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서 강해 -2 - 이장우 목사(늘푸른 교회)

작성자bloomy|작성시간07.04.27|조회수421 목록 댓글 0

스가랴 7:1-14 누구를 위한 금식인가? 2007. 2. 7

1 다리오 왕 사년 구월 곧 기슬래월 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2 때에 벧엘 사람이 사레셀과 레겜멜렉과 그 종자를 보내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고 3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물어 가로되 우리가 여러 해 동안에 행한 대로 오월 간에 울며 재계하리이까 하매 4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5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6 너희의 먹으며 마심이 전혀 자기를 위하여 먹으며 자기를 위하여 마심이 아니냐 7 여호와가 이전 선지자로 외친 말을 너희가 청종할 것이 아니냐 그 때에는 예루살렘과 1)사면 읍에 백성이 거하여 형통하였고 남방과 평원에도 사람이 거하였었느니라
8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9 만군의 여호와가 이미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피차에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10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남을 해하려하여 심중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11 그들이 청종하기를 싫어하여 2)등으로 향하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12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신으로 이전 선지자를 빙자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노가 나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나왔도다 13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었노라 내가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은즉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고 14 회리바람으로 그들을 그 알지 못하던 모든 열국에 헤치리라 한 후로 이 땅이 황무하여 왕래하는 사람이 없었나니 이는 그들이 아름다운 땅으로 황무하게 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70년 동안 5월과 7월에 금식을 하였습니다. 5월의 금식은 바벨론의 침략으로 예루살렘의 성이 무너지고 성전이 파괴되고 왕궁이 불타고 귀인들의 집들조차 파괴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 날을 기억하면서 5월에 금식한 것입니다. 7월의 금식은 바벨론에 의하여 파괴된 예루살렘에 그달랴를 세워서 그 남은 사람들을 다스리게 하였지만 다시 반역이 일어나 그달랴를 죽이고 유다의 백성들이 애굽으로 도망간 것입니다. 그러니 완전히 망한 것입니다. 이 날을 기억하며 금식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70년이 되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습니다. 지금도 그런 금식을 계속하여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벧엘에서 온 몇 사람이 제사장과 선지자들에게 질문을 한 것입니다. 벧엘은 북 이스라엘 지역이지만 바벨론에서 돌아온 사람들 중에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도 있기에 그들이 묻기 위하여 온 것입니다.

1-3절입니다. 벧엘에서 온 사람들이 먼저 여호와께 은혜를 구합니다. 은혜를 구한다는 것은 여호와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인데 성전에서 제사를 드린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서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5월에 해 왔던 금식과 재계를 계속하여야 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재계(齋戒)란 오락을 금하고 울며 탄식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목욕재계한다는 말을 하지요! 그런 금식을 계속하느냐 마느냐고 묻습니다.

4-5절입니다. 여호와의 응답이 스가랴 선지자에 임합니다.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칠십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였지만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고 합니다. 아주 강조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한번만 나를 위한 것이냐고 하신 것이 아니라 정말 나를 위한 것이냐고 두 번씩이나 말씀하신 것은 그들의 금식이 순전히 자기들을 위한 것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청년 때에 ‘금식기도의 능력’이라는 책을 보았습니다. 그 내용은 자신이 소원하는 바를 기도하여 응답받고자 할 때에 금식기도하면 응답이 잘 된다는 것입니다. 흔히 부흥사들이 하는 말이 자식이 금식하면 부모가 안달이 나서 들어준다는 것입니다. 그런 금식이란 누구를 위한 금식입니까? 순전히 자기를 위한 금식이지 어떻게 하나님을 위한 금식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이 땅에 금식기도원이라는 곳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도가 과연 누구를 위한 금식입니까? 오늘 뉴스 엔조이에서 보니 홍정신 목사가 조용기 목사를 비판 한 죄를 회개한다고 조목사 앞에서 무릎을 꿇고 회개하였다는 내용이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회개하라고 하면서 회개 속죄금 천만원도 내라고 해서 내었답니다. 그렇게 회개하니 조 목사의 은사가 자기에게도 임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병도 고치고 부자도 되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회개입니까?

그러면 유대백성들도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포로로 잡혀가서 나라가 망한 날을 기억하면서 그들이 울며 금식하며 기도한 것도 자기들을 위한 것이라는 말입니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자기들의 죄를 기억하고 다시 시온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금식하면서 기도한 것도 자기를 위한 것이냐는 것입니다. 표면적으로는 그들이 회개하고 시온으로 돌아가고자 금식하며 기도한 것처럼 보이는데 속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6절을 봅니다. 금식만이 아니라 먹고 마시는 것도 자기들을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즐거운 절기 때에 기뻐하며 잔치하면서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물론 일상에서도 먹고 마십니다. 이렇게 먹고 마시는 것이 다 자기를 위하여 한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도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과일도 먹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먹고 마시는 것이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나를 위한 것입니다. 나를 위한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당연한 것으로 문제를 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입술로는 하나님 아버지 이 음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하옵소서! 바울사도의 권면처럼 이렇게 기도하면서 먹어도 사실은 말로만 그렇지 순전히 나를 위하여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평소에 나를 위하여 먹고 마시면서 살아가다가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특별히 금식한다고 해도 나를 위하여 하는 것에서 달라질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주전에 누가복음 설교를 하면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먹기를 탐하고 술을 즐긴다는 비난에 대하여 예수님은 잔치집의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어떻게 금식할 수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때에 오나니 그러면 금식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적용하면서 세상의 염려와 근심이 예수님보다 커 보일 때 금식할 것이며, 세상의 재미와 욕망이 예수님보다 커 보일 때 금식할 때라고 말씀을 드리니 어떤 집사님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날마다 금식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과연 오늘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하고 기도를 하고 찬송을 하고 때로 금식도 철야도 새벽기도도 하는 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근본적으로 물어보자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을 위하여 한 것입니까?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예수님을 위하여 한 것입니까? 아니면 내가 예수님을 부르고 섬김으로 내가 잘 되고 천국도 가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까?

우선 오늘의 주제에 맞게 금식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율법에서는 금식하라는 규례가 없습니다. 최초로 금식이라는 단어가 나타나는 곳은 사사기부터입니다. 대부분의 금식은 전쟁에서 패배하였거나 자신들의 소원을 아뢰기 위하여 금식을 한 것입니다. 또는 존경하는 지도자가 죽었을 때에도 금식하였습니다. 또는 하나님의 심판의 선고를 받고 회개하기 위하여 금식하기도 합니다. 이방의 땅 니느웨도 왕으로부터 모든 신하와 짐승까지 금식하였던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하여 돌이키신 것도 봅니다. 이러한 금식을 통하여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임한 심판을 거두어 주시고 하나님께서 다시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금식마저 외형적인 형식으로 치우치게 되면서 자기들의 소원을 이루어내기 위하여 벌리는 종교적인 행사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자기들의 행위는 고치지 않으면서 금식기도로 해결하려는 주술적인 종교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자기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삭발 단식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정치인들이 삭발단식하면서 자기들의 정치적인 뜻을 관철시키려고 하는 것이나 교계의 지도자라라는 사람들이 사학법 개정을 위하여 삭발하고 기도회도 하고 금식도 하는 것이 과연 주님을 위한 행동들입니까?

7절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이전의 선지자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58:1-8절입니다. “봉독” 공동번역으로 다시 봅니다. “1 "목청껏 소리질러라. 네 소리, 나팔처럼 높여라. 내 백성의 죄상을 밝혀 주어라. 야곱 가문의 잘못을 드러내어라. 2 그들은 나를 날마다 찾으며, 나의 뜻을 몹시도 알고 싶다면서, 마치 옳은 일을 해 온 백성이기나 하듯이, 자기 신의 법을 어기지 않은 백성이기나 하듯이, 무엇이 옳은 법인지 나에게 묻고 하느님께 가까이 나가고 싶다면서 3 한다는 소리는, '당신께서 보아 주시지 않는데 단식은 무엇 때문에 해야 합니까? 당신께서 알아주시지 않는데 고행은 무엇 때문에 해야 합니까?' 그러면서 단식일만 되면 돈벌이에 눈을 밝히고 일꾼들에게 마구 일을 시키는구나. 4 그렇다, 단식한다는 것들이 시비나 하고 싸움이나 하고 가지지 못한 자를 주먹으로 치다니, 될 말이냐? 오늘 이 따위 단식은 집어 치워라. 너희 호소가 하늘에 들릴 리 없다. 5 이 따위 단식을 내가 반길 줄 아느냐? 고행의 날에 하는 짓이 고작 이것이냐? 머리를 갈대같이 구푸리기나 하고 굵은 베를 두르고, 재를 깔고 눕기나 하면 그것으로 다 될 듯싶으냐? 그게 이른바 단식이라는 것이냐? 그러고도 야훼가 이 날 너희를 반길 듯싶으냐? 6 내가 기뻐하는 단식은 바로 이런 것이다." 주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억울하게 묶인 이를 끌러 주고 멍에를 풀어 주는 것, 압제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7 네가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눠 주는 것,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 주며 제 골육을 모르는 체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해석이 필요가 없습니다. 종교적인 행위 중에 금식이 가장 대단해 보이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금식마저 자기를 위한, 자기의 소원 성취를 위하여 사용되고 있는 일에 대하여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금식과 고행을 하면서도 그들이 평소에 하는 짓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로 대표되는 약자들을 학대한 것입니다. 그러니 참된 금식이란 밥을 굶고 머리를 풀어 헤치고 고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된 금식이란 무엇입니까? 이사야 선지자와 같은 내용입니다. 8-10절입니다. 진실한 재판을 하라고 합니다. 인애와 긍휼을 베풀라고 합니다.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라고 합니다. 남을 해하려고 심중에 도모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외침이나 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행하지 아니한 금식으로 인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다가 하나님의 인애와 긍휼로 돌아왔다면 좀 고쳐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도 별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여전히 형식적인 금식은 하지만 참된 금식은 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11-14절입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기를 싫어하여 등을 돌리고 그들의 마음을 금강석같이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 판에 새겨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유리위에 먹으로 글을 쓰면 어떻게 됩니까? 물로 씻으면 바로 지워지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이 금강석처럼 되어 있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기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진노하셔서 열국에 흩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땅은 인애와 긍휼이 흘러야 되는 땅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을 긍휼로 베풀어 주셨기에 그들이 노력하지 아니한 약속의 땅을 받아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인애와 긍휼을 베풀어야 할 약자를 오히려 학대하고 착취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언약의 땅에서 추방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돌아와서는 달라졌습니까? 여전한 것입니다. 그러면 공정한 재판과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참된 금식의 구체적인 모습은 스가랴 8장에서 계속됩니다. 다음주에 보기로 하겠습니다만 우선 결론적으로 참된 금식이란 예수님께서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먹기를 탐하고 술을 즐기는 자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된 금식을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어떤 금식입니까? 우리가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의와 생명의 세계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얽매인 줄을 끊어버리시고 주의 사랑의 줄로 묶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죄인을 불러 구원하신 참된 금식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일상적인 삶만이 아니라 금식이나 기도나 예배라는 모든 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스가랴 8:1-13 질투하시는 하나님 2007. 2. 14

1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 2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 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왔은즉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4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예루살렘 길거리에 늙은 지아비와 늙은 지어미가 다시 앉을 것이라 다 나이 많으므로 각기 손에 지팡이를 잡을 것이요 5 그 성읍 거리에 동남과 동녀가 가득하여 거기서 장난하리라 6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일이 그 날에 남은 백성의 눈에는 기이하려니와 내 눈에 어찌 기이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백성을 동방에서부터, 서방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8 인도하여다가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성실과 정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9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집 곧 전을 건축하려고 그 지대를 쌓던 날에 일어난 선지자들의 입의 말을 이 때에 듣는 너희는 손을 견고히 할지어다 10 그 날 전에는 사람도 삯을 얻지 못하였고 짐승도 삯을 받지 못하였으며 사람이 대적을 인하여 출입에 평안치 못하였었나니 이는 내가 뭇 사람으로 서로 치게 하였음이어니와 11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이제는 내가 이 남은 백성을 대하기를 전일과 같이 아니할 것인즉 12 곧 1)평안한 추수를 얻을 것이라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산물을 내며 하늘은 이슬을 내리리니 내가 이 남은 백성으로 이 모든 것을 누리게 하리라 13 유다 족속아,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이방 가운데서 저주가 되었었으나 이제는 내가 너희를 구원하여 너희로 축복이 되게 하리니 두려워 말지니라 손을 견고히 할지니라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그렇게 사셨습니까? 지난주에 본 말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70년 포로생활동안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고 성전이 무너진 것을 기억하면서 금식하여 왔는데 이제 포로에서 돌아왔는데 계속 금식을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여기에 대한 응답이 7장에서 8장까지 연결이 됩니다. 그 첫 번째의 응답은 그 금식이 과연 “과연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고 되물으시는 것입니다. 너희의 먹고 마심이 너희를 위한 것이 아니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이 열국에 흩어지게 되고 황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음 받던 성읍이 사람들의 말거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런 현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질투하시는 것입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이미 율법을 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3-4대까지 이르게 하실 것이라고 십계명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 하자 질투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벌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벌을 받고 있는 자기 백성이 이방의 수욕과 치욕거리가 되자 또 질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8:1-2절입니다.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신다는 것입니다. 처음 질투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였기에 질투하심으로 이방인의 손에 파셨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의 땅에 팔려가게 되니 그곳에서 주의 이름이 더렵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질투하심으로 다시 시온에 돌아오시는 것입니다.

