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정하였음이라
삼하17:14
(삼하 17:14, 개역)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모략은 아히도벨의 모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파하기로 작정하셨음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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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정말 완벽하게 다윗을 제거하고
사람들을 왕께 돌아올 방법을 제시합니다.
압살롬이 그냥 아히도벨의 말을 듣고
그대로 시행하면 될 터인데
후새를 부르라고 합니다.
압살롬의 입장에서는
아히도벨과 후새 사이에
그 어떤 모순점이 없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작정하심이 개입하면
차이가 발생하면서
자살로 이어지는 비타협적 결과가
일어납니다.
그 차이가 어떤 차이일까요?
역대상 14:10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께 물어 가로되
내가 블레셋 사람을 치러 올라가리이까
주께서 저희를 내 손에 붙이시겠나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내가 저희를 네 손에 붙이리라 하신지라”
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에게는 자기 세계라는 것이
없습니다.
다윗은 사람에게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묻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세계 앞에서
자기 세계란 성립되지 않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
즉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온 것조차
자기 세계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일어난 일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 앞에서
자신을 이해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압살롬이나 아히도벨에게는
이런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모조리 오직 ‘자기 세계’ 확립을 위한 일로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결국 아히도벨은
자신의 견해가
압살롬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살하고 맙니다.
이런 모습이
신약 때의 가룟 유다를 닮았습니다.
마태복음 27:3-5절을 보면,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게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가룟 유다가 왜 예수님을 팔아 먹었습니까?
여기에 아히도벨의 사고방식이 작용합니다.
가룟 유다는 자신의 계획에
예수님이 들어오지 않으니
예수님을 팔아 먹었고
그것이 양심의 가책이 되어
괴로워서 자살한 것입니다.
그는 끝까지
자신만의 세계를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세상을
주님의 세계로
건네주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히도벨의 자살도
다윗을 통한 하나님의 계획을
인정 못하겠다는 차원에서
자살한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부인하거나,
자기를 포기하는 정신과
상관없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늘상 짜증내고, 화도 내고,
예수님의 영광보다
자기 영광과 이익을 우선시 하면서
살아갑니다.
자기 계획에 차질을 발생되면
비록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언제든지 원수 취급할
만반의 준비자세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든,
세상살이를 하든
존재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 무엇도 날 대신할 정도로
가치 있는 바는 없다는 겁니다.
이 ‘대신 할 수 없음’이
확실한 이상,
내 계획이 관철되지 않는 상황이라면
더 이상 내가 살 이유가 없는 상황이라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하지만 다윗에게나 후새에게나
인간의 자기 권력 집중은
이로 인해
그 어떤 ‘대신 하심’을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거부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
우리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따로 누군가 끼어 드는 것을
의아해 여기게 됩니다.
즉 “내가 하나님을 잘 섬기면 될 문제를
무엇 때문에 번거럽게
제 3자가 필요한가?”라고
나서게 마련입니다.
만약에 ‘제 3자’의 끼어듬을 인정한다면
이는 곧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 아니구나’를
인정하는 바가 됩니다.
사람이 자신의 작정함과
자기 결정 앞에,
다른 요소가 끼어 들면
당황하고 미워하게 됩니다.
외부적 요인이 작용해서
꼭 일이 안되는 쪽으로
진행된다고 칩시다.
과연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작정하심을
즐겁고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까?
자기가 확정해놓은
자기 결정이 있는 이상,
따로 하나님의 작정하심을
부담스럽게 여기게 되어 있습니다.
학생들이 시험지를 받아놓고서는
전 날에 미리 짐작하기를
‘이 문제는 안 나올거야’라고 짐작했던
그 문제만이 나왔다면
그 학생은 자기 자신과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감정을 갖게 될까요?
우선 자신이 자기를 믿지 못해서 한탄스럽고,
그런 자아를 유발시킨 하나님이
원망스러울 것입니다.
즉 “왜 신께서는
내가 나를 믿지 못하게 만드는가?”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 응답은
너무나도 간단합니다.
