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15:31-34 - 후새와 아히도벨

작성자지미박|작성시간26.06.13|조회수61 목록 댓글 0

후새와 아히도벨
삼하15:31-34


(삼하 15:31, 개역) 『혹이 다윗에게 고하되 압살롬과 함께 모반한 자들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나이다 하니 다윗이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하니라』

(삼하 15:32, 개역) 『다윗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루턱에 이를 때에 아렉 사람 후새가 옷을 찢고 흙을 머리에 무릅쓰고 다윗을 맞으러 온지라

(삼하 15:33, 개역) 『다윗이 저에게 이르되 네가 만일 나와 함께 나아가면 내게 누를 끼치리라

(삼하 15:34, 개역) 『그러나 네가 만일 성으로 돌아가서 압살롬에게 말하기를 왕이여 내가 왕의 종이니이다 이왕에는 왕의 부친의 종이었더니 내가 이제는 왕의 종이니이다 하면 네가 나를 위하여 아히도벨의 모략을 패하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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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보면 3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다윗과 후새와 압살롬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번호를 매긴다면,
각 사람 당 1, 2, 3 이라는 번호를
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사자 대신 번호만을 나열하면
1의 사람,
2의 사람,
3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 1의 사람, 2의 사람, 3의 사람 사이에는
그 어떤 우월함과 차등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숫자는 하나하나가 동등합니다.

숫자로만 따져서 1이
2가 3보다 못한 숫자도 아니요,
3이 1,2보다 못한 숫자도 아니요
월등한 숫자도 아닙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서로를 보면서
이런 관점에서 사람들을 대합니다.

나는 76번이라면
당신은 544번 사람으로 만납니다.

76이라는 숫자가
544보다 조금도 못하지 않고

544라는 숫자는
76이라는 숫자보다
더 잘나지도 않습니다.

오늘날 국민 투표가
한 사람당 한 장만 할 수 있다는 원리가
이 원리입니다.

과연 이 민주주의적 원리가
하나님 나라까지 통하겠습니까?

1,2,3 중에서
그 중 한 사람을
바짝 위로 치겨 세워버리면
나머지 두 사람과는
다른 차원으로 분리됩니다.

이렇게 되면
바짝 올려진 그 사람으로 인해
나머지 두 사람은
강제로 좌측과 우측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바짝 올라간 그 사람으로 인해
경사면에 발생합니다.

꼭지점을 중심에 생겨버리면
나머지 두 사람은
양쪽 경사면이 되어버립니다.
서로 마주보는 식이지요.

본문의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다윗은
자리는 인간이 선택한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위히여 선택되어진 자리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은
그 위상을 흉내 내거나
모방할 자격조차 없습니다.

오직 세워놓은 2등변 삼각형의
중앙 꼭지점 위치를
다윗이 차지하게 됩니다.

여기에 준해서 한 사람은
그 다윗의 위상을 인정하는 쪽이고
다른 한쪽은 거기에 반대한 쪽에
포진하게 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
양쪽에 두 개의 십자가가
더불어 있었던 경우와 같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서
어지간하면 예수님께서
같은 날에 같은 장소에 죽은
십자가 동기동창을
둘 다 구원해주실만도 한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한쪽은 예수님과 더불어
낙원에 가게되었지만
다른 한쪽은
끝까지 예수님을 욕하다 죽습니다.

즉 예수님의 특이성을
끝까지 인정못하고
예수님이나 우리나 다같은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숫자로 표시하면
그저 1,2,3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겉으로는 그렇게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중앙꼭지점이 되게끔
애쓰게 됩니다.

인생살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목적을 두고 움직입니다.

세상 기준에 따라가는 나가 아니라
내가 중심이 되고
내가 주장하고
내가 제시하는 것으로 인해
세상 사람들이
좌우로 분류가 되기를 원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겉으로는 평범하다고 말들하지만
자기 속성과 같은 같은 속성일 때만
나로 인해 그 사람이
내 친구로서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남들이 알아주었으면 바라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자기 중심점을 견지하려면
힘, 곧 권력이 있어야 합니다.