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에 돌아오셔서 예루살렘에 거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시온에서 떠나버리셨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면 이스라엘은 삽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떠나 버리시면 이스라엘은 멸망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범죄 하는 이스라엘과 함께 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사사시대 말기에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무엘 상 4장에 보시면, 엘리제사장의 두 아들이 홉니와 비느하스의 범죄가 나옵니다. 이들의 죄는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였기에 용서 받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전쟁터에 언약궤를 메고 나갔지만 그 언약궤 앞에서 죽고 언약궤는 블레셋에 빼앗겨 버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제사장은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서는 놀라 넘어지면서 목이 부러져 죽습니다.

엘리의 며느리 비느하스의 아내는 이 소식을 들을 때에 갑자기 산통이 와서 아이를 낳았는데 죽을 지경에 해산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두려워말라고 하면서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아들이라는 말에 대답도 않고 관념치도 아니하면서 말하기를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고 하면서 이가봇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하여 빼앗긴 언약궤가 어떻게 돌아옵니까? 언약궤 홀로 적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블레셋의 다곤 신전에 언약궤를 갖다놓으니 다곤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엎드려져 있어서 다시 세워놓았습니다. 그 다음날에는 다곤의 목이 부러지고 팔이 잘려서 문지방에 걸쳐져 있는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언약궤가 가는 곳마다 전염병이 돌아서 큰 환난을 당하게 됩니다. 결국 그들이 언약궤를 벧세메스로 돌려보내는 것을 봅니다.

이 언약궤를 다윗이 메고 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서 성전에 둡니다. 그러나 이 성전에 우상이 가득하게 되면서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게 됩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버린 성전이나 언약궤는 아무른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은 파괴되고 예루살렘은 망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70년을 지내는 것입니다. 때가 되어 그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다면 성전 재건에 힘을 써야 하는데 이들은 자기 일에 빨랐고 성전을 짓는 일에는 뒷전이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을 보시면서 여호와께서 질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시 돌아오셔서 그들의 마음을 각성시키시는 것입니다. 학개서 1:1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바 모든 백성의 마음을 흥분시키시매 그들이 와서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 역사를 하였으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는 것도 역시 여호와의 열심과 여호와의 질투로 인하여 되는 일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8:3절을 다시 봅니다. 여호와께서 돌아오셔서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시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성산이라고 일컫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4-5절에서 나타나는 대로 구약에서 축복을 받은 모습을 그림처럼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늙은 지아비와 지어미가 다시 앉을 것이며 장수하게 되고 어린 아이들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6절입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마음을 자기들이 압니다. 얼마나 여호와의 일에 게을렀으면 자기들의 일에 빨랐는지 금식을 하여도 순전히 자기들을 위하여 하였고 먹고 마시는 것도 자기들만을 위하여 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 남은 백성들은 아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예루살렘이 이렇게 회복되었는지 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남은 백성들에게 기이하게 보이지만 여호와께의 눈에는 어찌 기이하겠느냐는 것입니다.

7-9절을 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놀라운 일을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셨기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단락마다 다 나오는 말씀입니다. 8장만 보아도, 2,3,4,6,7,9,11,14,17,19,20,23절에서 계속하여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성취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대로 내 백성을 동방에서부터 서방에서부터 구원하여 예루살렘 가운데 두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대도 성취되는 때가 언제입니까? 부분적으로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에 재건되는 때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거하시려면 성전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을 재건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9절입니다. 여호와의 집 곧 전을 건축하려고 그 지대를 쌓던 날에 일어난 선지자들의 입의 말을 이때에 듣는 너희는 너희의 손을 견고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10절입니다. 성전 건축을 재개하지 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처음 시작을 하고 약 15년간 공사를 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 사람이나 짐승이 삯을 받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대적을 인하여 출입에 평안하지 못하였고 서로 치게 한 것입니다. 내분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학개서 2:15-19절에서도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전이 황폐하였을 때에 제대로 수확을 얻지 못하였지만 성전지대를 다시 쌓은 오늘부터 복을 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11-13절입니다. 이 남은 백성들에게 전과 같이 대하지 않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말고 손을 견고히 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에 열심을 내라는 것입니다. 평안한 추수와 포도나무는 열매를 맺고 땅은 산물을 내고 하늘을 이슬이 내려서 모든 것을 누리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저주가 아니라 구원하여 축복을 하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구원과 축복은 여호와의 질투로 인하여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질투는 뿌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 언약의 신실하심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씀의 궁극적인 성취는 아직 미래에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성전이 재건되지만 이 성전이 다시 무너지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증축된 성전조차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질투로 일어나는 일은 도둑의 소굴이 된 성전을 무너뜨려 버리고 사람의 손으로 짖지 아니한 새로운 성전을 세우신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성전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2:13-22절입니다. “봉독” 예수님의 질투가 보이십니까? 지금까지 구약에서 여호와의 질투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성전을 재건하게 하시는 그 질투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질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질투를 나타내실 때에 제자들이 무엇을 기억하는가 하면 시편 69:9절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전을 향한 열심 때문에 엉터리 열심을 가진 유대인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림자인 건물을 붙드는 열심이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삼일 만에 다시 부활하심으로 자기 몸이 성전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성전이 되는 것을 이루어 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질투는 이렇게 참된 성전을 만들어내시기 까지 하시는 것이며 이 성전, 그리스도의 몸을 경계로 이 세상을 구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여호와의 질투와 열심으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몸 된 성전은 무엇을 담고 있습니까? 자신들은 반역하여 떠났지만 주의 열심이, ㅈ주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구원하여 주셨다는 것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서 36:16-31절을 봅니다. “봉독” 이스라엘 족속이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우상들로 이스라엘을 더럽혔습니다. 그래서 심판하여 열국에 흩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 여호와의 거룩한 이름이 더러워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아껴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구원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하여 돌아온 자들은 맑은 물로 뿌려 깨끗하게 하시고 새 영을 우리 속에 두시고 새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돌 같은 마음이 살과 같은 부드러운 마음이 되어서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새 마음과 새 영을 받은 자들은 지역이나 혈연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이 그들이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들을 위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이 예비 되어 있습니다(요한계시록 21:1-8). 새 마음과 새 영은 곧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이 거하시게 된 신자가 성전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질투가 담겨져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거든 저주를 받을 지어다(고전16:22)! 이 질투가 우리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스가랴 8:14-23 은혜를 구하리라 2007. 2. 21

14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전에 너희 열조가 나의 노를 격발할 때에 내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뜻하고 뉘우치지 아니하였었으나 15 이제 내가 예루살렘과 유다 족속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뜻하였나니 너희는 두려워 말지니라 16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각기 이웃으로 더불어 진실을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17 심중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나의 미워하는 것임이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18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9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월의 금식과 오월의 금식과 칠월의 금식과 시월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할찌니라 20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후에 여러 백성과 많은 성읍의 거민이 올 것이라 21 이 성읍 거민이 저 성읍에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속히 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자 할 것이면 나도 가겠노라 하겠으며 22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리라 23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는 방언이 다른 열국 백성 열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포로기간동안 예루살렘의 멸망을 기억하면서 금식하였던 것을 계속하여야 하느냐 하는 질문에 대하여 여호와의 응답은 무엇이었습니까? 너희의 금식이 과연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고 대답하시면서 너희의 먹고 마심이 전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냐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할말이 없게 만드시는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70년을 절기마다 금식하였다고 하여 그들이 포로에서 돌아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까? 지난주에 본 말씀에서 하나님의 질투 때문이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온을 위하여 크게 분노하시고 질투하심으로 시온에 돌아오셨기에 예루살렘이 진리의 성읍이라고 일컫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시온에 돌아오셔서 동방에서 서방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내시고 그 가운데 거하시면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저주가 변하여 축복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워말고 손을 견고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14절을 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전에 너희 열조가 나의 노를 격발할 때에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뜻하고 뉘우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너희 열조’는 ‘너희로’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 열조의 죄로 인하여 너희가 재앙을 받았다는 식이 됩니다. 물론 율법에서 죄의 결과가 삼 사대까지 내려간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상들의 죄로 인하여 후손들이 재앙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죄를 탓하기보다 조상들의 죄 때문에 재앙을 당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담이 생겼습니다.

에스겔 18:1-4절입니다. “1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2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찜이뇨 3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4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 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우리나라 속담과 비슷하지요! 잘되면 자기 탓 못되면 조상 탓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런 속담을 다시는 사용하시지 못하게 하시겠다고 하시면서 모든 사람이 자기 죄로 인하여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 31:27-30절입니다. “2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28 내가 경성하여 그들을 뽑으며 훼파하며 전복하며 멸하며 곤란케 하던 것 같이 경성하여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29 그 때에 그들이 다시는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30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 이가 심 같이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

그러면 조상의 죄로 인하여 삼 사대에 재앙이 내린다는 것과 선지자들이 증거 한 자기들의 죄로 인하여 재앙이 올 것이라는 말씀이 어떻게 통일이 되는 것입니까? 이어지는 31절 이하의 말씀에 보면 새 언약이 나옵니다. 새 언약 하에서 이것이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조상들의 죄로 인한 재앙마저 차단이 되고 자기들이 죄악조차 용서를 받는 체계가 바로 새 언약의 능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스겔 선지자나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한 그 말씀들의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열조나 그들이나 간에 다 하나로 보아도 됩니다. 언약이란 언약을 맺는 당사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후손까지 포함시켜서 언약을 맺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5:2-3절입니다. “2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산에서 우리와 언약을 세우셨나니 3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열조와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날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 호렙산에서 세운 언약을 지금 모압에서 갱신하고 있습니다. 40년이 지났으니 그 언약을 받던 자들은 거의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언약이 여기 우리와 세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참으로 놀라운 내용입니다. 우리가 2천년 전에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를 구원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것이 바로 언약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로마서의 표현대로는 죄인 되었을 때입니다. 원수 되었을 때입니다. 그런 때에 하나님의 자기 사랑을 확증하시고자 자기 아들의 피로 새 언약을 세우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 세운 새 언약에 우리는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그 언약 속에 넣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15-17절을 봅니다. 전에는 재앙을 내리기로 하고 그 뜻을 돌이키지 않았으나 이제는 예루살렘과 유다 족속에서 은혜를 베풀기로 뜻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두려워말라고 합니다. 은혜를 베풀기로 하였기에 두려워말고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이웃으로 진실을 말하고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심중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고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이 다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로 이웃끼리 진실을 말하지 않고 서로 속인 것입니까? 진실한 재판을 하지 않았습니까? 은혜가 없기에 그러하였습니다. 오직 자기 살길을 자기 스스로 챙겨야 하기에 서로 속고 속이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이라고 하여도 은혜가 없으면 서로 속고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은혜를 베풀려고 뜻하였기에 너희는 서로 진실하게 대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다면, 이 약속의 말씀을 믿는다면 이제 이웃과 진실하게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를 살펴봅시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다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새벽기도회에 은혜를 주제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처음 은혜라는 단어가 나타나는 곳은 노아입니다. 노아가 은혜를 입었기에 120년간이나 방주를 예비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은혜를 입었다면 노아처럼 하나님의 심판이 올 것을 예비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막상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보다 거저 생활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막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부분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스가랴 선지자의 말씀을 통하여 그때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뜻하였다 그러므로 두려워말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18-19절입니다. 금식이 무려 네 번이나 있습니다. 이 네 번의 금식은 다 예루살렘의 멸망과 연결된 금식일입니다. 사월의 금식은 예루살렘의 함락, 오월의 금식은 예루살렘의 성전과 왕궁이 불타고 무너짐, 칠월의 금식은 그달랴가 살해당하고 남은 자들이 애굽으로 떠나서 예루살렘이 완전히 폐허가 됨, 시월을 금식은 예루살렘이 바벨론 군대에 포위당하여 극심한 굶주림에 처하게 된 것을 기하면서 금식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금식의 날을 무엇으로 바꾸어주신다고 하셨습니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복을 누릴 자격은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기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사야 61:1-9절입니다. “봉독” 구원의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이 말씀의 성취를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4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은혜의 해를 선포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남아있는 날은 신원의 날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은혜를 받을 때입니다. 그 은혜가 임한 자는 슬픔대신 화관을 재를 대신 하여 희락의 기름으로 슬픔대신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 할 것입니다. 그들은 의의 나무로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낼 자들입니다. 이들이 열방 중에 알리게 되면 이를 보는 자들이 그들은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이라고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이 복이 무엇입니까? 10-11절입니다. “10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2)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11 땅이 싹을 내며 동산이 거기 뿌린 것을 움돋게 함 같이 주 여호와께서 의와 찬송을 열방 앞에 발생하게 하시리라” 이런 복을 보고서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할까요?

스가랴 8:20-23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은혜를 베푸시면 여러 백성과 많은 성읍에서 사람들이 몰려오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서로 이르기를 우리가 속히 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자고 할 것이며 그러면 나도 가겠노라고 하면서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백성들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여호와께 은혜를 구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날에 방언이 다른 열국 백성 열명이 유다 사람 한 사람의 옷자락을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으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겠다고 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약속의 말씀이 언제 성취가 되었습니까? 2천년 전에 이 말씀이 성취가 되었고 지금도 그 성취 안에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시면 오순절 성령이 임하게 되자 각 나라에서 몰려온 자들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였습니다. 방언이 다른 여러 지역의 사람들이 와서 하나님의 큰일을 보고 듣게 됩니다. 그때 사람 사람들이 유다인인 제자들의 옷자락을 붙들고 우리도 은혜를 받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은혜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슬픔과 금식의 날이 기쁨과 즐거움의 날이 되는 것, 슬픔대신 화관을 주시고, 슬픔대신 찬송의 옷을 주시고, 의의 옷을 입혀주신 것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다는 그 약속 때문에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받는 모든 은혜란 하나님이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은혜가 있습니까? 이 은혜가 있기에 성도 안에서 서로 진실과 화평이 있습니까? 19절을 다시 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것이기에 진실과 화평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우리 안에 이 은혜가 있다면 진실과 화평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면 사람들이 나도 너희가 받은 그 은혜를 받기 원한다고 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2:43-47절입니다. “봉독” 이런 은혜가 있다면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을 것입니다. 어떤 칭송입니까? 스가랴 8:23절입니다.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노라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이 은혜가 우리에게도 있기를 소원합니다.

