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계별 학습-8)단계별 성경연구(창31:1-창35:22 )

작성자xian|작성시간07.09.13|조회수107 목록 댓글 0

마하나임
2002년 12월 1일
본문 말씀: 창세기 32:1-2

32:1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32:2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위기라는 것이 사실상 사람마다 다 틀립니다. 불우한 이웃들이 느끼는 위기라는 것과 잘 사는 사람들이 느끼는 위기와 정치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위기, 국가 별로 느끼는 위기들은 다들 다릅니다.


하지만 모두들 늘 위기를 생각하지 않고 살 수 없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자.. 이런 위기들이 닥치게 되면 종교에 입문한 사람들은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신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됩니다. 행여 신께서 지금 자기에게 닥친 위기상황을 속시원하게 해결해 주리라 기대를 하고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들의 이런 위기들을 해결하시는 분이 참 하나님이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위기를 해결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 나름대로 인간 세계의 위기를 달리 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위기에 대해서만 급급했지 하나님이 인간 세계를 보고 있는 그 위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각이 없습니다. 너무나도 자기 일에 열중하고 몰두하고자 하니 하나님을 만나서 자기 넋두리 풀기에만 우선합니다.


예를 들면, 교회 청년들이 교회 이름을 걸고하는 체육대회에 나가서 공휴일날 온종일 경기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자기 교회가 이번 대회에서 우승해 주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몸소 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도를 잘하는 본인 편들어주는 것이 뻔한 일이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이런 교회 간의 체육 대회를 통해서 더욱 가까이에서 체험하고자 하다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면 거기에는 일상의 위기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취업 문제라든지, 혼인 문제라든지, 장래 문제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낮에 자기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운동한 것과 아무런 상관도 없이 말입니다.


즉 위기란 교회 봉사 일로 해소되지 않는겁니다. 도리어 자기 자신을 압박해 오는 실질적인 위기는 일상에서 너무나도 현실감있게 닥쳐올 뿐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런 문제가 위기일까요?


오늘 본문은, 맨 처음 야곱이 천사 무리와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잠간 소개하다가 그 뒤로는 길게 야곱이 이번에는 형을 만나야만 하는 위기 상황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교회 체육대회에 나가서 교회를 위하여 열심히 봉사한 그 청년에게 있어 집에 들어오면 자신의 장래 문제가 위기처럼 여전히 산재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이 위기를 어떻게 해결하려고 할까요? 물론 신자라고 여기기 때문에 수시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기도하지 말래도 늘 기도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자신이 판단하기에 위기라는 것이 쉴 틈도 없이 계속 밀려오기 때문입니다.


위기 앞에서의 답답함이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하는 당사자는, 나의 위기가 항상 하나님의 기도 응답으로 늘 해결이 된다는 편안한 생각을 강제로 늘 자기에게 주입시키고 싶어합니다.


따라서 그러기 위해서 '기도 했음', 혹은 '기도 열심히 했음' 자체를 훌륭한 하나님의 일로 스스로 인정하고 싶어합니다. 기도라는 이 훌륭한 일을 했기에 하나님께서도 이 훌륭한 일에 대해서 섭섭지 않게 보상을 해 줄 것이라고 여기고 싶어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들이란 자기 욕심에 의해서 고민과 걱정을 자청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곱은 떼 천사들을 만나고서는 '하늘의 군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 천사들은 분명 거룩한 하나님의 일을 해야 될 천사들입니다.


그러나 천사의 만남과는 전혀 상관없이 야곱은 나름대로 위기의식을 지니게 됩니다. 그는 결국 자신이 딴 고장으로는 갈 수도 없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는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자신을 죽이려고 벼르고 있는 형이 있다는 것이 자기에게 곧 위기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야곱은 형을 달래기 위해 타협책을 제시합니다. 자기에게 각양 가축과 종들이 있으니 이것을 미리 받으시고 이 아우를 너그럽게 용서해 달라는 겁니다. 그리고 난 뒤 형의 반응이 몹시도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형이 무려 400명이나 되는 군사를 대동하고 야곱 쪽으로 출발했다는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야곱이 하나님의 군대 마하나임을 만난 사실과 야곱의 위기 상황이 풀리는 것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야곱이 아무리 하나님의 천사들과 만났지만 야곱이 실제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방식은 어디까지나 야곱 본인의 책략에서만 나옵니다. 이것이 야곱의 모습이고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교회 나가서 열심히 봉사하고, 하나님을 뜻을 알고 사랑하고 이해했노라고 큰 소리치지만 실상 일상 생활에서 계속 밀려오는 위기상황에 대해서는 순전히 자기 머리 쓰기에만 매달리는 식입니다.


야곱을 보세요. 야곱은 우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빈 몸으로 이곳까지 흘러들어왔다가 이제 풍성한 축복 보따리를 안고 다시 하나님이 지시하던 곳으로 귀환하려고 하는데 이제와서 형에 맞아 죽으면 안된다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친히 나서서 이 야곱이 형에게 맞아죽지 않게 해달라는 겁니다. 야곱의 기도는 순전히 자기 중심적입니다. 마하나임, 하나님의 군대 천사들이 어떤 전쟁을 벌리기를 원하는 가에 대해서는 전혀 깜깜합니다.


야곱은 그동안 모아 놓았던 재물과 식구들을 그대로 유지하고 지켜내는 것이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대열을 네 개의 나눕니다. 앞선 3개의 대열은 모두 형의 마음을 풀기 위한 예물의 대열입니다.


자기 종들에게 부탁해서 이 동생 야곱의 뜻을 형이 깊이 헤아려 주기를 당부했습니다. 이런 선물들을 받으시고 부디 동생을 용서해 주십사 하는 인간적인 방식을 동원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처 자식마저 앞서 보내고 마지막 자기 홀로 남게 됩니다.


과연 무엇이 진정한 위기입니까? 참된 위기를 자기의 소유를 지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위기란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자기 자신이 과연 무엇인지를 모르는데서 비롯됩니다.


대단히 바쁘게 산다고해서 위기가 없어지는 아닙니다. 단지 잠시 대충 덮어질 뿐입니다. 참된 그 인간의 본질은, 그 인간과 하나님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밝혀져야 할 그 때입니다. 이런 경우의 예가 열왕기하 2장에 나와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엘리야가 등장하고 그리고 그를 집요하게 쫓는 엘리사가 나옵니다. 엘리사는 무엇이 궁금했습니까? 그것은 엘리야 본질입니다. 엘리야가 행하는 그 모든 놀라운 일들과 사역이 도대체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기에 나올 수 밖에 없었는가가 궁금했던 것입니다.


결국 엘리야가 세상을 떠날 때는 시신이 땅에 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늘에서 불말과 불병거가 내려와서 엘리야를 데리고 갔습니다. 엘리야는 바로 엘리사가 그대로 고백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병거요 그 마병이었습니다.


