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16:11-14 - 저주가 복으로

작성자지미박|작성시간26.06.12|조회수45 목록 댓글 0

저주가 복으로
삼하16:11-14


(삼하 16:11, 개역) 『또 아비새와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삼하 16:12, 개역)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

(삼하 16:13, 개역) 『다윗과 그 종자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저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티끌을 날리더라』

(삼하 16:14, 개역) 『왕과 그 함께 있는 백성들이 다 곤비하여 한 곳에 이르러 거기서 쉬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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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축복과 저주의 근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맞추어서
인간의 평소에 하던 행세들도
같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는 우리들로 하여금
평소에 쉽게 하던 행위들이
결코 축복과 가까운 것이 아니라
저주에 가깝다는 것을
드러내게 합니다.

사람이란 눈만 뜨면
자기편한 일만 몰두 합니다.

사람의 모든 행위가
권력의 장을
벗어나본 적이 없습니다.

힘이 되는 곳으로 쏠리고
힘이 엷어졌거나 없어진 곳에서는
주저없이 떠나고 맙니다.

시골에서 점차 사람들이 떠나는 이유도
거기에 있고
도시에 사람들이 날이 갈수록 모이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사람은 힘이 없이는 안되는 일은
전적으로 기피하는 성향을 타고났습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더라고
우선 되는 일이
바로 힘을 모으는 일입니다.

이 점을 하나님께서는
너무도 잘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일을
두 종류의 관점으로 나눕습니다.

인간이 쉽게 할 수 있는 일과
그렇지 않고
인간으로서 도저히 해내지 못하는 일로
나눕니다.

문제는 축복과 저주가
이 기준에 준해서
분류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해낼 수 있는 곳은 저주가 임하고
인간이 도저히 해내지 못하는 곳은 축복이 임합니다.

그래서 축복이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로서만
주어진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자력으로 도저히 해내지 못하는 일이
본문에서도 나옵니다.

다윗은 자신을 저주하는 시므이를
가만 두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 본성인
인간들이 감히 말할 수 있는 태도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자기를 포기할 위인은 없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축복받을 만한 위인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축복이
주어지는 자들이 발생됩니다.

그것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사람의 자력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을
못하게 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
그 사람에게 임했기 때문입니다.

교회 또한 권력의 장임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 평소에 하던 행세대로
권력을 추구하고 그것을 집합시킨다면
그곳이 바로 저주받기로 작정된 자들의 집단이
되는 겁니다.

축복과 저주의 갈림길을
잘 보이는 일이
바로 소돔과 고모라 마을에서 일어났습니다.

롯의 가족은
아버지 롯의 말을 듣고
같이 소돔과 고모라성을 빠져 나옵니다.

그런데 롯의 처는
남편보고 따라 나왔지
결코 남편이 믿는 그 천사의 말을
본인이 곧이듣고 나온 것이 아닙니다.

“뒤돌아보지 말라”는 언명은
실은 하나님께서 혹처럼 붙어있는
롯의 처로 하여금
떨어지게 만들기 위한 요건이었습니다.

남편따라 나서는 것은
여느 여인네라면
쉽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남편이 믿는
그 하나님을 함께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능력입니다.

이처럼 축복이란
같이 모여있다고 해서
다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축복받지 못할 자를
철저히 가려내는 조치에 의해서
진행되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 어떤 구실과 방법을 동원해서도
축복받지 못할 자에게
축복이 돌아가는 법은 없도록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시므이가 다윗이 저주하는 이유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보편적 인간들이 추구하는
그 힘과 권력이
이제 다윗에게서 떠나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갖고 있는 힘과 권력이 탐나서
그 사람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 심판 사건에서
롯에게 붙어있던 롯의 처도
롯이 남편으로서 갖고 있는 힘이 그리워서
나오고자 했습니다만
결국 뒤를 돌아보고서는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은,
사람으로 하여금
축복과 저주를 선택하도록
허용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한 사건입니다.

