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 보호
삼하18:1-4
(삼하 18:1, 개역) 『이에 다윗이 그 함께한 백성을 계수하고 천부장과 백부장을 그 위에 세우고』
(삼하 18:2, 개역) 『그 백성을 내어 보낼새 삼분지 일은 요압의 수하에 삼분지 일은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동생 아비새의 수하에 붙이고 삼분지 일은 가드 사람 잇대의 수하에 붙이고 백성에게 이르되 나도 반드시 너희와 함께 나가리라』
(삼하 18:3, 개역) 『백성들이 가로되 왕은 나가지 마소서 우리가 도망할지라도 저희는 우리에게 주의하지 아니할 터이요 우리가 절반이나 죽을지라도 우리에게 주의하지 아니할 터이라 왕은 우리 만 명보다 중하시오니 왕은 성에 계시다가 우리를 도우심이 좋으니이다』
(삼하 18:4, 개역) 『왕이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가 선히 여기는 대로 내가 행하리라 하고 문 곁에 서매 모든 백성이 백 명씩 천 명씩 대를 지어 나가는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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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왕 중심으로
전열이 정비됩니다.
두겹 세겹으로
군사들이 배치가 되어 있지만,
그 중앙에는 다윗만 있습니다.
왜 다윗만 중앙에 위치해야 합니까?
오늘날 현대인들의 의식으로서
이러한 위치 배정은
충분히 불만의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옛날의 국가 형태에
야유를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일개 부속품으로 부리고
왕만 사람 대우받았다는 겁니다.
혹은 일반인들이 사람대우 받았다면
왕만 홀로 신으로 대우받았기에
이는 전적으로
비인격적이고 불평등한 사회 구조라는 겁니다.
영 현대인들의 취향에 맞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르는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언약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뜻을 드러내는데 있어
기존의 인간들의 본성에
부합하도록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쉽게나 어렵게도
어쨌든 믿을 수 있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언약으로만 드러내시고
그 언약을 믿을 수 있는 힘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가능토록 했습니다.
따라서 은혜가 물러나면
하나님은 언약을 도저히 믿기지 않도록
조치해놓은 것입니다.
곧 다윗 시대의 사람들은
다윗을 그들 가운데 박아놓은 것이
하나님 방식의 언약전달 방식입니다.
그래서 언약중심의 사람으로 인해서
왕을 잘 만나면 백성들이 편하고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과연 그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 정신을 알았느냐
하는 점입니다.
일단 겉으로 보면 백성들은
다윗을 아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3절에 보면,
“왕은 우리 만 명보다 중하시오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왕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과연 다윗을 중심에 심어놓으신
진정한 언약적 취지에 부합된
하나님의 인식일까요?
아니면 단지 눈에 보이는 왕이 있어서
단체가 구심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질서 차원의 배려 때문일까요?
실제로 다윗은
일반인들보다 특출난 면은 없습니다.
다같이 아담의 후손들이라서
아담의 죄악된 속성을
품고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그런 다윗을 선택해서
왕으로 삼으셨다는
그 하나님의 의지가 중요합니다.
이로서 다윗 시대에는
그 어느 누구도
다윗의 존재를 대신해서
자신을 중앙에 둘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본문에서 백성들은 그저 자신들도
다윗의 주변 인물로
배치되어 있는것으로
만족을 하고 있습니다.
형식적으로는 다윗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취지를
용납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
결국 눈에 유용해 보이는
다윗의 존재감때문에
잠시 다윗을 아꼈을 뿐임이라는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즉 그들의 신체를 공격하는 적들이 눈에 보일 때는
다윗을 보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다윗 언약은 이것을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증거로 바로
솔로몬과 그 이후 르호보암 시대가 되면
이스라엘 사람들의 태반은
다윗언약을 버리고
눈에 보이는 권력자를 새로운 중심 인물로
삼았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진정으로 다윗 언약을
이해못하고 있는 겁니다.
