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22:25-28 - 높으심과 낮추심

작성자지미박|작성시간26.06.08|조회수67 목록 댓글 0

높으심과 낮추심
삼하22:25-28


(삼하 22:25, 개역)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대로, 그 목전에 내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삼하 22:26, 개역)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삼하 22:27, 개역)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이다』

(삼하 22:28, 개역)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를 살피사 낮추시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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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함, 정결함의 기준이 무엇일까요?
그 기준은 누가 결정하고
누가 세우는 겁니까?

인간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진리가 결정하는 겁니다.
요한복음 18:37-38에 보면,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란 태어난 공간의 크기가 다르고
살아가는 시간의 크기가 많아야 100전후라서
진리와 진실에 대해서 다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책을 읽어도
세상의 변화를 다 예측하지 못할뿐더러
그렇게 공부한 내용도 간직해 내지도 못합니다.

또한 전체적인 관계성을
파악할 입장도 못됩니다.

그래서 그냥 무지한 상태에서
나름대로 깨끗함과 사특함을
구분하고 있을 뿐입니다.
즉, 무에서 무일뿐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다윗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다윗으로 하여금 자신의 자리를 떠나
다른 자리로 이동시킨
바로 하나님께서 계신 자리가
진리의 자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무슨 자리로 이동된 겁니까?
구약의 성도들이 열차의 시발점에 해당된다면,
이들은 구원열차 속으로 호출받아 승차한
자들이 될 것입니다.

그들이 그 구원 열차에 승차하고 난 뒤에
알게 된 바는,

그 구원 열차는
오직 진리에 따라서 구원되고,
그 밖에는 진리에 따라 저주받는 세계가
형성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그 승차된 자는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버려야 하느냐 하면,
자기 행함에 준해서
진리와 비진리를 가름하는 그 기준을
포기해야 한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하고
이삭이 그러하고
야곱이 그러한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구원받게 된 것은
그 구원열차를 관통하고 있는
하나님의 진리에 저촉을 받고
혜택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열차에
다윗이 올라 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열차에 올라탄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 기준이
당연히 비쳐나올 것입니다.

따라서 그 비쳐나온다는 진리의 기준을
새삼스럽게 알아봅시다.

시편 140:10에 보면,
“뜨거운 숯불이 저희에게 떨어지게 하시며
불 가운데와
깊은 웅덩이에
저희로 빠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소서”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단호한 저주스러운 말씀을
다윗이 했다고 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윗의 이 건방짐에 대해서
불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네가 뭔데 함부로 남을 폄하하는가?
너는 그렇게 잘 났냐?
그렇게 그렇게 완벽하냐?

본문의 나온 표현대로,
“너는 그렇게 완전하냐?”라는 식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소리 들으면
다윗의 입장에서 난처해집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개인적인 의견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자신을 잡아당긴 그 구원열차에서
작렬되는 구원의 원리가
자신을 통해서 유감없이 멈추지 않고
토하듯이 터져 나온 소리가
바로 그 저주의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39:20-22에 보면,
“저희가 주를 대하여 악하게 말하며
주의 원수들이 헛되이 주의 이름을 칭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지 아니하오며
주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한하지 아니하나이까
내가 저희를 심히 미워하니
저희는 나의 원수니이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그들은
눈에 보이는 다윗을 공격했다고 여기지만
실은 다윗과 함께 동행하시는
주님을 건드린 것이 되고
주님의 기준과 주님의 심판 취지에
노골적으로 대든 것이 됩니다.

사람을 건드리면
결코 뜨거운 불에 들어간다든지,
두 번 다시 구덩이에서 못 올라오는 것이 아닙니다.

주를 직접 건드린 경우에 한에서는
이런 지옥의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주님께서
다윗을 자신의 구원의 열차에 태우면서
다윗의 위상에다 그대로
그 심판의 기준을 옮겨놓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구원문제에
시비걸고 의심하는 자는
곧 주님에 대해서 직접 대든 것이 되어서
지옥저주에 해당되는 저주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어떤 식으로
구원열차에 옮겨 타게 하셨습니까?

