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계별 학습-76)신약 성경연구(고린도전서 2장-4장)

작성자bloomy|작성시간07.05.04|조회수183 목록 댓글 0

고린도전서2장

 

 

 

◈ 2장부터는, 동의하지 않는 인간들을 잘라내는 작업 !!

그러면 그 나머지 2장부터는 뭐냐 하면, 사도 바울이 이렇게 복음 전하는데 사람들이 여기에 동의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동의를 안 했지요.  이렇게 동의하지 않는 그런 인간들을 잘라내는 그 작업을 2장부터 고린도후서까지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처음엔 교인들이 엉터리 교인이었는데, 고린도후서로 넘어가면 목사자체가 엉터리 목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지금까지 십자가 이야기한 것으로 이미 고린도전후서가 다 끝나버렸어요.  이미 끝났는데 교회라고 하니까 어중이떠중이가 다 모이는 거예요.  이렇게 모인 자들에게, "이런 놈은 아니고, 저런 놈도 아니고, 이것도 오해고, 저것도 곡해야. 십자가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야" 라는 것을 현장에서 사건을 통해 되풀이하면서 확인시키는 작업이 2장부터 쭉 진행된다는 말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질문자 : 사도님, 아내와 결혼했는데 이 아내가 말썽을 피우는데 어떻게 하면 됩니까?
사  도 : 아내와 만나든 헤어지든 십자가와 무슨 상관이 있나?
질문자 : 사도님, 집에 돈이 많이 있는데 어떻게 쓰면 제대로 쓰는 것입니까?
사  도 : 돈이 있는 자는 없는 것으로, 없는 자는 많다고 여기지, 그게 천국하고 무슨 상관이 있나?
질문자 : 아내가 이혼하자고 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사  도 : 이혼해 주지 왜?  
질문자 : 어떤 사람을 돼지고기 먹는데요?
사  도 : 돼지고기를 먹든, 소고기를 먹든, 개고기를 먹든 감사하면서 먹어라.
질문자 : 같은 형제가 돈을 빌려가고 안 갚는데 어떻게 할까요?
사  도 : 떼인 셈 치라. 이미 구원받았는데 그게 뭐 대수냐.

고린도전서를 읽어보면 사실 겁나요.  자기 믿음 없는 것이 발각될까 두려워서 말입니다.  그래서 2장 후반과 3장 초반과는 육신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불러주신 것 때문에 3장에 보면, 육신에 속한 자가 나오고, 또 영에 속한 사람 쭉 나오지요.  그런데 이 대목을 설명하는데 또 혼란스럽고 말입니다.

1장 2장을 정리해보면 이렇게 됩니다.  십자가를 믿는 것은 불러주시는 분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불려온 사람은 예수님만 자랑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2장 2절에 보자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이것을 그림으로서 그려보자면,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예수님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했지요?  그런데 사도 바울 이야기에 보면 예수님 재림이야기 나오고,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 나오고, 감독들은 술 먹지 말라 하고, 여러 가지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 못 박힌 것 외에는 알지 않겠다는 말과 맞지 않다는 말이지요.  그렇지요?  이 모든 밑바닥에 보면 십자가가 쫙 깔려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십자가 있는데, 이런 것들이 도대체 문제 거리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 돈을 사랑하지 마라 - 기껏 해봐야 너는 돈만 사랑하는 자이다 !!

예를 들면,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디모데전서 말씀이 나온다면, "십자가만 알기로 했다는데 돈 이야기가 왜 나오느냐? 이것은 기껏 해봐야 너는 돈만 사랑하는 자이다" 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말씀 속에 결국은 "주님, 저는 십자가만 바라보겠습니다" 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다면 되었다" 라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돈을 너무 좋아하고, 자기 욕심 때문에 아내를 개 패듯이 패고 해도, 그것으로 낙심하면 안 됩니다.  왜요?  그렇게 되면 불러 주신 분에 대한 모독이 되는 것입니다.  "아내 사랑하기를 주님이 교회를 위해서 목숨 바쳐 사랑하는 것처럼 하라' 라는 말씀을 앎으로 말미암아서, "나 같은 인간은 개 같은 자다. 그런데 이런 개 같은 인간도 주님께서 십자가로 불러주시니 구원된다' 라는 것을 알라고, 그런 말씀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을 가지고 "나는 돈을 사랑 안 해야지" 이렇게 나오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말씀을 계속 어길 수밖에 없는 자인데, 이러한 나를 주님의 십자가로 구원했다" 라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만약에 "네가 말씀을 지키지 못한 것 때문에 낙심한다면 너는 육에 속한 자이다" 라는 甄求?  이것 때문에 육이 나온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육에 속한 자는 아무리 십자가 믿고 예수 믿는 흉내를 내도, 결국은 은혜 받은 것 없기 때문에 "나는 이 말씀을 다 못 지키겠다. 나는 힘들어서 도저히 안 되겠다. 나는 더 이상 교회에 못 다니겠다" 라고, 이렇게 나오지요.  이것이 바로 영의 관계에서 떨어진 육에 속한 사람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2장 끝 부분에 보면, 육에 속한 사람은 영에 속한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영에 속한 사람은 육에 속한 사람을 다 이해하지요.  왜 그런가요?  그것은 바로 과거 자신의 모습이니 말입니다.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 주님이 주신 사랑이나 챙기자 !!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사랑에 대해서 나오는데 사랑이 어떤 것입니까?  "내가 이렇게 하면 나쁜 짓이 될까? 이렇게 하면 착한 일이 될까?" 라는 것이 악마의 시험이란 말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말씀대로 살 수 있을까?" 라는 것은 마귀의 시험이고, "되지도 않은 인간에게서 뭐 나올 것이 있다고, 주님이 주신 사랑이나 챙기자" 라고, 이렇게 나와야 성도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제발 자기 정당성을 계산하지 마세요.  주님께서 이것을 싫어하십니다.  "지금 내가 잘 하고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지 마세요.  모두 다 잘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그냥 시키는 대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죠.  여기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평가하는 분은 따로 계시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이미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 땅에서 빵점 맞아도 하늘에서는 100점으로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힘이 들고 졸음이 와도 조금만 참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이것만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12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고전 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으로 주신 것들입니까?  그냥 은혜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스스로 자기를 관리하지 마시고 주신 것을 받아서 챙기는 일만 하라는 것입니다.  주신 은혜를 감사하면서 그냥 받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행실을 보고 부르신 것이 아니고, 그냥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겁니다.  미련하고 못난 우리들을 말입니다.  그렇다면, 육신에 속한 자는 무엇입니까?  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고전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고전 3: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여기서 육신에 속한 자의 특징이 뭡니까?  '어린아이와 같은 자' 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이 세상 물정을 잘 몰라요.  그러니 자신에게 주어진 은혜의 풍성함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게 얼마나 대단하며, 자기가 얼마나 큰사랑을 받았는지 말입니다.

그런데 육신에 속하고 또 영에 속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육신에 속한 것이 확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교회에서 제일 잘못되게 가르치는 것 중에 하나인데, 성경에 '육신에 속한 자' 라고 나오면 정죄를 하다시피 하는데,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발을 빼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 우리 모든 인간은 육신에 속한 자 !!

사실 우리 모든 인간이 육신에 속한 자입니다.  다만 어떤 경우에 신령한 자가 되는가 하면, 성령의 충만함을 입는 그 순간에 그 사람이 갑자기 신령한 사람이 되었다가, 0.2초 후에 또 다시 육신에 속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하면, 인간은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신령함을 개인 소유로 만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성령께서 돌봐야지 한 10년 돌봤다고 해서, 인간들이 이제부터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 성령께서 관여하시니, 하늘나라가 더 좋아지는 순간들이 있더라 !!

다시 말해서, "20년을 믿었으니까 이제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라는, 이게 안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라고 할지 몰라도,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이들은 다 어린아이란 것이지요.  다만 성령께서 관여하시니 그 순간에는 이 세상보다 하늘나라가 더 좋아지는 순간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령하다' 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는 항상 어린아이와 같아서 주님의 보호가 필요합니다" 라는 뜻이에요.  즉 신령한 수준은 성경에 나오는 수준이고, 육신의 수준은 우리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누가 지키느냐 하면, 성령님이 지킨다는 것이지요.  이런 식으로 하나님은 계속해서 어린아이를 신령한 자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아예 은혜를 못 받은 자이고 말입니다.

 

 

광주 강의   2005년 5월 27일   이근호 목사 강의  6-1

고린도전서를 공부하시면서 이것 하나 아시면 됩니다.  
사도 바울이 우주 전체의 원리와 법칙을 다 알았습니다.  

보통 종교는 ‘내가 이것을 믿음으로 내게 어떤 이득이 있느냐’ 하는 것을 챙기는데, 사도 바울은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이 우주 전체가 어떻게 흘러가는가를 알았기 때문에 자기 신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는 별 큰 문제가 되지를 않습니다.  

복음을 아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이 우주 전체를 다 알았기 때문에 자기 삶에 있어서의 갖가지 일어나는 우환이나 변화, 현상 그것 때문에 주눅 들거나 낙담하거나 고민하거나 두려움 이런 것으로부터 해방됩니다.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하나가 뭐냐 하면, 구약은 항상 장소적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애굽에 있을 때에는 이런 식으로 일하시지만 장소를 옮겨서 가나안 땅에 가면 하나님이 달리 활동을 합니다.  그래서 지리적, 장소적으로 하나님께서 달리 적용하시고 효력을 주십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오면 내가 서울에서 사나, 대전에서 사나, 이스라엘에 사나 상관없이 하나님은 동일한 원리 원칙으로 일하십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신약은 전 우주적입니다.  우주와 우주 밖 이런 관계가 신약이고 구약은 하나의 교육적 관점으로 가르치기에 이쪽 장소에는 이런 효과, 저쪽 장소에는 저런 효과로 가르친단 말이지요.  

예를 들면, 지성소에 들어가면 죽잖아요.  그런데 사실 지성소에 있는 땅이나 성소 밖의 땅이나 다른 게 뭐가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신 거예요.  성소에 함부로 들어가면 죽는다고.

그런데 만약 신약인 지금 예루살렘에 성막 지어놓고 그곳에 들어가면 어떻게 됩니까?  아무 일 없지요.  왜냐하면 지금은 특정 장소에 저주가 온다든지 특정 장소를 밟으면 축복이 오는 것이 아니라, 우주와 우주 밖이거든요.  이제 우주 속에서는 장소적으로 거룩이라든지 저주라든지 그런 구분은 없단 말이지요.

제사장은 옷을 제대로 챙겨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정한 옷을 입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반팔을 입든지 긴팔을 입든지 상관없어요.  우주의 원리가 공간과 시간을 초원한 원리가 현재 우리에게 퍼부어지고 있기 때문에 신약시대에 복음을 안다는 것은 이러한 자기 자신의 신상에 대해서 이미 극복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서울 살다가 대전으로 이사해서 사는데, 내가 서울 있을 때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역사하셨는데 이제 대전으로 왔으니 이제 어떻게 역사하실까?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구약적인 것입니다.  서울에서의 우주의 원리나 대전에서의 우주의 원리가 다 같습니다.  우주에서 보면 대전이나 서울은 바로 옆 동네거든요.  우주 안에서는 다 같은 원리의 적용아래 있기에 내가 서울에 사나 대전에 있으나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집에 있으나 병원에 입원해 있으나 아무 상관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 교인들은 그것도 모르고 병원에 있으면 저주고, 퇴원해서 집에 있으면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주의 원리를 모르는 것이 저주고 우주의 원리를 아는 것이 축복인데, 자기 신상에 일어나는 어떤 일을 가지고 축복과 저주를 구분하는 나약함을 드러내지요.

