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호와라는 이름 2003년 11월 16일 본문 말씀: 출애굽기 6:1-7 6: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리라 사도행전 4:12에 보면,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곧 다른 이름을 부르는 자는 지옥간다는 것을 확실히 명시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름으로만 자기 백성을 건지고 저쪽을 저주하신게 좀 이상하게 보이지 않습니까? 여기에는 그만한 내력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건지는데 있어 애굽 나라를 그냥 곱게 두시지 않고 강하게 징벌하시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 백성만을 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모른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5:2에서 바로왕이 말하기를,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느냐"라고 강하고 나옵니다.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르는 것이 왜 그토록 저주받을 중죄가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 이름 안에는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만의 기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민족에게 신(神)이란 개념은 그 용어 하나로 다 통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조물주도 되고, 날마다 복을 주시는 분도 되고, 사람이 죽고 난 뒤에 그 사람의 행업에 따라 상과 형벌을 차별지어 내리시는 분도 됩니다. 따라서 '신'이라는 용어 하나만으로 충분합니다. 또 그 신의 이름이 무엇이냐 에 대해 궁금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 뿐인 신은 신 그 자체가 그 분의 이름이 되는 겁니다. 이름이란 이름을 부르는 쪽의 이해성 정리를 위함입니다. 만약에 자식이 하나 밖에 없다면, '내 자식'이라는 표현만으로 곧바로 지칭됩니다. 그러나 여러 명의 자식을 거느렸다면, '내 자식'으로 부족하고, '누구 누구'라는 이름을 따로 불러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름이란 차이성을 분명히 하는데서 발생됩니다. '저 신, 그 신'이 아니라 '나의 신'이 되기 위해서는 따로 '나만의 신'에게 붙이는 이름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름을 지을 때는, 그 대상의 기능성을 염두에 두게 됩니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동물들의 이름 짓기를 위임한 적이 있습니다. 이 때 아담은 그 대상 안에서 하나님의 창조성의 구별을 기준으로 해서 속성을 파악해 내게 됩니다. 그런데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짓고 부르면서 하나 느낀 점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갑자기 아담은 외로움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아보이지 않아서 아담이 잠든 사이에 또 한 사람을 창조해 냅니다. 여기서 아담은 그의 이름 짓기의 특기가 발휘됩니다. 자기 아내를 '여자'라고 부르게 됩니다. 자기 몸의 일부가 연장되어서 하나님께서 여성으로 만든 것을 아담은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따로 떨어져 있는 두 개의 객체라도 한 몸이 되는 겁니다. 이처럼 아담은 곧, 인간은 '이름 부르기'를 통해서 자기와의 관계성을 만들어 나갑니다. 이로서 '여성'은 '남성'을 위해서 존재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름을 지어준 자의 세계를 위하여 이름을 지음 받은 자가 존재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여자'라는 이름이 '하와'이라는 이름으로 바뀝니다. 즉 '생명'으로 바뀐다는 말입니다. 이 이름은 남편되는 아담이 지어준 이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따라서 '여성'은 남성 관리 하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관리 하에 놓이고 또한 그 이름에 담긴 기능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님께서 일하시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에 있어 예수님은 성도의 신랑입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는 신부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우리들은 주의 이름이 벌리는 그 기능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부가 갖게 되는 영광성이란 땅에서 차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차려져서 내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2에 보면,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름이란 그 고유의 기능성을 품고 있으며 그 기능성은, 그 이름을 부르는 관계로 인해 실시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시가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이 시인이 자기 책상에 놓인 꽃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는 꽃과 시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이 그 꽃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 꽃은 시인에게 '의미'가 되고 그 때부터 관계성이 성립된 것입니다. 즉 꽃이 시든다 싶으면 시인은 그 꽃에게 물을 줌으로서 그 꽃을 시인 본인에게 의미있는 꽃이 되게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제공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신의 이름을 부를 때 비로소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하나님 자신이 만든 이름 자체를 인간에게 던져주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으로 하여금 그 이름에 종속되게 하시고자 하십니다. 즉 인간이 자의로 제정한 신의 이름이 아니라, 신께서 자의로 제시한 이름이기에 인간이 오히려 그 이름이 갖는 기능이 적용되어야 될 대상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물론 인간의 경우와 하나님의 경우는 반대입니다. 사람이 지어준 이름이 아니라, 그 이름으로 불리워질 것을 요구하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다가오셨기에, 인간들이 그 이름을 불러줄 때면 이미 그 이름을 부르는 인간들은 하나님에게 의미있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시고, '아담'이라고 부를 때만 인간으로서 관계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지정해주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인간은 더 이상 자신만의 세계는 사라지고 이 때부터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시는 그 체계안에 참여되는 겁니다. 그 이름에 담긴 기능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자신의 전능하심을 드러내었습니까? 바로 언약에 의한 실시입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의 자식은 반드시 아브라함이 육이 그 한계성이 드러나는 것을 통해서 성취되어야 합니다. 즉 이삭은 아브라함의 자식이 아니라 언약, 즉 하나님의 약속의 자식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제단을 쌓은 것을 여러분들이 아실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고해서 갑자기 아브라함에게 초능력이 생겨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있는 자신의 능력도 무너지고 기대감도 무너져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약에서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덤 밖에서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이름을 부르면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군말말고 무덤 밖으로 살아서 나와야 하는 겁니다. 즉 성도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더 이상 그들 고유의 일은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벌리시는 일만 그들에게 덮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자신이 생각한 이름이 아니기에 모든 면에서 불가능함과 절망감을 느끼게 됩니다. 바로 그 때의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그 취지의 의미가 생성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오직 언약 성취에만 관심을 두고 일하십니다. 그 언약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의 만남에서 이미 주어진 바 있습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는데도 아무런 변화가 없으면 어떡합니까? 그런 걱정은 안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자기 백성에서 알렸을 때는, 이미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즉 새삼스럽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를 때만 하나님의 일이 성사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이름이 지니신 능력에 의해서 자기 이름을 부르는 이스라엘 백성을, 완전히 통제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이름은 곧 전능하신 하나님의 위력이 실려 있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신다는 말은, 인간들이 하나님이 이름을 불러서 일 한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직접 일하는데 인간들이 그 이름을 부르면서 일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만약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이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일하심의 내용이 되는 언약 밖에 존재하는 것이 되어 그 전능하심에서 오는 저주와 징벌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의 이름에 의해서 내부가 장악당하고 침투당했습니다. 이제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은 따로 없습니다. 오직 주의 이름으로 해놓으신 그 공로와 업적을 온 우주에 증거하기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직장이나 가정 생활에서, 남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채워주기를 기대하는 식으로 살지 마세요. 이제부터는 자기 앞에 놓인 세계를 빈공간으로 간주해서 주님께 받은 그 사랑으로 마음껏 채워나가는 식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나의 것'이 없고 모두 하나님께서 사명을 발휘하라고 마련해 주신 마당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일이 시작하고 끝맺음을 우리가 알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약속 6:7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찌라
교회 나오는 사람은, 자기 것과 하나님의 것을 나란히 갖고 있습니다. 평생동안 이 둘은 같이 갑니다. 사람은 하나님에 향하여 자기 것을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요청하게 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것'을 잊으라고 요구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소위 '우리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들을 하나님께서 늘어놓으신다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거부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신경은 온통 '나의 것'이 언제 달성될 것인지에만 눈독을 들이고 있습니다.
여러분 죄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살인죄, 간음죄가 죄의 전부입니까? 죄의 대표입니까? 아닙니다. 여호와에 대해서 아는 바 없이 그냥 그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자..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우리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찾아내어 봅시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칭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역사의 혹독함을 인하여 모세를 듣지 아니하였더라"
분명히 모세는 하나님의 명을 따라 하나님의 계획은 백성에게 전했습니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이 하나님의 계획에 마음 두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백성들이 제대로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들이란 피조물이기 때문에 기껏 한다는 것이 유에서 유로 변신하는 것밖에 못합니다. 즉 있는데서 있는 것을 조립하는 수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수준은 있는데서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없는데서 없게 하는 수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딴에 하나님의 전능하심의 솜씨를 믿는다고 자부하기에, 그 놀라운 능력으로 자신의 소원을 들어 줄 것을 고대했었습니다. 그런데 모세를 통해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소식은 그 내용으로 봐서 뭔가 조금씩 틀려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을 제거해 달라"라는 점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로왕을 쳐부수라는 말이 아니라 바로왕에게 귀염받으면서 이 애굽 나라에서 편하게 살게 해달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애굽 나라에서 나가야 한다는 것은 백성들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이디어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아이가 당장 가시를 빼달라고 엄마 한테 요구하니, 엄마가 하시는 말씀이, "오늘 밤에 너는 할머니 집에 가 자야 돼. 그는 그래야 될 운명이야"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시 빼달라는 요구는 전혀 먹혀들지가 않는 것입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생을 꼭 해야만 합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일부로 이스라엘 백성을 고생시켜야지만 하나님 다운 것입니까? 창세기 15:13-16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 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이 내용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필히 애굽이라는 나라에 가서 고생을 해야만 하고 , 1대도 아닌, 2대도 아닌, 3대도 아닌, 꼭 4대가 되어야 비로소 그 이방 나라에서 나와야만 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왜 이런 희안한 제안을 하시는 겁니까? 그냥 아브라함 자손으로 하여금 그 어느 민족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게 하시면 안될까요?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관심사는 약속의 내용만을 역사 속에 펼치는 것이지, 결코 아브라함 자손의 사정을 들어주는 것이 주관심사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구원될 자의 개인적인 희망 사항들은 전혀 하나님의 약속 속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연적으로 하나님이 약속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무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하나님의 약속에는 어둡고 자기 사정에는 밝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획 보따리 속에는 죄라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심은 이 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죄라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정작 구원받아야 될 이스라엘 백성들도, 여호와에 대해서나 죄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순전히 자신들의 사정과 연관시키는 것에서 그 속마음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따로 관리하시게 됩니다.
즉 죄를 죄로 드러내기 위한 작업에 나서십니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하면 죄가 죄로 드러나겠습니까? 갈라디아서 4:28-29에 보면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가 이 시점에서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왜 성령으로 따라 난 자가 꼭 육체로 따라 난 자로부터 핍박을 받아야만 합니까? 핍박을 안받고 따로 관리해서 조용하게 지내다가 천국가면 안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가지고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모릅니다. 하지만 마냥 모르고 있도록 허용하지는 않습니다. 수시로 자기 백성을 그 세상 가운데 심어놓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그 하나님의 백성을 두고서 자기네들의 속성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핍박을 하게 만드는 거죠.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들에게 보인 것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된 복음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이 몹시 귀에 거스리기에 사정두지 않고 핍박을 감행하게 됩니다.
이로서 세상의 정체는 탄로 났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도 계속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냥 자기 백성이 핍박의 대상이 되도록 그냥 방치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들을 건져 내십니다. 하지만 그 시기는 세상의 죄가 제대로 숙성하고 관영 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 문제입니다.
여기서 소위 하나님이 백성들이라고 자처한 사람들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무지성도 함께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반발과 원망과 아쉬움과 실망감도 연이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이 하나님이 백성들이 그동안 몰래 품고 있었던 죄악 덩어리들입니다.
그들도 자기의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야 합니다. 핍박 받는 것을 즐기고 좋아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백성은 자신의 괴로움을 구원의 하나님에게 호소하게 마련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차원의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고린도후서 1:19-20절에 보면,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님 안에서 '얼마든지 예'가 된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약속 이루기가 지금도 제대로 성취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결코 실패라든지, 실수라든지, 저지당함이 도무지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 점을 제대로 모르는 것이 죄입니다. 죄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윤리적, 도덕적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자기 기준을 가지고 불신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애굽이나 이스라엘 양쪽의 그 어느 누구도 감히 생각지도 못한 내용을 가지고 다가오신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이 감히 생각지도 못하고 감히 성취될 내용인지 짐작도 못하는 것을 가지고 죄를 지적하시는 겁니다. 이로서 우리 성도들은 인생을 살면서, 걱정이나 근심이나 염려할 자격이 아예 없습니다.
만약에 염려 걱정을 한다는 것은 곧 자기 것, 곧 자기 사정이나 하나님 앞에 늘어놓고 떼를 쓰는 꼴이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약속의 땅이란, 결코 인간의 반항이나 항변이나 원망 같은 것들이 일체 나타나지 않아야 될 세계입니다.
모든 것이 '예'가 된다는 이 사실에 입각해서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죄인 노릇을 해 왔는지를 절실하게 느끼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인도 받으니 모든 감사를 하나님께 드립시다.
『하나님 아버지, 부질없이 자기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원망치 않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입이 둔한 자 2003년 11월 30일
6:1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하나님의 일이 인간의 능력 부족으로 좌절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새삼스럽게 인간이 만들어 나가야 될 사항이 아니라 이미 전개된 상태를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지 때문입니다.
세상이란 변함이 없습니다. 한결 같습니다.
새 것이라고는 없는 이 세상에 새 것이 이미 마련되어 있음을 통보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사용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이 사실을 모르는채, 자기의 입이 둔하다는 핑계로 하나님의 일 하기를 주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나 세상이란 자신의 능력 여하에 따라 하나님께 인정 받고 아니받고가 아니라 애초부터 사람 외곽에 놓여 있는 그 어떤 세력에 의해서 운명이 결정되어 있습니다. 마치 우편배달부가 소포를 배달했다고해서 자기 공로를 내세워서는 안되는 입장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바로 왕에 내세우는 것은 모세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런데 모세에게는 잘못된 선입견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뜻이 제대로 전달되기만 한다면 바로왕이 군말없이 하나님의 백성을 풀어줄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모세 자신이 정확한 하나님의 뜻을 못 전달하게 되면 상대방 바로왕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못알아 들었기에 하나님의 백성을 안 보내줄 경우를 생각해 볼 때 그 책임은 모세 자기에게 돌아올 것을 걱정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큰 오산입니다. 모세는 지금 애굽 왕을 설득해야 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이 다스리는 이 우주의 처지를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훈계해야될 입장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애굽왕은 지금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심판 대상입니다. 예를 들어서 살인죄를 저지른 사람이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판결을 내리는 판사가 심한 말더듬입니다. 그래서 더듬 더듬 판결을 내린다고 칩시다.
그렇다고해서 사형집행도 더듬더듬 늦추어지거나 취소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 못했으면 이해 못한체로 그냥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겁니다. 왜냐하면 살인이라는 범행은 이미 저질러진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즉 모세는 바로왕 앞에 체포영장을 갖고 서 있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몰라본다는 죄명으로 말입니다. 출애굽기 5:2에서 바로왕은 분명히 이렇게 말합니다.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물론 바로왕의 입장에서는 모세의 말을 거역하는 것이 죄가 된다는 생각은 추호도 갖지 않을 것입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는 생각 뿐입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이런 모세의 위상을 갖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상대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검사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들은 새삼스럽게 하나님의 사람 만들겠다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왜 이 세상 사람들은 지옥에 가야만 하는지를 통보해 주는 겁니다. 체포영장을 지니고 서 있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인정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관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악마의 영에 장악당해서 살아가는 자들이기에 그들의 죄를 모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두 번째로 모세가 모르고 있는 점은, 모세가 전하는 바에 의해서 바로왕이 비로소 자신의 본색을 유감없이 드러내면서 동시에 모세 자신과 하나님의 백성의 실체로 같이 공개된다는 점입니다.
즉 애굽과 이스라엘은 서로 다른 기초를 갖고 있음을 바로왕의 관계성에서 서서히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 점을 모르고 여전히 그는 인간의 지혜에 대해서 미련과 아직도 긍정적인 생각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보통 전도라는 것을 할 때는 누구나 예상되는 전도 상황을 마음 속에 그리게 마련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친절하게 말하면, 저쪽에서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잘 대해줄 것이라"고 은근히 기대하면서 다가갑니다.
만약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람에게는 쉽게 전도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도, 그 쪽에서 과격하게 나오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죠. 그러나 실제로 전도를 하게 되면 온순하다고 짐작했던 상대가 갑자기 독기를 품고 나오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선입견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말이나 전도술이나 복음적 내용이 전혀 상대에게 안 먹혔다는데 대해서 불쾌감을 품게 됩니다.
사람이 뭔가 실패했다는 감이 들 때, 그 원망을 하나님에게 하게 마련입니다. 이로소 전도 받는 사람 뿐만아니라 전도하겠다고 나선 자신에게도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전도란 누가 하시는 겁니까? 오직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복음을 전할 때는 복음 전달하는 방식까지 복음적으로 실시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즉 복음을 전했다는 공로를 빌미삼아 복음 전하는 자가 자신의 은근한 노림수를 따로 챙기지 못하게 하시는 겁니다. 모세는 이런 점을 몰랐기에 그저 자기 편한 것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지혜 뿐만아니라 인간 자체를 공격하신다는 점을 모세는 알아야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19-21에 보면,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인간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가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습니다. 추호의 양보도 있을 수 없습니다. 반은 인간 지혜요 반은 하나님의 지혜로서 하나님이 구원이 성사되는 것이 아닙니다.
계시의 전부를 하나님의 지혜로 점령당해야 하고 계시 속에는 조그마한 인간의 지혜가 포함되는 것도 허용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지혜는 배척받아야 합니다. 즉 말발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2:4-5에 보면,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지혜가 스며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이유는, 하나님은 논리로 구원하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 일하심의 능력, 그것으로 사람을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28-29의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도 인간의 능력이 가미되어서 구원되었다고 소리를 못하게 막으시는 겁니다.
흔히 요즈음 교회 일을 한답시고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는 자신이 하는 일은 주변의 사람들이 안 알아줄 때 스스로 화를 내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겸손 자체를 안알아준다고 삐치고, 때로는 자신의 마음 낮아짐 자체를 주위에서 이용하고 있지는 않을까해서 화를 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이 스스로 내세우는 능력이란 모두 악마의 시험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이토록 못난 우리를 앞장 세우시는 이유는, 우리들의 못남을 통해 예수님의 홀로 이루신 공적과 업적을 널리 전파하기 위함입니다. 사람은 실패를 해야합니다.
30대 실패 다르고, 40대 실패가 다르고, 50대 실패가 다릅니다. 그리고 쭉 계속 자신에 대해서 우리는 실망해야만 합니다.
그래야지만 우리는 지속적으로 예수님의 사랑과 공로만을 증거할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입이 둔하다는 모세의 핑계에 우리가 동감하면서 우리들도 이미 실패자로서 인도받고 있음을 인정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군대 7: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찌어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이스라엘 자손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군대'라고 호칭하십니다. 과연 이들이 막강한 애굽 군대와 싸울 만한 처지에 있어 보입니까? 지금 이들은 애굽의 권력 안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입장에 있습니다.