엘리사 외에 다른 선지자들은 엘리야의 시신을 찾기 위해 사흘 동안이나 헤매였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엘리야와 엘리사의 관계을 모르고 있습니다. 단지 엘리사만 알았기에 엘리야가 떨어뜨리고 간 그 겉옷을 가지고 다시 강물을 헤치면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그저 평범한 이스라엘의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지키는 마병으로 사셨던 분이었습니다. 흔히 생각하기를 위기 상황은 수많은 사람들의 지혜와 힘이 모아져서 해결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위기란 하나님 앞에서 진정 자기 자신의 면모를 제대로 모를 때 생겨나는 법입니다. 야곱이 만났던 마하나임, 즉 하나님의 군대는 일방적으로 야곱을 도와주기 위해 있는 군대가 아닙니다. 도리어 야곱으로 하여금 자신의 본질을 바로 알게 하기 위한 군대입니다.


야곱은 형을 보고 위기를 느껴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자신의 본질을 되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나는 과연 무엇이냐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있는 위기만 없어진다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위기도 존재하지 않는 법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은 야곱에게 본래의 하나님의 뜻을 담고자 합니다. 오늘날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를 통해서 실시되는 것을 겁낼 것이 아닙니다. "먹는 것과 입는 것이 족한 줄로 알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을 통해서 실시되는 것을 운없다고 여기지 마시고 도리어 영광스럽게 여겨야 합니다. 야곱이 그러했고 엘리야, 엘리사가 그러한 사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서 운동하고 작용하는 것을 황공스럽게 여기기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창세기 32:24-28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인간이 참으로 못된 죄인인 것이 드러나는 시점은 하나님한테도 대들 때입니다. 야곱은 하나님하고도 직접 싸웠던 유일한 인물입니다. 그 때까지 야곱의 입장은 이러했습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대드는 자는 나는 용서하지 않겠노라" 라는 정신이었습니다. 이것이 죄악된 인간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본질과 만나야 했고 실제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은 힘에 의한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다른 방식으로 약속의 백성에게 다가오시는 분이었습니다. 뭐든지 힘으로만 해결하려는 야곱에게 하나님은 단지 야곱의 적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마저 적이 되어야 될 정도로 야곱은 근원적으로 하나님과 무관한 사람이었습니다. 도저히 하나님과 만날 수 없고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런 야곱에게 끈질기게 찾아오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버지 이삭에게 준 약속 때문에 그러합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겨야 한다는 하나님의 자기 약속은 반드시 성취되어야 했습니다. 야곱은 약속된 인물입니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내려 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이방 민족과 싸워야 하는 나라를 이룩해야 될 입장에 놓인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전혀 하나님 사람이 아닙니다. 사는 방식이 섬기는 방식이 아니라 도리어 빼앗고 속이고 훔치는 식의 인생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인간적인 방식에 준해서 얻어 보려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그 야곱과 씨름에 들어갔습니다. 승리자로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패배자로 들어간 것입니다. 야곱에게 또 하나의 승리와 성공을 안겨 주려 야곱과 씨름한 것입니다. 그의 승리를 통해 인간적 승리의 한계를 보여주려고 하신 것입니다. 야곱이 거의 승리했을 때, 하나님은 야곱의 환도뼈를 쳐버렸습니다.

야곱의 인간적인 힘은 일순간에 무너졌습니다. 야곱은 알았습니다. 밤새도록 자기가 맞서 싸운 대상은 인간이 아니었다는 것을! 여기서부터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간 것을 눈치챘습니다. 환도뼈만 무너져 내린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이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세월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적은 형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했습니다. 형의 맏이 권을 빼앗기 위해 팥죽을 끊인 자기 행위도 소용없었으며, 아버지로부터 축복을 따내기 위해 어머니와 합작해서 속임수를 쓴 것도 이제 와서 다 소용없는 인간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축복이란 가상적인 하나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직접 자신의 모든 힘을 파괴하는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에 눈을 떴습니다. 그는 떠나려는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야곱의 머리맡에 오르락내리락 하던 그 밤의 천사를 이제 와서 놓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태어날 때 장자의 에서를 붙잡던 그 손으로 이제는 하나님을 붙들고 간구하며 울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과거를 소멸시켰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이름을 주시면서 새로운 사명을 부여합니다. 새 이름은, 이스라엘 즉 사람과 하나님을 모두다 싸워서 이긴 인물이라는 호칭입니다. 야곱은 이제 명실공히 장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명이 지닌 장자입니다. 남의 것을 갈취하고, 속이고, 힘가지고 밀어붙이는 장자가 아니라 하나님처럼 섬기기 위한 장자입니다. 어린 자를 섬기는 장자의 원 모습으로 이스라엘은 돌아 온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모습이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분명 주가 되실 분이지만 그 주가 되시는 과정은 섬김을 받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섬기려하고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바쳤기에 주가 되시는 분입니다. 교회란 바로 이런 분을 머리로 모신 단체를 두고 말합니다. 머리되시는 분이 섬기시는 분이라면 그
몸의 지체들도 서로 섬기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즉 야곱식의 인생관이 아니라 이스라엘 식의 인생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야곱처럼 하나님에게 얻어맞아 전 힘이 주저앉은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이 흔적이 바로 십자가의 흔적입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겸손히 바로 십자가의 흔적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체적인 힘을 근거로 해서 옆 사람과 싸움을 벌려 나갑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도 하나님마저 무시하면서 마구 공격하고 놀리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아무 것도 무너진 것입니다. 원초적인 힘은 여전히 마구 살아 있는 상태입니다. 이들의 이러한 야곱식 삶의 방식 때문에 십자가 지신 모습으로 하나님이 오셨다는 것은 아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또 다시 예수님을 못박게 하는 그런 완력이 큰소리치는 그런 단체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야곱과 이스라엘
2002년 12월 8일
본문 말씀: 창세기 32:22-32

32: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 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쌔
32: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네며 그 소유도 건네고
32: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32:25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32:26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32: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32:28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32:29 야곱이 청하여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그 사람이 가로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2:30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2: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32:32 그 사람이 야곱의 환도뼈 큰 힘줄을 친고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환도뼈 큰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사람들과 사귀게 되면 여기에는 필히 인간의 본성은 감추어지고 포장되게 되어 있습니다. 예의상으로도 점잖아야 되고 자신의 야심을 속으로 움츠리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혼자 있게 되면 이것 저것 가릴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과 야곱의 만남에 주목해야 될 것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반응이 평소에 인간들이 안 들킨 야심이나 본능이 유감없이 펼쳐진다는 것이고, 또다른 면에서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모든 야심을 그대로 다 인정하고 받아준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겸손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인간들이 야심을 불태우는 이유는, 평소에 나름대로 축복관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무의식 중에서도 축복을 기대하고 요구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상황에서 축복의 양과 종류도 계속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자기 속에서 끊임없이 야심이 만들어지고 또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각종 야심이 희망하는 목표가 바로 축복이 됩니다.


