삼하22:48-51 - 기름 부음 받은 자

작성자지미박|작성시간26.06.07|조회수70 목록 댓글 0

기름 부음 받은 자
사무엘하 22:48-51

(삼하 22:48, 개역) 『이 하나님이 나를=예수님 위하여 보수하시고 민족들로 내게 복종케 하시며』

(삼하 22:49, 개역) 『나를 원수들에게서 나오게 하시며 나를 대적하는 자 위에 나를 드시고 나를 강포한 자에게서 건지시는도다』

(삼하 22:50, 개역) 『이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삼하 22:51, 개역) 『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원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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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보면,
‘나’라는 표현이 많이 나오지요.
다윗은 단순한 옛날 인물이 아닙니다.
구원의 모델이 되는 분입니다.

다윗의 구원은
개인적인 특별한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 그를 덮쳐서 생긴 결과입니다.

따라서 다윗의 구원을 말한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과연 구원된 것이 맞는지를
점검하는 근거가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원수들로부터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원수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를 못한 자들을
두고 말합니다.

마태복음 10:36에 보면,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집안 식구가
자기 집안의 원수가 되는 겁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했기에
뭐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근거해서
가치를 파악해내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받은 자를 핍박하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원수의 등장은
곧 이 원수를
원수라고 파악이 가능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가
따로 등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받았던
다윗 언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언약의 되풀이되는 일하심이 아니라면
구원받은 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받은 사랑으로 인하여
애매하게 공격받는 대상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곧 하나님의 언약때문에 구원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양상은
다윗 언약 이전에
아브라함 언약에서도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방식으로 구원받지 아니했다면
결코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다윗이 받은 구원이란 어떤모습일까요?

로마서 4:5에 보면,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로움을 아무한것도 없이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브라함의 믿음이나 존재 자체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방편이 된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브라함 언약에
원수된자는 누구일까요?

바로 일을 해야지만
복을 받는다고 주장을 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아무리 사람들이 수월하게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단지 구원받은 행세를 할 뿐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구원의 언약이란
아들 이삭에게 일어나는 상황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쉽게 요약하면,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데서 살리시는
방식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구원과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이제
다윗에게서 구원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확인해 봅시다.

사무엘상 1장에서
한나라는 여인은
아들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브닌나라는 여인으로부터 구박을 받습니다.

한나는 서러움에 울게 됩니다.
이 울음 속에서 사무엘이 태어납니다.

사무엘이라는 인간은
이 서러움과 상관없는 것이 아닙니다.

사무엘은 이 서러움을 안겨준 세력은
“나에게는 자식이 있는데
왜 너에게 하나님께서 자식이 없느냐?

따라서 내가 복받은 것이다.”고 주장하는
하나님의 원수가 생겨났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한나는
복수의 전쟁을 감행하게 됩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작업이 아니면
과연 하나님의 일이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즉 있다는 것은
곧장 없음에서 침몰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없음의 세계로 미끌어져야 한다는 겁니다.
이 있음은 전에 있는것과 다른 있음입니다.

있음이 없음으로 사라지지 않고
있음 그대로 머물러 있게 되면
그 있음 자체가 필히 하나님이 하실 일을
자신이 하겠다고 나서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진짜 있다가 없으신
그 예수님을 통해서
제대로 일구어낸 하나님의 일과
충돌을 일으키게 됩니다.

만약에 12제자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있는 것을 포기했는데

그 있음의 가치가 3억 원이었다면,
과연 예수님으로부터 100배나 받게 되어
300억을 받게 될까요?
아니면 다른 세계를 받게 될까요?

사도들은 성령을 받고 난 뒤에는
다투며 더 살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것은
과거에 있음의 그런 차원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현재 있는 목숨을 잃었다고 할지라도
손해날 것이 없이
좋은 것을 받은 것입니다.

또한 그 받은 것은
자신의 행함으로 받은 것이 아니기에
더욱 고귀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자신을 드러낼까요?

다윗을 통해서 보면,
다윗 외의 인간은
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립니다.

이러한 인물의 등장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중매자로 내세우셨습니다.

