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18:5 - 계속되는 내분

작성자지미박|작성시간26.06.11|조회수39 목록 댓글 0

계속되는 내분
삼하18:5

(삼하 18:5, 개역) 『왕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 하니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모든 군장에게 명령할 때에 백성들이 다 들으니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압살롬이라는
막강한 신진 세력을 쳐부수기 위해서
다윗은 진용을 갖추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윗은
‘너그럽게 대하라’라는
특별한 지시를 내립니다.

전쟁이란 일단 모든 동정심을 접어두고
시작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전쟁에 인간미가 끼어드는 것은
언어도단이요, 사치일 것입니다.

전쟁에 있어 여유를 부리게 되면
고조된 긴장감을
떨어뜨릴 수도 있는 위험한 요소가 됩니다.

장수에 해당되는 신하들은
이런 다윗의 지시는
사적인 부탁처럼 여기고
건성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하지만 이 장수들은
다윗언약이 지니고 있는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보기에
압살롬이 지닌
다윗을 반대하는 정서는
바로 다윗 진영 쪽에도 가득합니다.

마치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주여, 주여, 우리가 권능을 행사하고
귀신마저 추방시키는 기적을 행했습니다”
고 나오더라도
예수님은 그들 편이 아니라는 것과 같습니다.

다윗편에 속한 압살롬 성향을
드러내는데는
바로 이 “너그럽게 대하라”는
한마디 지시로 충분합니다.

장수들은 호시탐탐 권력을 노립니다.
즉 ‘누구 누구의 사람’으로 평생 남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는
생리에 맞지 않는 일일 것입니다.

세상의 권력이란
겉으로는 비록 왕,
즉 ‘우리들의 지도자’를 원하는 것 같지만
실은 그 권력자를 잘 이용해서
그 기회로 자신의 권력을 키워나가겠다는
심보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이 “너그럽게 대하라”는 말은
진정한 의미를 모르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다윗의 장수들은
결코 ‘자신을 위한 전쟁’을
한시로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의 적이라고 할 수 있는
압살롬의 의식도 동일합니다.

다윗의 입장에서 이런 육적인 요인들이
굳게 굳어있는것 처럼
계속 일어나는 것이
본디 다윗언약이 지닌
내부적 본질이라고 보고 있는 겁니다.

악한 것들이 들추어져서
위로 올라와 표면화되는 것이
이 세상의 양상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점은
바로 이런 변화들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다윗 언약의 취지를 깔아두면서 이스라엘을 이끄시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신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곧 ‘숨어계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늘 전면에 나서시는 것이 아니라
다윗 언약에 준한 왕을 앞장 세우시고는
숨어계시는 방식으로
자기 백성을 다스리는 겁니다.

잠언 25:2에 보면,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다윗 언약에 의한 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구체화시켜
나가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일반인들이나 장수들은
이 사실에 대해서 어두운 겁니다.

그저 코 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자신의 자존심을 다 걸고
행동으로 보여줄 따름입니다.

이러한 시선 높이의 차이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요?

다윗언약은 이러한 장수들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 높은 곳에서 작용하는 그 원칙이란
곧 왕이란
멜기세덱의 계열이라는 원칙을
따르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시편 110:4-5에 보면,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그의 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사장은 서열에 의해서
업무가 진행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멜기세덱이라는 분은
왕이면서도 제사장입니다.
당연히 장차 오실 하나님의 아들을
닮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다윗왕의 입에서 나오는 발언들이
결국 제사장으로서의 왕,
혹은 왕으로서의 제사장 역할을
수행하는 차원에서
나오는 발언들이 됩니다.

이 원칙에 의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도 움직이기 때문에
다윗 언약에 속한 왕들이 치뤄야 전쟁은
다름 아닌 바로
이런 원칙을 준수하는 전쟁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전쟁하는 민족입니다.
언약으로서 비언약을 척결하는 임무를 띤
전쟁입니다.

그 중심에 본문에서는
다윗이 있는 겁니다.

