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20:14-19 - 지혜로운 여인

작성자지미박|작성시간26.06.09|조회수46 목록 댓글 0

지혜로운 여인
삼하20:14-19


14 요압이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두루 행하여 아벨과 벧마아가와 베림 온 땅에 이르니

15 그 무리도 다 모여 저를 따르더라 이에 저희가 벧마아가 아벨로 가서 세바를 에우고 그 성읍을 향하여 해자 언덕 위에 토성을 쌓고 요압과 함께한 모든 백성이 성벽을 쳐서 헐고자 하더니

16 그 성에서 지혜로운 여인 하나가 외쳐 가로되 들을찌어다 들을찌어다 청컨대 너희는 요압에게 이르기를 이리로 가까이 오라 내가 네게 말하려 하노라 한다 하라

17 요압이 그 여인에게 가까이 가니 여인이 가로되 당신이 요압이니이까 대답하되 그러하다 여인이 저에게 이르되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대답하되 내가 들으리라

18 여인이 말하여 가로되 옛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아벨에 가서 물을 것이라 하고 그 일을 끝내었나이다

19 나는 이스라엘의 화평하고 충성된 자 중 하나이어늘 당신이 이스라엘 가운데 어미 같은 성을 멸하고자 하시는도다 어찌하여 당신이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시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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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읽었던 내용이
뚝 잘라서 된 내용이라서
앞뒤가 흐름이 궁금하죠?

세바란 사람이 다윗에 대항해서
반역을 일으켜서 도망치다가 도망치다가
어느 성에 갔느냐하면,
유서 깊은 아벨이란 성 속에 들어갔습니다.

들어가니까 지금 한창 전쟁 중입니다.
누가 전쟁 중이냐 하면,
세바란 사람이 다윗 쪽을 공격했기 때문에
자연히 다윗 쪽에서 군대가 나와서
세바란 사람을 잡아야 되겠죠? 반란이니까.

주동자를 처단해야 나라가 안정을 찾으니까,
그래서 따라왔는데,
따라온 군대 이름이 요압의 군대입니다.

요압이 지도해서 따라오는,
요압의 군대가
세바를 쫒고자 따라오다 보니까
이 아벨 성까지 포위하게 되었습니다.

회자라는 게 뭐냐 하면,
성 주위에 둘러싸고 있는 작은 시냇가인데,
그것이 있으면 공격을 잘 못하게 됩니다.

근데 그 회자에다가 둔덕(흙)을 쌓아 가지고
높이를 같이 해서
평지대 성과의 싸움이 아니라,
같은 높이의 육지 대 육지 대 싸움으로
바꾸어서 치는 것이
그 당시에 성을 치는 전략이었습니다.

그것을 성을 쌓고 토둔을 쌓고
군사들이 막 쳐들어 올 즈음에,
그 아벨 성에 있는 어떤 여인 하나가 나서서,
“이 유서 깊은 이 성을 왜 당신은 치려합니까?
이 성이 우리 사람의 손으로 일구어 온
역사를 가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친히 주신 거룩한 하나님의 유업인데,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지키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고 있다는
그런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곳인데,
당신은 왜 이렇게 성을, 부서 버리려고 합니까?

총 대장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으니

총대장인 요압이란 장군이 하는 말이
”내가 이성에 감정이 있어서
이 성 자체를 부수려는 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성에 우리가 쫓고 있는 세바란 사람이
잠입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 세바란 사람의 목을 내 놓으면
조용히 물러가겠습니까?

그래서 그 여인이 세바란 사람의 목을 따서 주니까 조용히 헤어졌다 하는 내용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보면,
이야기 전개가 약간 복잡해요.

전쟁이란 것은
적들과의 싸움입니다.

여기에 중간에
세바란 사람하고 요압(다윗)의 싸움이 있었는데, 전쟁이란 적이 하나가 있을 때는 아주 편리합니다.

적이 누군지 분명히 알기 때문에,
여기에 제 3자가 끼어들면,
저 사람이 내가 치고자 하는 적의 편인지,
아니면 나를 도와줄 동지가 되는지,

이것부터 정리 하고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절차가 약간 까다롭게 되는 겁니다.