즉 다윗 언약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 소용돌이에서
자신이 다윗 언약의 소모품으로
존재함을 감사히 여기면 될터인데,
그것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항상 자신을 중심에 놓고서
세상 전체가 자기를 중심으로
도는 것으로 이해하는 겁니다.
구약을 보면서 해석에 난감한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그 중의 일부는 바로 이스라엘의 왕들이
‘하나님께 돌아왔다’는 상황이
어떤 상황을 말하는지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역대하 15:2을 보게 되면,
“저가 나가서 아사를 맞아 이르되
아사와 및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들아
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난 뒤 12-15에 보면,
“또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고
무릇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는 자는 대소 남녀를 무론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무리가 큰 소리로 부르며
피리와 나팔을 불어
여호와께 맹세하매
온 유다가 이 맹세를 기뻐한지라,
무리가 마음을 다하여 맹세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저희의 만난바가 되시고
그 사방에 평안을 주셨더라”
고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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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로 인정받은 아사 왕의 마음가짐이
도대체 어떤 상태냐 하는 겁니다.
바로 왕 자신이
자신을
눈에 보이지 않는 다윗언약이
작동하는 소용돌이 속에
한 지점에 놓여있는 것으로
간주할 경우입니다.
즉 자신을 자기 운명의 중심 자리에
놓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동일 인물인 아사왕이
과연 후대에는 어떻게 처신했습니까?
역대하 16:7-10에 보면,
“때에 선견자 하나니가
유다 왕 아사에게 나아와서 이르되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한고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
구스 사람과 룹 사람의 군대가 크지 아니하며
말과 병거가 심히 많지 아니하더이까
그러나 왕이 여호와를 의지한고로
여호와께서 왕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아사가 노하여 선견자를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 말에 크게 노하였음이며
그 때에 아사가 또 몇 백성을 학대하였더라“
고 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12절에 보면,
“아사가 왕이 된지 삼십구년에
그 발이 병들어 심히 중하나
병이 있을 때에 저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난처한 문제,
즉 어떻게 믿음이라는 것이
이랬다저랬다 할 수 있는 문제인가를
풀기 위해서
언약에 붙었다가
언약에서 떨어지는 그 핵심 요인이
결코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체에서 유발된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언약으로 인하여
우리가 여기 존재하고
구원되어 살아가고 있는 상태가
곧 하나님께 돌아온 상태요,
그렇지 않고 자립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고
그 힘으로 산다고 여기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을 가려버리는
악마짓을 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늘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일생이 따로 없음을
일깨워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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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강-삼하18장1-5(왕 보호)-2sa100725
2010-10-31 15:13:30 녹취: 이한례
하나님의 말씀 사무엘하 18장 1절에서 5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492페이지입니다.
사무엘하 18:1-5
“이에 다윗이 그 함께한 백성을 계수하고 천부장과 백부장을 그 위에 세우고 그 백성을 내어 보낼쌔 삼분지 일은 요압의 수하에, 삼분지 일은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동생 아비새의 수하에 붙이고 삼분지 일은 가드 사람 잇대의 수하에 붙이고 백성에게 이르되 나도 반드시 너희와 함께 나가리라 백성들이 가로되 왕은 나가지 마소서 우리가 도망할찌라도 저희는 우리에게 주의하지 아니할 터이요 우리가 절반이나 죽을찌라도 우리에게 주의하지 아니할 터이라 왕은 우리 만명보다 중하시오니 왕은 성에 계시다가 우리를 도우심이 좋으니이다 왕이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가 선히 여기는대로 내가 행하리라 하고 문 곁에 서매 모든 백성이 백명씩 천명씩 대를 지어 나가는지라왕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 하니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모든 군장에게 명령할 때에 백성들이 다 들으니라” 아멘
중심에 왕이 있고 그 주변에는 군사들이 배치돼 있습니다. 같은 인간 아닙니까? 왕이나 군사들이나 같은 인간인데 지가 뭔데 지는 보호받고 남들은 희생이 되어야 하느냐? 왕이라는 것이 도대체 뭐길래 자기가 중앙에 존재하고 우리는 왜 주변인가? 하는 겁니다. 이게 현대인들한테는 잘 이해가 안 되는 거죠. 대통령을 경호원들이 수행하는 거 이해해요. 하지만 온 백성이 다 대통령을 보호한다? 그건 우리가 용납을 할 수 없죠.