제가 오늘 이렇게 진짜 복음을 안다는 것은 우주 전체의 원리는 아는 것이고, 사도 바울이 그런 쪽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오늘 공부하려고하는 고린도전서 2, 3장을 보면, 육에 속한 사람(2:14), 육신에 속한 사람(3:1), 영에 속한 사람(2:14) 이렇게 세 쪽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13절에 보면,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해석할 때, 옆에 집사, 누구 장로, 어떤 목사 이것 가지고 따지지 마시고, 이 본문을 해석을 때는 사도 바울이 어떤 관점으로 보고 있느냐 하는 것을 먼저 챙겨야 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우주의 원리를 다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 말대로 한다면 결국 영적인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면, 사도 바울처럼 우주 전체의 원리를 알고 있는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고, 그런 영적인 사람은 자기 신상에 일어나는 일 가지고 그것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 자기 개인적인 변화에 대해 별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말할 때, 구약 성경과는 달리 우주 전체 원리를 알기 때문에 설사 이 시대에서 자기가 굶어 죽어 객사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축복된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되는 그 원리를 사도 바울이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 사람들이 자기 신상과 결부된 자질구래한 일들 때문에 염려하고 걱정하지만 이런 것들은 신약의 엄청난 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그들을 뽑아 세우신 것이기에 그 자체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 없단 말이지요.    

구약의 ‘다윗이 골리앗을 죽였다.’ 고 되어 있는데, 이것을 보고 어떤 사람은 ‘우리도 큰 일이 닥치면 다윗처럼 당당하게 이겨야 합당한 신앙인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받쳤다는 내용이 있지요.  그 말씀 보면서, ‘나도 내 아들을 신학교에 보내 하나님께 받쳐야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육신에 속한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구약으로 봐서 비로소 이해가 되는, 구약의 틀에서만 이해가 되는 사람들이에요.  갈라디아서에서는 이런 자들을 법에 매인 사람이라고 하는데, 법을 의식하는 사람들이 육신에 속한 사람들인데, 이 법이란 것은 법을 행사하는 주체자가 있게 마련이고, 이 법을 지키면 복이고, 이 법을 못 지키면 저주니까 현재 내 신상에 이런 나쁜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보니까 내가 법을 잘 못 지켰기에 나타난 현상이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생각 자체는 여전히 자기중심이지요.  

그런데 영적인 사람은 뭐 중심이다?  우주 중심이에요.  우주적으로 보면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우주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내가 내 인생을 어떻게 관리하느냐는 이미 끝난 이야기란 말이지요.  이것은 구약 시대에 하는 이야기지 신약에 오면 내 인생 내가 관리해서 구원 받는 것 아닙니다.  

관리자가 따라 있어요.  관리자는 주님이에요.  고린도전서에 ‘우리는 값을 주고 산 것이 되었으니 이제 내가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다.’고 나와 있어요.

우리 아버지가 건강이 좋지 못하셔서 병원에 계시다가 오늘 퇴원하셨습니다.  노쇠해서 계속 병원에 계셔봐야 특별히 좋아질 것도 아니고, 경제적 부담도 있고 해서 서둘러 퇴원하도록 했습니다.  퇴원시키면서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 이제 가실 준비 하셔야 합니다.  다시 병원 찾을 생각 마시고, 지금까지 산 것도 은혜인줄 아세요.” 하면서 단호하게 얘기했습니다.  더 이상 자식이나 가진 재산을 의지하지 않도록 사전에 조치를 취했습니다.

80년 사신 것도 대단히 장수하신 것인데, 아버지가 죄 지어서 아픈 것이 아니고, 마땅히 자연적인 현실로 받아드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이런 얘기를 上楮?  “지금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의 몸을 회수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자기 몸을 회수하는 것입니다.” 라고.  

그런데 사람들은 오랫동안 익숙해진 이 몸이 자기 것인 냥 생각하지요.  이것을 저는 지난 월요일 강의에서 ‘분여’ 라고 설명했어요.  ‘분여’는 수제비할 때 밀가루 덩이에서 일부 조각이 냄비 안에 떨어지잖아요.  이것을 ‘분여’ 혹은 ‘분배’라고 하는데, 주님의 속성이 일부가 떨어진 것이 우리에요.  그래서 결국 합치되면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분여되는데 일부는 귀가되고 일부는 발이 되는데, 발이 귀더러, 또는 눈이 발더러 내가 너보다 더 귀하다든지 너는 내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뭘 이야기하는가 하면, 이 사실도 역시 구약이 아니고 신약에 와서 밝혀진 사실이지요.  구약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제사장 신분 따로 있고, 선지자 신분 따로 있고 다 따로 있어요.  이 때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가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선지자나 제사장은 나보다 더 높네.’ 이렇게 되겠지만, 신약에 오게 되면 너희들이 거룩한 제사장이요 마지막 선지자라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 몸 안에서 따져보면 각자 그리스도의 분여로서, 지체란 말을 쓰기는 하는데 저는 이 표현이 쓰기가 싫어요.  왜냐하면, 교회에서는 썼던 말을 또 사용하면 타성에 젖어서 의미가 새롭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지체란 말을 하지 말고 ‘사지’라고 합시다.  사지 알지요.  팔, 다리.  우리는 주님의 사지입니다.  손가락이고 발가락이에요.  이 말은 결국 내 몸이 내 몸이 처음부터 아니었어요.  그냥 아닌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아니었는데, 우리는 가정교육을 통해서 내 몸은 내 것이며, 네 몸은 네 것이니까 내 몸과 네 몸 누가 더 괜찮은 몸인가 한번 겨뤄볼까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익숙해 졌습니다.

그것을 깨부수는 것이 우주적 관점입니다.  콘첼만이나 케제만 등 많은 사람들이 우주적 관점으로 많은 연구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성경을 볼 때 우주적 관점으로 보았어요.  우주적 관점으로 보면, 우주를 지배하는 것은 우주 밖에 계시는 주께서 우주를 지배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주 속의 ‘나’가 아니라 우리 밖에 있는 그분의 ‘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주 밖에 계신 예수님의 사자로서의 ‘나’가 되는 거예요.  

나무 송판이 있는데 여겨다 못을 박을 때 못이 튀어나오지요.  그러면 이 송판 밖에 있는 것 말고 이 송판과 같이 있는 이 철 못, 이것은 나무에 속합니까 아니면 못 재질입니까?  못 재질이잖아요.  이건 이해되지요?

지금 우주적 관점으로 보면 나무라고 하는 우주 안에 섞여 있는 그리스도의 못으로 박혀 있는 입장이란 말이지요.  신약 성경의 사도 바울이나 사도 요한, 베드로의 글을 보면, 갈수록 감탄합니다.  이렇게 깊은 뜻이 있냐고.  그냥 읽으면 금방 읽지요.  그런데 새겨보면 엄청난 것이 담겨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고민할 권리도 없고 자격도 없는 인간들이에요.  우리는 고민을 만들어서 하지요.  

그런데 우리가 어떤 일을 가지고 고민을 하는데, 주님께서 ‘네가 어떻게 이 땅에서 고민할 자격이나 있다고 착각하느냐?’고 하십니다.  고민과 걱정은 우리 권한이 아니에요.  세상의 모든 불평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나도 좀 고민합시다.” 이렇게 나오니까 그런 일이 생기지요.  일단 고민거리부터 만들어 놓고 고민 해결한다고 낑낑거리고.  모든 인간들이 살아가는 것이 이거에요.  

아침에 일어났다.  고민거리 만들고, 하루 종일 고민거리 해결하려고 설치다가, 밤에 잘 때는 잊고 잠들고.  또 아침에 일어나면 또 고민거리 만들고.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고민하는 것이 얼마나 금방지기 짝이 없는 거예요.  네가 뭔데 고민을 해.  박힌 못인데.  박힌 못이 어떻게 목재 재질과 잘 어울려보겠다고 시도하느냔 말이지요.

우주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그리스도의 분여된 존재로서 예초부터 우리는 우리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인데, 우리 아버지한테 가서 이 말을 했어요.  ‘회수’ “주께서 자기 것 회수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 우끼는 것이 두 사람 다 주님께 붙잡혀 끌려가면서 내가 잘랐어. 네가 잘랐어. 이렇게 다투고 있단 말이지요.  
‘이것이 아니구나!’를 깨달은 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복음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강조한 것은 십자가 앞에서 자기 의가 완전히 분쇄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자기 의가 박살나야 한다는 것은 사도 바울도 어찌할 수 없어요.  그가 평생을 살아오면서 바리새인 중 바리새인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동안 쌓은 마일리지가 있잖아요.  이게 큰 문제에요.  교회 오래 다니면 다닐수록 마일리지가 쌓이고 직분 맡으면 맡을수록 마일리지 쌓이고, 자기 의가 계속해서 누적이 되지요.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뭐냐 하면, 이 마일리지가 그 안에서 물처럼 녹아 없어져 버리고 죄인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자기 의에 대한 누적 점수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이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주를 자기 의 중심으로 봤어요.  나는 너보다 낫다는 그 재미로 온 우주를 생각했습니다.  

이걸 철학적으로 이야기하면, 자연조건이라고 하는데, 현재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조건 밖에 없습니다.  자연적 조건과 관습적 조건입니다.  자연적 조건을 관습적 조건으로 묶으려는 이것이 바로 인간의 문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연에서 일어나는 것을 묶은 것이 법이고, 이 법의 여러 가지 양상 중 하나가 과학이지요.  
봄 다음에 여름 온다.  더위를 대비하자.  물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  이것을 이용하면 힘이 생기겠다.  이것이 자연적 조건을 문화적 조건(관습)으로 전환해서 발전시키는 이것이 인류 역사의 발전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인간의 눈에는 뭐가 보이느냐 하면, 자연적인 조건과 관습적인 조건 이 두 가지를 가지고 다시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적을 베풀었다.  그 다음은 이 이적을 내가 묶어 내야지요.  묶어 놓으려면 율법이 있어야지요.  율법 가지고 똑 같은 이적을 되풀이해서 만들면 하나님도 내 손 안에 있다.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바울되기 전 사울 때의 생각입니다.

제가 자연적 조건, 관습적 조건 이런 어려운 표현을 썼습니다만 결국 우주의 중심은 누구예요. ‘나’ 중심으로 우주를 보는 거지요.  나 중심으로 우주를 보았을 때 우주는 뭐가 있다?  자연이 있음.  별이 있음.  달이 있음.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이용할까? 이것에 대한 느낌, 감정, 에너지의 이용 이런 것들이 대한 인간들의 결집된 지혜, 과학이 있겠지요.  이 두 가지가 전부에요.  인간의 모습을 이 보다 더 생생하게 나타낸 것이 없어요.  이것이 인간의 전부에요.  

나 중심으로 보는데, 저기 꽃이 있다.  저 꽃은 시들지도 않네.  조화를 만들어 놓은 거지요.  이것은 실제 있는 자연적 조건을 인간의 누적된 기술을 동원해 조화를 만든 거예요.  그러니까 조화를 만들 이유가 누구 좋으라고?  나 좋으라고 있잖아요.  

그런데 우주적 원리를 알고부터는 자연적 조건도 아니고 관습적인 법도 아니고, 십자가 앞에서 나는 그냥 죽어야 마땅한 자란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제 슬슬 톤이 올라갑니다.  고함  친다고 믿어지는 것도 아니지만.

자연적 조건과 관습적 조건을 내 것으로 만드는 나.  이런 내가 오직 십자가 앞에서만 죽어야 마땅함을 아는 순간부터 나는 걱정할 권리도 없고 고민할 자격도 없고 나는 이 세상에 대해 두려워할 입장에도 서 있지 않는 것입니다. 왜, 송판에 꽂힌 못이기 때문에.  

나는 우주적 원리가 담겨있는 매체로서 박혀있는 못이기 때문에, 주님의 분여로서, 주님의 사자로서, 혹은 지체로서, 주님의 신체 일부로서 내가 우주에 박혀 있기 때문에 나에게 걱정이나 염려를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도 바울에게 처음 나타날 때, ‘주여 누구십니까?’ 물을 때, ‘나 예수다.’ 이렇게 하시지 않고,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행22:8)고 하셔서, 나는 옛날에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는 것을 강하게 재확인 시킵니다.  세상이 이것보다 더 화들짝 놀랄 일이 없지요.  

며칠 전에 이웃동네에서 어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 후에 거리를 지나는데 어떤 낯익은 할아버지가 지나가시는데 누구시냐고 물으니까, ‘사흘 전에 죽었던 할아버지야.’ 라고 한다면 아마 그 자리에서 졸도하지 싶어요.  