 

 

 


스가랴 9:1-10 나귀 새끼를 탄 왕 2007. 2. 28

1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가 하드락 땅에 임하며 다메섹에 머물리니 세상 사람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눈이 여호와를 우러러 봄이니라 2 그 접경된 하맛에도 임하겠고 두로와 시돈은 넓은 지혜가 있으니 그들에게도 임하리라 3 두로는 자기를 위하여 보장을 건축하며 은을 티끌 같이, 정금을 거리의 진흙 같이 쌓았은즉 4 주께서 그를 쫓아내시며 그의 바다 권세를 치시리니 그가 불에 삼키울찌라 5 아스글론이 보고 무서워하며 가사도 심히 아파할 것이며 에그론은 그 소망이 수치가 되므로 역시 그러하리라 가사에는 임금이 끊칠 것이며 아스글론에는 거민이 없을 것이며 6 아스돗에는 잡족이 거하리라 내가 블레셋 사람의 교만을 끊고 7 그 입에서 그 피를, 그 잇사이에서 그 가증한 것을 제하리니 그도 남아서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유다의 한 두목 같이 되겠고 에그론은 여부스 사람 같이 되리라 8 ○내가 내 집을 둘러 진을 쳐서 적군을 막아 거기 왕래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포학한 자가 다시는 그 지경으로 지나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눈으로 친히 봄이니라
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오늘 신문에 아프가니스탄의 공군기지 정문 앞에서 폭탄테러로 20여명이 사망한 사고가 보도 되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 17개의 다국적 평화유지군의 일원으로 가있던 우리나라 군인도 한명이 사망을 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 진학 중에 한국군에 지원한 신앙심이 있는 청년으로 보도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든 군대를 기피하고자 하는 세상에서 귀감이 되기도 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가족들은 이제 몇 달 남지 않은 전역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런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가정에 평화는 깨어진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의 품에 묻는다고 하는데 두고두고 그 아들이 생각날 것입니다.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군에 자원하여 갔던 아들이 테러에 의하여 죽었다는 소식을 여러분의 자녀라면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테러한 그들만 미워하겠습니까?

미국에서 2001년 9.11테러가 일어나고 그 테러의 배후 세력을 축출한다는 명목으로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한 것입니다. 여기에 저항하면서 계속하여 테러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무슨 평화가 있습니까? 모든 국가들이 오직 힘만이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이 오늘의 세상입니다. 그러니 악순환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전쟁은 언제부터 일어난 것입니까? 범죄 한 아담의 자식들 사이에서 일어나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언제 이런 전쟁이 끝이 나겠습니까? 이사야 2:2-4절을 보면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며 그곳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나올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열방 사이에 판단하며 백성을 판결하시는데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다시는 이 나라와 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9-10절 말씀에서도 한 왕이 임하시는데 그 왕이 겸손하여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왕이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어버리고 전쟁하는 활도 끊어버리고 이방 사람들에게 화평을 전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를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평화가 어떻게 주어지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스가랴 1-8장까지는 여러 가지 이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이제 9-14장까지는 이상이 아니라 예언을 주신 것입니다. 이상을 통하여서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면 그 대적을 심판하실 것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백성만이 아니라 다른 열방에서도 그 구원을 바라보고 우리도 은혜를 받자고 함께 나아올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이상과 마찬가지로 예언부분에서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시고 자기 나라를 만들어 내실 지를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9:1절입니다. 여호와의 경고입니다. 경고란 중대한 일입니다. 이 경고가 하드락 땅에 임하고 다메섹에 머문다는 것입니다. 하드락과 다메섹은 이스라엘의 북쪽지역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을 늘 괴롭힌 나라들입니다. 이들에 대한 중한 경고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경고가 시행되면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의 눈이 여호와를 우러러 보게 될 것입니다.

2-4절입니다. 1절의 하드락과 다메섹만이 아니라 그와 가까이 있는 하맛과 두로와 시돈까지 경고가 주어집니다. 여기서 두로와 시돈은 예루살렘의 북서쪽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바닷가에 위치한 나라들입니다. 두로와 시돈은 넓은 지혜가 있다고 합니다. 이 지혜란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입니다. 세상의 힘을 가지는 기술력이 뛰어난 민족입니다. 그런 지혜로 무엇을 하였겠습니까? 무역을 하고 전쟁을 하면서 자기들의 힘을 축적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기를 위하여 보장을 건축하고 은을 티끌같이 정금을 진흙같이 쌓았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지금 이정도의 경제성장만으로도 만족하게 여기고서 더 나은 복지정책을 쓰고, 약한 나라들을 돕고자 합니까? 전혀 아닙니다. 다들 먹고 살기 힘들다고 난리들입니다. 그런데 한국 역사상 지금만큼 부요한 적이 없었습니다. 해외 여행객은 갈수록 많아지고 고급식당은 차고 넘칩니다. 세계의 유명한 명품이 한국에서 잘 팔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무엇을 요구하고 있습니까?

3절에 나타난 두로의 모습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든든한 요새를 만들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어떤 적이 쳐들어와도 무너뜨릴 수 없는 든든한 성벽을 갖추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국력이 튼튼하여 어느 나라도 감히 쳐들어 올 수 없는 나라가 되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세상의 지혜로 수많은 은과 금을 벌어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나 어느 개인이거나 간에 이것을 목표로 달려갑니다. 그러면 이 두로가 행복하였을까요?

4절입니다. 주께서 그를 쫓아내시고 그의 바다 권세를 치시리니 그가 불에 삼키 울 것이라고 합니다. 이들이 멸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든든한 요새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은과 금이 부족하여 망한 것이 아닙니다. 3절을 다시 봅니다. “자기를 위하여 보장을 건축하며 은을 티끌같이, 정금을 거리의 진흙같이 쌓았은즉” 보장을 세우고 은과 금을 쌓아놓으면 든든히 설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것을 쌓아놓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멸망시키시는 것입니다. 그 권세를 치시는데 불에 삼켜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도 두로에 대하여 예언하였습니다. 에스겔 28:1-9절입니다. “봉독” 두로가 그들의 지혜와 총명으로 재물을 얻고 금과 은으로 곳간에 저축하며 그 큰 지혜로 장사하여 재물을 더하여 교만하여 진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나오는 것입니까? 자신을 신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을 때에 너도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그 유혹을 스스로 떨쳐 낼 인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담의 범죄가 오늘 온 세상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생들이 달려가는 모습이 이런 두로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교만한 나라를 어떻게 하실 까요? 8-9절입니다. “8 또 너를 구덩이에 빠뜨려서 너로 바다 가운데서 살육을 당한 자의 죽음 같이 바다 중심에서 죽게 할찌라 9 너를 살륙하는 자 앞에서 네가 그래도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이라 하겠느냐 너를 치는 자의 수중에서 사람뿐이요 신이 아니라” 이렇게 멸망 받은 나라가 두로 입니다. 역사적으로 바벨론이 공격하였고 그 이후에 알렉산더 대왕 때에 완전히 멸망되었습니다. 이때의 공격으로 6-8천명이 학살당하고 종으로 팔린 사람이 수 만 명에 이르고 마지막으로 도망간 장소가 그들의 성전안인데 이 성전을 불사름으로 그 안에서 전멸 당하였다는 것입니다. 스가랴 9:4절처럼 불에 삼켜진 것입니다.

5-7절입니다. 예루살렘의 서쪽에 위치한 블레셋에 대한 경고입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옆구리의 가시처럼 괴롭힌 나라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범죄 함으로 하나님의 몽둥이로 사용된 블레셋이지만 이들에 대한 경고도 이어지는 것입니다. 아스글론은 두로의 멸망을 보면서 두려워할 것이라고 합니다. 에그론은 그 소망이 수치로 여겨진 것입니다. 에그론은 두로와 가까운 지역이라서 의지하였는데 두로가 망함으로 그 소망으로 여긴 것이 수치기 된 것입니다. 가사는 임금이 끊어질 것이며 아스글론은 거민이 없어지고 아스돗은 잡족이 거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심판하시는 이유도 블레셋의 교만을 끊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교만을 끊고서는 그 블레셋의 입의 피와 그 잇 사이의 가증한 것을 제거하여 남은 자가 되게 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돌아온 자들이 유다의 한 두목과 같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여 에그론은 여부스와 같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여부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쫒아내지 못하고 함께 살게 된 가나안 부족입니다. 그들처럼 이제 한 가족으로 편입이 될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8절을 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집을 둘러 진을 쳐서 적군을 막아 거기 왕래하지 못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포학한 자가 다시는 그 지경으로 지나지 못하도록 여호와께서 친히 눈으로 볼 것이라고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사야 35장에서 예언한 대로는 사막이 변하여 낙원이 될 것이며 거기에 사나운 짐승이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 곳에는 여호와의 구속을 받은 자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집을 여호와께서 친히 만드시는 것입니다.

9절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하고 즐거이 부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기뻐하고 즐거이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까? 여호와께서 새로운 집을 만드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다스리실 왕을 보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왕이 임하시는데 공의로우신 분이시며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는데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를 타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나귀를 사람이 타기는 합니다만 왕이 탄 적은 없습니다. 더구나 나귀 새끼를 타고오시는 왕입니다.

9:1-6절에 나오는 나라들은 다 힘 있는 나라들입니다. 그러므로 말과 병거를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든든한 요새와 은과 금이 많은 나라들입니다. 그런 나라들을 물리치고 평화의 왕국을 세우려면 더 강한 힘으로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평화 유지군이 필요하다는 세상의 논리로 보면 더 큰 힘을 가지고 왕으로 오셔서 구원을 베푸셔야 하시는데 왜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시는 것입니까?

10절입니다.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다는 것입니다. 전쟁하는 활도 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화평을 이방에 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에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가지 이를 것이라고 합니다. 스가랴 선지자의 이 예언이 그대로 성취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왕으로 오셔서 나귀 새끼를 타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21:1-9절입니다. “봉독”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선지자의 말씀을 이루려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셔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성전을 청결이 하시고 며칠 안 되어 잡히시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분이 우리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귀 새끼 타시고 십자가를 지신 우리의 왕을 우리는 지금도 어떻게 믿고 구하고 있습니까?

지금도 우리에게 말과 병거를 달라고 합니다. 금과 은을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속한 나라라면 예수님께서 무력으로 정복하셨을 것입니다. 그런 나라는 화평의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만들어진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안에서는 세상에서 통하는 힘이 필요 없는 나라입니다. 나귀 새끼를 타시고 가는 그 초라한 왕의 뒤를 따라가는 자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자들입니다. 이 소식이 땅 끝까지 증거 되면 그때의 이 나라의 완성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한 세상의 힘을 원하였던 나라들은 불살라 질 것입니다.

 

 

 


스가랴 9:11-17 언약의 피를 인하여 2007. 3. 7

11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를 인하여 내가 너의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12 소망을 품은 갇혔던 자들아 너희는 보장으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날도 이르노라 내가 배나 네게 갚을 것이라 13 내가 유다로 당긴 활을 삼고 에브라임으로 먹인 살을 삼았으니 시온아 내가 네 자식을 격동시켜 헬라 자식을 치게 하며 너로 용사의 칼과 같게 하리라 14 여호와께서 그 위에 나타나서 그 살을 번개 같이 쏘아내실 것이며 주 여호와께서 나팔을 불리시며 남방 회리바람을 타고 행하실 것이라 15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을 호위하시리니 그들이 원수를 삼키며 물매 돌을 밟을 것이며 그들이 피를 마시고 즐거이 부르기를 술취한 것 같이 할 것인즉 피가 가득한 동이와도 같고 피 묻은 제단 모퉁이와도 같을 것이라 16 이 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떼 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면류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 17 그의 형통함과 그의 아름다움이 어찌 그리 큰지 소년은 곡식으로 강건하며 처녀는 새 포도주로 그러하리로다

지난주에 본 말씀에서, 왕이 겸손하여 나귀 새끼를 타고 임하셨습니다. 그 왕이 임하기에 시온의 딸은 즐거이 부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왕이 오셔서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활을 꺾고 이방 사람에게 까지 화평을 전하는데 그 정권이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땅 끝까지 이른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이 말씀이 그대로 성취가 되어 약 이천 오백년이 지난 지금 오늘 우리에게 까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것은 칠팔십년입니다. 그러나 그 인생이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시편 90편에서 증거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인생이 영광스러운 모습도 있지 않느냐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영광도 풀의 꽃과 같아서 풀이 마르면 그 꽃도 떨어지는 것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것입니다(시40:8,7 벧전1:24).

11절 말씀을 봅니다.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를 인하여 내가 너의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범죄 함으로 이방의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지만 그들을 해방시켜 돌아오시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언약의 피를 인하여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언약의 피가 언제 세워진 것입니까?

출애굽기 24:5-8절입니다. “6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7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8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이 언약 체결은 시내산에서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준행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대로 열두 기둥을 세우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후에 그 피를 절반은 여호와의 단에 뿌리고 그 언약서를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자 백성들이 그 모든 말씀을 준행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피의 절반은 백성에게 뿌리고서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피로서 언약을 체결하였습니다.

