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39:11-14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레미야에 대하여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에게 명하여 가로되 그를 데려다가 선대하고 해하지 말며 그가 네가 말하는 대로 행하라 이에 시위대장 느부사라단과 환관장 느부사스반과 박사장 네르갈사레셀과 바벨론 왕의 모든 장관이 보내어 예레미야를 시위대 뜰에서 취하여 내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붙여서 그를 집으로 데려가게 하매 그가 백성중에 거하니라.”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유다나라에 속한 사람들은 다 심판을 받는데 그 중에서도 유명 인사들은 다 수모를 당하지요. 그 유명인사들 중의 한 사람인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다나라를 멸망시키러 오는 왕에 의해서 선대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생명이 부지되는 겁니다. 심판과 멸망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선지자가 살아났다는 것은 간추려서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사하시는 것은 진정 하나님에 의해서 살아날 사람을 하나님은 찾고 있다.’는 겁니다.
인간이 자기가 애써서 살아남아서 ‘하나님, 저 살아남았습니다.’ 하고 외치는 사람은 하나님에게는 필요 없고, 하나님께서 무섭고 맹렬한 심판을 실시하시고 그 가운데서 멸망 받지 않고 심판 받지 않고 살아남은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찾으시는 겁니다. 요한복음 5장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저는 가끔 성경을 통해서 교인들에게 시험을 치고 싶은 충동 같은 것이 있어요. 시험문제를 낸다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 다음에 빈칸으로 괄호를 쳐 놓는 거예요.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라고 빈칸을 남겨둘 때 평소에 자기가 예수 믿고자 했던 그 심보가 다 담겨 있을 거라는 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병에서 낫는다. 예수 믿는 사람은 만사가 형통한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사날짜까지 하나님께서 점지해 준다.’ 이런 것, ‘예수 믿는 사람은 교회가 부흥된다.’ 그런 것,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어요. 오늘도 페루에서 전화가 왔는데 ‘교회 부흥되나?’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뒤에 ‘교회 부흥’이 붙으니 얼마나 선입감이 그렇겠습니까?
그런데 성경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예수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합니다. 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것이 떠오르지 않느냐 하면 평소에 교회 다닌다, 혹은 예수 믿는다는 것의 노림수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채워주시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내가 예수 믿기 전에는 가지지 못했던 것을 예수 믿고 난 뒤에는 가진다는 심보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그 사람은 어디의 바깥에 있느냐,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과 멸망 바깥에서 노는 사람이에요. 하나님의 멸망과 심판 없이 믿어버리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 속에서 살아남을 사람인지 아니면 지옥 갈 사람인지를 검증해 봐야 될 텐데 검증 자체가 무서운 거예요.
그런데 예레미야같은 경우에는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말만 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 속에 과연 무서운 심판가운데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없느냐를 예레미야를 통해서 우리에게 증명해 주는 겁니다. 구약에 보면 레위기 민수기가 있는데 레위기 같은 경우에 주의 깊게 보게 되면 굉장히 복잡한 내용이 많아요.
현대생활과 거리가 있기 때문에 보기가 힘듭니다. 레위기 8장 35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칠 주야를 회막 문에 거하여 여호와의 부탁을 지키라 그리하면 사망을 면하리라 내가 이같이 명령을 받았느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말을 인자하신 할아버지 같은 분과 함께 있다고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데 실제로 레위기에 보면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항상 저주받아 죽을 수밖에 없는 그 죽음과 함께 동행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슬아슬 하지요. 굉장히 위험스럽습니다. 더 확실한 것은 민수기 18장 7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와 네 아들들은 단과 장안의 모든 일에 대하여 제사장의 직분을 지켜 섬기라 내가 제사장의 직분을 너희에게 선물로 주었은즉 거기 가까이하는 외인은 죽이울찌니라.”