진짜 맞습니까?  내 손에 못 자국을 봐라.  내 옆구리에 창 자국을 봐라.  맞네요.  주님!

이런 미친 인간들이 모여서 교회가 됩니다.  허깨비를 보는 자만이 성도가 될 수 있어요.  허깨비, 허무, 허탈, 허씨는 다 나오라고 하세요.  이것이 남들 보기에는 헛것으로 보이지만 성도에게는 절대적인 힘, 최후의 힘으로 등장하지요.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최후의 힘을 느끼는 사람은 세상의 어떤 힘 앞에서도 기죽지 않습니다.  교회 내에 어떤 세력이 핍박을 가해도 이미 최후의 힘을 품고 있기에 기존의 힘이 더 이상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지요.    

지금 예수님 십자가에 달리신 유적지에 가 보세요.  먼지만 있고, 장사꾼들만 있을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 달린 현장에 가보고, 거지들이 관광객을 상대로 구걸하는 것을 보면서 ‘아! 신을 믿는다는 것이 허망한 일이구나.’ 라면서 신앙을 포기하는 자들이 있는데, 이것이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영화 [Kingdom of Heaven]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십자군 전쟁에 참가했던 군인이 예루살렘이 거룩한 장소인줄 알고 가 보니까 그곳에는 거지들만 있고 아무 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어요.  십자가도 없고 먼지 나는 빈 언덕만 있단 말이지요.  그래서 ‘신이란 인간이 조작한 것이지 진짜 이곳에 하나님이 역사한 것은 아니다.’  이렇게 느낀 것입니다.  제대로 본 것이지요.

하나님의 역사는 어린양의 보좌에서 나오는 보이지 않는, 힘이 안 되는 힘, 힘이 될 수 없는 힘으로 다가온 사람만 궁극적인 힘으로 느끼지 다른 사람한테는 전부 허깨비요, 허구, 허탈, 허망이지요.

그래서 이런 것으로는 장사가 ?되니까 목사라는 인간들이 육에 속한 자를 위해서 구약적으로 ‘이렇게 했더니만 잘 되고, 이렇게 했더니만 이런 복을 받는다.’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결국 자연적인 조건을 관습적인 조건으로 붙잡아 둘려는 십자가 모르는 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알고부터는 이런 것에서부터 벗어났어요.  보이지 않는 힘을 최후의 힘으로 본 거예요.  이것이 궁극적인 힘, 구원의 힘.  이것을 가지고 고린도전서에서는 십자가의 능력이라고 했지요.  구원이란 것은 십자가가 만들어내야 그것이 구원이지 인간이 구원 얻겠다고 나서는 것은 구원과 무관한 것입니다.  구(9)원이 아니라 5원도 안 됩니다.  오늘 개그가 안 되네.

지상에서 구원해 달라고 아무리 설쳐도 그렇게 해서 구원 안 됩니다.  구원은 우리가 요구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지신 분이 자기 능력을 발휘한 현장에서만 구원이란 현상이 일어납니다.  십자가 지신 분의 고유 권한이지 우리가 달라고 요청할 입장이 못 됩니다.

우리는 죽은 자입니다.  산자는 오직 주님밖에 없습니다.  산자가 살려내는 영을 발휘할 때만 죽은 자가 살아나는 놀라운 기적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살려내는 영’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강의는 좀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 영에 속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 육에 속한 사람 이것을 이야기하려면 제일 먼저 영이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합니다.

우리교회 홈페이지 게시판에 보면 지난 월요일 강의한 내용을 장병엽 집사님이 어려워서 질문을 했는데, 그 질문에 대해 답변했는데 답변이 더 어려워졌어요.  무슨 소리인지 알 듯 말듯하고.  

제가 이렇게 답변을 했는데, 여러분도 좀 생각해 보세요.
질문을 간단히 줄이면 ‘영이 뭡니까?’ 라는 질문을 했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영이 뭡니까?’ 할 때, 제가 답변하기를 “하나님께서 아직도 창조 원리를 발휘하는 관계가 영입니다.” 이렇게 답변했어요.  괜히 답변을 해서 더 어려운 질문만 양산하게 생겼는데, 누구 약 올리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어렵게 답변을 했는가 하면, 사람이 자기가 육체라는 것을 알지요.  근육질.  이것을 구약에서는 ‘바사르’라고 합니다.  

히브리어 ‘바사르’는 뼈와 뼈 아닌 그 무엇이 인간의 모든 행동의 증거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도 어려운데, 히브리어 ‘바사르’란 것은 ‘살점’이예요.  우리가 살점이라고 하면 뼈도 있지.  뼈는 안 보이고 살점만 보이니까 인간은 살과 뼈로 되어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히브리인은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은 실제로 외부에 보이는 살점 덩어리가 움직이니까 살아있는 거예요.  이렇게 움직이고 살아 있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 작용해서 움직이는 거예요.  

뼈는 언제 드러나는가 하면 죽을 때만 드러나는 거예요.  히브리인들이 이렇게 보는데 이것이 맞는 이야기 아닙니까?  사람이 죽고 독수리가 와서 살점 뜯어먹고 남는 것이 뭡니까?  뼈지요.  뼈가 드러났다는 것은 그 인간은 산 인간이 아니라는 말 아닙니까?  그래서 히브리인들의 생각이 맞잖아요.  

에스겔 37장에 보면, 골자기에 뼈들이 있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신이 임하니까 거대한 군대가 되었잖아요.  결국 뼈가 있다는 말은 뭔가 하면, 그 사람은 산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하나님의 온기와 능력과는 단절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다시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니까 뼈에 힘줄이 붙고 살이 입혀지면서 거대한 군대가 되잖아요.  

그래서 사람이 뭔가 하면, 살점이 있어야 사람이고, 그것이 신약성경에서는 이것을 영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영이란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 아직도 여전히 작용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그렇게 보지 않고, 육과 영이 합쳐져서 인간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전혀 터무니없는 관점입니다.  육과 영으로 합쳐진 인간이 죽으면 영은 남고 육은 없어진다는 이런 관점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인간관이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을 그런 식으로 보지 않아요.  

육 자체도 영이고, 영 자체도 영이고 이것이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입니다.  육 더하기 영이 인간되는 것이 아니고 따로 따로도 인간이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을 해도 아직은 여러분들이 정리가 안 될 줄 압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히브리인 관점은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 받아요.  그런데 오늘날 현대인들의 관점은 내가 하나님을 알아서 그것 챙겨서 구원 받아요.  그러니까 정 반대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아서 그 지식으로 구원 받는 이것은 하나님이 원리 생각했던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인간이 죄짓고 난 뒤에 생긴 죄악 된 현상중 하나입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 두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걸 한 몸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현대인들인 우리는 이해가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타락 이후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두 몸이고 두 사람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의 몸의 관점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왜 우리에게는 한 몸으로 보이지 않고 두 몸으로 보이는가 하면, 내 몸이 따로 존재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내 밖에서 얼쩡거리는 아내는 딴 몸, 타인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내 몸에 아내가 들어올 여지가 없어요.  꽉 찼어요.  내 몸은 나라는 것으로 꽉 찼어요.  내 몸에 타인의 몸이 들어오는 것은 내 몸 자체가 용납을 못합니다.

어떻게 내 몸이 아닌 타인의 몸이 내 몸이 되느냐.  이것은 못 믿겠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못 믿는 것이 당연한 것은, 우리는 이미 범죄한 이후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 몸에 타인의 몸이 와서 비로소 내 몸이 된다는 생각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 되니까 인간이 살점 그 자체를 인간이란 말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이고, 기껏 이해하는 것이 뭐냐, 내가 있고, 내가 어떻게 타인과 결합해서 한 몸 이뤄 구원 받는다는 이런 관점 밖에 없는 거예요.

결국은 기어이 나는 구원 받아야겠다는 것입니다.  나가 없는데, 죄 짓기 전에는 나가 없어요.  죄짓고 난 뒤에 “누가 선악과 따 먹었느냐?”고 하시니까, “저 여자가 먼저 따 먹었습니다.”라고 해서 그 여자는 나가 아닌 나 밖에 존재하는 그런 타인이 되?것입니다.  참 어렵다.  여러분들이 이해할 것은 포기했습니다.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부터 비로소 자아의식이 생겼고, 자아의식이 생기면 자아의식 속에 타인의 의식이 못 스며듭니다.  내 밖에 있는 것은 누가되었건 타인이에요.  나는 아니잖아요.  어떻게 여자보고 나라고 할 수 있습니까?  “어이, 나” “나 이리와”라고 하면 “이게 미쳤나” 하겠지요.  멀쩡한 자기를 두고 왜 남을 나라고 하느냔 말이지요.  자기 배우자를 보고 ‘나’라고 하는 것은 도저히 용납이 안 되지요.  

노는 세계가 다르기 때문에 도저히 이해가 안 되지요.
제가 이렇게 강의하면서 염려되는 것이, 또 이것을 이해하서 구원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것을 이해하겠다는 것은 여전히 이해하는 당사자 나를 중심으로 이해를 시도하겠다는 것인데, 여러분 나는요 이해고 뭐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어떤 설교에서 그런 말을 했습니다만 하나님이 나의 목을 조이고 있어요.  

인 간 : 내가 누구일까?  
하나님: 너는 내가 누구일까 생각할 자격도 없는 인간이야.  에라 죽어라 이놈아!
인 간 : 나는 어떻게 해야 구원 받을까?
하나님: 구원은 너 같은 인간과는 상관없어.  이놈아.

우리는 구원 받을 자격조차도 없는데, 타락하고 난 뒤에는 ‘내가 어떻게 하면 죽어서 좋은 곳에 갈까?’ 생각을 하더란 말이지요.  구원은 우리가 요구할 사항이 아닙니다.  주님이 자기 숙제 하다보니까 나타난 현상이 뭐냐?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가 되었고, 주님은 날 위해 피를 흘렸고, 나는 이제부터 주님의 것으로서(예전에도 그랬지만) 주님을 증거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나 로마서, 기타 바울 서신에 나오는 그 많은 문장들이 이런 복음적인 배경을 깔지 아니하면 전혀 이해가 안 됩니다.  그 한 가지 예가, 사도 바울은 “우리가 너희에게 전하는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8)는 말을 했어요.

바울이 이렇게 선포했으면 오늘날 교회가 뭘 연구해야 합니까?  혹시 우리교회 목사가 전하는 복음은 바른 복음인가 연구해야 할 것 아닙니까?  또 목사는, 내가 전하는 복음 중에 다른 복음이 섞이지는 않을까를 두려워하면서 설교를 해야겠지요.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사람 끌어 모으기 바빠서 참 복음이고 다른 복음이고 다 관심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것 하나 밖에 없습니다.  ‘간절히 빌면 소원 이뤄진다.’  ‘소원 성취’

이것이 진짜 복음입니까, 다른 복음입니까?  
엉터리 교회들은 이런 질문조차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 따져서 교회 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 물으면 교회 장사가 안 된다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이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으면, 화들짝 놀라서 ‘아, 다른 복음은 뭘까?  진짜 복음과 다른 복음의 차이점은 어떤 것일까?’를 주의 깊게 살펴서, 이것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고, 이것은 종교꾼들이 전하는 가짜복음인 것을 가르쳐야 할 목사들이, “간절히 빌면 됩니다.  간청하면 뭐가 되도 됩니다.” 이런 식으로 외치고 있으니 원 ---

다른 복음이 뭡니까?  이것을 알려면 사도 바울이 전에는 어떤 인생을 살았는데, 지금 복음을 알고 난 후부터는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영적으로 사태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  그 원인은 좀 전에 말씀 드렸듯이 ‘간절히 빌자.’는 데 있습니다.  간절히 빌면 소원 이뤄진다고 할 때, 간절히 비는 주체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간절히 빕니까?  자기가 간절히 빌지요.  여전히 나를 포기 못하잖아요.  옆 사람이 간절히 빌어서 내 소원 이뤄집니까?  예수님이 간절히 빌어서 내가 오늘날 이정도로 살아간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는 천만대행입니다.  예수님이 간절히 비는 것은 믿고 싶지도 않아요.  그것은 부도수표에요.  ‘그래 예수님이 간절히 빌어서 기껏해야 내 꼴이 이 모양이야?’  얼마나 하늘을 향해 원망을 합니까?