만약에 언약을 어길 경우에 생명을 내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피로 세워진 언약이기에 그렇습니다. 피는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언약을 누가 어기게 됩니까? 하나님이 어긴 것이 아니라 언약의 모든 말씀을 지키겠다고 응답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북은 앗수르에 망하고 남 유다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망하여야 하는데 그들을 다시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언약의 피를 인하여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언약을 어겼는데 왜 언약의 피를 인하여 그들을 구원하여 주신다는 것입니까? 언약을 어겼다면 마땅히 형별을 내린 것으로 끝이 나야 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모세를 통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언약체결보다 사백 삼십년 전에 세워진 아브라함의 언약을 보아야 합니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는 것은 짐승을 쪼개 놓고 그 사이로 상방이 지나가는 것이 언약의 체결입니다. 역시 그 언약도 어기면 그렇게 쪼개진 짐승처럼 죽어야 하는 목숨을 건 언약인 것입니다. 그런데 저녁때에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고 나서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언약을 세우신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지나가지 않았는데 언약이 체결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언약은 일방적인 것입니다. 이것을 은혜언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실 일을 언약으로 체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언약을 맺는 것은 상호언약체결이 분명히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아브라함 언약 후에 모세의 언약이 상호계약으로 나타나는 것입니까? 신약의 빛에서 조명하여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5-19절입니다. “봉독” 아브라함의 언약의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언약이 왜 일방적인 은혜의 언약이 되어야만 하는지를 모세 언약을 통하여 확인하는 것입니다. 모세 언약은 상호 언약입니다. 백성들이 지키겠다고 동의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언약을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모세 언약은 인간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켜내지 못하는가를 보여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언약의 완성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언약을 따른 구원의 뿌리는 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어디까지 가는 것이겠습니까? 디모데후서 1:9-10절입니다. “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행위대로 된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약속된 것입니다.

이제 다시 오늘 본문 9:11절을 봅니다. 언약의 피를 인하여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다고 합니다. 무엇이 기억이 납니까? 요셉이 물 없는 웅덩이에 갇혔던 것이 기억날 것입니다. 방금 아브라함의 언약을 말씀드렸습니다만 그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그의 후손이 사백년간 이방의 객이 되었다가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요셉이 웅덩이에 갇혔다가 노예로 팔리고 애굽에서 총리가 되어 그들의 가족을 살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는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록 범죄 하여 나라가 바벨론 포로에 잡혀 갔지만 돌아오게 되고 아직 다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 남은 자들이 돌아오게 될 것이며 그보다 더 궁극적인 해방과 돌아옴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이방의 땅에서도 주의 백성들이 돌아오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의 땅에서 포로로 잡혀 있는 신세가 물 없는 구덩이에 갇혀서 죽어가야 하는 모습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갇혀있음은 죄 아래 갇혀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20-22절을 봅니다. “20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12절입니다. 소망을 품은 갇힌 자들아 너희는 보장으로 돌아오라고 합니다. 그러면 배나 갚아 준다고 하십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죄 아래 갇힌 자들이지만 어떤 갇힌 자들이 있습니까? 소망을 품은 갇힌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소망이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이 그 안에 담겨있기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복음을 듣고 주님께로 돌아오게 되는 것은 영원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이 주어져 있기에 돌아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 구약을 보는데 이렇게 신약을 동원하여 보는 것입니까? 어떤 분이 구약은 외국 영화의 화면이라면 신약은 영화의 자막이라고 하였습니다. 외국 영화를 볼 때에 자막이 없으면 그림을 통하여 대충 알지만 구체적인 의미는 모르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 하는 말씀이기에 이런 예언자들의 약속의 말씀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새 언약의 완성자로서 성취하시는 지를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본문으로 보지 못하고 문자대로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어떻게 해석이 되겠습니까? 13-15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다를 당긴 활을 삼고 에브라임을 먹인 살로 삼았으니 시온이 헬라를 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살을 번개 같이 쏟아내시고 나팔을 부시며 남방 회리바람을 타고 행하시면 자기 백성을 호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적들을 물리치는데 피를 마시고 즐거이 부르며 피가 가득한 동이와 같고 피 묻은 제단 모퉁이와 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시온이 헬라를 물리친 사실이 역사적으로 있었습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헬라의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제사를 금하고 할례를 금하고 돼지피를 제단에 바치게 하는 등의 만행을 항거하기 위하여 마카비 가문이 중심이 되어 물리친 적이 있지만 그것은 일시적이었습니다. 그 후에 예루살렘은 헬라제국과 로마제국에 의하여 지배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전쟁은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지난주 보았던 9-10절을 다시 봅니다. 겸손하여 나귀 새끼를 타고 오셔서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활도 끊으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화평을 땅 끝까지 증거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땅 끝까지 증거 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복음을 증거 하는 것도 전쟁입니다. 영적인 전쟁이기에 전투적인 모습으로 그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16절입니다. “이 날에”는 언제 입니까? 전쟁으로 승리하여야 하는 날입니다. 포로 된 자기 백성들을 구출하여 내는 날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무엇을 승리하셨습니까? 칼과 창으로 승리하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힘으로 승리하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보면 미련하고 어리석은 십자가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로 자기 백성을 구속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백성을 양떼 같이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양은 목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죄악에 사로 잡혀서 물 없는 웅덩이에 빠져 죽어가는 자기 백성을 그 언약의 피로 인하여 구속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그 언약의 피를 인하여 돌아오게 하시는데 돌아올 능력조차 양들에게는 없기에 주님께서 피를 흘려 죄를 속하여 양떼를 이끌어 내신 것입니다. 그런 양들은 면류관의 보석처럼 빛날 것입니다. 다른 번역으로는 높이 들릴 것입니다.

이런 내용의 찬송 가사가 있습니다. 299장 1절입니다. “예수께서 오실 때에 그 귀중한 보배 하나라도 남김없이 다 찾으시리 샛별 같은 그 보배 면류관에 달려 반짝 반짝 빛나게 비치리로다” 왜 양떼가 면류관의 보석처럼 되는 것입니까? 언약의 피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의 피를 인하여 구속하여 내시고 면류관의 보배처럼 여기시는 것입니다.

17절에서 그들의 형통함과 아름다움이 소년은 곡식으로 강건하며 처녀는 새 포도주로 그러하리라고 합니다. 얼마나 좋은지를 구약의 풍성함을 나타내는 곡식과 새 포도주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 뿌림을 입은 성도는 하늘의 기쁨을 이렇게 풍성하게 맛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그 언약의 피 때문입니다. 그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우리에게 주신 분이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로마서 8장33절 에서 말씀합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이 은혜와 은사가 언약의 피 때문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스가랴 10:1-12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2007. 3. 14

1 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 2 대저 드라빔들은 허탄한 것을 말하며 복술자는 진실치 않은 것을 보고 거짓 꿈을 말한즉 그 위로함이 헛되므로 백성이 양 같이 유리하며 목자가 없으므로 곤고를 당하나니 3 내가 목자들에게 노를 발하며 내가 수 염소들을 벌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그 무리 곧 유다 족속을 권고하여 그들로 전쟁의 준마와 같게 하리니 4 모퉁이 돌이 그에게 로서, 말뚝이 그에게 로서, 싸우는 활이 그에게 로서, 권세 잡은 자가 다 일제히 그에게 로서 나와서 5 싸울 때에 용사 같이 거리의 진흙 중에 대적을 밟을 것이라 여호와가 그들과 함께한즉 그들이 싸와 말 탄 자들로 부끄러워하게 하리라 6 내가 유다 족속을 견고하게 하며 요셉 족속을 구원할지라 내가 그들을 긍휼히 여김으로 그들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이 내게 내어 버리움이 없었음같이 되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라 내가 그들을 들으리라 7 에브라임이 용사 같아서 포도주를 마심 같이 마음이 즐거울 것이요 그 자손은 보고 기뻐하며 여호와를 인하여 마음에 즐거워하리라 8 ○내가 그들을 향하여 휘파람 불어 모을 것은 내가 그들을 구속하였음이라 그들이 전에 번성하던 것 같이 번성하리라 9 내가 그들을 열방에 뿌리려니와 그들이 원방에서 나를 기억하고 그들의 자녀와 함께 다 생존하여 돌아올찌라 10 내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이끌어 돌아오며 그들을 앗수르에서부터 모으며 길르앗 땅과 레바논으로 그들을 이끌어 가리니 그 거할 곳이 부족하리라 11 내가 그들로 고해를 지나게 하며 바다 물결을 치리니 나일의 깊은 곳이 다 마르겠고 앗수르의 교만이 낮아지겠고 애굽의 홀이 없어지리라 12 내가 그들로 나 여호와를 의지하여 견고케 하리니 그들이 내 이름을 받들어 왕래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을 거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판을 받고 멸망을 받아야 마땅한데 왜 이들을 다시 구원하여 주신다고 하셨습니까?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9:11절에서 언약의 피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그 언약의 피 때문에 물 없는 웅덩이에 갇히 자들을 놓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을 양떼같이 구원하셔서 면류관의 보석같이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형통함과 아름다움을 구약적인 표현으로 곡식과 포도주의 풍성함으로 말합니다.

곡식과 포도주가 풍성하려면 때를 따라 비가 와야 합니다. 이스라엘 땅은 애굽의 땅과는 다릅니다. 애굽은 나일 강이 흘러가기에 그 물을 인공적으로 끌어들이기만 하면 농사를 지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땅은 비를 흡수하는 땅입니다(신11:11). 물 빠짐이 좋은 땅입니다. 이런 땅은 적절하게 비만 오면 농사가 잘 되는 땅입니다. 그러므로 농사의 성패는 사람의 노력보다 하늘에 달려 있는 땅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말씀에 순종하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내려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른 비는 씨앗을 뿌릴 때 내리는 비이며 늦은 비는 곡식이 자라고 열매를 맺게 하는 비가 됩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아주 흡족하게 내리는 비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소나기로 되어 있습니다. 봄비를 구하라고 하시면서 주시는 것은 소나기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에스겔 34:25-26절을 봅니다. “25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우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서 잘찌라 26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내 산 사면 모든 곳도 복되게 하여 때를 따라 비를 내리되 복된 장마비를 내리리라” 에스겔서는 복된 장마 비라고 합니다.

오늘의 본문 10:1절을 봅니다. 봄비 때에 여호와 곧 번개를 내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고 합니다. 번개는 비가 오기 전의 징조입니다. 그러므로 번개를 내시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고 합니다. 이 비는 봄비로 되어 있는데 씨를 뿌릴 때의 비가 아니라 곡식이 자라고 열매가 맺는 비를 말합니다. 그런 비를 구하면 소낙비를 내려서 밭은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의 피로 인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러면 구하지 않아도 때를 따라 비를 내려주시면 되실 텐데 왜 비를 구하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에스겔서 36:37-38절을 봅니다. “37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찌라 내가 그들의 인수로 양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38 제사드릴 양떼 곧 예루살렘 정한 절기의 양떼 같이 황폐한 성읍에 사람의 떼로 채우리라 그리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느니라”

에스겔 36장 1절부터 35절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여 주신다는 약속을 주십니다. 구원하시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럽혀놓은 하나님의 자기 이름을 아끼기 때문에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하시기 위하여 맑은 물을 뿌리시고 새 마음을 주셔서 구원하시겠다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언약을 하십니다. 그러면 가만히 있어도 구원하실 텐데 37절에서 “그래도”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38절에 보시면 구원이 여호와께로 오는 것임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들이 구하였다는 조건 때문이 아니라 구원이 어디로서 오는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구함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구하였다는 것은 평소에 자기들이 의지하는 것에서 회개하여 주님을 찾고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 구한다는 것이 자기 부인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사람들이 기도 하는 것을 마치 하나님께 복을 얻기 위한 공적이나 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은 아직도 우상숭배의 습관이 몸에 배여 있어서 그렇습니다.

2절을 봅니다. 평소에 그들이 어디에서 구하였습니까? 드라빔과 복술자에게 구하였던 것입니다. 드라빔은 사람 형상의 우상입니다. 야곱의 아내 라헬이 자기 아버지 집에서 드라빔을 훔쳐 나왔습니다. 다윗의 아내 미갈이 다윗을 탈출시키고 드라빔을 침대에 눕히고 그 머리에 염소 털을 씌워서 위장하였습니다. 이런 드라빔을 그들의 신으로 여기고 점치는 사람들에게 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허탄한 것을 말하고 거짓 꿈을 믿게 만든 것입니다. 그 결과로 백성들이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며 곤고를 당한 것입니다.

3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곤고를 당하기에 여호와께서 친히 구원하시기 위하여 목자들에게 노를 발하면 수 염소들을 벌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목자와 수 염소를 이방의 압제자들과 그 압제들에 동조하는 백성의 지도자들을 말합니다만 에스겔서 34장에서는 유다의 목자와 백성들 가운데의 지도자들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유다에서나 이방의 땅에서는 심판을 행하시고 자기 백성을 구하여 내신다는 것입니다.