도저히 싸움이 될 것처럼 여겨지지 않습니다. 본인들도 애굽의 군대와 싸울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그저 애굽 왕으로부터 자비와 은총만 구걸하는 처지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군대'라고 호칭하시고, 애굽의 막강한 병력과 전쟁을 치르게 하십니다.
그 의도가 무엇일까요? 사실 오늘날 성도들도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군대가 되어 있습니다. 악한 영들과 싸워야 될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교회 문만 열고 나가면 만나는 세상 속에서, 우리의 처신이란 그저 아부와 굽신거름으로 일관하게 됩니다. 그래야 세상 사람들로부터 생계에 필요한 재물이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영적인 거룩한 전쟁을 벌릴 겨를이 없습니다. 그런데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군대라는 이름이 합당할까요? 여기서 우리는 이 점에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전쟁 양상과 다르다는 겁니다. 세상의 전쟁은 힘 구축에 의한 전쟁입니다. 즉 힘을 많이 가진 쪽이 승리하게끔 되어 있는 전쟁입니다. 따라서 평상시에 끊임없이 힘을 비축해 놓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동물의 왕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동물들이 영원히 이 지구상에서 멸절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 다윈의 진화론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자연 속에서의 생명들은 본의 아니게 늘 생존을 위한 전쟁을 벌리게 되어 있고, 거기서 살아남는 자는 곧 '승리자'라는 말과 통한다는 겁니다.
이 동물의 왕국의 철칙이 인간 왕국에서도 그대로 통한다는 겁니다. 심지어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서구 2000년 동안 살아남은 것은 복음이나 진리 때문이 아니라 교회가 상대적으로 실력가나 권력가들 편에 서서 그들의 앞잡이 노릇을 해왔기에 상대적으로 무식하고 힘이 약한 자들의 힘을 마음놓고 갈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곧 진리가 아니라 교회나 국가가 가진 '힘' 그 자체가 곧 진리로 간주되는 것이 인간 사회라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참된 신앙이란 하나님과 그 개인만의 단독적인 만남에서 성사된다는 주장을 한 사람도 있지만 막강한 교회 권력에 의해서 그 사람은 비난 받고 사회에서 매장되어 버리자, 일반 대중들은 '역시!'라는 자체적인 판단에 의해서 교회라는 이름의 권력집단의 편에 돌아서기 일 수 였습니다.
과연 하나님 나라의 전쟁도 이런 식으로 진행될까요? 아닙니다. 출애굽기 14:14에 보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군대인 히브리인들을 향하여 "가만히 있거라!"고 명령하십니다. 과연 아무 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을 위인이 있겠습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로 구성된 하나님의 군대에 대해서 가만히 있기를 명령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군대'라는 호칭으로 불리우는 것은 다 하나님의 약속된 바가 있고, 그 약속된 바를 하나님께서 친히 나서시어 성취시키기 위함입니다.
창세기 32:1-2에 보면,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야곱 위에 내려왔던 그 군대는 곧 '하나님의 군대'였습니다.
즉 하나님이 벌리시는 그 전쟁을 수행할 천사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인간들이 하는 것이 아닐까요? 아닙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군대의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하나님편에서 담당하는 몫입니다.
천사들은 기계처럼 오직 하나님의 약속만 받들어서 수행하시는 분들입니다. 여호수아 5:13-15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왔을 때에 눈을 들어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이 대목은 마치 모세가 호렙산 떨기나무 앞에서 여호와를 만나고 땅에 엎드린 대목과 같습니다. 모세가 벌리는 전쟁은 모세의 힘으로 하는 전쟁이 아니라 모세에게 나타나신 '여호와의 이름' 되시는 분이 하는 전쟁인 것처럼 여호수아 장군이 약속의 땅에서 앞으로 벌릴 전쟁도 결코 여호수아의 이름으로 시작해셔 끝이 날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천사인 군대장관의 소관으로 벌어질 전쟁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속성이 이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종족의 존재를 통해서 구현되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군대'라고 하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6:14-17에 보면, "왕이 이에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매 저희가 밤에 가서 그 성을 에워쌌더라 하나님의 사람의 수종드는 자가 일찌기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을 에워쌌는지라 그 사환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에 반드시 천사들이 개입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전쟁을 수행하시는 겁니까? 그것이 모든 인류는 반드시 축복받을 자와 저주받을 자로 상호 구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9장 25-27절에 보면,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각각 나름대로 새종족의 시조가 됩니다. 그리고 그 종족들은 시조가 받았던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의 속성을 계속 잇게 됩니다. 이스마엘의 종족과 에서의 종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 16:12에 보면,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마엘 후손은 이 저주의 틀에서 도저히 벗어나지 못합니다. 또 창세기 27:39-40에 보면에서 종족의 운명이 나옵니다.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
이처럼 인간 세계는 무조건 축복 받아야만 하는 종족이 있는 반면에 무조건 저주받아야만 하는 종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종류의 종족 이외에는 아예 없습니다. 그렇다면 각자의 운명과 종족의 운명들이 이미 결정난 상황이라면 왜 이들 종족들 사이에서 전쟁이 벌어져야만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지는 축복이 결코 인간의 공로에 근거한 것이 아님을 확실히 해두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은혜를 모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운명은 자신의 힘으로 개척해 나가야 한다고 여깁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천국 백성의 운명도 힘 가진 자에 의해서 완전히 소멸될 것이 뻔합니다. 하지만 천국이라는 세계는 인간이 힘을 자랑하는 세계가 아니라 순전히 은혜로만 유지되고 영원토록 존속되는 세계입니다.
따라서 과연 천국 백성이라면 이 땅에서부터라도 은혜에 대해서 철저하게 의지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자녀라도 다들 한 성질합니다. 다들 고집도 있고 오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조건 축복을 받아야만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자기 식으로 돌진하다가, 결국에는 자신의 행위로 자기가 축복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준해서 축복을 받는다는 그 은혜성에 눈을 뜨게 되어 있습니다.
은혜성이란 다름아닌 예수님의 공로를 뜻합니다. 오늘 본문 4절에 보면, "바로가 너희를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더하여 여러 큰 재앙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찌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반드시 세상은 달려들게 되어있고, 하나님께 반항하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을 하나님이 백성들이 충분히 납득을 해서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의심치 말아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이 은혜로 인도하시는데 왜 우리들은 평소에 하나님의 대한 감사가 나오지를 않습니까? 다시 한 번 가만히 있으라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지팡이와 뱀 7:8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우리는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하나님을 찾아서는 아니되고 사명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는 분이지 행복을 보장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사명없이 사는 자들이 곧 불행한 분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지상에서의 행복은 어떤 식으로 보장받고자 합니까? 출애굽기 12:12에 보면,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린다고 되어 있습니다. 또한 그런 하나님 이십니다. 자 모세가 받은 사명이 무엇입니까? 사명이란 결코 모세 개인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모세의 개인적인 요구나 희망사항이 포함되지도 않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 혼자 창안하신 일에 대한 내용만 그 사명이 담기게 됩니다.
자... 여기서부터 평소에 우리들이 생활 습관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하나님 모습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자 할 때의 그 하나님과, 실제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려는 하나님과의 대단히 동떨어진 사이인 것을 우리가 알게 되실 것입니다.
우선 출애굽기 4:1-3를 봅시다. "모세가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지팡이니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것을 땅에 던지라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뱀은 곧 애굽으로 지칭됩니다. 그런데 왜 애굽이 뱀이 되는 걸까요? 그들은 각종 신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평가받기를 '뱀'이라는 평가를 받는 겁니다. 그들은 어떤 신을 섬겼을까요?
크눔이라는 나일강의 수호신이 있습니다. 하피라는 이름의 나일강의 영을 섬겼습니다. 나일강의 흐름을 조정하는 오시리스라는 신이 있습니다. 또 헤크트라고 하는 부활의 신을 섬겼습니다. 핫솔이라는 암소의 형상을 한 신을 섬겼는데 이 신은 많은 생산을 책임지는 신이었습니다.
아피스라는 신은 황소의 신인데 역시 다산을 원할 때 비는 신입니다. 므네비스라는 황소의 신도 있습니다. 그 다음에 하늘에도 신이 있는 그것이 바로 누트라는 여신입니다. 생명을 책임지는 신의 이름은 이시스입니다. 곡물의 수호신의 이름은 셋입니다. 그 밖의 태양신도 있는데, 레, 아텐, 아툼, 호루스 등의 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왕 자체가 곧 신이었습니다.
이러한 애굽의 각종 신을 노리고 그 신들을 징벌하고자 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이러한 하나님의 생각에 따라 그냥 불쑥 바로왕 앞에 나타났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들 신들에게 벌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무엇입니까?
쉽게 말해서 자기가 뭔가 각종 신들을 칠 자격이 된다는 말입니까? 사실 우리가 애굽 사람들을 한 번 이해하려고 해 보세요. 사람이라는 것이 신을 섬기는 목적과 이유가 어디있습니까? 다 자기 잘되기 위해서 섬기는 겁니다.
인간들이 항상 두려움과 한계에 직면합니다. 어떤 일을 할때에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보잘 것 없고 미약하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게 됩니다. 따라서 이럴 때, 인간이 나올 다음 행동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겁니다. 즉 인간이 신을 찾는 행위와 신과의 관계 속에서 보여주는 행위란 모두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신으로부터 도움을 얻기 위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제가 설교하면서 하나님과 모세 관계를 설명해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뱀을 치겠다고 나서고 모세는 그냥 얼떨결에 그 하나님의 요구에 의해서 사명자로 불려나온 것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뱀이라고 규정하시면 치시겠다고 나서는 그 대상이 다름 아닌 애굽 백성들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도 당연하고 상식적인 생활 태도 그 자체를 말합니다. 아니, 인간의 능력의 부족을 느끼고 각가지 신에게 하소연하는 것이 뭐가 그리 죄이고 나쁜 짓이라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어 그들을 치려고 하시려는 겁니까?
흔히 교회 나오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고, 예수님을 찾고, 성령을 찾는 이유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애굽 백성들과 같은 인식으로 신을 생각해서 도움을 받겠다는 태도로 섬긴다면 도리어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뱀과 같은 족속이라고 평가받아 멸망받을 것입니다.
출애굽기 4장에서 하나님은 애굽을 뱀이라고 지칭한 것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원래의 근본 악이 그동안 어떤 식으로 자기 모습을 갖추고 발전해 왔는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창세기 3:15-16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에 '뱀'이 나오는데 이 '뱀'과 싸움에 나서야 되는 자는 오직 '여자의 후손'이라는 하나님의 백성들 뿐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아예 뱀과 싸울 사명을 주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 뱀의 후손들이 하는 행위가 대표적으로 애굽 나라의 백성들의 행위라는 겁니다. 그들은 신을 찾지만 그 신을 찾는 목적이나 이유가 전적으로 자신의 안위와 행복과 안전과 보전을 위한 행위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뱀의 후손들을 척결하기 위해 사명을 받은 자들이 '여자의 후손'이라면 이 '여자의 후손'들이 갖출 자질이라는 것이 적어도 '뱀의 후손'과는 틀려야되고 달라야 된다는 것이 너무나도 명확한 결론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도행전 19:15에 보면,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미 악마도 자신의 적이 누군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외의 사람들은 아예 갈구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가만놔두어도 자기 부하들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여자의 후손들'만큼은 악마와 싸우기 위해 부름받은 자들이 되서 이점에 대해 악마도 단단히 벼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란 세상 사람들과는 결코 자신의 행복과 번영을 위하여, 살아가야 될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부터 악마와 싸우기 위해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명을 부여받은 자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악마와 싸울 때 무엇으로 싸울까요? 어떻게 싸울까요? 출애굽기 34:10-17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 곧 내가 아직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치 아니한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 앞에행 할 것이라 너의 머무는 나라 백성이 다 여호와의 소위를 보리니 내가 너를 위하여 행할 일이 두려운 것임이니라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것을 삼가 지키라 보라 내가 네 앞에서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리니 너는 스스로 삼가 네가 들어가는 땅의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 그들이 너희 중에 올무가 될까 하노라
너희는 도리어 그들의 단들을 헐고 그들의 주상을 깨뜨리고 그들의 아세라 상을 찍을찌어다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너는 삼가 그 땅의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찌니 이는 그들이 모든 신을 음란히 섬기며 그 신들에게 희생을 드리고 너를 청하면 네가 그 희생을 먹을까 함이며 또 네가 그들의 딸들로 네 아들들의 아내를 삼음으로 그들의 딸들이 그 신들을 음란히 섬기며 네 아들로 그들의 신들을 음란히 섬기게 할까 함이니라 너는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찌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주 단호합니다. 무엇으로 단호한가 하면, '언약'만 고수하면서 단호하십니다. 언약을 모르는 것이 곧 죄입니다. 십계명 제 일 계명에도, "여호와를 섬겨라"가 아니라 "네게 다른 신을 두지말라"입니다. 이 애굽 사람들과 이 세상 사람들이 멸망당하는 것도 오직 '언약'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당해야 하는 겁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새언약'입니다. '새언약'이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오로지 그 '새언약'에만 관심두십니다. 인간들의 고민거리나 걱정거리나 괴로움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습니다. 관심조차 없습니다. 오로지 '언약'에만 매달리시는 분이 참된 하나님이십니다.
제가 방금 말씀드린 이 주장이 참으로 의아해 보이십니까? 여러분의 마음 속을 다시 정리 정돈시켜 보세요. 알약하는 입에 달랑 털어넣듯이 하나님의 '새언약'만 달랑 입에 털어넣고 살아가보세요.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이 얼마나 속시원하고 홀가분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들어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관심조차 없는 것으로 마음 속 가득히 품고 살아가신다면, 결국 여러분들은 멸망받을 애굽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자기 행복을 해결위해 찾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뱀의 후손이 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스스로 하나님을 이용해서 행복해지려고 하지 말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사명받은 자로서 살게 하옵소서. 홀가분하게 언약 중심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우리가 이해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재앙의 시작 7: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 백성 보내기를 거절하는도다
오늘 본문을 접하게 되면 모세와 바로왕의 관계가 뭔가 비정상적이다는 것을 짐작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쪽이 도리어 부자연스럽게 나오고 있다는 것도 알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막무가내로 자기 입장만 고집하면 대화 자체가 성립이 되지를 않습니다.
적당선에서 양보해 줄 것은 양보하고, 타협을 할 것은 타협을 하는 것이 상대를 배려하는 것임을 누구도 잘 압니다. 따라서 이런 패턴에 익숙해져 있는 현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모세가 바로왕에게 요구하는 것이라든지, 말하는 것이 너무 건방지고, 상대방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태도라는 것을 담박에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바로왕이 오히려 불쌍히 보이고 동정이 가지 않습니까? 그리고 모세와 하나님의 윽박지름에 넌저리를 내는 심정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왕은 지금 모세를 접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라는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의 인간의 태도에 대해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문제 삼고 계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범죄 이후 아담의 후손들인 인간들이란 늘 자신과 다른 자아상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등장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저일 먼저 자기에게 취한 조치는 바로 다른 자아상으로 위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방패삼아 자신의 실상은 그 뒤로 감추는 겁니다. 진짜 자아와, 본인이 되고 싶은 자아상을 같이 병행시키고 있는 겁니다.
이 버릇을 하나님을 상대할 때도 그대로 시행되니까 이게 문제가 되는 겁니다. 연출과 연기를 하는 것과 실제 본심 그대로 사는 것 하고는 큰 차이가 납니다. 사람들 사이에는 누구나 어느 정도 연출과 본심에 없는 행동을 하기 마련입니다.
이 세상에 자기 본심대로 사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아쉬울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 때를 대비해서라도 막 살 수는 없는 겁니다. 이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비록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우호의 여지는 남겨두는 법입니다. 이 방법이 사람 살아가는 요령이 되었습니다.
만약에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로와 모세가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서 만났으면 그저 막가는 식으로 과격한 언행은 삼갈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왕은 이점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과연 여호와 하나님에게도 타협이나 흥정이라는 것이 성립될까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요한계시록에 있어 하나님은 세 가지의 심판 시스템을 가동시키고 있습니다. 7인, 7나팔, 7대접이 바로 그러합니다. 왜 세 종류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가해지면 가해질수록 인간들의 반응은 더욱 더 과격해지고 교만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 좋다. 하나님이면 다냐? 그래, 갈 때까지 가보자 누가 이기는지 말이야"하고 나오게 마련입니다.
현대인들에게 있어 성경에 나와있는 각 지시에 대한 불만도 여기서 싹틉니다. "하나님이면 우리 인간을 함부로 윽박질려도 되냐? 얼마든지 좋게 이야기하면 우리 인간쪽에서도 얼마든지 잘 알아들을 수 있는데 …"라고 불만의 꼬리를 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우리는 바로왕의 입장을 먼저 생각해 봅니다. 모세라는 작자가 정말로 귀찮게 굽니다. 그것은 좋게 이야기를 시작하자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요구조건을 퍼부으면서 만약에 그 요구조건에 조금이나 이행되지 않으면 지팡이를 가지고 이 나라에 여호와 신의 징벌을 내리겠다고는 겁니다.
이는 횡포요 공갈이요 협박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면 좋게 나올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바로왕의 입장에서 보다 더 강하게 대받아칠 수 밖에 없는 거지요. 현대인들은 누구나 바로왕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호응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의 성경책을 보면서, 성경 구절 하나에 변명을 수십개나 늘어놓으려고 작정을 합니다. 즉 "하나님 말씀은 옳은 그른데도, 제가 바쁘다보니 그것까지는 못챙겼네요. 한 번 봐주소"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7:12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즉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바로왕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려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바로왕의 마음이 계속 강퍅함에 있어 업그레이드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여호와께서 배후에 그의 마음을 조절하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바로왕은 여호와 하나님에 손에 의해서 계속해서 강퍅해야만 하는 사명을 띠고 이 땅에 등장된 인물입니다.
그리고 그 후로도 하나님으로부터 파견되는 선지자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적들에게 등장되게 됩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의 17절의 말씀 때문입니다.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니 네가 이로 인하여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느니라 볼찌어다 내가 내 손의 지팡이로 하수를 치면 그것이 피로 변하고"
이 말씀대로 한다면 과연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변명과 위장술에 타협할 의사가 없으신 것입니다. 그대신 하나님은 인간의 위장술 뒤편을 공략하십니다. 인간들이 큰소리 칠만한 요소를 붕괴시키면서도요. 그렇다면 인간들은 더욱더 강퍅하게 나오겠지요.
