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이신 하나님
삼하22:35-41
(삼하 22:35, 개역)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활을 당기도다』
(삼하 22:36, 개역) 『주께서 또 주의 구원의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삼하 22:37, 개역)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나로 실족지 않게 하셨나이다』
(삼하 22:38, 개역) 『내가 내 원수를 따라 멸하였사오며 저희를 무찌르기 전에는 돌이키지 아니하였나이다』
(삼하 22:39, 개역) 『내가 저희를 무찔러 파하였더니 저희가 내 발 아래 엎드러지고 능히 일어나지 못하였나이다』
(삼하 22:40, 개역) 『이는 주께서 나로 전쟁케 하려고 능력으로 내게 띠 띠우사 일어나 나를 치는 자로 내게 굴복케 하셨사오며』
(삼하 22:41, 개역) 『주께서 또 내 원수들로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 나로 나를 미워하는 자를 끊어 버리게 하셨음이니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 본문은
다윗이 전쟁하면서 느낀 소감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예언이기도 합니다.
예언이기 때문에
이 예언대로 신약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이 예언이란
그 속에 다윗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다윗이란
다윗 홀로 존재라는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그런 다윗입니다.
따라서 본문에 나오는 전쟁의 승리란
실은 다윗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따라서 신약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러한 승리의 소감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28-29절에 보면,
“내가 내 원수를 따라 멸하였사오며
저희를 무찌르기 전에는
돌이키지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저희를 무찔러 파하였더니
저희가 내 발 아래 엎드러지고
능히 일어나지 못하였나이다”
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자신에게
그대로 적용하게 되면,
마치 나에게 욕을 하는 모든 자들이
하나님의 원수이라도 되는 것처럼
착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라는 점을
잊으면 안됩니다.
이스라엘이 암몬 군대를 상대로
전쟁을 할 때에,
우리아 장군은 열심히 적들과 맞서 싸워
전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전쟁에
사적인 입장을 들고 개입해서
그 우리아 장군을 죽인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다윗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원수가
진정 누구란 말입니까?
바로 다윗 자신이 되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까지 신약에 가서
오늘날 우리들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겁니다.
우리들은 우리 자신의 일을
끝까지 사수하려고 합니다.
다윗도 다윗 자신의 일을
따로 상정해놓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상황 때문에
다윗은 본의 아니게
하나님의 원수로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즉 자신의 정당성을 사수한다는 것이
곧 하나님의 원수들이 하는 짓이 되는 겁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두 가지 시선을 고려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을 의인으로 간주하면서
오늘 본문을 대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자신을 죄인이라고 간주하면서
이 말씀을 대하는 것입니다.
먼저 자신을 의인이라고 여긴다면
다윗이 우리아에게 하는 짓을
재현하게 됩니다.
자신의 잘남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서
억울한 사람들을
만들어 낼 밖에 없는 노릇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다윗으로 하여금
우리아를 죽이게 해서라도
다윗의 죄를 근원적으로 들추어내게 하셨습니다.
달리 말해서 우리아 장군은,
억울하게 죽어야 하는 위치를 놓이도록
그렇게 그 자리를 지정해놓으신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아로 인하여
다윗은 본 모습을 찾게 하셨습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반면에 죄인인 입장에서
오늘 본문을 대하게 되면,
본인 자체가 하나님의 전쟁 가운데서
당연히 패배해야 함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
제가 한 예를 들테니
어느 것이 정답인가 알아 맞쳐보세요.
어떤 사람이 인간 세계에서
하늘 나라로 올라갈 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첫째가 걸어서
둘째가 하늘나라까지가는 엘리베이트를 타고
셋째가 로켓트 불을 외부에서 붙여주어서
넷째가 누군가에 의해 저절로.
몇 번입니까?
정답은 (4)번입니다.
(1)의 경우가 소위 성화론이라는 겁니다.
여기에는 하늘나라라는 목적지가 어디인지
정해야 합니다.
천로역정 같은 겁니다
점차 자신의 값어치를
스스로의 행함으로 높여감으로서
거룩에 접근한다는 이론입니다.
스스로 목적지를 설정해야하고
목적지까지의 가치설정도 스스로해야 합니다.
(2)같은 경우는 이런 겁니다.
십자가 지시는 것은 예수님이 하셨지만
그 십자가를 믿는 믿음은
인간 쪽에서 행사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것은 곧 구원이란
하나님의 일과 인간의 일이 다같이
만나야 가능하다는 겁니다.