사무엘도 모릅니다.
누가 하나님의 언약을 받아
왕이 될 인물인지를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생각해 놓으신 인물은
‘없음’을
인간에게 있어 ‘숨겨놓은 인물’로
드러내십니다.

사무엘하 16장에서,
사무엘은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가정을 방문하게 됩니다.

그 자리에서 다윗은
없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선 사무엘에게
있음에 해당되는 자들을 만나게 하고
다 거부하게 하십니다.

“아니다. 그들은 아니다”
하지만 사무엘에게는 이미
왕을 간택해야 될 기름병은 갖고 갔습니다.

이 기름을 젖일 인물은
분명 이새의 아들들 가운데 있는데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겁니다.

맨 마지막에 양을 치던 다윗이 들어오자
그 막대 아들에게
사무엘은 기름을 붓게 됩니다.

이로서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의 입지는
‘없는 자’,
곧 있기는 있지만
사람 눈에 띄지 않는 ‘숨어있는 자’가 됩니다.

반면에 이 숨어있는 자를 대신하려는
가짜들의 집단이
곧 기름받은 자들의 원수들이 됩니다.

그들은 자신을 부인할 줄 모르고
부인할 이유도 알지 못합니다.

신앙이란
예수님 십자가를 보고서
그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이
내용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자신의 목숨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예수님 앞에서 부정하는 겁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만이 있을 분이요
자신들은 있어도 없어져야 될 자들인 것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만 인간으로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런 위상을 드러내기 위해
창세 전부터 선택되었기에
나타나야 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을 로마서 8:29에서는
“이미 아신 자를 또한 부르시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이 그대로 현실이 되었기에
우리는 이 현실 앞에서
부러울 것이 없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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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
10-11-24 15:57
054강-삼하22장48-51(기름부음받은자)-2sa101121

2010-11-23 07:30:04


하나님의 말씀 사무엘하 22장 48절에서 51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503페이지입니다.

사무엘하 22:48-51

“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수하시고 민족들로 내게 복종케 하시며 나를 원수들에게서 나오게 하시며 나를 대적하는 자 위에 나를 드시고 나를 강포한 자에게서 건지시는도다 이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원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하였더라.” 아멘


여기 나, 나, 나라는 말이 많이 나오죠? 그렇게 많이 나오는 이유가 오늘날 우리가 구원 된 사람, 구원이라고 이야기 할 때는, 반드시 언약 안에서의 구원이기 때문에, 다윗이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가 다윗이 모델이 되는 겁니다. 다윗이 고백했던 거, 다윗이 알았던 그 하나님, 다윗에게 찾아오신 하나님, 그 다윗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와야 그게 구원이 돼요.

하나님이 찾아 올 때는 ‘나 하나님이다.’이래 찾아오시는 게 아니고, 언약 속에서 찾아오기 때문에, 언약이라는 특별 성, 특이성을 가지고 오는 겁니다. 그러면 다윗 시대에 두 종류가 있죠?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원관을 쥐고 있는 사람들과, 다윗에게만 특별히 찾아왔던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구원관, 이 두 개가 섞이지를 않습니다.

복음으로 구원 받는 것과 교회를 통해서 구원 받는 것이 섞일 수가 없어요. 옛날 로마 카토릭 있을 때 로마 카토릭은 교회를 통해서 구원 받는다. 교회 안 나오면 지옥간다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런데 루터는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 받는다 했거든요. 본인도 그것을 분명히 모르지만, 하여튼 십자가로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캘빈 시대에 와서는 똑같이 교회를 통하여 구원 받는다.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 캘빈도 옛날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십자가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어디와 대결 되느냐 하면, ‘교회를 통해서 구원받는다’와 대결 상태에서 그게 등장했거든요. 교회도 구원 받고 그 말도 맞고, 십자가로 구원 받는 것도 맞고, 둘 다가 성립이 안 돼요. 교회라 하는 것은 눈에 보이고,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십자가의 능력이란 들쑥 날쑥이라. 십자가라 하는 것은 능력을 줄 때만 느껴지고 회수해 가면 없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을 상상하는 것은 내 몸이 있는 한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도 상상의 대상이 돼요. 십자가는 상상한다고 십자가의 능력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그냥 상상의 대상이 아니고, 지금도 그 능력이 바람처럼 지금도 능력 안에서 바람처럼 불고 있어요. 그 바람이 와 닿을 때, ‘아, 내가 이런 점에서 세상과 다른 인생이구나. 인간이구나. 를 다시 한 번 깨닫는 환희를, 기쁨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아! 구원 받는 거 맞구나. 주님께서 찾아와서 구원 되는 것이 맞구나. 내가 찾아가려고 애쓴 것이 아니고,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 찾아오셨구나. 라는 것을 확연히 느낄 때, 세상에 있는 물질과 세상의 명예가 다 없어지고 건강이 없어져도 그거는 조금도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가정이 파탄 나도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구원 받았는데, 가족, 세상, 물질이라든지, 영예, 이것은 그 앞에서 아주 하찮은 것이거든요.

