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20:15-20 - 도와주는 사람

작성자지미박|작성시간26.06.09|조회수41 목록 댓글 0

도와주는 사람
삼하20:15-20


(삼하 17:15, 개역) 『이에 후새가 사독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이르되 아히도벨이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여차여차히 모략을 베풀었고 나도 여차여차히 모략을 베풀었으니』

(삼하 17:16, 개역) 『이제 너희는 빨리 사람을 보내어 다윗에게 고하기를 오늘 밤에 광야 나룻터에서 자지 마시고 아무쪼록 건너가소서 하라 혹시 왕과 그 좇는 자들이 몰사할까 하노라 하니라』

(삼하 17:17, 개역) 『그 때에 요나단과 아히마아스가 사람이 볼까 두려워하여 감히 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에느로겔 가에 머물고 어떤 계집종은 저희에게 나와서 고하고 저희는 가서 다윗에게 고하더니』

(삼하 17:18, 개역) 『한 소년이 저희를 보고 압살롬에게 고한지라 그 두 사람이 빨리 달려서 바후림 어떤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서 그 뜰에 있는 우물속으로 내려가니』

(삼하 17:19, 개역) 『그 집 여인이 덮을 것을 가져다가 우물 아구를 덮고 찧은 곡식을 그 위에 널매 도무지 알지 못할러라』

(삼하 17:20, 개역) 『압살롬의 종들이 그 집에 와서 여인에게 묻되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이 어디 있느냐 여인이 가로되 그들이 시내를 건너가더라 하니 저희가 찾아도 만나지 못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니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성경 해석의 기본은
‘자리 싸움’입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신의 자리가 깨지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 길에 나서려고 하고
진리와 생명을 얻고자 시도합니다.

이것은 말도 안됩니다.

사람들이 교회 오더라도
자기 자리에 위기감이 들면
쓸쩍 자기 자리 사수에 나서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자리란
돈과 권력만이 아닙니다.
자존심과 명예와 자신의 영광의 자리까지를
포함해서 하는 말입니다.

세상에 손해보고 살려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본문에 나오는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은
위기를 자처합니다.
이것은 다윗의 자리 때문입니다.
즉 그 사람들은 하늘의 길이
다윗의 자리를 통해
나 있다는 것을 압니다.

본문에서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은
‘길’을 보고 있습니다.

유일하게 하나님쪽으로 연결되어 있는 길을
그들은 알게 된 것입니다.

그 길이 뭉개지지 않도록
다윗을 돕는 겁니다.

그 길이 계속 살아있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위험과 위협을 초래하는
계기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편에서 산다는 말은
하나님의 자리 앞에서
자신들의 자리가 확보될 수 없음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왕과 제사장직의 만남입니다.
제사장들은 거짓말을 해서라도
다윗의 왕 자리를 지켜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러한 사태는
본문의 시대 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에 다 공히
적용될 사항입니다.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실은 부끄러운 일일 수가 있습니다.

어떤 기준에 의해서 그러합니까?
그것은 “나는 거짓말이 나쁜 짓인 것을
아는 나이다”가 확립되어 있는 자들에게는
부끄러운 짓입니다.

하지만 그 거짓말을 하는 본인의 삶이
자신의 영광과 가치를 위한 삶이나
자기 자리를 빛내기 위한 삶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리를 위해 양보하고
양도해야 할 자리라면 어떠합니까?

그래서 거짓말이 부끄러운 짓이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여호수아 2장에서
기생 라합은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만약에 그녀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그것으로 인해
그녀의 가정은 ‘구원의 붉은 줄’을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붉은 줄’이 없는
여리고성 주민에게는
그 어떤 자비도 돌아가지를 못합니다.

결국 여호와 하나님에게는
자기 자리를 포기한다면
얼마든지 구원될 수 있음을 말해주는 모델로서
기생 라합의 가정을 존재해야만 했습니다.

거짓말을 할 줄 아는 인간은
그 자체로서 나쁜 것이 아니라
자기 자리 확보를 위한 거짓말인지
아니면 예수님의 자리를 보여주기 위한 거짓말인지를 구별되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31에 보면,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 속에
그 어느 시점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침투되지 않는 일은 없다는
말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 참석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뜻과의 접촉되는 기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평소에 쉬지 않고 터지는 거짓말을 해야 하는
삶의 환경 속에서
하나님은 줄기차게
‘우리 자리’와 ‘하나님의 자리’를
비교시키십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거짓말인가 하는 겁니다.
누구를 위한 거짓말인가 하는 겁니다.