간부급이라고 할 수 있는 요압은
이러한 상황을 몰랐습니다.

그는 다윗왕을 대하면서
그저 왕이라는 명칭을 가진
자기 시대의 최고 권세자라는 견해만
유지하고 있습니다.

왕을 존경하는 것조차도
자신의 권력욕을 감추기 위한 용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바로 상대하지 않고
왕을 통해서 상대해야 하는가 하는
그 심정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참된 하나님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려면
적어도 그 시선의 높이가
멜기세덱의 자리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자리에서는
멀리 아담까지도 보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담을 다루는
그 원칙과 방침이
그 이후의 모든 아담의 세계에
차질없이 전개된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만약에 오늘날 그 아담의 물결에
이미 휩쓸려있음을 안다면
다음과 같은 식으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누구시기에
왜 저를 이런 인생을 살게 하십니까?”라는
물음 말입니다.

만약에 이런 시선의 높이에 이르지 못하고
지상으로 낮추어져 있다면
다음과 같이 생활 할 것입니다.

즉 “나의 인생은 내가 만들어가는 것야.
나는 그 누구와도 다른 인간이야”라고 말입니다.

이런 의식은
곧 자립성을 행사하기 위해
당연히 힘과 힘을 더 붙여야 할 것을
요구하게 됩니다.

즉 일어나는 모든 사태가
자신에게 권력을 이양하기 위한 준비 단계로
이해하게 됩니다.

사무엘하 18:10-11에 보면,
“한 사람이 보고 요압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보니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 달렸더이다
요압이 그 고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보고 어찌하여 당장에 쳐서
땅에 떨어뜨리지 아니하였느뇨
내가 네게 은 열 개와 띠 하나를
주었으리라”고 나옵니다.

그만큼 왕의 지시를 무시하라는 겁니다.
부하 입장에서
바로 위 고참이 제일 무서운 법입니다.

그래서 간부급이 과감하게
압살롬 시신에 창을 꽂자
그 부하 10명이 지체하지 않고 합세합니다.

사무엘하 18:15에 보면,
“요압의 병기를 맡은 소년 열이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 죽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산다는 것은
이처럼 높이 보시는 하나님의 안목이 아니라
그저 자기 생존 차원의 안목 뿐입니다.

이로서 우리는 아담이 벌려놓은
악의 요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겁니다.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너그러움’ 뿐입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040강-삼하18장5-(계속되는내분)-2sa100801

하나님의 말씀 사무엘하 18장 5절에서 20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502페이지입니다.

사무엘하 18:5

“왕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 하니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모든 군장에게 명령할 때에 백성들이 다 들으니라 ” 아멘


짧습니다. 한 줄 딱 읽었는데, 여기 사람 여러 명 나오면, 또 목사 입장에서 하나, 하나 또 설명해 주어야 하니까 힘듭니다. 알아서 성경 딱 읽어 와가지고, 아, 이러면 알면 되는데, 또 한국사람 아닌 사람 등장하거든요. 왕은 다윗 왕은 들은 풍월이 있어서 대충 골리앗을 이긴 사람, 그쯤은 아는데, 요압은 누구고, 아비새, 잇대는 누구냐? 간부급입니다. 간부급. 소년 압살롬은 누구냐? 이는 김정일의 아들 김정은이거든요. 여기에 아버지의 권한을 물리치고 자기가 이스라엘 왕으로 그 자리를 뺏은 사람이 압살롬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이렇게 설명하면, ‘목사님, 오늘 성경이 쉽네요.’ ‘그래요?’ ‘압살롬은 왕을 물리치고 지가 차지했으니까, 그럼 간부급들, 요압, 아비새, 잇대는 고 못된 싸가지가 없는 아들, 압살롬을 쳐부수면 하나님의 뜻대로 처리한 게 되니까, 문제 수월하네요.’ 이래 생각하시겠죠. 근데 그게 아니라 그 반대입니다. 왜냐하면, 압살롬이 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윗의 간부들이 다 압살롬 이예요.