다윗은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의 자리에
앉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다윗은
진리의 기준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행함으로
깨끗함을 유지하고
자신의 태만함으로 사특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밧세바와 간음하고
우리아를 살해하므로서
그 성실한 율법 지킴이
소용없음이 드러났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다윗은
일반인들과 다름없이
제 2의 추가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과도하게 율법의 엄중성을
왕의 입장에서 주장하므로서
마치 남들로부터
평소에 율법대로 진리대로 사는 것처럼
행세할 수 있다고 여긴 겁니다.

이로서 다윗의 죄라는 것은
결코 간음이나 살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진리 자체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임이 드러납니다.

즉 하나님의 심판 기준조차도
명확하게 알지 못한 채
왕의 자리에 앉아있는 겁니다.

이 때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찾아듭니다.

비로소 다윗은
나단 선지자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은
결코 간음이나 살인죄를 책망하려고 함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즉 인간은 누구나 근원적으로
죄인됨을 알려주기 위해서
찾아오심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그 구원열차 안에서 주도하는 원리가
주님의 원리이고
그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억울하게 십자가상에서 죽으심으로서 주다운 면면을 보인다는 원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을 위해,
인간은 자신이 죄인으로 태어났음을
파악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진리의 기준이 변해야 합니다.
주님이 찾아들어서
주님의 자비하심을 받는 자만이
자비와 완전과 사특을
구분할 수 있는 눈이 열리게 됩니다.

그 주님의 자비하심이
바로 다윗 때는 제사를 통해서 드러나고
신약에서는 십자가에서 그 완성을 보입니다.

다윗이나 오늘날 성도나
모두 같은 구원열차를 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은혜로 남은 자들입니다.
자기 행함으로 진리를 챙기려는 다윗은
자신의 죄지음을 통해서
행함으로 규정되는 진리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요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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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03 18:28
051강-삼하22장25-28(높으심과낮추심)-2sa101031

2010-11-03 17:55:47


하나님의 말씀 사무엘하 22장 25절에서 28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502페이지입니다.

사무엘하 22:25-28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대로, 그 목전에 내 깨끗한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이다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를 살피사 낮추시리이다“ 아멘


시편에 나오는 ‘나’라는 사람이 보통 우리가 다윗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렇게 보시면 돼요. 다윗이라는 것이 경부선 기착점이다. 대전, 경주, 대구, 천안, 이처럼 중간에 기착점이라면, 그 역을 스쳐 가시는 분은 그 기차가 되시는 분은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서울에서 타서 천안쯤서 내릴 사람 탈사람 있고, 대전에서도 내릴 사람 탈사람 있고, 대구 가서 내릴 사람 탈사람 있듯이 다윗은 어디쯤 되는가? 다윗은 대전쯤에서 주님의 기차에 올라탔다고 이래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을 가지고 성경에서는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그걸 뭐라 하냐 하면, ‘예수 안‘이라고 합니다. 제가 쉽게 말해서 ’기차 안에 올라탔다.‘ 라고 쉽게 말씀드린 겁니다. 어렵게 이야기하면, ’예수 안에서 사는 사람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 안에 들어가면 어떤 효과가 있느냐 하면, 다윗의 인생은 짧아요. 다윗의 인생은 굉장히 짧지만 그 안에 들어가면, 다윗 인생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인생이 있기 때문에, 다윗은 평생 동안 본인이 했던 것만 복을 받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담겨있는 예수님의 행하심에 의해서 복을 옴팡 뒤집어쓰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 기차 ‘구원열차’죠. 아브라함이 기껏 살아봤자 몇 년 안돼요. 그리고 그 인생 살 동안에 오류와 실수투성이였습니다. 아브라함 지옥 갔습니까? 아니에요. 아브라함은 요한복음 8장에서 뭐라 하느냐 하면, ‘나 비록 부족하고 짧은 인생이지만, 내가 탄 기차 안에서 주님을 바라보고 있다가 드디어 만났다’는 겁니다. 차장이 주님이죠. 주님을 바라보고 만난 거예요. 영생 얻은 겁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그걸 귀찮다 여기지 아니하시고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시고,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 하는 겁니다.