제사장이 하는 일이 뭐냐, 죽음을 표시하는 역할, 죽음을 표현하는 기능입니다. 죽음이 여기 있다는 거예요. 제사장이 하는 일은 죽음을 모시고 가는 일, 이들은 죽음을 모시고 가는 사람들입니다. 죽음을 모시고 가는 특권을 가졌기 때문에 제사장 말고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성막과 법궤에 가까이 가면 죽어버립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죽음과 함께 있으면서도 그 죽음 때문에 그들이 산다는 사실이에요. 어렵지요. 그 죽음이 뭐냐하면 하나님의 죽음이 함께 있으면 그것이 영생입니다. 하나님의 죽음이 함께 있으면. 그것이 왜 그러냐, 하나님의 죽음이 함께 있으면 그 하나님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내가 살고자 하는 짓이 다 잘못된 짓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죽음 앞에서 살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죽음 앞에서 불평을 하게 되고 불평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의 죽음에는 관심 없고 자기 살고자 하는 것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죽음과 상관없이 인생을 살아가는 그런 사람이 되겠지요. 그러면 그 사람은 언약밖에 있기 때문에 사망에 그대로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사람은 항상 자기 앞에 이미 죽었던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이미 죽었던 하나님 앞에서 아직도 안 죽고 있는 자기가 그 앞에서 불평을 할 수가 없지요. 지금 엄마는 몸이 아파서 누워 있는데 애가 철없이 엄마한테 용돈 달라고 할 수 있겠어요? 안되지요. 엄마는 학자금 댄다고 너무 심하게 일하다가 몸살 나서 누워있는데 그 앞에서 과자 사먹는다고 돈 달라는 말이 안 떨어지지요.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바친 그 죽음의 현장에 있는데 우리는 거기서 나오는 생명에는 관심이 없고 내가 내 식대로 사는데 왜 안도와주느냐고 불평을 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죽음이 우리에게 영생이 된다는 것을 안 믿는 사람이에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할 때 그 아들을 믿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냐 하는 겁니다. 그게 방금 제가 이야기한 레위기나 민수기의 예를 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죽음을 모시고 가고 그 중심으로 그것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향하여 함께 동행 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참된 언약의 영생을 받은 사람이라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라 하는 것은 이스라엘 개개인이 어떻게 사느냐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죽을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사람을 심판하는 심판 주와 함께 있으면서도 버티었는가, 그 버티게 된 근거가 이스라엘 사람들의 행실이나 행동에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고 그들 가운데, 그들 중앙에 무엇이 있기에 그들은 살아 왔느냐 하는 겁니다.
같은 인간이면서도 홍해를 건너오고 같은 인간이면서도 요단강을 건너오고 같은 인간이면서도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도대체 그들 안에 누가 계시기에 그런 효과를 내고 있느냐,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유다나라의 존재의미인 겁니다. 존재의미라는 말을 하니 생각이 나는데 김 종환이라는 가수가 부른 존재의 의미라는 노래가 있어서 뭘 중요하게 여기는 가사인가 보니까 사랑하는 여자하고 결혼을 못해서 안타까워하면서 ‘내가 존재하는 의미는 너하고 결혼하려고 있다.’ 그런 내용이에요. ‘조금만 기다려줘. 달려갈 테니.’라는 가사가 나온다고요.
그런데 성도의 존재의미는 뭐냐, 단순히 내가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모든 사람을 다 심판하고, 심판하고, 지옥 보내고, 지옥 보내고, 멸망시키고, 멸망시키는 그분의 심판의 이유, 멸망의 이유, 심판의 근거, 그분의 거룩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이미 살아버린 자로 존재하는 이유, 근거가 되는 겁니다. 우리 자신의 잘남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행함을 내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주님의 그 죽으심이 무슨 뜻인가를 온 우주에 전파하기 위해서 우리를 살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생활에 찌들어 살다가 교회 와서 말씀을 듣게 되면 세상 생활에 찌들어 살았다는 그것이 전혀 하나님 앞에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가치 없는 일이 되어버려요. 집안에 어떤 힘든 일이 있더라도 주님 앞에 서면 그것이 전혀 불평거리가 될 수 없는 겁니다. 오히려 ‘황공무지로소이다! 세상에서 그저 돈만 챙기고 사는 것밖에 안 되는 우리를 어떻게 주님의 생명이 피어나는 그 옆자리에 우리 자리를 펼쳤나이까.’ 감사할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저는 이야기합니다. 매일같이 멸망사건, 심판사건이 일어나 줘야 됩니다. 일어나 줘야 환란가운데 구원이 확인되는 겁니다. 환난가운데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가운데 우리가 소망이 있습니다. 그 연단가운데 우리가 소망이 있는데 그 소망이 소망답게 되는 것은 우리의 세상에서의 사적인 뜻이 묵살되고 기각될 때 ‘내가 밥 먹고 사는 이것이 인생의 가치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주님께서는 늘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느부갓네살이 유다나라를 멸망하고 심판한다는 것이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이스라엘이 처음 애굽에서 나올 때 유월절 어린양을 문설주에 바르라고 했고 그들은 그때 멋도 모르고 그냥 시키는 대로 피를 발랐지요. 피 바르고 난 뒤에 갑자기 예상치도 못한 존재자들이 왕래를 했지요. 애굽을 떠나는 마지막 그날 밤에 죽음의 사자들이라는 낯선 존재들, 천사들이지요, 이 천사가 와서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피 없는 맏이는 다 죽였습니다.