즉 아무리 엘리베이트가
우리를 높은 층으로 데려갈 수 있지만
층수를 알려주는 숫자판은
우리 인간이 정해야 한다는 식입니다.
(3)번은 왜 정답이 아닐까요?
그것은 로케트가 외부에서 점화시켜 주어
강제로 구원받기는 하지만
관심사는
오직 자신의 구원에 그냥 머물러 있는 것이 오류입니다.
(4)번의 경우는
외부에서의 덮침에 인하여
자신의 구원문제가
하나님의 관심사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오로지 주님의 주되심을
스스로 만들어 나신다는데 있습니다.
따라서 다윗의 전쟁에서
우리가 죄인이 된 채 가담하게 되면
이 전쟁에 필요한 방패와 활이라는 무기도
우리가 스스로 의인인 것으로
내세울 무기는 아닙니다.
전혀 다른 무기가 됩니다.
그 무기는 곧 여호와 자체입니다.
창세기 15:1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방패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약에 와서
이 여호와라는 방패는
어떤 특이성을 나타냅니까?
우리 사람들은
살았다가 죽는 것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주변에
얼마 전까지도 살아 있다가
죽은 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죽음에서 되살아나는 방식에 대해서
알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결국 우리들의 싸움이란,
더 살고자하는 자들이 들고 나오는 무기와,
이제 죽어도 상관없다는 입장에서
들고 나오는 무기와의 싸움입니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요 11:26)는 무기입니다.
이 무기가 있음으로 인하여
소위 의인이라는 자들이 내세우는
“나는 의인이니 복받아 마땅해”라는 무기는 무용지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전쟁의 승리를
훼방하고 가로챌 뿐입니다.
정말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아는 사람은
자신의 의로움이나 자신의 죄인됨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이런 현상은
아까 예를 든 것처럼,
계단이나 엘리베이트나 로켓이 아니라
그냥 하늘에게 덮쳐야 가능합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전쟁에서
‘인간의 자기 구원’은
용납될 수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오로지 ‘주님의 주되심’을 위한 전쟁입니다.
마치 옛날 할머니들이
쌈지 안에 손자에게 줄
각양 사탕이나 용돈이 들어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주되심을 위하여
쌈지 안에 구원받아야 될 사람과
저주받아야 될 사람을 갖고 있습니다.
구원받는 사람들이 구원받는 이유는
순전히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은혜주셔서
구원된 것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저주받아야 될 사람은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사랑해주지 않아서
저주받는 겁니다.
그들이 성도보다 죄를 더 지은 자들이
결코 아닙니다.
현실 속에서
과연 저주받은 사람들이
어떤 고백을 하는지는,
바로 이런 쌈지의 원리를
이야기해보면 압니다.
저주받을 자들은 극명하게 반발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즉 “우리가 천국 가는 사람보다
뭐가 모자라서 지옥가느냐?”고 따지고 듭니다.
지옥갈 자들이요
하나님의 원수들입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052강-삼하22장35-41(용사이신하나님)-2sa101107
2010-11-09 17:19:47
하나님의 말씀 사무엘하 22장 35절에서 41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503페이지입니다.
사무엘하 22:35-41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활을 당기도다 주께서 또 주의 구원의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나로 실족지 않게 하셨나이다 내가 내 원수를 따라 멸하였사오며 저희를 무찌르기 전에는 돌이키지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저희를 무찔러 파하였더니 저희가 내 발 아래 엎드러지고 능히 일어나지 못하였나이다 이는 주께서 나로 전쟁케 하려고 능력으로 내게 띠 띠우사 일어나 나를 치는 자로 내게 굴복케 하셨사오며 주께서 또 내 원수들로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 나로 나를 미워하는 자를 끊어버리게 하셨음이니이다“아멘
다윗이 전쟁을 하면서 자기가 알게 된 사실이 우리에게 그냥 알게 된 사실로 지금 주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하나의 예언이 된다는 겁니다. 예언이 된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여기 있는 내용대로 신약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이 된다는 이 말입니다. 다윗이 미리 다윗의 일로 거치지 않는다. 이건 지난 시간에 제가 이야기 했죠? 다윗은 예언자니까 다윗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그 살아계신 하나님은 다윗에게 약속하신 그대로 다윗을 약속대로 움직이신 그대로 그 약속 그대로 우리 안에서 오늘도 역시 똑같이 움직이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고백한 고백이 우리를 통해서 동일하게 터져 나와야 되겠죠? 터져 나오는데 이 터져 나오면서 염두 해 둘 것이 몇 가지가 됩니다. 그 제일 첫 번째가 뭐냐 하면, 다윗이 이런 고백을 하게 되면,사람들의 선입관에 다윗은 훌륭하니까, 믿음이 좋으니까, 이런 핑계를 대는데, 다윗은 여러분 죄인입니다. 죄인의 입에서 이것이 나왔을 때, 우리는 이 성경을 보면서, ‘나도 잘 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이걸 보면 안돼요. ‘나도 죄인의 입장에서 이 성경말씀의 고백이 나올 수 있다’ 이래 봐야 됩니다.