그 다음 차례 오늘 탄 사람은 이삭이기 때문에‘이삭의 하나님’ 그담 차례는 야곱이기 때문에 ‘야곱의 하나님’ 사람은 자기 짧은 인생에 너무 소진합니다. 거기다가 자기 구원을 짧은 인생을 가지고 승부를 걸려고 해요. ‘난 이렇게 살았으니까 지옥 갈 거야. 난 천당 갈 거야.’ 자기가 했던 고것을 가지고 근거를 삼으려고 하는데, 그것을 가지고 오늘 본문 28절에서는“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곤고한 주께서는 곤고한 백성을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를 살피사 낮추시리이다” 이래 돼 있어요.

여기 곤고하다는 것은 교만한 자의 반대말로서 자립해서 스스로 내 인생 가지고 내 구원을 확정 짓겠다고 나서지 않는 사람들, 우리가 뭘 알고 뭘 잘 나가겠습니까? 흔히 자기 짧은 인생 가지고 내 구원 될까 안 될까를 짧은 인생으로 바탕을 삼지 않는 사람, 다만 나라는 것을 예수 안이라는 열차에 집어넣어 주신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문제 하나 제시합시다. 지나 걔나 전부 다 예수 믿는다. ‘예수 안에 탔다’ 하는데, 그러면 쉽겠다. ‘나도 예수 믿는다. 예수 안에 탔다. 구원 받았다.’ 이렇게 하면, 그러면 내가 하는 것이 진짜 구원 받은 사람의 증거인지, 아니면 또 내 말고 다른 집사님, ‘나도 구원 받았다.하는 저 사람이 모델인지, 확증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오늘 본문이 있는 겁니다. 다윗이라는 분이 그 열차 안에 탔더니만, 다윗을 통해서 마구 쏟아지는 구원받는 사람들의 증거들이 있다 말이죠. 그러니까 사무엘하 22장을 해석하면 목사님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돼요. 다윗을 통해서 밝혀지는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 이게 정답이죠. 다윗이 스스로 알아서 구원되는 거 아닙니다. 다윗을 통해서 비로소 밝혀지는 그리스도의 일하심이 밝혀지는 그것을 우리는 나와 비교하면 돼요. 다윗은 일종의 모델이 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김 집사, 박 집사 가 모델이 되듯이 오늘 본문에서는 다윗이 하나의 모델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다윗이 모델 됐을 경우에 나오는 특징은 뭐냐? 오늘 분문 하기 전에 요한복음 18장을 잠시 언급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요한복음 18장에 보면 여러분이 잘 아십니다. 빌라도하고 예수님 만나는 대목 이예요. 그 때 빌라도가 예수님께 뭐라고 말했느냐 하면, ‘진리가 무엇이냐?’ 했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진실이 무엇이냐? 여러분! 진리, 진실은 우리가 모릅니다. 왜? 인생이 짧아서 남들이 하는 경험을 우리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요. 그리고 우리가 사는 동리가 좁기 때문에 저 이태리, 우간다, 나이지리아 그쪽 사정을 다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이 아무리 오래 여행을 하고 인생을 살아도 전체 진리와 진실에 대해서는 우리가 손을 뗍시다. 아예 알려고 하지 마시고 포기하는 게 좋아요. 차라리 이렇게 이야기 하세요. 진실과 진리는 내가 물을 쨉이 못된다. 나는 모른다. 그렇게 이야기 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답변을 안 했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아무 답변을 하지 않았어요. 그러면 진리도 모르고 진실도 모르는데 어떻게 구원받는가? 오늘 본문을 보면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다윗을 등불로 사용해서, (다윗이 등불이란 말이 나중에 열왕기하 쭉 나옵니다) 등불의 특징은 거기서 빛이 나온다는 거예요. 다윗 한 사람의 인생을 통해서 이렇게 되어야 구원 받는 사람 맞습니다. 라는 특징들이 계속해서 막 쏟아져 나와요. 그럼 그 특징들을 소개하면서, ‘그럼 목사님! 거기서 진리가 나오고 진실이 나옵니까?’ ‘나옵니다.’ 그게 궁금하죠?