사람이 좋아하는 그것이
도리어 저주가 되고,
사람이 싫어하는 바가
도리어 축복이 되는 겁니다.

본문에서 시므이는
베냐민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원래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는
12지파가 동등된 수준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12지파 가운데서
유독 다윗 지파에게만
왕을 허락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자연적으로
다른 지파 사람들의 원성을
품게 되어 있습니다.

특정 지파에게 다른 지파가 종속된다는 것은
출애굽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사람들을 오해한 것입니다.

그들은 왕 자리를
이방나라처럼 권력의 우세로
결정 짓는 것이 옳다고
여긴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힘 모음이
하나님이 다스리는 이스라엘에게는
진정한 현실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약한 사람을 구박하기는
참 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들은
힘의 우열 위주로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내 평범하게 삽니다”는 말은
곧 “나 권력 모으기 위주로 삽니다”가 되고
이는 곧 “나 지금 지옥 가는 중입니다”와 같은 말입니다.

이런 사고방식 앞에서
다윗의 몰락은
인간들의 본색이 유감없이 나타나는
계기가 됩니다.

그런데 다윗의 자리, 곧 왕의 자리란
그렇게 힘이 모아지는 자리가 아니라
도리어 힘이 빠지고 깨어져야 하는 자리입니다.

다윗이 아들에게 쫓겨남으로서
다윗의 혈통적 가문은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윗의 자리란
인간이 앉을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긴긴 이스라엘 역사가
이제부터 시작이 됩니다.

왕의 자리란 곧 ‘아들’의 자리입니다.
아들의 자리란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그대로
이 땅에 성취시키는 역할을
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따라서 다윗 계열의 왕들은
이 이스라엘을
두 조각내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왕은
이미 하늘에 계십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인간의 왕 자리를 원했습니다.

이 말은 곧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서라도
자신들이 기대하는
축복된 이스라엘을 만들겠다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허락하시면서
이로서 이스라엘이
철저하게 망하게 하십니다.

힘과 힘의 투쟁과 갈등이 심화되면서
이스라엘은 자체적으로 붕괴되게 될 것입니다.

그 와중에서 진정 하나님의 왕 되심은
권력이 보장되는 자리가 아니라
권력이 빠져버린 자리에는
‘힘없는 왕의 모습’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란 머리되시는 예수님을 섬기는 곳이지
결코 인간 목사의 자리를
인정하는 곳이 아닙니다.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데살로니가후서 2:4의 말씀처럼
악마입니다.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악마를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그 자리를
은연 중에 계속 탐을 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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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5강-삼하16장11-14(저주가복으로)-2sa100627

2010-11-25 17:16:40 녹취 : 이한례


하나님의 말씀 사무엘하 16장 11절에서 14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489페이지입니다.

사무엘하 17:11-14

“또 아비새와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 하고 다윗과 그 종자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저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티끌을 날리더라 왕과 그 함께 있는 백성들이 다 곤비하여 한곳에 이르러 거기서 쉬니라” 아멘


성경은 항상 선만 나오는 것이 아니고 악도 더불어 같이 나옵니다. 그래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기준에 의해서 우리에게 제시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묻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것이 선이고 이것이 악이다. 이것이 축복이고 이것이 저주라는 기준에 대해서 니가 동의 하느냐?’ 라고 묻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의 기준에 대해서 동의할 것 같죠?ㅎ 그런데 성경을 들여다보면, 하나님이 제시하는 축복과 저주 가운데서 오히려 저주 받은 쪽의 사고방식을 우리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늘상 문득문득 발견하게 돼요. 그리고 무엇을 이해하느냐 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저주 받을만하다 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우리가 이해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이세상이라는 것은 미셀후크라는 사람이 잘 지적했는데, 그냥 진공 상태가 아니고, 아침에 눈만 딱 뜨면 힘, 권력에 대해서 주눅이 들고 그것을 탐을 내게 돼 있어요.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은 ‘어떻게 하면 현재 갖고 있는 힘보다 더 큰 힘을 축적할 것인가?’ 여기에 매진합니다. 우리의 행동은 무심코 하는 행동들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힘이 있는 곳으로 쏠리게 돼 있어요. 그리고 그곳에는 죄송합니다만, 하나님이 안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든 안 계시든, 하나님이 계시지 않아서 답답한 적은 없었어요. 다만 우리가 답답한 것은, 우리가 생존의 힘이 없어서 답답했지, 하나님이 없고 예수님의 목소리가 안 들려서 가슴 아파하고 했다면, 인간 다 됐죠? ㅎ 그런 사람은 보통 사람 아니죠?