“하나님 믿으라고
나는 너를 못믿게 하는거야”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곧 ‘너를 대신해서
다른 자가 등장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자기 권력을 쥐고 있는 자는
자신의 신앙심이
이 현실 속에서
얼마나 큰 권력으로
효능이 작용하는지를
시험하고 측정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나타난 결과를 두고
자신의 신앙심의 질을 결정하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작정하심’을 대드는
불신적인 조치입니다.
하나님께서 ‘대신 하심’의 조치를
미워하는 바가 됩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이 ‘대신 하심’으로 적용시킵니다.
인간의 모든 일은 내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든 일은 내일이 없고
바로 지금, 인간의 일과 비교하는
그 사건 속에서 나타납니다.
후새의 등장은
다윗언약이 갖고 있는 ‘작정하심’이
인간들의 분주함과 치밀한 계획에도 불구하고 저지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는데
의의가 있습니다.
인간이란 절대로 가룟 유다를 못 벗어납니다.
항상 예수님은 우리를
자신의 계획 달성을 위해
이용하십니다.
이 이용 과정을 통해서
인간들은 철저하게 무시당해야 합니다.
바로 이 작업의 장애로 등장하는 것이
양심이라는 겁니다.
양심이란
인간 고유의 장점이라기 보다
인간의 본질적 죄된 모습이라 할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양심에 숨고, 양심에 숨기는 일을
평생 반복하게 됩니다.
하지만 가룟유다는 그 양심으로 인해
자살이라는 행동을 낳았다고
생각해보세요.
후새가 아히도벨과의 차이나는 점은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
다윗의 자리로서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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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강-삼하17장14-(작정하였음이라)-2sa100704
2010-11-20 19:10:55 녹취 : 이한례
하나님의 말씀 사무엘하 17장 14절입니다. 구약성경 491페이지입니다.
사무엘하 17:14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모략은 아히도벨의 모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파하기로 작정하셨음이더라” 아멘
요 짧은 14절 한절입니다. 한절에 사람이름이 몇 명 나오느냐 하면, 압살롬 나오고 아히도벨 나오고, 그담에 후새 나오고 이스라엘 사람들 나오죠. 이스라엘 사람 빼면, 세 명의 중요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여러 번 이야기 했습니다만, 사람이름 나올 때마다 설교에 앞서 약간 아, 휴, 다시 한 번, 어휴 한숨이 나옵니다. 내 인생도 챙기기 바쁜데, 옛날 사람, 그것도 성경책에 깊숙이 들어있는 사람까지 챙기라 하니까, 이 바쁜 시간에 어이 다 챙기겠는가? 우리가 외면하기 쉽거든요.
근데 이거 하나 아시면 돼요. 3명이 등장하는데, 이 3명 가지고 하나님께서 조를 짜가지고 뭘 설명하려고 합니다. 뭘 설명 하냐 하면, ‘대신 죽었다’는 것이 성립이 되느냐, 마느냐 하는 성립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만 있다면, 인간 있고 하나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 쳐다보는 것으로 구원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등장해 버렸어요. 예수님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아이 내가 여기 있고, 하나님 저기 있으면, 그냥 내가 하나님 섬기면 되지, 왜 중간에 끼느냐 말이죠.
예수님이 그걸 매개자, 익히 아는 용어로서는 중보자, 매개하는 것, 매개라는 말이 상당히 어려워요. 중매쟁이, 걸쳐서 가는 것, 우리는 중매쟁이 있다는 게 짜증스럽다 말이죠. 내가 하나님 알고 하나님이 내 알면, 왜 중매쟁이가 왜 필요합니까? 하나님 저 하나님 이렇게 좋아합니다. 하면 끝나는 문제를 왜 하나님과 내 사이에 누가? 제 3자가 끼어드는가 말이죠.