덩달아 '신'이라는 개념도 축복 성사에 따라서 존재하고 존재안하고를 측정해 보려고 합니다. 이러한 근성은 그 누구나 할 것없이 다 지니고 있는 바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보면 실제로 제대로 된 하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그 외 신앙인들이 이들입니다. 물론 이들이 본질적으로 인간성이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들은 무슨 권리로 축복을 받은 것입니까? 축복이란 인간에게 그런 권리가 있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는 아예 없는 하나님의 권리가 어떠함을 드러내기 위해 그들이 부름을 당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이들의 만남 사이에는 축복관의 사이의 차이성으로 인해 갈등이 일어나겠지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과 야곱의 싸움이 바로 그런 이유가 벌어집니다. 야곱은 재산과 처 자식을 앞서 보내고 얍복강 가에 홀로 남았습니다.


그는 축복을 받아내고 또한 그것을 지켜내는데 예민해져 있는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의 주위에 다른 인간은 없습니다. 따라서 예의를 갖춘다는지 점잖을 뺄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저 속마음 그대로 지니고 있으면 그만인 상태입니다.


그런데 밤새도록 야곱은 난데없이 누군가와 붙들고 싸움을 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왜 야곱이 지금까지 모아놓은 재산과 가족에 탐을 내느냐 말입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야곱의 것인데 말입니다. 과연 이 싸움이 밤을 지내고 그 다음날까지 이어질까요?


오늘 본문 32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해가 돋았을 때, 야곱과 싸웠던 그 낯선 인물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일반 사람같았으면 대낮까지 계속 싸워 사생결단을 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나이는 결코 야곱의 재물이나 가족에 탐을 낸 분이 아니었습니다. 야곱과 직접 상대하고자 했던 분입니다. 왜 이 분은 야곱과 씨름을 했을까요? 그것은 야곱으로 하여금 진정한 축복이 따로 있음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창세기 32:1-2절에서 야곱의 고향 방문 길에 만났던 큰 무리의 천사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천사단의 이름은 마하나님, 즉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군대의 임무는 전투입니다. 그냥 빈둥빈둥 놀고 이 세상을 두루다니며 관광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가 아닙니다.


과연 이 천사들의 임무는 하나님의 의해서 어떤 식으로 수행이 될까요? 여기서 하나님은 하나님 나름대로의 축복관이 정립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관이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펼쳐지는 것이 곧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다름과 같이 약속한 적이 있습니다. 창세기 28:15을 보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란 하나님의 뜻이 그 사람에게 철저하게 적용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 당사자는 자기 뜻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굴복당하는 상태가 되고 자기 뜻을 위해 사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매여 사는 사람이 될 때, 이것이 곧 축복된 사람입니다.


이러한 축복이 성사되려면 그 과정에서 필히 하나님의 측복관과 인간의 축복관으로 야기된 싸움이 일어나야 하는 겁니다. 비단 야곱 뿐만아니고 오늘날 모든 성도에게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마치 요강같습니다. 우리들 내장에 들어있는 모든 것이 다 토하고 다 싸고해서 내어놓는 배설물을 남김없이 다 받아내어주는 요강말입니다.


물론 성도가 아닌 자에게는 이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성도이기에 하나님이 몸소 찾아오셔서 이 작업을 하시는 겁니다. 이런 사실도 모르고 성도는 자기 나름대로 생각해 놓은 축복관을 유감없이 철없게 발휘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하나님, 제가 열심히 기도했는데 왜 우리 교회는 부흥이 더딥니까? 하나님, 제가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헌신적으로 일하시는데 왜 우리 가족에서 어려움이 닥치게 합니까?"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래놓고서 그 다음의 대응은 그야말로 야곱식입니다. "하나님, 아무리 하나님께서 저에게 압력을 가해도 저의 축복은 제가 알아서 지킵니다. 제가 유지시킵니다. 제가 알아서 기도하고 헌신하고 복종하고 순종할 때니, 하나님은 제발 저의 소원들을 때마다 성취시켜 주옵소서. 그래야 다른 사람이 볼 때,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것을 알고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누이좋고 매부좋은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바로 이런 야곱적인 사고 방식으로 인해 야곱은 자기를 찾아온 상대와 밤새도록 붙들고 싸웠습니다. 자기 축복 자기가 지키겠다는 일념 하에서 말입니다. 바로 이 점이 평소에 야곱 안에 들어 있었는 그야말로 야곱적인 본성입니다.


호세아 12:2-4에 보면, 이러한 야곱적인 정신상태에 대해서 하나님 보시기에 벌받을 짓이라는 겁니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쟁변하시고 야곱의 소행대로 벌 주시며 그 소위대로 보응하시리라 야곱은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거기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그 당시 유다나라의 소행이 딴데서 온 것이 아니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 이 야곱의 행동이 그 당시 '야곱, 즉 이스라엘의 소행'의 원조가 된다는 겁니다. 야곱은 진정한 축복이 뭔지를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본인이 염두에 둔 처 자식과 재물이 결코 하나님이 주고자 했던 그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뭡니까? 야곱을 진정한 싸움꾼으로 변모되는 것이 야곱이 받을 축복의 전부입니다. 마하나임이라는 천사들의 싸움 군단으로 하여금 야곱을 만나게 했던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속에 함께 들어가 있는 바입니다.


싸움하다 보니 밤이 다 샙니다. 이제 낮을 피해 떠나야 될 그 인물로부터 환도뼈를 얻어맞고서는 싸움이 더 이상 진행될 수 없었습니다. 더 이상 그 천사를 붙들고 싸울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낯선 상대를 만나 자신의 본성을 다 드러나고 만 상태가 되고 말입니다.


모든 것이 들켜 버렸을 때에 야곱은 자신에게 아무 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모든 것을 가져간 그를 붙들고 이번에는 싸움이 아니라 애원을 합니다. 제발 축복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 때 그 낯선 분은 야곱의 이름을 묻게 됩니다. 야곱의 모든 것을 회수하려 하는 겁니다. 야곱식으로 생각한 축복은 이제 끝났습니다. 야곱식으로 축복을 지키려는 결과로서 야곱에게 돌아온 것은 절둑절둑 절게 되는 장애를 입은 신체 뿐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새로운 축복을 내립니다. 이것은 야곱이라는 이름이 없어진 근거에서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가지고 전쟁을 벌리려는 것입니다. 야곱식으로 버티는 모든 자를 향한 이스라엘식의 공격입니다.