주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기도한다고 나오지요.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晝?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 8:25)  
그리고 로마서 8장에도 나옵니다.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주께서 간절히 비시기에 어떤 현상이 일어난다고 했습니까?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  이런 것은 인간이 오기로 견딜 수 있습니다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무지 못 견디는 것이,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 이런 것입니다.

주님께서 간절히 기도하신 결과가 뭔가?  밀어먹는 인간으로 만드신 거예요.  거지로.  이게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까?  인생 조져놓았어요.  그런데 환란이나 기근이나 그 어떤 것이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 없다고 했어요.  아주 단정적으로 말씀하셨어요.  이렇게 단정하신 근거가 뭐냐 하면, 내가 간절히 기도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간절히 기도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왜 주님은 우리 몸이 망가지게 하시면서 까지 그런 기도를 하셨는가?  그것은 ‘바사르’ 영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우리 몸은 우리가 관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처음부터 아담은 산 영이 되었기 때문에 주님의 창조 원리가 계속 관여하는 그런 대상이기 때문에 주님의 간절한 기도는 항상 영적으로 모든 것이 눈에 띄게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영적인 존재라고 했을 때, 제일 먼저 점검하는 것이 뭐냐 하면, 자아에 대해서 포기했느냐는 것입니다.  자아를 포기하지 않으면 이 자아가 아무리 신비적은 능력을 발휘해도 구약의 ‘바사르’는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약의 ‘바사르’는 구약 때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어떻게 보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주신 창조 원리 때문에 내가 지금 이 살점가지고 행동하고 있다.  이 행동하는 자체가 내 힘이 아니고 주님께서 주신 힘이 단절되지 않고 계속 유지되기 때문에 내가 움직입니다.’ 라는 식으로 구약 성도들이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생각한 적이 없는데 신약에 와서 꼭 출발점을 하나님으로부터 한 것이 아니고 나부터 출발해서 ‘내가 얼마나 영적인 사람이 될 때 구원 받겠느냐’ 라고 생각하니까 이것은 영적도 아니고 개뿔도 아니란 말이지요.  자기 육을 포기 못하는 영이 무슨 영입니까?  이것은 신비적인 것을 탐내는 것일 뿐이지요.

이것이 골로새서에 나와 있는데 한 번 찾아봅시다.  먼저 18-19절 보고, 또 9절을 보겠습니다.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골2:18-1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과와 권세의 머리시라”(골2:9-10)

사람이 자기 자아를 가지고 자기를 평가하면 신성의 충만함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내가 이렇게 농사지어 가면서 힘들게 살고 있는데 겨우 이 정도야!  남들은 기도해서 복도 많이 받고 하든데’ 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제거 되어야 해요.  

이런 사람들처럼 생각하면 예수님이 목회를 하면 제일 큰 교회, 예수님이 사업을 하면 세계 최대 기업 --- 이렇게 되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서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신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의 신성이 충만했어요.  이게 구약에서 말하는 ‘바사르’  영적이란 거예요.  이것이 원래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적 존재란 말입니다.

내 안에 신의 충만함이 있는데, 이 자체로도 충만한데 무엇 때문에 남이 혹할 수 있는 신비로운 것을 꼭 추가해야 되겠습니까?  현재 있는 그 자체가 예수님의 신성이 충만하다고 했는데.

자아의식을 가지고 보니까 너무나 싹 말라버렸어요.  러시아에서 호수물이 하루아침에 다 말라버렸어요.  그 물이 어디로 사라졌는가 했더니 바닥으로 다 새버렸어요.  마찬가지로 바짝 마른 강물이 되었지요.  이것을 가지도 유다서에서는 바짝 마른 바다라고 했습니다.

마귀의 모습이 이러합니다.  말은 풍성한데 속을 들여다보면 바짝 타들어가요.  타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논, 밭이 짝짝 갈라지지요.  
신성과 신비를 그렇게 찾는데 평소에 살아가는 것은 불안과 초조와 메마름.  바짝 마른 장작처럼 누가 건드리면 예민하게 반응하는, 감사가 없고 풍성함이 없고 여유로움이 없는, 아침에 일어나서 근심과 걱정으로 일과를 시작하는, 우리는 걱정할 권리조차 없는데 우리 자체가 영인데 이러한 관점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제가 영적, 육적, 육신적 이것을 설명하면서 또 오해할까 사전에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영적, 육적, 육신적이라고 해서 어떤 사람은 영에 분류되고, 어떤 사람은 육신에 분류되고, 어떤 사람은 육에 분류된다고 이렇게 분류시키지 마세요.

세상을 육과 육신과 영으로 볼 줄 아는 그 눈만 있어도 영입니다.  그것을 A반 B반 C반으로 나눠 이것을 고급단계, 이것은 중급단계 이렇게 분류해서 집어넣지 마세요.  이런 것은 주님이 하실 일이지 우리가 할 일이 아닌데, 자기가 이렇게 분류시킨다는 말은 자기가 또 자아를 고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께서 하신다고 믿으면 되는데 ‘나는 이것을 파악해야 되겠어’ 라고 소매 걷고 나서면 곤란하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예화를 들어야 좋을지 모르겠네요.
이렇게 예화를 들어봅시다.  ‘서태지와 아이들’이란 그룹이 있어요.  이 그룹을 미치듯이 좋아하는 A그룹, 그 다음에 약간 좋아하는 B그룹, 좋아 하기는 하는데 큰 관심 없는 C 그룹이 있는데 이들 모두를 다 펜클럽으로 봅시다.  
이것을 누가 결정합니까?  이 등급을 가수들이 결정하면 괜찮은데, 자기들 끼리 A급 B급 나누면 대 혼란이 벌어집니다.  B급에 있는 아이들은 자신이 A급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자기 주체가 있는 이상은 올바른 판단이 서지를 않아요.

이것을 나누는 것은 가수들에게 맡겨야지요.  맡길 수 있는 이런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 같은 영적인 사람입니다.

아 저게 육적이고 저게 육신적이구나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바로 영적인 사람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반대로 내가 영적이니까 육신과 육에 속한 사람을 분류해야지 하신다면 육에 속한 사람이든지 육신에 속한 사람입니다.

예가 더 어려워졌습니다.

왜 그런 예를 들 수밖에 없는가 하면, ‘나의 판단’이라고 했을 때, ‘나’가 여전히 살아 있잖아요.  그러면 외부의 것이 들어올 수 없다니까요.  주님이든 누구든 들어올 수가 없어요.  내 고집이 너무 세기 때문에.

그런데 주님에 의해 활용되는 사람 같으면, 육이 되었든 육신이 되었든 영이 되었든 그것은 주님이 할 일이지 내가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첫 시간 너무 어려운 것을 했는데 조금만 더 하고 쉽시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구약의 ‘바사르’ 영이 뭐냐 하면, 나라는 것이 존재하든 안하든 그것은 하나님의 소관이란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영이예요.  이것이 어디 나오는가 하면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분명히 두 사람인데 한 몸 되었지요.  아담이 하와에게 ‘이는 내 살 중의 살이요’라고 했어요.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내 심장 중 심장, 내 허파 중에 허파’ 이렇게 본 거예요.

그 사람 있는 곳에 내가 있고, 내가 있는 곳에 그 사람이 있고 하기에 도대체 둘로 나눌 수가 없다는 거예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인데, 뼈와 살은 분리될 수 없는 거예요.  당신과 나는 분리되지 않는다는 말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이해할 때는 어떻게 합니까?  ‘당신과 나는 한 부부야!’ 이정도 밖에 생각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니까요.  한 부부 정도가 아니에요.  아내와 남편이 어떻게 마음을 맞춰 살아갈까 그런 것이 한 몸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아내와 남편은 두 몸이고 한 몸이 될 수가 없습니다.  같이 잠을 자도 서로 다른 꿈을 꾸고, 한 사람은 드라마 보려고 하고 한 사람은 스포츠 보려고 하고. 이렇게 따로 놀아요.  

그렇다면 무엇을 한 몸이라고 했고,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말인가?
남편에게서 일어나는 일이 아내에게 적용된다는 말입니다.  같은 몸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영적 차원에서 다루기 때문에 따로 따로 다루지 않고 한 무리로서 다루는 것입니다.  이게 영이에요.  

예수님께 일어났든 일이 동일하게 성도에게 일어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고 그 다음 열매는 우리가 되고, 이런 관계가 한 몸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이란 것은 나라는 존재는 파묻혀서 사라져버리고 주님께서 나를 어떻게 하시든 움직이신다는 것을 믿는 관계가 영적인 인간입니다.  이해되십니까?    

내가 뭐가 되던 고민하고 염려할 자격도 없고, 주께서 작용하신 대로 내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믿는 그런 회炷?가진 사람이 바로 영적인 존재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기준해서 다음 시간에는 육신과 육이 뭔가를 생각해 봅시다.  

5분간 쉽시다.    

 

 

 

 

광주 강의 6-2

두 번째 시간 시작해 봅시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육에 속한 사람이냐, 영에 속한 사람이냐?’ 고 묻는데, 이렇게 물으면 좀 곤란합니다.  영에 속한 사람, 육에 속한 사람이 있는데 그러면 육신에 속한 사람은 이 둘 중에 어디에 속하느냐? 할 때,  보통 신학 책에 보면 육신에 속한 사람은 영에 속한 사람인데 여전히 옛사람, 즉 육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에 육신에 속한 사람이라고 분류합니다.  그러니까 육신에 속한 사람은 지옥은 안 가지만 하는 행세가 육적인 행세를 하기 때문에 구원은 받지만 영적인 폼을 내지 못하는 그런 사람으로 말하고 있어요.  

이렇게 되면 굉장히 많은 문제점이 드러납니다.
어떤 문제점인가 하면, 어느 정도 단계가 되어야 육신에서 영으로 승급할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40일 금식 기도했으니까 영적이다.’ 라고 했을 때, 100일 금식 기도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40일 정도는 육신에 속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기껏 40일이야.  그 정도로 영적인 사람이라고?” 이렇게 될 수가 있지요.

100일 동안 단식하고 산 사람이 있잖아요.  도롱뇽을 지키겠다고 금정산에서 뛰어내려온 스님.  그런 사기가 어디 있어요.  100일 굶고 살아요?  황우석 박사가 배아줄기세포 연구하지 말고 그 여승 연구해봐야 해요.  

육신에 속한 사람은 비록 육신의 모양을 드러내지만 영에 속한 사람이고 구원을 받는다고 이렇게 주장하면, 이것은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복음적 관점하고 다른 관점이에요.  이것은 개인적인 구원에 욕심이 나서 분류시킨 인위적인 분류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렇게 분류한 것이 잘못된 것이 무엇이냐 하면, “너는 육에 속하고 나는 영에 속했다.”고 한다면 듣는 육은 기분 나쁘지요.  “내가 보기엔 네가 육이야.”하고 서로 싸울 수 있단 말이지요.

제가 전에도 얘기 했지요.  인간이 기준이 되어 분류시키면 자기가 기준이 되기 때문에 안 됩니다.  결국 해석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육에 속한 사람은 이런 식의 모습을 보인다.’ 라고 말을 해야지, “이런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당신은 육에 속한 사람이야.” 라고 규정짓지 말자는 것입니다.

광야에 있었던 사람들 전부가 홍해 갈라지는 것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했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해서 망해버렸어요.  그럴 때 이들은 지옥을 가기 원해서 원망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도 모르게 불쑥 뛰어나온 성깔이 있어서 그랬습니다. “이게 도대체 뭐야, 물이 없다니.  양식이 없다니.  우리보고 죽으란 말인가?” 이렇게 불평하다 광야에서 죽었어요.