하나님이 들을지라도 힘이 있는 곳이라면 항상 그쪽으로 발길이 돌려졌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오는 것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도 못 본 척하면 좋은데, 그런류의 사람들을 딱 끄집어 내놓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람을 딱 집어넣어서 딱 비교해 봅니다. ‘니 어느 쪽이야?’ 이쪽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축복해 주고, 그것을 비난하는 사람을 저주하겠다는데, ‘니가 이래도 저주 편에 고집할래?’ 라고 하시니 우리가 난처하게 되는 겁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마라 하니까, 기껏 악마와 인간의 생각이 그런 겁니다. ‘따먹지 마라’ 라는 자체를 베어버리면 그만 아니겠는가? 따먹어 버리면? 판문점 미루나무 베듯이 그 자체를 아예 없애 버리면 이러쿵저러쿵 잔소리 할 것은 없으니까, 잔소리 할 거 없으면 내가 신이 되잖아요? 신의 잔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는 누구나 자기가 본인이 신이 되는 겁니다. 내가 신이 되고 싶을 때문 절대로 신의 음성이 들리는 곳에 가면 안돼요. 그것과 멀리 있어야 돼요. 멀리 있어야 자기가 어떤 행동을 해도 누가 간섭할 사람이 없죠. 그래야 거기서 신의 흉내를 맘껏 즐길 수 있는 겁니다. 그 환경을. 그렇게 신이 되려면, 그냥 신만 되면 안 되고, 바로 내가 신답게 군림하려면 권력이 있어야 하니까, 누구나 권력에 대해서 추구하게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 내용이 그겁니다. 시므이란 사람 나오고 다윗 나옵니다. 시므이란 사람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다윗을 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저주합니다. 저주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현재 너에게는 권력이 없으니까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겁니다. ‘지금 너에게 있던 권력을 날아가 버리고, 권력은 네 아들한테 왔으니까, 너는 힘 빠진, 이빨 빠진 호랑이 꼴이 되었으니까, 니는 나한테 실컷 당해도 싸다.’ 하는 식으로 놀립니다.

자, 제가 여러분 마음속으로 묻습니다. 여러분! 어느 쪽이 쉽습니까? 힘 가진 자를 조롱하는 것이 쉽습니까? 힘없는 자를 무시하는 것이 쉽습니까? 힘 가진 자에게 대드는 것이 힘들고, 힘없는 자를 무시하는 것은 굉장히 쉬워요.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1학년, 2학년, 3학년 같이 있으면서 학급 수가 얼마 안됐으니까 어떤 남학생이 하나 있는데, 그 남학생은 너무나 키도 작고 비실비실해요. 저는 인간성이 좋아서 안 그랬습니다만, 다른 친구들이 오면서 쥐 박고, 화장실에 가면서 쥐 박고, 오면서 쥐 박고했는데, 키가 작아서 출입구 앞에 앉았어요. 심심하면 쥐 박고, 여기서 한번 쥐 박고, 우리 반의 2/3가 툭툭 쥐 박았어요. 그 아이는 몸이 너무 약하기 때문에 반항하지 못하고, 요새 말로 완전히 왕따 당했어요. 저는 안 그랬습니다.ㅎ 애들 왜 저러나? 하나가 그러니까 다들 따라하는 거예요. 하나가 톡 건드려도 아무소리 안 하니까 ‘호오, 고거 재밌데이~. 둘이 건드려도 아무소리 안하고 셋이 건드려도 아무소리 안하고..., 그 친구를 왜 거론하느냐 하면, 제가 우리 동창 사이트 들어가 보니까, 개가 한이 맺혔는지 걔가 나이 육십이 다 되가지고, 온 모임에 다 참석합니다. 그것도 이쁜 부인 데리고...무시하지 마라 이거죠.ㅎ다른 애들은 동창회 참석도 안 하는데, 걔는 사진 찍히는 데마다 다 나와요. ’아하, 한 맺혔구나.‘ㅎ 얼마나 권력이 없었으면 한이 맺혔는지...