사실 성도라는 자들은 모두 이스라엘입니다. 이름만 이스라엘을 사용한다고 성도가 아닙니다.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뀌게 한 그 하나님의 일관된 능력이 임한 자만이 참 이스라엘입니다. 이들은 야곱식의 사고방식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그리고 야곱식의 축복관이 무엇인지도 압니다. 내 힘으로, 내 기도로, 내 헌신으로 내 축복을 지킨다는 것이 하나님께 원수가 되는 사고방식입니다. 이것은 잘못된 축복관입니다. 이스라엘이 되면 애시당초 내 것, 내 축복이라는 것이 도무지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뜻만이 작렬할 뿐입니다.


시편 73:1-5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여러분 이런 상황에서 안미끌어질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싸움은 결코 육적인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권세를 잡은 악마와의 싸움입니다. 즉 인간 자신의 능력과 솜씨에 의존해서 사는 그런 야곱식을 좋아하고 옹호하는 세력입니다.


이 싸움은 타인과의 싸움 이전에 우리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의 것이 따로 있게 되면 그것은 어찌되었던 지키려고 힘쓰고 또한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잘못 알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미워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야곱의 변화
2002년 12월 15일
본문 말씀: 창세기 33:1-6

33:1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인을 거느리고 오는지라 그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33:2 여종과 그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33:3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 하니
33:4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우니라
33:5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이니이다
33:6 때에 여종들이 그 자식으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사람이 일단 구원받고 난 뒤에는 어떤 사람으로 바뀌게 될까요? 그런데 이 질의를 흔히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제가 예수의 피를 믿고 일단 구원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라고 말입니다.


이 질의가 옳지 않는 것은 구원 관계에 돌입된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한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관리 체제 안에 놓이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인간이 자기 구원을 지탱하기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인간을 구원을 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 인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선 사람들의 인식부터 따지고 봐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결단력 있는 행위로 구원을 따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걱정거리는 계속해서 밀려들고 있습니다.


죽어서 천국간다는 구원은 받았지만 이 세상에 떠날 때까지 긴 긴 여백의 세월이 아직 남아 있으니 그 여백을 자신의 행함으로 다 채워넣어야 될 임무가 아직 남아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그 행함은 항상 하나님 보시기에 착해야 되고 의로운 행함들이어야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생각이 이렇게 되니 바르게 살아야 될 주체가 최종적으로 계속 자기 일 수 밖에 없다는 점이 더욱 분명해지는 겁니다.


나는 내가 책임지지 아니하면 책임질 사람이 없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그저 하나님께서 나를 계속해서 감시하는 분으로만 머물고 실제로 바르게 살 주체자는 자기 자신이 되어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자아가 우선이어야겠고, 또 그러면서도 착하고 바른 인간으로 살아남아야 될 이중고를 짊어지게 되는 겁니다. 과연 이러한 난제를 우리가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쉬운 예가 있습니다. 어릴 때보면, 자기가 놀던 곳이 모두 크게 보이고 넓어보이고 골목길도 참 길게 보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어른이 되어 다시 옛적 놀던 곳에 가보면 모든 것이 좁고 작아 보이고 긴 골목길도 짧게 보이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보다 넓은 세계를 봤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와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처음 믿고 구원받은 생활을 한다고는 하지만, 그 때까지 자신이 살던 모든 삶은 여전히 자기 중심적으로 좁게만 되어 있습니다.


즉 남 한테지지 않아야 만족하고, 누군가가 옆에서 계속 이쁘다고 격려해주고 사랑해주어야 살 맛이 나고, 세상에 나가도 모두들 자신에게 굽신거려 주어야 기쁨을 느끼고, 아무리 추운 날씨에도 감기 들리지 않아야 자기답다고 여기면서 살고 싶어합니다.


자... 이런 상태에서 설교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함께 하심'이라는 사실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때부터 "옳다구나 평소에 갖고 싶고, 되고 싶고, 누리고 싶고, 얻고 싶은 것을 나와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께 마구 졸라서 한껏 얻어내야지. 만약 진짜 내 소원하는 바를 딱딱 이루어주시면 비로소 하나님께 함께 있는 것이 증명될 것이고 만약 딱 안 이루어지면 그것은 내 기도 정성이 부족해서 그러하고 하나님께 졸려대는 강도가 약해서, 즉 신앙심이 부족해서 일어난 현상이니 더욱 애걸해야지"라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사실 이런 강탈의 기도를 신앙심 있는 기도로 이해하고자 하는 그 마음바탕에는 평소에 불안감과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나온 현상입니다. 즉 마음이 변화되지 않았기에 세상적인 욕구가 제대로 충족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이 넘쳐 나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심을 이런 식으로 써먹겠다는 겁니다. 마음의 변화가 없는 이런 상태에서 이해되는 잘못된 신앙의 성장이나 신앙의 강함이란 곧 자신의 욕심으로 가득찬 빈보따리를 뻔뻔스럽게도 하나님 앞에 내던지고서는 그 빈 보자리를 채워라고 협박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식의 삶은, 자신의 고통과 고민을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식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자기 식으로 처리하겠다는 고집에 불과합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천사를 만날 때 이런 본성이 그대로 다 드러났습니다. 내 축복과 내 소유물은 내가 지킨다는 주의입니다.


비록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이기는 하지만 그 축복물을 계속 축복물로 유지시키는 것은 자신의 노력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홀로 남아 있는 야곱을 공격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있음'의 참된 의미를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무엇이 진정한 축복인지 야곱은 아직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시편 121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힘께나 쓴다는 주위 사람들을 의지하고 앞장 세우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 신앙인은 참으로 배포가 큽니다. 천지의 산악을 두루 살피고서는 하는 말이, 자신은 도움을 사람이나 세상에서 얻고자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올꼬? 여기에 대해서 대담무쌍하게도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는 겁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은 얼마나 대단한 분으로 함께 하신지, 세상에 자신이 잠을 잘 때에 그 하나님은 주무시지도 않고 지키시고, 자신의 출입을 지키시고 자신의 영혼을 책임져 주신다는 겁니다.


여러분, 아동 때에 그저 자기 동네만 세상의 전부인줄로 알았던 철없던 시절의 마음과 성인이 되어 세계 일주를 마치고 세상 넓은 줄 아는 마음과 비교해 보세요. 참으로 큰 의미의 차이가 날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심도 이와마찬가지입니다. 자기에게 필요한 세상적인 것이 없다고 불안에 떠는 그 모습은 마치 철없던 어린 시절의 모습과 같습니다. 보다 郪고, 깊은 큰 세계을 모두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있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친지나 친구, 모두가 다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조절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쓸데없는 타인과의 비교의식과 경쟁에 나서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그런 것으로 마음 조이고 조마조마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좋은 예가 되시는 신앙인이 있습니다. 그 분의 이름은 다니엘입니다. 이 분은 말도 다르고 종교도 다르고 음식도 다른 나라로 잡혀 들어왔습니다. 물론 자기를 위해주고 자기에게 편들어 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세계로 옮겨와서 살게 된 것입니다.


과연 좌절할까요? 그리고 살기 위해서 권세있는 사람들에게 굽신거릴까요? 늘 살아나야만 한다는 강박감으로 쫓긴채 살게 될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 분은 어디가서나 당당했습니다.