얼마 전 대구 지하철 2호선 연착할 때 영남대학교 어느 노조에서 아주머니들이 확 달려 들어가지고 위대하신 박 근혜 손이 할퀴었어요. 그래 연고하나 발랐는데, 왜 그 사람은 박 근혜한테 그런 소릴 하느냐 말예요. 영남대학교 병원장한테 해야지 박 근혜한테 달려들어 그러느냐 말이죠.
도대체 인간은 자기가 중심이다. 세상은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 세상에 내 밖에 없다 해놓고, 막상 세상을 살아가게 되면, 힘 꽤나 쓸 수 있는 사람한테 자꾸 뭔가 힘을 이용하려고 때로는 아부하기도 하고 때로는 협박하기도 하고 그러합니다.
오늘 본문에 2절에 보면, “다윗이 그 함께한 백성을 계수하고 천부장과 백부장을 그 위에 세우고 그 백성을 내어 보낼쌔 삼분지 일은 요압의 수하에, 삼분지 일은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동생 아비새의 수하에 붙이고 삼분지 일은 가드 사람 잇대의 수하에 붙였다” 이래 돼 있어요. 삼분지 일, 피자 한 판 있으면 그 밑에 있는 군장들은 피자 전체가 아니고, 피자 한 조각에 해당하죠. 삼분의 일에 해당된다 말이죠. 다른 사람들은 삼분지 일중에도 어디 속해져 있고, 여러분, 어떤 사람보고 제가 삼분의 일이라 하면 얼마나 기분 나쁘겠어요? ‘내가 왜 삼분의 일 입니까?’ 나는 나에게 전체인데, 나는 나에게 전부인데....
중심이 따로 있다는 말은 우리는 중심이 못 되고, 두 번째 우리는 그 중심에 휩쓸려서 살아가는 중심이 이끄는 대로 중심이 중심임을 드러내기 위한 그런 소모품으로 우리는 거기에 배정돼 있습니다. 배속돼 있고 배치돼 있고, 이것이 세상이라는 거죠. 세상은 소용돌이가 있어서 소용돌이의 중앙 지점에 있어야 될 분 따로 있고, 우리는 아무데서나 발 닿은 채로 중앙에서 흔들어버리면, 같이 딸려 나와야 돼요.
옛날에 갈 설탕 녹여가지고 뽑기 하는 것 있죠? 연탄불에 쪼그리고 앉아서 소다 넣고 설탕 넣어서 탁 쳐서 모양 만드는데 막대를 휘어줄 때 거기에 소다 넣고 휘어주면, 싹 돌리는 흰 선이 노르소름한 설탕과 함께 휩쓸려서 돌아가게 돼 있어요. 그게 소용돌이잖아요?
인생이란 것은 내 중심이 아니고 돌아가게 돼 있단 말이에요. 랍사게 라는 앗수르 왕이 진격할 때, 저는 아마 평생 두고두고 이 대목을 잊지 못 할 겁니다. 랍사게란 사람이 예루살렘을 아주 우습게보고 군사를 보내서 앗수르 장군인데 앗수르 왕인데 그 사람이 이스라엘을 공격했습니다. 여호와를 모욕하며 공격했을 때 그 때 군사가 18만 5천명이었습니다. 제 책에 자꾸 이 이야기를 집어넣는 이유는 지금 21세기에 나는 나고 너는 너고, 너는 너한테 중심이지만 내가 너의 삼분의 일이다. 내가 너 중심으로 날 인정하기 싫다. 왜 어쨌든 내가 내 중심이다.