다윗을 통해서 진실이 나온다? 그럼 뭐냐? 간단하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나 건드리면 하나님이 너를 벌한다.’ 그겁니다. 어떻게 들으면 객관성이 상실하고 자기 입장에서 자기가 돛대처럼 자기가 믿음이 제일 좋은 것처럼 그렇게 으스대는 교만의 표상처럼 그렇게 느껴지겠지요.

제가 ‘시편속의 그리스도‘ 라는 책을 쓰면서 설명하면서 제일 어렵게 느끼고 설명한 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저주에 관한 시‘입니다. 저주를 퍼붓는 대목 이예요. 다윗이 어떻게 저주를 퍼붓는가 보세요. “뜨거운 숯불이 저희에게 떨어지게 하시며 불 가운데와 깊은 웅덩이에 저희로 빠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옵소서.” 멋지지 않습니까? 네? 선거 떨어졌을 때, 혹시 교회에서도 권사, 장로 떨어지고 할 때 어떻습니까?

“뜨거운 숯불이 저희에게 떨어지게 하시며 불 가운데와 깊은 웅덩이에서” 요즘 말로 두 번 다시 빠져 나오지 못하게 하옵소서. 라는 말을 다윗이 서슴없이 합니다. 왜? 진리를 알기 때문에. 아! 겁나서 함부로 못하죠. 겁나서 함부로 못합니다. 대강 이런 소리하면 멱살 쥡니다. ‘니 뭐꼬?’ 이래 나옵니다.

우리가 이 말을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시편을 연구하는 많은 신학자들의 책들을 보게 되면, 시편에 나오는 좋은 소리는 다 이야기해도, 저주 시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뭐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 이고, 좋게 좋다고 은근슬쩍 넘어가는 그런 봐주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 안 믿고 하나님 안 믿어도 다윗을 욕해도 하나님은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데 ‘오세요.’ 라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이야기 했다가 막상 시편 140편 10절 “뜨거운 숯불이 저희에게 떨어지게 하시며 불 가운데와 깊은 웅덩이에서 빠지게 하소서” 이런 대목이 나오면, 설명하기가 당황스럽고 난처해지는 거예요.

시편 69편 24절에 보면, “주의 분노를 저희 위에 부으시며 주의 맹렬하신 노로 저희에게 미치게 하소서 저희 자리가 황폐하게 만들어 주시고 그 장막에 거하는 사람이 아예 없게 하옵소서.” 꼭 옆의 교회, 저주할 때 나오는 욕망 같지 않습니까? ‘저희의 교인수가 하나도 없게 하옵시고 황폐하게 하옵소서.

자, 이걸 우리가 모른 척하면 안돼요. 모른척하면 우리는 구원열차에 올라타지 않은 사람이 되고, 예수 안에 안 들어간 사람이 되고, 예수 안에 안 들어가 버리면 우린 빌라도처럼 진리라 하는 것은 모르고 접근하는 거야. 그냥 진리라고 쑤셔보는 거야. 누가 진리를 알겠어?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평생을 보낼 수가 있습니다. 진리를 모르면 우리는 구원을 못 받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예수님 이야기 했거든요. 말이야 누가 못 합니까? 중요한 것은 다윗의 이러한 소리를 대담하게 아주 담대하게 “그들을 유황불에 빠지게 하시고 웅덩이에 빠져 두 번 다시 나오지 못하게 하옵소서.” 이걸 자신 만만하게 할 수 있는 인생의 진리에 대해서 뭔가 확신과 확답을 우리한테 갖고 있어야 돼요.