이것은 애굽이라는 국가의 일 년 계획안에는 없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정치, 통치행태에는 아예 사전 계획도 통보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묻지 않고 벌인 하나님의 일방적인 침노이고 폭격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알지요. 그 사실을 두고서 우리는 그냥 출애굽기 12장에 나오는 그때 그 당시의 일이라고 여기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그 당시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지 않은 집안의 맏이를 다 죽이는 작업은……, 우리가 기억하다시피 창세기 2장에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는 것이 있지요. 그 때 따먹은 사람이 아담이지만 아담은 개인적 자격으로 따먹은 것이 아니고 전 인류를 대표하는 자격으로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는 아담 혼자 죽는 것이 아니고 아담속에 있는 모든 인간이 다 같이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된 겁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2장은 우리 같으면 지나간 일이요 옛날일로 여기는데 여호와 하나님이 나타날 때마다 창세기 2장의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는 것이 농담이 아니고 그 사실을 계속 되풀이해서 오고 오는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전부 다 퍼붓는 거예요. ‘내가 죽는다고 했지? 먹으면 죽인다고 했잖아.’ 라고 계속 퍼붓는 거예요.
우리가 인간이라는 이유 때문에 우리 조상이 지은 그 죄에 덩달아 품고 있다는 그 이유 때문에 거룩한 하나님에게 우리는 항상 죽임을 당하는 겁니다. 애굽 사람들은 자기 맏이가 죽어도 그냥 전염병이 돌아서 죽은 줄로만 알았지요. 그런데 왜 죽을 수밖에 없느냐, 그 이유를 유일하게 알려주기 위해서 모세언약이라는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상대해서 죽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모세언약의 제사안의 희생양, 희생소 , 희생제물을 통해서 담아 두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한 하나님의 심판은 계속되고 그 심판에서 면제되는 이스라엘과 그 심판에서 면제되지 못하는 다른 이방민족, 진짜 하나님을 모른다는 이유로 인해서 저주를 받는 겁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6장 22절의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그 말은 하나님의 모든 계획과 약속이 집약되어 있는 것이 십자가인데 그 십자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습니다.
반대로 그 예수님 안에 모든 것이 집약되어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하나님의 계획에 포함된 사람이에요.’ 이렇게 보니 하나님의 계획이 희미하거나 흐릿하지 않지요. 단출하면서도 명확하게 우리에게 전달된 겁니다. ‘십자가가 너희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사도바울은 아주 명쾌하고 명확하고 혼란스럽지 않아요.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이다, 간단하게 이야기해요. 행함이 어쩌고저쩌고, 그렇게 복잡하게 하지 않아요. ‘십자가! 끝!’ 그렇게 되는 겁니다. 옛날 이스라엘이 무서운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살았던 이유가 하나님의 죽으심이 함께 동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2장의 ‘정녕 죽으리라.’ 하나님의 죽이는 작업이 계속 오고 오는 시대 속에서 계속 된다면 애굽이라는 나라도 역시 우리에게 계속 주어지는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다나라가 멸망할 때 그 바벨론 제국의 군사들은 마치 무슨 기능을 하느냐하면, 옛날 유월절에 온 집안의 맏이를 다 쳤던 그 죽음의 사자, 애굽 집안마다의 그 맏이를 다 쳤던 그 죽음의 사자 역할을 느부갓네살의 군대가 하고 있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애굽나라에서 이스라엘을 뽑아냈다면 마지막 때는 애굽나라의 기능을 해야 될, 애굽나라로 시작했던 출애굽이 나중에는 바벨론에서의 출애굽이 됩니다. 그러면 출바벨론이 되겠지요. 처음에는 애굽나라에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끄집어냈던 하나님께서 애굽나라가 확장되어서 그것이 어디로 마감되느냐하면 큰 성 바벨론으로 마감되는 거예요.