제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사람들은 자기가 하기 쉬운 걸 하게 돼 있어요. 하기 어려운 것은 안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니가 진짜 내 심령과 같으냐를 보기 위해서, 인간들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형편을 만들어 놓고, 니가 할 수 없는 것이 나오도록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 안 믿는 것보다, 교회 안 다니는 것보다 교회 다니는 것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교회 안 다니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월드컵 한다 핑계대고 안 나오고, 야구 한일전 하면 핑계대고 안 나오고, 시험 치면 안 나오고, 훨씬 쉬워요. 피곤하면 안 나오고, 장사하면 안 나오고, 훨씬 쉽다 이 말이죠. 훨씬 쉽기 때문에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은 위반하기 좋도록 좋은 말씀을 계속 주시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만약에 발생되면 이걸 기적이라고 간주 하겠다 하시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의 힘이 아니고, 내장된 하나님의 힘이 작용했을 경우에만 그런 경우만 내가 뽑아내겠다는 겁니다. 쉽게, 쉽게 할 수 있는 것, 넓은 길 찾아가는 것은 많은 사람이 찾아가는 거예요. 많은 사람이 갔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좁은 길을 간다는 것은 사람의 능력으로서 이를 수 없는 걸 요구하는 거예요. ‘좁은 길로 가라.’ ‘주님 혼자 가이소.’ 아무도 못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길로 간사람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의 능력이 아닙니다. 바로 그런 요소를 숨어 있으면서 인간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해내는 것으로 은혜주시는 하나님의 흔적을 찾아보자는 겁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만 축복이라는 말을 쓰자는 거예요. 인간이 할 수 있는 축복 같으면, 아까 이야기한 그 친구, 축복 받는 길이 뭔가요? 왜? 줄 서면 앞에 덩치 큰 친구들이, ‘뒤로 가.’ 하고 축복 받는 길이 인간의 할 수 있는 거라면 그런 약한 사람들은 축복 받는 것조차도 소외당할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저주 쪽에 배치해 놓고, 이거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아니하면 도저히 인간이 하지 못하는 그쪽을 축복으로 배치해서,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이렇게 차이난다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약속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교회를 잘 지어 놓고 모이자.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교회에 불이 났다. 교회가 없는데 말씀 들으러 모였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거예요.