그 여파로 인하여 지속적으로 하나님 편에서 파견되는 선지자들은 더욱더 망가지는 모습이 됩니다. 즉 한 대 얻어맞으면 그 맞은 자리를 파스를 붙이고 나오고, 또 다른 곳을 때리면 그 자리에 또 파스를 붙이며 등장됩니다.
그런 식으로 계속 망가지면 나중에 어떻게 될까요? 빌립보서 2:5-9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즉 하나님께서는 교회 성도에게 요구하는 것은 이 '십자가 마음'입니다. '십자가 마음'이라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인간들은 위장과 변장으로 가득한 마음을 품고 현대를 살아갑니다. 거기서 도출되는 것이 바로 '자기 의' 쌓기입니다.
교회 내에서의 분쟁도 다 여기서 비롯됩니다. "그동안 내가 주님을 위하여 이렇게 많이 봉사했다"는 겁니다. 따라서 상대방보다 더 높은 공적의 탑을 쌓아서 그것으로 자아상을 대신하려고 합니다. 바로 이런 현실에 대해서 우리는 자신이 공적의 탑을 무참하게 군화발로 밟아 허물어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마음'입니다. 즉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과 동등되시는 분이지만, 우리들의 교만됨 때문에 비참하게 망가진 분으로 우리에게 최종적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따라서 좋게 이야기하면 어느 정도 정치적인 흥정이나 협상의 가능성으로 인해 유동적인 조건을 바로왕 쪽에서 제시할 여지가 있는데 그 여지조차 모세쪽에서 아예 차단하는 느낌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도저히 수용못할 발언을 일방적으로 퍼부어놓고서는 그 제안에 수용하지 않았다고해서 지팡이를 강물에 펴니 갑자기 강물이 피가 되어 버렸고, 이번에는 호수 위에다 펴니 그 호수물을 떴던 일반 가정집 부엌에 있는 그릇에 담긴 음료수마다 모두 피가 되어 버렸습니다.
자.. 인권적인 차원에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고집이 센 사람은 바로왕이지 애굽의 일반 가정집에 있는 철모르는 애들이 아니잖습니까? 그런데 고통을 누가 당하는가? 바로왕 뿐만아니라 모든 애굽의 사람들이 다 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왜 이리 확대시키는 겁니까? 그것은 나중에 히브리인들이 애굽을 빠져나올 때, 애굽인들 간에 맺었던 각가지 인간적인 관계 마다 여호와만의 속성이 스며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인간과 인간 관계보다 더 월등하고 근본적인 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비단 모세만 알고 바로왕만 알아서는 아니되고 전 애굽 백성과 히브리인들이 다 알아야 될 사항입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의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무엇을 기본으로하여 일을 벌리시고 성취하는지 모든 인간들이 다 알아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다 강퍅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누가 이 지경으로 만들었습니까?'라고 물을 때, 바로 우리의 위선과 가증됨 때문에 그러함을 우리가 알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피 재앙 7:20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행하여 바로와 그 신하의 목전에서 지팡이를 들어 하수를 치니 그 물이 다 피로 변하고
왜 하나님께서는 피를 보이는 재앙부터 시작했을까요? 열 재앙 모두 다 피와 관련되어 있는 재앙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마지막 재앙에는 어린 양의 피가 나옵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4장에서 애굽으로 길을 떠나기 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여준 세 가지를 마무리 하는 기적에도 강물이 피가 되는 기적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모든 재앙은 전부 피 안에서 이루어지는 재앙이요 심판이라고 보면 됩니다. 즉 하나님은 '피'를 떠나서는 일을 하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강물은 애굽 사람들의 삶의 원천입니다.
사람들은 물없이는 못 삽니다. 인체에 있어 70%가 수분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물은 자연계에 있는 기본 물질의 대부분을 상호 교류시킵니다. 인체는 구성은 자연계의 물질계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의 먼지를 재료로 삼아 인간을 창조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물질이 자유자재로 조절이 가능할 수 있으면 물이 필수적입니다. 물의 조절능력에 따라 인간의 신체 속의 활동은 돌아가게 됩니다. 곧 사람은 물을 중재로 해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고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그 물의 기능을 붉은 색깔로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 피입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다"고 했습니다. 단순히 관찰에 의해서만 내린 결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하실 생명 주심과 관련된 사항이 피에 있기에 예언조로 하신 말씀입니다.
레위기 17:11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피가 죄를 속한다'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즉 '죄'라는 말이 나오고 '피'라는 말이 나오는데 과연 피가 죄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 이 점을 알기 위해서 창세기 4장의 경우를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거기에 보면,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힘든 풀이가 나옵니다.
10-12절에 보면,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대지가 피를 받게 되어서 그 때부터 대지가 저주를 내뿜게 되었는데 그 결과가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그 노력의 효과를 내지 못하고 뿐 만 아니라 그 피를 유발시킨 그 인간은 이 대지 위에서 어디를 가고 반김을 받지 못하고 거부당하는 인간이 된다는 겁니다.
과연 그럴까요? 창세기 3장에서 인간들은 에덴동산이라는 낙원에서 추방을 당합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인간들은 무엇을 의지해야 합니까? 순전히 대지가 제공하는 혜택에만 의존하며 살아야 합니다.
땅, 즉 흙으로 구성되어 있는 대지는 현미경으로 과학적 관찰에 의해 조사해보면 그저 비생명적인 죽은 물질들의 에너지 결합으로만 구성되어 있음을 압니다. 거기에 어떤 어르신네나 인물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문어의 다리 중에 하나를 치게 되면 문어의 몸통 전체가 아파합니다.
전체가 반응을 나타내는 거지요. 그렇다면 대지의 한 모통이를 치면 대지 전체가 들썩들썩 들고 일어나는 겁니까? 대지가 살아있는 생물체입니까? 가이아 이론을 주창한 사람들은 그렇게 주장합니다.
가이아(Gaia)는 희랍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인데 지구가 하나의 생명체라는 가설을 러브록이라는 사람이 1978년에 펴낸 '지구상의 생명을 보는 새로운 관점'란 책에서 전개했습니다. 이것을 가이아 이론이라고 합니다. 지구와 자연와 인간은 모두 한 덩어리로 움직이는 저절로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겁니다.
상당히 성경적으로 보이십니까? 여러분, 변화하고 움직인다고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이 제시한 원칙과 원리에 부합되어야 살아있는 겁니다. 어쨌던 인간이 부대끼며 의지하며 살아야 될 이 대지는 그냥 무주공산, 주인없는 대상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지마저 하나님 손에서 관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대지 위에서 가인이라는 사람은 죄를 남기고 말았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만 가만히 지켜보고만 계실까요? 땅이 죄로 장악당하고 덮여지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방관만 하시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5:29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즉 하나님께서 노아를 태어나게 하셔서 노아를 통해서 저주받은 대지를 정화하는 방책을 실시하여 그 결과는 땅에 평화가 찾아드는 조치를 감행하시겠다고 작정하셨습니다.
노아라는 이름의 뜻이 곧 '안식'이라는 말입니다. 그만큼 하나님 보시기에 땅은 노아 이전에 안식치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원인이 바로 가인이 남긴 피에 있다는 말입니다. 노아 홍수 이후 그때부터 땅은 안식을 되찾게 되었는데 그 모습이 이러합니다.
창세기 8:22에 보면,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바로 이러한 대지에 대한 축복을 위하여 노아는 같이 방주를 타고 지내온 짐승 중에 정결한 짐승과 정결한 새를 잡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는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이 지시에 의한 행위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앞으로는 물로서는 다시 대지를 저주하지 않겠는데 이는 인간의 날 때부터 근본적으로 악한 존재라 기대할 것이 없지만 이 정결한 짐승의 제물을 받고서 이런 축복을 지속시키겠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런 환경에 돌입하게 되었기에 반드시 따라오게 되어 있는 죄의 규정도 새로 설정되었습니다. 창세기 9:4-6에 보면,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 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여기서 하나님께서 심도있게 진행하시는 그 관심사에 대해서 정리해 봅시다. 일단 생명은 피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는 인위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생명에 손상이 있어서는 아니됩니다.
만약 생명이 손상이 일어나 피가 바깥으로 쏟아져 땅에게 주어지면 그것을 '죄'라고 간주하겠다는 겁니다. 일단 죄가 발생되면 대지는 곧장 하나님의 징벌의 수단으로 작동에서 그 죄의 원인자를 가만두지 않고 저주를 퍼붓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대지의 저주스러움은 하나님의 조치에 의해서 원상회복이 되는데 여기에 동원된 것이 하나님이 거룩한 희생제물의 피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죄에 대한 규정은 이 거룩한 의로운 피, 곧 생명을 훼손하느냐 아니하느냐로 결정짓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이 일련이 언약 원칙은 앞으로 진행될 모든 하나님의 일의 핵심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땅의 모든 대지나 인간들이나 생명체들이나 모두 하나님이 확정해 놓은 언약의 법칙 안에서 죽음과 생명을 결정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바로왕에서 나선 모세와 아론도 예외없이 이 원칙 속에서 활동하게 됩니다. 바로왕은 물론 이들 배후에 이러한 거대한 원리, 원칙이 움직이는 것을 알턱이 없습니다.
그 사람은 아예 여호와 하나님을 무시하고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바로왕 앞에서 어떤 식으로 여호와의 개성을 나타내 보이게 됩니까? 여호와 하나님에게 의해서만 생명이 유지됨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앞으로도 계속 그들이 생명에 위협이 되는 환경들을 유발시킬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육신적으로 어디를 의지하며 사느냐를 다 아십니다. 또한 인간들의 신선한 물의 공급이 자기 생명과 직결됨을 알기에 적절한 이름을 붙여서 강의 신들에게 예배하고 경배했습니다.
그런데 자기네들이 붙인 신은,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 앞에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방어할 그 어떤 방도도 없습니다. 마치 해독제 없는 독물을 마시우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애굽의 바로왕과 백성들은 그들이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이미 그들은 여호와의 세워놓은 언약의 법칙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모세와 아론을 그들 앞에 파견시킨 것입니다. 하지만 약간의 숨통을 찾아내면서 그들은 기어이 버티며 더욱 더 강퍅해졌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여전히 매사에 하나님께 불만과 불평으로 일관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원리는 내몰라라하고 자기 고집과 원칙을 앞장세워 하나님을 압박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원래부터 악한 우리를 하나님께서 이만큼이라도 이끌고 계시다는 그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은혜를 모독하는 그 죄조차 씻어버리게 하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음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그 어떤 티끌같은 죄가 있더라도 봐주는 법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심판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심판받아야 마땅하고 고생해야 마땅합니다. 이 대지가 우리의 원대로 잘 따라주지 않더라도 우리는 할 말이 없는 그런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바로 '언약의 피'입니다. 히브리서 9:22에 보면, "피없이는 사하심도 없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3:20에 보면, "예수님을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은데서 이끌어 내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피가 오늘날의 새언약입니다. 이 새언약 안에 머물러 사는 길만이 하나님이 무서운 심판에서 면제된 사람입니다. 교회가 무엇일까요? 교회의 정의를 내리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20;28절에 보면,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이 피로 시작해서 피로 끝남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피만이 전부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개구리 재앙 8: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바로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하나님과 바로왕의 다툼은 꼭 속좁은 치사한 다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한꺼번에 처단하실 수 있는데 자꾸 미루는 것 같고, 바로왕은 그저 개인적인 자존심이나 지탱하는 것 처럼 보입니다.
왜 하나님은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지 않으실까요? 그것은 그 틈바구에 끼어 있는 모세와 히브리인들에게 하나님의 힘의 깊이를 제대로 경험해 주시려 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늘 아슬아슬한 지경을 보내고 보내고 있습니다.
바로는 더 거세게 나오고 있고, 하나님도 일체 자신의 뜻 관철에 양보할 기색이 보이지 않습니다. 즉 바로와 모세가 정치적으로 양보해서 적당선에서 타협할 그 어떤 여지도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고 있습니다. 무조건 '내 백성을 보내라'입니다.
이로서 하나님과 바로왕 중간에서 처신하기 힘겨운 입장에 모세는 놓여 있습니다. 아무리 일주일 전에 하나님께서 놀라운 기적을 베풀어 주셨다 할지라도 그 때는 그때이고 지금은 또 새로운 난처하고 위기스러운 상황을 맞이해야 하는 것이 모세입니다.
즉 모세 개인이 갖고 있는 능력가지고 바로왕을 갖고 놀면 좋겠습니다만, 전혀 그렇지 못하고 모세에게는 순간 순간이 위기의 연속입니다. 오늘날 성도의 입장이 그러합니다. 교회 와서 설교 말씀 들을 때면 천하의 모든 진리를 다 깨닫고, 앞으로 어떤 사태가 터진다 할지라도 어느 시, 어느 곳이든지 장렬하게 죽을 각오로 무장되었다고 하지만 막상 세상에 나가보면, 여전히 차갑게 불어오는 것은 겨울 바람입니다.
여전히 혼자라는 생각이 우선 자신을 장악하게 됩니다. 너무나 두렵고 무섭고, 걱정되어서 간절이 겸손한 자세를 취하여 기도를 해보지만 마음의 안정은 커녕, 이 기도가 이러한 난관을 해결하는데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참 부질없는 헛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전면을 장식하게 됩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성도를 인도하신다는 점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가롯 유다와 여러 제자들이 예수님 곁으로 많이 기적을 목격했고, 또 실제로도 자신들이 기적을 베풀었지만 막상 자기 신앙에 위험이 닥쳐올 때는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그동안 도 닦은 테크닉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아무런 테크닉도 소용없습니다. 그 때 그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의 현실성을 확신케 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니면 어느 누구도 천국까지 건너갈 수가 없습니다. 자력으로 구원되는 수는 없습니다.
수 년간, 수 십년간 교회 봉사하고 헌금 한 것도 지나보면 현재의 신앙을 갖는데 있어 소용없는 짓입니다. 현재 신앙은, 현재 성령께서 어떤 은혜를 주시느냐에 따라 얻어지는 겁니다. 매일같이 주님만 의지하면서 인도함을 받는 수 밖에 없습니다. 신학을 통달했다고 해서 신앙생활에 있어 유리하다고 장담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식도 역시 하등 소용없습니다.
도리어 지식이 자신의 믿음 없음을 감추는 장식품으로 등장될 뿐입니다. 지식은 지식이고 신앙없음은 여전히 신앙없음 그대로입니다. 하여튼 모세는 하나님께서 시키시는대로 지팡이를 들이댈 뿐이고, 그리고 똑같은 요구조건을 바로왕에서 제시할 뿐입니다.
참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지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만 밤에 몰래 데려가면 그만인데 왜 이처럼 애굽 전역에 재앙을 내린답시고 분란을 일으켜야 하는 겁니까? 그것은 애굽 사람을 위함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기 백성을 위함입니다. 애굽에서의 구원은 앞으로 그들이 정착해야 될 가나안 땅의 구원 전쟁과 같은 겁니다.
양쪽 다 절대로 인간의 힘을 의지하지 말아야 할 전쟁입니다. 상대가 더욱 거세게 나오면 나올수록 인간적인 도피를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애굽 나라에 무슨 재앙을 내리기 위해 모세를 바로왕 앞에 세우십니까?
두 번째 재앙은 개구리 재앙입니다. 개구리란 큰 강이 있을 때 서식하는 동물입니다. 가나안 땅에는 개구리가 유명하지 않습니다. 애굽 땅에서만 유명합니다. 개구리는 애굽 나라를 보여주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개구리 재앙이 주어지기 전에는 개구리는 개구리는 강가에 살았을 것이고 애굽 사람들은 따로 각자 자기 처소에서 편안하게 구분지어 살았을 것입니다.
물론 바로왕은 왕국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구분이 깨어지고 온 애굽 나라 전체가 개구리판이 되어습니다. 이것은 혼돈입니다. 순식간에 질서의 무너짐을 애굽 사람들은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바로왕이 단호하게 모세와 여호와라는 신에게 대들고자 하는 것은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러합니다.
그들이 믿는 것은 인간의 힘에 의한 국가라는 질서체제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소중하고 은밀한 처소가 바로 왕이 거처하는 왕궁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내세우는 인간들만의 질서 세계입니다. 감히 일반 백성들이 출입도 못한 깊숙한 공간이 왕궁입니다.
이런 체계있는 권력 체제가 그동안 이 애굽 나라를 튼튼한 강대국으로 키워왔다고 자부하는 차입니다. 따라서 이런 탄탄한 배경을 믿고 그들은 설마 이 강한 질서 구조에 혼란이 생길 것은 꿈에도 생각못했습니다.
그동안 바로왕은 자기 권력을 바탕으로 히브리 민족을 못살게 굴었습니다. 애굽인들에게는 자유와 자율이 주어졌지만 히브리인들에게는 바로왕에 의해서 언제든지 질서가 파괴될 수 밖에 없었던 엉성한 집단으로 취급받았습니다.
노예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겁니다. 종은 함부로 주인이 사는 방에 들어갈 수 없지만 주인 뿐만아니라 주인집 아이들과 개까지도 언제든지 함부로 종의 은밀한 방에 들어가도 흠이 되지 않습니다. 마치 마당에 있는 개집을 마음대로 부수고 허물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히브리인들의 운명은 주인인 바로왕의 마음에 따라 허물어질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히브인 민족은 애굽 사람의 종이 되어야만 마땅한 하등 종족일까요? 아닙니다. 히브리인들 배후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이 명령 한 마디로 나일강 가에서만 서식해야 될 개구리들이 특공대처럼 온 애굽 사람들의 집을 수색합니다.