본문에 나오는 두 제사장은
다윗의 다윗됨을 보여주기 위해
거짓말을 해야 하는 그런 여인의 도움을
필요로 한 것입니다.

그녀의 거짓말이 아니었음은
이 두 제사장은 목이 달아났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다윗의 자리는 괴멸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더불어
다윗언약을 맺었는데
그 내용이 다윗 가문의 영속성입니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혈통적 다윗 가문 유지가
그 목표가 아닙니다.

다윗 가문이 영속되려면
더 이상 그 다윗 가문을
인간들의 혈통에 맡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자손의 자리를
인간에게 허락하지 않고
직접 주님께서 맡게 됩니다.

시편 110:1-4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고 되어 있습니다.

즉 진정한 제사의 완성은
끊임없이 전쟁의 위기 속에서는
약속을 위하여
자리 자리를 포기할 수 있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버티게 됩니다.

즉 성도의 혈통은
예수님의 새로운 자리를 보여주기 위해
예수님께서 활약하는 자리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자리가
우리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완성을 포기할 만큼
귀한 자리입니까?

비가오는 날에
돈 주고 세차장에서 세차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세차장에서 세차하는 것보다
더 확실하게 세차되기 때문입니다.

이와마찬가지로
인간들의 모든 거짓말의 근본에는
‘혈통’, ‘혈육’이라는
자신들의 자리들이 있습니다.

그 자리를 키우고 번창하고 든든하게 만들기 위해,
달리 말해서 남의 자리를 부수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혈육 자리를 포기할 생각이 없는 것이
인간들의 본성이요 거짓말 하기입니다.

이런 본성을 그대로 가지고
거룩하고 성스러운 하나님을
상대하고 싶어합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근거로
자신과 가족을 거룩한 가문으로
변모되게 해달라는 겁니다.

하지만 이 착하기의
방향성과 관심사와 목적이
잘못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리가
위기를 맞이해야 합니다.

착하지 않을 수 있다는
위기 말입니다.

우리 자신의 자리의 가치보다
더 나은 가치가
곧 예수님의 자리라는 곳을
고백하게 하는데 있어
우리 자리의 붕괴는 필수입니다.

건물 청소원들의 곁에는
항상 밀대가 놓여있습니다.

그 밀대가 바로
그 사람의 본분과 하는 일을 말해주고
사명을 알려줍니다.

밀대없는 청소원은
청소원이 아닙니다.

이와마찬가지로
진정 우리가 하나님의 가정이라는
밀대같은 십자가가
우리 가정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 십자가에서 쏟아져 나오는 피만이
우리를 의롭게 합니다.
이 그 피 앞에서
우리 자리 확보하기는
당연히 늘 위기이어야 하고
붕괴되어야 합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037강-삼하17장15-20(도와주는사람)-2sa100711
2010-11-19 15:56:18


하나님의 말씀 사무엘하 17장 15절에서 20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491페이지입니다.

사무엘하 17:15-20

“이에 후새가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이르되 아히도벨이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여차여차히 모략을 베풀었고 나도 여차여차히 모략을 베풀었으니 이제 너희는 빨리 사람을 보내어 다윗에게 고하기를 오늘 밤에 광야 나룻터에서 자지 마시고 아무쪼록 건너 가소서 하라 혹시 왕과 그 좇는 자들이 몰사할까 하노라 하니라 그 때에 요나단과 아히마아스가 사람이 볼까 두려워하여 감히 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에느로겔 가에 머물고 어떤 계집종은 저희에게 나와서 고하고 저희는 가서 다윗에게 고하더니 한 소년이 저희를 보고 압살롬에게 고한지라 그 두 사람이 빨리 달려서 바후림 어떤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서 그 뜰에 있는 우물 속으로 내려가니 그 집 여인이 덮을 것을 가져다가 우물 아구를 덮고 찧은 곡식을 그 위에 널매 도무지 알지 못할러라 압살롬의 종들이 그 집에 와서 여인에게 묻되 아히마하스와 요나단이 어디 있느냐 여인이 가로되 그들이 시내를 건너 가더라 하니 저희가 찾아도 만나지 못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니라” 아멘


거짓말을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아주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고, 넙죽하고 있습니다. 거짓말의 대가는 역시 여호수아 2장에 나오는 기생 라합이 거짓말 하나 잘해서 거짓말 안하면 큰일 날 뻔했어요. 거짓말 잘해서 그 덕으로 구원을 받는 그런 일이 있습니다. 거짓말 안 했더라면 지옥으로, 거짓 말 했기 때문에 천국으로 들어가는 그러한 일이 일어났어요.