그래서 사람들이 기독교를 싫어하는 거예요. 그냥 신을 믿는 이슬람교나, 신을 믿는 힌두교, 그리고 교회는 안 다녀도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인정하는 이런 무종교이지만 하나님은 인정 해할게라는 그것이 왠지 편하고 홀가분하고 그렇지, 중간에 예수 끼어버리면, 하나님 알아야 되지, 예수도 알아야 되지, 이렇게 귀찮기 짝이 없는 거예요. 예수님이 끼어드는 이유는 가로막기 위한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세상에서 후새 같은 사람, 다윗 같은 사람만 있는 게 아니고, 아히도벨, 압살롬 같은 사람도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끼어드는 효과가 어떤 효과냐 하면, 압살롬, 아히도벨이라는 이 나쁜 자, 이 나쁜 자와 후새와 다윗이 어떤 차이를 갖고 있느냐를 알라는 거죠. 어떤 차이를 갖고 있는가? 뜸들이지 말고 바로 직탕으로 결론 내리면 이렇습니다. 압살롬과 아히도벨은 내가 끌어 모은 힘으로 나는 인간답게 산다. 권력 갖고 있으니까 힘으로 나는 살아갈 수 있다. 힘없으면 인간 대접 못 받는데, 힘 있으면 인간 대접 받더라. 고거 줄창 고런 식으로 인간 살아온 사람이 아히도벨이고 압살롬입니다. 그래서 압살롬과 아히도벨이 뭐가 귀찮으냐 하면, 중간에 끼어드는 자가 귀찮아요. 내가 끌어 모은 힘이 좋지, 중간에 끼어들면 자기 힘 빼앗아 갈까 걱정스럽다 말이죠.
그런데 거기에 비해서 다윗과 후새는 무엇을 아는 사람이냐 하면, 누가 대신 죽으심으로 내가 구원 받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내가 내 힘 가지고 하나님께 잘 보여 가지고 내가 열심히 기도해서 은혜 받아 구원받는 그런 문제를 가지고, ‘난 못합니다. 기도해도 소용없습니다. 누가 내 대신, 내 대신, 내 대신, 내 대신...., 찾는다는 자가 좀 의지가 없고 이상스럽게 여기지는 않습니까? 우리 교인들 말고..ㅎ 이 방송 보는 사람 말고, ㅎ ’하나님 인정하십니까? ‘녜, 복 받았네요. 구원받았습니다.’ 이게 더 쉽지, ‘하나님 인정하십니까?’ ’인정합니다. 그것 가지고는 안 되거든요. 예수님을 알아야 되는데요.‘ 그러면 골치 아파요. 내가 하나님 알고 하나님이 내 알면 끝나는 문제지. 전에 이야기 했잖아요?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으면 끝나는 문제 아닙니까?
그런데 거기에 예수그리스도가 끼어들었고,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라, 하라 하시면 되는데, 십자가에 죽으시고 ‘니 대신, 대신 죽는다.’ 라는 이야기를 언급을 하면서, 우리에게 ‘나를 믿어야 구원받는다. 신을 믿는 자는 멸망 한다 지옥 갔다. 하나님, 여호와 믿던 자들 다 지옥 갔거든? 그런데 나는 길이요..., 나를 믿는 자만 천국 갔단다.’ 라는 그 이야기를 우리보고 그걸 이해하라는 겁니다. 지금 우리에게 아무 힘도 없고, 우리가 세리와 창기같이 강도같이 이렇게 정말 내가 내 쳐다봐도 실망스러운 존재하면, ‘그래, 주여! 내 대신, 내 대신, 찾고 싶은데, 저와 여러분들, 이 세상에서 한 가닥 하면서 여기까지 오지 않았습니까? ㅎ
이러다가 맞붙으면 남한테 전부 다 큰소리 칠 수 있는 국민이다 말이죠. 7:0으로 진 팀이 무슨 축구를 논합니까? 북한 이야기입니다. 북한이 축구 이야기 하겠어요? 북한이 7:0으로 포르투갈한테 졌는데...., 그거하고 그리이스를 2:0으로 이긴 한국 팀 같으면, 우리는 축구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말이죠. 축구에 대해서 박 지성, 박 주영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는데, 북한 축구팀이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축구 나 모르거든?’(고개 푹 숙이고) 이래 된다 말이죠.
‘내 대신, 주여 내 평생 살아봐야 히마리 없고, 힘없는 인간입니다. 내 대신 누가 매개체로 내 자리 오지 아니하면, 내가 있는 자리에 나만 홀로 덜렁 남으면 안 됩니다. 내 대신 누가 들어오셔야 됩니다.‘ 라는 것이 오히려 인간으로서는 있는 힘 다 빼버리고, 자기 자존심 명예 다 버린 진짜 성도다운 모습인데, 그 차이를 주께서 만들어 가시는 거예요.