심지어 아무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바로왕 개인적인 거처까지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게 됩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에 의한 무장해제와 다를 바 없습니다. 과연 누가 노예며 누가 이 나라의 질서를 쥐고 있는 주인이라는 말입니까? 심지어, 하덕이나 떡반죽에도 개구리들이 올라와서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런 판국에 인간다움에서 오는 품위라든지 인격이라는 것은 찾아볼래야 찾을 수가 없게 된 지경입니다. 요즈음 경찰에서는 불시에 음주측정을 하게 됩니다. 음주측정을 하게 되면 남녀노소나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음주측정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체에 술이 들어가게 되면 더 이상 인간의 이성이나 감정이나 의지가 자신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술 기운이 지배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제정신이 아니지요. 제정신이 아닌 자를 두고 직업이니 직위이 권위를 따진다든지 인간의 품위를 논하고 윤리를 말해봤자 소용없는 짓입니다. 그냥 차에서 내려서 걸어가게 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권위라든지 질서 의식이라는 것도 스스로 권위를 가질만한 자질이 있다고 자부심을 가질 때나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주인이 되어야 될 나라가 온통 개구리가 사람의 모든 거처를 점령하고 말았으니 이는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이 애굽 나라는 개구리 나라에 불과하다는 이야기에 해당되는 겁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 이것은 자연적인 가능성에 의해서 생길 수 있는 우연적인 일이지 결코 배후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도적인 실행의 결과가 아닐 것이라고 보는 애굽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강퍅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8:12-14에 보니 그런게 아닙니다. "모세와 아론이 바로를 떠나 나가서 바로에게 내리신 개구리에 대하여 모세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의 말대로 하시니 개구리가 집에서, 마당에서, 밭에서 나와서 죽은지라 사람들이 모아 무더기로 쌓으니 땅에서 악취가 나더라"
즉 모세의 기도에 의해서 그많은 개구리가 일시에 죽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은 그동안 개구리의 침공이 자연적으로 우연히 생겨날 수 있는 무원인적인 사태가 아니라는 겁니다. 즉 애굽 나라 질서의 원상 회복은 더 이상 바로왕의 손에 달려있지 않다는 겁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바로왕은 끝까지 대들고 버팁니다. 왜냐하면 자기 나라 술객들도 그런 이적을 이르킬 수 있다는 점에서 애써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자기 기억에서 지워버리려고 합니다. 바로 이것이 강퍅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자기를 비롯해서 모든 이들이 다 하나님 앞에서 종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6:5-6과 9절에 보면,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줄 너희가 앎이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만 우리 속에 담겨 있다면 그것으로 우리의 소원은 달성된 것입니다. 신명기 12:5에 보면,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절망적인 상태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네가 과연 그런 상황속에서도 이 하나님의 이름의 공로를 인정하느냐?"를 물으십니다. 즉 하나님은 공로만 드높아지는 쪽으로 일하신다는 이 일관성만 깨우치신다면 온통 바로왕같은 사람들만 득실거리는 이 세상에서 나서도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인간 스스로 질서를 만들 생각말고,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그 질서에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 재앙 2004년 1월 11일
8: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에게 명하기를 네 지팡이를 들어 땅의 티끌을 치라 하라 그것이 애굽 온 땅에서 이가 되리라
하나님께서 인간의 신체에 대해 이렇게 직접 고통을 가하는 것에 대해 흔히 '너무 어른스럽지 못한 행위'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런 인간들을 괴롭혀서 뭘 할 것이며 약한 인간에 대해서 너무 심하게 고통 주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약한 대상을 괴롭히고 그것을 보고 즐기는 식이 되어 못 마땅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벌은 단순히 사람을 괴롭히겠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도리어 인간들을 가르치겠다는 차원입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당부하시기를, "선악과를 따먹는 자는 정녕 죽으리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도대체 '죽음'이라는 것이 뭔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그런 지시를 내린 취지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을 경험한 대상을 보고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면 아담은 또 새로운 세계가 있음을 통고받은 셈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 세계의 깊이를 인간 세계와 온 우주로 가르치려고 합니다.
어떻게 가르칩니까? 창세기 3장에서 내려진 징벌을 보면, 아담이나 하와나 둘 다 신체적 고통으로 주어집니다. 인간은 신체를 지니고 있는 이상 아무리 정신을 바짝차려도 신체로 가해오는 아픔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즉 죽음의 흔적이란 아무리 위대한 마음과 고상한 품위를 유지한다 할지라도 신체적 아픔에 굴복하고 얼굴을 찡그려야 합니다. 죽음의 흔적이란 비현실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입니다. 즉 죽음이란 그저 눈만 한번 감으면 될 문제가 아닙니다.
숨만 끊어지는 것만이 죽음이 시작이 아닙니다. 숨이 끊어질 때까지 인생의 전부가 죽음이 주는 고통으로 충만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비록 사랑하는 자녀라 할지라도 죽음의 흔적이 충만한 이 세상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내리시는 이 재앙은 애굽 사람들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 애굽 땅에 같이 사는 이스라엘 사람도 당합니다. 왜 아무런 잘못도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주신 재앙을 같이 받아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죽음의 흔적을 맛보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얼마나 귀한 것인 줄을 모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말입니다. 요즈음으로 표현하면, "예수님은 전세방도 없다"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하늘의 말씀만 하시는 분이라고 해서 결코 세상에 충만한 죽음의 흔적으로 자유로울 수가 없었습니다. 하늘의 좋은 말씀을 하시면 될터인데 왜 이 세상 고통에 흠뻑졌으셔야 하는 겁니까?
그것은 인간의 구원이라는 것이 신체성은 내 팽개치고 정신적인 구원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공생애 처음으로 그 임무를 부여받게 됩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성령님의 의도적인 작전에 의해서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악마와 마주치게 됩니다. 여기서 악마는 세 가지 유혹을 제시하는데 그것이 곧, 생존문제와 과시욕와 소유욕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 죽음의 흔적을 충만하게 남기게 한 원인입니다.
그런데 이 생존과 과시와 소유는, 보통 평범한 인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재미요 보람이요 축복이라고 여기는 것들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거리없이 무슨 낙으로 세상을 산다말입니까!
그러니까 흔히들 자칭 하나님의 자녀이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특별 대우를 해주셔야만 한다고 우기는 그 내막에는 실은 생명의, 흔적이 아니라고 죽음의 흔적들에 대해서 부푼 꿈을 안고 하늘의 복을 고대하고 있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정작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축복을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시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얼마나 자신들이 요구하는 것이 실상은 죽음의 흔적물들인가를 절실하게 깨닫게 하는 과정을 거친다는 겁니다.
소위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당한다는 고통과 괴로움은 그 원인이 실은 자신들이 여전히 죽음의 흔적을 열심히 찾고 있는 그 정신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신자들 불신자들 같이 고통을 겪게 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어떤 식으로 변화시키십니까? 열왕기하 5장에 보면, 나아만 장군이 나옵니다. 세상적으로 출세한 사람이지요. 그런데 갑자기 문둥병이 걸렸습니다. 인간은 곧 자기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는 죽음의 흔적입니다.
겉으로는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장군이라는 치장이요 실제로는 죽음의 세력에 의해서 마구잡이로 허물어져 가는 일반인에 불과합니다. 본질과 겉모습의 엄청난 차이를 나아만 장군은 보여줍니다.
그 때 그는 엘리사 선지자를 소개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작 엘리사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지시만 받습니다. 요단강 물에 7번 들어가서 몸을 씻어라는 겁니다.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가에 서는 순간 그는 너무나 실망했습니다. 왜냐하면 요단강물은 자기 나라 아람의 다메섹강물보다 더 더러웠기 때문입니다.
"깨끗한 물이 자기 몸을 깨끗케 하는데 유리하다"는 이 인식의 문제점은 과연 무엇일까요? 만약 몸만 낫겠다고 나선다면 이는 '생존-과시-소유'라는 죽음의 속성의 일부일 뿐입니다. 즉 "어서 몸이 나아서 살아야겠다"라는 의식이 그대로 남아 있는 이상 그는 여전히 죽음의 사슬에 그냥 묶인 인간입니다.
그러나 나아만 장군은 종들의 간청을 듣고 엘리사의 지시에 따릅니다. 이것은 곧 더 이상 자기 몸은 자기 것이 아니라 말씀을 내리는 분의 소유라는 것으로 전환된 순간입니다. 즉 병이 들었던, 병이 나았던 상관없이 더 이상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 자기 신체의 소유권은 하나님에게 있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전환이 곧 죽음의 흔적으로 충만한 이 세상에서 발생될 진정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런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상스럽게 일을 하십니다. 일방적으로 교회라고 불러놓으시고서는 천사를 보내어서 지시사항을 주시고, 만약에 이 지시에 따르지 않은 촛대를 옮기겠다는 겁니다.
여러분, 처음부터 교회를 시작케 하신 분은 하나님이신데도 불구하고 촛대를 냉정하게 옮기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어째서 앞 뒤가 잘 연결이 안되는 일이 일어나야 합니까? 쉬운 예를 들면, 길가던 사람을 불러 세워서 어떤 영화감독이 하는 말이, "엑스트라가 필요한데 시간 좀 내어주세요"라고 합니다.
그래 놓고서는, 그 엑스트라들에게 연기를 지시합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에 제 지시대로 연기가 제대로 안 나오면 나는 당신들을 해고 하겠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길가던 그 사람은 졸지에 감독에게 이용당한 셈이 된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자기가 영화 출연 시켜 주겠다고 먼저 이야기해 놓고서는 이제와서 연기 못하면 영화 출연 못세우겠다고 조치하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모든 소유권이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전달되는 도구가 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반드시 이렇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이 내리시는 재앙을 받아야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종이 맞는지?"를 다시금 생각해 봐야 니다.
끝으로 데살로니가전서 1:9-10절을 보겠습니다.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전 인류에게 노한다'는 내용이 나와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우리들을 그저 평범한 소시민일 뿐입니다. 크게 남을 해친 적도 없고, 해치고 싶은 의사도 없고, 남을 괴롭히면서까지 생존에 나서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그저 조용하게 열심히 평생을 소리없이 자세를 낮추면서 겸손하게 사는 자들입니다. 죄가 있다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존재한다는 죄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평범한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장차 분노하시는 때를 정해 놓으셨다는 겁니다.
이 사실이 과연 믿어지십니까?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만큼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죽음의 흔적들과 너무 안일하게 친밀을 유지하면서 그 덕으로 살아오고 있는 중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도 이런 우리들의 무지 때문에 당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런 고통을 당할 차례입니다. 하지만 이 고통을 통해서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우리 자신이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님을 발견한 그 즐거움을 지니고서 남은 여생을 살아갑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이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소품인 점을 놓치지 말고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파리 재앙 8:2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바로 앞에 서라 그가 물로 나오리니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계속적인 재앙이 주어지니까 제 3자의 입장에서 보면, 은근히 하나님에 대해서 불만을 느낄 만도 합니다. 약하디 약한 인간을 상대로 하나님께서 너무 하신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너무 심하게 다룬다는 감을 받을 만합니다.
자... 하나님이 일하시는 원칙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거룩한 하나님 본인을 건드리는 자는 봐주지 않고 멸망하시겠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타작마당입니다. 곧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집입니다. 따라서 자기 집 안에서 창조주에 대드는 자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방치 할 수 없는 법이지요.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인간들이 어떤 식으로 대들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은 이 땅에 특수한 민족과 국가를 생산해 내었습니다. 그들은 이삭의 후손들이요, 야곱, 즉 이스라엘의 후손들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스마엘이라는 친히 낳은 자식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는 자식으로 간주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자기 맹세에 의해서 출현된 이삭을 특별한 자식으로 결정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삭의 취지가 담겨있는 자식이 야곱, 곧 이스라엘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만이 특수한 민족입니다. 만약 그 어떤 민족이든, 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대드는 자는 곧 하나님께 대드는 자가 되는 겁니다. 왜 이들을 건드리면 안되는 겁니까?
저는 그 원리를 여호수아 6:26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로 무리를 경계하여 가로되 이 여리고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 하였더라"
여리고성을 일단 이스라엘 민족이 접수했다고 해서 그 여리고성은 이제 이스라엘 민족의 소유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말하기를, "구원될 때는 십자가 은혜이지만 이 이후로는 자신의 선행으로 구원된다"고 말들입니다. 이것은 곧 십자가의 은혜성이 구원 그 이후에 계속 영향을 미칠 수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여리고성 정복 원리에 따르면, 하나님의 의지로만 정복된 그 여리고성에는 그 어떤 물건을 갖거나 혹은 그 어떤 건축물도 건립할 수 없습니다. 즉 계속해서 인간이 관리할 대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만이 하나님이 지정한 약속된 자식이라면 이 원리가 이스라엘 민족 내부에 지속적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이스라엘 민족의 특수성에 시비거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용서치 않고 저주의 재앙을 내리시게 됩니다. 이것이 일관된 하나님 일하심의 원칙입니다.
오늘 본문 21-22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네가 만일 내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면 내가 너와 네 신하와 네 백성과 네 집들에 파리 떼를 보내리니 애굽 사람의 집집에 파리떼가 가득할 것이며 그들의 거하는 땅에도 그러하리라 그 날에 내가 내 백성의 거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곳에는 파리 떼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나는 세상 중의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
차별이란, 손해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있어서는 안될 악한 상황의 원인이지만, 이익보는 사람들에게 왠 횡재인가 하고 즐거워하게 만드는 원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차별이 구체적으로 진행되는 그 현장에 바로왕과 애굽의 술객들과 애굽 백성들과 이스라엘 백성이 함께 놓여져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바로왕 만큼은 아직도 여호와라는 신의 뜻을 거역할 수 있는 입장에 자신에 놓여 있다고 여깁니다. 그는, 인간들이란 그냥 그렇게 그런 자들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특별나게 신으로부터 차별 대우받을 사람이 없다고 여깁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애굽의 술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남들보다 많은 지식을 갖고 능력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지팡이가 뱀이 되는 일이라든지 물이 피가 되는 일이라든지, 개구리를 불러모으는 일에 대해서 그들도 어느 정도 따라 했습니다.
애굽의 술객들이 비슷한 결과를 내어놓으니 바로왕이 강퍅해 질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자기 앞에서 굽신거리는 술객들도 그 정도의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한다면 그 술객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자신으로서는 히브리인의 술객인 모세와 아론에게 굴복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겁니다.
인간들 사이에 있어 진정 차이나는 대우와 존경을 받을 자는 저 모세나 아론이 아니라 바로 바로왕 자신이라는 점을 더욱 분명히 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자기 빼놓고서는 모든 인간들은 다 자기 밑에 굴복 당해야 될 대상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바로왕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는 차별성입니다. 여호와으로부터 보냄을 입었다는 자들보다 자신이 더 우월하다는 겁니다. 그러나 바로왕은 착각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민족은 뭔가 그런 일반적인 종족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진실로 유일하게 살아계신 하나님이 직접 관여된 민족이라는 점을 알고 사실 경악해야만 합니다. 물론 요셉 때 있었던 선배 바로왕은 이 점을 압니다. 그래서 그 왕은 히브리인들에게 특별 유대를 해준 것입니다.
그러나 후대에 넘어와서 사정은 역전되었습니다.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세상의 뿌리가 어떻게 수립되었는도 관심도 없는 왕이 등장해서 자기 밑에서는 히브리 민족에게 주어졌던 특혜는 여지없이 제거되었고 오히려 다른 민족보다 더 차별적으로 구박을 받도록 조치한 것입니다. 즉 새로운 질서로 재편시키겠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정책으로 인해 하나님의 복으로 인도함을 받는 히브리민족 속에서 고통의 신음 소리가 울려나왔다고 그것이 하늘에 까지 상달된 것입니다. 이 부르짖음의 결과로 나타난 인물이 모세요 아론입니다. 모세는 지금 바로왕 앞에서 하나님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왕의 술객이나 졸개들이 바로왕 대신 나설 때는, 모세도 직접 자기가 나서지 않고 아론을 대신 내세워 기적을 수행했습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합니까? 바로왕의 부하들이 어느 정도 하나님의 기적을 따라 할 때까지만 그렇게 합니다.
이번 파리 재앙에 와서는 드디어 애굽의 술객들이 당황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모세와 아론이 배푸는 기적은 결코 인간들의 능력에서 나올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애굽의 술객들은 비로서 자신의 분수를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감히 나설 자리가 아님을 파악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왕에서 이런 부질없는 무모한 대결을 계속하지 말도록 종용합니다. 이처럼 애굽의 술객이 손을 들자, 비로서 나타나는 현상은 무엇입니까? 이 파리재앙부터 애굽 나라 내에서도 차별이 일어납니다. 애굽 백성들에게는 재앙이 내리는 그 순간에 히브리민족이 사는 지역에서는 재앙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 전까지 애굽인이든, 히브리인이든 구별없이 모든 재앙이 다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이런 재앙들이 그냥 우연한 자연 현상이 아니고, 그렇다고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아니라는 점이 확연하게 드러난 이상, 하나님의 재앙은 본격적으로 차별적으로 감행이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된 자와 그렇지 않는 자가 확실하게 구분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들 사이에 일어나는 거룩과 속됨의 차이입니다.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거룩과 속됨이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행위로 구별된다고 보지만, 정작 하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거룩과 속됨을 구분하시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내미시는 차별적인 사랑의 은총 여부로 가지고 거룩과 속됨이 갈라집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피조물입니다. 적어도 애굽 사람들 가운데 신앙심이 있는 자라면, 왜 히브리인들에게는 파리 재앙이 떨어지지 않는지 그 내력을 윗대를 거슬려 추적해 봐야합니다.
진짜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일을 어떤 식으로 진행시키는가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것이 시급한 문제임을 눈치채야 했습니다. 히브리인들이 하나님이 거룩한 백성이 되는 원리나 애굽 사람들이 하나님 백성이 못되고 속된 악마의 백성이 되는 원리가 오직 하나님의 자기 언약에 준해서 실시된다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구원받은 것이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일어난 일이 아님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즉 파리 재앙을 비롯해서 각가지 재앙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 당연히 자기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여기는 것을 이 역시 큰 오산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잘 섬기는 하나님은 마땅히 우리에게 재앙을 내려서는 아니된다"고 생각해서는 아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차별성은 우리 성도들 입장을 고려한 차별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차별을 하실만한 그만한 자격이나 권리가 있음을 증거하기 위한 입장에서 행하신 차별이기 때문입니다.
저주받아 지옥가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기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차별성이 우리들에게는 좋은 쪽으로 제공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은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제시한 차별을 우리가 즐겁게 반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바로의 타협안 8:25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 항상 내쪽에서 성실함으로 말썽 안부리고 '말 잘들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예, 올해에는 말 잘 듣겠습니다. 앞으로 착실하게 살겠습니다"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희생에 대해서 정말 제대로 아느냐?'하는 겁니다. 말이라는 것이 단순히 생각하면 의사소통을 위한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 주장을 상대방에게 강요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의 하나님은 이사야 45:15절의 말씀처럼, '숨어계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그냥 숨어 계시지 왜 나타나시는 겁니까? 인간으로부터 날라오는 죄로 인해 피해를 입는 그 상태가 점점 부각이 되기 때문이죠.
