슥1:1 - 스가랴는 왜 예언이 주어진 일자를 정확하게 기록하였을까?

작성자김유미|작성시간05.08.17|조회수531 목록 댓글 0
“다리오왕 이년 팔월에 여호와의 말씀이 잇도의 손자 베레가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니라”(슥 1:1)


  

스가랴서 전반부(1-8장)에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는 예언의 주어진 시기가 연도는 물론 달과 일자까지 정확하게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스가랴에게는 모두 세 차례의 예언이 주어졌다. 첫 번째 예언은 기원전 520년 10월경에 해당되는 “다리오왕 이년 팔월”이다. 8가지 환상을 그 중심 내용으로 삼고 있는 두 번째 예언은 “다리오 왕 이년 십일월 곧 스밧월 이십 사일”(1:7)에 주어졌는데, 이는 기원전 519년 2월 15일에 해당된다. 마지막 예언은 “다리오 왕 사 년 구월 곧 기슬레월 사일”(7:1)로서, 기원전 518년 12월 7일에 해당되는 날이다.


  

이렇게 예언의 시기를 정확하게 밝히는 점은 스가랴와 동시대인이었던 학개도 마찬가지이다. 2장으로 이루어진 학개서에는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예언의 시기가 명시되어 있다.(학 1:1, 15; 2:1, 10, 20)


  

일자가 정확하게 제시되는 경우는 스가랴와 학개보다 앞선 포로기에 활동하였던 에스겔의 예언에서도 네 번이나 나오고 있다(1:1-2; 8:1; 24:1; 40:1). 에스겔서의 경우는 연수를 계산하는 기준으로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왔던 해나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해를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에스겔은 포로기 동안 바벨론에서 예언활동을 하였던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 에스겔은 시대적으로 그의 뒤에 활동하였던 스가랴와 학개에게 많은 영향을 줄 수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들 두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다른 어느 선지자보다 에스겔과 시기적으로 가까웠을 뿐 아니라 포로기라는 시대적 상황을 공유하였던 인물들이다.


  

스가랴가 예언의 연대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예언과 관련된 역사적 정황과 예언의 신빙성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다. 또한 예언의 연대가 시간적으로 배열된 점은 그 예언과 관련된 연대 자체가 나름대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스가랴가 제시한 정확한 일자 속에 나타난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1) 연대를 밝히는 구절에서 관심을 끄는 요소는 ‘다리오’에게 ‘왕’(멜레흐: the king)이라는 칭호를 붙였다는 점이다. 물론 스가랴 1:1과 1:7에는 ‘왕’이라는 칭호가 빠져 있다. 그러나 스가랴 7:1과 학개 1:1, 또 2:1에는 모두 왕의 칭호가 나오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스가랴가 의도적으로 빠뜨린 것으로 보긴 어렵다. 자신들을 지배하는 이방나라인 페르샤의 군주에게 ‘왕’ 칭호를 정식으로 붙이고 있는 것은 곧 유다에 대한 페르샤의 지배권을 공식적으로 수용한 자세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또한 이스라엘의 포로들을 고국으로 귀환하도록 조처한 페르샤의 고레스는 곧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수행하는 왕이라고 해석한 다른 성경의 입장(사 45:1; 스 1:1-4)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2) 스가랴는 1:1을 제외한 나머지 두 경우 예언의 시기를 일자까지 정확하게 밝히고 있다. 이러한 정확한 일자 제시는 학개를 비롯한 에스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포로기를 중심으로 동시대에 활동하였던 이 세 예언자들에게서 예언의 정확한 일자가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이유는 예루살렘 파괴 이후 얼마의 시간이 지나갔는가를 계산하려는 당시대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들 세 선지자들에게 포로기는 거룩한 이스라엘 역사의 단절 곧 여호와께서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과 갖고 있었던 언약적 관계의 단절로 인식되었다. 여기에 바벨론 포로기간이 70년 동안 지속될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예언(렘 25:11-12; 29:10)은 중요한 역사의식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70년 동안 단절된 역사가 거의 끝나가면서 스가랴와 학개는 더 작은 단위의 시간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민감한 관심은 곧바로 70년의 마감시간을 더 정확하게 계산해 보려는 자세로 바뀌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스가랴의 첫 번째 환상 속에 나오는 “이를 노하신 지 칠 십 년이 되었나이다”라는 언급은 곧 정확한 일자 속에 드러난 촉박한 역사의식의 표현으로 이해된다.


그런 점에서 스가랴와 학개가 강력하게 촉구하였던 성전건축의 필요성과 그에 대한 강조는 이미 이들이 제시하고 있는 정확한 연수와 달수와 일자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할 수 있다.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이 본래의 자리인 예루살렘에 재건되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다시 돌아오심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가시적 표시가 되기 때문이다. 스가랴에게 성전재건과 그로 인한 새로운 이스라엘 공동체의 형성은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나갈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미 주도적으로 시작하셨고 구체화시키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이다.

