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져서 열린 세계
삼하17:27-29
(삼하 17:27, 개역) 『다윗이 마하나임에 이르렀을 때에 암몬 족속에게 속한 랍바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비와 로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실래가』
(삼하 17:28, 개역)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삼하 17:29, 개역) 『꿀과 뻐더와 양과 치스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 함께 한 백성으로 먹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함이더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우리가 누구를 도울 때는
그만한 가치와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보면서 도와줍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 자체가
특정한 인물을 키워나가는 식으로 진행됩니다.
주위에서 많이 도와주면서 말입니다.
그 인물이 서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입니다.
따라서 그 인물을 도와준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게 되는 것입니다.
그 외의 장소는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왜 세상이 이렇게 되었을까요?
처음에는 이 세상이 인간 중심이었습니다.
창세기 1:26-29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씨 있는 열매를 먹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요 복이며,
씨없는 열매맺는 것도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하지만 요즈음에 들어와서
전에 들어보지 못한 희귀 약품을 먹는다고해서
영생을 얻거나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창세기 1장 지나고 창세기 3장으로 넘어오면
이미 인간 자체가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주변의 세상도
저주받은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 때부터 폐쇄적인 영역이
따로 만들어지게 됩니다.
즉 가죽옷을 입은 것이 축복이 됩니다.
아무리 씨 있는 열매를 배터지게 먹어도
그것이 복이 될수 있는것이 아닙니다.
노아 시대에 들어오면
더 노골적입니다.
노아 방주는 그 바깥 세상의 축소판입니다.
그 방주 안에는
깨끗한 짐승 7쌍과
부정한 짐승 2 쌍이 들어갑니다.
즉 이 세상은 깨끗한 것들과 더러운 것들이
상호 섞여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구원 될 자가 구원되고
구원되지 못할 자는 탈락되는 겁니까?
노아 당시에는
방주 밖의 세계는
있으나 없으나
소용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이것을 읽어낼 줄을 알아야 합니다.
즉 구원의 방식은
인간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장차 심판하는 방식과
관련 있는 식으로
장치가 마련된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네가 천국 가봤어?”
하지만 복음 아는 자들은
천국을 볼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하나님께서 미리 제시한 장치는
우리가 미리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즉 예수님의 피의 의미를 아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복받은 것은
그저 양이나 소가 늘어났는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씨가 발생되고
그 씨가 나라를 이루고,
그 나라가 약속의 땅을 차지 한다는
그 사실입니다.
이제 본문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복이란 딴 게 아니라
다윗의 가문을
하나님께서 직접 관리하신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가문에서 드디어
메시아가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마하나임에 살던 세 사람은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다윗이 곤궁에 빠졌을 때,
한껏 도와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폐쇄된 공간이지만
열린 활동입니다.
마치 나뭇꾼이
하늘에서 내려온 두레박 같은 것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밖에서 보면 폐쇄적인으로 보이지만
위에서보면 뚜껑이 없이 열려 있는 겁니다.
즉 아무나 들어 올 수 없으나
누구나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와같은 다윗 언약의 가치는
전의 언약처럼
수평적으로 도와줌으로
복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나라 역사를 통해서 보면,
비록 이스라엘이 망해서
그 약속의 땅에서 추방당해
바벨론이라는 이방나라로 팔려간다 할지라도
그 나라에 가서도
다윗언약의 약속이 도리어
더욱 만개하고 유효하게 작용한다면
여전히 구원의 퍠쇄공간은
지탱되고 있는 겁니다.
즉 망하는 것을 통해서
더욱더 구원의 효력은 죽지 않고
활발하게 작용되는 것입니다.
그 구원의 폐쇄공간이
신약에 오면 어떻게 될까요?
마태복음 끝에 보면,
“보라,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다”
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신약의 복입니다.
신약 시대에서의 구원의 폐쇄공간은
하나님께서 친히 완료된 상황으로 만들어주시기에
그 안에서 ‘내 것’, ‘네 것’이 따로 없습니다.
사도행전 2:44-47에 보면,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함께 계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남을 돕는 것이
곧 예수님을 돕는 것이 됨을 압니다.
고린도전서 12:26에 보면,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이
처음부터 자기 전세계를
털어버린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사도로서 살 수 있었던 것은
오순절날 성령받고 난 뒤부터입니다.