그렇다면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사태들이 우리 인생에 일어나면서 거짓말 안하는 착한 사람 될래? 아니면 거짓말해서라도 주님을 위해 살래? 양단간에 결정하는 식으로 우리에게 들이미는 것 같습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주변들의 일이 우리를 거짓말 안하는 정말 착하디착한 우리의 착함을 위하여 이 세상에 우리가 있는 게 아니요. 우리의 영광과 우리의 자존심과 우리의 성실함과 양심의 가책이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세상이 이래 돌아가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비록 거짓말해서라도, 거짓말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거짓말쟁이라는 비난을 받을지라도 우리 예수님은 그만한 가치보다 더 놀라운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가 때로는 거짓말을, 때로는 말이 참 어설프죠. 늘 거짓말 하고 있으니까.ㅎ 거짓말 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거짓말 방향이 뭐냐? 거짓말 이유가 뭐냐? 목적이 뭐냐를 묻는 거예요. 우리 영광과 우리 자존심을 위해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냐? 아니면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거짓말 주고받는 세상과는 다른 월등한 분으로서 우리에게 찾아 계시고 있는가? 어느 것을 증거하기위해서 우리가 살아야 되는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내용, 사람이든 이름들이 후새, 사독, 아비아달, 아히마아스 (뒤에는 아히마하스로 돼 있거든요), 하고 요나단, 이 두 제사장이 다윗을 돕기 위해서 달려가는데, 그것을 이미 정권이 바뀌기 때문에, 중요한 임무를 띠고 다윗에게 중요한 정보를 전달해 줘야 되는데, 그 지역이 이미 압살롬의 권한 속에 있는 지역이 돼 가지고, 굉장히 두 사람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죠? 위태롭게 되면, 그 사람이 중간에 죽어 버리면, 다윗이 몰살당할 수가 있기 때문에, 위기일발의 순간이 찾아 왔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바후림 어떤 집에 갔는데, 그 여인이( 또 여인이 위대한 일을 해요) 두 사람을, 이번에는(기생 라합은 옥상에다 삼대로 덮어서 가려줬지만) 우물 속에 들어가서 거기에다 우물 뚜껑을 덮고 아구를 덮고 거기에다 찧은 곡식을 널어놓으니까, 찾던 사람들이 수색을 못해가지고 그냥 가버리니까 두 사람이 무사히 빠져나와서 다윗에게 알려서 다윗이 황급히 강을 건너가서 무사히 살았다 그런 이야기죠.

그러니까 이런 내용을 만약에 수사당국에서 보게 되면, 앞으로 수사할 때는 특히 빵, 곡식이 있는 우물을 주의해야 돼요.ㅎ 이런 것은 형사들이 임무를 제대로 못한 거죠. 똑똑한 형사 같으면, 특히 어디다 숨겼을까 해야 될 텐데, 결국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그냥 무사히 넘어갔고, 그리고 그 와중에서 이 여인은 거짓말, 거짓적인 행동을 한 겁니다.

자, 이 대목이 성경에 나와 있는데, 거짓말 한 것이 마치 잘한 것처럼 나와 있는 이 대목을 보면서, 우리 이 성경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뭘 느끼느냐 하면, 다윗이라는 게 그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냐? 다윗이 밑의 사람들의 목숨이 위태한 지경인데도 불구하고 다윗이라는 사람은 우리가 보호할 가치가 있는 것인가? 그러한 의문점을 가지고 볼 거예요.

