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구원
사무엘하 22:44-46
(삼하 22:44, 개역) 『주께서 또 나를 내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나를 보존하사 열방의 으뜸을 삼으셨으니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
(삼하 22:45, 개역) 『이방인들이 내게 굴복함이여 저희가 내 풍성을 듣고 곧 순복하리로다』
(삼하 22:46, 개역) 『이방인들이 쇠미하여 그 견고한 곳에서 떨며 나오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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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혈육적으로 구분되는 관계이며
동시에 율법을 받아들이냐
받아들이지 않냐의 여부로
판가름난 관계입니다.
사람들을 이를 두고
“출생 자체가 다르다”고 말합니다.
쉽게 말해서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아직 미처 모르지만
유대인들에게 알려준 언약에 의할 것 같으면
이사야 65:1에 의하면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여기서 ‘찾아낸다는 말은
우리가 찾거나,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찾아오실 수 있는 근거가 있을때
과연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근거가 본문에서
다윗에게 주어집니다.
다윗 언약 안에
이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언약을 수행할 수 있는 분은
오직 다윗 언약에 의해서 오시는
‘다윗 자손’이신 예수님에게만 해당됩니다.
다른 사람은
이 다윗 언약대로
수행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이러합니다.
한 사람만 믿음이 있어도
세상은 잘 풀리게 되어 있습니다.
한사람때문에 전체가 풀리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만이 다윗의 자손이 되셔서
‘하나님의 원수’를 이기게 되면,
그 근거와 공로로 인하여
이방인에게는 축복이 주어지게 됩니다.
시편 110:1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원수’가
어떤 존재를 말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사람의 등장과
‘하나님 원수’의 등장이
어떤 원리에 의해서 구분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거기에 저주라는 말은 없고 축복만 나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여기는 것에만
하나님께서 축복하십니다.
만약에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는 없애버립니다.
여기에는 죄가없고, 심히 좋음만 있기때문입니다.
여기서부터 중요합니다.
그냥 ‘보기 좋지 아니한 것’을 없애버리기만 하면,
원래 축복의 깊은 내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본래의 축복 상태로 되돌려버리면
우리는 예수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없는 그냥 옛 하늘과 옛 땅의 세계로
회복하는 정도밖에 안됩니다.
저주의 관한 이야기는
창세기 3장에 나옵니다.
이 저주가 등장하므로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야 봐야 합니다.
“도대체 원래 축복의 내용이 무엇이기에
그 안에서 저주가 나올까?”
저주를 유발시킬 수 있는 축복 개념은
흔히 인간들이 기대하는
축복 개념과 차이납니다.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는 축복은
결코 그 안에
저주의 요소가 일체 나와서는 아니되는 축복개념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서 저주가 발생되고 난 뒤로
결코 창세기 1장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축복개념을 정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저주 발생에 관여한 인물들을
하나님은 수습하여
‘약속’이라는 것을 만들어나가십니다.
이로 인하여 인간이란,
인간을 위한 인간이 아니라
축복을 실어 나르고, 저주를 실어 나르는
역할로서의 인간이 됩니다.
이 축복과 저주는
인간이 인간 위주로 만들어내는
축복과 저주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이런 잘못을 저질러버립니다.
즉 축복을 위한 자신들의 존재가 아니라
자신들의 존재를 키우기 위한 축복으로 간주했고, 이방인들에게는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저주가 주어진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상으로 볼 때,
이러한 오류는
축복의 깊이를 제대로 알지 못해서 나온
오류입니다.
진정한 축복은
예수님과 그 행하심입니다.
즉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신이 원하는 자를
축복하실 수도 있고,
자신이 원하는 자를
저주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확대시키는 바로 그것이
진정 축복의 진수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저주의 발생으로 인하여
인간은 두 개의 노선으로
결정지어지게 됩니다.
그 노선으로 인하여
진정한 축복은 장차 어떤 모습으로
최종적으로 굳어지는가가 밝혀집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과 아벨은
축복과 저주의 양상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는가를 보여주는
모델이 됩니다.