제가 방금 이야기한 다윗에게 찾아온 다윗의 언약의 위력이 이런 겁니다. 그게 그대로 십자가의 위력이 되는데, 이 다윗에게 찾아온 다윗의 언약을 쉽게 이야기 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없는 가운데서 있게 하신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없는 가운데 있게 한다는 말은 현재 있다고 여기는 것을 도로 없애 버린다 말이죠. 있다고 여기는 것은 없애 버리게 만들고, ‘없지?’ ‘없습니다.’진짜 없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있게 해줄게.‘ 그런데 있는 가운데 없어져 버리면 우리는 어떤 있음을 기대하느냐 하면, 옛날 있을 때의 그것을 다시 보상해 내라고 은근히 기대하거든요. 그런데 주님께서 있는 가운데 없게 할 때는 옛날 있었다고 자부했던 그 있음은 두 번 다시 제공하지 않습니다.

간증 집회를 보면 이런 오류가 많이 발생돼요. 내가 옛날에 돈 좀 가졌는데, 목사한테 대들다가 까불다가 잃었습니다. 그래서 목사한테 죄송하다 하고 죄송하다 하고 끊어버린 십일조 다시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옛날 있었던 것보다 30배 60배 100배나 더 해주셨습니다. 이러거든요. 그러면 나중의 있음은 처음의 있음과 같은 질의 있음이 되기 때문에 그런 구원은 다윗 언약에 의하면 그런 구원은 없습니다. 다윗 언약이나 십자가에 의하면 그런 구원은 없습니다.

예를 들면 12제자한테 예수님께서 ‘너희들 내 때문에 고생했지?’ ‘고생 많았습니다.’ ‘재산 다 날렸지? ’ 다 날렸습니다.‘ ’ 걱정하지 마라, 내가 100배로 갚아줄게.‘ 그러면 제자들이 계산하죠. ’내가 주님 때문에 손해 본 것이 3년 동안 3억 3천2백 만 원 손해 봤지, 그걸 100배로 하면, 330억 원 얻게 되는 그 계산을 했어요.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니까 330억 속에 살 수 있는 내 육신마저 몽땅 330억과 같이 다 날라 가도 괜찮은 것을 그들은 이미 얻은 거예요. 그래서 이미 부활의 능력 속에 포함된 겁니다. 죽어서 부활 세계에 가는 것은 그것은 기본이고 이미 죽기 전부터 부활의 능력으로 이미 거기는 완전히 휘감겨 있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손수건 내미니까 손수건으로 죽은 자가 살아나고, 자신도 모르게 앉은뱅이에게 예수 이야기 하니까 앉은뱅이가 자기 능력이 아닌데, 주님의 능력으로 불뚝 살아나고, 자신도 모르게 귀신 들린 자가 날아가고, 그리고 복음을 전했더니 자신의 뜻도 아닌데 믿는 사람이 발생하여 자기한테 나오고, 이것은 세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뭔가 있다. 그동안 알던 세상 말고 뭔가 섞여 있다. 뭔가 침투했다. 천국이 침투했다. 그것도 복음을 통해서 지금 활동하고 계시는구나. 주님께서 주로서 지금 활동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발견할 때, 그들(제자들)은 죽고 싶어 환장했습니다. 죽고 싶어 환장해가지고 저들끼리 줄서서 ‘빨리 죽을래!!’ ㅎ 누구 맘대로 제대가 함부로 됩니까? 누구 맘대로...ㅎ