그래야 우리는 다윗과 같은 열차에 같은 옆 좌석에 탄 사람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배려한다고 진리를 외쳐야 하는 자리에서도 너무 주저하는 경우가 있어요. 물론 우리는 남을 배려하고 싶죠. 하지만 우리를 하나의 등불로 사용하고 등대로 사용한다면, 우리 속에 계시는 주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면 우리는 이대로 참을 수가 없습니다. 막 토하듯이 (토할 때 못 참잖아요?) 길과 진리 생명이 막 토해져 나와야 돼요.

단순히 우리가 열차에 공짜로 그냥 앉아 있는 게 아닙니다. 그 안에서 움직임 속에 우리도 같이 움직여서 그 안에서 창밖을 향하여 진리를 같이 외쳐야 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는 어떻게 해서 이 소리를 할 수 있는지를 고걸 먼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시편139편 20절에 보면, “저희가 주를 대하여 악하게 말하며 주의 원수들이 헛되이 주의 이름을 칭하나이다” 바로 이 대목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열차에 올라탔을 때가 언제냐 하면, 바로 그걸 확실히 느낄 때가 언제냐 하면, 나단 선지자가 와가지고 자기가 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것을, 모태에서부터 죄인 중에 태어난 것을 알려준 시점입니다.

자기는 죄를 감추기 위해서 살아왔던 시절이 있었다면, 나단 선지자가 와가지고 있는 죄를 다 털어 내놓는 그런 경우를 당했어요. 밧세바와 간음한 사건을 다윗은 감추려고 했을 때, 감추어 놓으면, 아까 시편 140편10절 말을 이야기를 할 수 없어요. ‘간음한 놈 다 죽어라‘ 이런 말을 못한다고요. 왜? 자기가 했기 때문에..ㅎㅎ 간음한 건 봐주고 딴 거는 용서가 안 된다. 이래 나올 거란 말이죠. 그러면 다윗은 주관적으로 자기가 불리하다 싶으면 가만히 있다가, 자기가 유리하다 싶으면 그것만 골라서 남한테 증거 하는 아주 사기성이 농후한 사람이 돼버립니다.

그러면 아예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사용할 때, 간음이든 사기든 모든 것을 저지르지 않은 상태에서도 저질은 사람으로 또 안 저지른 상태에서도 이미 저지른 사람으로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찾아오신 거예요. 그럴 때 다윗이 알게 된 것은 간음죄나 살인죄 때문에 찾아온 게 아니라는 것을 그때 뿅 하고 가버렸어요. 나단 선지자 왔을 때.

야! 내가 이거 살인을 했기 때문에, 이거 간음을 했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찾아온 게 그게 아니었구나.~~ 라는 사실 이예요. 우리가 교회에서 목사한테 얼마나 주눅 듭니까?...ㅎ 십일조 하라. 주일성수하라. 봉사해라. 구제해라. 바쳐라. 뭐해라. 그래가지고 봉사 안하면 부끄러운 구원 받습니다. 상도 없습니다. 협박조로 나오는데, 만약에 그 목사가 진짜로 주님이 찾아와서 밑바닥까지 목사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아는 것 같으면, 하라, 하라가 나오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진리 앞에서 우리는 해도 안 해도 이미 우리는 죄인이었습니다. 라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죠.

우리는 하나 안 하나 태어난 것 자체가 죄인으로 만들어져서 태어났다는 사실, 그 만드신 하나님의 만드심을 존중해 줍시다. 그 하나님의 취지에 우리는 한껏 동의합시다. 죄인으로 만들어 놨는데 만들어 놓은 존재가 의인이라 주장해 버리면 죄인으로 만드신 주님의 손이 부끄럽지 않습니까? ‘아니, 목사님 주님께서는 왜 죄인으로 만들었습니까?’ 바로 시편 140편 “주님께서는 유황불(지옥불)에 집어넣고 두 번 다시 나오지 못하는 사람을 주께서는 일부러 따로 챙겨서 만들어 놨다는 주님의 숨겨진 창조의 내막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찾아온 거예요. 아! 많이 어려워요. 쉽게 가겠습니다.