가인은 힘을 가졌고
그 힘을 노림수를 지닌 힘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은 자를 죽이는 방향으로
그 힘이 소비됩니다.
창세기 4장에서
죽은 아벨의 씨, 대신
셋이라는 인물을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 사이에서
출생케 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는 가인의 존재를
아담과 하와의 존재 노선에 넣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이로서 분기점이 발생되었습니다.
창세기 9:25-27에 보면,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함과 가나안은
좋든 싫든 저주의 역할을 충실히 다 해야합니다. 자기가 끌어모은 힘으로 버텨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축복과 저주의 근원된 것과
이삭과 이스마엘의 갈라짐과
야곱과 에서의 갈라짐도
다 축복의 깊이를 위하여
예수님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경우를
보여주는 사태들입니다.
얍복강가에서 야곱은
힘으로 하나님을 이기려고 했는데
바로 이런 모습이
‘하나님의 원수’의 모습이었습니다.
소위 축복받았다는 그 혈통이
자동적으로 축복이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하나님의 원수’의 요소가
함유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야곱의 노선에
라헬의 죽음을 통해서
진정된 하나님의 아들(베냐민)이
개입하게 됩니다.
이같이 주체란
힘들을 끌어모으려는 그 현장에서
출몰합니다.
마치 바다 한 가운데서 솟아오르는
물기둥과 같습니다.
가운데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주변에서 보기에는
마치 그 안에 권력들이 집약적으로 분포되어
어떤 괴물이 등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식으로 세상은
힘들을 모아 주체라고 우기면서
행세하며 다닙니다.
다니엘에 나오는 느부갓네살이라는 왕이
이런 존재입니다.
그 배후에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의 세력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금신상을 건립해서
그것으로 자신의 자아를
대변하겠다고 나섭니다.
성전이 불 타버린 유다 민족은
이러한 짐승의 하수인의 행세를 보면서,
언젠가는 자신들도 그런 힘을 모아
보란 듯이 이 지상에
절대적인 다윗왕국을 세우겠다고 나섭니다.
곧 이스라엘의 주체성을
힘을 끌어모아 형성하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들 집단을 두고서
“너희 아비는 마귀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8:44)
예수님께서는 진정 축복의 주인공으로서
이들 유대 집단의 힘에 밀려서
십자가에 죽고 말았습니다.
이로서 껍데기만 이스라엘이었던 자들과
껍데기만 이방인들이었던 자들이 모두
십자가 안에서 무효가 되고,
오로지 알아서 선택하시는 예수님에 의해서
구원될 자들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자유로운 결정에
대드는 그것이
곧 ‘하나님의 원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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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
10-11-18 22:34
053강-삼하22장44-46(이방인구원)-2sa101114
2010-11-17 22:36:01 녹취 : 이한례
하나님의 말씀 사무엘하 22장 44절에서 46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503페이지입니다.
사무엘하 22:44-46
“주께서 또 나를 내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나를 보존하사 열방의 으뜸을 삼으셨으니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 이방인들이 내게 굴복함이여 저희가 내 풍성을 듣고 곧 순복하리로다 이방인들이 쇠미하여 그 견고한 곳에서 떨며 나오리로다” 아멘
이방인들이 어떤 사람을 이방인이라 하느냐 하면, 이사야 65장에 보면, 거기에 잘 표현돼 있습니다. ‘나를 찾지 아니하는 자’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자’를 이방인이라 합니다. 이사야 65장 예언에 의하면, 나중에 어떤 분이 메시야로 오게 되면, 어떤 놀라운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나(하나님)를 구하지 않고 찾지도 않는 사람들이 찾아냄이 되었으며, 찾아 냄이 되었다는 말은 그들이 찾는다는 말이 아니고 주께서 찾게 될 것이며, 하나님을 부르지 않은 사람을 주께서 건지신다 이 말입니다.