그래서 이 다윗 언약에 의해서 구원 받는다 할 때는, 방금 제가 정리한 것처럼 있는 것을 없게 만들고, 없는 데서 있게 만드는 데, 있음은 전의 있음과 차원이 다른 질의 있음으로 제공되는 겁니다. 이와 같은 다윗 언약에서 옴으로 뭐가 발생되느냐 하면, 오늘 본문에 그게 나오죠? 그게 원수가 나와요. 여기서 다윗이 받은 구원이 뭐냐 하면, 49절에 보면, “나를 원수들에게서 나오게 하시고” 이게 구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십자가의 능력(언약의 능력)이 들이닥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원수가 누구인지 몰라요. 예수님께서는 이런 심한(위험한)말을 하셨어요. “니 집안 식구가 원수니라.” 집에 가셔서 한번 잘 들여다보세요. 집에 키우는 강아지나 고양이도 들여다보시고(ㅎ), 집에 있는 빈대는 말고, 심심할 때 날아오는 모기가 원수가 아니고, “집안의 식구가 니 원수니라.” 그런데 어떤 때 원수로 보이느냐 하면, 바로 그것이 5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기름 부음 받은 자, 하나님으로부터 인자, 사랑을 받을 때, 사랑을 못 받아서 환장을 한 사람들이 몽땅 주님의 원수가 되는 겁니다. 이해하기 쉽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자기 것에 연연하지 않는데, 꼭 사랑을 못 받은 인간들이 꼭 ‘요기서 요까지 내꺼.’ 시어머니가 그런 시어머니가 우리에게는 없지만 그런 시어머니가 있대요. 며느리가 시집와서 10년째 시집살이해도 심심하면, ‘너 시집올 때 얼마 해 왔는데? 시집와서 내 아들 간을 다 빼 먹어라. 니는 왜 살찌노, 내 아들은 볼 때마다 삐쩍 말랐는데, 니가 내 아들 죽이는구나, 반대로 친척집에 가면, ’아이고, 내 귀한 딸, 우리 사위가 죽이는구나,‘ㅎ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할 때는 자기 영역을 고수하게 돼 있어요.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반격을 하게 됩니다. ‘사랑이 어딨어? 인간이 노력해야지.’ 꼭 이런 투로 조롱하고 멸시하고, 그런데 그 멸시와 조롱을 받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원수가 발생됐다는 뜻이고요. 원수가 발생 되거든, 여러분!! 구원 받은 줄 아시기 바랍니다. 구원 받지 아니하면, 원수라는 게 눈에 뵈지를 않습니다. 구원 받았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이 사랑을 모르는 자들이 사랑을 받은 자(인자)에게, 하나님께 용서를 받은 자를 심하게 학대 하게 돼 있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몇 가지 예를 들 테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자들의 주장이라는 것을 여러분에게 예를 들겠습니다. 제가 왜 이런 예를 드느냐 하면, 우리가 방금 이야기한 성경의 내용을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만 통하는 이야기고, 바깥에서는 해당 사항이 없다고 그렇게 여기는 사람이 많아요. 로마서 4장에 보면, 아브라함 이야기가 나옵니다.

옛날에 어느 교회서 제가 청년회 맡으면서 아브라함 이야기를 해 줬더니만, 청년이 하는 말이 아브라함처럼 옛날 지나간 사람 이야기를 왜 끄집어냅니까? 마치 강감찬 이야기...등을 왜 끄집어내느냐 이런 이야기 투예요. 제가 이야기 했어요. 아브라함이 받은 구원이 아니면, 오늘날 우리가 받은 구원은 다 엉터리고 사기다. ‘아브라함 니 구원 받았어? ’구원 받았어.‘ 그럼 아브라함이 구원 받은 거와 대조를 해 보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왜 있겠어요? 다윗이 왜 있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구원 받았다는 말을 입만 열면 해요.