흔히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그토록 인간들을 구원하고 싶다면, 하나님께서도 그 어느 누구도 가볍게 납득이 되고 설득이 되는 식으로 대화를 하면 될 것을 왜 자꾸 연약한 인간을 구박하느냐고 의아해 합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의 의견을 들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 자신의 사랑이 사랑답게 고스란히 펼쳐진다는 조건하에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 방식이 바로 '희생'입니다. 즉 하나님은 항상 '희생'을 앞장 세우면서 일하십니다.
물론 인간 세상에서도 희생적인 면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생전부지의 사람을 위해 자신의 장기를 하나 떼어 준다는 일이나, 지하철에 엎어져 있는 외국인을 구하기 위해서 유학생이 대신 자기몸을 던진 것은 모두 숭고한 인류애의 발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뿐 만 아니라 자식의 과외비를 대기 위해서 연세많은 부모님이 새벽부터 밤 늦도록 추위를 무릅쓰고 생업에 종사하는 것도 감동할 만한 가족애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희생에 관해서는 누구나 그 가치를 무시하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인류애나 가족애가 동원 되었어도 과연 진정 그 대상자가 제대로 살고 영원히 영광을 누릴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아픈 자식을 위해서 부모가 자신의 모든 피를 다 뽑아 준다고해서 과연 그 자식이 정상으로 되돌아 올 수 있을까요?
그렇지 못합니다. 부모는 부모대로 죽고, 자식은 자식대로 죽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정성이 부족해서 그러합니까? 정성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사태를 제대로 알지 못해서 그러합니다. 동물이나 인간에게는 감정이 넘칩니다.
정상적일 때는 이성적으로 행동하더라도, 급할 때는 본능과 감정이 먼저 튀어나옵니다. 중국 철학자 맹자에 의하면 인간에게 네 개의 감정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겁니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이 그것이요, 수오지심(羞惡之心)이 그것이요, 사양지심(辭讓之心)이 그것이요, 시비지심(是非之心)이 그것입니다.
측은지심이란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요, 수오지심이란 부끄러운 일을 저질렀을 때 수치를 느끼는 마음이요, 사양지심이란, 남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마음이요, 시비지심이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을 뜻합니다. 바로 이러한 선한 감정은 인간이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따져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주신 천심의 결과로 나온다는 겁니다.
만약 이런 것들이 안나오는 자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인(仁), 의(義), 예(禮), 지(智)에 준해서 사는 것이 인간다움이라는 겁니다. 즉 이처럼 인간의 품성이 원래부터 선하다고 보는 쪽에서는 더 이상 '하나님의 덕분'이라든지,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을 하지 말라고 왜냐하면 인간들 속에 원래 담겨 있는 선한 기질을 마음껏 개발하고 그것을 발휘하게 되면, 그야말로 이상적인 좋은 세상이 얼마든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즉 사람이 죄 짓는 것은 그 사람을 너무 윽박질려서 화가 나서 반발심으로나온 죄이기에, 그 사람 주위에 좋은 환경을 조성해 주면 얼마든지 개과천성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사고방식이 바로왕이 갖고 있던 의식이었습니다.
즉 바로 왕은, 히브리인들이 왜 '희생 제사'를 드려야 하는지 이유는 모르는채 그저 그것을 허용한 것 조차 왕인 자기에서 나온 배려와 은총이라고 간주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이 세상에 인간들의 이런 성실함과 선함으로 유지되는 겁니까? 남을 불쌍히 여긴다고 그 사람이 문제가 근원적으로 해결이 납니까?
그렇지 못합니다. 도대체 원인이 어디있습니까? 그것은 인간이 현재 누구 덕분에 사느냐에 대해서 완전한 깜깜한 채 살아가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여호와께서 히브리인에게 나타나신 이유도, 그리고 바로왕에게 여호와 이름으로 다가서는 이유도, 다 지금 이 세상에 누구 덕분에 유지되고 있는가 하는 점을 분명히 해두고자 함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자신의 목숨을 가지고 나타냈습니다. 돈을 가지고 나타나시는 분이 아닌 이유는, 현재 우리가 사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돈 때문에 사는 것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피 때문에 사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전에 애굽 땅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7년 큰 풍년을 준비하셨고 또한 7년 큰 흉년을 연이어 준비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게 되면, 잘되면 당연한 일이고 못되면, 하나님 탓으로 돌리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을 보내어 결코 그런 것이 아님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7년 대풍년이 주어진 것도 하나님 마음대로요, 7년 대 흉년이 오는 것도 하나님 마음대로인데 그 모두를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대비해야 한다는 겁니다. 요셉이 이를 위하여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과연 요셉은 감사한 마음으로 대비했습니다. 애굽이 최고의 부국이 된 것은 결코 7년 대 풍년 때문이 아니라 그 풍년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7년 대 흉년을 통해서 더욱 더 그 풍년의 은혜에 대해서 고마워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이 건강하면 당연하고 아프면, 하나님 탓으로 돌리기 싶습니다. 건강할 때도, 자신이 죄 안지어서 건강하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것은 그 도중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해 주심이 은혜로 작용하고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바로 이런 마음가짐이 있을 때 설사 나중에 몸이 아프더라도 하나님 탓으로 돌릴 것이 아니라 나의 본질에 비해서 이런 아픔은 너무나도 지당한 것으로 곱게 받아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통해서 히브리인 민족은 장차 전 인류를 대표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제사장 역할을 해야될 민족인 것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다가 오시는데 그 은혜성이란 반드시 희생을 면전에 세우고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희생하여 재앙을 사전에 제거하는 방식은 이방종교에서나 행하는 제사입니다. 하나님의 희생은 사람이 제물로 바쳐진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뭘 바쳐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희생 제물의 첫째 원칙은, 제물에 '흠 없어야 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동물이 바쳐져서 사람이 사는 방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반대로 사람들이 뭘 바치고 아무리 많이 바친다할지라도 하나님께 만족을 드릴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이 짐승을 바치든, 곡물을 바치든 그 바치는 것으로 인해 사람들이 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 희생의 자리에는 사람말고 사람을 대신할 완전한 분이 위치할 자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처럼 자꾸만 희생을 드릴 것을 요구하시는 것은, 이 세상 만사가 모두 이 여호와께 바쳐지는 희생 사건에 초점을 두고 진행되고 있음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기존의 모든 국가와 모든 사건과 모든 인간의 노고나 지혜가 몽땅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저주하고 미워하고 싫어한 그 괴로움이 누적이 되어 되돌아온 증거물로서의 희생물입니다. 여기에 바로 하나님의 본심을 드러낸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생각할 때, 먼저 자신이 선함과 성실함을 주섬주섬 모아서 하나님께 드리면 그만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 속에서는, 하나님의 덕택이라든지, 하나님의 덕분 이라는 요소가 자기 속으로 밀려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 거부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은혜받은 인간들의 비난마저도 도로 용서함과 불쌍히 여김으로 되갚아 주시는 요소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희생'이라는 모습으로 등장됩니다. 앞으로는 제발 하나님을 염두에 둘 때는, 십자가로 나타나시는 하나님을 먼저 연상해 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것은 그 사랑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악질의 재앙 9: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다섯 번째 재앙부터 본격적으로 '죽음'이라는 단어가 붙게 됩니다. 죽음이 무엇입니까? 단순한 사라짐입니까? 왜 재앙이 종국에는 죽음으로 달려가는 겁니까? 사람들이 큰소리치고 믿는 것은 아직 목숨이 붙어있으니 나오는 에너지들입니다.
사람이란 자신들이 살아있는 것도 자신이 활동한 결과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참으로 바보같은 생각입니다. 일단 살아있으니 활동하는 것과, 활동하니 살아나는 것과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사람의 활동이란 살아있지 아니하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죽음이란, 그 앞서서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에 그 결과로 인해 주어지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앞서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그 말씀의 권능을 인정하지 않기에 결국 자신이 왜 죽는지도 모르는채 죽어가고 있는 입장입니다.
예를 들면, 선악과가 먼저 있기에 비로소, 인간 세계에 '죽음'이라는 단어가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만약 선악과 나무가 심지 않았다면, 인간에게 죽음이란 사실도 주어지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까 죽음이나 생명이냐 하는 것은 인간 스스로 관리해서 선택할 문제가 아니라 선행되어 있는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가축의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난데없이 가축들이 죽어 쓸어집니까? 그 선행해서, "내 백성을 붙잡아두지 말고 보내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기에 필히 나타날 수 밖에 없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자기에게 귀속되어 있는 현상으로 간주해서 어쨌든지 자기 선에서 처리하려고 합니다. 그 예를 제가 들겠습니다. 누가복음 12:13-21에는 두 종류의 말씀이 연이어 나옵니다.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이 두 가지 이야기의 공통점은, 모두 다 생명이라는 것이 당연히 주어지는 양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겁니다. 즉 일단 살아있는 것은 마땅하고, 이왕 살아있는 것 자신의 소원대로 해달라고 예수님에게 찾아온 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형이 독차지한 부모의 유산에 대해서 억울한 마음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사실 세상적으로 보면 참으로 억울한 일이 되겠지요. 완전히 형에게 다 빼앗긴 셈이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다면 그 억울함을 당한 그 동생의 생명은 원래 동생 것입니까?
예수님은 여기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도대체 탐심의 한계가 어디까지입니까? 마땅히 자기에게 돌아올 돈을 도로 찾겠다는 것도 탐심에 해당된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마땅히 돌아올 돈을 챙길 것이 아니라 마땅히 자기 것이 아닌 목숨에 대해서는 마땅히 자기 것으로 알고 있는 그 심보가 바로 탐심의 시발인 것입니다. 생명이란 돈처럼 "내가 소유하겠다"고해서 자기 소유가 되는 그런 것이 아님을 동생은 제대로 알아야 했습니다. 그런 것도 모르고 동생은 자기 소유될 것에만 집착을 보인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람이 가진 탐심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라 혼자 있을 경우에 생긴 탐심입니다. 사람이 혼자 산다고해서 죄 안짓는 것이 아님을 예수님은 똑똑하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 부자는 자기영혼이 자기 소유인줄로 압니다.
아니, 인간의 목숨이 자기가 만들어 집어 넣은 것입니까? 분명히 그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연적으로 원래부터 자기 것인양 자기가 관리하겠다고 나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 인생의 본색을 드러내시는 겁니다.
오늘 밤 네 영혼을 가져가면 이 많은 재산이 다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하십니다. 인간들이 낮에는 끊임없이 자기 소유의식으로 완전무장하더라도 밤이 되면 다 소용없습니다. 깊은 잠이 들면 더 이상 자기 몸은 자기 것이 못 됩니다. 원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데려가 버리면 결국 자신은 이 땅에서 사라져 버린 존재가 되었습니다.
즉 사실상 모든 인간은 이미 죽어 있습니다. 그 영혼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 자신은 더 이상 자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아는 자신의 몸에 종속되어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이란 자기에게 얹혀사는 신세입니다. 자기 몸이 사라지면 자아도 사라지는 겁니다. 물론 이 땅에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란 도무지 나의 것이라고 할 것이 없는 입장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애굽과 히브리인들에게 죽음이 어디서 오며 어떻게 오는 가를 알려주십니다. 죽음이란 여호와 하나님부터 옵니다. 다른 권력에서는 오지 않습니다.
욥기에 보면, 악마가 욥의 신앙을 시험하겠다고 나설 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허락하되 욥의 생명만은 건드리지 못하게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10:29-31에 봐도,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이 사실을 왜곡시켜서 마치 죽음의 권세를 자신이 갖고 있는 것처럼 인간에게 겁을 줍니다. 인간들은 그것도 모르고 실제로 죽음의 권세를 지니신 분보다는 세상 권력에 아부하기에 급급합니다. 바로 그런 류의 사람들이 애굽 사람들이요, 또한 히브리인들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차원에서 죽음이 오면, 어떤 차원에서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만남, 그 자체로 이미 죽음입니다. 하나님 보고 살 자가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살았다 하지만 인간들 끼리는 마치 산 사람들처럼 행세할련지 모르지만 일단 하나님 심판대에 선다면 이미 죽은 자임이 공개됩니다.
그런 죽은 자들에게 기죽고 겁내고 재산이나 권력을 가지고 비교 우위를 따질 필요조차 없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난데없이 애굽 전역에 있는 가축들에게 죽음이 찾아온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말씀이 그 전에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즉 죽음이란 먼저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나타내느냐로 성립되는 겁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그냥 흐지부지 끝나지 않습니다. 못 준수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죽음으로 다가오는 심판의 말씀, 저주의 말씀으로 작용합니다. 이런 하나님이 바로 모세를 보내신 하나님 인 것을 애굽 전역에 공표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죽음에서 면제되는 부류도 있습니다. 바로 히브리인들입니다. 그들의 가축은 죽음이 찾아들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좋은 점은 죽음의 권세를 더 이상 그들을 덮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교회가 바로 그런 곳입니다. 음부의 권세가 작용하지 못하는 집단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는 생명이 부여된 겁니다. 그런데 죽음이라는 것이 말씀에 불순종의 결과하면 생명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답게 그들 안에서 성취를 보여주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히브인들의 가축들이 안죽고 살아남았다고해서 그들이 천년 만년 그 애굽 땅에서 편하게 짐승이나 기르면서 살기 위한 이 땅의 생명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히브리인들이 훌륭해서 죽음에서 면제된 것이 아니고 그들이 대단한 능력을 가졌기에 생명이 찾아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창세기 32:30에 보면,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그 어떤 인간이 하나님과 만났는데 거기서도 죽지 않고 버텨내었다는 것은 이미 그 사람은 누가 뭐해도 영생 안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바로 이러한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친히 내리신 언약과 맹세와 약속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가지고 나타나시고 약속 안에서만 사람을 구원합니다. 이 약속이 믿어지는 자는 구원된 자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누구든지 인자의 살과,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않고서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옛날에는 선악과이지만 지금은 생명나무 되시는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믿으시고 당당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 입장만 생각하지 말고 죽음조차 이긴 그 약속을 믿게 된 것을 최고의 하늘의 선물인 것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술객의 한계 9:10 그들이 풀무의 재를 가지고 바로 앞에 서서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날리니 사람과 짐승에게 붙어 독종이 발하고
사람이 염두에 두고 있는 '하나님의 종'과 하나님께서 직접 보내시는 '하나님의 종'이 상호 다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술객들이란 바로 민중들이 인정해 준 제사장들이요, 자기네 신의 종들입니다.
민중들은 이들의 행동과 삶과 정신세계를 자신들보다 월등하게 높다고 간주해 주고 있습니다. 복장이라든지, 생활면에서 확실하게 다른 경지에 속한 자들이라고 보는 겁니다. 민중들 자신들은 맨날 돈만 생각하지만, 이들 '하나님의 종'들은 맨날 하나님만 생각하는 자들이기에 이들을 통하지 아니하면 하늘 나라 가는데 지장있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들 하고 있습니다.
이런 경향은 이 세상 모든 민족들이 공통적으로 내보이는 면입니다. 즉 보통 사람들인 자신들이 구원되기 위해 자기보다 더 특별난 자를 세워서 그 인물들을 통해서 신의 나라로의 진입이 가능하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위치에 있는 술객들에게 맨 먼저 여호와 하나님의 재앙이 징벌로서 내려칩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고린도전서 8:4-6절에 의하면,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분 밖에 없는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상과 그 제물에 대해 언급하면서 나온 말입니다. 즉 "실제로 우상에 해당되는 사항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어차피 우상이라는 없다고한다면, 남이야 우상을 섬기든 말든 관여하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점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우상을 거론하는 이유는, 바로 우상은 없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는 있지 아니한가 말입니다. 즉 우상은 처음부터 없는 허구이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바른 생활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주 예수님은 지금 그냥 계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전쟁을 유발시키는 중이라는 겁니다. 신약에서도 이런 취지로 우상이 거론되듯이 오늘 본문에서 마찬가지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파견되어 있는 이 애굽 나라도 우상 700가지가 넘는다고 합니다. 현재 일본에는 신이 10만 가지나 된다고 합니다.
애굽인들은 신들이 이 세상에 나타나 인간이나 동물, 식물, 암석, 조각상 등 여러 가지 것에 깃들인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깃들인 신들은 인간들의 질문에 대해서 응답하는 식으로 자기 정체를 드러낸다고 믿었습니다.
어느 신전이든 신들이 깃들이기 쉽게 동물을 길렀습니다. 그리고 신의 가르침을 듣고 싶을 때는 술객들은 동물들의 행동을 통해 해답을 받았습니다. 가령 예를 들면, 음식을 두 종류로 준비해 놓고 동물 앞에 가져 갑니다. 동물이 그 중의 한 음식에 먼저 입을 갖다대면 'yes'로 간주하고, 다른 음식에 입을 갖다대면, 'no'라고 간주한다고 제멋대로 정해 버리는 겁니다.
이런 계시 찾기를 통해서 왕위 계승 문제까지 해결한 적도 있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혹시 이렇게 생각하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우상을 믿든 여호와를 믿든, 애굽 나라가 최고의 강대국이 되었으면 그만이 아니냐"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상을 700여 가지나 믿는 나라 세계 최고의 국가가 되었습니다.
허구적인 것을 지어 내어서 믿는 나라 안에는, 진짜로 살아계신 하나님이 인도하는 민족도 같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 겁니까? 우리 어릴 때, 장가 안 간 삼촌하고 잘 놀지요. 또 삼촌은 어린 조카하고 잘 놀아줍니다.
그런데 그 놀이 가운데 이런 게 있습니다. 삼촌이 자기 힘이 얼마나 센지 과시하기 위해 자기는 땅에 납작 웅크리고, 그 위에 모든 조카를 다 올라 타게 합니다. 조카 친구까지 올라 타 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삼촌 자기가 도저히 일어나지 못하도록 위해서 꽉꽉 눌리라고 말합니다. 그래놓고 삼촌은 힘차게 기지게 펴면서 자기 등에 올라탔던 조카들을 우루루 땅에 떨어지게 만듭니다. 조카들 눈에는 삼촌이야말로 자기들의 예상을 초월하는 힘 센 존재로 다시금 각인되는 순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사실 전쟁을 끊임없이 시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전쟁의 상대자가 누구냐 하면, 현재 인류를 계속 장악해 오고 있는 이 세상 신입니다. 이 세상 신이라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지 않는 신입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히브리민족을 통해 언약으로서 나타내지만, 이 세상 신은 그 외의 모든 민족들의 '우상 숭배'의식으로 그 내막을 드러내게 됩니다. 자... 고린도전서 8:6절에 의하면. 만물이란 하나님과 예수님의 의해서 생겨났으며, 동시에 하나님과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존재해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해 봅시다. "그 팀의 선수들은 감독을 위해서 있다"는 말을 할 때에, 선수들이 전부 다 훌륭하다는 뜻으로 생각하시면 오산입니다. 물론 감독 말을 잘 듣는 선수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독 말을 안듣고 감독에게 대드는 선수도 있는데 이 선수는 맨날 감독한테 매를 맞고 벌을 서는 모습을 보인다는 겁니다.