그렇다면 죄인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나라에서 항상 원수가 돼요.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는 내 사적인 문제가 아니고 주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을 쏟아놓는 세력 속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내가 실수 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내가 죄에 사로잡혀서 죄가 시키는 대로 움직여서, 그래서 죄가 나오게 되는 것이거든요. 죄 짓고 싶어서 죄짓는 것이 아니고, 선한 것을 원하지만, 우리가 원치 않는 악이 튀어나오는 겁니다.
그런 입장에서 성경을 보게 되면, 죄인의 입장에서 이걸 보는 것과 소위 의인이라 여기는 입장에서 성경을 보는 것과 완전히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그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38절에 보면, “내가 내 원수를 따라 멸하였사오며 저희를 무찌르기 전에는 돌이키지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저희를 무찔러 파하였더니 저희가 내 발 아래 엎드러지고 능히 일어나지 못하였나이다.”
이것을 소위 의인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보면, ‘내 한테 어디 감히 까불어, 죽을라고. 이런 식으로, ’어디 내가 감히 누군데?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잰데. 어디 나를 상대로 사기를 쳐? 하나님이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이런 식으로 자기중심주의로 생각해서 내한테 달려들어서 꼬꾸라지고 엎어지면 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신 것처럼 그렇게 간주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러면 자기는 점점 더 잘난 사람이 되겠죠.
근데 죄인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되면, 뭐냐 하면, 여기 내용처럼 엎드러지고 엎어지고 하는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한테 까불다가 예수님한테 오히려 얻어맞아서 꼬꾸라지고 엎드러진 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되었다는 입장에서 이것을 바라보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보면 주님께서 그런 주님이 나를 이기신 주님이 내 안에 계신다면, 주님께서 나를 이기신 것처럼 나하고 똑같이 생겨먹은 인간들을 주께서 나를 가지고 죄인을 가지고 사용하셔서 그들도 꼬꾸라지게 하시고 엎어지게 하신다면 그들은 구원받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
‘얘야, 나는 구원받고자 할 때, 나는 의인인체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죄인의 입장에서 구원받았기 때문에 내 앞에서 잘난 체 하는 사람들도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졸지에 본인이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되고, 그러면 그 사람은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는 주님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는 혜택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문장이 굉장히 길어요. 마침표가 잘 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이 항상 그래요. 뭐가 아니고 뭐다. 뭐가 아니고 앞에 꼭 붙어요. 그것은 우리가 자기가 의인인체 하는 죄를 짓고 있기 때문에 그걸 돌아가야 되고 그걸 틀어줘야 됩니다. 그걸 벗겨줘야 되기에 그게 힘든 겁니다.
승리에 있어서, 여기 계속 승리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무찔러서 승리했잖아요. 승리의 의미가 본문 그대로 하게 되면, 본문 그대로 해 봅시다. 본문이 이렇습니다. 오늘날 신학생이 교회 나올 필요도 없고요. 사람들 손에 뭘 쥐어주느냐 하면, 방패를 쥐어주고, 활을 쥐어주는 겁니다. 활은 누가 잘 쏘냐 하면, 김 수녕이 잘 쏴요. 예, 우리 신자들은 잘 못 쏩니다.
그리고 방패, 방패는 누가 잘 다루느냐? 로마 군병들이 잘 다뤄요. 그렇다면 본문 그대로 하면, 우리에게 활을 주고 방패를 주어서, 우리는 밖에 나가서 로마 군병들이 입는 짧은 치마 입고 여기는 씨스팩, 근육 팍 키우고, 붙이고 이러고 돌아다니면, 아마 미친 사람 아니면, 관광, 연극을 하는 사람, 아미 두 종류의 사람으로 비칠 거예요.
