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복 받게 하옵소서
삼하7:23-29 - 영원히 복 받게 하옵소서
(삼하 7:23, 개역) 『땅의 어느 한 나라가 주의 백성 이스라엘과 같으리이까 하나님이 가서 구속하사 자기 백성을 삼아 주의 명성을 내시며 저희를 위하여 큰 일을, 주의 땅을 위하여 두려운 일을 애굽과 열국과 그 신들에게서 구속하신 백성 앞에서 행하셨사오며』
(삼하 7:24, 개역) 『주께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세우사 영원히 주의 백성을 삼으셨사오니 여호와여 주께서 저희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삼하 7:25, 개역) 『여호와 하나님이여 이제 주의 종과 종의 집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영원히 확실케 하옵시며 말씀하신 대로 행하사』
(삼하 7:26, 개역) 『사람으로 영원히 주의 이름을 높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하게 하옵시며 주의 종 다윗의 집으로 주 앞에 견고하게 하옵소서』
(삼하 7:27, 개역)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신고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삼하 7:28, 개역) 『주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말씀이 참되시니이다 주께서 이 좋은 것으로 종에게 허락하셨사오니』
(삼하 7:29, 개역) 『이제 청컨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은혜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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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성경에서 골라내는 구절을 보면,
평소에 자기에게 위로가되는
부분을 찾게 됩니다.
본문 29절에 나오는 말씀
“주의 은혜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라는 말씀을 보게 되면,
인간들이 하나님에게 복을 달라는 것이
참으로 옳은 일인 것처럼
비칠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왜
이런 식으로 기도했는지는
그 앞 구절들을 통해서 밝혀집니다.
간단히 말해서
‘복이 와서 우리 자신 자체가 복이 되게해달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즉 ‘내가 복을 가지게 해달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 자체가 하나님의 복으로
움직이고 살아가게 해달라는 겁니다.
이는 있는 재산을 불려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현재 있는 것까지라도
나의 소유가 아니라
복의 소유가 되게 해달라는 말입니다.
그것도 영원히 말입니다.
이는 곧 아예 ‘나의 것’,
아니 ‘나’라는 자체가
따로 설치지 않게 해달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사람들이 잘못된 복을 구하는 이유는,
그 복의 주인으로서
자신만이 들어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을 달라는 것도
그 중앙에 있는 자신이
대단한 존재인 것을
인정해달라는 말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에게는 다음과 같은 변함없는
원칙이 생기게 됩니다.
첫번째가
무엇이 복이냐 하는 것은
복 받을 나에게 물어보고
하나님이 복 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집에 가서
우리 사정을 살펴서
나에게 아쉬운 것,
내가 평소에 여력이 없어
가질 수 없는 것들을
잘 기억해놓았으니
그 미흡한 점에 대해서
전능하시다는 그 신에게 빌어서
마처 채워달라는 식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이 복인지는
누가 사전에 단정 짓고 있느냐 하면
바로 복받은 자인 우리가 내린다는
그 원칙을 고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두번째가
복이 나에게만 오고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가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다같이 골고루 오게 되면
복이 복답지 않다고 여기는 겁니다.
참으로 복이 복 다울려면
차별적으로 오로지 나에게만
특별나게 복이 와야 한다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께 복달라고 빈다면
다른 누군가에게는 저주가 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 지역의 모든 교회가 다 부흥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면 내교회 빼고는
다 망하게 해달라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복을 달라는 것은
이런 심보가 내부에 깔려 있다는 겁니다.
셋째로,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면
옆에 계속 붙어있지만
얼른 떠나라는 의식이 들어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은 남만 받아야 하는데
하나님도 같이 있어
하나님도 복받아버리면
내가 복을 몽땅 차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만 복받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복을 줘놓고서는
후딱 떠나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자꾸 하나님이 옆에 있으면
귀찮기만 하는 겁니다.
인간이 노리는 것은 복이지
결코 하나님의 잔소리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잔소리하시는 분을
옆에 두는 것이 심적으로
부담이 될 수 밖에 없는 법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세 가치 원칙으로
복을 달라는 것은
23절에 나오는 이스라엘이 받을
복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본문 27절에서
다윗은 뭔가를 ‘알게된 것입니다.
무엇을 새삼스럽게 알았던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복주시는 것은
애굽 나라 및 주변 나라에 대해서 심판하고
그 가운데서 자기 백성들을
따로 취급하기 위한 조치임을
알았다는 겁니다.
이것은 곧 세 가지 이방인들의 복과는
전혀 다른 복의 세계로
인도되는 바가 됩니다.
그렇다면 그 복의 세계가 무엇입니까?
바로 복이 쳐들어오게 되면
우리의 모든 것은
더 이상 우리 소유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이 복답게 증거되는 용도로
쓰여지는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복이 오는 것이 아니라,
전에 우리 자신의 것이라고 여겼던 것마저
하나님의 것이었음으로 전환되는
그런 복을 받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마태복음 5:3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의 너희 것이요”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복입니다.
왜 심령이 가난한 것이 복이 될까요?
복으로 오신 분이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된 복이란
우리 자신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찾아오신 그 분 때문에
그분이 받는 모든 수모와 핍박과 고난과 운명을
같이 하게 된 팔자가 되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다윗의 집’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의 집’이
사전에 벌써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이 다윗에게 쳐들어오면
그 복 자체가
다윗을 가지고
다윗의 집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이것은 어디까지 우리에게 밀려든 복이
의도하는 바이지
결코 복을 받는 우리들이 의도한 바가
아닙니다.
이렇게 되면
다윗 내부의 모든 것은
장차 오실 하나님의 것으로 대체되게 됩니다.
즉 다윗이
곧 ‘예수님의 것’으로 변모되는 겁니다.
다윗 안의 모든것이
새로운것으로 대체되면
그 때부터 다윗의 움직임은
곧 장차 오실 예수님의 움직임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민족들은
이런 다윗의 움직임 앞에서
여전히 자기 자신이 자기의 주인공인양
복을 소유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바이에는 세계에게 제일 높은
빌딩이 세워져 있습니다.
아랫 쪽에는 상가요,
중간층에는 고급아파트요
윗층에서 사무실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모든 이들이 이 건물을 보게 되면
곧 돈의 힘을 느낀다고 합니다.
이는 곧 자신이 힘 있는 자가 되고싶은
욕심이 생기게 됩니다.
바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이란
이런 힘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돈의 힘도
더큰 힘을 가지고있는 나라에게는
한줌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로지
이 세상 힘을 쥐고 있는 악마만
제공해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악마의 무릎팍 밑에 꿇어 앉아
살살 비는 모양새일수 밖에 없습니다.
참으로 우리다 다윗처럼 기도하려면
아예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서
지금 있는 모든을 다부수고
예수님것으로 대체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기도란 지금의 것을 다 부수고
새로움으로 채워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이처럼 자신의 힘을 빼고
지금 자신이 하는 모든 것까지
복이라고 여기는 것,
곧 그것이 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