저는 오늘 본문 말씀, 저주와 축복 이야기를 하면서, 다윗이 이런 이야기 했습니다. 저주 하니까, 아비새가 하는 말이 ‘쟤 손 좀 봅시다. 쟤 죽여 버립시다. 이렇게 나왔습니다. 여기 아비새라고 친위 지켜주는 군대장이 ’쟤 죽여 버립시다.‘ 하니까 다윗이 말리죠. 왜 말리냐 하면, 다윗 왕에게 대드는 자를 숙청하고 제거하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겁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윗이 한다는 것은, 다윗은 지금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지, 은혜를 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누구나 추구하고 누구나 좋아하는 그 권력을 아직도 이 만큼이나 갖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밖에 안돼요.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발생시키는 것이 언약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보여줄 겁니다. ‘나 이렇게 잘났어. 이렇게 봉사했습니다. 이거는 보여주면 안돼요. 그런데 ’이렇게 나 망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 라고 고백하는 것은 사람의 능력에서 나올 수 없는 놀라운 기적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그걸 밝히려고 합니다. 우리가 특별한 인간은 아니에요. 보통 사람과 똑같습니다. 남 좋아하는 거 다 좋아하고, 남 편안하면 나 편안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특이 현상이 일어나게 하는 겁니다. 분명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주께서는 중지 시키고, 내가 못하는 것을 내 속에서 끄집어내는 일을 하게 하시는데, 그중에서 모델로 제사하는 게 뭐냐 하면, 자기에게 저주하는 시므이를 다윗이 오히려 보복하지 말라고 말리는 다윗의 행동, 이 행동이 너희에게 있느냐고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축복과 저주를 생각하면서 항상 저는 잊지 않는 것은, 소돔과 고모라의 소금기둥 이야기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롯의 처가 있는데, 롯의 처가 할 수 있는 행동이 과연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 할 수 없는가를 먼저 따져 보세요. 자기 남편은 소돔과 고모라, 부동산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일단 떠나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롯의 처는 뭐냐? 실 가는데 바늘가야죠? 과연 롯의 처가 약속을 믿고 남편을 따랐던 건가요? 아니면, 남편 없이 살아본 적이 없는 것이 하나의 일이 되어서 그것이 하나의 습관이 되어 남편 없이 혼자 남아 있다는 것이 신세 처량해서, ‘아이고, 사나 죽으나 남편 가는 길에 같이 있어줘야 한다.’고 따라 나온 거냐? 를 하나님이 물으시는 겁니다.ㅎ

롯의 처가 남편이 알고 있던 믿음에 동의한 게 아닙니다. 남편은 지금 돌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어떤 남자가 왔다. 그게 남자지 천사가 아니거든요. 근데 롯은 천사로 봤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아무리 봐도 천사로 보이지 않아요. 그냥 이쁘장하게 생긴 꽃미남이죠.ㅎ 그냥 이쁘장한 사람이라서 낯선 사람이 이쁘장한 것뿐이지 그것 때문에 멀쩡한 하늘에서 유황불 떨어진다는 이것을 누가 믿겠습니까? 아무도 안 믿습니다. 아무도 안 믿는 것이 인간이 쉽게 할 수 있는 거예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안 믿는 게 주특기입니다.

원래 이 말씀은 어느 것도 믿지 않게 돼 있어요. 그걸 우리 하나님은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근데 믿지 않는 아내와 믿는 남편을 같이 겹으로 해서 하나님께서는 무슨 흔적을 남기냐 하면, 하나님의 축복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행동해서 얻을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건 하나를 준비하신 거예요.

롯의 처가 남편을 따라갑니다. 근데 조건을 답니다. 그 조건은 나중에 알고 보니까, 남편을 따르라는 조건이 아니고 아내 하나 탈락시키기 위해서, 표적수사처럼 그 여자를 탈락시키기 위한 조건을 하나님께서 미리 롯에게 알려주신 겁니다. ‘뒤돌아보지 마라.’ ‘뒤돌아보면 안 된다.’