그런 식으로 해서, ‘마귀 나와! 하나님 원수 나와! 해서 봉은사 땅 밟기 해가지고, 여기 중 나와! 나하고 활쏘기 하자. 방패 붙자. 이렇게 하면, 사무엘하 말씀이 본문 그대로 맞춰질 겁니다. 짧은 치마입고, 주름치마 비슷한 로마 군병처럼 입고, 문자대로 예요.
그런데 신약 성경이 왔을 때, 본문이 신약 성경에서는 어떻게 적용 되는가? 그게 에베소서 5장에 나옵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이 의외로 어려워요. 그냥 보는 것이 아니고 구약 때 봤던 것들과 결합을 시켜서 봐야 하기 때문에, 연결시키는 그 고리들이 복잡합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요령을 하나 알려 주려고 합니다. 어떻게 구약과 신약을 연결시키는지 요령을 알려 주려고 해요. 오늘 일찍 간사람 손햅니다...ㅎ
오늘 아침에 한 거 이야기 해 봅시다. 죽었다. 내가 지금 살았는데 나이 많으면 죽는다. 이거는 굉장히 쉬워요. 왜? 우리 가운데서 살았다가 돌아가신 분이 많기 때문에... 그런데 뭐가 안 되냐 하면, ‘죽었는데 다시 살아났다.’ 아! 이거는 우리가 수용하기가 곤란하고, 왜? 우리는 그런 경우를, 죽었다가 산 경우를 몰라요.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헤롯 같은 경우는 뭐를 생각 하냐 하면, 살았다가 죽은 경우만 생각하고, 죽었다가 산다는 세계는 자기 세계에서는 그걸 잘라버린 거예요. 그런 걸 없다고 한 거예요. 중요한 것을 날려버렸어요.
그런데 아침에 이야기 했는데, 헤롯왕만 그랬습니까? 헤롯왕만 그렇게 욕 얻어먹어야 되겠어요? 사실 우리 모두 전부가 한쪽을 잘라버린 겁니다. 살았다가 죽기 때문에 안 죽으려고만 애썼지, 죽어도 괜찮다. 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태도로서 임하고 있습니까? 죽어도 괜찮다는 것, 왜냐하면 죽었다가 다시 살게 한 능력이 우리에게 퍼부어진다면, 더 이상 우리가 죽는 것에 대해서 얽매일 필요가 없는 그런 입장이 되겠죠?
그럼 그런 경우가 성경에 나온다 할지라도, 목사님 그것에 대해서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남들처럼 안 죽는 것만 지금까지 교육 받고 신경 썼는데,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 그건 저는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하죠. 그걸 모르게 되면 뭐가 안 되냐 하면, ‘다윗의 전쟁’이 안 돼요. 오늘 본문의 해당사항이 안 되는 겁니다. 다윗이 이긴 전쟁에서 활과 방패,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바로 산자가 안 죽으려고 나대고 몸부림치는데 필요한 무기가 결코 아닙니다. 죽어도 다시 살 수 있는 그런 힘을 보여주는 싸움이 되는 겁니다.
그럼 한번 정리해 봅시다. 다윗의 적들의 무기는 뭐냐 하면, 이렇게 하면 안 죽는다. 에 해당하는 무기들이겠죠? 다윗이 갖고 있는 무기는 뭐냐 하면, 죽어서도 살 수 있는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거예요. 그 두 가지 서로 다른 무기가 맞닥뜨릴 때, 누가 승리하느냐? 다윗 편이 승리하게 돼 있습니다. 우리가 부럽고 우리가 갖고 싶은 무기는, 살아서도 안 죽는 무기가 부러운 것이 아니고, 죽어도 다시 살 수 있는 자유 함이 보장된 무기가 우리한테는 아쉽고 부러운 겁니다. 그런데 실제로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걸 보면,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것은, 많은 재산 모아서 죽음이 지연된다든지, 복 받아서 그 영감 잘 죽었다든지, 이렇게 이 땅에 눈에 보이는 것에 전부를 거는 무기 키우는데, 소위 교회의 부흥되는 상품으로 사용되지는 않습니까?