또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그러한 시비를 건다는 것을 다 염두 해 두시고, 여기서 다윗의 생명은 하나님이 몹시 보호한다. 그것도 부각시키려는 거예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근본적으로 우리가 해야 될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특정 나무 조각을 믿는다든지, 특정 교회 와서 예배시간을 준수하든지, 특정시간, 특정 공간에 우리가 거기 참여한다든지, 이런 식으로 해서 하나님과 교류가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마치 불꽃놀이 할 때, 불꽃이 팍 터지면, 그 알갱이 하나하나의 불꽃이 땅에 떨어지면서 좋은 땅에 그 근처를 다 덮잖아요? 그처럼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시도 때도 없이 공간과 시간을 초월해서 항상 우리 일상 가운데서 주의 뜻이 흐르고 있는 겁니다. 발생 되고 있는 겁니다.

여기 아히마아스라는 이 사람과 요나단이라는 두 제사장이 만약에 밖에 뛰어나가면서, ‘ 어이 제사장님, 어디가십니까?’ 물으면, 이 두 제사장이 ‘난 지금 다윗을 만나거든.’ 이렇게 굳이 이야기 할 필요 없어요. 왜? 중요한 정보는 자기가 갖고 있는 중요한 정보는 함부로 흘릴 수 없기 때문에. 그럼 뭐라 합니까? ‘화장실도 못가나?’ 이랬다 말이죠. 그러면 제사장이 화장실에 가는 것도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럼 우리가 화장실에 가는 것도 주를 위한 뜻일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로고린도전서(10:31)에 나오죠. ‘니가 먹든지 마시든지 화장실에 가든지 뭣을 하든지 주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이거예요. 우리가 평소에 일상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뭔가 설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건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딸랑 딸랑, 이쪽 건드리면 방울 달려있는 것을 건드리면 어디서든 딸랑딸랑 하는 것처럼, 우리는 뭘 해도 딸랑딸랑 주의 뜻이 거기서 솟아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 와서 목사 설교 들을 때만 주의 뜻을 아는 것이고, 평소에 자기 일은 주의 뜻이 없다고 여기고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거예요.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버리면, 나중에 기도할 게 없습니다. 여러분! 기도는 기도 시간에만 하는 게 아닙니다. 기도 시간은 결과입니다. 뭔가 일이 벌어졌고 일에 대해서 자기 힘으로 안 되고, 어떻게 주의 뜻대로 살기가 참 난감할 때, 그 때 어쩔 수 없이 엎드리게 되고 부르짖게 되고, 버스타고도 중얼중얼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지금 압박감, 주님의 뜻에서 압박감을 받고 있다는 겁니다.

근데 주의 뜻으로 오는 압박감에서 내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님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 보니까 기도를 안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근데 싹둑 가위로 자르듯이 잘라버리면, 주의 일은 교회서 하고 바깥에 나오면, 내 맘대로 내 일을 하니까 기도할 내용이 전혀 나오질 않는 겁니다. 하여튼 제 강의 끝나고 또 이번에 수련회 합니다. 끝나면 ‘목사님, 기도할 게 없습니다.’ ㅎ왜? 기도할 게 없습니까? 평소에 모든 일을 이거는 내 일이고, 하나님도 터치 하지 마라라고 자기 일로 간주하니까, 기도할 게 없죠. 건드리면 딸랑딸랑, 이래도 딸랑딸랑, 저래도 딸랑딸랑, 항상 기도할 게 샘솟듯이 나오는 겁니다.


참 기도할 것이 어떻게 나오느냐? 여기 오늘 본문에 의하면 제사장 아비아달, 두 제사장이 종들에게 그 때 요나단과 아히마아스, 가는 제사장에게 알려주는데, 그렇다면 여기서 나오는 게 뭐냐 하면, ‘제사장과 왕’과의 만남입니다. 쉽게 하겠습니다. 천국의 길이 나와 있는데 잘 들어 보세요. 위에서 보면 안보이죠. 근데 그 길은 다윗 시대에는 다윗을 통해서 길이 나와 있습니다. 그것을 다윗에게 준 약속이라고 해서 ‘다윗 언약’이라고 합니다. 다윗 언약은 다윗을 중심으로 전개 됩니다. 그래서 다윗은 필요한 존재며, 다윗은 다치면 안 되며, 죽으면 안 되는 존재입니다. 다윗이 있어야 길이 유지가 되고, 길이 트여지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언약은 무엇을 만드는가? 다윗 언약이란 자리를 만듭니다. 야, 이제부터 중요합니다. 여러분, 힘들고 오후에 비도 오고 축축하고 힘들지만, 요거 10분 동안 짧게 힘들게 안 할 테니까 잘 들어보세요. 다윗 언약은 다윗을 통해서 자리를 만들어요. 포지션, 자리를 만들어요. 그렇다면 자리를 만들면 자리를 믿으면 될 텐데, 쉽잖아요? 믿죠, 다윗 자손을 믿습니다. 문제는 다윗 자리를 못 믿게 하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내 자리’입니다.