만들어 가시면서 어떻게 만들어 가시느냐 하면, 아히도벨이 인생을 어떻게 끝장내는가를 보자는 겁니다. 여기에 14절에 보면, 압살롬이 하는 말이, 후새보다 아히도벨의 모략이..., (내가 말을 반대로 했네요. 죄송합니다. 지금까지 한 거 반대로, ㅎ 이름이 반대로) 후새의 모략이 아히도벨보다 낫다 하니, 고담에 내 말이 맞습니다. 17절에 봅시다. “아히도벨이 자기 모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나귀 안장을 지우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기 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메어 죽으매, 그 아비 집에 장사 되니라.“ 이래 돼 있어요.
아히도벨이라는 사람이 가룟유다 같이 자살했어요. 권력을 추구하고 쉽게 말해서,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한다. 누구든지 내 인생에 끼어들지 마라. 뭐 내 대신 살아준다고? 나 필요 없거든? 나 내대신 살아주는 인생, 나 그거 안 믿거든? 내가 필요한 것은 내가 원하는 내 인생 살아가는 것, 그거만 필요하거든?’ 라고 했던 사람의 결과는 뭐냐? 자살로 끝났습니다.
여기서 약간 어려운 거 해 봅시다. 여러분! 세계란 말과 세상이란 말이 좀 달라요. 어감이 달라요. 눈에 보이는 이 세상, 해와 달과 동물들과 사람들이 있는 이 세상, 그냥 있는 내가 거기에 배속돼 있고 소속돼 있는 눈에 보이는 자연 세계를 이야기 하는 반면에, ‘ 나의 안방은 나의 세계라, 세계란 말은 어디까지나 중심이 내 중심이다, 라는 뜻이 들어 있어요.
제가 세상과 세계를 나누느냐 하면, 세상이라 하는 것은 너 조금 떼 가고 너 조금 떼 가고 나 혼자 사는 게 아니잖아요? 내 세상만이 이 세상이 아니거든요. 헷갈리지만 대충 넘어갑시다.ㅎ 세상이라 하는 것은 나의 세상이 전부가 아닌데, 사람들은 뭐냐 하면, 이 세상이 어떠냐를 관심 있는 게 아니고, 나의 세계 이게 관심이 있는 거예요. 눈만 뜨면 애들 보면서 보면, 옆집이나 다른 집에는 관심 없어요. 나의 세계를 내가 어떻게 구축하고 어떻게 마련하고 장만할 수 있는가? 이것만 잘 되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좋은 세상~~입니다. 참 세상 좋아~~! 나의 세계 괜찮으면, 온 세계 되는 거예요.
근데 이 말하는 것은 나의 세계를 세상 사람이 안 알아주면, 나의 세계가 허물어지면, 자살합니다. 이 아히도벨처럼, 가룟 유다처럼. 결국 나의 세계를 장만한다는 말은 ‘내 대신 돌아가시는 분,’ ‘그런 것은 나의 세계에 나는 안 둔다. 들어오지 마, 다 귀찮아. 하나님이여 기다리세요. 내 세계 만들어서 이거 들고 갈 테니까, 이 세계나 크게 키워주소.’ 이래 되는 거예요.
어떤 큰 교회 있다 합시다. 교회 수가 서너 명 되는 거 같으면, 뭐 예수님 이야기 하겠는데, 교인 수가 5천명, 6천명되면, 예수 이야기 쑥 들어가 버립니다. 그동안 얼마나 노력했으면 큰 교회 됐습니까? 이것은 목사, 그 교회가 자기 세계가 돼 버려요. 그 세계가 돼 버리면, 그 5천명과 부동산과 동산과 그 인원수가 없다 할지라도, 나는 우리 대신 죽으신 십자가만 있으면 족합니다. 라는 사람은 점점 더 그 세계에서 추방되게 돼 있어요.