3절 하 반절에서 5절까지 그 구원을 누구를 통하여 이루어내시는가 하면 유다 족속을 통하여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유다지파에서 구원자가 나온다는 것은 이미 야곱에서 언약하신 내용 중에 들어 있는 말씀입니다. 그 유다를 전쟁의 준마같이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유다에게서 모퉁이 돌과 말뚝과 싸우는 활이 나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모퉁이 돌, 말뚝, 싸우는 활이 다 메시아의 상징어입니다. 그렇게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함께 하심으로 그 말 탄 자들이 부끄러워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6-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함께 하심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시는데 함께 하시는 이유는 유다와 요셉을 긍휼히 여기심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긍휼을 담아내는 그릇인 것입니다. 그 긍휼로 인하여 돌아오게 하시는데 버림을 당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회복시켜 주시면 에브라임이 용사 같아서 새 포도주를 마심같이 마음이 즐거울 것이며 그 자손을 보고 기뻐하고 여호와를 인하여 마음에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8-11절은 더 넓은 지역까지 하나님의 구원을 펼쳐 내신다는 것입니다. 휘파람을 불러 모으신다는 것은 어떤 기호를 세워서 구원하여 약속의 땅에 들여 놓으신다는 것입니다. 열방에 뿌려진 자기 백성들을 불러 모아 내시는데 마치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던 것처럼 구원하여 내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가로 막을 그 어떤 것들도 없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고난의 바다도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길을 막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2절입니다. 여호와를 의지하고 그 이름을 받들어 왕래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찾아본 말씀에서만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일어나는 것인지를 보면, 언약의 피를 인하여, 자기 이름의 거룩함을 인하여, 긍휼을 인하여 구원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구원은 이스라엘을 위한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이름을 위한 구원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가서 5:7절입니다. “야곱의 남은 자는 많은 백성 중에 있으리니 그들은 여호와에게로서 내리는 이슬 같고 풀 위에 내리는 단비 같아서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하며 인생을 기다리지 아니할 것이며” 야곱의 남은 자를 여호와로부터 내리는 이슬과 단비 같다고 합니다. 이들의 특징은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한다는 것은 여호와 도우심만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스가랴 10:12절처럼 여호와를 의지하고 그 이름을 받들어 왕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오늘 이 시대에 어떻게 성취가 되었고 되고 있는 것입니까? 구약에서 때를 따라 은혜를 베푸신 모습을 비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스가랴의 말씀도 역사적인 순서로는 나중인 신약의 빛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구약의 비란 단지 농사짓기 위한 비만이 아니라 오늘 이 시대의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풍성하게 드러나는지를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엘서 2:21-27절을 봅니다. “봉독” 여기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28-27절에서 하나님의 신을 모든 육체에 부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을 부어주신다고 합니다. 마치 비를 쏟아 부어 준다는 표현과 같습니다. 바울사도는 한 성령을 마셨다고 합니다(고전 12:13). 그러므로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단지 농사짓는 비만이 아니라 주의 성령의 임하심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른 비가 와서 싹이 나와서 자라고 있는 것을 보시고 벌써 익어 추수 때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고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심으로 소나기가 쏟아진 것처럼 주의 영이 임하게 되고 그때부터 본격적인 추수에 돌입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은 어떤 때 입니까? 추수를 마감해야 할 때입니다. 야고보서 5:7-9절입니다. “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 야고보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말하면서 주님의 강림이 가까웠기에 길이 참고 인내하라고 합니다. 심판자가 문 밖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미 성경에서 말씀하신 이른 비가 내렸습니다. 때를 따라 소나기도 내려 주십니다. 아직 늦은 비는 내리고 있습니다. 지금이 추수 때이기 때문입니다. 이천년 전부터 추수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금 주님이 문 밖에 서 계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구하여야 합니까? 스가랴서의 말씀에서는 봄비를 구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성도가 무엇을 구하여야 합니까? 아직 주님이 재림하지 않은 이유는 지금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것이며 또한 아직 주의 택한 백성들이 복음을 듣고 주님께로 돌아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일에 우리가 부름을 받고 있다면 지금도 늦은 비가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추수를 위한 늦은 비를 구한다는 것은 이 종말의 시대에 주님 오시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 약속을 믿고 기다릴 뿐만 아니라 복음을 증거 하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은 구원의 날이요 은혜 받을 만한 때입니다. 그러나 늦은 비가 그치면 심판주가 임할 것입니다.

 

 

 

 

스가랴 11:1-17 은 삼십에 팔린 목자 2007. 3. 21

1 레바논아 네 문을 열고 불이 네 백향목을 사르게 하라 2 너 잣나무여 곡할찌어다 백향목이 넘어졌고 아름다운 나무가 훼멸되었도다 바산의 상수리나무여 곡할찌어다 무성한 삼림이 엎드러졌도다 3 목자의 곡하는 소리가 남이여 그 영화로운 것이 훼멸되었음이로다 어린 사자의 부르짖는 소리가 남이여 이는 요단의 자랑이 황무하였음이로다
4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는 잡힐 양떼를 먹이라 5 산 자들은 그들을 잡아도 죄가 없다 하고 판 자들은 말하기를 내가 부요케 되었은즉 여호와께 찬송하리라 하고 그 목자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는도다 6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다시는 이 땅 거민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사람을 각각 그 이웃의 손과 임금의 손에 붙이리니 그들이 이 땅을 칠찌라도 내가 그 손에서 건져내지 아니하리라 하시기로 7 내가 이 잡힐 양떼를 먹이니 참으로 가련한 양이라 내가 이에 막대기 둘을 취하여 하나는 은총이라 하며 하나는 연락이라 하고 양떼를 먹일쌔 8 한달 동안에 내가 그 세 목자를 끊었으니 이는 내 마음에 그들을 싫어하였고 그들의 마음에도 나를 미워하였음이라 9 내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먹이지 아니하고 죽는 자는 죽는대로, 망할 자는 망할대로, 그 나머지는 피차 살을 먹는대로 두리라 하고 10 이에 은총이라 하는 막대기를 취하여 잘랐으니 이는 모든 백성과 세운 언약을 폐하려 하였음이라 11 당일에 곧 폐하매 내게 청종하던 가련한 양들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이었던줄 안지라 12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고가를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그들이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 13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14 내가 또 연락이라 하는 둘째 막대기를 잘랐으니 이는 유다와 이스라엘 형제의 의를 끊으려 함이었느니라
15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또 우매한 목자의 기구들을 취할찌니라 16 보라 내가 한 목자를 이 땅에 일으키리니 그가 없어진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흩어진 자를 찾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강건한 자를 먹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살찐 자의 고기를 먹으며 또 그 굽을 찢으리라 17 화 있을찐저 양떼를 버린 못된 목자여 칼이 그 팔에, 우편 눈에 임하리니 그 팔이 아주 마르고 그 우편 눈이 아주 어두우리라

성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여러 가지로 표현합니다. 아버지와 자식, 왕과 백성, 남편과 아내, 포도원주인과 포도나무, 목자와 양 등으로 나타납니다. 오늘 말씀은 목자와 양을 이스라엘 백성 전체로 봅니다. 즉 백성들의 지도자는 목자요 백성들은 양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목장의 주인입니다. 목장의 주인이 자기 목장을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목자들과 양들도 주인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이 임하는 것입니다.

11:1-3절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됨으로 평소에 그들이 자랑거리로 여기는 것들, 백향목, 잣나무, 상수리나무들이 다 불에 타고 무너져서 황무하게 되었습니다. 그 영화로운 것이 다 무너졌기에 목자는 곡하는 소리가 나고 어린 사자는 부르짖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단의 자랑이 황무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평소에 믿고 자랑거리로 여기던 것들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진 것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오늘 우리가 평소에 자랑거리로 여기는 것들이 무엇인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살아가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인데 그것을 모르고 자기가 잘나서 이렇게 살아가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우리기 자랑거리로 여기고 사는 것들이 과연 하나님의 심판에서 견딜 수 있는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오늘 말씀을 보고자 합니다.

4-5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스가랴 선지자에게 목자의 역할을 하라고 합니다. 목자로서 양을 먹여야 하는데 어떤 양인가 하면 잡힐 양 떼를 먹이라는 것입니다. 양은 이스라엘의 백성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백성을 사는 자들은 그들을 잡아도 죄가 없다고 하고 파는 자들은 내가 부요케 되었으니 여호와를 찬송한다고 합니다. 그 목자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대조영이라는 드라마를 보면 고구려가 멸망하자 유민들을 잡아서 당나라로 보내는 것입니다. 그 앞잡이들이 누구인가 하면 한때 고구려의 권력자들인 것입니다. 유민들을 잡아서 당나라의 노예상인들에게 팔아먹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다른 나라에 자기 백성이 팔려 가는데도 그것을 팔아놓고서는 부자가 되었다고 여호와를 찬송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고파는 자들은 이방인들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도 합세한 것입니다. 이런 지경에도 목자들이 불쌍히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6절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호와께서 다시는 이 땅 거민을 불쌍히 여기지 않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각각 그 이웃의 손과 임금의 손에 붙이리니 이 땅을 칠지라도 내가 그 손에서 건져내시지 아니하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심판이 선고되었는데도 하나님께서 스가랴를 통하여 잡힐 양떼를 먹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7-14절입니다. 잡힐 양떼이지만 목자를 보내셔서 먹이게 하시는 것은 그들이 가련하기 때문입니다. 그 가련한 양들을 위하여 막대기 둘을 취하여 은총이라 하고 하나는 연락이라고 하여 그들을 먹이시는 것입니다. 연락은 연합을 말합니다. 그러니 은총과 연합으로 양들을 돌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한 달 동안에 세 목자를 끊어버렸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끊어버린 것입니다. 지도자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들입니다.

미가서 3:9-12절을 봅니다. “9 ○야곱 족속의 두령과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 곧 공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하는 자들아 청컨대 이 말을 들을찌어다 10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11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12 이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시온은 밭 같이 갊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과 같게 되리라”

두령, 제사장, 선지자가 다 타락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들을 다 끊어버리는데 문제는 이러한 자들의 횡포를 백성들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5:30-31절입니다. “30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31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

8절입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이나 백성들이나 간에 여호와께서 보내신 목자, 은총과 연합으로 기르시고자 하는 목자를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자도 그들을 싫어하고 그들의 마음에도 목자를 미워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대로 내 버려두신 것입니다. 먹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9절입니다. 죽는 자는 죽는 대로, 망할 자는 망할 대로 그 나머지는 피차에 살을 먹는 대로 내버려 두리라 하신 것입니다.

9-12절입니다. 은총이라는 막대기를 취하여 잘라버린 것입니다. 이는 모든 백성과 세운 언약을 폐하려 하신 것입니다. 이 날에 그 목자에게 청종하던 가련한 양들은 이 것이 여호와의 말씀인줄 알아보았습니다. 그들에게 너희가 좋게 여기면 내 고가를 달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려면 그만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었습니다. 은총과 연합으로 양들을 돌보러 온 목자에 대한 대가를 은 삼십을 달아 준 것입니다. 이것은 노예의 몸값인 것입니다.

13-1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선지자에 말씀합니다.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며 연락이라는 둘째 막대기를 잘랐으니 이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형제의 의를 끊으려고 함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는 이미 신약을 알고 있기에 무슨 말씀이 떠오릅니까?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판 사건이 떠오를 것입니다.

마태복음 27:3-10절을 봅니다. “3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6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7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8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9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저희가 그 정가 된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정가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10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방금 본 말씀은 스가랴서입니다. 그러면 스가랴라고 해야 하는데 왜 예레미야라고 하는 것입니까? 은 삼십에 팔릴 것은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이지만 그런 행동을 한 자들의 심판에 대하여서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예언자의 경우를 인용할 때는 더 잘 알려진 예언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신약의 다른 곳에도 그렇게 나타납니다(막1:2).

은 삼십에 팔리는 목자의 역할을 하고서 다시 다른 목자의 역할을 합니다. 15-17절입니다. 은 삼십에 팔린 목자는 은총과 연락이라는 막대기를 가지고 왔는데 꺾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목자의 기구를 취하게 한 목자는 어떤 목자입니까? 없어진 자를 마음에 두지 않고 흩어진 자를 찾지 아니하고 상한 자를 고치지 아니하고 오히려 살찐 자의 고기를 먹으며 또한 그 굽을 찢는다고 합니다. 이런 목자에 대하여 저주가 선포됩니다.

여기서 두 목자가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 목자는 가련한 양떼를 위하여 은총과 연합으로 왔는데 이 목자를 싫다고 은 삼십에 팔아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 목자는 양떼를 잡아먹는 목자입니다. 그런데 이런 목자를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구약에서 이런 모습은 너무나 많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른 목자는 배척을 당하고 거짓 목자는 환영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선지자들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대로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은 삼십에 팔리시고 그 몸값을 가룟 유다가 양심의 가책이 되어 다시 성소에 던져놓고 자신은 자살합니다. 그런데 그 돈은 피 값이기에 성전금고에 넣어두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하여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만들었습니다. 은총과 연합으로 오신 목자는 이렇게 은 삼십에 팔아버리고 살찐 양을 잡아먹는 거짓 목자는 환영하는 일들이 구약에서 그대로 일어났으면 또 예언되었습니다. 그 예언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은 삼십에 팔려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은총과 연합은 더 이상 기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저주와 심판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죽으심이 언약을 파기한 결과로 마땅히 받아야 할 자기 백성의 저주를 대신 담당하신 죽으심이라는 것입니다. 이로서 선한 목자가 어떤 목자인지가 들어나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0:1-18절을 봅니다. “봉독” 예수님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인도를 받는 자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양의 문입니다. 예수님으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오셨지만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거짓 목자들은 있는 것입니다. 양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양을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로 인도하는 자들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사단이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듯이 거짓 선생들이 교묘하게 자기들의 종을 삼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잡아먹고 사로잡고 뺨을 칠지라도 용납하는 것입니다. 이런 세대 속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의 음성을 듣고 사시겠습니까? 은총과 연합으로 오시는 목자,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만으로 자기 백성을 이끄시는 목자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물론 자기 양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듣게 되어 있습니다. 그 목자란 베드로도 바울도 아볼로도 아니었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유명한 사람이 아니라 은 삼십, 치욕스러운 노예의 몸 갑에 팔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우리의 목자입니다.