우리 교회 구원 있다. 자꾸 험담하지 마라. 이래 나오는데 구원이 있는지는 아브라함과 성경을 대조해 보자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도 구원 받았다고 외치고, 성경에서 그 근거를 안대요. 왜? 성경은 수취인 불명이니까. 수취인 거부기 때문에. 아예 성경을 안 보니까, 우리는 구원 받았다고 단합대회 하는 거, 그거로 끝나버려요. 성경적으로 맞는지 확인은 안 해본다고요.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의 구원은 행한 것도 없이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그겁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행해야 구원이 있다고 우기냐 말 이예요. 그게 무슨 구원이냐 말이죠. 저마다 천사 표 다 만들어 놓고, 초, 식초를 쳐야 돼요.ㅎ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믿음의 선두(줄 서는데 제일 앞)인데, 앞에 아브라함이 안 보이면, 끝난 거예요. 아브라함과 같이 주님 앞에 서야 되는데, 거지 나사로가 죽어서 누구 품에 안긴 줄 알아요? 아브라함 품에 안겼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 말이죠. 모델 하우스예요. 근데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는가? 아브라함은 율법의 행함이 아니고, 값없이 의로움을 그냥 택배로 받았어요. ‘ 어 너 값없지? 의롭지? 라고 탁송을 받았어요. 풀어보니까, ’니 의인이야.‘ 그 소식이 들려온 거예요.

그동안 교회를 위해 애쓰고 용쓰는 거, 말짱 도루묵이었고, 그냥 주님 앞에 십자가 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거예요. 그 아브라함이 알았던 것은 뭐냐, 이삭이 죽은 데서 살았고, 없는 데서 있게 하는 하나님이라고 고백을 한 거예요. 하나님은 없는 데서 있게 하신다. 있음은 전에 있음이 아니고, 전에 있음은 내 노력으로 있음이고, 새롭게 있는 있음은 그냥 주셨기 때문에 내가 상상도 못한 건데 주셨기 때문에 여기 발생 된 거예요.

나는 내가 의를 가진 것이 아니고, 의가 나를 가졌다는 사실!! 나는 의가 만들어 낸 상황!! 의의 상황이 나 같은 죄인도 구원 받았다는 그 자체가 우리가 만든 구조가 그런 식으로 짜여져 가는 거예요. ‘저 봐라 우리 교회 어떤 사람은 행함도 없이 구원 받았다고 했잖아? 저게 내가 증거하고 싶은 의다. 말이죠. 하나님의 의의 작업에 우리가 거기에 포섭이 된 겁니다.그런데 세상이라 하는 것은 행함의 세상이거든요.

윌리암 템플이라는 영국의 주교가 있는데, 1941년에 이런 책을 썼어요. ‘그리스도와 사회질서’라는 책을 썼습니다. 주교가 돼 가지고 어떤 책을 냈는가? 이런 책을 냈어요. 이 사회가 천국이 되려면, 다음 6가지 사항만 있으면 된다고 한 겁니다. 6가지 사항이 뭔지를 말씀드리면, 첫 번째: 모든 사람은 집이 있어야 되기 때문에 토지 수용을 지역 주택 공제조합에서 일괄적으로 위원회에서 떠맡아야 한다. 두 번째: 모든 사람이 성인이 될 때까지는 의무 교육을 해야 되기 때문에 14대까지 하지 말고 18대까지 늘려야 한다. 세 번째: 모든 사람이 직장이 있어야 되기 때문에 공공사업을 벌려가지고, 모든 사람에게 직장을 마련해 주되, 민간 기업은 배제돼야 된다. 네 번째: 모든 사람은 자기의 직장에서 뭔가 발언권이 있어야 된다.(노조를 가입해야 된다) 다섯 번째: 사람은 여가 생활을 해야 되기 때문에 주 5일제를 해야 된다.(주5일제를 윌리엄 템플이 처음 만들었는데, 주 5일제를 해서 일요일에 교회를 가고 6일 날은 놀아야 하지 않겠느냐? 이 사람이 바보예요. 토요일부터 놀면, 금요일 저녁부터 논다는 사실을 모르고, 토요일 놀아서 힘 모아서 일요일에 교회에 가는 줄 알아요.ㅎ 차타고 멀리 가는 줄 모르고...ㅎ 월요일 새벽에 오는 줄 모르고... ) 여섯 번째: 신앙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가 있어야 된다. 자유를 누가 빼앗아 간 적 있습니까? 주기는 누가 주는데? 지가 죽기 무서워서 벌벌 기어놓고, 무슨 자유를 달라니...??