이 때로부터 교회는
열린 단체로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자신의 것을 나누어지고
자신의 것도 자기 것이라고 우기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자기 삶이란
하나님의 일이 벌어지는 현장입니다.
마치 예수님 몸 안에
함께 들어와 있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남의 것을
내 것이라고 해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남이 부유하다고 해서
그것을 시기해서는 아니됩니다.
정작 그 교회 내에서 필요한 것은
마지막 불 심판에서
자신들이 어떤 식으로 구원되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피입니다.
그러니까 선교비나 구제비를
얼마나 책정했느냐가 바른 교회의 표준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에는 눈을 돌리고 얼굴을 돌리는
그런 태도에 대해서
우리 성도들은 도와주어야 하는 겁니다.
수평적으로 땅만 바라보고 사는 자들을
하늘을 보고 사는 자들로 인도하는 것이
곧 예수님의 일이요
예수님을 돕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038강-삼하17장27-29(이어져서열린세계)-2sa100718
2010-11-07 09:11:15 녹취 : 이한례
하나님의 말씀 사무엘하 17장 27절에서 29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492페이지입니다.
사무엘하 17:27-29
“다윗이 마하나임에 이르렀을 때에 암몬 족속에게 속한 랍바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비와 로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꿀과 뻐더와 양과 치스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 함께한 백성으로 먹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함이더라.” 아멘
사람들이 다윗의 일행을 보고 도와주는 그 대목입니다. 도와줄 때는 그 사람의 심정이 하는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 어렵다고 여겨질 경우에만 도와주게 돼 있어요. 하나님 앞에 대적하고 하나님 앞에 나쁜 짓 하는데 도와줘 버리면 그것은 더욱 더 하나님께 대들라고 힘을 보태주는 것밖에 안되죠.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사람이 사람을 도와준다는 그것이 우리는 좋게 생각하는 모양인데, 도와줄 때 그 사람 속성과 우리 속성이 일치되느냐를 확인을 해 봐야 합니다. 우리가 이단을 도와 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요한삼서에 보면 이단과는 상종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원수가 어려울 때 원수가 배고파하면 먹이라.’ 그것이 ‘당신 사상도 훌륭합니다.‘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하라고 도와준 게 아닙니다. 도와줄 때는 저쪽 사람들이 우리 도와주는 쪽의 어떤 새로움이 있는가를 그쪽 사람들이 알기 위해서 도와주는 겁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복을 줄때는 양만 소만 그냥 챙기고, 아이고, 나는 거부 되었구나 부자 되었구나 요것만 챙기라고 하나님께서 복준 게 아닙니다. 그 복은 그 복 받은 사람은 복 값을 하게 돼 있어요. 이것은 하나님께로 약속으로부터 왔습니다. 라고 드러내기 위해서 복을 주신 겁니다.
아브라함이 소, 양떼 늘었다고 그걸 보이라 하는데, 저는 아무리 봐도 아브라함의 복은 뭐냐 하면, 땅을 얻고 신을 얻는 게 복 이예요. 그 외에 다른 복은 없습니다. 약속의 땅에 가고, 약속의 신을 얻는 게 아브라함의 복입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우리 안에 예수님 계신 게 그 게 복이다 이 말이죠. 아브라함 자식이 아브라함을 구원해요. 이걸 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나를 구원하시는 분과 함께 있어,’ 이게 복입니다.
마태복음 제일 마지막에 뭐라 하셨냐 하면, “볼찌어다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제가 성경을 쓴다면, 거기다가 하나 덧붙이겠어요. ‘이게 복이다.’ 라고 쓸거예요. 아마..ㅎㅎ ““볼찌어다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라고 그 뒤에 내가 보탠다면 ‘그 게 바로 하나님의 뜻이고 복이다. 말이죠. 너희를 떠나지 않고 함께 있겠다는 겁니다. 함께 있는 것을 사람들은 복으로 여기지 않고, 내 꺼, 내 소유가 늘어나는 것을 자꾸 복으로 여긴다면, 그 사람은 어디에 머물러 있느냐 하면, 창세기 1장28절에 머물러 있는 겁니다. 창세기 1장28절 너무나 유명한 말씀이지만, 우리 교회에서는 별로 잘 다루기 때문에 생소할 겁니다.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복을 주셔서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이렇게 창세기 1장28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만약에 대한생명 회사 사두라면, 대한생명의 축복이 뭐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대한생명 회사에 복을 주셔서 생육하고 번성해서 땅에 충만하라.‘ 말은 구찌... 보험구찌 많이 해가지고 우리 보헙 회사가 크게 넓히는 것, 이걸 복이라 여길 게 아니냐 말이죠?