 

 

 


스가랴 12:1-9 그 날에 2007. 3. 28

1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자가 가라사대 2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그 사면 국민에게 혼취케 하는 잔이 되게 할 것이라 예루살렘이 에워싸일 때에 유다에까지 미치리라 3 그 날에는 내가 예루살렘으로 모든 국민에게 무거운 돌이 되게 하리니 무릇 그것을 드는 자는 크게 상할 것이라 천하만국이 그것을 치려고 모이리라 4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모든 말을 쳐서 놀라게 하며 그 탄자를 쳐서 미치게 하되 유다 족속은 내가 돌아보고 모든 국민의 말을 쳐서 눈이 멀게 하리니 5 유다의 두목들이 심중에 이르기를 예루살렘 거민이 그들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로 말미암아 힘을 얻었다 할찌라 6 그 날에 내가 유다 두목들로 나무 가운데 화로 같게 하며 곡식 단 사이에 횃불 같게 하리니 그들이 그 좌우에 에워싼 모든 국민을 사를 것이요 예루살렘 사람은 다시 그 본 곳 예루살렘에 거하게 되리라 7 여호와가 먼저 유다 장막을 구원하리니 이는 다윗의 집의 영광과 예루살렘 거민의 영광이 유다보다 더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8 그 날에 여호와가 예루살렘 거민을 보호하리니 그 중에 약한 자가 그 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라 9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열국을 그 날에 내가 멸하기를 힘쓰리라

봄이 완연하게 온 것을 보게 됩니다. 각종 꽃들이 피어나고 새싹들이 돋아나고 있습니다. 이런 자연의 변화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십니까? 우리가 평소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이 세상에서 내가 어떻게 행복하게 사는가를 관심 두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타난 모든 것들이 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 존재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당연하게 여기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24장에 보시면,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하여 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는 것처럼 너희가 이 징조들을 보면서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고 하십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봄이 와서 꽃이 피고 잎사귀를 내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이 가까이 올 것을 알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우리의 뜻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어짐을 받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유지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결론 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서 그저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인줄 알고서 세상만 바라보는 사람은 소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이 세상에 나타난 것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아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11:1-3절을 봅니다.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믿음이란 보이는 모든 세계가 나타나진 것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가 된 것입니다.

골로새서 1:16절에 보시면,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까지 다 예수님을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사람들의 소원대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예수님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계시하고 있고 증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언을 받아서 증거 한 사람들이 선지자들이요 예언자들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봅니다. 1절에서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라고 합니다. 경고란 무거운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1절을 증거 하기 위하여 위의 성경 세 곳을 인용하였습니다. 그러면 왜 여호와의 말씀대로 온 우주만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여호와께서 하늘을 펴시고 땅을 터를 세우시고 사람의 심령을 지으신 분이시라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을 지으시고 그 안에 영을 지어 넣으신 분이 여호와이십니다.

2-3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그 사면 국민을 혼취케 하는 잔이 되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이 에워싸일 때에 유다에까지 미칠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날을 예언하여 3절에서 “그 날”이라고 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 속에 심령을 지으신 분이 그 날에 이루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그 날이란 여호와의 말씀이 성취되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이 스가랴 12-14장에서 그 날이라는 말씀이 많이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에서만 다섯 번(3,4,6,8,9)이나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선 그 날에 있을 일을 살펴봅니다. 3절에서 그날이란 예루살렘이 무거운 돌이 되게 하여 다른 국민들이 그 돌을 들다가 크게 상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을 가볍게 여기고 공격하려고 왔다고 오히려 망하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하만국이 예루살렘을 치려고 모이겠지만 그러나 4절에서 그 날에 모든 말들을 쳐서 놀라게 하며 그 탄자를 미치게 하고 그 말의 눈을 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5절입니다. 그렇게 되면 유다의 두목들이 심중에 말하기를 예루살렘 거민들이 그들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로 말미암아 힘을 얻었다고 할 것입니다. 왜 그런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까? 자기들이 행한 것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대의 목자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11장 16절에서 자기 양들을 잡아먹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적들이 물러가고 승리가 주어진 것을 보고서 여호와로 말미암아 이렇게 되었다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6절입니다. 그 날에, 유다 두목들로 하여금 나무 가운데 화로 같이 곡식 단 가운데 횃불 같게 하여 그 좌우에 에워 싼 모든 국민을 사를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사람은 그 본 곳 예루살렘에 거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8절에서 그 날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 거민을 보호하셔서 그 약한 자가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여호와의 사자와 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9절에서 그날에, 예루살렘을 치러오는 열국을 그 날에 내가 멸하기를 힘쓴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그 날이 언제입니까? 유대인들은 지금도 문자대로 이 그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구약의 모든 말씀을 다 이루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에 아직도 이런 구약의 그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날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이제부터 찾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창세기 3:15절에서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이 계속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 약속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한 도구로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무엇을 의지하여야 되는지를 보여주시는 싸움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과 병거를 의지하면 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나가면 승리하는 싸움인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하여 보여주실 뿐 아니라 출애굽에서도 광야에서도 가나안땅에서도 계속하여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한 예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봅니다. 골리앗은 키가 3미터가 넘은 거인으로서 창과 칼과 방패로 무장하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직 얼굴이 붉은 소년으로 아무른 무장 없이 다만 물맷돌을 들고 나간 것입니다. 다윗이 의지한 것은 물맷돌이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이었습니다. 골리앗을 향하여 너는 창과 방패로 나아오지만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간다고 하면서 물맷돌을 날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싸움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한 데서 온 승리인 것입니다.

이러한 전쟁을 통하여 계속하여 하나님은 그 날의 구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이 어떻게 성취될 것인지를 7절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먼저 유다 장막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다윗의 집의 영광과 예루살렘 거민의 영광이 유다보다 더하지 못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유다의 장막이란 성안에 살지 못하고 성 밖에서 텐트치고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성 안에 사는 사람들보다 보잘것없고 약한 자들입니다.

우리나라도 성 안의 사람과 성 밖의 사람들이 구별되었습니다. 서울에 살면 사대문 안에 사는 지 밖에 사는 지에 따라 그 사람의 신분이나 경제적인 차이가 난 것입니다. 능력 있고 실력 있는 사람들이 성 안에 살고 가난한 농민이나 노동자들은 성밖에 살았던 것입니다. 성 안에 사는 사람들은 성곽의 보호를 받지만 성 밖에 사는 사람들은 성벽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날에 어떻게 일하시는가 하면 성 밖에 있는 자들의 영광이 성 안에 있는 자들의 영광보다 결코 못하지 않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8절입니다. 그 날에 약한 자가 다윗과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을 말씀드렸습니다.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의 사자와 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사야 60:22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그 작은 자와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나라가 어떤 나라이겠습니까?

세상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나라입니다. 오직 메시아가 오셔서 이루어 내셔야 할 나라인 것입니다. 그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을 구약에서 그날로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부분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그 날이란 특정한 한 날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모든 일들을 다 포함하여 그날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그 날을 이루어내셨는가 하는 것은 신약에서 증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안의 사람이 성 밖의 사람보다 더 영광스럽지 못하게 되는 나라, 약한 자로 이루어지는 나라, 이런 나라가 도대체 어떤 나라입니까? 이 세상의 힘을 원하는 나라와는 정 반대되는 나라가 바로 예수님이 이루시는 그 날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바로 그 날 안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 그날이란 종말론적인 그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사이가 다 그날에 속하는 것입니다. 초림하시고 역사적인 시간으로 2천년이 지났다고 하겠지만 그러나 묵시적인 시각으로 보면 아직 그 날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약의 예언도 예수 그리스도의 성취에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약한 모습으로 가난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란 정말 미련하고 어리석고 저주 받은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골로새서 2:9-15절을 봅니다. “봉독” 이 세상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속입니다. 그 속임이란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인 것처럼 말합니다. 이것을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닙니다. 육적인 세상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나와서도 눈에 보이는 세상의 힘과 권세를 구한다면 그것은 그 날 안에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 날 안에 있는 사람은 새로운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 약하심 안에서 이루어진 새로운 세계를 보는 것입니다. 세상의 정사와 권세를 폐하여 버리고 십자가로 승리하신 세계가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린도후서 12:9-10절입니다. “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예수그리스도께서 아직 재림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아직 그 날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 날 안에 있다는 것은 예언자들의 예언처럼 약한 자의 모습으로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세상이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는 그 날 안에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12:32). 세상의 헛된 힘들에 속지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늘에서 머무시기를 바랍니다.

 

 

 

 

스가랴 12:10-14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 2007. 4. 4

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1)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11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12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 다윗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나단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13 레위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시므이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며 14 모든 남은 족속도 각기 따로 하고 그 아내들이 따로 하리라

12장은 ‘그 날에’ 일어날 예루살렘의 구원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1-9절은 예루살렘을 공격한 적들을 물리치시고 예루살렘을 구원하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구원의 날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부어주시는가 하면 10절 말씀에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신다고 합니다.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새 번역 성경에서 “은혜를 구하는 영과 용서를 구하는 영”으로 번역합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용서를 구하는 마음”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날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구원이란 이스라엘백성들이 기다린 정치적인 구원이 아니라 영적인 구원임을 이미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일 낮에 누가복음 7장에서 세례요한에 대한 예수님을 말씀을 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다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 메시아를 증거 한 세례요한이 왜 예수님의 대하여 의심을 품게 되었습니까?

자신이 직접 세례를 베풀고 하늘에서 성령이 임하는 것을 목격하고 이 분이 메시아라고 증거 한 세례요한이 의심을 품었다는 것은 평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품고 있었던 메시아관이 어떠한 것임을 알 수가 있는 내용입니다. 즉 예수님의 행하신 일과는 전혀 반대되는 메시아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나타나는 것입니까?

10절을 다시 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 즉 은혜와 용서를 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은혜와 용서를 구하는 심령이 된다는 것은 자신들이 무언가 대단한 잘못을 한 것이 전제가 됩니다. 그 잘못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통곡하기를 장자를 잃고서 통곡하듯이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들이 찌른바 그가 누구입니까? 유대인들이 찌른바 그가 누구입니까? 이 본문의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이라고 되어 있는 말씀이 ‘나를’이라고 번역이 되어야 더 정확합니다. 그러면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의 거민들이 그들의 목자요 왕인 여호와 하나님 그분을 찔렀다는 것입니다. 이 왕이 어떻게 오시는지 스가랴 9:9절에서 왕이 겸손하여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십니다. 11:12절에서는 그 목자가 싫다고 노예의 몸값인 은 30에 팔아버린 목자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을 찔렀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찔렀다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여기서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본 자는 하나님 아버지를 본 것이요.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것이 됩니다. 동일하게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배척한 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믿지 않고 배척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하나님께서 먼저 찔리셔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요한보다 큰 자라는 의미를 여기서 찾아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 중 가장 큰 자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저보다 큰 자가 없다고 한 세례요한이지만 무엇을 몰랐던 것입니까? 그들이 메시아를 죽이게 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자기들은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수많은 고난을 받았기에 자신들을 괴롭히는 이방나라들을 심판하고 자기들은 구원하여 줄 것을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렸다는 그 백성들에 의하여 배척을 받고 찔림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자신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창세기 3:15절에서 뱀의 후손이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먼저 상하게 합니다. 그러면 여인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합니다. 먼저 공격하는 자가 뱀의 후손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공격한 자가 누구입니까?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이 기다린 메시아와 다르다고 배척한 것입니다. 물론 기적을 베풀 때에는 다 환영하면서 그들의 임금을 삼고자 하였지만 예수님의 살과 피를 이야기 하시고 고난을 받고 죽으셔야 된다는 말씀에서는 베드로조차 믿지 못한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셔서 메시아의 사역을 온전히 이루어 내시는 것은 그렇게 메시아를 기다린 유대인들조차 모르는 방식으로 이루어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한계이며 문자의 한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인간이 스스로 성경을 연구하고 조사하여 알아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하였습니다. 성경에서 영생이 있는 줄을 알고 부지런히 상고하였지만 성경이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임을 몰랐던 것입니다. 성경 박사들이라는 유대인들의 손에 의하여 예수님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다시 본문 10절을 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무엇으로 결론 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셔야만 되는 일입니다. 이것은 주의 성령을 부어주심으로만 일어나는 일입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어야 자기가 행한 일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유대인들이 어떻게 생각하였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따라 나사렛 이단의 괴수 예수를 적법하게 처단하였다고 여긴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서 자기들이 찔러 죽인 메시아라고 회개를 하겠습니까?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성령이 임하여야만 일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보이신 후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승리하기고 하늘 보좌에 등극하셔서 이제 성령을 부어주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도 합니다. 그렇게 성령이 임하게 되니 비로소 성령을 받은 자들이 자기들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9:31-37절을 봅니다. “31 ○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32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33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34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35 이를 본 자가 증거 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니라 36 이 일이 이룬 것은 ㄷ)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함이라 37 또 다른 성경에 ㄹ)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도 성령이 임하고서 요한복음을 기록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장면을 기록하면서 그 뼈가 하나도 꺾어지지 아니하였다는 것을 출애굽기 12:46절의 유월절 양의 뼈를 꺾지 말라는 말씀과 시편 34:20절의 그 뼈가 보호되어 하나도 꺾어지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의 성취로 본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한 스가랴 12:10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증거 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2:36-37절을 봅니다.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3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3)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오순절 성령이 임하여 베드로와 사도들이 처음 설교하는 내용입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대로 된 것입니다. 너희가 찌른바 나를 보고서 애통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이 임하지 아니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들은 자들이 심령이 찔린 것입니다. 심령에 찔려서 회개하는 자들이 바로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이 임한 자들입니다. 주의 영이 임하면 자기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 죄란 자신이 바로 예수님을 죽인 가해자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주의 성령이 임하면 회개하고 애통하게 됩니다. 무엇으로 애통 하는가 하면 내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애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인생이 한스러워서 통곡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소원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원통해 하는 내가 바로 예수님을 찔러 죽인 장본인임을 알고서 마음에 애통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애통하는 것입니까?