로마서 9장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할 때 로마서 9장 1절처럼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구원 받는 겁니다. 은혜로 구원 받은데 그게 전부 다 자기 잘났다 행함으로 나오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행함으로 나오는 자를 뭐로 보는가 하면, 사특한 자 교만한 자로 보시고, 그 자들 가운데서 남겨둔 자가 있어요. 그 남겨둔 자에게는 뭐를 주는가 하면, 아! 우리는 주님께서 찾아오지 아니하면, 내 의로움으로 내가 구원되지 않는구나. 라고 은혜가 임하는 사람이 있어요. 은혜가 임하는 사람은 자기의 행함을 중절시켜 버립니다. 스톱을 시켜요. 왜냐하면 자기는 언제든지 간음할 수 있고 언제든지 살인할 수 있고, 언제든지 사기죄, 도둑질을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거예요.

인생이라 하는 것은 살아가면서 살다 보면요 본인이 원치 않지만 집단적으로 같이 사기를 칠 때 같이 사기를 쳐 줘야 직장에서 안 쫓겨납니다. 그리고 분명히 집단적인 나쁜 짓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검찰에 소환되면, ‘기억나지 않는다.(누구한테 많이 배워가지고) ’아는 바 없다.’ 이러면서 버텨줘야 그 직장에 충성할 수 있는, 승리할 수 있는 사람이 돼요. 이 말은 ‘하라’ 하지마라‘ 세상이 우리를 가만두지 않습니다. 집안에 침해 걸린 한 사람이 있어도 그 며느리는 돌보면서 정신병자까지 내려갑니다. 침해 걸린 시어머니 붙들고 자살하고 싶어 하는 사람 있어요. 아무리 착하고 바르게 해도 성질나는데 어떡합니까?

그래 성질난다는 그것이 처음부터 우리가 성질이 못돼서 그런 것이 아니고 원래 하나님께서 찐빵 만들고 만두 만들 때 처음부터 성질나도록 만들어 놨는데, 마귀가 와서 이걸 교만하게 만들어버렸어요. 자기 죄를 감출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한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서 다윗을 대전역에서 태워 벼려요. 구원 열차에다가 태워놓고, 일단 들어가 보니까 거기서 완전히 발가벗겨 버려요. 그동안 자기가 잘났다. 왕이다, 최선을 다했다. 하나님 나를 통해서 골리앗을 이겼다. 사울은 천천 나(다윗)는 만만이라고 인기 있었던 그것, 그 거 하나 둘 다 껍데기를 벗겨 버려요. 벗겨 버리고 ‘너는 처음부터 간음할 가능성이 농후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알게 된 것이 이게 축복이라는 겁니다.

달리 이야기 하면, 이런 게 어려워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람들에게 얻어맞아서 형편무인지경이 되고, 완전히 떡이 됐잖아요. 피를 흘리고 십자가에서 죽었을 때, 구세주가 사람들에게 얻어맞는 구세주가 진짜 구세주인 것을 알게 된 것이 그게 기적 이예요. 그렇다면 다윗은 자기를 통해서 뭘 했느냐 하면, 우리아를 죽였고 밧세바에게서 난 아이가 자기 죄로 인하여 난 지 일주일 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된 것을 남의 일로 여기지 않고, 나와 관련된 일로 여기는 겁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다윗은 죄인의 역할로 있을 수 있고, 나 때문에 애매하게 죽었던 그 아이와 우리아 장군은 장차 오실 예수님의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 두 역할이 서울에서 대전, 부산까지 가는 KTX 구원 열차 안에서 계속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게 바로 진리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윗은 뭐냐 하면, 다윗은 그걸 알았잖아요? 다윗은 아니까 저쪽에서는 뭐라 하느냐 하면, ‘사람은 착해서 구원 받는다’ 이래 나오는 거예요. 사람은 성화되어 착해야 구원 받는다 나오니까, 그걸 다윗 기준에서 보니까 그걸 ‘사특한 자라’ ‘니는 내 경우를 몰라, 니는 나에게 찾아온 하나님을 몰라.‘ 이런 뜻 이예요.