사람들은 자기 적이 바깥에 있다고 여기지만, 그 적을 하나님 관점이 아니라 자기 이익관점에서 보게 되면 자기가 곧 그 사람이고 자기가 그 사람이 되는 거예요. 내가 그 사람을 치면, 치는 그것으로 잘난 것이 아니고, 내가 위대해지는 것이 아니고, 똑같이 하나님께 우리가 침을 당합니다.

압살롬이 나쁜 줄 안다고 해서 그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 사람이 압살롬 자리에 올라가면, 똑같이 압살롬처럼 행세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둘 다 다 문제다. 압살롬도 문제다. 너도 문제다 하는 것으로 다윗은 무슨 말을 제안하느냐 하면, 여기 5절에 보면, “나를 위하여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 너그러이 대접하라, 관대하게 인자하게 너그러이 대접하라는 말을 다윗이 이야기하죠. ‘쳐서 죽여라’ 이게 아니라 ‘너그럽게 대접하라‘ ’대우하라.‘ 이게 간부급들에게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지금 전쟁 중이지, 동창회 하는 게 아니잖아요? 화수회, 하고 놀러온 게 아니잖아요? 적을 죽여야 내가 살고, 적이 살면 내가 죽는 판에, ‘너그럽게 대하라.’ 너그럽게 대하면 전쟁 꼴이 좋겠다. 우리 월드컵 할 때 너그럽게 대하든가요? 뭐 박주영이는 너그럽게 대해 한 꼴 쳐가지고 자살골을 넣어줬지만...ㅎ 그래 박주영이처럼 믿음 좋고 기도 잘하는 사람 없잖아요? 전부 다 악착같이 한 골 넣으려 하잖아요?


너그럽게 대하라니....??? 이게 하나의 키워드(Key Word), 중요한 핵심 포인트가 되는 겁니다. 다윗이 전쟁을 보는 관점하고, 고 밑에 간부급들이 노리는 것하고, 이게 차원이 달라요. 간부급들은 이렇습니다. ‘어디 감히 우리가 소지하고 있는 권력을 넘봐? 이 압살롬아!! 내 권력을 침범했다는 이유 때문에 저쪽 권력은 힘 대 힘의 싸움인 반면에, 다윗의 입장에서는 뭐냐 하면, ’아이고, 철딱서니 없는 것, 기껏 내 아들이면서 나한테 배운 게 그래 힘이 있어야 성공한다는 그깟 것을 배웠냐? 아이고, disappoint(실망스럽다), 나는 니가 그래 나오니 실망스럽다. 하지만 여러분 간부급들이여! 똑같은 전쳘을 밟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뭘 통해서? 이번 전쟁을 통해서...

우리가 저렇게 힘밖에 모르는 철딱서니 없는 저 압살롬과 똑같이 철딱서니 없어버리면 우린 뭐가 됩니까? 너그럽게 대하므로 말미암아 이번 전쟁은 이방나라의 전쟁이 아니라 권력과 권력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감추어진 자비가 전쟁을 통해서 드러나는 전쟁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 뜻으로 설명을 한 거예요.

제가 이렇게 설명했지만, 제 앞에서 간부급들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습니다. 아무리 다윗이 그런 이야기를 해도, 이 간부급들한테는 다윗이 ‘니마저 나의 이용물이야. 그런겁니다. 왕이라고 존경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왕에게 권력이 모이기 때문에, 그 권력이 탐이 나서 입 다물고 가만히 있는 거예요. 나중에 그 권력이 와해 됐을 때는 요압이나 간부급들이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권력을 왜 갖게 되는가? 설이 두 가지가 있어요. 요게 어려운데, 상식이지만 어려운데, 그 하나는 뭐냐 하면, 그 밑의 사람이 십시일반 권력을 모아져서 모으다 보니까 하나의 권력이 됐다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돈이 많은 것은 십시일반 조금씩 내어 모으다 보니까 큰 돈 갖은 것처럼, 권력이라 하는 것은 밑에 있는 사람들이 ‘당신 대장하소, 대장하소, 대장하소, 하여 자신의 갖고 있는 권력들을 일부를 양도해 주니까 그 양도해 준 권력들을 모으다 보니까 웬 떡인가, 어느새 자기가 대장질 하고 있더라. 이렇게 지도자가 된다는 설이 있고요.