바벨론 나라에서의 구원을 의미하는 겁니다. 따라서 바벨론 나라에서의 구원이 된다면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예레미야는 누구로부터 구원을 받느냐하면, 바벨론나라로부터 심판받는……이 바벨론제국의 심판은 아주 혹독한 심판이고 정돈되고 빈틈없이 일체 사정을 봐주지 않는 냉혹한 심판이었습니다. 그 심판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른 심판이었기에 대충 봐주는 것이 없어요.
그 맹렬하고 타협 없는 무서운 심판가운데서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습니다. 제가 방금 애굽나라에서 시작했던 멸망당할 이 세상의 표상이 성경에 의하면 이 신약 때인 지금은 220개국 모든 나라가 바벨론으로 다 일괄 통합이 되는 겁니다. 나라가 어떻게 쪼개져서 500개가 되든 600개가 되든 상관없이 성경은 무조건 그것을 하나로 보는 겁니다. 바벨론이에요.
모든 나라가 바벨론 하나로 통합되었다는 이 말은 어느 교회 출신이냐 어느 나라 출신이냐 관계없이 이 세상의 모든 성도는 한 종류의 성도밖에 없는 겁니다. 그것은 이 심판 받아야 될 세상에서 살아남은 그들을 하나님의 마지막 남은자로서, 택한 자로서 구원을 해 내시는 겁니다. 이 구원 작업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몸을 두고 있는 주변의 바벨론 적 상황, 날마다 우리에게 혹독하게, 아슬아슬하게 죽음을 요구하는 위험스러운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매일같이 살려내고 또 살려내는 작업이 계속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궁금한 것은, 과연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살려내고 있다는 흔적이 뭐냐, 하나님이 일하고 있는 그 흔적이 참 궁금해요. 여러분이 가만 생각해 보니 그렇지요? 예수 믿는다, 하나님을 믿는다, 우리는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 성경에 보면 예레미야는 죽을 뻔 하다가 살아났고 베드로는 변화 산에서 예수님을 봤다는 여러 가지의 흔적과 증거가 있는데 요즘 시대에서 진짜 하나님이 날 살리고 있다는 증거는 어떻게 포착할 수 있느냐가 무척 궁금할 거예요.
어제부터 우리 집에 쥐가 들어왔습니다. 전에 제가 쥐를 본 적이 없었어요. 쥐를 본적이 없는데 비누에 쥐의 이빨 자국이 그어져 있어요. 어제는 비누를 갉아먹었는데 오늘은 아예 비누를 낚아 채버렸어요. 분명히 흔적은 있는데 그 당사자, 쥐를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쥐를 만나는 방법은 뭐냐, 이 두 부부가 이틀 동안 골똘하게 생각했어요.
‘찾자, 쥐가 들어온 구멍을 찾아서 그 구멍을 막자.’ 이것이 우리 부부가 생각해 낸 최선의 방안이었습니다. 그래서 구멍 두 개 발견해서 휴지로 막아놓았습니다. 과연 이것이 성공 할 것인가의 관건은, 쥐가 이미 들어와 있는 상태에서는 소용없는 것이고 쥐가 그동안 들락거렸으면 막아놓았으니까 성공할거예요. 주님께서 현재 우리와 함께 있다는 그 증거가 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이 고린도후서 4장 7, 8절입니다. 그런데 그것과 함께 봐야 할 구절이 있습니다. 이렇게도 성경은 애매모호합니다. 뭐냐 하면 성경을 해석할 때 ‘이렇게 이것을 믿으시면 됩니다.’만 이야기해서는 안 되고 ‘이렇게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당신은 그렇게 믿지 말고 이렇게 믿으세요.’라고 설명을 해줘야 돼요.
그래서 이렇게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8절에서 12절에 보면 “그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데살로니가후서 2장 9절에서 11절까지 나와 있습니다. 방금 한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냐, 진리, 예수님의 죽으심보다도 현재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것을 더 풍요하게 살기 위해서 평소에 ‘내가 원하는 기적을 누군가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 되었든지, 부처가 되었든지, 목사가 되었든 나는 당신을 진짜 하나님으로 믿겠습니다.’ 하는 사람들에 하나님께서는 거짓 영들을 유포시켜놓았어요.