왜냐하면 개인의 출세나 영달을 위해 '하나님과 함께 있음'을 사용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이 하나님의 지시와 말씀에 붙잡힌 상태가 바로 '하나님과 함께 있음'의 상태인지를 제대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개인적인 생존으로 인해 더 이상 불안해할 이유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었습니다. 단지 다니엘은, 그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인해 주위의 세계와 앞으로의 세계 역사가 어떻게 전개 될 것인지에 관심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곱은 내심 조마조마 했습니다. 왜냐하면 형은 자기를 죽이기 위해 400명이나 되는 군사를 끌고 온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33:20절에 보면, "거기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하였더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는 말은,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이 왜 이런 고백을 했을까요? 사실 형 에서가 400명의 인원을 끌고 자기 무리에 다가온 것은 공격해서 살해하기 위함이 아니라 도리어 동생을 반기고 환영하기 위한 환영 의식이었던 것입니다.


그 전까지 야곱은 참으로 마음 조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야곱에게 그런 마음을 심어주는 상황을 조성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래야지만 진정 하나님과 함께 있음의 의미를 야곱에게 알려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이 단순히 재물이나 자식 생산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스로 자신을 지탱하고 수호하고 방어하고 지켜 나가겠다는 생각 때문에 일어나는 불안감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쪽으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축복으로 제공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의 일상에서 불안하고 걱정하는 모든 원인이 어디에서 오는 겁니까? 그것은 야곱처럼 나 스스로 나를 지키겠다는 생각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그 수호하는 방식도 평소에 알고 있던 모든 세속적인 장치들을 염두도 두고 있습니다.


집안 재산이 늘어난다든지, 자식이 출세한다든지, 큰 세력을 지닌 기업이나 교회를 갖고 있다든지, 늘 건강하고 젊음이 유지된 신체를 가졌다든지, 가정이 화목하고 웃음꽃이 피어난다든지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 없으면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시는 의의가 없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정작 찾아든 것은 그 사람 본인의 마음의 초조와 불안감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와 함께 하시어 이 마음 조차 바뀌어주시려고 하십니다. 마치 다니엘처럼 말입니다.


남들보다 자연스럽게 일이 처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모든 것도 성도 그 개인의 마음의 변화를 염두에 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타인이 볼 때에는 에서는 처음부터 야곱을 헤칠 마음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형을 만나기 전에는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올지 염려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에서 야곱에게 이런 마음을 유발시켜서 진정 축복의 하나님으로 함께 하심을 알게 합니다. 이로서 야곱은 이제 진정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잘못 기대하는 것으로 인해 얼마나 잘못된 기도를 하는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다니엘처럼 그 어떤 상황에서 위에 계신 하나님의 지시만 귀 기울리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야곱 아들들의 무변화
2002년 12월 22일
본문 말씀: 창세기 34:1-6

34:1 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 여자를 보러 나갔더니
34:2 히위 족속중 하몰의 아들 그 땅 추장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고
34:3 그 마음이 깊이 야곱의 딸 디나에게 연련하며 그 소녀를 사랑하여 그의 마음을 말로 위로하고
34:4 그 아비 하몰에게 청하여 가로되 이 소녀를 내 아내로 얻게 하여 주소서 하였더라
34:5 야곱이 그 딸 디나를 그가 더럽혔다 함을 들었으나 자기 아들들이 들에서 목축하므로 그들의 돌아 오기까지 잠잠하였고
34:6 세겜의 아비 하몰은 야곱에게 말하러 왔으며

성도는 하나님의 축복 아래에 놓여 있습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그 축복의 범위 안에 있습니다. 축복의 경계를 넘어 저주의 영역으로 이동될 수 없습니다. 좋든 싫든, 원하든 원치않든 축복이 인도하는대로 축복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도에게 입혀주는 축복된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여기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견해 싸움이 벌어지게 됩니다. 사람이란 본성상 자기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강구합니다. 흔히들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순간부터 자신의 뜻을 내던져 버려진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고이 고이 애틋하게 간직하고 거기에다 모든 포부를 걸은 그 찬란한 목표까지 내다 버리게 된다는 점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뜻을 밀어냅니다. 둘 사이의 타협이나 흥정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뜻보다 우세합니다. 결코 인간의 뜻을 위한 하나님의 개입이란 하나님께서 용납한 적이 없습니다. 결국 인간의 뜻은 사멸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꼭 알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축복이요 하나님의 능력의 임재하심입니다. 사람이 요구해서 축복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이 인간에게 쳐들어와서 그 축복에 포로된 자만이 구원될 자라는 말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야곱이라는 분을 보았습니다. 야곱은 변화되었습니다. 야곱은 축복 속에 놓여 있기에 생겨난 그 결과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있음 그 자체가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축복이 그 시대에 과연 야곱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일까요? 아닙니다. 야곱의 배에서 나오는 자식들과 또 그들에게서 나오는 후손들 모두에게는 야곱과 함께 있는 그 축복의 대상이 되어있습니다.


그들이 축복을 따낼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야곱에게 내린 그 축복이 이제 야곱의 후손에게 손을 뻗힌다는 말입니다. 야곱을 다루었던 원리 원칙을 야곱의 후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시켜 나겠다는 것이 야곱의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그러면 우선 야곱의 자식들은 어떻게 축복을 받았을까요? 그 시작되는 내용이 창세기 34장에 결쳐 나옵니다. 야곱에게는 딸이 하나 있습니다. 이름은 디나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야곱의 가족들은 남의 땅에 기거하고 있었습니다.


아는 사람들이 없어 남들로부터 보호받기 힘든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살려면 스스로 지켜내는 자생력을 키울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자연히 정신상태도 대단히 예민해져 있을 뿐입니다. 물론 야곱은 이미 변화되어 하나님과 함께 있음의 위력을 친히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자식들은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네 식구들과 함께 있음을 그저 건성으로 알고 있을 따름입니다. 아버지의 신앙 변화를 제대로 읽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 누이 동생 디나가 토착민에게 강간을 당하고 맙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내린 처방은 한결같습니다. 철저한 복수뿐입니다. 또한 그것이 스스로 자기를 지탱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인간의 본성이기도 합니다. 물론 변화되지 않는 자연적 죄성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빈틈없는 복수를 위하여 상대방을 속이게 됩니다. 토착민과 더불어 한 가족이라도 된 것처럼 하기로 협상을 하게 됩니다. 누이동생을 토착민에게 시집보내는 대신 그저 종교적 요식 행위 하나만 요구합니다.


자신들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의 법에 보면, 할례받지 않는 자와 혼인이 금지되었지만 이왕 육체적 관계가 있게 되었고 혼담까지 오가게 되었으니 단지 신랑쪽 사람들이 모두 할례를 행해서 이번 혼인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험이 없기를 바란다고 상대방에게 요구했습니다.