자, 성경 해석 어떻게 합니까? 목사님, 성경 해석 어떻게 합니까? 성경 해석은 문자로 보지 마시고, 저쪽 자리와 내 자리를 비교해 보면 됩니다. 예수님 자리와 내 자리를 비교해 보면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 자리와 내 자리를, 내 자리를 가지고 주님 자리로 가려면, 길이 턱 턱 막힙니다. 길이 없어요. 길이 뚫리지 않습니다. 길을 나서려면, 죄송합니다만, 내 자리를 폭파시키고 붕괴해야 되요. 그런데 어느 인간이 그 곱게, 곱게 쌓은 내 자리를 깹니까? 자리란 말이 어려우면 쉽게 가겠습니다. 어떤 누구하고 이야기 할 때, 그냥 건성으로 이야기 하는 것 같지만, 그 사람의 자리에서 나온 내용을 가지고 한국말이란 언어에 담겨서 나한테 전달하고, 거기에 대해서 대응하고 답변하는 것은, 내가 평생 살아온 내 자리가 만들어 낸 그러한 내용이 내 혀를 통해서 저쪽에 전달합니다. 중간에서 칼싸움하고 난리입니다. 번쩍 번쩍, 번쩍 번쩍, 니 자리가 괜찮은 자리냐? 내 자리가 괜찮은 자리냐? 번쩍 번쩍, 폭탄 터지고 이래요. 그리고 연결 잘 안 맞으면, 휙 하고 삐지고 어디로 돌아가느냐 하면, 각자 자기의 자리로 돌아갑니다.ㅎ 이게 인간의 포지션(자리)이예요.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뭘 주느냐 하면, 다윗의 자리만 이야기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넙죽 ‘믿죠.’ 이래 나오거든요. 다윗의 자리와 더불어서 우리의 자리를 같이 언급해 버립니다. 그러면 다윗 때문에 우리는 무슨 결단을 내려야 되느냐 하면, 내 자리가 위태로워도 다윗의 자리만 있으면 좋으냐, 나쁘냐를 결정을 내려야 되요.

오늘 나오는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은 위기에 처합니다. 그 사람이 위기란 말은 뭐냐 하면, 제사장이란 자기 자리가 날아갈 판 이예요. 잡히면 그냥 죽습니다. 이미 권력이 있어요. 좀 더 어렵게 이야기해야 해요. 사람의 자리라 하는 것은, 그 현재에 나오는 권력 가운데 한 자리 차지한 거예요.

하나교회 지난 주 목요일 날에 참석을 했는데, 서 경수 목사님 강의할 때, 금요일 날 강의 있지만 목요일에 미리 가서 아무에게도 말 안하고, 주께서만 아시고(ㅎ) 하나교회 떡 참석을 했어요. 서 경수 목사님이 삐직, 삐직 땀을 흘리시면서 2시간 동안 강의를 하셨습니다. 불쑥 들어간 거예요. 들어올 때 거기서 무슨 이야기 나오느냐 하면, 새순 교회 교인수가 몇 명이냐고 나왔어요. 교회가 큰 자리 같으면, 안 물어 줄까봐 걱정이 됩니다. 교인수가 많으면, 제발 물어줘, 물어줘, 교인 수 물어줘,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작은 수의 교회 자리를 가지고 있으면, 물어주면 답변을 어떻게 할지가 답답해져요. ‘4명입니다. 4명. 많이 나올 때는 5명 나옵니다.‘ 이러니까 상대방이 물었던 사람이 얼마나 미안하겠습니까? ’나 그만큼 적을 줄 몰랐습니다.‘ 란 말을 함부로 고백하는 질문자가 없거든요. ’예 알았습니다.‘ 묻는 사람도 서먹하고 대답하는 사람도 서먹하고, 저렇게 물은 사람이 뭐라 하겠습니까? ’그동안 뭐 했습니까? 목사 되고 난 뒤에 다른 사람은 수천 명인데, 4명이 뭡니까? 뭐 했습니까? 그러니까 질책하는 느낌이 들고, 저쪽은 질책하는 질문을 한 것 같아 지가 알아서 미안하고, 분위기 이상하거든요.