따라서 말 안듣는 그 선수로 인해서도 감독은 자신의 감독다운 위상을 보이는 겁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이 술객들은 우상 전문가들입니다. 술객이란 보통 인간이 감히 해내지 못하는 비상한 능력을 지혜의 소유자들을 말합니다.
곧 인간의 지혜의 최고점에 위치에 있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인간들의 능력을 최고조로 발휘했을 때, 나타나는 성질들은 이 술객들이 다 보여주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 이들에게도 어김없이 하나님의 징벌이 주어졌다는 겁니다.
인간들로부터 본심들을 만족시켜 온 대표적인 집단인 술객들이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았다는 말은, 모든 인간들은 마땅히 하나님에게 징벌의 대상일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즉 그동안 인간들이 아무런 생각없이 무심코, 상식적으로, 마음을 합해서, 서로 마음이 통한채 단결심에서 벌려온 모든 일이 다 우상적인 일일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일반 사람들이 우상을 찾는 이유는, 우상을 섬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제대로 섬기고 행복한 입장에 놓이게 하기 위해 우상과 더불어 그럴싸한 인간을 신의 중매자로 부축이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세기 3:15절에 의해서 전쟁중이라는 이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자의 후손과 악마의 후손은 반드시 세상 끝날까지 전투를 벌려야 합니다. 그것도 모르고 우상에 대해서 별 적대심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자신에 주인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런데 성경 전체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상에 대해서 매우 단호하게 대처하십니다. 온갖 저주란 저주는 다 동원해서 우상섬기는 자에게 안기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히브리민족으로 하여금 심한 고생을 일부로 받게 하시는 이유는 한 분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월등하게 이기시는 분이라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결코 그들의 사적인 행복을 위해서 일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신약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유 때문에 이 세상에서 살면서 심한 고생을 겪도록 하나님께서는 인도하십니다. 그것은 그저 안일하게 세상 사람들처럼 자력으로 자기 인생을 살려는 그런 식이라면 그 안에서는 하나님 능력을 이용하려고만 하지, 진정으로 모든 것을 주 예수님에게 거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진 억울함과 심지어 거의 살기를 포기한 지경까지 예수님께서 일부로 이르게 하시는 이유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이 자신을 위한 인생일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을 마치 인간들이 기대하는 그런 '술객같은' 주님은 결코 아님을 확실히 해두시겠다는 겁니다.
인간은 원래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만 사랑합니다. 따라서 이들이 원하는 우상적 메시야는 예수님이 될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점을 보이기 위해서 성도들은 굴욕의 세월을 이 땅에서 보내야 합니다. 최후의 심판을 믿으면서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에는 한 분 하나님과 한 분 주님만이 실질적으로 존재하심을 믿게 하옵소서. 그리고 그 분의 전사가 되어 사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박 재앙 9:2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어 애굽 전국에 우박이 애굽 땅의 사람과 짐승과 밭의 모든 채소에 내리게 하라
오늘날에는 신약 시대이고 이미 예수님이 와 버린 입장에 있는데 왜 옛날 이야기인 구약을 펼쳐야 할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전부 구약의 여호와 자리에서 행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서 제대로 알려면 구약의 여호와께서 어떻게 일하시느냐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와 무관한 예수님은 없습니다. 가짜 예수입니다.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셨기에 때문에 인간적인 측면에서 예수님을 분석하자는 주장도 있지만 그것은 말도 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구약의 인간들이 하는 일이 아니라 구약의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의 연장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일관성'을 찾아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그 어떤 식으로 일관성을 나타내지 못합니다. 믿음이라고 장담하는 감정도 조석으로 차이나게 마련입니다. 연초에 결심한 것이 2월 달을 넘기지 못하고 무산되기 일수입니다.
하나님의 일관성을 놓쳐버리면, 우리 인간들은 맨날 하나님을 그 때 그 때마다 이용할 생각부터 갖게 됩니다. 즉 신에게 환심을 사서 신으로부터 복을 따 내고 싶은 심정으로 신을 찾게 됩니다.
이런 행위는, 하나님의 일관성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순전히 자기 욕망이 움직이는대로 형편따라 신과 관계하려는무질서의 일종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일관성을 나타냅니까? 하나님께서 우박 재앙을 내리시면서 그 이유에 대해서 먼저 언급하셨습니다.
그것은 17-18절에 보면, "네가 여전히 내 백성 앞에 자고하고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느냐 내일 이맘때면 내가 중한 우박을 내리리니 애굽 개국 이래로 그 같은 것이 있지 않던 것이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박 재앙을 내리시는 이유는, 여호와 앞에서 자기를 낮추지 않고 높였기에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가를 분명히 보여주고자 우박 재앙을 내리신다는 겁니다.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바로왕의 마음을 낮추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낮추지 않은 자에게 어떤 저주가 주어지는가를 보여주는데 목적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의 마음 교정이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됨을 보여주는데 목적이 있는 겁니다.
이것이 14절과 16절에 잘 나와있습니다. "내가 이번에는 모든 재앙을 네 마음과 네 신하와 네 백성에게 내려 너로 온 천하에 나와 같은 자가 없음을 알게 하리라 ...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여기서 '너'라고 지칭되는 인물은 바로 왕입니다. 즉 바로 왕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매맞는 역할을 하기 위해 세움을 입었다는 겁니다. 같은 인간이라는 동지애 차원에서 볼 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얼마나 인간들의 분통을 살 일인지 모릅니다.
이런 하나님의 행위를 곱게 받아 드릴 위인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자기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가치가 결정된다고 믿듯이 그것을 그대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게도 건방지게 적용시키려고 합니다.
따라서 인간들의 눈으로 볼 때에 하나님께서 너무 과하게 행위하시는 걸로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바로 인간들의 '원초적 본능'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자신의 일관성을 포기 하지 않습니다.
신약의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그 일관성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은혜줄 자에게는 확실하게 은혜가 돌아가게 하고, 은혜가 돌아가지 않을 자에게는 은혜가 돌아가지 않도록 일을 하시는데'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박을 내리시는 이유는, 애굽 나라를 망쳐버리기 위해서입니다. 인간들 생각에 자연이란 저절로 움직이고 저절로 조정하면서 변화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자연의 안정적인 질서를 관찰하면서 인간은 적응하며 사는 기술을 스스로 터득했다고 확신한 것입니다.
즉 이 세상에서 믿을 것은 자신들의 판단력 외에는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대자연은 사실 인간의 말을 고이 듣고 유지해 온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일관성을 실행하기 위해서 움직여 온 것입니다.
오늘 본문 26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의 거한 고센 땅에는 우박이 없었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현재 이스라엘 자손은 마음을 낮추거나 높이거나 할 필요도 없이 우박 재앙은 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바로왕에게는 철저하게 '마음 낮추기'를 요청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따로 요구하는 바가 전혀 없습니다. 이것은 애굽 민족와는 다른 관계가 이스라엘 사이에 연결되어 있음을 말하는 겁니다. 즉 지금 분명 하나님께서는 바로왕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어떤 하나님인 가를 알린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알림' 중의 하나는 심판의 관계가 아니라 은혜의 관계도 여호와 하나님을 통해서 제시된다는 것을 애굽 땅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려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예수님이 오신 경우에도 그러합니까? 왜 오늘날에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우박이 떨어지지 않는 겁니까? 과연 하나님의 일관성이 오늘날에도 적용이 되는 것일까요?
데살로니가후서 1:7-9에 보면,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구약 바로 왕과 그 애굽 나라에 우박이 떨어진 것은 신약에 와서 예수님의 복음에 복종치 않는 자에게 떨어지는 범우주적 재앙의 예고편에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즉 국지적이 아니라 이제는 온 천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저주성이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방금 제가 출애굽기와 신약을 바로 연결했는데 그렇다면 그 중간에도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까? 일어납니다. 사무엘상 6장에서 7장의 내용을 보면 잘 나타나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인간들의 오해가 가득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 측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언약궤의 위력을 한껏 과시하고 싶었습니다. 즉 언약궤가 있는 한 우리 이스라엘이 승리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오산이었습니다. 언약궤는 언약궤대로 빼앗기고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번에는 블레셋이 이긴 것일까요? 아닙니다. 블레셋 민족들은 자신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다곤신에 의해서 체포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다곤신전에 두었는데 그 때부터 다곤신전이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곤신의 손목이 부러지고 맙니다. 그리고 다곤신의 코잔등이 언약궤 앞에 꼬꾸라지게 됩니다. 블레셋 사람은 이 언약궤를 감당을 못합니다. 언약궤가 있는 곳, 가는 곳마다 재앙이 늘 넘쳐납니다. 마치 애굽 나라에 재앙이 넘쳐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민족은 이 언약궤를 고이 이스라엘 측에 넘겨주게 됩니다. 그 뒤에도 블레셋 나라는 이스라엘을 침공합니다. 이번에는 사무엘 선지자가 온 백성들을 모으고 그냥 조용하게 금식하는 틈을 타서 블레셋이 공격해 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하나님이 아시고 하늘에서 큰 재앙이 떨어져서 즉 갑자기 우뢰가 떨어져서 그들이 대패를 했습니다. 이런 승리를 위하여 이스라엘 한 것이 뭐가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무능력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랬는데 여호와 하나님의 일관성으로 인해 은혜줄 자에게는 은혜를 주고, 은혜 대신 저주가 돌아갈 자에게는 확실하게 저주가 돌아가도록 조치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에게 추호도 양보할 생각이 없습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압력을 넣고, 또 이미 신자라는 신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변경시켜 보려고 해도 하나님은 요지부동입니다. 이미 확정된 일관성으로만 움직이십니다. 오늘날 예수님도 이와같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께서 어떤 입장에서, 그리고 어떤 일관성을 가지고 일하시는가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이것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면 인간은 지쳐서 예수님을 포기하고 나가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우리가 천국에 갈 때에, 결코 우리들이 남들보다 더 잘난 것이 있었다든지 아니면 우리가 확실하게 성실했다는 것이 근거가 되어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렇게 못난 인간도 구원되었음'을 온 천하에 널리 전파하기 위해서 우리가 뽑혔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단호한 믿음을 믿는 실수를 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인간에 대한 이해 9:27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모세와 아론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번은 내가 범죄하였노라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나와 나의 백성은 악하도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언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가 하면 하나님에 대해 견해를 말할 때입니다. '취중진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술 취하게 되면 본심이 나온다는 것인데, 사실은 본심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야성과 탐욕과 악독이 나오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본심이라면 옳은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란 이성으로 따지기를 좋아하지만 사실상 그것은 핑계이고, 따지기 전에 기분과 느낌과 감정의 포로가 된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자기 욕심에 대해서 제 때에 제대로 처리로 못하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자신의 욕망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행동에 나서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 욕망이 침투하지 않는 곳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 이 욕망으로 인간은 자아가 구축됩니다. 이렇게 구축된 자아는 왠지 하나님에 대해서 거부반응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설쳐봐도 전혀 동조해 줄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벌리시는 일에 대해서 모두 반대하고 나서고 싶습니다. 왠지 하나님에 관한 모든 것은 다 싫어지고 불쾌하고 느껴집니다. 그러면서도 인간의 머리와 지식과 교회에서 들은 설교는 이성적으로 남아 있기에, 지옥가지 싫어서라도 노골적으로 하나님에게 대들지는 않을 뿐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타고난 죄인입니다. 즉 인간 안에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죄 안에 인간이 놓여져 있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로 염색이 된 상태입니다. 시편 51편에서는 이것은 '죄 중에 태어났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죄 중에 탄생한' 겁니다.
이 죄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외에 모든 인간은 타인으로, 즉 나와는 직접 관련성 없는 대상으로 간주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되었든 누가 되었든지 말입니다. 하나님을 타인으로 관련되면, 그분과의 관계에 대해서 자기가 무슨 조치를 감행해야 될 필요가 있게 됩니다.
즉 그 분과의 관계 속에서도 그 분과 경쟁을 하든지, 아니면 굴복을 하면서 계속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은 계속 타인처럼 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대할 때 내 쪽에서 일단 손을 내밀면서 비로소 관계가 성립되는 타인처럼 간주합니다. 마치 친구에게 악수를 내미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다음에 상대를 내가 이길 것인가 아니면 내가 질 것이 아니면 전혀 상관없는 자로 처리하든지 그것은 자기 쪽에서 결정하겠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로 왕도 바로 이러한 인간의 속성을 유감 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27절에서 바로 왕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이번은 내가 범죄 하였노라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나와 나의 백성은 악 하도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 최종 모세의 답변은 이러합니다. "그러나 왕과 왕의 신하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아직도 두려워 아니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즉 바로 왕은 스스로 자신을 악하다, 범죄 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모세가 보기에 뭐가 빠진 상태입니까?
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이 상실되어 있다고 본 것입니다. 경외감이 형성되려면, 자신에 대한 방어 벽이 송두리째 날라 가 버려야 합니다. 마치 뜨거운 열기 앞에서 초에 새겨진 붙어있는 장식 모양들이 무용지물이 되어 흐물흐물 녹아지듯이 여호와의 말씀 앞에 자아의 모든 것이 녹아져야 합니다.
즉 다시 돌아서서 자아의 고유성을 주섬주섬 찾아내어 조립할 생각을 아예 먹지 말아야 하는 겁니다. 이래야 '경외'하는 말을 쓸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자주 나오고, 신학을 공부하고, 성경 공부를 빈번하게 한다고 해서 경외감이 절로 강렬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호와 말씀에 대한 경외성이 이 핑계, 저 핑계를 방패삼아 삭제해 버릴 가능성이 큽니다. 예를 들면, 사무엘상 2:30에 보면,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엘리 가정에 대한 솔직한 심정 표시입니다. 즉 엘리 제사장 가정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존경심이 완전히 메말랐다는 겁니다. 제사장이란 사실 백성들에게 모범적인 모습과 생활을 보여주어야 될 입장에 있는 자입니다.
제사장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닙니다.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 중에서 뽑게 됩니다. 그리고 제사장 되고 난 뒤에도 제사장은 백성들의 어른으로 간주되어 백성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도 인간인지라 머리나 이성으로 따져서 자신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욕망과 욕심이라는 감정에 의해서 구축되는 죄성을 절제해야 하는 처지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연적으로 건성과 형식으로 백성들의 눈을 가리는 위선적인 생활의 반복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제사장 가정의 철없는 자식들은, 제사장이 모범적인 생활을 해야 된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제사장이기 때문에 들어오는 각가지 수혜만을 챙기기 급급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모습이 사람들에게는 들키지 않지만 하나님에게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남들 보기에 경건을 가장한 위선적인 종교 행태가 하나님 보시기에 더 가증스러울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지키려는 모든 행위는, 하나님이 손길을 건방지게 뿌리치는 교만 중의 교만의 형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는 그것을 지적하는 겁니다. 시합에서 "졌다"고 꼬리 내린다고 해서 상대방에 대해 존경심을 갖고 있다고 보기 힘듭니다. 도리어 마음 내면에서 내심 복수의 칼날을 더 날카롭게 갈게 되는 시발점이 형성될 것입니다.
"두고 보자!"라는 식이 될 것이 뻔합니다. "어디 허점만 보이라. 천배, 백배로 갚아 줄 테니"라는 식이 될 것입니다. 화해가 아니라 휴전 상태이지요. 비록 겉으로 보기에 둘 다 평화롭게 보이겠지만 말입니다.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보이고자 하는 뜻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는, 인간들이 점차 자신의 죄성을 유감 없이 발휘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바로 왕의 심정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항상 찾아볼 수 있는 심령 상태들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일단 지옥 보낸다고 하니 인간들은 더럽지만 고개 숙이는 척을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는 존경이나 경외까지는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사무엘상 16:22에 보면,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보면, 제사와 순종이 서로 대립되는 뜻으로 등장합니다.
즉 제사를 반복하는 것이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존경과 경의의 모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종교적인 경건의 모습을 계속 지켜내는 것이 결코 하나님에 대한 헌신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어떤 사람의 생활을 전체 다른 사람의 신앙생활의 표준으로 삼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순종이라는 것은 그 시작을 사람에게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시고 적절하게 순종할 내용들을 제공하는데 제 3자가 그 중간에 개입할 수는 없는 겁니다. 즉 "당신은 나처럼 행동을 해주셔야 비로소 순종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입니다"라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시편 94:9절의 말씀처럼,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못하겠으며, 귀를 만들지 자가 듣지 못하겠으며, 마음을 만드신 자가 우리들의 속마음 해석에 혼선을 갖겠습니까. 결코 그럴 리 없습니다. 바로 왕은 모세가 곁에 있음을 진정으로 고마워해야 합니다.
스스로 자기 세계를 지키겠다는 무모함을 버려야 했습니다. 바로 왕은 하나님과 대결 구조에 버티고 있지 결코 순종 구조 안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졌습니다!"라고 한다고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성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순종입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순종을 보면서, 우리들이 평소에 얼마나 자기 합리화하는 여전히 세상에 쳐다보고 사는 인간인지를 절실하게 느껴야 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순종의 구조를 가지고 우리를 덮쳐오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하나님은 우리의 타인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겉을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과 관계를 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메뚜기 재앙 10: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로 들어가라 내가 그의 마음과 그 신하들의 마음을 완강케 함은 나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이기 위함이며
바로왕과 모세의 대결은 마치 오늘날 우리들로 하여금 둘 중의 어느 한편을 우리가 임의로 골라잡아 선택해서 자기 운명으로 결정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왕이 비로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늘 책망을 받고 정죄를 당하는 입장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 자신들조차 바로왕과 무관한 초연한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바로왕 안에 이미 우리가 놓여 있으며 현재 우리들이 바로왕의 심보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바로왕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모세 쪽을 선택할 것인가를 놓고 그 둘 중에 하나로 골라잡을 권리가 우리에게는 아예 없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바로왕이며 어쩔 수 없이 바로왕입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바로왕에게 책망하는 모든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질책입니다. 이와같은 경우가 신약에 들어서면 바리새인과 예수님 사이에도 동일하게 일어납니다. 제자들은 쉽게 자신들이 자진해서 예수님 편에 서기로 작정한 자들 같지만 제자들 마음 속에는 여전히 바리새인과 동일한 품성을 지닌 채 예수님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사람입니다.