다윗을 중심으로 해서 양분과
후새와 아히도벨의
세상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점은
이러합니다.

후새의 경우,
그는 다윗에 의해서
자기 운명이 결정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비록 다윗이
권력이 박탈당한 상태라도
다윗 곁을 떠나지 않으려는 겁니다.

이는 다윗만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을 의도적으로
왕으로 세우셨다는 ‘기름부음’의 원칙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름부음’의 원칙이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낼 때는
특정 인물에게 기름을 붓는 것으로
드러난다는 원칙입니다.

왕이나 선지자나 제사장도 그러합니다.
오늘날에서
모든 성도들이 다 기름부음받은 자들입니다.

이 어두운 세상에 대해서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선지자들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면서
12제자들을 다 데리고
하늘나라로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남겨두신 이유도
이 ‘기름부음’의 원칙 때문입니다.

이 원칙이 본문에서
여전히 실행됩니다.

후새에 비해서
아히도벨이라는 사람은
오로지 자신의 기준만을 고집하기 위해
권력을 쌓는데 치중하는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적으로 말해서
극히 정상적인 인물입니다.

권력이 있는 곳이라면 마다하지 않고
권력이 엷어졌다고 여기면
권력이 두꺼운 구름을 형성하는 곳으로
곧장 자리를 들고 옮겨가면서 살아가는
극히 세상적이고 극히 정상적인 사람입니다.

사람에게 있어 이런 성향 외에
다른 성향을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스러울 정도입니다.

따라서 아히도벨보다 후새가
처신이 더욱 이상스럽습니다.

이미 권력의 추가
다윗에게서 압살롬에서 기우러진 이상,
달리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겁니다.

하지만 후새는 권력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다윗이 내려준 사명으로 사는 자입니다.
사명이 없는 존재는
후새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한 강도는
곧 사명없이 인생을 사는 자에
해당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었던 강도는
죽는 순간까지 예수님이 부여한 사명때문에
죽은 자가 된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가 평생 살아온 것도
사명을 위한 삶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사명자와
사명없이 권력을 탐하는 자와
붙게하신 것입니다.

압살롬과 다윗과의 전쟁이
이들 지략가를
전쟁으로 요약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각각의 지략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 조언하기를,
다윗이 남기고 간 후공들과
공개적으로 동침하라는 겁니다.

이것은 다윗 권력에 대해
공개적으로 모독하는 행위를 하므로서
다윗과 압살롬의 관계가
이미 화합될 수 없고
도리어 더욱 악화된 지경으로 돌입했기에
백성들이 함부로 다윗편에 서는
그런 위험한 짓을 하지 말라는 경고를
전 이스라엘에게 날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권력이란
그 과정 자체를 통해서 전달된다는
전력론을 아히도벨이 압살롬에서 알려줍니다.

이러한 점을 다윗이 익히 알고,
후새에게는 마치 다윗편에서
압살롬편으로 넘어온 신하로서
위장근무하라고 지시를 내립니다.

일종의 다윗의 조정을 받은
비밀요원으로 활동해서
아히도벨의 지략을
차단시키라는 조치를 취합니다.

그렇다면 후새의 제안은
무엇일까요?

압살롬은 후새의 의견도
듣겠노라도 나섭니다.

그 때 아히도벨은
후새의 제안보다
더욱 더 환상적인 권력론을
들고 나옵니다.

이 이론은, 권력이란
과정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로 말한다는 이론입니다.

쉽게 말해서 전체 권력을 일단 손에 쥐고 난 뒤
다윗을 쳐도
늦지 않다는 겁니다.

그것은 권력에 탐하는 자들로 하여금
최고 권력이 제공하는 맛에
쉽게 도취된다는 것을 간파해서
환상적으로 제안한 겁니다.

이 제안이 받아들여지면
다윗이 피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됩니다.

압살롬은 자기 꾀의
궁극적인 도달점을
후새가 미리 말해준 것에 대해서 고마워하면
후새 안을 채택해 버립니다.