세바란 사람은
다윗에게 대들기 때문에
이것은 사람 앞에서나 하나님 앞에서나
나쁜 사람이 맞아요.

하나님의 주신
그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했기 때문에
나쁜 사람 맞는데,
그 나쁜 사람 쫓는 쪽이
처음에는 요압이란 한쪽이었는데,
이제는 여인이란 또 다른 쪽이 나타나서
공동적인 적인 세바를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요압과 이 여인이
과연 한 편이냐 하는 문제를
본문은 우리에게 이야기 해주는 겁니다.

적이 같다고 해서
과연 한 편이냐 하는 겁니다.
적은 하나지만 적을 바라보는, 저 사람이
우리의 적이라는 관점이
얼마든지 두 개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얘기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적‘이라는 것을
툭 떨쳐놓고
그것이 왜 적이냐는
서로 다른 두 개의 관점이
나올 수가 있고,

그 두 개의 관점끼리
진짜 제대로 된 적수가
된다는 겁니다.

복잡하죠?

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복잡한 일을 꺼냈냐하면,
인간이 전쟁을 하면서
명분을 자꾸 하나님께 명분을 둡니다.

옛날 유럽이 전쟁을 할 때
서로가 여호와 하나님을 들고 나옵니다.
다 같이 여호와 하나님을 들고 나와요.
여호와 하나님 믿는 사람끼리
싸움을 벌이고 난리가 납니다.

하나님 때문에 전쟁을 한다고,
그런 명분을 가지고 나오는데,
그렇게 명분을 가지고 나오는 놈들끼리
적이 된다면,
하나님에 대해서
일관된 확정된 하나의 개념으로
사람들은 붙잡아 둘 수 없다
이 말입니다.

서로가 대화하다보면 논쟁이 나오는데,
다 같은 개념으로 살면서
서로 다른 관점이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그렇게 하실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관심사는
인간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 배후에
진짜 하나님과 붙어야 될 적이
인간 배후를 감싸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악마입니다.

악마를 끄집어내는 방법이
그 수밖에 없습니다.
배후에 숨어있는 악마를
현실세계로 끄집어내기 위해서
인간은 전쟁을 하게끔 해서
그 전쟁을 보는 관점이
같은 전쟁을 하고
같은 적을 다루면서도,
서로가 전쟁의 목적과 의미가 다르다고
난리를 지기는 겁니다.
사뭇 다른 두 가지를 끄집어내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한국 교회 썩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주장한다고해서 다 정통입니까?

한국교회가 이단이라 주장합니다.
그렇게 주장한다고 해서 다 하나님의 성도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한국교회 썩었다고 할 때,
일종의 전쟁인데
그 전쟁을 해서
얻고자 하는 승리의 내막이 무엇입니까?
승리를 한번 톡 깨보면,
승리란 열매의 내막을 깨면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승리냐?
아니면, 하나님을 믿는 나의 승리냐?
이 말입니다.

이번 전쟁에서 하나님은
세바란 공통된 적을
토끼처럼 숲속에 던져놓고,
거기에다가 두 쪽이
그걸 쫓아가게 만듭니다.

그런데 쫓아가는 양쪽 다
세바란 반란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양쪽 다 승리를 얻었어요.

그런데 승리라고해서
일치된 내용의 승리가 아닙니다.

한 쪽의 요압 쪽의 승리는 뭐냐 하면
나보다 못한 놈은 죽어도 싸다는 것이고,

정화조 청소하러 두 사람이 내려갔다가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살아났다 합니다.

근데 살아났을 때
옆에 죽은 사람을 보고
뭐라 하겠습니까?

나는 살아남을 가치가 있고,
저 사람은 빠져 죽을 운명이기 때문에 죽었다
살아 있는 쪽에서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일종의 생존 자체를
승리로 보는 생각입니다.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악마의 생각입니다.

악마가 퍼트리고 있는 승리라는 개념을
이 지상에 이렇게 퍼트리고 있는 겁니다.
살아있는 게 자랑거리가 아니거든요.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은 것을
실패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순교한다고 자랑거리입니까?

순교는
예수님의 순교로
그걸로 족한 겁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순교를 뜯어먹고
구원받은 겁니다.