제가 만약에 캐토릭 병원 원장이라면 복이 뭐겠어요? 대구에 있는 환자들 전부 다 캐토릭 병원에 다 가도록 하는 거죠. 번창하고 정복하니까. 제가 만약 사립학교 교장이라면 뭐하겠습니까? 우리학교 졸업한 학생들이 서울 대학교 많이 가서 대구의 중학생들이 우리고등학교 들어오려고 기를 쓰고 교사들한테 빽 쓰고 이래하지고 후원금 많이 들어와서 우리고등학교 가 대구에서 최고 일류고등학교 돼 가지고 못 들어와서 안달 나고 우리 고등학교 오려면 철야 적어도 40일은 철야해야 되고, 교회마다 만약에 우리고등학교 들어오면, 교회마다 프랭카드 만들어 아무개 고등학교 20명 합격 이런 거 붙여놓을 때, 그러면 사람들은 뭘 보느냐 하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덮었다. 이래 보는 겁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28절에 맞는 복이고, 창세기 2장에 넘어가면 그담부터는 선약과 안 따먹는 게 복 이예요. 또 창세기 3장에 넘어가면, 선약과 따먹더라도 가죽옷 입은 게 복입니다. 창세기 8장,9장에 넘어가면, 방주 안에 들어가 있는 게 복 이예요. 점, 점, 점 뭔가 축소되면서 닫혀 있는 느낌을 주죠. 아! 요게 어려운거예요. 창세기 1장에서는 활짝 열어놨습니다. 공격하라. ‘적극적으로 땅을 정복하라. 다 니꺼다. 온 지면에 있는 씨 맺는 채소와 씨가진 열매, 모든 나무를 너에게 주노니 너희는 맘껏 먹어라.’
저도 지난 금요일 날 우리 집사람 농장에 가서 자두 맘껏 먹었습니다. 떨어진 것 물에 씻어가지고 먹고..ㅎ 방울토마토도 맘껏 먹었습니다. 왜? 씨 맺는 거 먹으라 했으니까...ㅎ 먹었습니다. 복 받았습니까? ㅎ 뭐든지 이렇게 우리가 씨 맺는 열매, 방울토마토 이런 거 먹어서 구원 받을 것 같으면, 구태여 교회 나올 필요 없어요. 농장하면 됩니다. 오이 하나 키우고 그러면 돼요. 그러나 그건 창세기 1장이고, 죄 짓기 전이고, 죄 짓고 난 뒤에는 어디 쳐 박혀야 돼요. 어디 방주 안에 들어가든지, 신약에는 예수 안에 들어오든지. 뭔가 폐쇄된 그 안에 들어가야 됩니다.
오늘 성경 본문이 마하나임에 사는 세 사람이 다윗 일행을 도와줬다. 아주 간단한 이야기거든요. 여러 가지 먹을 걸 줘서 도와줬다. 이게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뭐가 중요하냐 하면, 다윗을 도와줬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떡해 중요하냐 하면, 마치 노아가 방주 만들 때 쥬스 한 잔 대접한 거와 똑같은 거예요. 예수님 돌아가시기 전에 그 어떤 마리아가 자기 향수병을 깨서 예수님의 장례를 대비하는, 향수 뿌려서 당신의 죽음은 고상한 죽음이라고 향기를 뿌리는 그것과 동일한 겁니다. 도와줄 때 제대로 도와줘야지, 이렇게 도와주면 안 됩니다. 복음을 외치는 현장에 도와줘야 돼요.
왜 그러냐 하면, 이제부터 그걸 설명하겠습니다.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노아 방주 같은 경우에 제일 단촐 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노아 방주 안의 세계는 노아 바깥의 세계를 축소를 한 겁니다. 긴긴 역사를 짧게 어커디온처럼(윙윙 접었다 폈다) 뒤에 접는 것 있죠? 딱 부채 접듯이 전 세계 역사를 딱 접어 버리면, 노아 안의 역사가 돼 버려요. 파일압축을 하듯이 압축을 해버려요. 그걸 펴 버리면 전체 역사가 되는 겁니다.
