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의 출생
삼하12:24-25
(삼하 12:24, 개정)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삼하 12:25, 개정)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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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보면,
다윗은 아내 밧세바를 위로합니다.
자신의 잘못된 행위때문에
밧세바의 마음을 힘들게 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습니다.
그는 그녀를 위로하기위해
밧세바와 결혼하고 자식까지 낳게 했습니다.
외부에서 볼 때,
다윗은 단순히 지가 책임을 면하기 위해
사태 수습에 들어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일이
다윗의 손에만 맡겨진 것이 아닙니다.
밧세바에서 태어난 아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름을 지으시면서
다윗과 함께 하심을 알리십니다.
아이의 이름 ‘여디디아’,
엄연히 솔로몬, 즉 평화라는 이름이 있음에도
말입니다.
‘여디디아’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다”는 뜻입니다.
이로서 다윗이라는 한 인물에 대해서
육과 영이 공히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
곧 다윗의 육적인 혈통과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개입하시고 있다는’
언약적 현실, 두가지가 개입하고 있음을 알립니다.
마태복음 1:6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이 문장에서 남자 이름이 둘씩이나 나옵니다.
아이 낳는 여자는 하나인데
남자는 둘이 관여되어 있습니다.
이는 마치 마리아는 하나이지만
예수님의 출생에 있어
두 주체가 관여되어있는것과 같습니다.
즉 요셉과 성령님이 그분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 전체가
한 곳에 그려진
다양한 그림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한쪽 천을 잡고 흔들면
다른 천도
같이 흔들리게 되듯이 말입니다.
독자적 성격을 지닌
사건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다윗과 우리아의 아내 사이에 벌어진 일은
창세기에 일어난 사건이나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사건들과 더불어
모두 한 공간에서 공유되는
배경이 됩니다.
창세기 3:15에 나오는 약속에 의하면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 경우에 있어
여자가 누군지,
뱀이 누군지를
분명히 규명되어야 합니다.
여자란 메시아를 출산하는 자입니다.
즉 실제 인물이라는 말입니다.
메시아가 역사적 인물이라면
여자도 역사적 인물이어야하고
동시에 뱀의 후손도
역사적 인물로 등장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역사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모습으로
육과 영의 전쟁이 진행되고 있다는 겁니다.
영이라고 해서
역사라는 배경에서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있어 육과 영의 요소는,
혈통적 다윗 가문과
그리고 ‘다윗 언약’에 준해서 개입되는
하나님의 사랑의 현장에 의해서
구분됩니다.
솔로몬 이후에 전개되는 다윗의 가문에서
이 둘의 요소가 병행하게 됩니다.
혈통적으로
다윗의 자손이라고 우긴
유다 왕을 통해서
유다 나라는 여지없이 멸망하게 됩니다.
그 배경이 된 예수님의 임마누엘의 현장이
바로 멸망한 이스라엘 땅입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
다윗 언약의 영적인 작업은
사라진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개입은
죄가 들추어지면서 역사 표면으로 올라옵니다.
‘여디디아’라는 아이의 존재가
그 증거가 됩니다.
마태복음 1:6이
“다윗은 밧세바에서 솔로몬을 낳고”
라는 식으로
적혀있지 않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분명 솔로몬이 다윗의 자식이면서도
왜 하나님께서는 죽은 ‘우리아’의 이름이
등장되는 겁니까?
그것은 다윗의 입장에서 봐서
밧세바는 자기 아내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다윗의 아내가 아니라
죽은 우리아의 아내로서
역사에 등장되고 있는 겁니다.
왜그런가 하면,
다윗은 자기가 지은 죄로 인해
산 자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로 간주되는 겁니다.
도리어 진정 산 자는
다윗의 죄로 인하여 죽은 그 우리아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아의 죽음은
‘다윗이 살아있다’가 아니라
‘다윗의 죄가 살아있음’을 위하여
‘살아 있는 죽음’이어야 하는 겁니다.
반면에 다윗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늘 ‘죽어있어야 하는 산 자’가 되어야 합니다.
즉 죽은 자가 산 자를 죽음으로 몰아세우면서도
계속 살려주는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시편 51:8에 나오는
‘주께서 꺾으신 뼈’의 기능입니다.
메시아께서 오셔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전할 때도
동일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다윗 언약’ 안에 들어있는
불변하는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구원되고자 하는 자는
구원되지 못하고,
구원될 자격이 없는 자에게는
구원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에만
친히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은
단독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뱀의 후손과 마주치게 되어 있습니다.
즉 뱀의 후손이라는
실제적 인물들의 등장은
다윗의 혈통들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유다 나라 속에서 발현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대체해서
자기 속에 혈통적 힘을 축적하려는
왕들의 등장이
유다 나라의 멸망을 가속시키는 겁니다.
즉 사람들이 주체에 힘을 모르는 것은
자기 내부의 죄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감추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우리아 가정에 행사했던
그 육적인 작업의 반복이요 연속입니다.
고린도후서 5:16에 보면,
사도 바울이 고백하기를,
“전에는 나는 그리스도를
육체대로 알았다”고 합니다.
이 말은 곧,
성령을 받은 자만이
‘육체대로 그리스도’와
‘영으로 아는 그리스도’를
구분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육체대로 안다는 것은
지금 자신의 육신을
긍정하고 정당화하려는 시도로서
그리스도를 대면한 자들의 결과요,
영으로 안다는 것은
자신의 죄를 그리스도의 죽으심 앞에서
노출되는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다윗은
자신의 죄의 흔적을
고스라니 담고 있어
언제든지 자신이 죄인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밧세바를 아내를 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내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의 개입을 보게 됩니다.
즉 다윗은 더 이상 자신은
죄와 헤어져서
자신을 규정할 도리가 없음을
자인하는 겁니다.
밧세바가 자신의 아내가 아니라,
자신이 죽인 자의 아내라는 이유 때문에
그녀를 영원한 아내로 삼는 겁니다.
자기 손에 죽었기에
더욱 더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죄인됨을 일깨워준
우리아는
여디디아 안에서
계속 살아있는 겁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마태복음 1:6의 말씀처럼,
다윗의 아내에게서가 아니라
우리아의 아내에서는 태어나는 겁니다.
이 사랑으로 인하여
뱀의 후손은
더 이상 정체를 감추지 못하고
역사적 인물들로 등장하게 됩니다.
사랑과 전쟁하기 위해서
‘사랑을 받지 못한 자’의 자격으로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진정한 원수는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자들을 말합니다.
사랑을 모르기에
사랑을 핍박하게 됩니다.
사랑을 모르기에
힘을 모아서 자신의 존재를 구축해내는 겁니다.
사랑을 모르기에
사랑해준 분을 증거할 수 없습니다.
단지 힘과 힘의 부딪힘으로
이루어지는 전쟁의 종식을
염원합니다.
바로 이런 속성을 드러낸다면
모조리 뱀의 후손들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이를
‘국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에 와서는
이 다윗 혈통을 잇는 국가와
‘다윗 언약’을 잇는 국가 사이에
놓여있습니다.
무엇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과 경외를
보여줄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이 다윗처럼 죄인된 것을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자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