이것은 전혀 해당사항이 없죠. 우리교회 권사님 계시는데, 권사님한테만 제가 예를 들어 말합니다. ‘권사님, 천국 가는데 하나 주의할 게 있습니다. 절대로 16강할 때 밖에 나가서 응원하지 마세요.’ 권사님 하라 해도 안 합니다. 그 시간에 자야지 붉은 티 입고 무슨 응원을?? 이거는 할 생각도 없고 할 마음도 없는 사람한테는 전혀 해당이 안 되는 조항 이예요. 그런데 그 소리를 아들이 들었다. 티 입고 나갔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축복과 저주, 저주와 축복을 할 때는 그냥 해보고 안 되면, 저주 해줄게. 가 아니라 처음부터 저주 받기로 작정된 항목을 따로 이렇게 삽입을 시켜주는 겁니다. 자녀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죠? 아들한테는 밥을 많이 먹이고, 뚱뚱한 동생한테는 적게 먹이는 방법이 뭐냐? 동생이 콩을 싫어한다면, 콩을 잔뜩 넣어주는 거예요. 그리고 ‘니들 맘껏 먹어라.’ 한다고요. 그러면 맘껏 먹어라. 는 것이 반칙이죠? 왜? 맘껏 먹으라 하려면 양쪽이 맘껏 먹을 수 있는 조건을 줘야 할 텐데, 콩을 잔뜩 넣어놓고 맘껏 먹으라 하니까, 아들은 ‘아이, 내가 좋아하는 콩,’ 하고 맘껏 먹죠. 그런데 동생은 맘껏 먹고 싶어도 콩을 다 골라내고 나니 밥이 남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는 축복과 저주, 저주와 축복을 이미 결정지어 놓고, 거기에 해당되는 조건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조건은 ‘이렇게 해서 저주 받았단다. 너희들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희들 생각하고 똑같지? 그러니 너희는 저주 받는 쪽이야.’

그리고 축복받는 쪽은 ‘ 자 이렇게 축복 받는다. 어떻게 생각해? 니 힘으로 안 되지? 하지만 주께서 해주시면 되지? 그러면 너는 축복받은 자야.’

성경 전체가 그런 거예요. 이걸 가지고 뭐라 하느냐 하면, 성경은 길을 제시하는 책입니다. 11절에 보면, “아비새와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일반성도들이 이걸 볼 때 상당히 어려운 점이 뭐냐 하면, 왜 다윗이 베냐민 사람이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끄집어냈느냐? 그 내막을 찾기는 상당히 어려워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지금 다윗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뭐를 염두에 두느냐 하면, 출애굽 할 때 지파가 13지파입니다. 그 중에서 땅이 없는 지파 레위지파 빼고 12지파예요. 12지파가 동등하게 오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소금기둥 이야기 했듯이 마지막 골인지점에는 동등이 아닙니다. 축복 아니면 저주, 저주 아니면 축복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12개가 어떻게 둘로 나뉘느냐? 거기에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12개 같으면 12지파가 되어야 될 텐데, 왜 이것이 어떤 특정지파가 하나가 우위를 차지해서 그 지파만 복을 받고, 나머지는 저주를 받느냐? 그 이야기를 끄집어내는데, 그 핵심부분에 다윗이 권력을 잃어버리는 사건이 벌어지는 거예요.

베냐민지파라고 이름 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만 축복을 준다는 겁니다. 그래서 만약에 베냐민 지파가 복을 받으려면, 다윗지파 앞에서 무슨 지파를 포기했느냐 하면, 다윗 지파만 선택받았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베냐민 지파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그한테 자복해야 돼요.

주의 이름을 부를 때는 무슨 이름을 포기해야 된다? 나의 이름을 포기해야 돼요. 나의 명예와 명성과 나의 자존심을 포기해야 됩니다. 누구 앞에? 주님의 이름 앞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히 여기게 하옵소서.’ 주기도문에 나오는 주의 이름을 거룩히 하려면, 주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간다면, 매사에 있어서 나의 이름과 나의 영광을 포기를 해야 돼요. 그걸 포기하지 아니하면, 우리 이름에 의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주기도문 기도 하라는 이유가 있어요. 항상 주기도문 정신 가지고 기도 하라는 겁니다. 어떤 기도를 하든지 간에 너의 응답이 너의 자존심과 영광이 된다면, 그 응답은 응답받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만약에 너의 기도의 응답이 너는 무시당하고 예수님만 높아지고 영광과 감사 되거든, 제대로 응답 받은 줄 알아라. 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언제 이야기 했잖아요. 기도원에서 응답 받고 나면 그 응답을 버려야 된다고. 응답을 안 버리고 응답 받은 것을 지고 내려오면, 그것은 주님의 기도의 응답을 가리는 것이 됩니다.