언젠가 여러분에게 여러 번 이야기 했죠? 서울의 사랑의 교회가 사람이 많아서 성전을 수천억 들여서 짓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지만, 그거 문제 해결 간단합니다. 복음 아시는 목사님 가서가지고, ‘ 이거 교회 아니고, 절이거든요. 여러분 똥입니다. 여러분! 이 교회도 믿지 마시고, 이 교회 다녀도 지옥 간다는 것을 믿으시고, 구원 받는 것은 사랑의 교회가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내 대신 죽으심으로 구원합니다. 이 한 소리 하면 다 나가버립니다. 왜 다 나가느냐 하면, 교회 올 때 노림수를 가지고 옵니다. 아히도벨, 압살롬 같은 인간들이 교회 와요. 자기 세계를 더 구축하기 위해서, 이 세상이 나의 세계 되기 위해서....
한번은 인터넷 뉴스를 보니까, 약간 마음이 찡그려지는 뉴스가 등장했어요. 서울 서초동에서 길을 건너던 부장검사가 택시에 치어서 죽었다. 라는 뉴스가 떴어요. 그걸 보고 마음이 우울하고 찢어지는 이유는 뭐냐 하면, 부장검사 죽으면 뉴스 나오고, 부장 검사에게 고생당하는 피고 죽으면 개입니까? 왜 같은 인간인데 부장검사 죽으면 뉴스거리가 되고, 보통 사람 아줌마 죽으면 뉴스에 안 나옵니까? 그것은 부장검사의 우리가 부러워하는 힘이 거기에 걸쳐 있기 때문에..., 아이, 부장검사 될 만큼 자기세계 이룬다고 얼마나 애쓰고 고등고시, 사법고시 친다고 얼마나 애를 썼노? 아이고, 그 집안 얼마나 떵떵 대고 부장검사니까 대단한 집안인데..., 우리는 그 사람이 갖고 있던 힘이, 내가 평소에 갖고 있던 힘을 앞서서 갖고 있다는 점에서 아까워 죽는 거예요. 내가 만약에 우리 집안의 부장검사라면, 아이고, 얼마나 안타깝겠느냐 말이죠. 부장검사 죽어서 화장터에 가서 가루되면 뼛가루가 이쪽 가루나 개죽어서 나온 가루나 똑같은 흙에서 나와서 흙으로 가는 똑같은 흙입니다. 흙을 하나 뭉쳐 놓으니까 부장검사 되고, 흙 뭉쳐놓으니까 개 된 거예요.
주님께서는 그런 차이를 없애기 위해서 대신 죽으신 겁니다. 대신 죽으심 앞에서는 어떤 인간이 자기 세계, 자기 권력은 무용지물이 되는 겁니다. 아무짝도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아먹은 이유가 그겁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 팔아먹은 장면이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해서 가룟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놓고 스스로 목메어 죽었다 돼 있잖아요? 그래 가룟 유다가 뭐냐? 죽어가면서도 자기 인생을 주님의 인생으로 등기할 생각이 없는 거예요.ㅎ 얼마나 못됐습니까? 자살할지언정 내 인생이 주님을 위한 인생이라고 주님 것이라고 넘기고 싶은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인생을 주님에게 넣어버리면, 나는 그동안 구축했던 나의 세계가 날아가 버리잖아요? 그러면 살아도 살 재미가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아, 이건 정말 무서운 이야기 아닙니까? 세상이 있고 이 세상에 예수님이 오시더라도 아무리 세상이 아름답고 봄, 여름, 가을 있더라도, 세상이 아름다워도 나의 세계가 아름답지 않으면, 나는 살기 싫다 이 말이거든요 결국. 아름다운 것이 나의 세계가 될 경우에만 내 안에서만 아름다울 때만 나는 이 세상을 아름답게 보겠다는 뜻 아닙니까? 남이야 죽든 말든 내만 잘 되면 그만이다.