10-11절입니다. 자기 외아들, 독자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통곡하는 것입니다. 므깃도 골짜기 하다르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곳은 요시아 왕이 전사한 곳이기에 백성들이 애통하였습니다. 요시아 왕의 개혁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압니다. 무너져 내리는 유대를 온 힘을 다해 개혁한 그런 왕이 죽었을 때에 이제 유대의 희망이 사라졌다고 운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고 운 것입니다. 이 정도의 애통, 이 보다 더한 애통이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일어나는 것이 바로 성령이 임하여 애통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번 주간이 고난주간입니다. 평소에는 예수님의 고난은 관심도 없이 그저 세상의 영광을 이야기하다가도 이번 주간만큼은 주님의 고난을 생각한다고 금욕적인 행사들을 많이 합니다. 특별새벽기도회를 한다든지, 금요일 하루를 금식한다든지, 청소년들에게는 게임 한 주간 안하기 등의 과제를 주면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라고 합니다. 그러한 과제를 수행하고 나면 자신이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사실보다는 무언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였다는 뿌듯한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런 사고방식이 바로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기다려온 사고방식이었던 것입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몰라도 우리는 메시아를 기다린다면서 율법을 지키고 금욕적인 모습으로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손에 의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찔려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아니고서는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 죄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피조물의 손에 의하여 살해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죄를 모르고서 그저 윤리도덕적인 몇 가지의 거론하면서 회개를 말하고 그런 회개를 한다고 집단적인 모임을 만들어 통곡기도회를 한다고 하고 무슨 집회들을 한다고 야단들입니다.

그러나 주의 성령은 사람들이 운동한다고 오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바람이 부는 것처럼 사람이 주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에서 각각 따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12-14절입니다. 따로따로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전하여 주는 방식이 아닙니다. 이런 영이 임하는 것은 유다만이 아니라 온 땅 각 족속에서 임하게 됩니다. 처음에 애통하였던 그 예루살렘의 일이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오늘 우리가 이 소식을 듣게 됩니다. 각자가 따로 통곡하게 됩니다. 집단 기도회를 통하여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믿어왔지만 과연 내가 예수님을 찔러 죽인 자라는 사실을 얼마나 인식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얼마서 아프셨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감상적입니다. 세 개의 못 이라는 복음성가는 그때 그 무리들이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오늘도 살려고 발버둥치는 우리 자신들이 다 예수님을 찔렀던 자들입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이 말씀은 여전히 현재의 사건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 은혜가 임하기를 바랄뿐입니다. 주의 영이 임하여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 주의 용서를 구하는 심령, 그 찌른바 주님을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자기의 독자를 잃어버린 것처럼 나라가 망한 것처럼 통곡하는 이런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스가랴 13:1-6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 2007. 4. 11

1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2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사귀를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 3 사람이 오히려 예언할 것 같으면 그 낳은 부모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하니 살지 못하리라 하고 낳은 부모가 그 예언할 때에 칼로 찌르리라 4 그 날에 선지자들이 예언할 때에 그 이상을 각기 부끄러워할 것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털옷도 입지 아니할 것이며 5 말하기를 나는 선지자가 아니요 나는 농부라 내가 어려서부터 사람의 종이 되었노라 할 것이요 6 혹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상처는 어찜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

지난주 말씀에서 다윗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영을 부어주신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서 성령을 부어주실 것을 요엘 선지자도 예언하였습니다. 그 예언대로 오순절 성령이 임하게 되자 그들이 찌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애통하며 은혜와 용서를 구하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애통이 어떤 애통이었습니까? 독자 외아들을 잃은 자의 애통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자식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드리라고 하였을 때에 아브라함은 약속의 자녀를 자기 손으로 죽어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찌른바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애통하기를 독자를 잃어버린 부모의 심정으로 애통합니다. 그 애통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을 버리시는 그 애통의 마음을 성령을 통하여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애통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책과 다큐멘터리를 보면 그들이 가족을 잃고서 애통하는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오히려 주님을 더 사랑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놀랍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를 잃었는데도 그 애통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그를 죽인 자들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마음들은 주님께서 부어주셔서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이 임한 자들의 모습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원통하다고 여기면서 억울해 하는 모습과 전혀 다른 차원의 애통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의 모습을 비추어보면 도대체 나는 무엇으로 애통하고 있는가를 돌아보면 한심스러운 모습입니다. 부디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시기를 구할 뿐입니다. 또한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으로 씻겨달라고 할 수밖에 없는 모습입니다.

13:1절입니다. ‘그 날’입니다. 선지들이 계속하여 예언한 그 날입니다. 그 날에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신다는 내용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성령이 임하심을 통하여 주어진 것을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오늘은 동일한 그 날의 약속이 어떻게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리게 되는 가를 보고자 합니다.

일반적으로 씻는다는 것은 더러움을 씻는 것을 말합니다. 서울대 의대의 어느 학생이 우리나라의 통치자들의 건강에 대하여 박사논문을 썼습니다. 조선시대의 임금들부터 그들의 건강을 조사하였는데 조선시대에 의학의 한계만이 아니라 불결한 생활환경으로 질병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신과 같은 대접을 받던 임금이 각양 좋은 것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서도 잘 씻지 않아서 각종 종기나 부스럼이 낫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너무 많이 씻어서 탈이 날 정도입니다만 씻는다는 것은 몸의 청결문제만이 아니라 신들에게 정성을 바칠 때에 제의적인 면에서도 중요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조상들도 신에게 정성을 빌 때에 목욕재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약에서는 씻는 것에 대하여 어떤 규례가 주어져 있습니까?

민수기 8:5-8절입니다.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6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취하여 정결케 하라 7 너는 이같이 하여 그들을 정결케 하되 곧 속죄의 물로 그들에게 뿌리고 그들로 그 전신을 삭도로 밀게 하고 그 의복을 빨게 하여 몸을 정결케 하고 8 또 그들로 수송아지 하나를 번제물로, 기름 섞은 고운 가루를 그 소제물로 취하게 하고 그 외에 너는 또 수송아지 하나를 속죄 제물로 취하고”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를 대신하여 레위지파가 하나님께 대신 드려집니다. 그래서 레위인을 정결하게 하는데 속죄의 물을 뿌려서 정결하게 하고 또 수송아지의 번제물을 취하여 속죄 제물로 취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려지는 사람을 속죄의 물을 뿌림과 짐승의 피 뿌림이 함께 동반이 되는 것입니다. 민수기 19장에서도 각종 부정하게 된 자들이 정결하게 하는 물을 뿌려서 정함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람들이 목욕재계한다고 하여도 죄를 씻을 길은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의 현장에서 유출 병이 있는 것처럼 계속하여 죄가 줄줄 새 나오는 사람인데 무엇으로 씻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선지자들은 장차 자신들의 죄와 더러움과 부정함을 씻어줄 그 날을 고대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샘물이 터져 나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하게 됨으로 일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심으로 그 찌른 자를 보면서 애통하여 회개하게 됨으로 죄가 사함을 받아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에스겔 36:16-31절을 봅니다. “봉독” 이스라엘 족속에 그 땅을 더럽혔는데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의 부정함같이 더럽혔다고 합니다. 이러한 부정이란 우상숭배로 가득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갑니다. 그러나 잡혀간 그곳에서 다시 구원하여 내시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더럽힌 하나님의 자기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시는데 맑은 물을 뿌려서 정결하게 하고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우상 섬김에서 깨끗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로 씻는 것이 아니라 새 영을 그 마음속에 넣어주시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성령과 물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47장에서는 성전 동문에서 물이 스미어 나오는데 그 물이 발목, 무릎, 허리,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 되어서 흐릅니다. 그 강물이 가는 곳마다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물이 물이 아니라 성령임을 우리는 성령이 임하게 된 자들이기에 이미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4:13-14절입니다.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사마리아의 우물가에서 한 여인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이 판 우물을 마셔도 다시 목마르지만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는 목마르지 아니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물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7:37-39절입니다.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생수의 강이 흘러 나는 것은 성령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일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에서 각종 죄와 더러움과 부정함을 씻어야 한다고 하니 율법적 규례를 따라 씻는 것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방법으로 지키기 위하여 장로들의 유전까지 보태어서 음식을 먹을 때에 반드시 손을 씻고 먹게 한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부정함과 더러움을 씻는 그 행위를 가지고 또 다란 자기 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씻지 않고 먹는 자들을 정죄하였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15장에 보시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따집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아니하고 음식을 먹는 것은 장로들의 유전을 어긴다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너희는 어찌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고 되물으십니다. 그러면서 고르반 사상을 책망하시고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마음은 멀다고 합니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서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고 하였습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고 예언한 대로 예수님이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고 자기들이 평소에 지켜오던 씻는 것을 포기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바로 눈앞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터져 나오는데도 그것을 모르고서 그 생수를 버리고 자기들이 물을 보관할 웅덩이를 만든 것입니다. 예레미야 2:13절입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죄란 생수의 근원을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하지 못할 터진 웅덩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죄악인 것입니다. 스스로 웅덩이를 만들어 그곳에 자기들이 마실 물을 길어 놓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각종 율법지킴의 자기 의들을 채워 넣은 것입니다. 모세로부터 받은 것이니 그 웅덩이에 얼마나 오랫동안 모아둔 것이었겠습니까? 인도의 시골마을을 가보니 마을마다 웅덩이 들이 많았습니다. 우기 철에 비를 가두어 두고서는 일 년 동안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그 웅덩이에서 목욕 설거지 빨래를 다 처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물이 걸쭉해질 정도입니다.

페인티드 베일이라는 영화를 보면 영국인 병리학자가 중국에 콜레라가 번지는 곳으로 들어갑니다. 아내의 불륜을 견디지 못하여 선택한 일이기도 합니다만 그곳에서 우물과 강물을 현미경으로 조사하여 오염되었다고 먹지 못하게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물을 먹으려고 고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의 눈에는 오염된 물임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과연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생수를 제공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마시고 마셔도 갈증만 더하는 세상의 욕망이라는 물을 공급하고 있는 것입니까? 온 세상을 둘러보아도 생수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양식이 없어서 주림이 아니고 마실 물이 없어서 갈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아모스 선지자가 외친 것처럼 지금도 그러합니다.

성령이 임한 사람은 오늘 이 말씀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죄와 더러움에서 씻어주실 영원한 샘물이 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만든 웅덩이를 의지 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의 공로를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늘 씻음을 받아야 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에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 받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죄와 더러움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씻어짐을 성령이 임하여 믿게 된 자들은 영원한 생명의 샘을 마시는 사람들입니다.

2-6절입니다. 그 날에, 즉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리는 그 날에 우상의 이름을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예언자들도 정체가 다 드러나서 부끄러워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황홀경 상태에서 몸에 상처를 내면서 주술적인 짓을 한 것을 숨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선지자인 것처럼 털옷을 입은 일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 세상은 거짓 선지자들이 수도 없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날이란 진행 중입니다. 이미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렸지만 거짓 선지자들이 다 사라지기까지는 예수님의 재림이 남아 있습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영적인 분별력을 갖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죄와 더러움을 영원히 씻는 샘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임을 성령을 통하여 날마다 넘쳐 나기를 소원합니다.

 

 

 


스가랴 13:7-9 내 목자를 치라 2007. 4. 18

7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8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지 이는 멸절하고 삼분지 일은 거기 남으리니 9 내가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지난주에 죄와 더러움의 샘이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죄와 더러움이 씻어지기 위하여 죄로 더렵혀진 자들의 애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고난을 받으시는지를 성경은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9:11절에서 공의를 베풀 왕이 겸손하여서 나귀 새끼를 타십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말과 병거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피로 구원하시는 것을 자기 백성들이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백성에 의하여 배척을 받는 예언이 11:12절에 은 삼십에 팔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12:10절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시면 그 찌른 자를 바라보면서 그를 위하여 자기 독자를 잃은 것처럼 애통할 것입니다. 이러한 예언들이 다 성취가 되었고 성령이 임하여 알게 하셨기에 우리는 이런 말씀을 보고서 예수님을 증거 한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보다 크다는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를 더 잘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3:7절을 봅니다.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고 합니다. 여기서 내 목자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단지 내 목자라고 하지 않으시고 내 짝된 자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짝 된 자, 하나님과 친밀하고 동등하게 여김을 받는 자를 치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이 유대인들에게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홀로 하나이시기에 그 어떤 것도 짝할 수가 없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하는 말씀을 참람되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여호와 하나님에게 하는 주라는 호칭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에 대하여 예수님은 시편 110편을 인용하시면서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후손이 되겠느냐고 마태복음 22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아무른 대답을 못하고 그 날부터 감히 예수님께 묻는 자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짝된 자를 치라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희생이요 자기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죽음을 말하니 이상하게 여기겠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인간에 의하여 죽임 당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9:10-11절입니다. “10 빌라도가 가로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1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하시니” 예수님을 죽이고 살리는 권세는 빌라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주시지 않았다면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음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목자를 치는 칼이 언약 백성이라는 유대인과 그 당시 로마의 권세가 합동하여 칼이 된 것입니다.

