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13:20-22 - 사태 해결 방식

작성자지미박|작성시간26.06.16|조회수25 목록 댓글 0

사태 해결 방식
삼하13:20-22


(삼하 13:20, 개정) 『그의 오라버니 압살롬이 그에게 이르되 네 오라버니 암논이 너와 함께 있었느냐 그러나 그는 네 오라버니이니 누이야 지금은 잠잠히 있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라 하니라 이에 다말이 그의 오라버니 압살롬의 집에 있어 처량하게 지내니라』

(삼하 13:21, 개정) 『다윗 왕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니라』

(삼하 13:22, 개정) 『압살롬은 암논이 그의 누이 다말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그를 미워하여 암논에 대하여 잘잘못을 압살롬이 말하지 아니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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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란
평소에는 가만히 있다가
어떤 문제가 벌어지면
그 때부터 자신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어나게 됩니다.

“내가 누구지?
내가 꼭 이런 식으로 살아야 하나?
차라리 죽어버릴까?
아니면 나를 이렇게 만든 인간이나 하나님에게
내가 복수해 버릴까?”

등등의 생각들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행동하게 됩니다.

이것은 곧 인간이란
세상 환경과 동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이 일렁거리면
같이 일렁거리게 되어있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즉 세상이 만들어낸 존재가
자기 자신이라는 겁니다.

죄악된 세상에서
자기만 초연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세상을 보고,
“세상은 참 악하다”고
혼자서 빙정대거나
비난할 입장이 못된다는 말입니다.

세상이 악하면
그 사람도 같이 악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얼마전 2026년 기초선거가 있었습니다.
가령 아무리 못났어도
자기가 지지하는 당이 생기면
반대하는 당을 싫어하게 되는 이치입니다.

아무리 숨기려 하여도
하나님께서 사태를 일으키시면
세상이 악한 것 못지 않게
악해지는 것이 인간입니다.

순식간에 분노가 일어나면서
그 어떤 위로도
놀림으로 들리게 마련입니다.

즉 사태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우상적인 심보로
정비가 되고 체제가 갖추어지게 됩니다.

즉 자신은 영원한 신처럼
행세해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왜 인간들은 모르고 있을까요?
인간들이 “내가 누굴까”를 감지하는 경우란
예상 밖의 사건이
자기에게 벌어질 때입니다.

자기 밖에서 자기와 무관하게
아무리 험난한 사태가 일어나도
그것을 통해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게는
실감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막상 그 사건이
자신의 몸에 일어난다면
이때부터 자기만 빼놓고
주변은 다 자신을 위협하는 세력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이란 졸지에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낯선 세계가 됩니다.

옛적부터 사람들에게 있어 자연이란
사랑과 미움으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물질과 정신을 나누어 생각하지만
옛적 사람들은
그렇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내가 기분 좋으면 세상은 아름답게 보이고,
내가 기분 나쁘면 세상 만사가 다
나쁘게 돌아간다고 여기는 겁니다.

이처럼 세상은
사랑과 미움으로 짜여져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 속에 자리잡은
사랑과 미움이라는 죄성이
바깥까지 이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에 있어
압살롬은
여동생이 공개적으로
웃음거리가 된것에 대해서
은밀하게 복수에 나섭니다.

이러한 마음에 대해서
외부인이 관여하기가 곤란합니다.

“참으세요. 하나님이 처리하실 것입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 때문에 생긴 것이니까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세상에는 이런 일도, 저런 일도
생겨나는 법입니다.

세상이 사람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
하나님 믿고 견디세요”라는 위로의 말이
전혀 먹혀 들어갈 수가 없는 겁니다.

“남의 일이라고
함부로 쉽게 말하지 마세요”
라고 쏘아붙이면
충고하려는 자들은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마음이 편하고 기분좋을 때는
얼마든지 할 것같지만
조금이라도 속상하는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이고 뭐고 다 접고 싶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면을
오늘 압살롬을 통해
보이고 싶은 겁니다.

그는 양털 깎는 축제일을 빌미로
자기 여동생을 강간한 암논이라는 왕자를 죽여버립니다.

이와같은 태도는
인류 보편적 태도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인류 최초의 범죄는 살인죄입니다.
이 살인죄를 유발시킨 분은
누구도 아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의도적으로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이것은 가인에게 있어
자신의 숨겨진 죄성을
들추어내는 사건이 됩니다.

즉 가인에게는 나름대로의 미운 감정이
발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린 조치 때문에
발생된 미움입니다.

과연 어느 인간이 이런 미움의 감정에서
자유로울 수가 있겠습니까?

죄의 지배를 받는 자들은
이런 속성을 보여주게 되어 있습니다.

평소에 인간들은 자기 하는 일에
열중하기 때문에
‘내가 어떤 존재인지’에 관심없이
지나치게 됩니다.

자신은 문제없는 사람이라고 여기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다스리고 지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죄가 인간을 지배하고 다스립니다.
이런 사실이 파악되는 순간은
바로 예수님의 몸 앞에서입니다.

이 예수님의 몸의 대변해서
가인 당시에는
아벨이 등장한 것입니다.

아벨이 죽고 난 뒤에
하나님은 무엇이 죄가 아닌 상태인가
물어오십니다.

“가인아 네 아우가 어디있느냐”고 하십니다.

이 때, 가인의 답변을 들어보세요.
‘하나님, 제가 동생 아벨이나 지키는 자입니까?“

그렇다면 가인은 뭘 해야하는 자라고
자신을 스스로 보는 겁니까?

결국 “나는 내 자신만 지키면 되는 자”라고
여기고 싶어하는 겁니다.

이것이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이 과연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일까요?

아닙니다.

결국 이 세상에서는
모두 다 하나님의 뜻에 무지하고 순종치 못하기에 당연히 하나님으로부터
벌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존재들이라는 것이 밝혀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압살롬에 대해서
비난할 자격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사랑과 미움은
누가 결정짓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몫입니다.
하나님만이 사랑할 자를 사랑하고
미워할 자를 미워하는 겁니다.

즉 이 세상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아내기 위한
그 어떤 몸짓도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전제가 되지 못한 사랑은
필히 미움을 유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미움의 대상에
하나님 자신이 들어가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놓치면 않됩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 가문에서 벌어지는
‘다윗언약’의 내막입니다.

지상의 인간들의 사랑과 미움의 한계를
드러내는 식으로 사건들이 벌어지는 겁니다.

이럴 경우에
우리는 숨겨진 나만의 사랑의 죄가
들추어지게 됩니다.

그 죄에 의한 피해자는
오로지 예수님의 몸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본색은
있는대로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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