둘 중에 어느 것이 맞나 생각해 보세요. 그게 ‘리더’라 하는 거예요. 밑을 받춰 줘야 되는구나 하는 것하고, 두 번째는 하늘에서 주니까 사람들이 ‘저런 경우가 다 있노? 저건 보통 내기가 아니다. 저 사람에게 만약에 우리가 그 사람을 거부하는 것은, 신에게 거부하는 것이다. 무조건 엎드리세, 복종하세, 찬양하세.’ 이래 가지고 어떤 영발, 카리스마, 그런 것들 보고 신의 기운이 있어야 저런 일을 할 수 있다는 태도를 밑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자진해서 그 기의 힘에 눌려서 왕으로 삼는 것. 두 종류가 있습니다.

처음에 이야기한 십시일반 자기의 권한을 양도해서 모았던 권력이 서양의 제국입니다. 서양의 제국은 왕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평소에는 귀족들이 똑같이 있다가 누가 ‘전쟁이다’ 하고 일어나면, ‘ 이번에 김 씨 집안에서 전쟁할 동안 왕 하소.’ 이래 가지고 왕 시켜주고, 전쟁에서 계속 승리하면, ‘아이고, 당신 재주 있는데 계속 하소.’ 이러고 전쟁이 패배하면, ‘나와 이리 나와, 내가 해야 되겠어.’ 돌아가며 하는 것. 고게 서양 제국인 반면에, 이야기가 점점 깊이가고 헷갈리고 어렵습니다. 앞에 무슨 이야기 했나 다 잊어버렸죠?

두 번째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옛날 이스라엘 성경에 나오는, 그리고 동양의 중국들이 뭐냐, 특히 이집트가 뭐냐 하면, 바로 신의 아들 이예요. 신의 아들이 우리 이 나라를 돌보기 위해서 하나님이 특별히 은총을 주셔가지고, 하나님의 기운이 살아있기 때문에, 만약에 왕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신의 말에 어긋나기 때문에 우리는 왕한테 목 달아나도 우린 싸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고만 어른의 가문대로 당신 집안 자체가 신의 가문이니까 아버지가 왕 되면 아들도 왕 되고, 또 아들이 왕 되고 ‘왕 계속 하소’. 이렇게 된 거예요.

그래서 우리나라 옛날 역사에서는 자기 아버지가 왕 되면 아들이 자동적으로 왕 되지, 영의정이 ‘나도 왕 됩시다.’ 이런 법은 있을 수가 없다 말이죠. ‘니만 왕이냐.’ 하고 왕의 가문도 아닌 게 나서서 반란했던 영화가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영화예요. 니만 왕 다 해먹고 우리는 인간도 아니냐. 해서 다 잘리고.

여러분, 어느 쪽이 더 인간적인 권력이 나아보입니까? 얼른 보면 서양 쪽, 우리의 십시일반 권력을 양도해서 우리가 당신을 왕으로 인정해 줄 때만 왕 되는 것이 굉장히 인기 있게 사는 것 같지만, 동양에서의 왕은 동봉된 허수아비예요. 허수아비라 해서 ‘내 니 왕 해 줄테니까 모든 실지 권력은 영의정 내한테 다 양보해라. 해가지고 해 먹는 놈은 다 해 먹어요. 이 세상에서는 하는 게 없어요.

그래서 성경의 사무엘하 18장에서 뭐라 하느냐 하면, 왕이 되게 되면, 왕이 만약에 잘 되면, 신이 잘 도와줬기 때문에 우리나라도 덩달아 잘 되고, 왕이 뭔가 못되면, 신이 지금 우리를 모해하고 있는 거니까 어쨌든 간에 왕에게 힘을 모아줘서 왕이 잘도록 해주는 것이 신하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라고 입에 발린 소리를 해대는 거예요.