12지파가 1지파 되려면, 그러면 12지파에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다윗 니 지파는 뭐가 잘났느냐?’ 라고 하겠죠? 고 이야기 하고 마치겠습니다. 이거 상당히 어려운데요. 다윗 지파의 중심은 ‘왕의 자리’입니다. 원래 왕의 자리라 하는 것은 이스라엘에는 없어야 될 자리예요. 왕의 자리는 하나님의 자리가 왕인데, 왕이 있는데 무슨 왕의 자리를 만듭니까? 왕(하나님)이 계신데 왕의 자리를 만든다는 말은, 이젠 하나님은 안 보겠다는 뜻이거든요.

교회의 머리되시는 분이 예수님이다. 그러면 그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 듣고 살면 돼요. 변화 산에서 ‘너희는 저의 말을 들어라.’ 했거든요. 그 말씀이 귀에 들어온다면, ‘주여, 저는 주의 말씀만 듣겠습니다.’ 이러면 그 교회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주의 말씀이 안 들어오니까 주의 말씀을 대신해서 목사를 세워서, 목사 당신 말 들어서 구원 받겠습니다.‘ 하고 나오는 사람이 생기는 거예요. 그러면 그 목사의 자리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 받기 위해서 목사를 중심에 두면 안 됩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와요.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저주하기 위해서 목사의 자리를 두는 거예요. 예수님 말씀을 들으면 되는데, 꼭 목사를 두겠다는 말은 결국 그 교회는 ’한번 혼나게 저주받아 봐라.‘ 하는 식이 되는 겁니다.

그 자리가 다윗의 자리예요. 그러니까 다른 집하고 오해한 거죠. ‘ 니 뭐 잘났느냐?’ 이래 나오죠. ‘니 무슨 축복이냐?’ 근데 당사자 왕의 권위를 갖고 있는, 왕의 가문을 갖고 있는 다윗은 ‘아니야, 아니야, 그게 아니야, 이러면 안 된다는 게 왕의 자리야.’ 라고 알려주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의 후계들이 있던 그 줄들의 왕들이 왕 때문에 나라가 망해요. 그렇게 망하는 것은 이것 때문에 망한단다. 는 것을 보여주는 자리가 다윗의 자리가 되는 겁니다. 참 쉽죠?ㅎ

목사를 세웠으면 목사를 통해서 예수님의 뜻이 뭐며 예수님의 깊은 진짜 의도가 뭡니까? 그것만 목사를 통해서 받아내면 되는 거예요. 더 이상 안 나온다. 안 나오면 바꿔야 되죠. 약 떨어지면 바꾸듯이 바꿔야 되는데, 목사가 없이는 주의 말씀이 안 온다는 거예요.ㅎ 그러면 자기가 누구 덕에 사느냐 말이죠. 예수님 덕으로 살아가고 있잖아요. 목사 덕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잖아요?

다윗의 자리란 이렇게 해서 인간은 주의 긍휼과 용서 없이는 안 됩니다. 를 대표해서 보여주는 왕의 자리, 다윗의 자리입니다. 그 아래로도 줄줄이 권력을 탐하여서 망하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홈이 파였어요. 우리교회 있으면, 중간에 지진이 난 것처럼 홈이 파여서 계곡이 갈라지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지고 왕의 자리를 가지고 남과 북으로 갈라지게 만듭니다. 남쪽으로 북쪽으로 갈라졌다는 것은 나라꼴이 안 된다는 겁니다. ‘원래 이런 나라는 없어.’ 이런 뜻입니다. 갈라지게 하는 그 틈을 통해서 인간의 죄가, ‘ 아, 이래서 망하는구나.’를 알게 하려고 그 틈새에서 주님이 왕이 되어 드러내는 겁니다. 일그러진 왕, 사람들한테 핍박받은 왕, 상처받은 못자국과 창 자국.