부르는 조건하에 건지는데 부르지도 못하고 이름도 모르고 여호와가 누구라? 누구지? 그런 분이 다 있어? 라고 했던 그들에 의해서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게 되는 겁니다. 드러내게 되면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서 구원을 받게 되는 그런 아주 특이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제가 특이한 현상이라 하는 것은 놀라운 현상이 아니고, 사람들이 기대했던 놀라운 일은 아니고, ‘이상하다’ ‘왜 저렇지? 라고 특이성으로 규정하면서 일어나는 겁니다.
근데 이러한 이방인들이 이름을 불러 찾던 근거가 바로 오늘 본문에 의하면, 사무엘하22장에 의하면, 다윗의 위상(자리), 다윗의 언약, 다윗이 행했던 것에 근거해서 그러한 혜택이 주어지는 겁니다. 다윗에 근거해서 혜택이 주어진다는 말은 설명이 많이 필요한데요. 그 설명을 위해서 41절을 제가 잠시 보겠습니다. “주께서 또 내 원수들로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 주님께서 자기 원수를 물리치는데, 다윗의 후손을 동원시켜서 물리친다는 겁니다. 다윗의 후손은 다윗의 자손 되시는 분은 또 어떤 원리에 의해서 원수를 물리치느냐 하면, 다윗에게 약속한 내용을 다윗의 자손이 그대로 인수인계 받게 돼 있고, 인수인계된 다윗의 그 언약의 내용을 가지고 예고로만 하나님의 원수를 치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받았던 그 내용이 아니면, 주의 원수는 꼬꾸라지지 않게 돼 있어요. 다윗이 받았던 그 언약의 내용이 동원 되어야만 그것을 무기로 사용되어야만 주의 원수가 완전히 정복되어서 그 담에 이방인들이 돌아오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주의 원수가 누구냐 하는 것은 다윗이 뭘 받았느냐? 뭘 상속 받았느냐가 중요하게 되겠죠? 제가 어느 글을 봤는데 이래 돼 있어요. 우리는 개혁주의 정신을 상속해서 개혁주의 정신을 지금 이 시대에 펼쳐야 된다는 취지의 글을 봤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지금도 있는 이 시대는 훌륭한 조상들의 믿음의 전통이기 때문에 그대로 우리는 상속 받아서 전파돼야겠다는 글을 봤어요. 봤다니까요. 그래서 제가 의문이 들어가죠. 개혁주의 신학의 상속을 어떤 식으로 받느냐 이 말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을 상속 받는다고 주의 원수가 물러날까요? 아니면 그 자체가 악마일까요? 그 자체가 악마죠? 주님의 원수를 물리치는 것은 개혁주의 신학이 아닙니다. 다윗 언약을 상속한 다윗 자손이 되게 돼 있어요.
다윗 언약을 안다고 다윗 자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 그 내용을 실천해 옮길 만한 능력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기 때문 이예요. 이걸 간추려서 이야기 하면, 한 사람만 믿음 좋아도 일은 잘 풀리게 돼 있습니다.
이사 간 집에 갈 때 성냥이나 화장지 들고 가잖아요? 화장지 상표에 이런 거 있어요. 잘 풀리는 집 이러는 게 있어요. 우린 모두가 믿음 하나도 없어도 한 분만 믿음 좋으면, 일의 전혀 차질이 안 생기게 돼 있어요. 그게 하나님 방법입니다. 그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 이십니다. 예수님 한 분 믿음 덕분으로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오게 돼 있어요. 돌아올 때 그 이방인들은 모든 공로를 자기 믿음의 공로로 돌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믿음 공로로 돌리게 돼 있어요. 그럴 때 주의 이름은 극 상승으로 찬양받게 되는 겁니다.
개혁주의 신학 자체를 상속하는 방법이 교육을 통해서 자기들은 그렇게 주장을 하겠죠. 개혁신학을 가르치면 닮는다고. 모든 교육은 기껏 교육해봤자 바리새인이 받은 교육의 틀을 못 벗어나요. 바리새인은 성경 가지고 아무리 교육을 받아봤자 그것은 자기 영광과 자기 이름을 위하여 차곡차곡 쌓이게 돼 있습니다. 그게 악마의 모습이고, 악마가 기껏 하는 짓거리가 그 짓밖에 안 돼요. ‘니는 개혁주의 신학 아나?’ ‘안다.’ 개혁주의 신학을 기준 삼아서 축복과 저주를 가름하는 것은 그 자체가 바로 악마가 배후에서 사주하는 거예요.