그런 소리를 했기 때문에, ‘왕이여, 내가 간부급으로서 권력을 유지하는데 왕이 후원해 주소. 하는 서로서로 쌍방 간에 거래하는 공무가 있어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사회적 문제가
‘목사님,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뜻의 왕은 뭡니까?’ 고래 놓고, 거기에 대해서 설명을 할게요.

성경의 뜻은 아주 멋지게 나온 대목이 있어요. 잠언서 25장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얼른 감이 안 오죠? 성경 자체가 그래요.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자존심이요. 일을 숨기는 것은 왕의 자존심이라. 어디를 왕을 건드려?? 이런 뜻이라 말이죠. 하나님께서 암행어사 용도로서 왕을 이 땅에 우리에게 보내 주셨다. 는 것이 다윗 언약에 속한 하나님이 진짜 지정한 왕의 해야 될 일은 잠언서 25장 2절처럼 하나님은 ‘내가 숨어 있을게, 일은요? ’ 일은 왕인 니가 알아서 해라.‘ 요겁니다.

일을 숨기는 것이 하나님의 주특기요. 숨어 있는 일을 구체화 시키는 것은 왕이 해야 할 주특기라 이 말입니다. 그래서 다윗 언약, 다윗 언약이라 하면 어려우니까, 이스라엘에서 왕의 말을 안 듣는 것은 곧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도전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백성들이 죄를 지었잖아요? 그러면 왕이 백성들을 대신해서 제사 드리면 백성들에게 징벌이 취소가 됩니다. 그것이 다윗이 마지막 한 일이예요. 다윗이 타작마당에서 제사 할 때, 다윗이 지가 실수해가지고 숫자 세놓고(인구조사) 백성들이 7만 명이나 많이 죽었거든요. 죽고 나서 왕이 나서서 백성들을 위해서 죄를 대신해서 제사를 드리니까, ‘스톱’ 천사야 칼을 거두어라.‘ 이랬거든요. 왕이 없으면 왕하고 내통하는 것은 하나님이지, 부하가 나서서 ’하나님 나하고 상대합시다. 우리 대화합시다.‘ 이럴 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구조예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통치하는 구조입니다. 그걸로 굳어졌어요.

그래서 그런 왕을 가지고 기름 부은 자,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장차 오실 그리스도도 고런 틀 속에서 고거 틀을 깨는 게 아니고, 고 틀을 유지하면서, ‘나는 이 땅에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셨다.’ 는 거예요.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게 얼마나 믿음 있는 것인지, 그걸 보고 예수님은 깜짝 놀랐어요. 보통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시면 자기가 하나님께 직접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우회를 한다고요. 직접 나아갈 때는 잘난 멋에 나아가지만, 우회로 나아갈 때는 ’주여 너그럽게 봐 주소서,(아까 나왔잖아요) 주여 관대하게 용서 하소서, 불쌍히 여기옵소서.‘ 왜? ’왕은 우리의 제사장이니까.‘

이왕 어려운 거 더 어렵게 이야기 해 봅시다. 다윗의 왕이라 할 때는 왕이 제사하지만, 다윗의 언약 위에는 멜기세덱 계열이 있어요. 멜기세덱 계열로 올라가면, 어디까지 보이느냐 하면, 저 아담까지 보여요. 다윗 안에만 있으면 다윗 레벨 수준에 있으면, 다윗 그 시대만 보이지만, 멜기세덱까지 올라가 버리면, 이 세상 인간들은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 아담 한 사람한테 속해 버려요. 저 지평선에 아담이 보여요. 그럼 이걸 전개시키면 보통 사람들은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산다. 간섭 하지 마. 내가 원하는 대로 산다. 이래 하지만, 성도는 뭐냐 하면, 멜기세덱 수위가 20층 아파트까지 쭉 높은 데까지 올라가면, ’주여, 내가 왜 이 짓을 하며 살아야 됩니까?