인간은 자유를 줄 것도 없어요. 태어난 자체가 자유예요. 하나님으로부터 자유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유는 마귀로부터의 속박이고, 마귀로부터의 자유는 하나님께 속박입니다. 인간은 어디에도 자유가 없어요. 어디에 속했느냐가 문제입니다. 이게 바로 인간의 힘으로 노동으로 기껏 생각한 지상천국이 이거예요.

리스만이라는 사회학자가 주장하는 것은 인구가 증가하게 되면, 증가에 따라 3가지 특징이 있어요. 첫 번째: 인구가 적을 때는 가족 단위에서는 전통 지향적이다.(자기의 전통을 개인적으로 살린다) 두 번째: 인구가 약간 불어나면, 내부 지향적이다.( 단결성에 힘을 모은다) 세 번째: 외부 지향적이다.( 남을 정복하려고 잡아먹는다)

이거는 치킨 집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 할 때는 ‘우리 가족 밥만 먹고 살면 되요.’ 하다가 좀 장사가 되면, ‘ 손님 단골 빼앗기면 안 돼.’ 라고 내부 지향적으로 나오다가 좀 더 커지면, ‘어디 잡아먹을 가게 없나.’ 하고 문 닫은 가게까지 해서 키우는 것. 이런 이야기는 사회학자 연구 안 해도 성경에 이미 나와 있어요.

다니엘에 보면, 인간 속에 짐승이 들어오게 되면, 이 짐승이 가만있지를 못합니다. 자꾸 잡아먹어야 속이 차요. 자꾸 잡아먹어야 사는 보람이 있어요. 카사노바가 여자 한두 사람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백 명이고 이백 명이고 계속 나가잖아요. 주식도 그렇고 땅 사기도 그렇고, 이쯤 하고 손 끊는다, 도박도 그렇고, 이쯤 하면이 어디 있습니까? 낭떠러지 갈 때까지, 망할 때까지, 계속 가게 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있는 것을 없애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제가 윌리엄 템플 이야기와 리스만 이야기 한 것은 우리가 오늘날 이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자꾸 우리가 가진다. 가진다 하지만, 사실은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빼앗는 과정입니다. ‘내가 덜 망했구나, 덜 망했어.’ 평소에 작은 것 가지고 감사해야 되고, 하루하루의 생활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고 감사하고, 내일일은 내일할 것인데, 우리는 오늘 일은 오늘 기뻐하지만, 그걸 근거로 해서 ‘내일은 뭘 잡아먹지? 내일 잡아먹을 걱정까지 한다니까요.

이런 세상 속에 우리가 하나의 기름 부은 자로 감히 하나님께서 바람 불듯이 기름 부은 자로 우리에게 와 버린 겁니다. 사무엘하 1장에 보면, 사무엘의 어머니가 나와요. 한나라는 여자가 나오는데, 그 분에게 사무엘이 출생할 때, 없는 자식을 있게 하시는데, 누가 가담을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원수가 딱 가담이 돼요.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제가 세상의 사회학 이야기(윌리암 템플 주교 이야기) 하는 이유가 왜 하나님께서 그런 나쁜 사람을 두느냐 하는데, 그런 사람을 두므로 말미암아 우리가 뭔가 다른 분에 의해서 살아간다는 것을 그들에게 깨지고 그들에게 패배함으로써 우리가 깨닫게 하는 겁니다.