‘따라가라, 다 따라가라. 자식 성적 올라가고 사업성공하고 교회 부흥되고…….’ 그런 기적을 원하는 사람들은 거짓선지자들한테 다 가라는 말이지요. 교회라는 곳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서운 곳인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뭔가 노림수를 가지고 왔고 그 노림수에 맞닥뜨리면서 ‘여러분은 이것을 채우기 위해서 왔지요? 채워드리겠습니다. 세상에서 유명해지고 싶지요? 채워드리겠습니다.’ 그런 교회들을 하나님께서 악한 영들을 통해서 허락하셨다는 것이 데살로니후서 2장 8절 이하의 이야기입니다.
사탄의 능력을 따라서 세상 것 좋아하고 복음과 진리에 대해서는 ‘에이’ 하고 손사래를 치면서 기겁하고 도망쳐 버리지요. 왔다가는 다 ‘십자가가 밥 먹여주나.’ 하고 다 가버린다고요. 십자가는 밥을 먹여주는 것이 아니고 밥그릇을 빼앗아 버립니다. ‘네 몸이 원하는 식으로 살아가는 네 몸이 네 것’이라는 소리거든요. 그러나 ‘내가 사는 식으로 살아가면 너는 네 것이 아니고 네 몸은 네 것이 아니고 나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것으로 채워야지 내 것을 주님의 것으로 채워버리면 그것은 예수님이 아닌 다른 예수, 예수님을 공격하는 다른 예수가 우리 속에 들어오는 것밖에 안돼요. 적그리스도라는 것은 예수는 예수인데 진짜 예수가 아니고 다른 예수인거예요. 더 쉽게 이야기해서 교회가 예수님을 공격하는 거예요. 세상에, 교회가 예수님께 대해서 적대적인 행동을 하는 거예요.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진짜 살려주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고린도후서 4장 7절이하에 보면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게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여기서 보세요.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는 일을 당하게 될 것이고’ 이것이 쥐가 비누 갉아먹는 거예요. ‘사방으로’입니다. 동쪽 서쪽 남쪽으로 에워싸이면 북쪽으로 빠지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사방으로, 하여튼 숨을 못 쉬게 만들어요. 애가 네 명 있으면 하나가 말썽 부리다가 풀리면 다른 애가 말썽 피우고 365일 바람 잘 날이 없어요.
그 다음에 ‘답답한 일을 당하고.’ (가볍게) ‘답답한 일’ 그게 아니고 (된 소리로) ‘답답한 일, 답답한 일’ 기도해도 안 돼, 헌금해도 안 돼, 전도해도 안 돼, 교회 봉사해도 안 돼, 성경공부해도 안 돼, 몸이 아픈데 약이 없다는 글을 십자가마을에서 읽었어요. 얼마나 답답합니까? 성경공부해도 병이 낫지 않아요.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고’ 여기에 한 수 더 뜨네요.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참 이것이 웃을 일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습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의 생명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러한 풍파가 넘치도록 사회 자체가 하나의 파고가 되어서 넘실거리면서 우리를 치도록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하나님께 구타당하고 있는 거예요. 매 맞고 있으면서 우리안의 생명은 우리가 관리할 수 없다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4장 11절,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이왕 죽어버린 우리 육체에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한다는 겁니다. 쥐가 비누를 갉아먹는 것처럼 주님께서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살아 있다는 겁니다. 이 파도가 어디서 밀려오는가, 애굽에서 밀려오고 바벨론에서 밀려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산다는 것의 의미가 내가 애굽에서 교육받았던 식의 삶은 아니고 주께서 이미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피로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기 때문에 그 확인 차 이런 답답한 일들, 몹쓸 일들이 파도처럼 쉬지 않고 계속해서 파도처럼 밀려온다는 것이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증언하는 성령의 고백입니다.
끝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선지자라 해서 우리가 겉으로 보면 멋있어 보이지요. 엘리야의 인생, 예레미야의 인생, 이사야의 인생이 순탄한 길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인생, 열두 제자의 인생, 스데반 집사의 인생, 빌립집사의 인생, 성령 받은 사람치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배부르고 행복하고 편안한 삶 없었습니다.
답답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하고 핍박받고 난데없는 오해에 휩쓸리고, 그런 것이 오는 것은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는 고난의 길, 거룩한 그 영생의 자리에 우리의 자리가 있기 때문에 나의 몸은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주님의 확인 차 주어지는 주님의 생명의 역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