그러니 오로지 최고 권력만을 추구하기에
자신의 그 어떤 낭패나 실패를
스스로 용납 못하는
아히도벨의 지략으로 하여금
자살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선택에 의해서 구원된 자는
더 이상 자신의 위대함을 위하여
권력을 끌어모으는
무모한 짓을 해서는 아니됩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노리는 약점은
‘더 낮아지기 싫어하는’
그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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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강-삼하15장31-34(후새와아히도벨)-2sa100613
하나님의 말씀 사무엘하 15장 31절에서 34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488페이지입니다.




사무엘하 15:31-34




“혹이 다윗에게 고하되 압살롬과 함께 모반한 자들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나이다 하니 다윗이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하니라 다윗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루턱에 이를 때에 아렉 사람 후새가 옷을 찢고 흙을 머리에 무릅쓰고 다윗을 맞으러 온지라 다윗이 저에게 이르되 네가 만일 나와 함께 나아가면 내게 누를 끼치리라 그러나 네가 만일 성으로 돌아가서 압살롬에게 말하기를 왕이여 내가 왕의 종이니이다 이왕에는 왕의 부친의 종이었더니 내가 이제는 왕의 종이니이다 하면 네가 나를 위하여 아히도벨의 모략을 패하게 하리라“




열왕기상 구약의 수풀 속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가 모르고서는 이해가 안 되는 그런 사람 이름들이 툭, 툭 튀어나옵니다.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는 아히도벨과 후새가 나와서 후새같은 경우에 다윗과 이야기 하면서 아히도벨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럼 세 사람이 됩니다.




다윗, 아히도벨, 후새, 이 제 3자의 관계는 무엇일까? 이 사람들이 어떤 관계로 엮어졌을까? 이것을 이제부터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일단 다윗을 중앙에 하늘과 유일하게 통하는 분으로 올려봅시다. 다윗을 세 사람을 나란히 두면 수평으로 두면 키가 고만 고만한테, 다윗을 바짝 들어버리면, 다윗은 위에 있고 양쪽에 후새와 아히도벨이 있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의 산 꼭지 점을 형성하는 거 같아요. 우측과 꼭지 점에 이르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꼭지 점에 도달해 버리면, 왼쪽과 오른쪽이 결정돼 버립니다. 무슨 말인지 감이 잡힙니까? 세 사람이 그냥 있으면, one, two, three (제가 영어로 말하니까 어렵지 않습니까? ㅎ) 하나, 둘, 셋, 그런데 중간에 있는 사람을 바짝 올려 버리면, one, two 가 하나, 둘이 아니고 이 쪽 저 쪽이 되고 말죠. 제가 말을 어렵게 합니다. 어렵게 하지만 중요한 말 이예요. 이 쪽 저 쪽이 돼 버려요.




빵이 10개가 있으면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10개가 돼 버려요. 빵 하나는 빵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빵 하나 중에서 만약에 도너츠를 바짝 들어버리면, 도너츠와 닮은 것과 도너츠와 안 닮은 것 두 종류로 나뉘어져 버립니다. 그러면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하는 번호표는 소용이 없어요. 번호표는 소용이 없고, 도너츠와 같은 빵과 도너츠를 안 닮은 빵 그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점심 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도너츠 생각이 나네요.ㅎ 사람은 그냥 두면 똑같아요. ‘그래 니는 니대로 살고, 나는 내대로 살고, 그래 니 종교 믿고, 나는 내 종교 믿고 살자.’ 똑같이 돼 버립니다. 숫자 매길 때 하나, 둘, 셋, 넷,... 인구 오천만도 다 똑같아요.