권력이 있는 자리가 왕의 자리인지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인간이 권력을 추구하는 것 때문에, 오히려 뺨 맞고 모든 권력을 빼앗긴 십자가의 자리가 진정한 이 땅에 오신, 그렇게 그리워하고 그리워했던 왕의 모습이 그 모습 이예요.

어떤 사람이 말했습니다. ‘절대로 첫 사랑을 만나지 마라.’ 왜냐하면 그 첫 사랑을 만나는 순간, 지나온 너의 모든 과거가 환상 속에 살아왔다는 것이, 현실이 아닌 걸 현실이라고 우기며 살아왔다는 것을 크게 실망할 것이라는 거죠. 뭐가 실망이냐 하면, 그때 그 아름다운 그 여학생은 없는 거예요. 이 땅에. 이 지구상에 없다는 거예요. 현실은 없는데 내 머리 속에 있으니까, 이 갭, 이 격차, 사람 미치는 겁니다. 아침에 동양화 얘기 했죠? 그림은 그리면 그릴수록 사람은 환상에 빠져요. 문제는 환상이 많으면 그것이 없다는 거예요. 바닷가가 멀리서는 아름답죠. 가보면, 지금 꽃게 때문에 꽃게 값 떨어져서 고민하고 있는 어부들 몇 명 있어요.ㅎ 멀리서 보면 그렇게 소나무가 아름다운데 가까이 가면, 구역질나는 바다 냄새, 아이, 여기서 어이 삽니까? 현실 문제 들어가죠.

사람은 비현실적인 것을 많이 안고 있으면, 본인이 비현실 적이 되기 때문에 점점 더 실망스러운 그런 삶을 살 수밖에 없어요. 사람들이 권력을 추구해서 권력의 끝에 어떤 올 것인데, 제가 시간 관계상 읽지는 않겠습니다만, 데살로니가 후서 2장 4절에 보면, 바로 권력의 끝에 뭐가 있느냐? 권력의 끝을 잡고 마귀가 등장해요. 그런데 마귀가 아니라면 우리가 권력을 추구하는 교회가 부흥을 추구할 때, 교회가 부흥을 추구하는 그 자리에는 마귀가 항상 앉아 있어요.

그러면 교회도 깨어지고 교회의 권력의 힘도 깨어졌으면 그 모든 비참한 곳이 어디냐? 예수님이 거기 계시죠. 예수님은 바로 모든 힘없는 사람한테 밉상 당한 모습으로 방치된 모습으로 무시당한 입장에 있죠. 그게 현재 오늘 날 누구의 모습이냐? 다윗의 모습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다윗은 지금 권력을 다 빼앗겼어요. 원래부터 없는 사람이 아니고 있었는데, 빼앗겼어요. ‘옳다구나’ 하고, 베냐민지파 시므이가 인간이 쉽게 할 수 있는 저주를 퍼붓습니다. 그럴 때 다윗은 하나님의 계획을 알아요. ‘가만 놔둬라. 그 저주가, 저주 하는 너희가 저주 받게 되고, 저주 받는 나는 도리어 축복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이 세상 다루는 원리라는 겁니다.

홈이 파이면서 나라가 둘로 쪼개질 때, 그 밑에서 불길이 올라오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여러분! 우리 매일같이 우리 가정이 둘로 쪼개지고, ‘아비나 자식을 나보다 사랑하는 자는 나에게 합당치 않다.’ 항상 내 자아가 둘로 깨져서, 이렇게 권력만 추구하고 힘만 추구하고 남 앞에 쓰레기만 좋아하는 이 내부가 깨어져서 그 안에서 ‘아이고, 이놈아, 니같은 인간을 내가 내 피로 용서해준다. 이놈아, 이게 축복이야.’ 라고 그러한 소리를 날마다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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