개혁주의 신학을 못 버리는 사람은 그걸 버려버리면, 안이 텅텅 비어있어 내놓을 게 없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아니, 십자가 복음을 내 놓으면 되잖아요? 십자가 복음을 받아야 내놓지, 받지도 않은 십자가 복음을 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십자가 복음을 받아 버리면, 왜냐하면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내가 천하의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되면서 받게 되죠. 그래서 개혁주의 신학을 버리게 되죠. ‘ 나 그게 죄였구나, 그걸 왜 진작 몰랐을까? 하, 개혁주의 신학이 최고라고 난 교수한테 배웠는데, 교수들이 그 짓하는 것은 그게 밥벌이인 것을 왜 몰랐을까? 후회하면서 받게 됩니다.
어떤 미국의 유명한 경영학자가 G20대회에서 연설을 했어요. 연설을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회사에서 쓸모짝 없는 직원은 가차 없이 잘라내야 한다. 그러니까 사회 보는 사람이, 그 유명한 하버드교수부터 해가지고 모든 세계 학자들은 그렇게 능력 없다 쫓아내지 말고 상생으로 같이 사는 게 참된 기업이고 멀리 보는 기업이라 하는데요. 라고 하니까 80넘은 경영학자 하는 말이, 타율 1할4푼도 안 되는 타자는 프로야구에서 팀에서 내쫒듯이. 그 능력 안 되면 내쫒아야지 아마 그 교수는 그 자리 오래 있었을 거야. 그 교수는 그 대학 교수자리에 너무 오래 했어. 그 쫒아내야 된다 말이죠.
사람이 신학 교수들이 기껏 하겠다고 한 것이 복음으로 사는 게 아닙니다. 복음으로는 앞에 산다는 게 있을 수 없어요. 성경에 복음으로 산다는 말이 있는데, 복음으로 산다는 말은
복음 안에서 주께서 살려주는 복음의 성령의 힘으로만 죽기 때문에, 나는 날마다 그 안에서 날마다 죽는다는 말은 반대로 이야기 하는 거예요. 십자가 지는 거와 같은 의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바로 원수라 운운하지만, 사람에게 감각으로 피부로 와 닿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가 와 닿는 것이 아니고, 자기 원수를 마치 하나님의 원수처럼 여기는 겁니다. 신학을 사람이 갖게 되면, 그 신학에 반대하면 전부 다 자기의 원수가 되 버려요. 그래서 그 글을 딱 쓰고 난 뒤에 그 댓글을 달려고 보니까 멋지게 달렸어요. 개혁주의 신학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성경으로 산다. 구사위퇴.ㅎ고 위의 글을 보면 뭐라 돼 있느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우리를 저주한다. 라는 글들이 나와 있어요. 얼마나 고마운지...
이방인이 왜 존재 하는가? 지금부터 조금 어려워지는데, 찬찬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조시는 분들은 다 가셨기 때문에, 안 조실 분만 남아 있기 때문에...ㅎ 처음에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것에 대해서만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것이 상실되면, 하나님은 축복을 하는 것이 아니고, 없애는 방향으로 나가요. 없애는 방향을 저주라고 이야기 합니다. 가문을 저주하면 태가 닫히게 돼 있어요.