그렇지만 한 쪽을 바짝 들어버리면, 양 같은 인간, 염소 같은 인간, 지옥 갈 인간, 천국 갈 인간이 달라져 버립니다. 그걸 ‘센서’ 라고 합니다. 센서라 하는 것은 방향이란 말이 있어요. 방향을 결정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이 땅에서 여러 사람 중에 한 인물로 오신 것이 아니고, 방향을 결정하는 겁니다. 속성을 끄집어내는 분이예요. 색깔을 분명히 두는 거예요. 니는 검은색, 니는 흰색, 흰색, 검은색을 분명히 하는 분으로서 십자가 죽었다가 바짝 올라가 버렸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합니다. ‘니들 중에 누가 부활했지? 누가 십자가 죽었지?’ ‘예수님!!’ ‘누가 부활했지? ’예수님!!‘ ’그걸 믿으면 내가 구원해 줄게.‘




이건 아니에요. ‘예수님 점수 몇 점이었지? ’100점‘ ’니는 몇 점이고? ‘92점’ ‘98점’ 니는?‘ ’88점‘ 이건 아니에요. 예수님을 모델로 해서 점수를 메기는 게 아닙니다. 얼마나 예수님을 가까이 하면 1등급, 처지면 7등급, 이런 점수 메기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오신 것은 개인이 갖고 있는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 속에 원래 담겨 있는 속성을 드러내는 데, ’ 너는 예수님께 선택받은 자야, 예수님께 간택 받은 자야, 아니면, 버림받은 자야. 이렇게 결정되는 겁니다.




사극을 아주 제가 싫어하는데 왜 그러냐 하면, 거짓말이라 싫어하는 겁니다. 사극을 보게 되면, 어떤 왕이 어떤 짓을 하느냐 하면, 궁녀가 이래 있으면, ‘오늘밤은 누구하고 동침할꼬? 하고 간택을 해요. 같은 남자지만 참, 기분이 더러워요. 지가 뭔데 남자라는 이름으로 이 여자를 지 맘대로 간택을 하느냐 말이죠. 그만큼 간택을 하는 것으로 뭐를 뽐내느냐 하면, ’ 나 여자 많다.‘ 고 뽐내는 것밖에 안 돼요. 여자가 없어서 장가도 못 간 사람도 있는데..ㅎ 지는 여자가 10명, 20명...심지어 솔로몬 같은 경우는 1000명입니까? 수천 명이잖아요?




그러니까 그들은 순서를 기다려야 돼요. 은행가면 번호표 뽑죠? ’6월 7일에는 2번이요‘ 6월 8일에는 3번이요.’ 뽑고 들어가는 겁니다. 왕과 동침할 때, 만약에 번호표 27번이 3번 뽑혔는데 들어가면 죽어요. 순서 안 됐는데 들어가면 다른 여자들이 가만있지를 않아요. 그것이 얼마나 제가 보기에는 몹쓸 짓을 한다. 고 생각돼요. 그런데 왕이라는 지위가 간택을 한다는 말은 뭐냐? 순서가 2번 다음은 3번, 3번 다음은 4번인데, 왕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27번, 니 오늘 동침이야.‘ 이러면 아무리 3번 다음에 오늘은 4번 들어갈 차례인데, 4번 들고 표 들고 기다리다가 어, 27번이 들어가 버리면, 4번~26번까지는 얼굴이 새파래져 버리는 겁니다. 무수리들은 얼굴이 새파래져요.ㅎ 이게 왕의 자율권, 특권입니다.




그 왕 가지고 주님께서는 양과 염소로 간택을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다윗과 아히도벨과 후새를 볼 때, 우리가 그냥 세 사람이 있다 보지 말고, 한 사람을 높이 계시고,(간택하시는 분이고) 다른 분들은 그 간택 당해야 할 이 쪽 저쪽을 분간해야 될 사람으로 보시면 됩니다. 이 다윗 중심의 후새와 아히도벨은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예수님 양쪽 편에 십자가가 예수님만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니고, 양쪽에 십자가가 따로 있었어요. 이왕 동기동창 사형수 동기동창 같으면, 이왕이면 인간적으로 같이 천국 보내주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한쪽은 지옥가고, 한쪽은 ‘니가 오늘밤에 낙원에 가리라.’ 이것도 간택의 결과입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선택의 결과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받아들이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근데 이걸 강력하게 거부하는 속성이 우리에게 있어요. 들어오기는 쉬운데 이걸 따져서 들어오려 하니까, 우리 내부에 자리 잡은 우리의 원래 주인이(마귀) 강력하게 저지하는 거예요. ‘니가 알아서 잘 될 수 있는데, 니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는 바보 같은 짓을 하느냐? 강력하게 거부합니다. 주님의 선택이 우리가 밀어내는 힘보다 셀 때, 우리는 주님 앞에 사로잡힌 자라고 이야기 합니다. 사로잡힌 자 되어서 그래서 구원 받는 거예요.