내 순교 담보로,
내 목숨 바쳐서 구원 받겠다 하는 것은,
무슨 사고방식이냐 하면,
베드로가 자기의 근원적인 죄를 아직 모를 때,
“내 목숨 담보로 해서 천국 갈렴니다.”
이런 성립될수 없는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오기를 부린 것은
진정한 하나님이 벌이고자 하는
악마의 세계에서 전혀 보탬이 안됩니다.

일상 부부가 가게 동업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꼭 서로 싸워요.
싸우지 않을 경우는 손님 올 때뿐이고,
손님 가고 난 뒤에 또 싸웁니다.

항상 전쟁을 할 때에
배후를 끄집어내는 하나님의 방법이
‘둘 같이 승리할 걸’ 해놓고,

‘그 승리 가운데서 주의하라’
너는 평소에 어느 쪽의 승리를 원했었던가를
우리 보고 선택을 강요하십니다.

죽음 뒤의 상황을
자기가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채로 상상하면
전부 다 엉터리가 되어 버립니다.

그것은 착각이고 잘못된 시나리오입니다.
찬란하게 순교하는 것은
우리한테는 버거운 거예요.

우리한테는 격에 맞지 않습니다.
우리는 찬란한 순교하지 말고
추잡한 순교하든,
더러운 순교하든
천당 가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이렇게 할 거예요.
그렇다면, 이 세상에 생존 말고
다른 순교가 어디 있느냐?
사람이 먹고 사는 것이 다 살기 위함이고,
살았다 하는 것은 복 받았다는 증거로 간주하는
이 세상에서, 그거 말고
또 다른 의미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이 세상에 누가 있단 말인가? 라고 할 때

본문에 ‘이름 없는 여인’ 하나 등장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19절 끝에 보면,
“어미같은 성을 멸하고자 하시는도다
어찌하여 당신이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시나이까”

“하나님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시나이까?”
기업이라고 해서 사업체처럼 생각하는데,
기업이라는 말은
대대로 내려오는
집안이 갖고 있던 그 토대,
재산이라든지,
땅이라든지,
부동산 이라든지,
우리가 지배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무엇을 가지고
기업이라 합니다. 상속이죠.

상속을 받게 되면
우리 아버지한테, 받은 것, 우리 할아버지한테 받은 것,
항상 자기 노동이 거기 들어가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이 벌인 전쟁은 뭐냐 하면,
자기를 지키고자 함이 아니고
내가 지켜야 될 것은 내가 아니라
따로 있음을 보여주는 전쟁을 한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성경에 왜 나와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이 전쟁이라 하는 건
자기 전쟁이기 때문에,
내 생존에 위협이 된다 이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생존의 힘에 위협이 된다면,
가차 없이 공격하게 돼 있어요.

근데 이 여인에게 있어서의 주 관심사는
자기의 생존이 아닙니다.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것을 파괴해 버리면,
하나님보다 더 센 게 등장해 버려요.
그러면 믿음의 대상이 뭐냐 하면,
더 이상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 보다 더 센 걸 믿어야 돼요.

하나님 보다 더 센 게 누굽니까?
바로 자기 자신 밖에 더 있어요?
그렇다면 이것은 배후에 있는 악마의 생각과
같아지죠.

하나님께서는 이번 세바의 전쟁을 통해서
인간들의 본성으로는
도저히 끄집어 낼 수 없는
진실과 진리를 우리에게 펼치고자 하는 겁니다.

쉽게 이야기해 보면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어떤 부자가 창고를 크게 지어놓고
곳간에다가 곡식을 가득 채워놓고 하는 말이,
자기 영혼을 자기에게 두둔하는 거예요.

“내 영혼아, 염려하지 마라,
이제는 여러 개 창고를 쌓아 두었으니까,
편히 먹고 마시자.
즐거워 할 일만 남아 있다.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양산역에 아침 10시즘에 가면,
노인네들이 쭉 늘어선 모습을 쉽게 볼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뭐냐 하면
할일이 없으니
노름이나, 바둑, 장기로 소일하더라는 것입니다.

집도 소유를 안 해요.
그냥 지내면 되어 있고.
그러니까 그 노인들이 차려 입고 그냥 돈 벌겠다는 즐거움으로 사는 거예요.
누구보고 시비나 하고
시장을 현실로 보는 거 같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뭐라 하십니까?
“이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영혼 도로 찾으리라.”