그러면 그 교회 자체는 진짜 교회한테 적이 되고, 주님한테도 큰 밉상 받는 지옥 가는 교회 되는 겁니다. 교회 문을 딱 열었을 때 어떻게 해야 더 오래 버티는가? 그 이야기 하는 교회 같으면, 문 열다가 도로 탁 닫아버리기 바랍니다. 또 헌금 했다가 도로 끄집어내시기 바랍니다...ㅎㅎ(아이, 말 조심스러워요..ㅎ) 진짜 교회는 ‘여러분! 우리 죽었다고 칩시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 있습니다. 를 확인해 줄 수 있는 그런 무기가 있으니까 우리는 그 무기 가지고 싸웁시다.’ 이래 되는 거예요.
그럼 방패는 뭐냐? 방패는 창세가 15장에 나와요. 여호와 자체가 방패가 되는 겁니다. 여호와 자체가 방패가 된다는 것은 하나의 관념이고 언어상, 문자 상 있는 건데, 문자 상 ‘여호와는 나의 방패시고.., 누가 이런 이야기 못합니까? 그것이 기능화 돼야 돼요. 항상 문자는 문자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냥 기능화, 계속해서 실제로 우리에게 적용돼야 되거든요. 그 적용될 때 방패가, 어떤 방패? 죽어도 사는 방패라면, 그 방패는 무슨 방패냐 하면, 소위 살아있다는 자를 죽여 버리는 방패로도 되고, 그 활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 방패가 방어무기라 해서 공격무기가 안 되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활과 방패는 둘 다 합해서 무기하고 보는 거예요. 방패는 수비하는 거고, 활은 공격하는 것이라 나누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여튼 활과 방패는 모두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은 소위 악인들이, 원수들이 ‘나는 살았네.’ 하는 사람은 죽여 버리고, ‘주여 죽었습니다.’ 하는 사람은 살려내는 희한한 방패예요. 왜 그러냐 하면, 그 방패 그 활 안에는 누가 들어있냐 하면, ‘십자가‘가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었다가 사신 분이 그 안에 힘으로서 작용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 구약에서 오늘 나오는 이 전쟁을 무찔렀다 하려면, 전쟁이 되려면 두 종류가 있어야 해요. 하나는 뭐냐 하면, 적들이 나와야 됩니다. 적들이 나와야 하는 것은 지난 시간에 이야기 했어요. 지난 시간에 이야기해도 다 잊어버렸으니까, 다윗의 적은 누구였냐 하면, 아람 군대가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아람군대에 우리아를 보내면 돼요. 하나님의 할례를 무시하는 언약을 무시하는 적을 무찌른 그 우리야, 그 하나님의 용사 우리야를 누가 죽였습니까? 우리야는 다윗이 죽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적은 누구냐 하면, 다윗 본인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왜냐하면, 그 우리야를 죽였으니까. 충신 우리야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딱 아다리! 그렇게 매치 되도록 셋트를 아주 잘 짰어요.
하나님께서 우리보고 Meeting하라 하면 천사하고 미팅하고 싶은데, 항상 악마하고 미팅해가지고, 짝이 잘 맞게 하시는 겁니다. 우리의 평소에 좋아하는 것 다 들어주겠다고 오니까, 제가 아침에 이야기 했잖아요. 우리가 주님 사랑한다는 건 스토커 수준이라고요. 정작 주님께서 사랑하지 않고 찾아오지도 않는데, 지가 혼자 나대고 싸대는 것은 그야말로 나대지 말라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주님께서 찾아 왔느냐 하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은, 바로 그냥 찾아오지 않고, 주님의 기능이 다가오잖아요? 주님께서, ‘너 여호와 아나? ’압니다.‘ ’믿으래.‘ 이거는 여호와증인들이 하는 짓이고요. 제 아내가 길을 가는데, 어떤 여호와증인이, ’여호와를 아십니까?‘ 하는 거예요. 여호와 안다는 것이 여호와 이름을 아는 게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벌리시고 있는 일에 우리가 아다리 되고 우리의 접촉이 될 때, 그게 비로소 거기에 휩싸여서 여호와를 제대로 아는 겁니다. 여호와를 안다는 것은 다윗을 아는 것이고, 다윗을 안다는 것은 다윗이 어떤 짓을 했기에 죄인된 것을 아는 것이고, 그 다윗이 어떤 식으로 그 무서운 죄로부터라도 다윗이 무엇으로 용서가 되었는가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아침에 장로님 기도하신대로, 우리는 양 같아서 다 제갈 길로 갔거늘, 양 되어서 제 갈길 가는 게 구원 되는 요건이 아닙니다. 그거는 양들이 제 성격이기 때문에 그냥 나대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양 같아서 제 갈길을 가는 걸 안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고, 양 같아서 제 갈길을 갔는데, 그 니는 니 맘대로 나대는 양이라고 지적해 주시는 채찍 맞으신 목자가 나타날 때, 비로소 우리의 존재가 그야말로 성경 그대로 나대는 양, 지꺼, 지꺼 밖에 모르는, 지 하고 싶은 대로 나대는 양, 지금도 죄를 짓고 있는 그러한 양인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는 거예요. 그게 뭐냐? ‘여호와의 기능’입니다. 말이 아니고, 우리가 어떤 말을 골라잡을까 이게 아니라 여호와의 기능 이예요.