제가 어느 날 강의하면서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어떤 분이 이야기하기를 ‘목사님, 그러면 우리가 뭘 해야 되고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습니까? 복음을 안 뒤에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습니까?’ 라고 질문을 했는데, 두 사람 잠자는 이야기 했어요. ‘하고 자시고 간에 그냥 주무세요. 그냥 주무시고 있으면, 주께서 재림하시면, 둘이 나란히 잤는데 한 사람을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그냥 버려두는 거예요. 그걸 밤새도록 안자고 주님 오시기를 기다린다고 데려가는 게 아닙니다. 그냥 푹~~ 주무세요. 그냥. 푹 잠자는 것이 복입니다. 푹 주무시고 계시면 주께서 재림하시면 눈 깨보면 한쪽은 천국 가 있고, 눈 깨보면 한쪽은 지옥 가 있고 그런 겁니다. 상당히 너무 비정하고 냉정해 보이지만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후새와 아히도벨은 분명히 차이가 나는데, 그럼 다윗과 연관해서 어떤 차이가 나는가? 그 차이를 두고 다윗은 미리 감 잡아요. 뭐냐 하면 후새라는 사람은 좋은 편을 가지고 하나님이 다윗을 선택했고, 그 다윗에게 붙어있으면 구원받는다. 라는 다윗과 하나님을 연관 시켜서 생각한 사람이 후새라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이 혹시 나중에 후새라는 사람이 기억되거든, ‘아, 좋은 편.’ 라 생각하시고, 아히도벨, 후새는 두 자인데, 아히도벨은 네 자입니다. 요 네 자되는 사람은 나쁜 편입니다. 그 사람은 압살롬의 종이라고 우기면서 사실은 압살롬의 종이 아니고, 자신의 종이죠. ‘아이고, 압살롬 뭐. 내가 아부하는 척 하지만, 그것은 지금 나한테 쓸모짝 있다고 내가 일시적으로 간주하는 것이고, 사실은 나는 나를 위해서 존재한다. 고 한 사람이 아히도벨입니다.




그래서 아히도벨이 이렇게 딱 견주다가 ‘자, 다윗 쪽에 설 거냐? 아니면 압살롬에게 설 거냐? 하고 견줄 때, 자기가 어느 왕을 선택할 때, 그 선택의 권리가 누구한테 있다 하느냐 하면, 아히도벨은 나에게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에 비해서 후새는 내 운명은 하나님이 다윗을 선택한 이상 다윗이 내 운명을 결정한다고 믿어지는 쪽이 후새입니다. 후새는 좋은 편, 아히도벨은 나쁜 편. 여러분들이 좋은 편에 서려면, ’후새, 후새 하지 말고, 후새처럼 다윗을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리고 낙원에 간 강도처럼 옆에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달리신 그분이 남들 보기에는 초라하게 죽지만, 그분의 나라가 나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한다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후새 편이 되는 겁니다. 한 사람 바짝 들으면 두 사람이 저절로 대립이 되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 방식입니다.