노아 방주 안에 뭐가 들어있냐 하면, 깨끗한 것도 들어있고, 그담에 중요한 것은 더러운 것이 들어있습니다. 깨끗한 것은 몇 쌍 안돼요. 7쌍 인가 밖에 안 되고, 더러운 것은 더 많아요. 더러운 것은 굉장히 숫자가 많습니다.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이 섞여 있는 세상을 압축을 시켜서 하나님께서는 방주라는 폐쇄된 공간(구조물)에다 딱 집어넣습니다. 집어넣어 놓고, 자, 방주 바깥의 세계가 이제 방주 안의 세계입니다. 방주 안의 세계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겁니다. 바깥에는 지워버렸습니다.
그림을 그릴 때 스케치를 직접 하잖아요? 스케치 해 놓고 대충 그림 완성 단계에 들어가면, 지우개로 연필로 그렸던 스케치 부분을 지워버립니다. 지워놓고 그리고 싶은 중요한 부분에 집중해서 더 세밀하게 그려나가죠. 맞죠? 마찬가지로 방주 안에 노아 들어가 버리면, 바깥의 세계는 볼품없어요. 그거는 어차피 물에 다 쓸려 내려갈 세상이기 때문에 별 의미 없어요. 거기 TV, 냉장고 있더라도 다 물에 떠내려 갈 것이기 때문에 필요 없어요. 다만 살아있는 작자들이 어떡해 살아있는가? 거기에 하나님도 집중하고 너희들도 거기에 주목하라 이 말 이예요.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이런 말씀 있습니다. ‘옛날에 물로써 심판했는데, 이제는 불로써 심판한다.’ 물로써 심판할 때는 방주가 있었지만, 불로써 심판할 때는 대비책이 뭐냐 말이죠.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 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노아 때는 방주란 약속이 있고, 신약 때는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특히 노아가 방주 지을 때, 기가 막혀요. 방주란 아이디어는 노아의 아이디어도 아니고, 노아 말고 그 주변 이웃 사람들의 아이디어도 아니에요. 방주를 만든다는 것은 무엇과 결부돼 있냐하면, 하나님만이 아시는 장차 올 심판의 내용과 합치해서 곡과 이렇게 연결시켜 봤을 때, 아! 장차 올 심판을 봤을 때 방주만한 게 없다. 방주가 왓따야! 해서 방주를 만들어 놨다 말이죠. 그러니까 일반 사람들은 모르죠.
근데 노아는 그걸 눈치 챘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게 놀라운 일이에요. 이게 노아가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아는 거예요. 노아는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오늘 아침의 설교처럼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게 안 나와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가위로 다 짤라 버려야 돼요.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미처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미리 와야 할 것을 주님께서 약속을 주신 겁니다. 안 믿는 사람하고 이야기하면 제일 답답한 게 뭐냐면, 실컷 이야기하면, ‘니 천국 봤나? 니 죽어봤나? 천국 가 봤나? 니 지옥 가 봤나? 가보고 그런 소리해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런 소리 하거든요. ‘우리는 천국 안 갔습니다.’ 이러면, ‘천국도 안 가 본 놈이 왜 그러냐고 하거든요.
여러분!. 천국을 볼 필요 없어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온 것만 알고 있으면 됩니다.
노아가 홍수를 맞아본 적이 없습니다. 노아는 1년 동안 홍수를 맞아 본적이 없어요. 노아가 받은 것은 방주만 만들면 되는 겁니다. 방주 만들고 방주 안에만 들어가면 되는 겁니다. 그 안이 바로 왜 방주와 방주로만 구원되느냐를 보여주는 축소판이에요. 그래서 방주가 오기 전까지는(방주가 없을 때는) 세상에 대한 해석할 수 있는 중심적인 해석이 없어요.