근데 처음에 창세기 1장에는 축복만 나와요. 저주 이야기는 안 나옵니다. 저주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근데 창세기 3장에 넘어가면, 드디어 저주 이야기가 나와요. 저주 이야기가 나오는데 축복만 있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해서 하나님이 만든 모든 것을 축복만 되는데, 거기서 저주가 나왔다 말이죠. 주님께서는 저주가 나온 입장에서 저주만 없애 버리고, 없는 것으로 여기면, 축복의 그 깊이가 옛날로 돌아간 셈이 돼요. 이런 문장들이 어려워요. 저주가 생긴 입장에서 그냥 저주가 없는 것으로 치겠습니다. 해버리면, 처음에 축복의 깊이가 얕게 돼요. 처음에 있는 축복이 어떤 내용의 축복이 있기에 축복에서 저주가 발생이 되느냐. 라고 이렇게 같이 합쳐서 새롭게 인식된, 죄 때문에 저주 때문에 새롭게 인식된 축복을 생각해 줘야 축복의 깊이가 깊어지는 겁니다.
나중에 축복의 깊이가 깊어져 버리면, 뭐가 축복이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것만, 예수님의 이름만 축복한다는 신약시대까지 밑바닥에 서로 연결되게 돼 있어요. 연결된 과정에 우리가 사무엘하 22장을 중도지점에서 보게 되는 겁니다. 축복과 저주가 등장하면서 저주를 통해서 처음에 하나님께서 생각해 놓은 취지, 축복의 취지가 나중에 어디와 연결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저주 때 유발하는 요인들을 가지고 뭘 만들었냐 하면, 약속이란 걸 만들었어요.
약속은 두 가지 노선이 있는데, 약속 안에는 축복도 있고 저주도 있고, 둘 다 나와요. 여자 후손은 복을 받고, 뱀의 후손은 저주를 받게 돼 있습니다. 그때부터 인간이라는 것은 인간 자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 어떤 역할을 맡게 되는데, 역할이 뭐냐? 축복을 실어 나르는 화물열차, 한 쪽은 저주를 실어 나르는 화물열차로 작용을 하게 돼 있습니다. 그때부터 성경 내용은 쉬워지죠. 창세기 4장에 드디어 쫙쫙 갈라집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은 저주 받고, 아벨은 축복받죠? 아벨이 축복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축복의 내용의 질이 점점 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가까이 가는 그런 발걸음을 내 딛게 돼요. 그게 뭐냐 하면, 아벨이 죽고 난 뒤에, 아벨이 죽고 난 다른 씨를 셋을 통해서 새롭게 만들어낸다 돼 있어요. 창세기 4장 끝에 보면.
그러면 우리 입장에서는 아벨이 없어도 형 가인이 살아있으니까, 가인은 아담과 하와사이에서 나온 자식이니까 자식이라고 쳐 주자 하면 되는데, 하나님은 자식 못 줘서 환장하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심은 처음에 축복과 저주, 저주와 축복의 두 대립을 통해서 축복을 더 축복되게 내용을 더 풍성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아벨이 죽어버리면, 가인은 아예 아담의 그 후손에서 탈락되게 되게 돼 있어요. 그것을 저는 분기점이라 해요. 갈라지는 지점으로 해서 그때부터 가인과 아벨이 갈라지죠. 그담에 창세기 9장, 여러분 아시지만 읽어 봅시다. 9장 26절에,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이 원하시면 그대로 되죠.
여기서 노아의 자손 가운데 함과 가나안이 저주 쪽이 되고, 셈과 야벳은 축복 받는 쪽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셈과 야벳은 축복을 실어 나르는 화물열차가 되고, 함과 가나안은 저주를 실어 나르는 화물열차가 되는 거예요. 이것은 개인적으로 이익이다. 손해다. 서로 좋다 나쁘다 서로 따지는 게 아니고, 그 가운데서 주께서 진짜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축복의 내용이지, 축복을 실어 나르는 화물열차가 대단하다. 위대하다. 그걸 이야기 하려는 게 아닙니다. 인간이 위대하다 하는 게 아니에요. 인간은 그냥 저주의 그릇과 찬양 받을 하나님의 긍휼의 그릇을 누가 그 화물열차에 축복을 누가 부어 넣을꼬. 누가 일부러 저주를 부어 넣느냐는 문제입니다. 저주를 부어 넣으시는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어야 해요.