상대방은 상대방조차 이해타산을 계산했습니다. 야곱의 가족들이 키운 모든 가축과 재산이 결국 모두 자신의 것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형식적으로 마음이 맞아떨어져 혼인을 인정하고 토착민들의 모든 남자들은 일시에 할례를 행하게 됩니다.


3일 째 되는 날, 가장 고통스러워 남자들이 기동을 못하게 된 틈을 타서 이 야곱의 시므온과 레위라는 아들들이 달려 가서 디나를 강간한 그 남자와 그 집안의 어른과 그리고 여타의 모든 남자들을 다 처치해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누이 동생 디나를 도로 데려오고 토착민이 갖고 있었던 양과 소와 나귀와 재물을 몽땅 다 뺏아버리고 맙니다. 과연 이것이 정의로움입니까 아니면 정의를 빙자한 인간적이 살인본능입니까? 내 것은 스스로 지킨다는 것이 과도히 되면 이런 결과를 낳습니다.


물론 야곱의 아들은 도덕적으로 그리고 신앙적으로 잘못이 없도록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거론합니다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려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즉 남들 보기에 신앙적으로 보고 정의로움을 내세운다고해서 그 사람이 참 신앙가에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이런 야곱의 아들들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축복을 하시는가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하나님과 함께 자에게 내리는 축복도 이 원리에 준해서 실행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9:5-6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찌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찌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이 대목은 야곱이 마지만 숨을 거두면서 자신의 12아들들에게 각자 축복을 해주는 장면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를, 축복이라면 온갖 갖고 싶은 것을 하늘에서 듬뿜 내려주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대상이 품고 있는 잘못된 정신을 낱낱이 지적하는 식으로 진행이 됩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잔해하는 기계'라고 야곱은 이 아들들에게 축복하고 있습니다.


'기계'란 무엇입니까? 감정도 없고 이성도 없고 절제도 없는 것이 기계입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도 잔인하게 말입니다. 따라서 다른 자식들이 이 자식의 행동을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려주는 것이 아버지로서의 야곱의 축복입니다.


그렇다고해서 이들이 지옥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내려준 축복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악된 품성을 철저하게 깨닫게 하는 식으로 전개됩니다. 그렇게해서 결국 그런 죄로 인해 누가 희생해야 하며 누가 그 죄를 대신 처리해야 하느냐를 보게 하는 것이 축복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들의 축복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남들보다 많이 가지는 것이 축복입니까 아니면 남들이 주목하지 않는 그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에 대해서 바른 안목을 갖고 있는 것이 축복입니까?


구원이란 내가 그 예수님을 알아주는 공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셨고 데리고 다시고 앞으로도 그렇게 된다는 사실에 눈이 뜨여지게 함으로서 이루어 나가시는 겁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불쌍한 고아 출신 사람이 고백하기를, "내가 세 살 때 옆집 아저씨의 손을 잡고 따라가지만 않았어도 그 때부터 나는 부모와 헤어질 일도 없이 당당한 세상 사람이 되었을 것인데 그 때 잘못된 인생노정으로 들어서는 바람에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고 후회하고 있는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그렇다면 그 때 부모와 함께 있었다고 자신의 구세주를 발견했을까요? 그런데 또 한 사람이 고백하기를, "제가 세 살 때 옆집 아저씨의 손을 잡고 따라가서 그 길로 고아가 되어 무진 고생을 했지만 어느 날 27살 때 예수님을 알게 되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세 살 때, 옆집 아저씨를 따라 나서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저를 구원해주기 위해 축복으로 인도한 처사입니다. 그래서 저는 인정합니다. 내가 나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고요. 저는 이제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사에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말입니다."


자... 여러분, 그야말로,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로운 자를 영화롭게 하신다'라는 사실을 그저 신학적으로 성경 지식상으로 알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함께 있는 자들에게는 이 사실이 정말 현실화 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을 데리고 다니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야곱에 내린 축복이요 야곱의 아들에게 임했던 축복의 경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로만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 오늘날 실제로 역사하고 있음을 저들이 의심치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벧엘의 하나님
2002년 12월 29일
본문 말씀: 창세기 35:1-8

35: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35:2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35: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35:4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묻고
35:5 그들이 발행하였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고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35:6 야곱과 그와 함께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35:7 그가 거기서 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거기서 나타나셨음이더라
35:8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

하나님은 성도를 한 곳에 정착시키고자 합니다. 그곳은 거룩한 세상입니다. 거룩한 세계의 한 일환으로 삼으시려고 합니다. 사실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거룩과 점점 거리가 먼 모습이 될 수 밖에 없는 입장입니다.


보통 순수하다는 말은 어른에게 어울리는 표현이 아니라 어린이들에게 해당됩니다. 사람이란 어린이에서 점차 어른이 되어 갑니다. 동시에 순수의 모습은 상실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린이들은 어른이 시키면 시킨대로 자발적인 순수함으로 실천에 옮기려고 합니다.


거짓말 하지 말라고 하면 최선을 다해서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거짓말 하지 말라고 훈계하는 그 어른들은 틈만 나면 거짓말을 남발합니다. 그것은 거짓말 하는 것이 재미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어린이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생존에 대한 위협이 너무나 강렬하기 때문에 거짓말해서라도 그 위협을 극복하려고 애를 쓸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어린이들은 이런 어른들의 모습에 대해 실망을 금치 못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들도 점차 어른이 되어가면서 이들의 성인들의 세계에 동화되어 갑니다. 순수함보다 자아의 생존이 더 시급한 문제인 것을 알아가는 겁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비록 하늘 나라가 좋은 나라이며 거룩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할지라도 그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갖춘다는 것은 참으로 요원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천국의 요건을 완화시켜줄까요? 그러니까 좀 덜 거룩하고 좀 덜 순수해도 마음대로 천국에 입국할 수 있도록 거룩의 기준을 대폭 낮추어줄까요? 이런 경우는 도저히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됨을 그 어떤 경우에도 뒤로 미루거나 양보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순수치 못한 우리가 어떻게 순수한 것만 요구하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단 말입니끼? 하나님의 방법은 이러합니다. 거룩한 하나님께서 친히 방문하셔서 그 상대를 통해서 새로운 거룩의 모습을 구현해 내는 것입니다.


즉 개인적으로 봐서 거룩이란 깨끗하고 흠없고 띠없이 맑고 순수한 것을 염두에 두겠지만 실제로 행동으로 보여준 하나님의 거룩은 그런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진짜 하나님의 거룩한 행위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간의 격차입니다. 즉 인간으로서 도저히 해내지 못하시는 것을 행하심으로서 인간과 대비해봐서 거룩하지 않을 수 없는 분으로 등장하시는 겁니다. 보통 인간들이 인간들과 비교할 때 염두에 두는 선행이나 착함이란 어디까지나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능력 범위안에서 따지게 됩니다.