그러면 새벽 지나고 아침 되면
누가 없어지나하면
어제 곳간 지은 내가 없어진 겁니다.
내가 없는 상황에서
너는 평소에 무엇을 위해 살 것이냐를
왜 우리에게 묻지를 않았느냐 이겁니다.

내가 없는 상황이라도
하나님의 승리케 하시는 나를
이때까지 없게 하는 인간도
그동안 살려주면서도
뭔가 찾고자 하는 나만의 승리만이 아니고,
바로 숨어있는 나의 나를 지배했던
나의 악마와의 승리를,
내가 없는 가운데 있는 가운데 상관없이
나를 찾고자 하는 것이
인생의 본래 목적이라는 겁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평소에 놓쳐 버리면,
어리석은 자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죠.

이 어리석은 부자는
일단 자기는 생존했기 때문에
승리로 보는 겁니다.

요압이 세바란 인간을 쫒는 것은
딴 게 아닙니다.

다윗을 위함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나중에 나와요.
내가 이놈을 잡아버리면, 나는 일등공신이 되고,
그동안 모아둔 권력에다가
더 집중적으로 권력이 모으면,

그러면 저 사람 없이는
나라가 안 되는 이 대세가,
자기에게 쏠릴 게 분명합니다.
다윗은 껍데기일 뿐입니다.

사울 시대에 다윗이 골리앗을 죽입니다.
그럴 때 백성들의 민심은 대번에 바뀝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

사울이 1이라면, 다윗은 열이라.
얼마나 듣는 사람 기분 나쁘겠습니까?

사울이 화 낼만 하죠.
그런 소리 하니까
숨어있던 악신이 드러납니다.

악마가 드러나는 겁니다.
우리는 무심코 나의 생존에 보탬이 안 된다고
하나님께 욕을 하면,
누가 격려하고 부추기느냐 하면,
멀리 도망갔던 일곱 귀신이 들어와
“잘 한다. 잘한다.” 하고
우리를 격려합니다.

“그래 니가 하나님 믿고
뭐 얻어 챙긴 거 뭐 있어?

아이고, 넌 결국 하나님 믿어도 실패했을 뿐이잖아. 그렇게 실패할 것 같으면
하나님 믿지 말고 떼려치워.
하나님이나 욕하고 뒤 돌아 가기나 해”
이렇게 한다 이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승리가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어떤 악마의 세력이라고 버틸 수 있다는
하나님의 기업의 온전함과 완성됨을
보여주기 위해서
허접스런 우리를 하나
거기다가 붙여 준 겁니다.

그 붙여 준 것을 ‘이끼’라고 합니다.
돌에 붙어있는 이끼,
누가 와도 관심두지 않고
짓밟아도 할 말 없는 그런 이끼 같은 것,
그래서 우리에게는 이끼가 중요하지,
거기 붙어 있는 우리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 보면,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하나하나 셈을 하지 말라 이 말입니다.
열 명이 있어도 하나, 천명이 있다 해도 하나.
그런 일치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말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에게만
하나님의 유업을 영원토록 이어가십니다.

근데, 우리는 태생이
내 몸 뚱아리 밖에 모르기에,
내 몸 뚱아리 어려우면,
그건 나쁜 나가 되는 거예요.
친구라 해도, 내 잘 도와주면,
나의 훌륭한 동지가 되죠.

목사에게서 복음이 안 나오면
교회에서 나가는게 그나마 잘된 선택입니다.
또한 그것이 자기를 돕는 일이됩니다.

그런데, 복음 안 전해도
한 번 목사는 영원한 목사입니다.
도와주면 그거는 도박하는 것보다
더 나쁜 친구고
나쁜 사람 사깃꾼되는 겁니다.
오늘날 이런 상태에서 머뭇거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줄 모릅니다.
여전히 껍데기 붙잡고 자기를 버릴줄
모르는 겁니다.

요즘 교회에 분란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은데,
대부분 돈, 여자 문제입니다.