그렇다면 숨어있는 내가 모르는 그것이 무엇인가를 모릅니다.  “나는 5x6이 뭔지 모른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아는 사람이지요?  5x6은 24는 아니고 25도 아니란 사실을 알잖아요.  그럼 언젠가는 29도 아니야.  28도 아니야.  31도 아니야.  30 그래 맞아.  결국 이 사람은 알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사람 아닙니까?  

5x6이 30인줄 모르는 사람은 이 정도 돼야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5가 뭔데?  곱하기가 뭔데?” 아예 숫자나 기호조차 모르는 정도가 되어야 이게 진짜 모른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뭐가 육적인 사람인가 하면, ‘영, 육, 육신 그것 왜 분류하는데?’ 라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에 한해서 그 사람은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이 육에 속한 사람이냐, 영에 속한 사람이냐? 지옥 〈윰? 천당 가느냐?” 이것을 규정짓지 말고, “이렇게 생각하시면 육신에 속했습니다.” 라고 하고, 그 사람의 운명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당신은 육에 속했으니까 지옥 가잖아.” 라고 단정 짓지 말자는 것입니다.  

단정 짓지 말자는 말은, 그 사람의 운명이 아직 결정되지 않아 유보적이란 뜻이 아니고, 이미 결정 되었지만 우리가 시건방지게 판단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조용기 목사 지옥 가는 것 연구할 필요 없단 말입니다.  다만 조용기 목사 하는 모든 것은 육적이고 육신적인 것이라고?하면 되는 것입니다.  조용기 목사가 반드시 지옥 가느냐 하는 그 문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조치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택하지 않은 자는 지옥 간다.” 이렇게 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관점이 어떤 관점이다?  영적인 관점이란 말입니다.  조용기 목사의 운명까지 하나님께 일임하는 그 관점이 ‘바사르’ 관점이란 것입니다.

이제 두 째 시간이 되니까 이 부분에 대해 조금 이해가 됩니까?    

그렇다면, “육신에 속한 사람이 이렇다.” 고 했을 때, 이렇게 정의 내리는 것이 왜 중요하냐 하면, “나는 영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육신에 속한 것은 알 필요 없어.” 라고 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든 육신이 튀어 나오고, 영이 튀어 나오고, 육이 튀어나올 수가 있습니다.  튀어 나올 때, 육신이 튀어나왔다고 “나는 영적이 아니었구나.” 라고 낙담한다든지, 육신이 튀어나올 때 “맞아 나는 아직 어린아이 같은 신앙이야” 라고 낙담하는 그 자체가 영이 되고 싶어 환장한 육신에 속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주님이 어떻게 하든 나는 내 구원만 챙기면 된다.’는 그러한 개인적인 이득관계에다 예수님을 끌어당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제 지난 시간에 한 것을 정리하고 진도를 나가 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제일 먼저 뭘 했는가 하면, 사도 바울은 우주적 원리까지 알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우주 안에서의 나란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주적 원리에서 중요한 것이 뭡니까?  송판에 대못이 박힌 거예요.  그래서 얼핏 보면 못의 철 재료와 송판의 목재 자질과 섞인 것 같지만 사실은 안 섞이지요.  

그러면 사도 바울이 육과 영과 육신을 나누는 이유가 진정 하나님께서 박아놓은 못이라면, 여기에서 뭔가 증거되는 것이 있어요.  뭘 증거하느냐 하면 ‘저게 육이고, 저게 영이고, 저게 육신이구나.’ 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증거물을 남기는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이미 구원 받은 사람은 ‘저게 육이고, 저게 영이고, 저게 육신이구나.’하는 것을 분류시킬 수 있는 증거물을 남기지요.  그기에 비해 진짜 육적인 사람은 어떤 증거물을 남기는 것이 아니고, 내가 기꺼이 구원되려는 자기 생각에 몰두하지요.  하나님이 주신 것을 퍼트리고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꾸 끌어 모아 ‘이것은 내 것이고, 저것은 네 것이야.’ 이런 식으로 자기 것을 모으려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진정 너희들이 영적인 교회라면 지금부터 내가 영과 육과 육신을 분류할 때, 여기에 동의해라.’는 말입니다.  ‘이런 것이 어린아이 같은 육신적인 것이고, 이런 것이 육적이고, 이런 것이 영적이다.’ 라고 이야기 한 것에 대해 같이 동감하고 나가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고린도교회의 내용은 무엇인가?
‘고린도교회는 일단 교회다.  1장을 봐라.  은혜로 되었잖아.  그런데 그곳에 문제성이 있는 자들이 있더라.  그러니까 우리는 그런 나쁜 것은 본받지 말고 제대로 된 교회를 만들어 보자.’ 라는 자아 중심, 자기 교회 중심, 괜찮은 교회, 멋진 교회를 만들어보겠다는 지침서로 고린도 전,후서를 이용하는 거예요.  

결국 남은 것이 뭔가 하면, 주님이 아니고 ‘이렇게 해서 우리는 괜찮은 교회 되었다.’고 하는 [자기 의]를 증거하는 결과를 남긴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어떤 증거를 남기느냐’가 아니라, ‘나는 어디에 속하면 안심할 수 있을까’에 치중하면서 고린도서를 보면 전혀 엉뚱한 해석이 나오게 됩니다.

예를 들면, 고린도교회 안에서 서로 소송을 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럴 때, 영과 육과 육신을 나눈 사도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천사도 재판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너희가 어떻게 해서 너희 형제들끼리 서로 송사하고 하느냐?  차라리 속는 것이 낳지 아니하냐?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그렇다면 왜 고린도교회에서 서로 소송하는 일이 벌어졌는가?  그것이 바로 육에 속한 것이고 육신에 속한 것이고 영은 아님을 주님께서 고린도교회를 통해 증거하는 것이란 말이熾?  이렇게 바울이 설명을 했을 때, 우리는 박수를 치면서 동감하면 됩니다.  “맞습니다.  교회는 내 구원이 용도가 아니고 이미 구원 받은 자들을 통해서 영, 육, 육신을 드러내는 그러한 것으로 영적인 몸으로 다루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기존 신학이 고린도교회는 구원받았다.  우리도 잘 해보자는 식이라면, 바울은 “이러한 것이 증거되어야 참된 교회입니다.” 라고 할 때, 공감하는 자들이 일부 있을 것이고, 반대하는 자들이 있을 것인데, 결국은 자기 백성 찾기의 일환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1년 6개월 있었습니다.  2차 전도여행 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에서 천막 만드는 일을 해 가면서 섬겼던 교회가 고린도교회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어떻게 부흥시킬까, 발전시킬까 이런 것은 의미 없습니다.  고린도교회를 통해서 주께서는 어떤 증거를 남길 것인가 하는 것만 생각하면 됩니다.  이게 바로 영적인 사람의 특징입니다.

이미 구원 받았는데 무엇 때문이 구원 받으려고 애를 쓰겠습니까?  다만 이러 이러한 것을 증거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영적인 사람은 육적인 것이나 육신적인 것은 안 나타납니까?  왜 안 나타나요.  나타나지요.  영적인 사람도 육과 육신적인 것이 나타날 때, 그것이 바로 나를 통해서 주께서 이런 것을 드러내셨다고 믿어질 때 그것이 바로 영적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적인 사람은 육과 육신이 안 나타나지요.

방금 나타난다고 해놓고 안 나타난다고 하니까 좀 이상한데, 설명을 다시 합시다.  영적인 사람은 육신과 육의 요소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해석과 이해를 주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의미에서 영적이기 때문에 영적인 사람은 절대로 육신과 육적인 것이 안 나타나게 되지요.

영적이라고 해 놓고 육적인 것이 나타나니까 ‘나 지옥 갈 거야.’ 하고 나자빠질 때, 그 사람은 예초부터 영적인 사람이 아니고 다만 영적인 사람 되려고 애쓴 사람에 불과한데 이런 사람은 처음부터 영적인 사람이 아니었어요.

자기 구원받을 욕심으로 육신과 육을 버리고 금욕과 절제를 통해 영적인 사람으로 나아가려고 애쓴 사람에 불과하지 구원 받은 사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극히 육적이고 육신적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육적인 사람은 영적인 것이 나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계속 육신과 육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 말씀이 맞잖아요.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이.  제가 해석을 교묘하게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틀림없이 맞아요.

그러니까 육적인 사람은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없고, 육신적인 사람도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없고, 영적인 사람도 육적인 사람도 될 수 없고 그런 것입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이 육에 속하냐 영에 속하냐 라고 이렇게 분류시키기가 고란해요.  다만   육이라는 것은 영의 일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육신이란 것은 어린아이 같은 어리석음을 보일 때 이것을 육신적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분명히 육과 영을 나눴잖아요.  육에 속한 사람은 영의 일을 분별할 수 없다고 육과 영을 나눴다구요.  육과 영을 나눴으면, 여기에 3장에 들어가서 이런 자는 육신에 속한 어린아이 같다는 이야기를 왜 했을까요?  

다시 생각해 봅시다.
3장 1절 읽어봅시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같이 대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 있지요?  육신에 속한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이 아니고, 그런데 육신에 있다는 말이 그리스도 밖에 있다는 말도 아니에요.  그래서 이게 어려워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내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어린아이 같은 너희에게’ 라는 말이 아니에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에게’라는 말도 아니에요.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 할 때는 그 사람의 육신에 대해서 이야기 한 것이 아니고, 육과 영에 대해서는 이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 안, 그리스도 밖이라고 하지만, 육신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는 그리스도 안이냐 밖이냐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어린아이 같으냐 어른 같으냐를 가지고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해도 뭔가 확 뚫리는 느낌이 아니라 뭔가 미진한 느낌이 있지요?  그것이 뭔가 하면, ‘그래서 육신에 속한 사람은 영이란 말입니까 육이란 말입니까?’ 이렇게 또 묻고 싶은 거예요.

얼마 전에 제 아내와 같이 조조할인 영화를 봤습니다.  둘이 4,500원 내고 봤어요.  이게 [십자군 운동]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의 풍물, 경제 상황, 십자군 운동의 동기 이런 것들이 나온다구요.      

제같이 신학을 공부한 사람은 대사 하나하나가 중요하고 역사적 상황들에 다 관심을 갖게 되는데, 제 아내는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 아니니까, ‘재미있었나?’고 물으니까 ‘별로 재미없다.’고 해요.  

제가 “그 영화가 재미있더냐?”고 물은 것은, 그 영화를 본 사람에게 해당되는 질문이지요.  남자한테 묻느냐 여자한테 묻느냐는 관점이 아닙니다.  그 영화를 본 사람에 한해서 ‘그 영화 재미있더냐’는 물음이 성립되는 거예요.

어찌했던 간에 사도 바울은 손해 볼 것이 없는 거예요.  ‘저사람 있지.  어린아이 같아.’ 이 소리를 본인이 들었어요.  ‘뭐! 내가 어린아이 같다고.  내 나이가 80인데.’ 이렇게 나오면 육의 사람이고, ‘내가 어린아이 같다구요.  그럼 어떻게 하면 어른이 될까요?’ 이렇게 나오면 영적인 사람이에요.

영적이냐 육적이냐는 것은 유보적이에요.  육신이란 것을 이야기함으로서 어느 쪽에 속하는지는 그 사람의 반응으로 아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육신이란 개념입니다.  이제 좀 잡히십니까?

육신적이라고 할 때, 그것은 육적이냐 영적이냐 하는 것이 아니라, ‘왜 어른답지 못하고  어린이이 같으냐.’ 하는 것이 육신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서의 내용은 교회 밖의 사람에게 한 것이 아니고 교회 안의 사람에게 이야기한 것이기 때문에 육신적인 관점에서 해석을 하면 다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육신적 관점이 한 마디로 뭐냐?  그것은 어른과 어린 아이의 차이점을 보면 되지요.

어린아이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아를 떠나지 않습니다.  자기 집착이지요.
만약 이런 아이 같으면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자기 반에 모든 아이가 휴대폰을 갖고 있는데, 한 아이가 ‘애들아 휴대폰이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어?  아무 필요 없는거야’ 이렇게 말했다면 이는 학부모지 어린아이가 아니잖아요.  이렇게 나왔을 때, 그 순간 말한 아이는 어른이 되고 나머지 전부는 어린아이가 되겠지요.