아까 기도하신 분이 기도하시기를 ‘항상 우리는 우리중심으로 산다고 하거든요.’ 우리중심으로 살면, ‘니 중심 따로 있다.’ 이래 하면 안 되니까, 세상을 보는 중심은 우리가 마련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마련해 주십니다. 구름 속에서 하는 말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너희는 저의 말을 들어라.’ 딴 걱정하지 마라. 쓸데없이 장사되고 안 되고, 교회부흥에 대해 걱정하지 말고, 수련회 몇 명오든지 걱정하지 말고, ‘니는 구름 속에서 하는 말이 니는 아들의 말만 듣고 살아라.’ 이게 뭔가 예수님과 장차 심판과 관련성이 있다는 겁니다. 불심판과 관련성이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방주 이야기가 끝나고 그담에 나오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다윗까지 갑시다. 다윗의 성전을 만들어야 돼요. 성전을 만들고 성전이 깨지고 안 깨지고가 옛날 그 방주 때와 똑같습니다. 그러면 성전 만드는 그 와중에서 세상의 축소판 이예요. 성전이 필요 있다, 없다. 성전(눈에 보이는 성전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에 주께서 성전에 하나님이 계신다. 안 계신다의 싸움이 성전을 통해서 벌어집니다. ‘북쪽 나라 이스라엘은 성전 필요 없다. 우리가 만들면 되지 뭐, 그 까짓거 우리가 대충 맞추면 되지. 아하스 왕은 이스라엘 성전, 유대 성전 별 힘없더라.’ ‘앗수르 성전이 더 멋있더라.‘ 더 화려하더라.’ 해서 앗수르 성전처럼 성전 짓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성전의 껍데기를 부숴버리고, 그 성전이 갖고 있던 ‘다윗 약속’, 다윗 언약을 성전이 부숴 져도 다윗 언약은 부숴짐을 통해서 더욱 더 언약이 언약대로 확실함을 드러내는 증거로 사용하는 겁니다. 지금 제가 이렇게 말을 빨리하고 하지만, 이게 굉장히 복잡한 이야기가 많이 들어 있습니다.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뭘 하나, 방주를 만들라. 성전을 짓는 걸 허락할 때는, 고 성전, 방주가 아니고, 고게 탁탁 깨어지면서 사람들이 미처 몰랐던 예상 밖의 새로움이 우리에게 주어져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세 사람도 다윗이 지금 정권을 날려버렸어요. 완전히 압살롬에게 다 빼앗겼습니다. 히마리 없습니다. 지금 곧 죽을 사람 이예요. 늙은 왕에 불과하고 권력을 빼앗긴 사람입니다. 아, 볼품없어요. 하지만 볼품없는 사람에게 오늘 뭘 줬느냐 하면,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꿀과 뻐더와 양과 치스” 완전히 신혼살림 이예요. 한 살림 트럭 채워서 준다고요. 이건 뭐냐 하면, 다윗은 권력은 없어도 다윗이 권력을 빼앗긴 것을 통해서 도리어 하나님의 다윗언약은 더 활짝 핀다는 겁니다.
방주 들어가는 사람 몇 명 없다 할지라도 방주가 기어이 살려내는 것처럼, 비록 다윗은 쫓겨 다니고, 참 힘든 인생을 살아가지만,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다윗을 왕으로 삼았다는 것은, 그만한 구원의 효능을 나타낸다. 그 이야기예요. 효과를 나타낸다는 겁니다. 볼품없이라도 나타내는 거예요. 그럼 이건 뭐냐? 이걸 제가 본격적으로 설명을 하려고 하는데, 이걸 가지고 ‘열린 구조’ 라고 합니다. 말이 어렵죠?
주님께서는 하늘에서 두레박을 내려놓습니다. 두레박이 내려와서 나무꾼을 태워갈 때, 그 때 뚜껑이 없잖아요? 뚜껑이 없다 해서 ‘열린’ 이라한 거죠. 마지막 오순절 날 성령을 통해서 교회라는 두레박이 내려와요. 두레박이 내려오면, 고 자체는 옆에서 보면, 닫혀있어요. 함부로 그 교회 못갑니다. 교회라 하는 것은 성령 받아야 갈 수 있어요. 근데 위에서 보면 열려 있습니다. 그 열린 것이 어떻게 열렸는지를 성경을 그 대목 읽어보면 지금까지 한 거 이해될 겁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2:44~47) 이래 돼 있어요. 이것은 자기 재산을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자기 물건을 서로 나눠줬거든요. 서로서로 나눠 준거예요.
야고보서 5장 13절에 보면,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찌니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찌니라.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 이래 돼 있습니다. 뚜껑이 열려 있잖아요? 서로서로...