그래서 목사 싫어하는 사람은 다 나가고
나머지 남아있는 사람들은
교육관에 모여 예배드리고
본당에다가 교인들 못들어 오도록 용접용접까지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교회 다니는 사람이 걱정돼서
한 가지 지혜를 알려줬
줍니다.
“아무소리 하지 말고 돈만 내지 마라.
분명히 양쪽에서 다 이렇게 말할 겁니다.

돈의 문제 때문에 생긴 거예요.
돈이 있어야 자기 자존심 사니까,
그것을 승리로 본 겁니다.

예수님께서 그 교회 빠져 나가도
사람들은 관심도 없습니다.
예수님 보고 그 교회 나가라 하면,
이 부동산이 보통 부동산이겠어요?

그래서 주님께서 결국은
이 ‘유업’이란 구약의 개념이
신약에 와서 바뀌게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진짜 단단하고
주께서 벌리는 싸움은
그동안 너희가 악마 때문에 몰랐었던
그 귀한 것을,
이제는 성령이 찾아 온 사람에게는
진짜 소중한 것이
나한테 일어났던 것이 아니고,
거저 유업으로 그냥 물려준 것이
제대로 된 덩어리가 온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늘나라가 연결 되어 있는 겁니다.
오늘 밤 죽어도 여러분 천당 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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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9월 26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 20:14-19

(삼하 20:14, 개역) 『요압이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두루 행하여 아벨과 벧마아가와 베림 온 땅에 이르니 그 무리도 다 모여 저를 따르더라』

(삼하 20:15, 개역) 『이에 저희가 벧마아가 아벨로 가서 세바를 에우고 그 성읍을 향하여 해자 언덕 위에 토성을 쌓고 요압과 함께한 모든 백성이 성벽을 쳐서 헐고자 하더니』

(삼하 20:16, 개역) 『그 성에서 지혜로운 여인 하나가 외쳐 가로되 들을지어다 들을지어다 청컨대 너희는 요압에게 이르기를 이리로 가까이 오라 내가 네게 말하려 하노라 한다 하라』

(삼하 20:17, 개역) 『요압이 그 여인에게 가까이 가니 여인이 가로되 당신이 요압이니이까 대답하되 그러하다 여인이 저에게 이르되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대답하되 내가 들으리라』

(삼하 20:18, 개역) 『여인이 말하여 가로되 옛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아벨에 가서 물을 것이라 하고 그 일을 끝내었나이다』

(삼하 20:19, 개역) 『나는 이스라엘의 화평하고 충성된 자 중 하나이어늘 당신이 이스라엘 가운데 어미 같은 성을 멸하고자 하시는도다 어찌하여 당신이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시나이까』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는 의미는 성경에 담겨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력으로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인간을 둘러싼 검은 기운들을 계시로 인하여 인간쪽으로 집중되도록 몰아붙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을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서 극도로 민감한 반감을 갖게 됩니다.

‘복음에 대항하는 피조물’로 만들어내므로서 그 실존 배후에 주목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게 해서 도출된 악은 곧 ‘여자의 후손’과 최후의 전쟁을 책임지는 숨어있는 책임자로서 그동안 숨어서 활약해 왔음을 역사 전면에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인간 위주로 생각하는 선과 악은 진정한 선과 악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 선과 악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하신 일들이 계속 오해받아 왔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일어나는 일도 예외가 아닙니다. 한 여인이 쳐다보는 것과 요압이 쳐다보다는 것이 상호 다릅니다. 그러면서도 결과에 있어서는 마치 원하는 바가 같은 것으로 오해되기 십상인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것은 ‘전쟁’에 있어 일치되지 않는 의도들이 현실에서는 같은 승리로 인식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아벨성에 이름 없는 한 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인은 여호와께서 주신 기업을 살리기 위해 세바의 머리를 베어 요압 앞에 던집니다. 이것으로 여호와께서 이 여인에게 주신 기업은 아무 일이 없게 됩니다.

이 여인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핵심과 관련된 일임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과 상관없는 전쟁이 있음도 아울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같은 원칙은 흔히들 ‘산다’라는 말에도 해당됩니다.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산다’라고 언급할 수 있는 겁니까?

이 하늘 높은 가을날에 진정 ‘산다’는 것이 어떤 경우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성묘하고 벌초하고 등산가고 주말에 산과 들에서 가을의 정취를 맛보고, 농부들은 가을 추수에 분주하고, 수험생들은 시험에 대비해서 그동안 익혔던 내용들을 다시금 집중해서 총정리하는 급박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진정 ‘산다’에 해당되는 경우입니까? 아닙니다.