바로 이 어른이 사도 바울입니다.  물론 고린도교회에 사도바울의 말에 동감하는 사람이 있겠지요.  그런 사람은 어른입니다.  다만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해 어린아이 같다는 말을 한 것은 본인은 어린 아이가 아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자기는 어른이기 때문에 ‘그것은 어린 아이야’ 라는 것을 말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린 아이의 특징은 자기 집착에서 헤어나지 못한 자입니다.  이런 자를 육체에 속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자기 집착에서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그 결과가 제 2의 자아상을 여기에 둡니다.  어른들은 행동을 하게 되면 자아가 없어지고 자기보다 더 큰 세계가 보이지요.  그런데 어린 아이는 행동을 하면 그 행동 안에 더 멋있는 자아상을 상상하게 됩니다.  이게 어린 아이의 특징입니다.

특히 어린 아이들은 유혹받기 쉬워요.  예를 들어, 서랍에서 돈을 훔쳤잖아요.  그런데 돈 훔친 것이 나쁜 짓 인줄 몰라요.  뭐에 신경 쓰는가 하면 ‘엄마가 화내면 내가 매를 몇 대 맞아야 하는가?  그 때 내가 얼마나 아프겠는가?’ 하는 것만 생각해요.  돈 훔친 것이 한국 경제에 왜 나쁜지 몰라요.

어른과 어린아이는 정도문제지요.  내가 빚이 많아서 빚을 좀 갚으려고 은행원하면서 불의한 방법으로 고객을 확보해서 보너스를 많이 받아 빚을 청산했을 때, 아내는 돈 많이 벌어온 남편이 너무 고맙고 좋기만 해요.  다음 달에도 많은 보너스 챙겨오기만을 기다리지요.  그러나 그로 인해 서로 은행간 과다 경쟁으로 다음부터는 몇 배 더 열심히 일해야 과거 정도의 고객을 확보하게 된다는 사실을 아내는 모르지요. 상대적으로 그 아내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지요.  타인을 생각할 줄 몰라요.  

애들이 시험을 치는데, 아무 생각 없이 되는대로 문제를 풀고, 평균 62점 받아서 35명 중 34등 해도 전혀 아랑곳 않고 재미있게 뛰놀고 그러는데, 어머니가 성적표를 보면서 화를 내고 회초리를 들고 야단을 치니까 그제야 아이가 시험 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을 알지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를 아는 것이 아니라, 시험 못 치면 엄마가 화내고 내가 회초리 맞는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 때문에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이것이 뭐냐 하면, 어린 아이는 계속해서 내가 유리하냐 불리하냐 이것에만 신경을 씁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아린아이가 가장 인간다워요.  이게 육신다워요.  여기서 육신은 짐승이거든요.  

짐승들의 특징은 예의범절이 없습니다.  짐승은 자연조건에 속하고 본성대로 살아갈 뿐 인습이나 문화, 예절 이런 것과는 무관하게 살아갑니다.  무슨 본성?  생존 본성.  이 생존 본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가지고 프로이드는 ‘정신병’이라고 했어요.  

잠 오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고 육신이 원하는 대로 그냥 다 하는 거예요.  이것은 정신병 이예요.  그래서 인간은 뭐냐, 이런 짐승에서 탈피해서 인간이 되는데 여기에서 철학자들이 하는 말은, 인간에게는 이성이 있어서 이것으로 말미암아 짐승으로부터 구원한다고 본 것입니다.

이성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훈련과 훈계를 통해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예요.  이렇게 가르치지 않으면 짐승적인 본능이 나오기 때문에.  

교육학에서 가르친다는 말이 뭘 뜻하느냐 하면, 사람 보는 앞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교육이 아니에요.  교육의 목적은 ‘네 속에 이미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이성이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페스탈로찌의 이론입니다.  독일의 모든 교육, 그리고 근대 교육의 중심은 이 페스탈로찌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는 페스탈로찌 하면 운동장에 깨진 병조각을 줍는 것만 생각하는데, 이 사람은 인간이 갖고 있는 신이 주신 형상을 본인이 알아서 개발해 내도록 자극을 주는 것을 교육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나중에는 프뢰벨까지 나오지요.  유치원의 놀이기구 그것을 ‘은물’이라고 하는데, 장난감은 장난감인데 교육용 자재를 ‘은물’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독일 유치원 교육에서 처음 나온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부모가 돌볼 수 없으니까 본인이 갖고 있는 이성적인 잠재력을 개발하도록 자극을 주어서, 본인 스스로 ‘나에게도 이런 재능이 있었구나.’를 깨우쳐 주는 것이 교육이지요.  이것이 삐아제의 이론이고, 또 콜버그라는 사람의 [도덕 발전론]입니다.  이 사람은 인격, 품위, 도덕적 양심 이런 것들이 어릴 때부터 성장할 때까지 어떻게 발전되어 가는가를 연구한 사람입니다.  

그리면 콜버그 같은 사람이 완벽하게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교육학자가 인성과 품성을 스스로 개발한다고 했지요.  그러면 교육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할 수 있겠구나 생각하지만, 경제학자가 보면 ‘놀고 있네!’ 라고 합니다.  백날 인성과 인품을 개발해도 사람이 배가 고프면 ‘언제 교육을 배웠냐?’하면서, 고급적인 아이디어를 이용해서 타인을 이용합니다.  그러니까 아담 스미스같은 경제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리 개인적인 인격이 고상해도 경제적으로 사회 정의를 이루지 못하면 말짱 도로묵이고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해서 나온 것이 존 롤스의 [정의론]입니다.  이게 뭐냐 하면, 기회를 균등하게 주고 분배를 공평하게 하는 것이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는 한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법은 그 때 그 때 진화해야 되고 형편따라 달라져야 되지 도덕적 법을 고집하게 되면 경제 현황에 맞지 않다고 주장했어요.

사람들의 이론을 잘 들어보면, 경제학자의 이론으로는 그들만이 인류를 살릴 수 있을 것 같고, 교육학자의 주장을 들어보면 그들만이 인간을 바른 길로 인도할 것 같고 그렇지요.  그러나 그 모든 것의 문제점은 육신, 자아 중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바로보지 않기 때문에 나온 주장인데, 이것이 바로 어린아이 같은 육신에 속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전체를 보지 못하고, 우주적 원리를 모르고 늘 자신의 일상적인 것만을 생각하고 고민하고 염려하면서 마땅히 자신에게 그런 권리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면서 사는 사람이 육신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육신적인 사람이 아닌 자가 누구입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육신적인 사람이 아니었지요.  예수님은 이 땅에서 머리 둘 곳도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버지가 죽어서 장사를 치른 후에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하니까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했어요.  이게 얼마나 영적입니까?  아버지 장례식도 육신에 속한 것으로 대 자연의 원리로 보면 아무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사람이 죽는 것이 별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 것 회수해 가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옷 갈아입는 것이다.  “더러운 옷 벗어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 것이다.”  그래서 죽는 것을 아까워하는 것은 마치 옷 벗기를 싫어하는 개구쟁이 같은 짓이고, 개구쟁이가 뭡니까?  어린아이 아닙니까.  자기 밖에 모르는.

어린아이가 “죽으면 안돼!  나 죽기 싫어!” 하면, 예수님은 “너 옷 안 벗을래.  이 녀석아.”

제발 자아라는 옷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일부라는 옷으로 갈아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이 하늘에 속한 형상처럼 우리도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을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옷은 흙에 속한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옷을 바꿔 입는 것이 그렇게 섭섭합니까?

이렇게 육신에 속한 사람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영적인 사람이 아니라, 육신이 뭐며, 육이 뭐며, 영이 뭔가를 보면서 이렇게 세상을 넓게 볼 수 있다는 자체가 영에 속한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계속 진도 나가 봅시다.
3장 10절을 봅시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 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하면, 3장 3절에 보면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이렇게 되어 있지요?

다시 설명합니다.  
제가 물을 테니 답변해 보세요.
육신에 속한 사람이 뭐가 돈독한 사람이라구요?
[자아]지요.
자아가 형성되면 뭐가 보이겠습니까?
[타인]이 보이지요.

사람이 강하면 남에게 피해를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무 강해서 모든 사람이 그분 앞에서 다 죄인 아닙니까.

자아는 아무리 해도 타인을 타라 잡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자아의 특징이에요.  상대방을 이해한다고 아무리 해도 상대방처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 자아의 한계입니다.  이것을 네비나스라는 사람은 ‘초월’이라고 했습니다.  예전의 ‘초월’은 더러운 곳에서 성스러운 곳으로 뛰어넘는 것을 ‘초월’이라고 했는데, 네비나스는 그렇게 보지 않고 자아에 갇힌 자가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초월’에 해당되기 때문에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단 것입니다.

그러면 신은 어디에 있는가?  타인의 얼굴로 온다는 것입니다.  이 얼굴은 내 자아로 말미암아 피해를 입은 양태로 자아에게 다가옵니다.

나 때문에 피해를 입은 자가 여러 명이겠지요.  그러면 그들이 내게 피해를 호소합求?  ‘너 때문에 내가 아프다. 너 때문에 내가 괴롭다.’ 할 때 비로소 자아는 ‘초월’과 접촉이 됩니다.  여기서 진정한 이웃 사랑이 나옵니다.  이것이 네비나스의 철학입니다.

신은 바로 우리 때문에 일그러진 모습으로 오는 거예요.  십자가의 아픔으로 나타나면 그 십자가의 아픔 속에 신의 얼굴이 들어있고, 그 얼굴은 우리 때문에 상처받은 아픔으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이 네비나스의 주장에 대해 신학자들이 깜짝 놀랐어요.  철학으로 십자가의 신학을 풀어낼 줄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이 사람이 기독교 신자냐?  아닙니다.  유대인이에요.

마르틴 부버라는 사람은 유대인 신학자인데 이 사람은 ‘나와 사물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너의 관계’라고 보았습니다.  사물의 관계란 뭐냐, 나와 그것.  “그 자식이 말이야, 그 놈이”에서 그는 寬@?아니에요.  내 앞에서 물건에 지나지 않아요.  그래서 그 물건은 부서져도 그만 이예요.  그런데 마르틴 부버는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주신 이웃 관계가 깨지니까 진정한 신의 관계는 뭐냐, 나와 너의 관계로서 그 안에 신이 존재한다고 본 것입니다.

유대인 수용소를 거쳐 가면서, ‘인간이 무엇인가? 인간이 어느 정도 지독하게 할 수 있는가?’ 이런 것을 연구하면서, 그러면서도 신을 부정하지 않고 신의 사랑은 바로 ‘신의 모든 죄는 나와 그것과의 관계에서 발생하고, 신의 모든 사랑은 나와 너의 관계에서 발생된다.’는 것이 마르틴 부버의 주장이라면, 이에 한 걸음 더 나가서 그런 ‘너’가 그냥 ‘너’가 아니라 내 때문에 피해보는 당사자의 입에서 나오는 ‘너’라는 것입니다.  이럴 때 진정한 윤리와 도덕은 피어난다고 본 것입니다.  

이 철학의 문제점이 뭡니까?  이것 하고 둘째 시간 마치겠습니다.
문제점이 뭘까요?

성경에서 말하는 죄란 것은 예수님이 와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네비나스가 주장하는 죄는 뭔가, 내 때문에 피해를 입은 상대방이 있으면 그것이 나에게 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것은 뭡니까?  윤리, 도덕적 죄지요.  그렇다면 네비나스의 철학에 의하면 예수님은 필요치도 않고, 정신병자지요.  모든 사람을 죄인이라고 했으니까.  자기 빼놓고.  

반대로 이야기해서 복음을 안다는 것은 결국 뭐라고요?  윤리, 도덕이 아니고,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인 것을 깨닫는 것이 복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상하기 짝이 없는 철학도 다른 복음이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 다른 복음을 증거하는 오늘날 교회는 어떤 곳이냐?  감리교, 장신, 자유주의 신학 등등이지요.  이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와 모순을 교회가 나서서 해결함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아직도 이 사회에서 유용한 기관임을 알리는 것을 사명이라고 여깁니다.