그래서 결론 짓기를 "우리 둘 중에는 역시 내가 너보다 더 훌륭한 존재이다"고 결론 내립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들 끼리의 비교에서 만들어낸 거룩이라는 뜻을 가지고 그대로 하나님에게 적용시킬 수는 없는 겁니다.


즉 "하나님은 훌륭하다고 소문난 인간 보다 몇 배나 더 훌륭할까?"라는 물음 조차도 성립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의 구원 작업은, 사람에 대해 아직 태어난 적도 없기에 선이나 악을 행할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한 자를 가지고서 해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9:10-13에 보면,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을 가지고도 인간들은 여러 가지 점에서 하나님의 불합리한 점을 따질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내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가 제대로 성립하려면 대상이 먼저 존재하고 그 다음에 그 대상에 대해서 사랑과 미움을 결정지어야 할 텐데,


분명히 이 로마서 9장의 말씀에서는 아직 그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이런 마음을 결정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대상도 없이 단지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과 미워하고자 하는 마음부터 먼저 시작한 셈이 됩니다.


달리 말씀드려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하고 싶은 대상을 삼기 위해 사랑의 대상을 창조하셨고, 자신의 미움의 마음에 합당하게 부합되도록 즉 내 미움을 마음껏 받아보라고 미움의 대상자를 창조한 셈이 됩니다.


그렇다면 에서의 입장에서 봅시다. 미움받기로 작정된 에서가 바라본 하나님에게서 거룩하고 자비로운 하나님으로 비치겠습니까? 도저히 그럴 리 없을 것입니다. 에서 자신의 의지나 행위나 선을 향한 집념같은 것은 완전히 무시당한채 오로지 저주의 대상이 되기 위해 태어나야만 하는 자기 입장을 에서는 어떤 것으로 방어할 수 있단 말입니까?


자신을 저주스러운 지옥 일원의 일부로 만드신 그 하나님을 과연 합당하고 거룩이 충만하고 정당한 하나님으로 여기겠습니까? 도저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야곱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야곱은 하나님의 사랑의 진수를 접하게 됩니다. 자비의 극치 안에 놓여져 있습니다. 자신의 행위와 전혀 무관하게 사랑을 받게 된 대상이 되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모든 행위에 대해 찬동하고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더군다나 같은 인간이면서도 단지 저주받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에서의 처지와 비교하면서 야곱은 하나님의 그 원대하고 특수한 계획에 감탄을 금치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거룩하십니다. 감히 인간들이 상상하지도 못할 거룩하신 행위를 실행에 옮겼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결코 다음과 같이 고백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사랑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생각하면 정말 기쁘고 감사할 일입니다마는,


제 형 에서를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제 마음이 편치못합니다. 따라서 제 마음의 소원이 있는데 제발 우리 인간들이 알고 있는 그런 수준의 자비와 거룩을 행사하셔서 비록 형 에서는 택하심을 받지는 못했지만 어떻게 제 청을 들어주셔서 그도 나처럼 구원받게 하옵소서."라고 말입니다.


만약 그렇게 야곱이 나온다면 이는 야곱이 하나님의 차원에서 거룩을 이해하고 있는 자가 아니라 인간적인 이해수준에 머무는 셈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벧엘이 바로 그런 곳을 지적해주는 장소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벧엘이라는 장소를 야곱과 에서 사이를 따로 분할 관리하겠다는 거룩한 의지를 드러낸 장소로 보시고 그 일에 대해서 확고히 하겠다고 사랑을 받은 당사자인 야곱보고 제단을 쌓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거룩의 의미를 지속케 하기 위해 계속 야곱을 사랑하시고 인도하시려고 합니다. 벧엘은 바로 야곱의 야곱됨과 에서의 에서됨이 확연하게 분리되었음을 보여준 장소입니다. 하나님은 에서를 영원히 야곱 곁에서 떨어져 나가게 조치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거룩의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 7절에도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그가 거기서 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거기서 나타나셨음이더라" 즉 하나님은 결코 에서와 야곱의 공동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점을 바로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의 거룩을 아는 겁니다. 이것을 알 때만, "벧엘로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취지를 바로 이해하는 것이 되고 또한 "하나님은 벧엘의 하나님" 불렀던 야곱의 선언을 우리가 바로 이해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오로지 야곱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씀드려서, 야곱을 이스라엘로 변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창세기 36:10-15에 보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 가시는지라 야곱이 하나님의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야곱 때에는 형 에서와 따로 관리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알게 된 것이 거룩한 하나님의 문으로 손색이 없었습니다.


이제 이 야곱 식의 생각은 이스라엘 식의 생각으로 바뀔 때가 되었습니다. 이 바뀜이 벧엘이라는 장소에서 새로운 계시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어떻게 바뀔까요?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그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특정한 공간이나 장소가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행위를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로 바뀐 이제는 이스라엘이라는 몸 자체가 하나님의 축복의 문으로 달라졌습니다. 즉 축복된 민족이 야곱의 허리가 아닌 이스라엘의 허리에서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


이 사실이 또한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하심의 효력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들은 어떤 이름으로 바뀌어야 할까요? 우리 성도의 이름은 '그리스도의 소유'로 바뀌었습니다. 야곱의 허리에서 복의 후손들이 나오듯이 이제는 예수님의 허리에서 예수님께 속한 백성들이 하늘의 별같게 바다갓의 모래 같게 쏟아져 나온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구원받는 백성들의 등장은 전부 오로지 하나님의 일방적 선택 행위로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마치 야곱에게 찾아오신 벧엘의 하나님처럼 말입니다. 이들은 그동안 세상 알고 있는 인간적인 사랑이나 거룩이 아니라 새로운 각도로 하나님의 거룩과 사랑을 이해하고 있는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이 구별됨을 가지고 '거룩'이라고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열매요 작품인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슬픔의 아들
2003년 1월 5일
본문 말씀: 창세기 35:16-22

35:16 그들이 벧엘에서 발행하여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 길을 격한 곳에서 라헬이 임산하여 심히 신고하더니
35:17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말라 지금 그대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35:18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35:19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35:20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35:21 이스라엘이 다시 발행하여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35:22 이스라엘이 그 땅에 유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성경의 중심에는 예수님의 고통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의 고통은 어디서부터 오는 겁니까? 그것은 인간의 죄로부터 오는 겁니다. 인간에게 죄가 없다면 하나님의 고통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지적하기 위해 자신의 고통을 가지고 다가서시는 겁니다. 만약 이러한 하나님의 고통을 꼭집어내지 못하는 성경 해석이라면 헛수고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고통을 우회해서 고통없이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기 않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고 말들 합니다. 과연 누가 진정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고통과 함께 느끼고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이란, 함께 있는 인간의 죄로 인해 유발된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님 고통의 원인이 나옵니다. 즉 성도의 허물이 없으면 예수님께서 찔릴 이유도 없습니다. 그런데 흔히 사람들은 예수님의 찔리심을 보고서도 그 속에서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신의 잘못이나 허물을 염두도 두지 않고 단순히 예수님의 고통을 쳐다보고 있으니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참 안되었다. 우리는 이처럼 편하고 행복한데 예수님 혼자 불행하구나."라고 말입니다.