교회라는 것이 뭐냐 하면, 바깥에서 보면, 못 들어가는데, 위에서 담아주면 들어가게 돼요. 일단 들어가고 나서는 뭐가 있느냐 하면, 내 것을 내 것으로 여기지 않고, 서로서로 우리의 모두의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내 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내 것도 아니고 더 중요한 것은 니 것도 아니다. 니가 내 것 아니라는 말 듣고 니가 탐을 내면 안 되는 거예요. 우리 모두의 것 이예요. 이 말은 가난한 사람이 제발 부자를 탐내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것이 내 꺼기 때문에...
동생을 너무 사랑하면, 동생이 갑자기 로또에 당첨되면, 축하해주잖아요? 동생이 남이 아니기 때문에. 근데 내가 미운 사람이 만약 갑자기 로또 당첨되면 ‘저거 하루아침에 날려라, 망해 버렸으면 하죠. 그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고 그 사람하고 나하고 하나로 느껴지면 그 사람 잘 되는 것이 내가 잘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교회‘라고 합니다. 그 사람이 아파할 때 아파하고 그 사람이 기뻐할 때 같이 기뻐하고...한 몸이거든요. 이게 열린 겁니다.
방주 안에 들어와 놓고 싸우면 곤란하잖아요.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축소화 시켜서 그걸 방주처럼 닫힌 구조를 만들어요. 닫힌 구조에서 구원 받을 사람은 어떻게 구원받고, 구원 받지 못하는 사람은 어떻게 구원 못 받는가를 안의 구조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데, 그 구조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뽑아서 교회가 하나씩 둘씩 심어놓은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방주’가 되는 겁니다. 서로가 볼 때 ‘니 얼마 가졌어? 이래 말하면 안 되고, ’당신 어떻게 구원 받았어?‘ 라고 이야기 해줘야 됩니다. ’당신도 주님 때문에 구원 받고 나도 구원받았다면, 당신 잘되면 내 잘되는 것이고, 당신 못 되면 내 가슴 아프고, 이럴 때 우리는 한 바구니(두레박)에 같이 타고 있다는 것이 됩니다. 그게 오늘 본문의 이야기인데, 다윗이 어려울 때 바로 그 세 사람이 다윗을 도와주는 거예요. 이게 도와주는 거예요.
다윗이 어렵다고 해서 ‘아이고, 꼴좋다. 다윗’ 이런 것이 아니고, 다윗이 존재하고 있다는 자체가 우리 이스라엘을 지금 하나님께서 구원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그 때 다윗이 어려울 때 서로 도와주는 겁니다. 이것을 요즘시대에다가 실제적으로 적용을 한 번 시켜봅시다. 적용을 시켜버리면, 집에 로션이 떨어졌습니다. 그러면 고난 받는 겁니까? 화장대에서 로션을 바르려고 탁탁 쳐도 로션이 다 떨어져서 안 나와요. ‘주여! 또 고난을 주시는군요.’ 이걸 고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별로 없을 거예요. 없으면 안 바르면 되죠. 그러면 쌀부대에 쌀이 떨어졌다. 이거는 좀 고난 같죠? 약간 고난 같죠?
예수 이름으로 고난을 받을 때, 집에 로션이 떨어지는 것을 우리는 고난으로 여기지 않고, 쌀 떨어졌을 때 고난으로 본다 말이죠. 그러한 생각 자체가 주님에 대한 고난을 잘못 이해한 게 되는 겁니다. 주님의 고난은 양식 떨어졌다. 쌀 떨어졌다. 어느 신자가 지금 돈이 없다. 우리 교회가 돈 모아 돈 빌려주자.
이런 식으로 적용시켜 버리면, ‘구약 때 닫힌 구조’가 돼요. 오늘 중요한 대목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정신 차리고 주무시면 안 됩니다. 제일 중요한 내용입니다. 구약 때는 오늘 본문대로 쌀 떨어지고 양식 떨어지고 로션 떨어지면 도와주면 돼요. 그런데 신약 때 도와 줄 것은 뭐냐 하면, ‘에이고, 교회가 어려운데 돈도 안 도와주고...난 삐져 교회 안 다닌다.’ 라고 할 때,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쌀 떨어진 것이 아니고 ‘믿음’이 떨어진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아픔과 낮아지심’을 외면하는 거예요. 이것이 신약과 구약의 차이점입니다. 지금 선교 단체나 세상 교회사이의 연락을 들어봅시다. 구약 때 주께서 복을 주시면, 양식이 늘어난다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신약 때 양식 떨어지면 도와줘야 한다. 사도행전에도 서로 도와줘라 했으니 도와줘야지, 라고 하는 거예요. 이것은 구약의 구조와 신약의 구조를 몰라서 그래요.