주께서 지금도 한창 일을 벌리고 있다. 열심히 성실하게 일하고 있다는 증거에 우리가 휘말린 겁니다. 요번에 서울에 가니까, 서울역부터 경찰이 쫙 깔렸어요. 대구시에서도 경찰이 2000명이 올라가서 G20을 지킨다 말이죠. 그러다가 수상한 사람이면, ‘검문 있겠습니다.’ 이러면 그것은 경찰이 올라갔다가 G20 이라는 그 개념, G20이라는 숫자하고 G라는 영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G20이 실제로 나에게 나를 검문한다는 실제적인 일로 벌어지는 거예요.
예수님 살아계시다. 말로는 뭐 못합니까? 예수님이 일하신다. 누구나 이해하죠. 하지만 실제로 나의 일로 다가올 때는 ‘너 이리와, 너 죄인이야, ’뭘?, ‘그건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넌 뭘 해도 죄인이야, 라고 휩싸이고 지적해 줄 때, 우리는 비로소 여호와와 만난(Meeting) 거예요. 주님을 만난 겁니다. 마치 주님이 사울을 만나듯이 ’사울아 니 참 애 꽤 쓰네, 쓸데없는 짓 하는구나, 니 인생 백날 헛짓이야.‘ 라고 깨우쳐 주심. 그것도 근원적으로 깨우쳐 주심. 요거, 요거 잘못 됐다가 아니라, 처음부터 모태의 태중부터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났다고...ㅎㅎ
그래서 제가 울산서 강의할 때 했습니다. 하도 답답하니까 이랬어요. ’좀 죄 좀 지으세요. 죄!!! 이랬어요..ㅎㅎ 제가 왜 그런 말 했냐하면, 사람들이 죄 지어놓고도 안 지은 척 하니까, 죄 지으란 말이 아니고... 죄가 있는데도 음!! 오늘도 교회 나왔어. 음!! 오늘도 홍시 두개 먹었어. 음!! 이러고 자꾸 죄를 안 지은 척 하고, 죄를 안 지은 척 하니까, 뭐라 하는가 하면, ‘저 놈은 나보다 나쁘고, 저 놈은 인간성 덜되고, 지는 졸지에 의인돼 버리니까 흔히 목사들이 교회서 하는 짓이거든요. 지 성경 좀 안다고. 지는 훌륭하게 사는데 남들은 .... 그래서 ’죄 좀 지으라.‘ 했어요.
이것은 새삼 죄를 짓는 게 아니고 어차피 인간은 죄밖에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무기를 안 들고 나와요. 자기 무기. ‘나는 신학 했네.’ ‘책을 몇 권 지었네.’ 강의를 잘했네.’ ‘나는 복 받아서 부자 됐네.’ 이런 자기 무기를 안 갖고 나와요. 그저 십자가의 피흘리는 십자가의 공로 외에는 아무것도 내세울만한 게 없게 돼요.
40절 봅시다. “이는 주께서 나로 전쟁케 하려고 능력으로 내게 띠 띠우사....”
아! 요게 어렵군요. 요 대목하고 제가 마치겠습니다. 문제를 낼게요. 자, 하나님의 일은 어떻게 하는가? 하나님의 일은 높은 곳으로 가는 겁니다. ①번: 계단으로 올라간다.(우리 어머님도 한번 맞춰 보세요) ②번: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간다. ③번: 로켓 타고 올라간다. ④번: 알아서 올린다. 몇 번 입니까? 계단 아닙니다. ④번이 정답입니다.