즉 예수님의 시련과 우리의 처지가 무관한 것처럼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이러한 오해가 오늘 본문에도 나옵니다. 야곱이라는 사람에게는 아내가 둘 있습니다. 한 사람은 레아요 다른 사람은 라헬입니다.


아내가 둘 있다는 것을 다복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남편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둘 사이에서 치열한 다툼이 있기 마련입니다. 야곱은 라헬을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비록 레아보다 후손을 못 낳아도 상관두지 않고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 라헬이 일찍 죽고 맙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야곱에게는 분명히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고 있다는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누구보다도 더 오랫동안 살아있어 함께 부부의 정을 나누고 싶었던 라헬을 하나님은 일찍 데려가고 맙니다. 이렇게 되니 라헬의 입장에서는 언니 레아와의 싸움에서 패배하는 셈이 됩니다.


평생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이 마땅히 자신의 권리처럼 여겨왔던 라헬은 자식을 낳으면서 그 자식으로 인해 자기 목숨을 잃게 되고 동시에 남편의 뜨거운 사랑과도 이별해야 했습니다.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라헬은 죽어가면서 낳게 되는 그 자식의 이름을 '베노니'라고 짓습니다. 즉 '슬픔의 아들'이라는 겁니다. 사실 그 베노니가 태어나면 그를 지극 정성 돌봐 줄 친어머니를 잃어버린채 살아가야 합니다.


뿐만아니라 그는 다른 어머니에게 태어난 숱한 형들의 구박을 한 몸에 받으면서 살아가야 될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자기와 같은 어머니와 태어난 형제는 오직 요셉 뿐입니다.


비록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게 되지만 유별한 사랑은 도리어 다른 형제로부터 미움과 질투의 대상이 되는 일입니다. 상상만해도 끔직한 불행한 일들이 새로 태어난 이 아이를 기다리고 있는 듯 합니다. 과연 이 아이는 비극적인 운명으로 생을 마감해야 할까요?


하나님과 함께 하심에서 오는 특혜나 아버지 야곱의 돌보심도 이 슬픔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수는 없는 걸까요? 그런데 난산의 현장에서 아버지 야곱은 그 자식의 이름을 전혀 딴 이름으로 돌려놓습니다.


슬픔의 아들이 아니라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그래서 '베냐민'이 됩니다. 오른손의 아들이란 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은 하나님의 오른손에서 나온 특별한 능력 발휘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 잃은 이 아이가 어떻게해서 엄마의 죽음을 보여주는 아기가 아니라 능력의 오른손, 즉 하나님을 보여주는 아기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그 점은 이 아이의 어머니와 다른 형제들의 어머니와의 투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비록 라헬은 죽었지만 라헬이 남긴 자식, 요셉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이 이 요셉에 대해서 얼마나 대단히 집착하고 사랑하는 점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창세기 37:3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야곱은 여전히 라헬편입니다. 그러니까 도리어 이 점이 화근이 되어 나머지 형제들이 이 라헬의 형제들을 무척 미워하게 됩니다.


급기야 요셉을 애굽나라 노예로 팔아버립니다. 즉 아버지 야곱의 눈에서 사라지게 만든 겁니다. 야곱의 입장에서 볼 때 사랑의 대상자가 없어진 것이 되었습니다. 라헬이 지녔던 아픔과 슬픔과 고통이 그대로 야곱에게 이전되었습니다. 야곱은 크게 웁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래도 라헬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베냐민이 아직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곱과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그 하나 남은 베냐민마저 야곱의 품에서 앗아가 버립니다.


그 과정에는 잃어버린 자식 요셉이 관여합니다. 요셉은 애굽의 종으로 팔려 간 이후 하나님과 함께 하심으로 애굽의 총리대신의 자리까지 오릅니다. 그러면서도 그와 같은 어머니의 혈육인 동생 베냐민이 잘 있는지 노심초사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요셉의 형들이 식량을 사러 요셉 앞에 나타났습니다. 요셉은, 자기 동생 베냐민이 잘 지내고 있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시므이를 볼모로 잡고 동생 베냐민을 자기 앞에 나타나도록 조치했습니다.


일단 베냐민을 보게 된 요셉은 이번에는 동생 베냐민을 볼모로 잡고 아버지 야곱을 애굽으로 오게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베냐민은 고난의 요셉과 고난의 야곱이 함께 만나게 되는 운반체가 됩니다.


그들은 고난 안에서 함께 만나는 것이 되고 동시에 야곱의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일을 조정했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베냐민은 마냥 슬픔의 아들이 될 수 없습니다. 고난을 매개로 하여 야곱이나 요셉이나 다른 형제들로 하여금 진정한 하나님의 참 모습을 알게 하는 역할을 맡은 자가 된 셈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십니다. 흔히 말하기를,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만사형통해 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평소에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소망이나 소원 속에는 고통이나 고난이 빠져 있습니다. 어느 누가 자진해서 고난과 고통을 찾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입장에서보면 하나님의 고난과 고통이 없이는 인간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를 파악하는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성도의 현실을 인도하시되 예수님이 당했던 현실속으로 데려 들어가십니다. 그속에는 외로움이 있습니다. 서러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가 봐도 비극이라고 느껴질 일들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전혀 희망없음이 상태입니다.


마치 요셉이 애굽의 종으로 팔릴 때, 장차 요셉이 총리대신이 되리라는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요셉 본인조차도 몰랐던 일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야곱도 몰랐던 일입니다. 야곱은 도리어 요셉에게 걸었던 모든 기대가 사라진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요셉은 이미 야곱에게 있어 죽은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은 함께 계셨습니다. 요셉을 총리대신 되게 하시므로서 형들이 지니고 있는 그 죄악을 낱낱이 드러내게 하십니다. 이처럼 고통받는 자를 통해서 구원될 자의 죄를 지적해 들어가시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방식이요 하나님의 함께 하심입니다.


다른 경우를 생각조차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은 함께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다 가짜 하나님이요 가짜 예수입니다. 마지막으로 로마서 8:26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 즉 성도와 함께 하신다는 그 하나님은 우리들의 마음 귀에다 쉴새없이 탄식 소리를 퍼붓습니다.


"이 철없는 것아. 네가 하나님의 고통을 알고 싶어 하는가?"라고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소원이 안 이루어진다고 얼마나 불평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고통은 이러한 우리의 죄 때문에 발생된 것임을 우리로 알게 해주옵소서. 한 시라도 성령의 탄식 소리를 놓치지 않는 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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