제가 지은 책 중에서 ‘지옥의 하나님’ 이 있는데, 그 책의 제목에 대해서 거부 반응이 많이 일어났어요. 왜 하나님은 천국의 하나님이 아니고, 지옥의 하나님이냐? 제목만 보고 안 보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저주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를 저주케 하는 하나님은 없다는 겁니다. 누가 하나님인지 누가 인간인지 구분이 안 되는 대목 이예요.
사람은 붓는 대로 부음을 받게 돼 있어요. 참으로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한다면, 이 성경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 일을 이끌고 가는가를 봐야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 분기점이 드러나죠. 그렇다면 남은 역사는 이미 결정 난 겁니다. 함과 가나안 족속은 그냥 왔다가 그냥 가면 안돼요. 무조건 축복 받은 쪽을 할퀴어야 되고, 공격해야 되고, 달려들어야 되요. 달려들어서 저주 받을 짓을 있는 대로 다 내놓아야 됩니다. 자기 역할에 충실해야 되요. 악역을 맡은 탈렌트가 악역을 해야지, 가끔씩 웃으면서 이쁘게 보이고 하면 안 됩니다. 이쁘게 보이면 안 되고, 귀신 역으로 나온 사람은 귀신처럼 보여야지 멀쩡한 사람으로 보이면 영화가 안 되잖아요. 하여튼 달려들어야 되요. 그런 역할을 그쪽 노선에서는 해야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누가 피를 보느냐 하면, 축복 쪽이 피를 봐요. 그리고 달려들어서 공격을 받게 되면, 하나님의 원수 쪽은 뭘 갖고 있냐하면 힘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힘이 있는 쪽은 하나님의 원수요. 또는 힘을 갈구하는 쪽, 힘을 얻고자 하는 쪽은 하나님의 원수요. 있는 힘도 다 빼앗기고 나중에 맥없이 힘 하나도 없이 이 땅에서 죽는 쪽은 뭐냐 하면, 축복 받은 열차 노선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힘없이 죽었어요. 사람이 힘을 갖게 되면,(의존교회 두 번째 시간에 했는데) 돌고래처럼 솟아올라야 돼요. 바다위에서 돌고래가 확 솟아오르면, 겉에서 보면 물결이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올라오잖아요? 안에 덩어리를 물결이 휩싸이게 되면, 안에 있는 돌고래는 안 보이고 물결치는 것만 장식되어 보이거든요. 물결 하나, 하나를 권력으로 보자 이 말이죠.
인간은 자아라는 게 없어요. 권력이 휩싸이면 그 안에서 자아가 자연 발생적으로 자아라는 허구가 허황된 자아가 거기에 같이 발생되는 겁니다. 축구 잘하는 친구 많으면 지가 못해도 축구를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처럼, 자기를 둘러싼 그런 것처럼 자기도 같은 것처럼 오해를 하게 돼요. 큰 교회 다니면 믿음 좋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처럼 똑같은 겁니다. 그처럼 주체가 있는데, 그런 식으로 자기의 주체를 만들어 내는 대표적인 것이 다니엘에 보면, 바다에서 나온 짐승이 쫙 하고 올라오죠. 그것이 느부갓네살의 금 신상 만들기 작업입니다.(겨울 수련회 할 걸 다 해버리네요..ㅎ)
바다에서 온 짐승이 대표자가 느부갓네살처럼 하나의 권력체가 형성되죠. 그러니까 느부갓네살한테 밀려버린 유대공동체라는 게 있어요. 성전 깨지고 난 뒤에 ‘우리끼리 말씀대로 살자’ 하던 유대공동체가 무엇에 한이 맺히고 무엇에 억울하냐 하면, 언젠가 나도 권력을 가져서 우리 메시야가 오시면 우리에게 누부갓네살 못지않게 큰 권력 주셔서 우리는 다윗의 나라를 이 땅의 왕국, 절대적 왕국을 건설할 것이다. 라고 한 분들이 계신데, 그 분들이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에요.