계속하여 7절을 봅니다. 목자를 치면 양떼들이 흩어지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에 제자들이 다 도망갔습니다. 마태복음 26:31절입니다.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실 때에 다들 도망갔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였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목자를 치면 양떼들이 흩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목자가 침을 당하고 양떼들이 흩어지는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7절 후반부를 봅니다.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고 합니다. 이 손은 그들을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대로 제자들은 목자가 침을 당하는 것을 보고 다 도망갔지만 예수님이 다시 찾아오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26:32절에서 예수님께서 먼저 갈릴리고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부활 후에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다시 만나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칼에 침을 받고 양떼들이 흩어지지만 그 흩어진 양떼들을 다시 모으시는 것이 다 구약의 예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구약의 예언을 예수님께서 지금 자기 몸으로 성취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됩니다. 칼이 내 목자를 칠 것인데 그 목자는 하나님의 짝된 자입니다. 그 목자가 침을 당하여 양떼들이 흩어지나 흩어진 그 작은 무리를 다시 모아내시겠다는 그 말씀대로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모아진 그 양떼들은 자기들이 주님을 배신하였다는 것이 들어있는 양들입니다.

8절을 봅니다. 이 온 땅에서 삼분지 2는 멸절하고 삼분지 일은 남는다고 합니다. 목자를 치면 양떼들이 흩어지는데 삼분지 이가 멸절하고 삼분지 일만 남는다고 합니다. 이 예언의 성취를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A.D 70년에 로마군대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파괴되는데 무려 150만 여명이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멸망 중에도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은 보호를 받아서 남게 됩니다. 그러나 이 사건만이 아니라 예수님 다시 오실 때 까지 이 온 땅에서 목자의 침과 그 양떼들의 흩어짐이 계속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8-20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20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그 유명한 포도나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있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이 핍박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침을 당한 증거물을 그의 몸에서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삼분의 일 위에 그 손을 드리운다는 말씀은 유대인들 가운데 남은 자들과 이방인 가운데서 택함을 입은 주의 백성들로 보아야 합니다. 이들은 목자의 침을 당하여 흩어진 무리들이지만 그 흩어진 곳에서 그대로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불러 모으시는 것입니다. 불러 모으시는데 불 가운데 던져서 연단하고서 불러 모으시는 것입니다.

9절입니다.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서 은과 금처럼 시험하신다는 것입니다. 남겨진 삼분의 일도 자기들의 의로 남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면한 자들입니다. 이렇게 남은 자들은 연단을 통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면 주님께서 들으시고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며 그렇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여호와가 내 하나님이라고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목자의 침을 당하여 양떼들이 흩어지고 흩어진 양떼들 중에 소수의 남은 자들이 불과 같은 시험을 통과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침을 당하시고 그 양떼들이 흩어졌지만 그 흩어진 양떼 가운데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반드시 불과 같은 시련을 당한 후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더 이상 자기의 이름에는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연단을 말하면 구약에서 대표적인 인물로 욥을 듭니다. 욥은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같은 시험을 통과하고 나서 자기의 의로움을 주장하던 욥이 어떻게 변하게 됩니까?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불과 같은 시험을 통과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새벽기도회 때에 시편 44편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리지도 않았는데 양떼를 흩어버리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흩어진 양떼들이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처럼 여김을 받았다고 합니다. 시편 44편의 죽임 당하는 양이란 자기 죄가 아닌데도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런 고난은 바로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자기 백성들도 동일한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로마서 8:35-39절을 봅니다.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성도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셨기에 그의 몸인 성도도 같을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환난 가운데서도 결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아니한다는 그 사랑만을 굳게 순전하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게 마련입니다.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징계를 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헛된 곳에 한눈 돌리지 못하게 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묶어두시기 위하여 그렇게 연단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냥 가만히 내 버려두면 우리는 길 잃은 양처럼 각기 제 길로 가는 자들이기에 날마다 목자의 고난에 참여시키고 그 흔적을 따라 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3-7절도 봅니다. “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영원한 것을 위하여 불로 시험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하는 이유를 베드로 전서 2:20-21절에서 또 이렇게 증거 하는 것입니다.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전에는 길을 잃었지만 이제 목자 장에게 돌아왔기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목자가 침을 당한 자리에서 자기 양떼들도 목자를 배신한 흔적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자신이 주님을 배신하는 자 인가를 알게 하시기 위하여 여러 가지 시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시험들을 통하여 자기 이름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이름만 부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의 이름을 부르면 응답하시고 그들을 자기 백성 삼으시는 것입니다.

천지 만물이 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특별히 자기의 소유를 삼으신 백성이 바로 이스라엘 이었습니다. 그 이스라엘에 의하여 배척받는 메시아를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셨고 그대로 성취가 되었습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만들기는 자기와 짝한 자,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서 만들어 내시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증거들이 바로 이 사건을 주목한 것이었습니다.

그 예언대로 목자가 침을 당하였지만 그러나 그 목자를 다시 살려내시고 자기 백성을 찾아오셔서 끝까지 사랑하여 주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기 백성 만들기입니다. 여기서 찾아진 양들의 공통적인 고백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상관없이 주께서 피 흘리심으로만 주의 백성이 만들어지는 것임을 온 몸으로 체험하면서 오늘도 그 십자가의 뒤로 따라 가는 적은 무리들이 주의 백성입니다.

 

 

 


스가랴 14:1-8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2007. 4. 25

1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너의 중에서 나누이리라 2 내가 열국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성읍이 함락되며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보며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 가려니와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쳐지지 아니하리라 3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나가사 그 열국을 치시되 이왕 전쟁 날에 싸운 것 같이 하시리라 4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산은 그 한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5 그 산 골짜기는 아셀까지 미칠찌라 너희가 그의 산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가 주와 함께하리라 6 그 날에는 빛이 없겠고 광명한 자들이 떠날 것이라 7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8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지표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민물가재나 반딧불이가 살 수 있는 곳은 물이 일급수라고 하는 식으로 기준을 정하는 것입니다. 공기의 오염도는 이끼류를 가지고 측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 세상의 모든 천지만물만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영적인 세계까지를 다 아우르는 지표는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성경말씀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온 우주만물의 상태와 시기와 때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선택된 나라가 나오는데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 전개되는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담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다가 하나님의 때가 되어 출애굽을 할 때에 열 가지 재앙이 내립니다. 이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이 참된 신이심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세계 최 강대국인 이집트가 그들이 노예로 다스리는 백성들의 하나님에게 패배하였다는 것을 통하여 온 천하에 여호와와 같은 신이 없음을 증거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1절에 보시면 그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고 합니다. 이 여호와의 날에 대하여 구약은 아주 많은 곳에서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이 오면 일반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참된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날이 구원의 날이 아니라 심판의 날이라고 증거 하는 것입니다. 물론 심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심판 후에 구원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심판의 소식보다 구원의 소식을 좋아하기에 거짓 선지자들은 심판을 말하지 않고 구원의 소식만 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여호와의 날은 예루살렘이 먼저 심판을 받는 내용입니다. 1-2절입니다. 재물이 약탈되어 그 자리에서 나누어 질 것입니다. 전쟁을 하면 재물을 닥치는 대로 가져가서 나중에 나눌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히 정복하게 되면 그 자리에서 재물을 나눌 것입니다. 그 정도로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열국을 모아서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셨기에 성읍이 함락되고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보며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잡혀가리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이 이방에 의하여 공격을 받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그들의 범죄로 인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가 증거 하듯이 예루살렘에 죄악이 가득하였기에 적들이 쳐들어오며 포로로 끌려가고 나라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들의 범죄와 상관없이 공격을 당하는 것은 다윗의 예를 통하여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는 것으로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두 가지 경우에서 공통점은 무엇인가 하면 이스라엘 먼저 공격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범죄 한 예루살렘을 하나님께서 징계하시기 위하여 바벨론이라는 몽둥이를 사용하시지만 이 바벨론이 교만하여져서 자기들이 하나님인양 예루살렘을 공격하였을 때에 이 바벨론도 멸망시키시는 것입니다. 범죄 하지 않았지만 공격받는 것은 국가차원보다 개인차원에서 보는 것이 더 분명합니다. 요셉이나 다윗이나 다니엘의 경우에 그들의 잘못한 것이 없이 공격받는 경우를 봅니다.

이런 모습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먼저 공격을 받지만 이스라엘을 공격한 그들이 결국은 패배하는 전체적인 그림이 그려집니다. 이것은 이미 창세기 3:15절에 약속된 말씀입니다. 뱀의 후손이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면 여인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전쟁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이스라엘과 비 이스라엘이라는 구도로 전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전쟁의 과정에서도 남은 백성이 있게 됩니다. 2절 끝에 보시면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쳐지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라고 전부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남아진 자만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남겨진 이스라엘은 반드시 심판 속에서 남겨지는 것입니다. 13:9절에서도 삼분지 일을 남기시는데 불 가운데 던져서 은과 같이 금과 같이 연단하신다고 합니다. 그 남은 자는 보호하시면서 동시에 열국을 치시는 것입니다.

3절입니다. 그 때에, 즉 여호와의 날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열국을 치시되 이왕 전쟁 날에 싸우신 것 같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왕 전쟁이란 구약에서 여호와께서 전쟁하신 그 방법대로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전쟁은 붙여주시는 전쟁인 것입니다. 칼과 창이나 활과 병거로 이기는 전쟁이 아니라 여호와의 약속을 신뢰함으로 이기는 전쟁인 것입니다. 이런 전쟁이 바로 붙여주시는 전쟁인 것입니다. 너희는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을 보라는 식입니다. 언제나 여호와께서 앞장서셔서 적을 물리치시는 전쟁인 것입니다. 이런 전쟁에 인간이 자기 공로를 주장하기 위하여 앞서는 것은 아간과 같은 꼴이 나는 것입니다.

4-5절입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 동편 감람산에 서신다고 합니다. 그러면 감람산이 그 한 가운데가 갈라져서 산 절반을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갈라져서 골짜기가 생길 것인데 그 골짜기는 아셀까지 연결이 되어서 그 산 골짜기로 도망갈 것이라고 합니다. 유다의 웃시야 왕 때에 지진이 일어나 도망간 것처럼 도망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때에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가 주와 함께 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문자적으로 역사적으로 성취가 될 말씀인지 아니면 종말론적인 해석이어야 하는지 이견들이 있습니다.

역사적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예루살렘이 A.D 70년에 로마에 의하여 파괴되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그때에 감람산이 남북으로 쪼개지는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예루살렘이 무너질 때에 도망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언의 말씀의 궁극적인 성취는 6-7절을 보시면 종말론적인 현상입니다. 그 날에는 빛이 없겠고 광명한 자들이 떠날 것이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니고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라고 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한 날을 기다려 왔습니다. 그러나 그 날에 대한 선지자들의 예언은 심판의 날이 먼저였습니다. 아모스 5:18-19절입니다. “18 ○화 있을찐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 19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20 여호와의 날이 어찌 어두워서 빛이 없음이 아니며 캄캄하여 빛남이 없음이 아니냐” 여호와의 날이 화가 있는 날이며 빛이 아니라 어둡고 캄캄한 날이라고 합니다.

요엘 3:14-16절입니다. "14 ○사람이 많음이여, 판결 골짜기에 사람이 많음이여, 판결 골짜기에 여호와의 날이 가까움이로다 15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그 빛을 거두도다 16 나 여호와가 시온에서 부르짖고 예루살렘에서 목소리를 발하리니 하늘과 땅이 진동되리로다 그러나 나 여호와는 내 백성의 피난처, 이스라엘 자손의 산성이 되리로다" 감람산이 골짜기가 나듯이 여기서는 판결골짜기입니다. 이 판결은 해와 달과 별이 빛을 거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자기 백성의 피난처와 산성이 되십니다.

이 여호와의 한 날은 누구만 아는 날입니까? 7절에서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입니다. 이 날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그 날은 천사도 인자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는 그 날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은 신약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면 여호와의 날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주의 날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주 예수의 강림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날이란 묵시적으로 보면 초림과 재림 전체를 한 날로 보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간 개념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그 날입니다. 이 날은 반드시 심판이 먼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24:29-31절입니다. “29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31 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해와 달이 빛을 내지 않고 하늘의 별들이 흔들리고 떨어질 것입니다. 구약에 예언된 그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에 누가 오시는 것입니까? 인자가 즉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구약의 여호와의 날을 주의 날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신 것을 베드로 사도는 요엘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로 보고 있습니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합니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면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이 쓸데없이 되는 우주적인 대 파국과 변혁이 도래할 것입니다. 초림과 재림을 함께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사도들은 다 종말론적인 자세로 살았으며 그 주의 날을 대망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초림하실 때에 그들이 여호와의 한 날을 오해하고 기다렸습니다. 그 결과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온 세상이 죄 아래 심판아래 있다는 증거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스라엘 가운데 남은 자들이 있으니 이들은 그 찌를 자를 보면서 독자를 잃은 듯이 통곡하는 자들입니다. 이 들만이 아니라 이방인 가운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나아와서 동일하게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으며 이방인 중에 부름을 받은 자들에게 주의 날을 사모하게 하였습니다. 주의 날이 도적같이 임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주의 날이 도적같이 임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날에는 이 땅의 모든 체질이 다 불에 풀어지듯이 풀어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여호와의 날이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의 여호와의 한 날, 여호와의 사건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만이 아니라 심판 후에 구원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스가랴 14:8절입니다.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고 합니다. 해 뜨는 데부터 해지는 때 까지 온 세상에 생수가 흐를 것입니다. 그 생수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생명수를 값없이 받아 마신 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을 대망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6-7, 23절입니다. “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 마른 자에게 값 없이 주리니 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구약에서 예언한 여호와의 날, 여호와께서 아시는 그 날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을 전부다 다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주의 날을 맛본 자들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부분적입니다. 그러나 곧 얼굴과 얼굴로 대하여 볼 주님의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생명을 얻었기에 이제 그 보혈을 흘리신 주님이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이장우 목사/늘푸른 교회/십자가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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