쉽게 말하면 ‘나는 오늘 라면 먹고 싶다, 라면 먹고 싶다. 한다 말이죠. 오 용익 목사님이 애들한테 주부 노릇을 충실히 하기 위해서 복날 삼계탕을 2시간 동안 끓였답니다. 잘 끓여서(저는 못해요) 최선의 노력을 다했는데, 삼계탕을 보더니, ’아빠 나 라면 먹을래요. 컵라면.‘ 2시간 동안 더운데 생고생하여 삼계탕 끓였는데, 주부도 못하는 어려운 요리를 했는데, 아(아이)는 맛없다고 컵라면 먹는다고 했을 때, 아빠의 자비를 볼 때 얼마나 섭섭한 거예요? 그러니까 아들이 이래야 돼요. ’아버지, 나는 내가 먹고 싶은 컵라면 먹고 싶은데, 왜 삼계탕을 끓이시나이까? 라고 묻는다는 것이 아버지의 존재를 인정하는 거예요.

성도가 됐으면, ‘하나님, 미안합니다만 내 맘대로 산다,’ 이건 성도가 아니고, ‘하나님, 오늘은 왜 이 일을 하고, 내일은 또 뭘 하고 왜 나는 이런 식으로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까?’ 늘 물어가면서 동행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렇다면 다윗이 ‘얘들아, 간부급들아,’ 예!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하라 하면, 예, 할 것이 아니라 왜, 너그럽게 합니까? 묻는 것이 진짜 멜기세덱의 시선을 가지고 전부를 보면서 물어야 되는데, ‘알았습니다.’ 해놓고 그담에 어떻게 나가느냐 하느냐, 10절에 봅시다.

“한 사람이 보고 요압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보니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 달렸더라.” 달렸다고 돼 있는데요. 제가 넣는다면 대롱대롱 달렸더라. 대롱대롱. 왜냐하면 압살롬의 머리가 머리숱이 많은 모양 이예요. 머리숱이 남 보기에는 장점이지만, 장애요소예요. 도망가다가 머리숱이 많아가지고 턱 걸려가지고 머리가 감겨가지고 꼼짝달싹 못하는 거예요. 마치 머리 긴 여자가 세탁기나 어디에 머리 감겨가지고 같이 들어가는 것처럼....

머리가 많아가지고 나무에 달려가지고 오뎅처럼 달랑 달린 거예요. 어린애도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안 죽이는 이유가 다윗이 너그럽게 대하리. 어떤 일이 있어도 너그럽게 대하리. 마치 왕이 알고 예언한 것처럼, 마치 사태를 아는 것처럼, 너그럽게 대하리. 이렇게 했는데, 요압은 ‘니 딴 데 가지마라 쉿, ’ 해놓고 찔러 죽였어요. 왜냐하면 자기 동생의 사적인 복수심이 여기서 가미된 겁니다.

하나님의 너그럽게 대하란 말은 압살롬의 말의 적이 아니고, 그 다윗의 너그럽게 대하란 말을 이해 못하는 내가 바로 다윗 언약 안에서 멜기세덱의 적이 된다는 것을 요압은 몰랐던 겁니다. 너그럽게 대하는 말을 동의를 못한 것은 은연중에 ‘ 내가 다윗 너 집안한테 언제까지 내가 씨, 느들 쫑인 줄 알아? 나도 내가 클 때까지 큰다는 권력에 대한 야심이 있었던 거예요.

그것을 다윗이 모를 리가 있고, 하나님이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압살롬의 반란이 일어난 것은 압살롬도 문제지만, 압살롬 같은 인간들이 다윗진영에 ‘다윗님! 다윗님! 다윗님! 요새 말로, 주여! 주여! 주여! 하면서 우리 안에 있는 거예요. 주여, 주여 한다고 다 천국 갈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만한 정도로 우리가 죄인 중에 괴수란 것을 모르면 그 사람은 신자 아닙니다.