그래서 그 분위기를 해소하기 위해서 제가 2부 순서 강의를 했어요. 교인수라는 것이 뭐냐 하면, 제가 앞에다 그림을 그렸습니다. 1부는 서 경수 목사님이 하시고, 2부는 내가 사람 그림을 떡 그려 놓고, 네모 난 파스를 딱 붙이게 되면, 하나밖에 없는 전체 교회에서 새순 교회는 파스 면적만큼 울산에서 담당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교회 교인이나 새순교회 교인이나 우리교회 교인이나 아니면 서울의 어떤 교회 교인들은 전부 다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 하나의 몸에 속한 전체 몸에 속하지만, 지금 새순교회 면적이 좁아가지고 그중에서 몇 명만 이렇게 담당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교인 수는 뭐냐? 현재 21세기, 2010년도에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새순교회 교인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파스 쪼가리가 몸 중에서 어떤 사람은 배 담당으로 딱 붙어 있고, 어떤 사람은 팔 담당으로 딱 붙어있기 때문에, 팔에 붙어 있는 것이 새순교회라면, 배에 붙어 있는 것은 하나교회고, 다리부분에는 우리교회고, 그래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니 교인 내 교인 없고, 전체의 교인인데, 파스 쪼가리 붙였고, 큰 쪼가리 붙인 것, 그 차이밖에 없습니다.‘ 라고 주제넘게 나가서 했어요.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ㅎ) 주님께서 노아 당시 수백 만 인구 중에서 달랑 여덟 명이거든요. 방주에 들어간 사람이 8명입니다. 평수가 몇 백 평 넘는 큰 평수의 배에 달랑 8명 들어갔으니 얼마나 허전하겠습니까? 그래도 배 떴습니다. ’손님 안 왔습니다. 오라이 못 합니다.‘ 이러지 않았어요. 그냥 때가 되면, 물차서 배 뜬 겁니다.

중요한 것은 인원수가 아니고, 지금 다윗 자리가 어떤 자리이기에 인원수에 전혀 상관없이 구원이 되는 자리냐? 도대체 어떤 정보가 담겼기에 세상에 저주 받은 저주를 극복할 수 있는 장치가 어떻게 다윗이란 장치에 들어 있느냐? 요게 중요한 겁니다. 그것을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은 익히 알고 있어요. 자기가 위기란 걸압니다. ‘ 나 이거 전할까 말까, 전하다 거리면 나 죽는데... 아이고, 다윗이 뭘 중요해, 내 자리가 중요하지, 다윗의 자리가 뭐 중요해? 내 자리가 중요하지. 십자가 자리가 뭐 중요해, 내 자리가 중요하지. 이럴 것 같으면, 성경 본문에 이 두 사람 안 나옵니다. 바로 그게 성경 해석 이예요.

다시 말씀드리면, 성경 해석은 예수님 자리와 우리 자리를 같이 이야기 해놓고, ‘둘 중에 어느 자리가 귀한 자리냐?’ 묻고 그 주님이 귀한 자리를 위해서, 니 자리에서 어떤 위기적이고 거짓말하는 상황이 올지라도 너는 충분히 감당하겠느냐? 그걸 묻는 겁니다. 그게 성경 해석 이예요. 성경 해석은 성경에서 해석하지만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일주일 내내 내 자리냐? 주님의 자리냐? 주님의 자리냐? 내 자리냐? 계속 묻는 주님의 일은 멈추지 않죠.

지금 아히마아스하고 요나단 둘이 성경 책 들고 뜁니까? 아니죠? 성경 책 놔두고 있는 거예요. 자기 집에 있지 자기는 안 들고 있습니다. 성경책은 자기 집에 있더라도 성경책 내용은 지금 자기에게 떨어진 거예요. 위기죠? ‘빨리 빨리 달려, 안 그러면 죽어.’ 우리는 이게 성경과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아히마아스하고 요나단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성경 속에 묻혀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밖에 튀어 나와서 지금 나에게 이런 일을 시켰구나.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이 자체가 이미 성경 이예요. 뭘 하든지 간에, ‘거짓말 하지마라‘가 아닙니다. 거짓말하고 무슨 일을 해도 그 방향성, 그 관심, 그 목적이 ’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 를 위한 일이라면, 뭐 우리가 잘 하는 거 있잖아요? 거짓말!!!!! 마음껏 하세요.‘ 이거 남는 거 없습니다. 바가지도 씌우고...ㅎ어차피 내 안에 그리스도 살아계시면 너무 정당화 하는 것도 되지만 ㅎㅎ