현대인들은 그래요 내가 내 중심이라 말이죠. 뭘 선택해도 내가 알아서 선택하고 결정해도 내가 결정하고, 인생 망쳐도 내가 알아서 내가 망칠 테니까 니가 간섭하지 마라. 그러한 이 세상에서 어떤 말씀이 복음이야? 바로 18만 5천명이 하루아침에 몰살한다는 말입니다. 그 때 그 현장에 제가 있고 여러분의 자녀가 있고, 여러분의 가족들이 있다면, 그 18만 5천명이 죽을 때, 그 무슨 죄로 죽었습니까? 천사가 와서 죽였거든요.
천사가 와서 죽였는데, 앗수르 군대라는 단지 이유 때문에 그러니까 그게 중요한 이름이란 개념 이예요. 자기 이름 있어도, 고거 이름 떼버리고 앗수르의 군대란 이름으로, 달리 이야기하면, 이스라엘 여호와께 대드는 그런 편에 속한 이름으로, 여호와를 공격하는 편에 섰다는 그 이름 때문에 천사한테 몰살되어 다 죽었습니다. 그래서 이름이라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 이마에다 이름 새길 때 우리는 내 이름 새기지만, 이것은 우리 마음이고 소망이지만 우리 이름 없어요. 둘 중에 하나를 골라잡아야 돼요. 어린양의 이름을 쓰든지 아니면, 악마의 이름을 쓰든지 우리 이마에 두 종류 중에 하나의 이름만 박혀 있어야 돼요. 만약에 악마의 이름이 박혀 있으면, 어린양이 재림하셨을 때 몰살당할 수밖에 없고 지옥가야 되고, 그 대신 만약에 어린양의 이름이 있으면 우리 한평생 살 동안에 고(괴)롭습니다.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악마의 힘에 의해서 상당히 괴로워요.
우리 이름 때문에 악마가 싫어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악마가 손댈 것도 없어요. 그건 있으나 마나한 존재예요. 하지만 우리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면, 그 어린양 때문에 살았다는 그 믿음, 나는 내가 사는 것이 어린양의 소용돌이 속에 끌려가는 식으로 살아간다는 그걸 이야기 한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이 세상 어느 사람한테도 환영받지 못하고 밀창을 당해야 됩니다. 이게 괌이든 영국이든 전혀 상관없어요. 십자가 마을에 영국에 계신 분이 밉상 받았다고 분해가지고 글을 써놨는데, 그러니까 괌에 계신 분이 ‘나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어린양의 공로로 구원 받는다는 말을 해버리면, 주변 사람한테 밉상을 받게 돼 있어요.
자, 그렇다면 이 왕 하나, 왕이 대체 뭐기에 사람들은 다윗 왕을 보좌하고 주변에 배치를 하느냐? 그게 바로 ‘언약’(약속)이라는 겁니다. 언약이 무엇이냐? 약속이 무엇이냐? 설명하면 저는 암담한 생각밖에 나지를 않아요. 왜 암담하냐 하면, 사람이 뭐 별것 있나, 키 160~180센티미터 사이 그 정도밖에 안돼요. 똑같은 인간이거든요. 똑같은 인간이 똑같은 인간을 믿어야 구원받는다. 하나님이 그렇게 정했대. 그럼 이게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이게? 이건 도대체 말이 안 되거든요.
하나님께서는 너 자신이 무슨 선을 해도 안 보신대. 아주 눈 여겨 보지 않는대. 하지만 하나님이 눈여겨보시는 사람은 딱 한 분 있대. 그 분 때문에 산다는 걸 믿으면 니도 살고, ‘지나 걔나 똑같지,’ 하면 니는 지옥간대. 라는 말을 하기도 뭐하고, 그것도 동창회나 모임이나 회식자리에서 하기도 뭐한 거예요. 한창 술집에서 술잔 돌아가고 흥이 나서 노래방 노래 부르고 넥타이로 이마에 매고 신나게 부르는데, ‘여러분 제가 부를 노래는 우리가 지옥 간다는 겁니다.’ 이래 나오면 분위기 깨지는 것은 물론이고, 하기도 뭐하고 안하려고 하니까 주님께서 가만두지 않죠. 소용돌입니까? 가만히 두지 않고....