그래서 우리는 압살롬과 아히도벨의 내용이 이 성경에 나온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나의 세계는 나의 재미로 살겠다고 해서 ‘주여! 누가 내 대신 내 인생 싫어요. 대신 살아줄 인생, 대신 죽어줄 인생 없습니까?’ 라고 고 선으로 넘어가는 것이 과연 인간의 힘으로 되느냐 하는 문제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여기 압살롬이 후새와 아히도벨 두 사람에게 다 지혜와 모략을 구합니다. 그런데 역대상 14장10절을 보게 되면, “다윗이 하나님께 물어 가로되 내가 블레셋 사람을 치러 올라가리이까 주께서 저희를 내 손에 붙이시겠나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내가 저희를 네 손에 붙이리라 하신지라”
보세요. 지금 압살롬은 누구한테 묻습니까? 압살롬은 사람에게 물어요. 압살롬이 사람에게 묻는다는 말은 사람에게 의지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너희들은 나의 세계 속에 들어있어. 너희는 내 부하직원이야, 내 세계를 유지 고수 하면서 내 세계 잘 되기 위해서 내 세계 확장되기 위해서 참고로 그렇게 묻는 것뿐 이예요.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께 묻는다는 말은 자기 세계를 이용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묻는 것이 아니고, ‘나는 하나님 없이는 나는 내 것도 없습니다.‘ 라는 그런 태도로 물은 거예요. ’하나님이여! 올라 가리이까? 마리까?‘ 아 참, 벌써부터 주께서 내 대신 사십니다.’를 고백하는 태도 아닙니까? 내 인생에 내 것이란 없습니다. 주님의 인생인데, 주님의 인생으로 살려니까 주님이여!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적을 보냈는데, 이 적을 치고 안치고도 내 소관 아닙니다. 어차피 내 인생 내 것도 아니고 주님 거라면 주님께서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내가 공격할까요? 말까요?‘ 라고 물어보는 겁니다.
가룟 유다가 자살할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습니다. 그는 늘 자살하거든요. 주님 십자가 앞에 늘 자살했다니까요. ‘대신 죽으심’이라고 말한 그 자체가 이미 자기는 늘 죽어 있어요. 그런데, ‘누구야, 날 힘들게 하는 것은,’ 이것은 자살할 가능성이 있으면서 계속 버티고 있는 겁니다. ‘그래도, 할 때까지, 나의 세계 포기 못해, 포기 못 먹어’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나라에 어려움을 주시는 것은 그걸 톡 깨버리는 거예요. 만약에 어떤 인간이 호도를 처음 봤을 때, 먹으라 하는 것은 실례입니다. 호도 먹으라 하는 것은 ‘니 이빨 다 깨라.’ 하는 것과 똑 같은 거예요. 한 번이라도 호도를 먹어본 사람은 호도를 먹는 것이 아니고, 다 깨서 부드러운 속살 먹는다는 것을 다 아는 거 아닙니까?
다윗 언약을 호도로 여기고 그냥 줘 버리면, 진심으로 다윗 언약을 이루려고 설치는 인간과 똑같은 거예요. 다윗 언약을 깨야 돼요. 십자가 믿으라 하니까 맹탕 호도처럼 먹으려하니까, 십자가를, 여자들 가슴에 목걸이 하거나 자동차에 매달아 놓거나 십자가 폼 낼 때나 쓰이죠. 진짜 십자가를 톡 깨보니까 뭐냐 하면, ‘내 인생은 없음, 주님 대신 살아 주심.’ 그게 들어 있고, 내가 살고 죽는 것도 주의 대신 죽으심으로 된다. 그게 들어있다 말이죠.