따라서 바리새인에게 질책하는 것이 그대로 제자들이나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예수님과 같이 합세해서 바리새인들을 비난했던 그들 제자들 역시 예수님을 단호하게 거절하고 예수님 곁에서 도망친 사실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바로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왜 겸비치 아니하느냐?"라는 겁니다. 자... 도대체 무엇이 겸비치 않는 겁니까? 그것은 여호와를 섬기지 않는 것이 겸비치 않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호와를 섬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마음이 겸손하다든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인간 쪽에서 조작해 낼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개인에게 주시는 사건 안에서 비로소 '겸비'의 현상과 '섬김'의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인간들이 스스로 조작해내는 방식과 양식에 따라 겸비하고 섬기려는 것은 곧 자신의 겸손을 섬기는 것이요, 자신의 하나님 섬김을 겸손으로 이해하려는 소치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에 원하시는 겸손함과 섬김이란 하나님에 의해서 터져 버린 사건이 전제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 예에 대해서 제가 예레미야 20:7-11의 경우를 가지고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의 성격과 더불어 예레미야의 성격이 같이 나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 붙는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의 두려움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나의 친한 벗도 다 나의 타락하기를 기다리며 피차 이르기를 그가 혹시 유혹을 받으리니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그러하오나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 같으시며 나와 함께 하시는고로 나를 박해하는 자가 넘어지고 이기지 못할 것이오며 그들은 지혜롭게 행치 못하므로 큰 수욕을 당하오리니 그 수욕은 영영히 잊지 못할 것이니이다"
지금 예레미야에게는 하나님의 힘이 한데 엉겨붙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진정한 섬김과 겸손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진해서 하나님을 일을 하고자 한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여호와의 존재를 인정 못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겸손과 섬길의 형식과 유형과 예를 갖고 살고 싶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바가 아닙니다. 지금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쳐들어와 버렸다는 것이 관권입니다. 그래서 이 때부터 예레미야는 몸부림치기 시작합니다. "제가 하나님의 일을 안하겠다는데 왜 저에게 하나님의 일을 시키십니까?"라는 데서오는 몸부림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에게 나온 겸비와 섬김이 아니라 하나님에서부터 시작한 겸손과 섬김입니다. 이 예레미야의 고통과 심정은 신약에 와서 예수님에게 그대로 이어지고 사도 바울에게 그대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 그대로 이어 지게끔 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으로부터 열심히 탈출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떼 내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예레미야는 이 점을 압니다.
하나님이 도리어 자신을 이기고 있다는 점을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결코 하나님을 하나의 자기 밖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처해 있는 이 현장에 침입한 하나님으로부터 알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자신은 자기의 의도한대로 인생이 진행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당황해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잊지 않고 있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이 자기를 이긴다는 그 사실을 말입니다.
이 두 현실을 다 느끼면서 살아가는 이 모습이 진정 오늘날 성도가 느끼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성도에게 찾아 드시고 인도하시고, 일시키시고 있는 겁니다. "나는 안 하려고 했고, 나는 그냥 멀 발치서 하나님께 겸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그런 평범한 신자이기를 원했지만 하나님이 나를 쳐들어왔고 나를 정복하고 덮쳐서 이끌고 계시다"는 것을 고백하게 하십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빌립보서 4:11-13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도에게 생겨나는 상황은 사도가 순교하기 위하여 억지로 조작해내고 은근히 유발하기를 기대한 상황이 아닙니다. 그도 우리 같이 우리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를 전혀 예상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압니다. 고린도전서 10:22에 보면,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어떻게 해보겠다고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님을 사도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 대해서 늘 승리하시는 분이시고, 우리는 예수님에게 늘 패배 당하는 대상일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즉 여기서 '모든 것'이란 자신이 미리 점쳐놓은 기대나 야심이 아닙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란 늘 자기를 이겨주시는 예수님이 생각해 놓으신 모든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로서는 도저히 엄두도 못낼 일들입니다.
하지만 결국에도 날마다 사도 자신을 이기시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인해 자신은 그 모든 일을 다 해내는 자로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궁핍이나 환란이나 그 어떠한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섬김이요 겸손입니다.
즉 자기 자신이 가진 능력이나 의지력을 아예 기대치 않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서는 그 다음으로 자기 걱정을 하기 마련입니다.
즉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데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되겠는가.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를 찾으신다는데 내가 이렇게 막 살아서는 되겠는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섬기는 자를 원하신다는데 내가 그만 있을 수는 있겠는가"라는 인간적인 반응을 나타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절차로는 나름대로의 겸손과 섬김의 틀을 갖추려고 시도할 것입니다. 목사에게 묻기도 하고 다른 선배 교인들의 스케줄을 참고로 해서 편리한 대로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섬김의 유형을 조성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니 그 소리를 듣고, 자신의 하루 스케줄을 고려해서 예를 들어, 2시간 반을 기도하는 것으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대체할 수 있다고 간주해 보는 겁니다. 24시간 종일 쉬지 않고 기도하지는 못하지만 자기 형편에 2시간 반을 꼬박 하나님 섬기는데 바치는 것에 대해서 자기가 생각해서 대견스럽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기도를 시작하려니 마침 그 시간에 재미있는 연속극이 시작하는 것과 겹치게 된 것입니다. 이럴 때 두 가지 타입으로 섬김의 반응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하나는 "하나님, 연속극 마저 보고 하겠습니다"라는 타입과
"아, 이것이 내 기도를 방해하는 악마의 수작이구나. 성경에 보면 죄와 싸우데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는데 내가 이 악마가 싸워 이기기 위해서라도 연속극을 안보고 기어이 기도를 끝내야지"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후자의 경우는 거의 퇴행성 정신분열증 증세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마음 한 구석 연속극의 내용이 궁금하면서 억지로 기도한다고 하나님께 기뻐하시겠습니까? 바로 이런 사고 방식이 인간적인 섬김이요 겸비라는 겁니다.
우리는 평생을 다 가도록, 자신이 예상한대로 안 들어주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느낄 수 있어야 참 성도입니다. 왜냐하면 날마다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이 승리하심을 본인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잘했다고 하는 순간이나 못했다고 하는 순간이나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떠나지 않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바로 왕의 볼모 작전 출 10:8 모세와 아론을 바로에게로 다시 데려오니 바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갈 자는 누구 누구뇨
권력을 지향하는 인간의 본성이 오늘 본문에서 여지없이 폭로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왕 하나님과 헤어진 마당에 따로 인간만의 세계를 구상하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필히 체계 잡힌 권력으로 등장될 것이 뻔합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소위 '지도자'라고 지칭되는 작자들이 등장하기 마련입니다. 이들 지도자라고 자처하는 인간들은 사람을 '거느린다'는 점에 대해서 즐거움을 갖고 있습니다. 누가 누구를 거느린다는 것은, 가인의 후예들의 속성입니다.
창세기 4:23-24에 보면,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찐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하였더라" 라멕은 가인의 후예입니다.
곧 살인자의 후예요 폭력의 자손들입니다. 힘과 폭력에 의해서 질서를 창출하려고 시도하는 자들입니다. 타인은 결코 자신과 동등해지는 것을 거부하고 용납하지 않으려 합니다. 계급이 있는 사회가 그들에게는 천국입니다.
남에게 명령하고 지시하고, 그리고 자기 말의 위력에 기계처럼 움직이는 모습들을 보면서 신의 흉내를 내는 것에 사는 재미를 갖고자 하는 작자들입니다. 라멕은 자기 아내마저 자신의 부하처럼 다루고 있습니다. 폭력적인 가장의 전통을 존중하고 절대 사수하려는 자입니다.
이 전통은 그대로 바벨론 시대로 이어져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니엘 5:18-21에 보면,
"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고 그에게 큰 권세를 주셨으므로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이 그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였으며 그는 임의로 죽이며 임의로 살리며 임의로 높이며 임의로 낮추었더니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강퍅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 왕위가 폐한바 되며 그 영광을 빼앗기고 인생 중에서 쫓겨나서 그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또 들나귀와 함께 거하며 또 소처럼 풀을 먹으며 그 몸이 하늘 이슬에 젖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게 되었었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권세라는 것은 개인 소유용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더 쉽게 말해서 한 때 권세를 받았다고해서 계속 자기 것이 아니라 권세가 주어지더라도 여전히 자기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은 그 권세를 자기 것으로 오인하니 자연적으로 권세있는 자기 자신과 자기보다 권세가 없는 타인을 구분하게 되는 겁니다. 진정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부여받은 자라면, 권세 주신 하나님과 권세의 혜택을 받아야 될 타인들이라는 인식이 있어야 정상입니다.
여러분, 권세자는 마치 우편배달부에 지니지 않고 심부름하는 자에 불과합니다. 심부름하는 자가 권세자를 대리해서 대접을 받을 수는 없는 겁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중간 경로를 거치지 않고 각 개인에게 주어집니다.
중간에 집례하시는 목사를 통해서 은총이 몇 단계 거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정치적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교인들부터가 참된 하나님의 뜻에는 아예 관심이 없고, 그저 익숙한 습관대로 편하게 신을 섬기려는 의식 때문에 이런 것들이 용납되는 겁니다.
어쨌든 그 어떤 이유서라도 자신은 타인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다고 여기고 타인이 자기보다 더 낮은 위치에 있다고 여기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하지만 이런 하나님의 뜻을 알 길이 없이 강퍅하기만 한 바로왕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권세 장악자로서 행세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권세를 가지고 여호와를 직접 공략하기보다는 이스라엘인이 갖고 있는 인간적인 취약점을 노리고 들어옵니다. 이점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바로왕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오늘날 소위 교인들이 교회 나올 때 하나님에 대해서 얼마나 얕잡아보고 나오느냐와 상호 통하기 때문입니다.
즉 아무리 신이 위대하고 여호와가 위대하고 이스라엘 민족 편에 선다할지라도 부모 자식의 확실한 고리보다 더 강력하겠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바로왕이 생각하는 사고방식의 한계는 어디까지나 인간과 인간들의 관계의 울타리 속에서 맴돌고 있는 겁니다. 즉 신이란 인간들의 애로사항을 충족하는 존재일 뿐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습니다.
인간을 괴롭게 하면서까지 신이 신으로 군림하는 것은 신의 입장에서도 자기 팬들을 놓치는 어리석은 작전일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겁니다. 이런 측면에서 바로왕은 이스라엘의 자식들을 인질로 잡아두려고 합니다.
그 당시의 히브리 사람들은 바로왕의 정권을 지탱해주는 인간 기계처럼 취급되었습니다. 만약에 공장에 기계가 빠져나가면 생산이 불가능하겠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애굽 경제를 돌아가게 만드는 노동력을 제공하는 이들이 여호와 섬긴다고 빠져나가면 나라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따라서 국가 경영을 책임지는 책임자인 바로왕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불만을 다소 해소해주면서도 동시에 그들의 노동을 계속 착취할 수 있는 관계 망을 계속 작동하려고 합니다. 설마 자기네들 자식들이 위험한 지경에 처했는데 그래도 여호와만 쳐다보면 섬기지는 않겠지 라는 계산서를 빼본 겁니다.
오늘날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인정한다고 나서보지만 여전히 그 관계는 유동적이고 헐겁고 느슨한 관계로만 걸쳐놓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더 확실한 관계의 끈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가족 관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현재 자기가 만든 가족보다는 덜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러나 다니엘 5장의 말씀처럼 인간의 운명은 결코 인간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시기도 하시는 권한은 하나님에게만 있을 따름입니다. 출애굽 뿐만 아니라, 다니엘 시대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오신 이 신약 시대에는 더 확실하게 인간들을 추궁하고 계십니다.
누가복음 9:61-62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 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아니, 가족한테 생이별하면서 작별인사 하는 것도 그토록 문제되는 일이란 말입니까? 가족의 인연을 끊지 아니하면 지옥 보내신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관계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관계, 즉 흔히 사람들이 죽어도 못 끊는다는 가족 관계보다 더 중요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가 되겠습니다.
가족이란 흔히 사랑으로 똘똘 뭉쳐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자식을 위하여 주저 없이 헌신하고 아낌없이 목숨 바칠 부모의 사랑이 기초가 되어 구성된 조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부모의 사랑보다 더 위대한 것이 없다고 상식적으로 잘 알고 있는 바로왕의 입장에서는 볼모 작전을 세워서 자기 나라 노예들인 히브리인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부모, 자식간의 사랑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은 순전히 자기 자식이기에 남의 자식보다 더 사랑하는 일방적인 사랑일 뿐입니다. 이 말은 곧 자기가 낳은 자식이 이라서 자기 몸의 연장체 라는 뜻에서 죽어도 못 버리겠다는 데서 나온 사랑입니다.
만약에 자식이 독립 선언해 버리면 참으로 사랑했던 폭 만큼이 아픈 가슴으로 되돌아올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절대성을 더욱 확고히 하는 사랑일 뿐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면, 그동안 자신의 절대성을 지지해 주던 모든 관계가 다 허물어지고 오직 주님의 사랑에만 온통 점령당하게 됩니다.
이것은 기적이 임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만약 이런 사랑이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노라고 나선다면 바로 바로왕과 같은 인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해 주는데 머문 겁니다. 진정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적어도 '하나님 이용하기'를 훨씬 뛰어 넘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결코 장난이 아님을 압니다. 구약 때, 무서운 하나님 앞에 굴복한다고 해서 구원이 성사되는 것이 아닙니다. 복종한다고 다 된 게 아닙니다.
이유 없고 조건 없는 사랑으로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인력으로 불가능한 기적의 열매로서 자신이 등장되었음을 믿고 인정해야 합니다. 이럴 때, 그 어떤 힘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이 아쉬운 것을 가지고 하나님에게 나아가지 말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에게 나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자연의 뜻 10:13 모세가 애굽 땅 위에 그 지팡이를 들매 여호와께서 동풍을 일으켜 온 낮과 온 밤에 불게 하시니 아침에 미쳐 동풍이 메뚜기를 불어 들인지라
사람들은 자연 세계에 관심이 대단합니다. 이 대자연이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가 하는 것을 알고 싶어합니다. 왜 알고 싶은가 하면 그것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연 속에 담겨 있다고 여겨지는 신의 섭리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것은 인간도 신처럼 마음대로 자연세계를 부리고 싶은 것입니다. 즉 자연세계에 대해서 신에게만 독점권을 넘겨주기 싫다는 겁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왜 서양에서는 과학이 발달하는데 동양에서는 발달하지 못했습니까?"라고 말입니다. 저는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최고 수준의 라이벌, 즉 경쟁자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인간이 신을 인정하고 믿는다는 말은, 신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그 신마저 극복하여 신으로부터 아예 영원히 자유로워지려는 야심이 깔려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모든 피조 세계가 구체적인 인물에 속하는 하나님에 의해서 지음 받았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피조세계 안에는 신의 개성과 특징이 필히 함유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인간 각 개인 속에 있는 신의 특성과 개성을 분리하는 작업을 개시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신의 속성을 따로 뽑아내어야 하기 때문인데, 신의 속성 안에는 전지전능의 씨앗이 배태되어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 전지전능 만큼은 신도 축복으로서 팍팍 밀어준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인간 속에 있는 신의 특성을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았습니다. 이 '하나님의 형상을 발췌해 내어 개발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만이 하나님과 연관짓는 방도로 보았습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지시와 명령을 받고 그대로 수행할 수 있는 통로를 인간이 마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 과학을 발전시키면 시킬수록 하나님의 뜻에 더 철저하게 복종하는 것이라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이로서 인간이 대자연을 다스리고 정복할 수 있는 정당성이 보장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라이벌로 여기는 사고에서 나온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벌리시는 일에 인간이 관여하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도 신처럼 존재하려고 합니다. 바로 이러한 오해는 인간들이 일방적으로 자기 가치를 내세우고자 하기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하나님은 대자연을 그런 식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의 과학적 사고방식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끼어 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협조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대자연을 무엇으로 인도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언약입니다.
여러분, 언약이라면 노아의 방주 언약이 생각날 것입니다. 방주라는 배에 들어간 사람은 살았고, 방주 안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은 대홍수에 몰살당한 그 방주 말입니다. 그렇다면 홍수 심판이 그치고 더 이상 방주가 필요 없게 될 때에 인간과 이 자연에 대한 하나님의 원칙이 공백상태에 들어가게 될까요?
아닙니다. 노아 식구가 방주에서 나와서 새 땅을 밟게 될 때에 이미 거기에는 하나님이 마련하신 새로운 언약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홍수 이후에 이 대자연에 대한 하나님의 일관된 지침이 제시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무지개 언약'입니다. 창세기 9:12-13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언약에 대해서 안 좋은 감정을 갖는 이유는, 언약대로 일을 처리하게 되면 인간의 자율성이 훼손되는 것을 못마땅해 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은 자신의 의지와 결단에 의해서 교회도 나가고 하나님도 믿는다고 자부하고 싶어합니다.
따라서 인간들의 왕성한 의욕 앞에서 언약이 더 이상 필요치 않다고 보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고방식이 이어져서 '신처럼 모든 것을 알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사람은 보는 것만큼 알게 되고, 아는 것만큼 믿게 되는 겁니다.
이런 사고방식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을 불필요하게 여길 것이 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께서는 언약에 준해서 모든 것을 처리하려고 할까요? 그것은 악인이든 선인이든 모든 이에게 동일한 은혜를 베푸시기 위함입니다.
즉 마태복음 5:45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자... 이런 하나님의 언약적 처사에 대해서 사람들이 과연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우선 이런 은혜에 마음껏 이용하려는 악한 성향의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들 생각에는 어차피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니 이런 기회를 통해서 마음껏 원 없이 악한 모든 것을 자유스럽게 체험해 보겠다고 나섭니다.
그런데 반면에 소위 의인되는 쪽에서 마음을 먹는 사람들은 이런 악인들의 횡포와 범람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 불만의 소리를 높이게 됩니다. 즉 하나님은 한없이 무능하다는 겁니다. 어떻게 저토록 죄악 된 자들이 활개치는 것을 그냥 방관만 하시느냐 하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하나님의 공의가 전혀 인간 사회에 먹혀들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정의로운 분이라면 악한 자를 방치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두 부류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연을 은혜롭게 운영하시는 것은 이 은혜 성을 제대로 읽을 줄 아는 자만이 영생을 얻고 구원이 되는 자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오늘 본문의 경우, 모세가 지팡이를 드는 것은 그냥 하나님이 시켜서 행한 일일뿐입니다.