신자가 뭡니까? 십자가에 부딪쳐서 깨져야 신자 아닙니까? 지 행함이 십자가에서 부딪쳐야 되는데, 십자가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가 자기 행함이 되어 버렸어요. 나도 믿는다. 나도 복음 좋아한다. 이게 자기 하나의 권력이 되고 말았어요. 제가 어느 글에 썼듯이 ‘저는요 십자가 피만 알고 난 뒤에 나는 목사 안 돼도 괜찮아요. 목사 무시해요. 이래 나와야 피를 아는 사람이고 은혜를 아는 사람인데, 나도 씨! 복음 좋아한다. 씨! 이래 나오면 그건 하나의 지가 복음을 통해서 장사 해먹겠다는 것밖에 안돼요. 점포 하나 만들어서 지가 권력을 모은 거예요. 그게 무슨 새 언약 앞에 십자가 앞에 놓여진 사람의 모습입니까? 압살롬이지.

그러니까 너그럽게 대하란 한마디가 세상을 멜기세덱 반열에서 저 위쪽에 있는 시선에서 아담과 하나님 사이에 어떤 계약과 어떤 약속이 있었는가를 끄집어 땡겨서, 21세기에 8월 1일 날 우리에게 모조리 전부다 멜기세덱의 반차로 다 적용시켜 보니까, 고 나오는 표창 안에 배달 된 게 뭐냐면, 너그럽게 대하라. 너그럽게 대하면 다 구원 받는다는 말이 아니고, 너그럽게 대하란 말을 듣고, 거기에 대해서 그 의중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다윗 편이라고 우겨도 그거는 말짱 거짓말이다. 사실은 그런 걸 통해서 또 하나의 복음을 하나의 상품화 시킨 권력을 추구한 것밖에 안돼요.

그래서 14절에 보면, “요압이 가로되 나는 너와 같이 지체할 수 없다 하고 손에 작은 창 셋을 가지고 가서 상수리나무 가운데서 아직 살아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니 요압의 병기를 맡은 소년 열이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 죽이니라.” 거기 간부급들이 죽이니까, 죽여도 되는 줄 알고 그제서 용기를 내서 다윗의 너그럽게 대하라는 말을 잊어버리고, 이 자리에서는 ‘우리 고참이 왕이다’ 하고 다 쫓아서 한 거예요.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요 장면 있잖아요. 분명히 지시가 ‘너그럽게 대하라’ ‘생포해 가 오너라. 이리 이야기 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위의 고참이 찔러 죽일 때, 바로 위의 고참이 무섭지, 멀리 있는 고참은, 대통령 안 무섭거든요. 그래서 같이 합세해서 했던 사람들, 그 사람이 바로 군에 간 모든 사람들, 군에 간 전도사, 목사, 모든 군대 상황 속에서 시집간 며느리 모두가 띠 띠고 원치 않는 나쁜 짓을 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란 말이죠. 제 말은.

그러니까 다윗 언약의 너그럽게 대하란 말을 순종해서 구원 아무도 못 받습니다. 노아가 방주 만들어서 구원 받은 것이 아니고, 노아가 구원 받은 것은 은혜를 입어서 구원 받지 방주 만들어서 구원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상황 속에서 아무리 ‘주님! 주님! 하지만, 실제로 행동하는 것은 얼마나 나보다 더 무서운 권력, 나를 쥐고 너는 내 손에 달려있다고 하는 사람이 무서운 거예요. 멀리 있는 예수님은 안 무서워요. 저 멀리 있는 멜기세덱은 안 무서워요. 바로 코앞에 있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겁나는 겁니다.

그런 상황 속에 우리가 놓여 있다는 것은 이 섬김이 바로 니가 바로 압살롬이라고 알려주는 겁니다. 이 압살롬 속에서 이 전체가 십자가로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거예요. 주여, 예 역시 우리가 오늘도 죄인 맞습니다. 이 육신이 있는 한 어쩔 수 없군요. 하지만 진짜 관대히 여기시고 너그러이 여기시고 그 인자를 우리가 외면하지 않게 하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고백입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