아담스미스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어요. 이 세상이라는 것은 모든 것이 ‘교환’이다. 라고 했어요. 교환이라는 것은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아내는데 그냥 받을 때는 그냥 받는 것이 아니고 거기다가 뭔가 잉여, 덧붙여서 받아내는 사회. 내 몸 주고 내 몸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고, 줄 것 주고 더 받아 내는 것, 5병2어죠.ㅎ 십일조죠.ㅎ 십일조 바쳐놓고 30배로 걷어 내는 것. 이런 식으로 아담스미스라는 경제학자는 모든 것은 교환의 세계다 말이죠.

상대방을 대할 때 속으로 ‘어이, 니 뭐 내 놓을 거 있는데? 이래 물어요. 결국은 니 내놓는 거 보고 값어치 있다 싶으면 내가 줄게.’ 하는 겁니다.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는 사회 속에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내 놓는 경쟁에 들어가야 되겠죠? 이 사회라 하는 것은 아브라함 이야기 하고 다윗 이야기 했잖아요? 지금 그 이야기만 하는 게 아닙니다. 그 바깥에 있는 세상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세상 이야기는 교환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남한테 내놓을 게 없으면 그 사람은 받을 것도 없어요. 공부 못한 애한테는 부모가 ‘니는 죽어라.’ 하지 않습니까? 공부도 못하면서 밥은 주둥이 잘도 들어간다고 쥐어박잖아요. 내놓을 거 내놓고 먹으라 말이죠.ㅎ

그런데 그것이 사회에 나가면, 경쟁에 참여 안 하려면, 경쟁에서 얻을 수 있는 것도 기대하지 말라는 겁니다. 고스톱 칠 때 옆에서 광만 팔지 말고, 직접 참여하라는 거죠. 같이 고스톱 치지 아니하면, 경쟁에서 승자가 모두 갖는 거예요. 그런데 모두를 갖기 위한 경쟁 자체에까지 끼어들지 아니하면, 니는 모든 걸 잃을 걸 각오하라는 겁니다. 이런 쪽으로 이 세상이 몰아가고 있습니다.

산 속에 머리 깎고 도 닦는다. 경쟁을 기피하잖아요? 안 됩니다. 결국은 얻을 것도 없어요. 시장은 교환이기 때문에 내 놓을 것은 내 놓아야 얻을 게 있죠. 그래서 요새 동화사 절에 또 뭐하냐 하면, 템플 스테이, ㅎ 소는 누가 키우고? 그게 뭐냐 하면, 관광객들을 유지하므로 말미암아 절의 운영과 확장 시키는데 자금을 필요하거든요. 절 생활 경험하기, 자기의 성질과 스트레스 풀고 성질 다듬는 것을 상품으로 제공하는 것이 교환입니다. 그런데 절이 한 군데서 하면 안 되죠. 잘 되니까 경쟁이 되고 경쟁에서 빠지면 안 되는 것은 얻을 것도 못 얻게 되기 때문이죠. 그래서 경쟁을 강요할 수밖에 없는 이 세계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도 모르고 자비도 모르는 우리가 태어난 이 세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수고 언약 밖의 세상입니다.

사무엘은 어디서 태어났는가? 바로 그렇게 ‘나는 자식 있다.’ 고 여기는 브닌나라는 자기 남편의 두 번째 부인이 자랑하는 거예요. ‘나는 하나님이 사랑해서 아들 가졌다. 어이, 한나야, 넌 내놓을 게 뭐 있느냐?’ 교환이 안 되는 거예요. ‘내놓을 게 뭐 있느냐? 우리 자식 경쟁 하자. 니는 어떤 자식 낳았는데? 닌 자식도 없잖아? 니는 저주 받았어.’ 한나는 여기서 없음을 깨달았어요. 왜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필요한 것을 주지 않습니까?‘ 라고 한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알았어요. 우리가 필요한 것을 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하나의 장치였습니다. ’언약‘을 방출하는 장치이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것을 주면 안 되고, 우리는 하나의 파이프 역할을 하죠. 우리는 없음의 파이프, 나는 없어야 마땅한데, 너희들이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닌 너희들이 얻고자 해도 얻을 수 없는, 경쟁마당에서 찾을 수 없는, 노력한다고 주어지지 않는, 애쓴다고 주어지지 않는, 그냥 은혜로 주신 것들이 바로 없음이란 과정 속에서 방출되는 겁니다.