주님은 가차 없이 이야기 했습니다. ‘느그 애비는 악마다.’ 고. 그냥 유다 공동체 입장에서는 누가 악마냐 하면, 우리 유다 나라를 유린했던 이방민족들을 악마로 봤는데, 악마로 봤던 이방민족들만 악마가 아니고, 그것에 피해를 봤다고 여기는 억울하게 피해봤던 메시야를 기다리는 자기 자신이 세상에~~ 악마로 볼 줄이야 꿈에야 생각했겠습니까? 상상도 못했죠. 바로 그 주제를 가지고 개혁주의 신학 신학회에서 발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너희들이 바리새인처럼 악마의 집단이다. 힘을 원하는 거예요. 예수님을 사랑한 게 아니고 개혁주의 신학 조직체를 숭배하고 그곳에 가입하면 정통적인 믿음을 공유하고 있는 역사적으로 정당하다고 인정받은 신학에 저절로 구원되는 사람인 것처럼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처럼 위장하고 있는 겁니다.
그 뒤에 나온 분기점이 계속 나와요. 여러분 아시다시피 바로 이삭과 이스마엘, 그담에 야곱과 에서, 점점 더 그러한 분기점이 갈라지면 갈라질수록 축복과 저주에 있어서, 축복은 예수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축복 받은 그 깊은 내면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창세가 5장에 보면, 바로 섬기는 자, 내가 축복 받았다고 소유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희생하는 사람으로서 등장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이 형이 원수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원수를 이기고, 내가 축복 받았다고 여겼던 야곱 자신이, 얍복 강가에서 바로 하나님의 원수였습니다. 야곱이 자기는 복 받았고 아버지한테 복을 오른손으로 받든지 왼손으로 받든지 비벼서 받든지 간에 축복을 받았다는 축복 받았다고 여겼던 그것이 바로 야곱이었고, 그것이 하나님의 원수였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멀리 다른 혈통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하나님의 원수의 핏줄이 ‘육’이란 이름으로 내 안에 흐르고 있었던 거죠. 그걸 와서 진짜 나중에 오실 메시야 영이 미리 와서 손대지 아니하면, 우리는 계속해서 그 조시로 완전히 내 자랑하며 내 힘 구축하며, ‘나 복 받았다. 라는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원수로 살아가는 겁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러니까 사람은 여자를 잘 만나야 되요. 여자를. 어제 제가 주례를 하는데, 본문이 잠언서 31장 10절이었습니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는가. 그 값은 진주를 얻는 거와 같다.ㅎㅎ (현숙, 진주 세트로 다 나왔어요) 그래 이야기 했어요. 현숙한 여인을 얻는 것은 집안에 보물하나 들어오는 건데, 이 보물이 결혼식 할 때만 보물로 여기지 말고, 연애할 때만 보물로 여기지 말고, 진짜 보물이 보물답게 되는 것은 결혼식 끝나고 같이 살면서 처음이나 나중이나 일관성 있게 보물로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남편이 그만큼 노력해야 한다고 이야기 했어요. 하니까 이상선 목사님이 뒤에서 ‘말 잘한다. 나 주례하면서 그 만큼 집중하는 거 처음 봤어요. 전부 다 불신자인데, 양쪽 다 신랑 신부 다 불신자인데, 주례를 잘 들었어요.
근데 무슨 이야기를 하려 하냐 하면, 여자를 잘 만났는데 야곱이 여자를 잘 만났어요. 야곱이 진짜 사랑했던 본처는 언니 레아가 아니고 라헬입니다. 그 라헬이라는 역할은 무슨 역할인가 하면, 죽으면서 진리를 내 쏟아내는 역할을 하는 거예요. 창세기35장 17절에 보니까 라헬이 마지막 아들, 12번째 아들 베냐민을 해산하면서 난산에 빠졌습니다. 자, 아들 살릴 것이냐, 아니면 자기가 살 것이냐,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엄마를 죽여 버립니다. 야곱으로서는 환장할 노릇입니다. 계속 사랑하는 보석 같은 여자는 항상 그 라헬 이예요.