이런 한신, 장신, 감리교, 천주교 등이 이런 신학을 펼 때, 무식한 기존 교단이 반박을 못해요.  기껏해야 ‘그렇게 해서 교회가 되느냐?’는 식의 주장만 하지요.  이렇게 반박하는 쪽도 복음이 아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철학이나 교육학 등은 이웃에 대한 아픔에 관심을 가지면 그것이 사랑이라고 여깁니다.  옥에 갇힌 자를 돌아보고, 헐벗은 자를 도와줄 때 그것은 종교와 관계없이 이것이 곧 구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저도 교사 생활하면서 여름방학 때 연수를 받았는데, 강의하는 교육학자들이 저렇게 복음을 모르는가 하는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아직 신학을 공부하기 전이었고, 다만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책을 읽었는데 그래도 복음이 아닌 것이 구분이 되었습니다.

영과 육과 육신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광주 강의 6-3

세 번째 시간 시작해 봅시다.

성경 한 구절 찾아봅시다.
3장 21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 이것입니다.
사람을 자랑하면 육신에 속한 사람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지옥 가느냐, 천당 가느냐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어린 아이같이 세상을 좁게 보는 것이 육신에 속한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것은 영에 속한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사람 자랑 안 할게요.’ 이렇게 나오면 됩니까?  그것이 아니라, 23절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고 되어 있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그 뒤에 나오는 결과가 어떠해야 육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까?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야하는 것이 나와야 해요.

‘하나님의 것’이란 말은, 그 뒤에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는 것이 나와야 해요.  
이런 사람은 엉터리지요.  ‘나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나만큼 믿음 좋은 사람 있으면 나오라고 해.’  이렇게 되면 안 됩니다.  이것은 여전히 자아가 살아 있기 때문에 이렇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계속해서 ‘자아’는 타락된 이후에 나온 죄악 된 속성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제 생각과 제 얘기를 자꾸 오해하는 것이 뭐냐 하면, ‘그러면 내가 안 하면 누가 하냐?’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요.  ‘행위의 주체자가 내가 되어야지 나 말고 누가 한단 말이냐?’  

‘이 목사는 주체를 없앤다.’ 이런 소리를 합니다.  주체를 없애는 것 자체를 없애버리면 이것은 불교입니다.  ‘자기를 반성하는 자기를 반성한다.’고 하면 반성의 되풀이에 불과해요.  그러나 ‘주님을 자랑하기 때문에 더 이상 내 자랑할 이유가 없다’고 할 때에는 영적인 거예요.

그런 점에서 고린도전서의 ‘터’ 비유를 봅시다.  3장 10절에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자아가 없는 상태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란 입장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를 어떻게 보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진다.’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관점이라면 무엇이 나와서는 안 됩니까?  “나 어떻게 구원 받아요?”라는 소리가 나오면 안 되지요.  “나 그러면 구원 받는 것 맞네요.” 라고 해서도 안 되지요.  지금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거기에서 왜 자기 구원을 거론하느냐는 것이지요.

그래서 14-15절에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 했을 때, 이것은 내가 구원 받는가 못 받는가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는 이런 식으로 일하는구나.’ 라고 받아드리는 그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란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이것은 세상 좀 넓게 보라는 것입니다.  

아직 잘 이해가 안 되는 것 같은데,
엄마가 아이 손을 잡고 공원을 산책하는데 개가 막 짓고 있습니다.  이 때 아이는 개가 무서워서 ‘엄마 저 개 발로 차버릴까’ 아니면 ‘딴 길로 가’ 할 때, 엄마가 ‘괜찮아 엄마가 있잖아’ 라고 합니다.

그러면 얘가 그냥 ‘아, 엄마가 곁에 계시는구나’ 하고 개가 짓든 말든 그냥 가면 될 텐데, ‘엄마가 있으니까 개를 한 번 차야지’ 라든가 ‘엄마가 있으니까 개에게 안 물렸다’ 이렇게 나오지요.

그러나 엄마의 취지는 개가 짓든 말든 그냥 아름다운 공원 산책하고 즐기자는 것입니다.
엄마가 있어서 개를 찬 것도 중요한 것이 아니고, 엄마가 있어서 개에게 안 물렸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린 아이는 여전히 개를 의식하고 개를 상대하려고 하고 그기에 신경을 쓰고, ‘나는 이제 저주 안 받았어’ ‘나는 복 받았어’ 이런 식막?자꾸 생각하는 자체가 이 본문에 대해 잘 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취지는 뭔가 하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것인데 더 이상 내편 네편 나누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래야 교회가 교회답고 어린아이 같은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구원 받았네, 안 받았네 이렇게 따지고, 마일리지를 많이 쌓아야 복 받지 안 그러면 공력이 다 불탄다는 식으로 말한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터를 닦았는데 그기에 예수 그리스도 말고 사람이 한 것은 다 없애버린다는 것은 ‘더 이상 너 자신의 행함에 대해 신경 꺼’ 여기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뜻 아니에요.  개인적인 구원을 따져서는 아니 되고, 눈을 크게 떠서 우주적인 원리를 보자는 것입니다.  

이제 3장 끝부분을 보면 이해가 되겠지요?
21절에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는 구절에서 어떤 사람은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는 구절을 오해해서 ‘만물이 다 내 것이구나’하고 나오는데 그런 뜻이 아닙니다.  ‘만물은 다 주님의 것인데 우리가 그 안에 포함 되었다’는 뜻입니다.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는 구절 이후에 23절에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 나와 있잖아요.  
아시겠습니까?

3장 끝부분을 보면 모든 것을 다 통달한 느낌이 들고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없다고 여겨 성경책을 덮고 싶어요.  ‘다 뗐다.  이제 4장 이후는 잔소리밖에 안 된다.’

그런데 4장에서 ‘우리는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다’고 할 때,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3장 끝에서 ‘모든 것을 다 알았다.  그러니까 4장을 볼 필요가 없다.’ 라고 했는데 4장에 보니까 ‘우리는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다’고 나올 때 우리가 단박에 갖는 불만이 뭡니까?  “하나님이여! 만물을 다 아는 우리한테 기껏 하나님께서 이걸 축북이라고 주십니까? 이런 식으로 우리를 대하면 섭섭하지요.  천하를 아는 우리가 어떻게 만물의 찌끼가 됩니까?”  했을 때, 고린도전후서를 보면 이렇습니다.  남의 희생자가 되고 남보다 비천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천하를 알게 되었다는 그 기쁨을 증거하는 것이 아무에게나 주어진 축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게 보통 능력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3장만 보고 책 덮는 사람은 어떤 경우냐 하면, 아마 지식적으로 ‘더 이상 들을 것 없다.  들을 것은 다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우리 모임이 처음에는 많이 나오다가 나중에 몇 명 안 남는데, 안 나오는 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제 다 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실제 상황에서 아는 사람에게 남보다 더 낮은 위치에 몰아넣으면 반발이 일어납니다.  ‘기껏 우리한테 해 주신 것이 이것밖에 안 됩니까?’하고 따지게 됩니다.  이럴 때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이렇게 약한 자가 된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더 풍성히 아는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능력 그 자체다.’ 라고 이야기 하지요.

예수님은 내가 당한 것보다 더 낮은 자리에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우리보다 더 낮은 자리에 갔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강의한 것은 '우리의 눈을 더 크게 넓히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4장부터 보면, 예수님께서 미천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얼마나 천한 몸으로 좁혀왔는가를 거꾸로 시선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느냐 는 것입니다.    

못난 우리를 건지기 위해서 예수님은 더 못난 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그 큰 사랑을 네가 얼마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염치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를 구원하신 분의 그 크신 사랑을 입 싹 닦아 버리고 전혀 사랑 안 받은 것처럼 행세하고, 자기 챙길 것만 챙기고 휘파람 불면서 자기 이익만 따지고 있을 때, 이런 자를 ‘싸가지 없다.’고 합니다.  ‘싸가지 없다.  염치없다.’고 해서 지옥 간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런 것이 바로 육신적이란 말이지요.  

사람이 인품이 좋다.  예의 바르다.  이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신 크신 주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터져 나와야 성도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 속에서는 자기 의나 자기 자랑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총과 사랑만을 자랑하게 되지요.  

행복한 가정이 뭐냐 하면, 상대방에게 서로 감사할 때 수입이 적더라도 그 가정은 행복합니다.  

그래서 사랑할 때는 상대의 장점을 찾기 바쁘고, 미워질 때는 상대방의 약점을 크게 부각시키지요.  교회 처음 개척할 때는 서로 사랑해서 서로 고마워서 서로의 장점을 자랑하기 바쁘다가, 교회 마음에 안 들고부터는 서로의 약점을 보게 되지요.  

‘고마움’을 가지고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자유주의 쪽에서는 이것을 크게 오해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을 내가 해야 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에게 손을 내밀고 찾아오십니다.  이것을 가지고 ‘은사’라고 합니다.

주님의 사랑에 닫게 되면 자신은 불의를 행치 않고, 온유하며, 화평하며, 자기 유익을 구치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게 되며,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천사의 말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사랑이 아니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 없으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고, 사랑은 은사입니다.  주님의 선물입니다.

내가 나오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이 오게 되면 고마움이 터져 나오고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고마움이 없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도둑놈 심보를 가졌는지 자기 챙길 것만 챙기고 도망치는 버릇이 있어요.  그래서 줄 때 까지만 고맙고, 그 고마움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소유주가 됩니다.  받을 때는 고마움을 가지지만 일단 받고 나면 내 것이 되고 이것의 소유주가 되지요.  이러니까 사랑이 중간에 싹뚝 끊어지지요.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입니다.  사랑을 쳐다보며 모인 것이 아니라, 각자의 잘남으로 모였기에 여기에는 경쟁과 시기가 있습니다.  

4장 9절에서 바울은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서 뭐라고 했는고 하면,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사도 자신을 뭐라고요?  ‘하나님이 자기를 죽이기로 작정했다’고 했으니, 이 운명이 바뀌겠습니까? 안 바뀌겠습니까?  바뀔 턱이 없지요.  잠시 죽이는 폼만 잡다가 살리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끝까지 죽이기로 작정을 했지요.

하나님이 죽이기로 작정을 했으면, 사도는 그것을 받아들여야지 여기에서 다른 욕심을 부리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사랑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죽이기로 작정되어 있는데 아직도 살아 있으니 이것도 사랑이고, 자기는 굶어 죽어야 하는데 아직도 교회에서 봉급 주니까 이것도 사랑이고, 자기는 마땅히 추방되어야 하는데 아직도 설교를 시키니까 이것도 사랑이고, 주위의 모든 여건이 사랑이지요.    

제가 여러분을 만난 이것도 사랑이고, 여러분이 저를 만난 이것도 사랑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밑바닥 되는 것이 정상적인 모습입니다.  죽이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그런데 그 밑바닥이 밑바닥이 아니었습니다.  4장에서는 분명히 밑바닥인데 6장에 보면 천사를 재판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천사가 어떤 존재입니까?
천사는 아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천사의 특징은 한 마디로 자유都求?  천사는 세금을 낼 필요가 있습니까?  교통 법규를 지킬 필요가 있습니까?  천사는 구애받을 것이 없어요.  죽지도 않아요.  천사처럼 산다는 말은 붕붕 날아다니는 거예요.
천사만큼 세상을 초월해서 사는 그런 존재가 없잖아요.

그런데 그 천사마저 누가 재판한다고요?  성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는 어떤 자입니까?  정말 대단한 존재입니다.

천사는 배를 째도 그 안에 피가 없습니다.  생명의 피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 안에는 예수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기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생명을 증거할 목적으로 주님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 천사는 성도를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인간 자체가 좋은 것이 아니라 성도 속에는 주님의 살과 피가 들어있기 때문에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천사는 예수님의 형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형제이고 양자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보통 신분이 아닙니다.

우리야 맨날 실수하고 죄짓고 하지만 우리 속에 예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단 말이지요.  따라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천사까지 재판할 정도로 너무나 위대하기 때문에 ‘밑바닥까지 자연스럽게 내려가도 상관없지 않는가?’  이것이 바로 어른스럽고 영적인 사람입니다.