그 사람이 사무엘 이예요. 그리고 사무엘이 기름 부은 자가 누구냐? 그게 다윗입니다. 다윗 언약 뽑아 나오는 게 길어요. 그 다윗이 사무엘상 16장에 보면 원래 후보에 다윗은 없어요. 사무엘이 차기 왕을 뽑기 위해서 기름을 들고 갔는데, 기름을 부을 사람이 없어요. 원래 본인이 정작 없다 말이죠.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 시간에 다윗을 양 치라고 보내버렸습니다. 이새의 집안에 와서 아들을 다 불러 모아 아들 일곱을 세워서 기름 부으려 하니까, 하나님께서 ‘걔는 아니다.’ 부으려 하다가 ‘얘 아니랍니다.’ 두 번째, ‘저는요.’ 너도? ‘아니다. 세 번째도, ’아니다.‘ ....일곱 번째도, 얘도 ’아니다.‘ 없는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했을까요? 왜 그 현장에 다윗이 있어도 무방한데 왜 그 현장에 없게 만들었을까요? 모든 사람들이 나올 수 있는 모든 선입관과 모든 자기의 과거로부터 뭉쳐진 자기의 지식들이 이러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일에 전부 다 개입을 하거든요. 정작 사무엘 본인이 원했던 아들도 탈락했습니다. 사무엘 본인도, ‘ 얘 맞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에요.

이것은 뭐냐 하면, 구원 받는 사람은 목사가 지정한다고 구원 받는 게 아니고, 로마서 8장에 하나님께서 이미 아신 자만 불러내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아신 자만 불러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부르신 자에게만 의가 주어지고 부르신 자만 영화롭게 되는 거예요. 그 하나님의 약속(언약)이 없는 데서만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물어요. ‘여기에 혹시 남은 아들 없습니까? ’ 하나 있는데, 그거 시원찮습니다. 아직 어립니다. 찾지 마세요. 걔는 이미 내 놓은 아들인데, 걔는 해당 사항 없습니다.‘ 사무엘이 ’ 걔 불러 오세요.‘

자 여기서 우리가 하나 위로 받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전도한다고 천 번 찾아 갔는데도 거부할 때, 우리는 낙담하기 쉬운데,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놓치는 법이 없습니다. 화장실에 있어도 화장실에서 구원 받습니다.ㅎ 우리는 우리가 애쓴다고 그 사람한테 집중 투자 한다고 해서 구원 받는 게 아닙니다. 어려울 때 도와준다고 구원 받아요? 아이고, 정말 실망스럽습니다. 여러분! 많이 해봤죠? 어려울 때 도와줬더니만, 입 싹 닦고, 고맙습니다, 하고 두 번 다시 보이지 않는 사람 한 두 명이 아니죠. 그래서 사람이 어려울 때 도와준다고, 개과천선하고 감화 받아서 교회 나오고 예수 믿는다? 그런 시나리오는 생각하지 마세요. 그냥 불쌍해서 도와줬다 하고, 기대는 하지 마세요.

마지막에 다윗이 여덟 번째 왔을 때, 사무엘에게, 하나님께서 ‘바로 걔다.’ 하고 기름을 부음으로 말미암아 그 앞섰던 형제들과 다윗 하나와 완전히 차별화 시킵니다. 사람의 의도와 사람의 의지가 담긴 것은 무조건 있음에서 있음으로 키우려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 방식은 아니올시다. 이 말입니다.

반드시 현장에 없었던 아이에게 기름이 부어져서 그것이 다윗이었고, 그 다윗은 다윗언약을 보여주는 하나의 배출구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교회 50년 다녀서 구원 받는다 우기지 마시고, 그냥 복음은 나도 모르는데 주께서 미리 아시고 창세전에 미리 아셔서, 그래서 부름을 받았다고, 항상 성경적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주님의 그 말씀이 우리 속에서 나올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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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22:44-51 - 다윗과 그리스도 - 신윤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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