전진 배치라는 것 있죠? 우리는 보이지 않는 예수님 때문에 이 땅에 전진 배치돼 있어요. 보이지 않는 분을 동서남북으로 사수한다고 보이는 우리를 하나의 문어발처럼 이 세상에 이 시대에 깔아놓은 겁니다.
성경을 이렇게 해석하면서 항상 주의해야 하는 어려운 대목이 뭐냐 하면, 제가 광주에서 그런 이야기 했는데, 그 이야기 다시 한 번 해 볼게요. 이런 게 참 어려운데 뭐냐 하면, 임진왜란이 1592년에 일어났거든요. 그런데 임진왜란 직전까지 선조대왕 때 조정에서는 임진왜란이 일어 날거냐? 말거냐? 왈가왈부 했어요. 그런데 제가 하는 이야기는 이겁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아이고, 터졌구나, 왜군이 쳐들어 왔구나. 누구든 바보 아닌 사람은 다 알지만, 고 전에 1590년이나 1580년대에는 ’올 거야 안 올 거야. 지가 무슨 낯짝으로 올 거야. 안 돼. 없어....계속 조정에서 싸움이 일어난 거예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계속 임진왜란 전에, 반란을 일으키는 그 영화 내용이 온다. 안 온다. 당파 싸움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게 역사라는 겁니다.
막상 사건 터지면 바보가 아닌 이상은 예를 들어서 소돔과 고모라 같은 경우에 유황불 내릴 때, 불이 떨어지는 그 이전에는, ‘불이 떨어진다.’ 하는 그 자들은 바보예요. ‘아이고, 청천 하늘에, 푸른 하늘에 불이 떨어져?’ 그런데 막상 떨어지고 난 뒤에, 불 없다, 불 안 떨어진다는 사람들이 바보예요. 왜 인간은 역사에 농락당하느냐 말이죠.
제가 하는 말은 역사 사건 이전의 해석은 막상 사건이 일어나니까, 이게 다 소용이 없단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 사건만 일으키고 손 털면, 우리가 바보가 아닌 이상은 소돔과 고모라의 목불상 이러겠는데, 그 다음날에는 불이 안 떨어지고, 그 다음날은 또 하늘이 말짱해가지고 해 뜨고 달뜨고 이 세상은 돌아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소돔과 고모라에 불 백날 내려봤자 3년,5년 10년,100년 지나면, ‘아이고, 옛날에 그런 전설이 있었대.’ 그런 전설이 있었대.‘ 라는 말을 해버리지. 지금 내 시대에 그런 일은 없는 거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보낼 때는 왕 중심으로 보내는 이유가 그 당시에 ‘하나님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 뜻이 무엇입니까?’ 라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그 사람들을 위해서 한 사람을,(아무것도 아니에요. 다윗이라는 사람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 이예요.)팍 집어서, ‘언약이다. 다윗을 믿으면 구원받고 다윗을 안 믿으면 저주(지옥) 받는다. 쉽게 말해서 다윗에 의해서 우리는 소용돌이치는 곳에 속해 있으면, 우리는 구원받고, ’다윗과 니하고 내하고 무슨 관계인데? 유다자손하고 무슨 관계인데? 하면서 다윗과 벗어나면 그것은 저주 받는다는 그 시대에 합당한 하나님의 조치가 눈에 보이는 왕이었습니다. 다윗 시대는 다윗이었고, 솔로몬 시대는 솔로몬이었고, 르호보암 시대에는 르호보암 이었습니다.