그런데 한국 교회는 이 십자가 가지고 뭐를 하느냐 하면, 십자가 가지고 자기 권력을 모으는 힘으로 작용하는 거예요. ‘십자가 알려 줄 테니까 돈 내라’ 이것과 똑 같은 말입니다. ‘돈 안 가져 오면 십자가도 없어. 저리가’ 이렇다 말이죠. 뭐하고 뭐를 바꾸느냐 하면, 교회가 십자가와 돈을 바꾸어 버렸어요. 제가 어느 자리에서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신학박사가 됐다는 말은, 결국은 예수님하고 신학박사하고 맞바꿔치기 한 겁니다. 신학박사 하러( 가까운 그분도 계시지만)외국에 왜 나갑니까? 주님께서 신학박사 하라는 말이 성경에 안 나와요. 왜 개혁주의는 성경에 없는 소리 합니까? 지금도 신학박사 하려는 사람이 있어요,(이야기하려니까. 여러 사람이 걸리는데..ㅎ)
성경에서는 니 대신 죽으신 분을 증거 하라 했지, 신학박사 하라 한 게 아니에요. 신학박사 따겠다는 것은, 저쪽에서 힘으로, 박사라는 것이 힘으로 작용하니까 나도 힘 있는 것 갖고 있으면, 저 사람을 가지고 힘과 힘이 소통이 될까봐 서로 의사가 소통이 될까봐, 의사가 소통되면, 그쪽 세계와 이쪽 세계가 똑같이 망하게 되는 세계가 되어 버립니다. 저쪽에서 힘 주장할 때, 우리는 아예 힘을 다 빼버려야 돼요. ‘ 나 신학박사 아니거든, 물론 박사교회 나온 것은 맞습니다만...ㅎ 신학박사는 아닙니다.ㅎ 신학박사 제가 나쁘다는 게 주는 것 안 받는다는 것도 어폐가 있지만 제가 이야기 하는 것은, 신학박사 따러 온 사람들이 젊을 때 개척교회 하기 싫어서 믿음이 없으니까, 죽어야 되는데 살고 싶으니까, 살기 위해서 입에 학자의 혀라는 핑계 대면서 자기가 밥 먹고 사는 핑계를 대면서, 믿음이 있는 척 하기 위해서 밖에 나가서 박사 학위 따가지고 신학교 교수나 하려고 이리 온 거예요.
그러면 박사 학위를 그냥 줍니까? 예수를 버린 조건하에 박사 학위를 줘요. 예수님을 만약에 십자가를 정죄해 버리면, 논문에 뭘 쓰느냐 하면, 이 논문을 써도 이 논문은 주님 십자가 앞에 죄악된 것임, 이게 나와야 되거든요. 그거 쓰면 어느 박사가 학위 주겠습니까? 어느 미친 박사가 그걸 보고 이 박사 학위는 의미 없음, 하면 지보고 욕하는 건데 누가 박사학위를 주겠습니까? 철이 없어 박사학위 따 왔다 칩시다. 그러면 그걸 찢어 버리고 주여, 개척교회 하더라도 나는 십자가 복음만으로 내 목숨 바치겠습니다. 대신 죽으신 분이 있는데 이미 살았는데, ‘십자가 피’ 외에는 없습니다. 라는 지혜, 그게 바로 이미 십자가 앞에서 대신 죽으심만 증거 하는 주의 증인되는 겁니다. 그래 제 말이 뭐냐 하면, 가서 박사학위 해가지고 와서 찢으니, 미리 안 받으면 좋다 이 말이죠. 이왕 찢을 거 왜 받느냐 말이죠.
다윗은 깨어지면 그냥 겉으로는 ‘다윗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종입니다.’ 주장하지만. 안에 들어가 보면, 이런 구더기, 이런 권력 주장해서 하나님 주신 세상에 자기 세계를 권력으로 다지는, 있다가 그게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안 되니까, 이래 살려면 왜 사나? 라고 자살하고 마는 아히도벨의 이야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압살롬만을 위해서 작정하셨음이라.
요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셨다는 말은 그냥 작정하셨다는 말이 아니라 대신 죽으심의 예수님 십자가 가지고 진짜 구원 받기로 작정된 자인지, 아니면 지옥가기로 작정된 자인지 고 기준은 ‘주께서 대신 죽으셨다’는 것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느냐를 보는 겁니다. ‘너무 기분 좋습니다.’ 이러면 ‘ 니꺼 엉망 돼도 괜찮지?’ ‘괜찮습니다. 대신 죽으셨는데’ 이런 마음으로 사느냐? 아니면 대신 죽으셨다는 것을 미끼로 해서 따로 자기 권력을 세우고, 자기 밥벌이, 생계유지 하려고 자기 이름 내려고 하는 인간인지, 작정하신 것. 하나님께서 창세 전 예정하신 자는 십자가 대신 죽으심, 고 하나를 집어넣으면 헤까닥 다 드러난다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인도하시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