이런 세속적인 삶도 역시 ‘전쟁’이라는 양상 속으로 흡수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그렇게 살지 않는 자들도 있음을 발췌하는 계기가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름모를 여인에게 있어 ‘산다’는 것의 의미를 우리에게 제대로 알려줍니다. 여호와께서 은혜로 주셨다는 그 사실을 지워버리는 그 어떤 것들과의 밀릴 수 없다는 긴장도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의 목숨 지키는 긴장감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을 지켜야 하는 긴장감 말입니다.

세상은 이처럼 늘 ‘하나님께서 그저 주셨다’는 사실에 대해서 시비를 걸면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납니다. 세상을 상식선에서 보자는 겁니다. 별나게 살면 피곤하다는 겁니다. 즉 너의 삶에 훼방되고 방해되고 있는 것을 내놓고 삭제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말하는 ‘삶’은 생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주신 것들을, 은혜가 아니라 본인들의 행함으로 얻은 보상이라는 차원에서 주입된 것을 방출하는 것이 진정한 ‘삶’을 지키는 모습입니다.

말씀을 지킨다든지, 율법을 지킨다든지 하는 것은 그 본래적 가치를 사수해서 잊지 않고 유지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이 남기신 약속의 가치는 자신의 삶이나 자신의 목숨을 잃는다 할지라도 지킬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 진정 ‘성도의 삶’입니다. 촌에서 사과 과수 농사를 하면서 보여줄 수 있는 진정한 ‘삶’이란 바로 과수농사가 잘되고 못되고 와는 상관없이 오늘밤도 내 영혼 데려가면 모든 것이 결국 나의 것이 아님이 드러난다는 겁니다. 이런 심정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고마워하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유지하는데 있습니다.

사람의 행함에 대해서 요압이 그 속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도망치 세바를 잡아들이는 것이 요압의 명성을 쌓고 그것으로 인하여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 요압 장군의 삶에 합당한 일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소유하므로서 사는 삶’을 뜻합니다.

세바가 요압쪽과 그리고 이 여인이 거할 성쪽, 모두에게 위험한 존재가 되는 이유는, 소유성에 대한 위협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요압 장군쪽에서는, 요압 본인이 그동안 쌓아올린 명성과 권력을 넘어뜨릴 위험을 세바가 갖고 있고, 뿐만 아니라 이름 모를 여인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그저 주심’을 인간적 소유의 대상으로 변질되게 만드는 위험을 세바가 역시 보여 줄 수가 있습니다.

요압과 여인 사이에는 세바라는 공통의 적은, 각각 양쪽에게 다 수용할 수 없는 존재가 됩니다. 세바의 죽음을 여인 쪽에서 이해하면 하나님의 저주가 주어진 결과요, 요압쪽에서 이해하는 요압보다 못한 존재라는 죽어야 되는 인물이라는 것을 대외적 천명한 셈이 됩니다. 즉 요압이 이번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은 마치 그만큼 이 땅에서 더 오래 살 자격자가 되는 양 오해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성도는 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즉 성도 자체가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에 의하면 기업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기 자신이 곧 하나님께서 거저 구원해내신 기업인 것을 나타내면서 이 세상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요압 꼴이 됩니다. 오로지 자신의 노고와 노력으로 자신이 이 땅에서 살 가치가 있다고 우기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면 모두 복음을 훼방하기 위해 투입된 것들입니다. 그 중에 제일 위험한 나쁜 요소는, ‘내 힘으로 얻었다’고 여기는 발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인이 세바를 치면서 요압을 동원시키신 겁니다. 이 여인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로 돌아가기 위해서 말입니다.

누가복음 10:17-21에 보면,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어리석은 부자는 자신이 없을 때도 하나님은 무슨 전쟁을 벌리고 있는 가를 자신의 삶의 의미와 목적으로 삼지 않았다는 점에서 어리석은 자입니다. 갈라디아서 3:29에 보면,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에 비하면 우리는 거기에 붙어있는 이끼같은 존재입니다. 여인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귀한 유산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한 유산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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