다윗은 담대하게 말합니다. ’너희들은 나단 선지자가 나한테 찾아온 걸 너희들은 몰라.‘ 심지어 더 나아가서 ’너희들은 내가 날 때부터 죄인인 것을 모르지?‘ 모르지? 그러니까 교만하잖아’. ‘내 손으로 내 죄 때문에 죽었던 사람이 우리아고 철없는 어린애가 죽었던 사실을 모르지? 하는 거예요. 그럼 저쪽에서 뭐라 합니까? ’그래 니 간음하고 죄짓고 잘났다. 그래, 그걸 자랑이라고 하느냐?‘ 지금 다윗은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기준 이예요. 천국 갈 거냐. 지옥 갈 거냐. 기준으로서 주께서는 만드신 겁니다.

다윗이 죄 짓는 것이 쉬운 게 아니에요. 사울은 그 입에서 회개를 자주 해요. 회개를 그렇게 자주 해도 기준이 아니라니까요. 그게 구원 받고 천국 가는 기준이 사울은 회개해도 회개한 자체가 자기 장끼가 되고 자기 주특기가 됩니다. ‘주여 회개합니다.’ 이것이 교회에서 자기는 우쭐대고 자기는 훌륭하게 포장하는 하나의 기술, Skill이 된다니까요.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교만한 자 사특한 자 내가 완전한 자에게는 완전함을 보이시고 자비한 자에게는 자비를 보이시고,” 근데 자비가 뭐냐? 뒤에 나오는 완전과 자비가 같은 말 이예요. “나는 자비한 자에게는 자비하심을 나타내 보이시고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함을 드러낸다.” 이 말은 주께서 주신 것을 내세우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고, 사특한 사람은 자기 것만 잔뜩 들어있는 사람, 자기 것으로 자기를 구원시키려 하는 사람들은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은 낮추시고 결국은 아까 이야기한 그런 저주의 ‘너 같은 인간은 뜨거운 유황불에 들어가고 두 번 다시 기어 나오지 말아야 된다.’ 라고 선언을 하는 겁니다. 누가요? 다윗이. 다윗을 통해서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다윗은 인간의 모든 지을 수 있는 범죄 가운데 가장 낮은(밑바닥) 범죄를 대표적으로 내세우므로 말미암아 다윗도 구원 받을 수 있다면, 누구나 자비를 받을 수 있음을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알았던 그 자리에 이제는 우리를 초청을 하는 거예요. 그럼 초청을 어떻게 하느냐? 그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초청을 어떻게 하느냐? 방금 이야기한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의 저주의 시를 우리(남한테 하지 말고, 옆에 있는 교회에 하지 말고, 우리교회)에게 적용하는 거예요. 할 때 우리가 기분이 되게 나쁘다. 아~주 수상합니다.ㅎ 수상해요.

우리는 아직도 잘난 존재로 인정합니다. 그런데 다윗이 우리보고 ‘너는 저주 받아야 마땅해.’ 한다면 우리는 사도바울처럼 ‘맞습니다. 저는 곤고한 사람입니다.’ ‘이제 나 자신을 알았습니다. 내가 착한 것을 몰라서 착한 일을 하는 게 아니고 착한 일 하고 싶어도 악한 것이 우세하게 튀어 나오므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라고 십자가 앞에서 자백을 하고 다른 이 앞에서 자백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은 자비하심이 나와요. 긍휼히 여기심. 불쌍히 여겨주심, 준비된 긍휼히 여겨주심이 도달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축복 시 보다 저주시가 더 은혜가 돼요. 사실은 두 가지 카드처럼 두 가지 면이 있어가지고, 저주시를 내밀고 뒤를 뒤집어보면,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축복을 주기 위한 준비단계가 먼저 단계가 십자가였고 저주였습니다. 우리가 이 다윗을 통해서 기준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고 하신 분이 십자가 지시고 아버지께 버림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버림받은 그것이 그대로 소급해서 그 열차에 탄 우리에게 그대로 주어집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어져야 마땅함을 아는 사람! 그 사람은 근원적으로 죄인임을 아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를 영화롭게 할 자비를 받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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