(3) 정확하게 제시된 일자는 스가랴와 학개의 예언활동 사이에 어떤 상호 관련성을 지니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스가랴가 처음 예언을 시작한 시기는 “다리오 왕 이년 팔월”(1:1)이다. 이것은 학개 선지자가 마지막으로 예언을 전한 “다리오왕 이년 구월 이십 사일”(학 2:18, 20)보다는 한달 정도 앞서 예언을 시작하였음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학개와 스가랴의 활동기간은 적어도 한 달 정도 중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성전재건이 시작된 “다리오왕 이년 유월 이십 사일”(학 1:15)에서 약 한 달이 지난 뒤인 “다리오왕 이년 칠월 이십 일일”(학 2:1) 곧 학개의 두 번째 예언이 주어진 직후에 스가랴의 첫 번째 예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스가랴의 활동은 학개의 예언과 그에 의하여 시작된 성전재건의 새 역사와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학개는 당시 이스라엘이 겪고 있던 경제적 어려움은 그들이 성전재건에 무관심하였기 때문이라고 공격하면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의 신앙적 각성을 촉구하였다. 이에 자극을 받은 그들은 곧바로 성전재건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성전재건이 어느 정도 진행되면서 다시금 실망감이 그들을 찾아왔다. 그것은 그들이 서둘러 재건하고 있는 성전의 모습이 이전의 솔로몬 성전과 비교할 수 없도록 초라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에 학개는 그의 두 번째 예언을 통하여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학 2:9)는 여호와의 약속을 전하면서 총독 수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 그리고 그 땅의 모든 백성들을 격려하였다(학 2:4).



그러나 스가랴는 학개와는 좀더 다른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실망감을 다루고 있다. 즉 지금 재건되고 있는 성전의 중요성은 외형적인 웅장함이나 화려함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돌아와 새로 재건되는 성전에 내재하심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스가랴서의 첫 부분에 소개된 여덟 가지 환상 속에 나타나는 신학적 주제요 관심이다.



학개와 스가랴는 동시대에 같은 지역에서 활동하였던 선지자들이다. 이들이 다루는 주제 역시 동일하게 성전재건과 관련된 이스라엘의 미래 문제였다. 비록 이 두 선지자는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서로 다른 관점에서 상호 보완적 역할을 하였다. 학개가 성전재건이라는 가시적 역사에 초점을 두었다면, 스가랴는 그 성전이 지니고 있는 내면적 의미에 강조점을 두었다.



(4) 스가랴 전반부(1-8장)의 역사적 배경은 다리오왕 이년과 사년 사이가 된다. 이 기간에는 어떤 역사들이 진행되었을까?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역사적 발전은 스가랴서 예언 이해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다리오왕은 기원전 522∼ 486년까지 페르샤제국을 통치하였던 페르샤의 제3대 왕인 다리오 1세 히스타스페스(Darius I Hystaspes)를 말한다. 페르샤제국을 건설한 고레스가 죽은 뒤 기원전 530년 고레스의 아들이었던 캄비세스는 부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된다. 기원전 525년 캄비세스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와 에디오피아 정복에 나서게 된다. 기원전 522년 에디오피아에서 귀국 도중 캄비세스는 고국에서 과우마타를 중심으로 일어난 반란소식을 접하게 되고, 이스라엘의 갈멜산 근처에서 의문의 죽임을 당하게 된다.



캄비세스의 돌연한 죽음으로 권력의 공백이 생기게 되자, 수사 총독의 아들이면서 캄비세스 군대의 장군이었던 다리오는 군대의 호응을 얻어 왕위에 오르게 된다. 본국으로 곧장 회군한 다리오는 반란의 주동자였던 과우마타와 그의 추종자들을 성공적으로 진압시켰다. 그러나 다리오가 반란군들과 전쟁을 벌이는 동안 페르샤의 지방 총독들은 이때가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겨 각지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났다. 동쪽의 이란을 비롯하여 서쪽의 소아시아 지방, 그리고 남쪽의 애굽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에서 소요와 반란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바벨론의 상황은 심각하였다. 자칭 나보니더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였던 느브갓네살 3세는 바벨론의 독립을 선포하였다. 느브갓네살 3세의 반란이 진압된 후 곧 이어서 느브갓네살 4세가 나타나 바벨론 왕위를 주장하였다. 다리오왕은 왕위에 오른 이후 첫 이년 동안 제국 내의 반란 진압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격변기를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새날이 도래하는 시작으로 이해하였고, 그것이 학개와 스가랴가 예언활동을 시작한 역사적 환경들이다. 혼란스러운 시기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리오왕은 제국 내의 소요사태를 진압할 수 있는 유능한 장군 출신의 왕이었다. 고레스나 캄비세스가 그러했듯이 얼마 지나지 않아 다리오왕은 확고한 통치권을 획득하였다. 기원전 520년 다리오왕은 캄비세스에 의하여 페르샤에 병합시킨 적이 있었던 애굽을 제외한 고대근동의 전역을 평정시킬 수가 있었다.


그 이후 다리오왕은 거대한 제국의 내부 문제에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다리오왕의 노력은 주로 제국 내의 총독관구 제도를 개혁하는 일이었다. 특별히 행정적인 제도를 개혁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520년경부터 전에는 현지인들에 의하여 관장이 되었던 지방행정직에 페르샤인들을 등용하기 시작하였다. 페르샤 사람들은 심지어 하급 지방행정직도 맡게 되었다. 이렇게 함으로 다리오왕은 세금과 재정에 관련된 분야를 확실하게 관장할 수 있었다.



다리오왕이 제국 내의 소요사태를 평정시킨 그의 즉위 2년과 그 이후의 상황이 곧 학개와 스가랴가 예언 활동을 시작한 시대적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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