우리는 천국이 가고 싶어요. 요 이유는 간단해요. 우리는 죽어서 좋은 데 가고 싶습니다. 살아서 고생했는데 죽어서 지옥 간다면 지금 생각만 해도 기가 막힙니다. 살아서도 억울한데.... 그런데 우리는 계단으로 갈까요? 하면, 이건 천로역정 이예요. 요거 성화 론입니다. 계단으로. 하나씩 높은 계단 쌓아서..
두 번째 엘리베이터로 올라간다. 이것은 소위 십자가를 내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말조심해야 됩니다. 십자가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내가 믿어줌으로써, 그러니까 엘리베이터 탈 때 그냥 가만히 있으면 못 올라가잖아요? 뭘 눌러야 됩니까? 번호를 누르잖아요? 번호 눌러주는 행위는 내가 해야 된다는 거예요. 예수 믿는 나는 해야 된다. 요거 두 번째. 요거 땡입니다.
세 번째 로켓 타고 올라간다. 요거는 엘리베이터보다는 낫지만, 역시 올라가는 주인공이 내가 돼요. ‘나는 지금 신나.’ 자기가 주인공 삼는 겁니다. 주께서 로켓에 심지에 불붙여 주의 뜻으로 올라간다. 이것도 굉장히 복음적으로 보이지만 고거 아닙니다.
네 번째가 정답인데 주께서 알아서 건져 올라갑니다. 스스로 위에서 내려옵니다. 우리가 어떻게 올라가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올라가봤자 우리는 계속 우리가 살아있습니다. 덮치는 거예요. 위에서 덮쳐보니까 그것이 위쪽이라. 우리는 위에 있다 생각했는데, 위에가 밑에 내려가 보니까 가만히 앉아있어도 여기가 위가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복음입니다. 십자가 복음 이예요.
주님 쪽에서 기능 발휘하고 우리 쪽에서 기능 발휘해서 합쳐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덮치는 겁니다. 주님이 덮쳐버리면, 우리가 죽어서 구원 안가도 이미 여기서 이것이 무려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지금 영원히 죽지 않는 일을 하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주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에 관심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주되심’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를 사용해서 주께서 주되심으로 만들어 내는 거예요.
그래서 울산서 강의 하면서 하나의 예를 여기서 하겠습니다. 여러분! 할머니들이 설날 때 손자 주려고 사탕하고 세뱃돈을 어디에 넣습니까? 복주머니에 넣죠? 그걸 쌈지라 해요. 쌈지라 하는 것은 옛날 할아버지들이 담배 할 때 부셔서 할 때 담배쌈지 있잖아요. 쌈지라는 것이 주님도 쌈지데 쌈지가 뭐냐? 주님의 주되심 이에요. 주님은 스스로 주되심을 만들어 가십니다. 고 만들어 가는데 쌈지 열어보면, 누가 있느냐 하면, 바로 악인도 들어있고, 의인도 들어있고, 우리도 들어있고, 지옥 갈 사람도 들어있는 거예요.
왜 저 사람 지옥 가는가? 주께서 찾아주시지 않으니까 지옥 가고, 우리는 왜 천국 가는가? 열심히 예수 믿어서가 아닙니다. 주께서 구원 받기로 선택을 했기 때문에 구원 받은 겁니다. 그렇게 선택하고 버리는 그 결정과 자격은 ‘주의 주되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러한 일이 우리에게 기능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그럼 안 믿는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안 믿는 사람은 우리가 구원 받은 사람의 그 이야기를 그런 이야기를 해주니까 그 사람은 그것 때문에 삐지는 거예요. ‘무슨 그런 하나님이 다 있노?’ 삐지는 겁니다. ‘내가 아무것도 안했는데 어떻게 구원 받아?’ 삐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사람은 뭔가 찾아오지 않은 사람 이예요.
주님의 주되심을 위한 이 전쟁에 40절 말씀대로, 우리는 본의 아니게 이 전쟁 통에 나왔습니다. 나의 적이 아니에요. 주님의 적인데, 우리가 창 들고 방패 들고 설치지 말고, 주께서 우리를 가지고, 죄인을 가지고 사용하십니다. 의인을 가지고 사용하지 않고, 죄인을 사용하시면, 이런 전쟁에서 우리는 주의 주되심만 증거 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