남자가 아무리 바람피워도 조강지처로 돌아오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그걸 산에서 제가 이야기 하는데 주위에서 얼마나 웃는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웃는지, 있는 모양 이예요.ㅎ 조강지처는 라헬입니다. 근데 하나님께서 조강지처를 죽여 버려요. 사랑하지 않는 여자는 남기고 사랑하는 여자는 먼저 보냅니다. 먼저 보내면서 라헬이 아들을 낳는데, 아들 이름이 베냐민인데, 라헬이 슬퍼서 베노니라고 이름을 짓습니다. 이는 ‘슬픔의 아들’이다. 참, 팔자도 더러운 팔자다. 이렇게 이야기 할 때 야곱이 ‘아니다. 그게 아니다. 이름을 바꿔야 된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나님의 아들‘ 오른손의 아들’ 이라고 하여 이름을 ‘베냐민’이라 졌습니다. 하나님이 증거 내 노선에 가담하고 개입하는 흔적으로, ‘ 자네, 당신이 내 대신 먼저 죽는다.’
‘죽음을 통해서 나타나신 하나님,’ 우리를 살리는 하나님은 죽음 속에서 나타난 하나님, 그래서 하나님 안다면 죽어도 괜찮은, 이제는 죽음과 맞바꾼 거예요. 자기는 죽고 살아있는 야곱에게는 생명을 제공하고. 이것이 야곱의 아내 라헬이 했던 일입니다. 여자 하나 잘 만나야 돼요.ㅎㅎ(당신 죽고 내 살자.ㅎ) 이건 아브라함도 마찬가지.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 덕분으로, ‘당신은 누이동생이라 하고 나는 살자.’ 그래서 여자의 후손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사는 것 같아요.ㅎ 여자 덕분에 사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바로 이 노선이 계속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내용으로 계속해서 차곡차곡 싸이는 거예요. 왜 주님께서는 하나의 밀알이 되어 돌아가셔야 되는가. 그것은 진짜 축복이라는 것은 적어도 죽음 정도는 거뜬하게 이겨내야 그게 축복다운 축복이라 말이죠. 죽음이 무서워 벌벌벌 떨고, 벌벌벌 떨고, 조금만 어지러우면 병원가자 벌벌벌 떨고...ㅎ 이게 축복이 아니고, ‘아, 나 죽을게. 연락 하지 마. 일주일 뒤에 시체 찾든지 말든지. 나 좋은데 간다. 이게 뭔가 너끈하게 이길 수 있는 자기에게 있는 구닥다리 고물 같은 목숨과 주의 생명과 바꿀 수 있는 그렇게 돼야 되는데, 바로 이방인들이 소식을 듣지 못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받은 유대인만(이는 껍데기만 유대인)이 아니고, 나중에 신약 시대에는, 율법을 백날 받아도 그 율법을 자기 살고자 지키는 것, 메시야의 공로 없이 자기 공로로 하는 것은 이방인과 똑같은 거예요. 이방인도 십자가 앞에서 다 헐어버리고, 새로 시작하자. 새로 시작해서 십자가의 영, 십자가의 피를 가지고 새롭게 주께서 주님 쪽에서 먼저 약속을 주게 되면, 그 분들이 야곱이고, 그 분들이 바로 셋이고, 야벳이고 셈이고, 그 분들이 진짜 이삭의 후손도 되고, 다윗의 후손들이 되는 겁니다.
우리들이 이방인의 남은 자로서 하나님께 감사해야 될 것은 진짜 원수, 주의 원수가 우리 힘으로 우리 믿음으로 된 것이 아니고, 한 분 믿음만 잘 믿으면, 일은 잘 풀리게 돼 있어요. 그 잘 풀리도록 어느 정도 잘 풀리는가. 예수님을 모르는 우리가 어느 날 예수님을 알게 된 것처럼 이보다 잘 풀린 게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우리가 감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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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22:48-51 - 기름 부음 받은 자
답글삼하22:44-46 - 이방인 구원 - 이근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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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삼하20:14-19 - 지혜로운 여인 - 이근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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