그러면 후새와 아히도벨이 도대체 나중에 그 정체를 어떻게 드러내는가? 이것은 사무엘하 한 장을 더 진도 나가시면 16장 20절에 보면, 압살롬이 아히도벨에게 묻습니다. ‘아히도벨아, 앞으로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려면 어떤 지략과 어떤 전략을 세우면 되느냐?’ 라고 묻는 대목이 나와요. 그리고 17장에 보면, 또 압살롬이 누구에게 묻느냐 하면, 후새한테 물어요. 아니? 후새가 좋은 편인데도 불구하고 다윗한테 안 붙고 왜 나쁜 압살롬에게 붙었을까요? 궁금해 하시겠죠? 원래 후새는 다윗과 함께 떠나려고 했었습니다. 그런에 누가 말리느냐 하면, 다윗이 말렸습니다. ‘후새야, 니가 바로 비밀요원이 돼 다오. 니가 거짓으로 압살롬한테 항복하여 충실한 신하인 척 해다오.’라고 부탁한 거예요.




다윗이 자기 사람을 일부러 압살롬 진영에다가 박아 놓은 겁니다. 왜 박았는가? 그것은 압살롬이 똑똑한 게 아니고, 거기에 아히도벨이라는 지략가가 있어서 압살롬이 그의 말을 다 듣는데, 아주 똑똑한 사람 이예요. 일종의 황장엽 같은 아주 지혜로운 사람( 전에 북한에 있을 때 주체사상을 개발한 사람) 그런 사람과 니가 비밀요원이 돼서 같이 맞붙어서 니가 승리를 낚아채라고 한 거예요. 다윗이 일부러 한 거예요.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부활하실 때, 예수님이 12제자를 데리고 간 게 아닙니다. 안 데려 가요. 남겨두신 이유는 이 땅( 어두운 세상)에서 빛의 자녀로서 비밀요원 하라고요. 비밀요원(FBI) 해서 ‘니는 이 사람 편인 것 같지만 속내는 사실은 하늘나라 위해서 살아가는 그런 비밀 정예부대가 되라고 우리를 남겨두는 겁니다. 이걸 제가 ’선발대‘라고 어느 강의에서 그랬어요. 선지자는 선발대.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고 선지자고 이 땅에 거룩한 제사장으로서 이 땅이 잘못 됐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는 그런 수모를 당해야 됩니다. 우리는 자진해서 이중인격자가 되세요. 이중인격자! 자진할 것도 없어요. 원래 이중인격자니까....ㅎ




그러면 그 이야기하는 차이가 나는 내용이 뭐냐 하면, 이제부터 이게 어려워요. 16장 20절에 보면, 압살롬이 아히도벨에게 ‘어이 니 작전을 전개해 봐. 펼쳐 봐. 니 속에 들어있는 내용이 뭐냐? 어떻게 하면 다윗을 쳐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어?’ 물으니까, 아히도벨이 말하기를 “..... 왕의 아버지가 머물러 두어 궁을 지키게한 후궁들로 더불어 동침하소서 그리하면 왕께서 왕의 부친의 미워하는바 됨을 온 이스라엘이 들으리라...., 이래 돼 있어요.




이게 무슨 이게 묘책이냐 말이죠. 아! 이거 어렵죠? 어떻게 하면 지금 다윗이란 우리 아버지란 잔당들을 소탕해서, 빨리 이 나라를 접수할 수 있느냐 물으니까, 아히도벨이라는 천재적인 지략가 하는 말이, 지금 도망친 일종의 쫓겨 간 왕의 흔적들이 있다는 겁니다. 왕 다윗과 더불어 함께살던 후궁들을 접수하면, 백성들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아하! 압살롬이 더 이상 아버지 왕하고 협상하거나 화해하거나 타협할 여지는 전혀 없이 추진력을 가지고 이제는 (또 아니면 뭐다, 이 노래 할 줄 아시죠?) 아버지와 좋게, 좋게 할 의사는 없이 막 가지는 이야기구나.’ 라는 그러한 낌새를 전 백성들에게 알려주라 말이죠. 알려주면 백성들이 지금 권력의 추가 어디로 기울었는지를 스스로 파악해서 ‘아하, 이제 끝났어, 다윗? 다윗 시대는 갔어. 한 물 갔어. 이제는 압살롬한테 붙는 게 그래도 고무신 하나라도 얻는 게 나.’ 해서 모든 사람들을 끌어서 다윗을 빨리 처리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한 겁니다.