다윗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아는 척하고, 솔로몬 이야기 하면 아! 하고 아는 척 하는데, 르호보암 나오면, ‘그 사람이 누구십니까?’ 이래 나와요. 르호보암 시대에는 르호보암이 그 시대의 ‘언약’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 앞에 완전히 돌아온 거예요. 구약에서 또 어려운 게 있어요. 구약에 보면, 어느 왕 하나님께 돌아오고, 이래 돼 있거든요.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게 뭐냐? 하나님께서 다방에서 기다립니까? 도대체 하나님께 돌아오니까 복을 주셨는데, 이들이 하나님께 마음이 멀어지니까 저주 내렸다 하는데, 하나님께 저주 내리는 것은 쉬운데( 우리는 맨 날 하나님 생각 안 하니까) 뭐가 어려우냐 하면, 하나님께 돌아왔다는 그러한 상황이 도대체 어떤 상황이 하나님께 돌아온 상황이냐 하는 겁니다. 아!! 그거 정말 궁금합니다.
도대체 하나님께, ‘아사 왕 하나님께 돌아와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유다를 도우사 전쟁에 승리케 하셨고, 나중에는 아사 왕 버리거든요. 그 하나님께 돌아왔던 아사 왕이 마음이 강건해지니까 나라가 부강해지니까 다시 하나님을 버리고 다시 세상 적으로 나갔다 이래 되거든요. 그거 제가 이래 보면서, 계속 어려운 이야기 하니까 어렵다 하고 들으세요.
다윗 시대에는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의 중심이었습니다. 다윗 시시한 것 알아요. 우리도 시시하고 다윗이 간통하고 사람도 죽이고 다 알아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다윗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살인자, 간음 자를 언약 중심자로 세워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보여줬다는 요점을 유의하자는 말이죠. 그렇다면 고것을 다윗이라 하지 않고 ‘다윗언약’이라 합니다. 이제 이해되죠? 다윗언약인거예요.
예수님 자꾸 보여 달라 하는데, 예수님 보여줄 필요 없어요. 예수님의 새 언약 있으면 그것이 예수님 언약 이예요. 예수님 새 언약 전파하는 사람 있으면,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의 몸의 지체들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예요. 예수님 볼 필요 없어요. 사람보고 믿는 것은 구약입니다. 다윗 보고 믿는 것은 구약 이예요. 그러나 다윗 죽고 난 뒤에는 그때부터 언약이 뭐냐? 보고 믿는 식으로 하나님 믿는 사람들은 넘어지는 그런 판국이 돌아왔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사라졌지만 뭐가 남아 있느냐? 다윗언약이 남아 있거든요. 이게 제가 오늘 설교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다윗언약은 눈에 안보이죠. 다윗 때는 살아있는 다윗을 보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천 부장, 백부장, 삼분의 일, 삼분의 일, 나눠서 보위해봤자 진짜 그 사람은 다윗언약을 믿는지, 아니면 눈에 보이는 다윗이 있어야 우리가 사는지, 권력을 믿는지, 분간이 안 되는 거예요. 아까 장로님이 기도하신대로, 눈에 보이는 힘을 믿는지, 아니면 힘을 빼더라고 여전히 구원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능력이 우리를 살리고 있는지, 그 사실을 믿는지가 구별이 안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약간 구별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려워요. 여기 3절에 보면, “백성들이 가로되 왕은 나가지 마소서 우리가 도망할찌라도 저희는 우리에게 주의하지 아니할 터이요 우리가 절반이나 죽을찌라도 우리에게 주의하지 아니할 터이라 왕은 우리 만명보다 중합니다.”
제가 일찍 와서 계단에 걸레질하면, ‘목사님이 이런 걸 왜 합니까? 목사님이...목사님이 우리 만 명보다 귀합니다.’ 이런 식이죠.ㅎㅎ 그렇다면 그런 이야기 하는 사람은 왕은 우리 만명보다 중하고 적군들이 다윗을 노립니다. 할 때 그 적군이 보이지 않는 적군이냐? 아니면 보이는 적군이냐를 따지고 해석하자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적군을 생각해서 다윗을 보호한다면, 다윗만 생각한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다윗언약을 아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만약에 적군들이 무서워서 다윗을 보호한다면, 만약에 보이는 적군이 안 쳐다보면 다윗을 우습게 볼 게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건 내가 보기에 백성들이 어느 쪽이냐? 여전히 눈에 보이는 권력 쪽으로 나가는 수가 많다 말이죠. 그 이유가 뒤에 솔로몬 오고 르호보암(솔로몬 아들) 왔을 때 그들은 다윗언약을 잊어버렸다는 사실입니다.