자신이 특별히 하고 싶어서 한 행동이 아닙니다. 그런데 모세가 지팡이 드는 것을 신호 삼아서 하나님께서 갑자기 동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면서 메뚜기 떼가 까맣게 온 애굽 지면을 다 덮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평소에 애굽 사람들이 착해서 그동안 메뚜기 재앙을 안 받은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두신 겁니다. 그리고 모세가 기도하니 그 많던 메뚜기 떼가 순식간에 싹 사라져버렸습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얼마나 의도적으로 이 세상을 관리하고 있는가를 보여주시는 겁니다.
즉 무지개 언약은 하나님께서 핵심적으로 일하심을 커버해 주시는 배경적 은혜가 되는 겁니다. 진짜 구원시켜 주시는 은혜는 이 무지개 언약의 배경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인간들의 마음 돌리기 때문입니다.
소위 악인이나 선인이나 모두 하나님의 은혜가 지목해서 일하시는 그 핵심적인 목적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짜 하나님의 일은 악을 추구하는 자들이나 선을 추구하는 자들 모두에게 핍박을 받는 양식으로 진행이 됩니다.
소위 선인들은 자신들이 열심히, 부지런히 긴장을 늦추지 않고 선을 쌓았기에 그 대가로 자신들에게는 자연의 재앙이 안 떨어질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마음가짐조차 획기적으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무지개 언약이 주는 은총 안에서 진짜 은혜의 본질을 만들어 나가십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에게 자기 아들을 잡아 번제를 드리게 함으로서, 자식을 버려야 하는 아버지의 아픔을 알게 하고 동시에 그것이 자신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은혜가 됨을 알게 하십니다.
즉 진정한 은혜는 자연에서부터도 계속 흘러나오지만 그 최종적 종착지점은 하나님의 희생과 죽으심과 연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한 예를 들면, 어떤 분이 교회에 헌금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잘 모르고 있을 때에, 목사는 강단에서 십일조 하라고 강요하고, 주위 교인들은 자신들의 십일조 한 경험담을 늘어놓는 것을 듣게 됩니다.
즉 교회에 어떤 부인 네가 하는 말이, 자신이 50만원을 십일조를 하고 나니 그 다음날 500만원이 생기는 횡재를 얻었다는 겁니다. 그것은 횡재가 아니라 십일조를 교회에 낸 것에 대한 하나님의 정확한 보상원칙에 준해서 제공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그 사람도 자신이 그 교회에 십일조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복음을 접하고 난 뒤에, 그는 크게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즉 왜 하나님께서는 그런 '헌금 바람잡이'들을 자기 주변에 나타나게 하셨는가 하면, 평소에 자신의 돈 욕심과 돈 사랑함이 가득 차 있는 것을 소위 '십일조'로 횡재하기라는 유혹을 받게 해서 그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사기 인 가를 통감하는 과정을 겪어서 진정한 하나님은 뜻은 하나님 이용해서 부자 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마음가짐 자체가 달라져야 한다는데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는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은혜를 받기 전에 숱한 돈을 교회의 사기에 말려 날려야 했습니다. 그는 이것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마음가짐의 변화가 은혜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는 은혜에 눈을 뜨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흑암의 재앙 10:22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매 캄캄한 흑암이 삼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있어서
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만 몰래 끄집어내면 될 터인데 함께 살고 있는 불신자들을 건드리는 겁니까? 그것은 사람이 환경이 좋아졌다고 해서 사람 자체까지 달라졌다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원'이라는 것이 항상 환경의 나아짐으로 자꾸만 정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염두에 두시는 구원이란, '인간성 바뀜'에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성이 바뀌어져야 하고 달라져야 하는 이유는, 비록 구원될 자라 할지라도 그들이 그동안 지니고 있는 인간성이란 곧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인간성과 별반 다를 게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구원받지 못할 자를 치신다는 것은, 곧 그 징벌의 취지를 늘 간직하며 살아야 될 자들이 구원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본연의 '인간성'을 치는데 있어 왜 하필이면 온 천지를 캄캄하게 만드는 조치를 단행하는 겁니까?
그것은 애굽 사람들이 그동안 열심히 태양신을 숭상해 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눈과 안목으로 볼 때, 자신들이 생존하는데 필요한 열량들은 모두 하늘 한 가운데 떠 있는 태양말고는 달리 정답이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태양 없이는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없다는 점이 너무나도 확실한 상식으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오늘날 현대 과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아 거기서 진리를 도출해 내는 과학적 인식에서 인간의 생존은 전적으로 태양에 달려있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현재 우리가 매일같이 먹어야 하는 음식물은 다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어지는 겁니까? 지구상에 있는 모든 생물체는 태양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태양에서 전달해 오는 빛에너지는 파동으로 지구에 도달합니다.
빛에너지를 방출하는 물체는 광자를 방출하고, 광자는 물질을 닿으면 입자처럼 행동합니다. 그런데 광자가 식물이 지니고 있는 엽록소 분자를 때리면, 엽록소 분자를 이루고 있는 전자 몇 개가 높은 에너지를 가진 상태로 변합니다.
이것을 '들뜬 상태'라 합니다. 들뜬 상태의 엽록소 분자는 매우 불안정해서 결국에는 전자를 방출하여 일하는 에너지로 사용되기 마련입니다. 사람들이 또는 동물이나 식물을 섭취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것들은 대기 이산화탄소를 섭취하여, 탄소와 산소를 분리한 뒤 그 탄소를 이용하여 자신이 물질을 만드는 것입니다. 광합성이라 불리는 이 과정은 에너지 유발시킵니다. 이 에너지는 사람의 신체 내에서 산소와 탄소를 결합시킵니다.
녹색식물은 태양 광선을 이용하여 이를 수행하는 겁니다. 이렇게 보니, 태양이 우리의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인간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그것밖에 모르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일부로 태양이 사라지는 암흑을 만드신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인간은 태양에만 최종적으로 관심사가 머물 것이 아니라 '도대체 태양을 만든 분은 과연 계신 다는 말인가?'에 관심 두게 하겠다는 겁니다. 가만히 하늘을 유유히 떠다니던 태양이 졸지에 없어진다는 것은 태양의 소유자가 따로 계심을 천명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두렵고 놀라운 사실은 흑암을 만드신 하나님이 그 자신의 백성이 실제로 애굽 나라에 실존해 있다는 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살던 동네에는 광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로서 히브리인들이 섬기는 그 여호와는 단순히 조작해낸 하나님이 아니라 영원부터 계속 유일하게 계셔왔던 그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태양의 빛이 결코 인간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생존에 태양 빛이 필수적이라고 단정짓듯이 사실 인간의 운명을 단정짓는 빛은 따로 있습니다.
요한복음 1:3-5에 보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람들은 태양만이 빛이라 여깁니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눈에 보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래의 빛은 따로 있습니다. 마치 태양 없이 아무 것도 생존할 수 없는 것처럼 본래의 빛을 모르는 이는 죽음 뿐 임을 확정 지우는 또 다른 빛이 있습니다.
장차 우리가 들어가고자 하는 세계는 태양이나 달이나 별 빛이 더 이상 필요치 않을 정도로 환한 신세계입니다. 따라서 이 빛과 관련 없는 이는 근원적으로 어둠일 수밖에 없습니다. 애굽의 바로 왕은 그저 태양 빛만 평생 쳐다보며 살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런 종류의 사람의 목숨은 목숨도 아닙니다. 태양을 만드신 그 분의 빛에 있는 자만이 참으로 생명을 가진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가 아직 이 이 어둠의 세계에서 살아야 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남한테 지지 않고 자존심을 지탱하기 위해 성도의 인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즐거움을 원 없이 즐기기 위해서 아직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두움의 세계 속에서 진정한 빛이 되시고 생명 되시는 예수님을 알리기 위해서 아직 이 세상을 떠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바로 왕은 미처 모르고 단지 히브리인들의 재산에만 탐을 내고 있습니다. 바로 왕은 말하기를, 가족들만 나가고 가축은 두고 가라고 합니다. 옛날 고대 농경시대에 있어 가축이란 농사짓는데 필수적인 생산 수단이 되는 겁니다. 그것은 재산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그 가축을 단순한 재산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모세가 가로되 왕이라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 희생과 번제물을 우리에게 주어야 하겠고 우리의 생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 이는 우리가 그 중에서 취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길 것임이며 또 우리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어떤 것으로 여호와를 섬길는지 알지 못함이니이다"
즉 당신네들은 당신의 소유가 오로지 당신의 유익과 생존과 행복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소유된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게 제사하고 제물로 쓰여지기 위한 것이라는 겁니다.
애굽 사람들 보기에는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가축이 인간보다 더 중요하게 보이겠지만 히브리인들에게는 제물이 되는 가축이야말로 자신들보다 더 큰 의미가 담겨 있는 짐승입니다. 태양을 마음대로 조정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의 재산이나 재물을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지정하신 제물을 원하시는 분입니다.
제물이 없는 관계는 곧 하나님과의 단절이며 이는 빛과의 단절이요 생명과의 단절입니다. 지금 우리 마음 속에도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없으면 안됩니다. 제물로 바쳐지는 짐승들은 평소에 가족들과 함께 정겹게 잘 지내왔던 가축들입니다.
식구들은 압니다. 인간인 자신들은 죄를 계속 지어오고 있지만 가축인 순한 짐승은 죄를 짓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동안 듬뿍 정을 주어온 관계로 그 짐승이 남은 식구들을 대신하여 죽음의 길로 쑥 들어서야 하는 것입니다.
아마 그 제물을 바치는 나머지 식구들은 마음이 대단히 심란할 것입니다. 그동안 정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 짐승의 죽음은 곧 자신의 죽음처럼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성도의 마음 속에는 이런 흠 없는 짐승과의 생이별 정도가 아닙니다.
친히 우리를 창조하신 분의 생죽음이 마음 속에 늘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와 예수님의 살이 없으면 더 이상 살아있는 자라고 볼 수 없습니다. 제물의 죽음 안으로 성도는 같이 사라져야 합니다.
성도들은 무엇이 진정 어두움이며 무엇이 진정 빛인가를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리실 때, 천기에 희한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가 세상이 깜깜해져 버린 것입니다.
누가복음 23:44에 보면, "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평소에 늘 규칙적으로 운행하는 자연 질서는 노아 때의 무지개 언약에 의해서 그렇게 되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세상에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대자연의 빛을 제거함으로서 이 세상이 그 자체로 어두움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은 아드님의 죽으심을 통해서 알리려 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도 이런 관점에서 남은 인생을 살아갑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를, 빛과 어둠의 구분을 통해서 제대로 정립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마지막 재앙 11:5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찌라
마지막 재앙을 남겨놓고 바로 왕과의 마지막 대화를 마무리 한 장면입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란 공통점이 있어야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한쪽은 하늘을 보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다른 한쪽이 땅을 보고 이야기를 하면 사로 상통하는 바가 없어 관계는 결국 끊어지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조성된 관계,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상황 속에서 바로 왕은 무엇을 느꼈으며 모세는 무엇을 느꼈습니까? 바로 왕은 끝까지 신을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기존의 자기 나름대로의 신이 있기에 그 신을 포기하고 그 자리에 여호와라는 낯설어 보이는 신을 안치할 마음이 추호도 없는 법입니다.
다같이 하나님을 섬기고 믿는다고는 하지만 그 신이 갖는 내용이 틀릴 때는 전혀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바로 왕의 입장에서는 모세가 연락을 주고받는 그 여호와라는 신을 도저히 받아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로부터 출발한 신이 아니라 외부에서 찾아든 신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란 자기로부터 출발해야 비로소 의미를 인정하는 자들입니다. 만약 나에게서 출발하지 아니하면 그 신을 소개한 타인에게 예속되는 것이 뻔합니다.
외국에서 기계를 들여왔을 때, 그 기계가 외제이기 때문에 무슨 하자나 고장이 나면 그것을 수리하는 기술자나 부속품까지 몽땅 그 나라에서 데리고 와야 할 형편에 처할 것입니다. 기술적인 예속이지요. 만약 자신이 만든 기계라면 그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외부에서 날라 온 신이기에 그 신을 받아들인다는 바로 왕의 입장에서 자신의 주권을 그냥 몽땅 모세에게 인계하는 셈이 됩니다. 즉 옳게 사느냐 아니면 옳지 못하게 사느냐에 대한 기준 설정조차 더 이상 자기 자신이 마음대로 정해놓을 수 없습니다.
성경 말씀에 나오는 주님의 뜻에 따라야 합니다. 히브리인들은 애굽 나라의 노예 취급을 받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애굽의 최고 통치권자가 자기의 아래에 놓여 있는 민족의 신을 만약에 추종한다면 그 신의 선지자가 자기 자신 위에 올라앉아 매사를 명령해 대는 것이 분명할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싫습니까? 우리는 자신이 만든 신을 교체해야 합니다. 모세가 만난 그 하나님으로 신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참 하나님께서 지상에 남긴 증거물은 무엇입니까?
요한계시록 14:4-5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어린 양'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자, 이 '어린 양'이라는 개념이 맨 처음 나오게 된 것은 무슨 사건 때문일까요? 바로 왕과 그의 나라에게 재앙을 내리는 과정에서 나오는 개념입니다.
오늘 본문 7절에 보면, "여호와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같은 나라에 살면서도 하나님께서는 기가 막히게도 자기 백성인 자와 그렇지 않는 자를 구별해 내십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바로 '어린 양'이라는 겁니다. 과연 '어린 양'이라는 기준으로만 충분할까요?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찌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왜 맷돌 뒤의 여종까지를 꼭 들먹이어야 하는 겁니까? 그것은 애굽 나라에서 구원될 자와 구원되지 못할 자를 구분 짓는 기준은 결코 인간의 지혜나 신분 격차를 가지고 결정 지울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
즉 신분적 차이나 혹은 죽음의 사자가 심판하려 집집마다 방문할 때에 그 어떤 자세나 태도를 취했는가 상관없이 어쨌든 '애굽 안'에 있는 자들의 장자는 다 죽었다는 겁니다. 단 '어린 양'에 속한 자만은 예외가 됩니다.
'어린 양'이라는 기준은 인간이 만들어 낸 기준이 아닙니다. 양 백성을 구분 짓는 기준이 이스라엘 편에서 협의해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현재 갖고 있는 신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천명하신 것입니다.
"신을 과연 바꾸었느냐?"를 묻고 계시는 겁니다. 신을 바꾸었느냐 아니 바꾸었느냐는 이 지상에서 '어린 양'에 의해서 졸졸 따라다니는가 아니면 독자적으로 살아가느냐로 판가름됩니다. '맷돌 뒤의 여종'은 인권적인 측면에서 보면, 분명 애굽 사회의 불평등의 한 단면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민주 사회를 구성하는데 무슨 기여를 하는가 하는 선에서 예수님을 해석할 수 도 있을 것입니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사기 당하고, 박해받는 자의 편에 서서 그런 자들과 함께 고난을 받는 그런 예수님이 참 예수님의 정신이기를 은근히 바라는 마음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아직도 신을 바꾼 사람이 아닙니다. 애굽의 신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을 구별할 때는 오직 '어린 양의 피' 외에 다른 기준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형편없고 불쌍히 보이고, 가난한가 라는 정도를 기준으로 해서 구원과 구원 안됨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한 자들은 부자 나름대로 교만이 있듯이, 가난한 자도 나름대로의 교만이 싹터있습니다. 즉 신을 바꾸지 않겠다는 교만입니다.
사회로부터 처절하게 당하고 매맞더라도 어떤 신에게 철저하게 종속되기 싫은 마음은 항상 따로 가득하게 부풀어오르기 마련입니다. 특히 자신의 교회를 이상적인 교회로 만들고 싶은 교만은 어린 양의 정신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세상 기준으로 채워지기 마련입니다.
교회 내의 성도는 모두 한 성령을 지닌 채 다시 태어난 자들입니다. 이들의 운명과 인도하심을 각자 안에 계시는 성령님의 일하심에 따라 결정됩니다. 사람마다 처해 있는 환경과 배경이 다르기에 어떤 특정 한 사람의 입장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을 수가 없기 마련입니다.
성도의 거룩함에 대해서는 하나 같이 같은 속성을 지녔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입니다. 그런데 교회 내에서 특정 인사가 자신의 생활을 기준으로 정해놓고 타인들을 윽박지르고 그들은 구원됨의 자질을 심사하는 것은 각 사람 마음 속에서 한창 일하시는 예수님을 모독하는 바가 됩니다.
목사가 교인을 심사하는 저의와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상적인 교회를 자기 정치적 역량으로 실현시켜 보겠다는 겁니다. 이것은 교만입니다. 교회는 인간 손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인간 손으로 교회를 만들겠다고 덤벼들면 거기에는 반드시 참 백성과 아닌 백성을 구별하는 기준이 반드시 개입되기 마련이고 그리고 그 기준을 마련한 목회자 당시자의 자기 인생관이 그 기준을 대신할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어린 양'이 제시하는 정당한 뜻은, 누구든지 제가 나름대로의 기준을 거론하지 말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애굽 나라에 들이닥칠 재앙이 심각합니다. 죽음의 파도가 노아 홍수처럼 애굽 나라 전역에 덮치게 됩니다.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찌라 애굽 전국에 전무후무한 큰 곡성이 있으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어린양 기준 외에 다른 기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 종교개혁 시대에는, 목사만이 성만찬을 행사할 권리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성만찬에 참여 못할 자는 죽어서 지옥 갈 사람이라고 규정지었던 시절이었습니다. 따라서 목사가 가지는 정신적 우월성은 대단했습니다. 목사는 나름대로 '죄악의 리스트'를 뽑아놓고서는 교인들을 하나 하나 그 기준의 함량 여부를 심사했습니다.
만약 죄악의 리스트에 걸리는 사람은 거룩한 성만찬을 훼손시킬 지옥 자녀라고 단정짓게 되는 겁니다. 과연 성령이 있는 자를 같은 인간이 심사할 자격이 있습니까? '어린 양'이 될 수 있는 분은 진짜 '어린 양' 뿐입니다.
요한복음 1:29에서 세례요한은 외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란 같은 인간을 심사할 자격이 없습니다. 진실로 구원된 자는 어린 양을 쳐다보며 그분의 가치를 자기 존재에 있어 가장 궁극적인 것으로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사회 생활하면서 여러 가지로 치이더라도 그 어떤 경우에도 어린 양을 포기하지 않는 그 모습이야말로 이 한국 땅에 같이 살면서도 천국의 백성인 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어린 양 외에는 다른 것이 크게 보이지 않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