그러니까 나쁜 사태, 더욱 더 아버지와 아들이 그렇게 사이가 벌어졌고, 더욱 더 나쁜 사이가 됐다는 나쁜 관계를 일부러 확산시키는 거예요. 아버지와 이렇게 반발이 있음을 더 확장시키는 겁니다. 이것은 결국 뭐냐 하면, ‘압살롬 왕이여! 지금은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고, 지금 이 과정 하나하나가 중요합니다.’ 란 과정이 있어야 좋은 결과가 있습니다. 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제가 하는 말 무슨 뜻인지 모르겠죠?




고담에 후새의 말 들어보면 이해가 될 겁니다. 그래서 비밀요원 후새는 ‘후새야, 너 우리아버지 다윗에게 충성하지, 왜 이리 왔느냐?’ 후새 하는 말이(연기력이 뛰어나요. 탈렌트 같애) ‘제가 전에는 아버지한테 했지만, 이미 아버지는 맛이 갔습니다. 이미 권력이 추가 넘어 와버렸는데, 내가 거기 가 있으면 내가 죽을 거 뻔한데, 그저 난 영원한 압살롬 팬입니다.’ ‘그래 그럼 아히도벨이 후궁들을 차지해서 나쁜 관계를 확산시켜서 한꺼번에 치자고 나왔는데 니 생각은 어떠노?’ ‘압살롬 왕이여 그건 옳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뭐고?’ 물으니까, ‘지금 당신의 아버지 왕은 옛날에 한 가닥 했던 장군입니다. 아무리 현재는 권력을 빼앗겨서 미약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속에 날카로운 이빨이 들어있습니다.’ 아히도벨은 이빨 빠진 호랑입니다. 라 하고 후새는 ‘아직도 이빨이 있기 때문에 잘못 건드리면, 백성들이 ‘그 아버지 왜 심하게 해?’ 하고 반발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지금은 치지 마시고 점차, 점차 백성들을 압살롬 편이 다 됐을 시점에 가서 한꺼번에 치시면, ’아하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구나. 압살롬이 왕 되는 게 맞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지금은 몇몇 소수하고 우리끼리 저끼리 붙어서 되는 게 하니고, 온 국민을 압살롬의 팬으로 만든 후에 쳐도 늦지 않습니다.’ 라고 한 거예요.




자, 여러분!! 이 후새가 얼마나 똑똑한가 보세요. 사람은 전쟁할 때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뭐냐, 자기의 권력이 얼마나 높으냐를 노리고 전쟁하는 법이예요. 내가 누구누구보다 더 높고, 누구보다 더 힘이 세다는 것을 높이려고 전쟁은 멈추지 않습니다. 16강까지 멈추고 싶습니까? 천만의 말씀! 8강? 4강? 월드컵 우승해야 되는 겁니다. 사람이 높아지려고 전쟁한다는 것을 이미 후새가 감 잡은 거예요. 그런데 아히도벨도 그걸 감 잡았어요. 그래서 둘 다 다 머리 좋은 사람 이예요.




그런데 아히도벨은 뭐냐 하면, 지금 이 과정을 계속 쳐 나가야 되지, 멈추면 안 됩니다. 과정 자체가 중요 합니다.라는 것이고, 후새는 뭐냐 하면, 더욱 더 사람을 환상 속으로 몰아가요. 사람들을 자기 지도자를 환상에 뿅 가도록 만들어요. ‘임금님 한번 상상해 보세요. 온 국민이 환호성 울릴 때, 그때 쳐들어가도 늦지 않습니다.’ 후새가 그런 이야기 할 때, 압살롬이 뿅 가버렸어요. ‘야, 니가 내 맘에 쏙 든다. 니 계획이 훨씬 환상적이다.’ㅎ ‘최곱니다!!’ 이게 후새라면, 아히도벨은 ‘왕이여~ 아직도 안심하면 안돼요. 아직 다 이루었다하면 안됩니다. 이미 아직 이예요. 지금 계속 노력해야 됩니다.’