구약의 구조는 수평적인 겁니다. 서로 인간이 어느 정도 이것을 설명하려면 2~3시간 필요한데, 나중에 가야산에서 듣고요.ㅎ 가야산 못 가면 생중계로 할 테니까 들으시고, 구약 때는 말 잘 듣고 주님 의지하면, 갑자기 전쟁에서 승리케 되고, 만약에 하나님께 말 안 듣고 다른 나라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그 나라에 종살이 되도록 고 장치가요 인간의 육신과 관련해서 고렇게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 해 줍니다.
근데 신약에 오면, 고건 옛날 언약이 육신으로 십계명을 지키고, 율법을 지켜야 될 시대이기 때문에, 육신에 관한 걸 이야기해요. ‘니가 어디가든 말씀을 지키면, 들어가도 떡이 나오고 머리가 되고, 이렇다 말이죠. 니가 이 땅에서 농사도 잘 되고, 말을 안 들으면 농사 져도 가시가 돋고 저주 받는다. 이게 하나의 수평적인 , 육적인, 세상적인 것을 가지고 하나님은 너와 함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시대가 그 때는 율법 언약, 모세 언약이기 때문에 그렇다 말이죠.
근데 신약에 오면, 서서히 다윗 언약부터 보면, 그 약속의 땅을 포기하더라도 다윗의 등불을 포기하지 않으면, 남의 땅(바벨론)에 가더라도 그게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거예요. 이제 서서히 윤곽 잡히죠?
모세 언약은 안 지키면 당장 벌이 오고 굶어죽고 하지만, 다윗 언약부터 들어가게 되면, 이젠 땅을 버리고 포로 잡혀 가더라도, 다윗 약속대로 믿으면, 거기서 주께서 하나님 백성답게 살 수 있습니다. 그래도 신약에 오면, 이제는 주님께서 떡 주고, 아까 뭐 줍니까? 참기름 주고...밀가루 주고 하잖아요? 주님께서 밀가루 주고 참기름 주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를 주시는 거예요. 근데 교회에서 언제부턴가 ‘피’, ‘헤이, ’피, 피를 조롱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 정말 도와줄 형제입니다.
‘집사님, 형제님, 예수님 고통 잊어버리면 인간 아닙니다. 지금 당장 예수님의 피, 희생의 고통 잊어버리면, 주께서 재림하시면 지옥 갑니다.’ 라는 것이 결핍 돼 있고, 그 결핍된 것을 채워주는 것이 열린 교회고, 그걸 도와줘야 된다는 겁니다.(아이고, 힘 들어라.) 이게 교회에서나 선교단체에서는 뭐냐? 구제, 니네 교회의 예산가운데 몇 퍼센트야? 구제비 몇 퍼센트야? 맨 날 따지는 게 구제비 몇 퍼센트야? 선교 비 몇 퍼센트 책정 했는데? 그거요 선교 비 50% 책정하면 구원 받습니까? 그거 지옥 가는 길입니다. 거기에 사람들 껌뻑 다 속아 넘어갑니다. ‘아이고, 성경대로 하는구나, 서로 구제하는구나.’
지금 구제는 그게 구제가 아닙니다. 세끼 때꺼리 없다 할지라도, 주여! ‘예수님의 피‘ 감사하면서 굶어죽이면 나 복 입니다.’라는 마음을 갖추어져 있는 것, 그것이 예수 안에, 예수라는 새로운 열린 구조 안에 들어있는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그거 도와줘야 됩니다. 그거 도와줘야 돼요. 행함 주장하는 사람이 기도빨 좋다고 뭐 어떻고, 어떻고 하는 사람, 도와줘야 됩니다. ‘당신 기도빨 자랑하지 말고, 다른 거 쓸데없이 하지 말고, 당신이 십자가 앞에 죄인인 것을 알면, 당신 구원 받습니다.‘ 그거 도와줘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점심시간에 조용하잖아요?...ㅎ 왜? 다 아시니까...ㅎ 그리고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교회, ’십자가 피‘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결핍을 채워주는 정말 다윗을 도와주는 열린 구조안의 복 받은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