눈에 보이는 왕이 ‘꽥’ 하니까 예! 하고 역시 눈에 보이는 권력을 무서워하는 쪽으로 백성들이 다 가버렸어요. 그렇다면 밑에서 땡기고 속이려 하지만 다윗 때도 다윗을 보호하고 촐랑대는 게 아니고 다윗언약이 아니라 역시 눈에 보이는 아직도 다윗은 쓸모짝 있다는 생각에서 다윗을 보호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사람 우리교회는 없어서 마음 놓고 이야기 합니다만 이 근호 목사를 보호할 하등의 가치가 없어요. 그러나 십자가 복음은 이것은 전파해야 됩니다. 이것은 보호해야 되고 이거는 버리면 안 됩니다.
십자가 복음이 소용돌이칩니다. 그 십자가 복음 때문에 커피에 있는 믹서기 하얗게 돌아가는 것처럼 그 돌아가는 위치에 저와 여러분이 배치돼 있는 겁니다. 그걸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바꿔치기 할 수 있어요. 십자가 눈에 보이지 않는 걸 보호해야지, 눈에 보이는 것은 소용없습니다.
자, 그렇게 돼 버리면 이제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느냐? 나는 당신의 부속품 입니다. 이런 뜻 이예요.
요 말씀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라는 말을 안다면, 하나님을 버릴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나님을 버릴 경우는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자기 소유된 힘이 불가능할 때, 이젠 하나님, 하나님 하고 안 불러도 찾지 않더라도 이젠 살만하다 하는 생각이 들 때, 그 때 성경(성령)은 뭐라 하느냐? ‘그는 하나님을 버렸고’ 이렇게 쓰는 거예요. 하나님을 찾고 버리고 하는 방해되는 마귀는 누구냐 하면, 우리 본인들이예요. 우리 본인들!!!!!!!
적 들어오면 그냥 깜짝깜짝 놀라는 겁니다. 퍽! 윽! 저는 아내 분들이 남편을 욕하고 불평할 때, 아직도 미스테리한 게 그렇게 욕하고 하려면 어지간하면 혼자 살지...ㅎ 정전되면 그냥 자면 되지, 자는 남편 깨워서 귀찮아하는 남편에게 ‘형광등 나갔나 봐라, 두꺼비 집 나갔나 봐라. 몽둥이는 골프채는 문 앞에 놔뒀나, 도둑놈 들어오면 안 되니까...,’ 왜?? 남편을 찾나 말이죠. 그렇게 꼴 보기 싫으면 혼자 살지...ㅎ
예수! 예수를 자기 보디가드인줄 알고 왠 다이아? 자기 보디가드인줄 알고 눈에 보이는 게 자기니까 자기 지키기 위해서 다윗이 필요하고 솔로몬이 필요하고...., ‘대출은 솔로몬....,’나오잖아요? 솔로몬이고 뭐고 다 지만 살려고....,ㅎ 그러니 자기가 중심 이예요. ‘주님이 중심입니다. 나는 주님이 없이는 못 삽니다.’ 입에 발린 거짓말, 침 바르고 거짓말, 어떤 사람은 침 바르고 거짓말해요.ㅎ 다들 거짓말. ‘주님 없이는 못삽니다. 아이, 전부 거짓말......,
‘나는 주님의 하나의 소모품입니다. 내가 주님의 복음을 가리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의 그 흘리신 피를 내 산다는 욕망 때문에 내가 방해물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그저 주님 살아계시니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입니다.’ 라는 그 고백. 그것이 보이지 않는 새 언약을 보호하는 성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