어느 쪽이 신납니까? ‘왕이 최곱니다!!’ 이쪽이 신나지, ‘지금 계속 애써야 되지 지금 긴장을 늦추면 안 됩니다.’ 하고 닦달 내는 거 별로예요. 과정보다는 다 완성됐다는 것이 사람의 권력 쪽으로 더 확 오는 거예요. 그래서 압살롬 왕이 어느 안을 채택하느냐 하면, 후새 안을 채택을 해버립니다. 그런데 후새가 뭘 아느냐 하면, 다윗도 알지만, 아히도벨의 특기가 뭐냐 하면, 이 나라에서 자기보다 똑똑하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있는 사람 이예요. 사람이 그야말로 시시하게 동네 축구하는 나라가 월드컵 본선만 들어가면 축제하고 난리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브라질이 16등 했다하면 축구팀이 고개 숙이고 들어가야 합니다. 잘못하다가는 권총 맞고 죽을 수 있어요.




이미 사람이 뭔가 한껏 권력욕에 빠져 있고, 자기가 높다고 여기고, 똑똑하다고 여긴다면, 쪼그만 흠도 자기한테 친피(창피?)거리가 됩니다. 그게 인간들이 마귀한테 잡히는 취약점 이예요. 마귀가 그 점을 노리는 거예요. ‘너같이 완벽한 니가 요런 허점이 있으니까, 에라, 하나님 욕하고 죽어라.’ 요게 마귀가 우리를 매일같이 다뤄요. 그래서 가룟유다가 어디 돈이 떨어져서 죽었습니까? 어디 양식이 없어 자살했습니까? 가룟유다가 왜 자살했습니까? 자기가 예수님 팔아먹을 때는, 그 나라에서 바리새인들에게 인정받으려는 기대치가 있지 않습니까? 그 기대치가 무너질 때, 자살한 거예요. 그게 바로 마귀(사단)가 들어간 거예요. 그게 우울증 이예요.




인간은 개뿔도 아무것도 아니란 말을 여러분! 헛되이 들으면 안 됩니다. 그 말은 여러분을 욕하는 게 아니에요. 제발 우울증 걸리지 말고, 제발 더 넘어질 자리 없도록 바짝 엎드려 살란 말입니다. 그게 행복이고 그게 사실은 지혜예요. 더 낮아지는 게!!!! 승진이 지혜가 아니고 강등되는 게 지혜입니다. 십자가까지. 밑바닥까지.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2장5절에 나오죠? “너희는 이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뭐든 아직 실패할 거리가 없었던 거예요. 마귀가 어떻게 수치거리를 끄집어낼 게 없어야 돼요. 왜 하나님의 원수인데요. 뭘. 그 자리가. 아침에 말했잖아요. 매직으로 ‘하나님의 원수’ 나는 뭘 해도 원수예요. 바짝 엎드리면(바짝 손만 들지 말고) 넘어질 것도 없어요.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어떤 목사님이 저한테 충고한 겁니다. 저 십자가 마을 사람 중에 공개적으로 충고한 거예요.ㅎ 맨 날 넘어지고 있어요.ㅎ 바로 인간이 권력을 추구하고 높아지기를 추구할 때는 , 이미 마귀한테 약점을 다 드러난 거예요. 기초는 좁은 데 크게 와버리면 균형의 감각이 빨리 넘어지기 쉬워요. 밑바닥에 넙죽 엎드려있으면, 넘어질래야 넘어질 거리가 없어요. 권력을 추구하고 높은 자리를 차지한 사람, 그거는 마귀의 밥입니다. 그런 자가 바로 가룟유다 에요.




바로 하나님의 지혜가 인간의 권력을 탐하는 지혜를 이긴다는 것을 다윗이 알고, 후새를 비밀요원으로 침투시킨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주님께서 우리를 지금 하늘나라 안 보내시고,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우리 자신을 미워하는 자가 차라리 생명을 얻는 자란 지혜를 그들을 통해서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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