자 그러면 마지막으로, 목사님, 다윗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놀랍게도 다윗은 껍데기였습니다. 시편(110:1)에 보면, ‘주께서 내 주에게’ 했습니다. 주께서 내 주에게 일을 시키는데, 니는 원수를 이길 때까지 저 다윗이라는 껍데기를 사용하겠다.‘ 저와 여러분들이 껍데기를 주께서 사용하시겠다는 겁니다. ’미안하다, 거짓말 좀 해라.‘ 이런 식으로. ’미안하다 너 자리에 위기를 안겨줘서.‘ 하지만 니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너는 길을 터야 된다.

오늘 핵심은 그거예요. 우리가 길 돼서 길 막지 말고, 우리 안의 우리가 길을 터야 돼요.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우리 자리가 가로막는 일은 없어야 된다. 차라리 우리가 관통되고 위기가 온다 할지라도 우리의 자리를 통해서 우리의 사업이나 직장이나, 여러 가지 농사지을 때나 뭘 하거나 우리 자리가 다른 사람이 들여다보면, ‘니 자리 보니 십자가 보이네.’ 다시 말해서, ‘영생의 천국 문이 보이네.’라는 말을 할 수 있도록 우리의 자존심에 우리의 깨끗한 착한 일하는 내가 주의 자리를 가로막지 않아야 됩니다. 일부러 거짓말 하라는 말이 아니고, 주께서 그런 거짓말 할 수밖에 없는 위기를 줘요. 그때 내 자리 고수냐? 아니면 십자가냐? 그러한 선택을 하도록 우리에게 찾아오실 것입니다.

끝으로 하나 더 하죠. 우리의 가정이 있잖아요? 모든 가정이 마찬가지입니다만, 여러분! 오늘같이 비 많이 올 때, 세차하는 사람 봤습니까? 바보예요? 돈 안줘도 잘 되는데, 왜 세차합니까? 만약에 여러분 가정이 예수 믿는 가정이라면, 지금 하나님께서 장마전선을 보내서 예수의 피 장마를 보내서 우리에게 씻어 내리고 있어요. 그렇다면 그런 가정이라면, 적어도 바르게 살려고 착하게 살려고 시도하지 마세요. 오늘 오전, 오후 기쁜 소식 많이 전합니다.ㅎ 여러분! 비 오는데 세차하는 바보가 어디 있습니까? 예? 지가 깨끗하게 하겠다는 말은 이거는 완전히 예수 피 없으니까, 내가 알아서 내가 깨끗하게 해야 내라도 건진다. 이리 되는 겁니다.

지금 아히마아스하고 요나단 둘은 피 세차를 받고 있습니다. 지 죽고 사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야! 이번 기회에 다윗 길 좀 트자, 다윗 없이는 못 산다. 그래 나 죽을게, 하지만 니는 다윗 살아야 돼.’ 이렇게 주님을 증거 하는 데 길을 터야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 가정에는 바로 십자가가 중심 이예요. 내 자리 있지 말고, 십자가가 중심 이예요. 어제 산 TV가 중심이 되지 말고, 십자가가 중심이 돼야 되요.

제가 밖에 나가서 건물에 들어가면 여자 청소부 있잖아요? 여자 청소부가 쉬는 곳, 동대구에도 있어요. 여성 청소부들이 쉬는 곳에 꼭 뭐가 있어요. 공통적으로 밀대가 있어요. 밀대가 그 사람의 직업을 말해주죠. 그러면 우리 가정에 뭐가 있어야 돼요? 밀대 같은 ‘십자가’가 있으면, 우리는 우리가 착 하려고 하는 것 포기했다는 것을 증거 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을 증거 하는 가정이 되는 겁니다. 주님을 위해서 청소부의 밀대라는 십자가를 보여주는, 밀대 때문에 산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나 죽으나 주의 영광을 위해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