물론 이렇게 되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보고 어린아이 같다고 하고 육신적인 생각이라고 책망 받아 마땅하지요.  ‘성경대로 지키자’가 아니라 우리는 계속 어린아이로 남는 거예요.

빌립보서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소원이 하나 있는데 내가 몸을 떠나 일찍 죽고 싶다.’ 왜, ‘나도 숨 좀 쉬자’ 이 말입니다.  하지만 떠나지 못하는 것은 ‘철없는 어린아이 같은 너희들에게 증거할 것이 있어 아직 못 떠나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이 정도로 바울은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이런 자유로운 사람의 글을 우리는 지금 겁도 없이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되고 싶지도 않으면서 그의 글을 보고 있다 이 말입니다.  참 우끼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미천하다’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다’고 백날 얘기 해봐야 사도 바울은 웃으면서 이야기 합니다.  왜냐, 세상에 대한 그 무엇도 부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최근이 끝난 ‘신입사원’이란 TV드라마가 있었어요. 강호라는 사람이 나와서 연기를 하는데, 입사할 때 0점으로 들어와서 나중에는 자기 회사를 살린다는 그런 내용인데, 그것을 보면서 뭘 느꼈는가 하면, 인생의 의미와 목적 같은 것은 그 드라마에서는 하나님이 만드는 것이 아니고 인간들끼리 서로 게임을 만들어 그 게임에 빠집니다.  그러니까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 인간입니다.  누가 성공했느냐 하는 그 성공의 의미를 하나님이 주신 그런 기준은 다 없애버리고  자기를 끼리 모여서 자기들 끼리 정해서 이것은 성공이고 이것은 실패라고 하자. 고 게임을 만들었어요.

축구가 11명이 한다는 것 성경 어디에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그러나 축구는 11명이 해요.  이것은 인간이 자기들끼리 만들어서 해요.  그러니까 이것은 자연적 조건에서 나타난 관습적인 것 인데 이것을 가지고 가치로 보고 진리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 진리와 가치를 적어도 초월해 주는 단체가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것에 얽매인다면 이것을 가지고 사도 바울은 ‘다른 복음’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초월케 하는 복음은 무슨 복음?  진짜 복음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고린도전서를 한 번 읽어 보셨습니까?

육신에 속한 사람은 이 고린도전서를 읽어도 ‘하나님! 제가 지금 성경 2장 읽는 것 보고 계시지요?  성경 읽었으니까 복 주세요.’ 이렇게 나옵니다.
성경 2장 봤으니까 그에 대한 노동의 대가를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복음을 전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성경을 안 봐요.  복음 전하기 전까지는 성경을 읽으면 복 주는 줄 알고 읽었는데 그것 때문에 복이 오는 것이 아님을 알고부터는 아예 성경 안보기 운동으로 들어가요.  

박주영 선수가 진짜 복음을 안다면 상대방이 꼴을 넣었을 때도 기도해야 합니다. 천사들의 동네에서는 골을 넣으나 안 넣으나 의미가 없음을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해요.

성경에 축구 잘 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것이 어디에 나옵니까?  없어요.  그런데 그것을 기도한단 말입니다.  그것이 결국 교회라는 것이 사람 모집해서 자기를 끼리 스스로 만든 안도감입니다.  성경과는 무관하게 자기를 끼리 모여서 규율을 만들어서 이렇게 하면 영광이고 이정도 하면 믿는 것이고 구원 얻을 것이라고 서로 위안을 주고 받는 것입니다.
모두가 사기입니다.  

4장 19절을 봅시다.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 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노니”  
여기에서 ‘능력’이 무엇인가 하면, 사도 바울을 하나님이 만물의 찌끼같이 취급해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인 줄 아는 그것을 말합니다.  
그런 능력이 너희에게 있는지를 내가 알아보겠다는 것입니다.

5장 1절에 보면,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라고 되어 있는데, ‘음행’이 왜 생기느냐 하면, 교만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교만이 왜 생기느냐 하면, 겸손하지 않기 때문에 생깁니다.  왜 겸손하지 않느냐 하면, 세상 속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가치와 의미를 찾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냐?  내가 과연 구원 받았느냐?’를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알려고 하지 않고, 세상 경험을 통해서, 그리고 남들에게서 확인하려고 할 때 이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내가 구원 받았다.’는 것도 확인하려고 하고, ‘구원 안 받았다.’는 것도 확인하려고 하고.

그러니까 ‘교만’이란 예수님과 관련을 맺지 않고, 다른 사람이 나에게 뭐라고 이야기하는가에 관심 기울이면서 그 소리에서 내 구원을 확증 지으려 하고 점검하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확인해서 구원 못 받았다고 여겨지면 그 때부터 금욕으로 나옵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에 나와요.  어떤 사람은 먹는 것을 골라서 먹어요.  결혼을 안 하려고 하는 자도 있어요.  이런 짓 하는 것도 교만이에요.

반대로 구원 받았으니까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고 나오는 것도 교만입니다.

여러분!  천사가 자기 구원 받은 것 확인하기 위해서 음행하겠습니까?  죄이기 때문에 안 하는 것이 아니고, 구태여 할 이유가 없지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축구를 해서 구원 받는다고 하면 축구를 하겠는데, 구원은 축구와 관계없고 십자가와 관계있어요.  그런데 꼭 축구를 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이 교만이란 말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인 간: 주님이여!  저, 축구 국가대표 감독입니다.
하나님: 그래서?
인 간: 저는 주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습니다.  그런데 구원 받은 것은 받은 것이고요, 이번         에 우리 팀이 4강에 올라가야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너희 팀이 3전 전패를 해도 네가 그것을 수용하겠느냐?’고 묻지요.

‘이왕 구원 받았는데, 남자가 되어서 한 번은 바람피워 봐야지’ 라고 할 때 하나님은 ‘남자가 되어서 바람 한 번도 못 피워도 너 내가 감사할래’ 이렇게 묻습니다.
‘이제 구원 받았으니까 술 먹어도 괜찮지.’ 라고 나오는데 주님은, ‘평생가도 술 한 번 못 먹도록 만들어도 너 나한테 감사할 수 있느냐?’ 이것을 묻는단 말이지요.

그리니까 구원의 기쁨보다도 구원 받았으니 은근히 내 하고 싶은 것 한 번 해보겠다는 그 기대 자체가 육신에 속한 어린아이 같은(지옥 갈 사람이 아니고) 사람이란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음행’에 대해서 이야기 한 것입니다.  

음행에 대해 이야기 하고 술 취한 것 등에 대해서 이야기 한 것이 뭐냐 하면, 지금 너희들이 갖고 있는 신분은 일부러 확인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이 세상과는 관계없는 주님께서 주신 은혜에서 나온 것임을 네가 알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광주 강의 7-1  2005.  6.  24.   (이근호 목사)

기도 생략하고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제가 고린도전서 3, 4장을 강의 하려고 합니다.
먼저 3:21-23절을 읽겠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바울이 이렇게 하는 취지가 무엇이냐 하면, 잘라내는 작업에 들어가요.  꼭대기는 남기고 밑바닥은 잘라내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어떠냐 하면, 밑바닥부터 점차 잘라내고 꼭대기만 살리는 방향으로 일을 하십니다.  

이 밑바닥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미국이란 것도 있고 영국도 있고 필리핀도 있고,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고, 학생도 있고 등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결국 하나님이고, 나머지 ‘너는 여자 나는 남자, 너는 한국 사람 나는 미국 사람’ 이것은 별로 안 중요하단 말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내가 한국에 살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갑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작별행사를 하고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를 부르면서 울고 야단을 칩니다.  그런데 이 고린도전서 3장에 의하면 내가 한국 살다가 미국 간다든지 아니면 예배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든지 이러한 일은 나에게는 중요한 일이고 꼭대기처럼 느껴지지요.

말씀을 보기 전에, 고린도전서 3장을 알기 전에는 내가 최고고 내 문제가 중요하고 모든 의미는 다 내게 쏠린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것이 말씀에서는 용납이 안 돼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위해 주신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이 스스로 이루실 것을 다짐하고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일을 어떻게 하시느냐 하면, 여자, 남자, 미국, 필리핀 이런 다양함, 이런 것을 지워버리고, 결국 뭐가 남느냐 하면 꼭대기만 점차 우리 눈에 크게 보이는 식으로 일하시는 것입니다.  

공부 시작 시간이 되었는데 여러 분들이 도착하지 않아서 김 집사님이랑 목사님이랑 경기도 연천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왜 김동민 일병이 동료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쏘았느냐?”  

나도 군 생활 했고, 나도 매일같이 고참으로부터 매 맞고 잤는데 그래도 총으로 그들을 쏠 생각은 없었어요.  이것은 내가 김일병 보다 착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 대화에서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고참이 괴롭히고 훈련이 힘들고 해도 군 복무기간이 끝나면 밑바닥으로부터 벗어나요.  어떤 사이라도 군을 제대하면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서로 헤어져요.  그러니까 군에서의 고참 졸병관계는 한시적인 거예요.  그런데 그것을 참지 못하고 총으로 쏘았다는 것은 그 군 생활이 자기 인생의 전부로 생각한 거예요.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인생이 나는 전부인줄 알고 있어요.

이것은 총질을 한 김 일병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고 오늘날 우리들도 해동되는 이야기예요.  23절 말씀을 다시 보세요.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이런 것들은 나중에 하늘나라에 가면 아무 의미 없는 것들이에요.  ‘나는 80년 살았다.  나는 40년 살았다.’ 이런 것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지금도 작업을 진행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고 제게 물으신다면, “하나님의 뜻은 밑바닥 지우기다.”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런데 왜 우리는 이것을 안타까워하는가 하면, 밑바닥을 나의 꼭대기로 보기 때문입니다.

연천 군부대에서 8명이 죽었는데 그 부모들 실신하지요.  왜 부모들이 실신합니까?  20살 먹은 아들 그동안 키우느라 얼마나 애지중지했습니까?  그리고 부모에게 그 자식은 유일한 희망이고 요즘은 대부분이 외아들이고 그래요.  그런 아들이 죽었으니 오죽하겠습니까?

그런데 고전3:22절 말씀을 보면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 다 의미 없어요.  여기 “바울” 대신에 여러분 이름을 한 번 넣어보세요.  “이근호”도 아무 孤?아니고,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아니고 마지막 꼭대기는 하나님이고 그 밑에는 예수님이고.  그런데 하나님과 예수님은 눈에 안 보이는 구름 위의 꼭대기에요.  이 세상에서는 안 보이는 위치에 있어요.  

그리니까 결국은 이 세상은 스스로 독립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꼭대기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의해 보이는 세계가 조정 받고 있고, 운영되고 있고, 진척되고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보이지 않는 분에 의해서 보이는 세상은 지금 지워나가고 있고, 제거되고 있고, 무너지고 있는 중입니다.

이것을 만화로 그려 볼게요.  이런 것은 현장에 와서 들어야지 그냥 음성으로만 들으면 안 되는데.
점선으로 표현합니다.  이 지점은 두 살 때, 여기는 세 살 때, 이쯤은 열다섯 살 때 이렇게 계속 쭉 나가는데 각 시대마다 추억이 있어요.  그런데 믿는 사람들의 이 추억을 예수님이 지웁니다.  왜, 꼭대기만 남기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내가 태어난 것도, 내가 산 것도 이 모두가 주님께서 역사하신 것이었구나 하고 주님만을 남기게 되지요.  

이것이 바로 영적이 사람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분에 의해 눈에 보이는 내가 관리되고 있음을 아는 자입니다.  이것이 믿어지는 사람은 영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면 육적인 사람은 뭐냐?  지난 시간에 했습니다만 복습하는 의미에서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인간대 인간의 관계망이다.”  라이프니찌가 한 말인데요, 관계망이란 표현은 어려운 표현인데 쉽게 말하면 거미줄이란 것입니다.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은 인간대 인간에 의해 형성된 거미줄 같은 망으로 존재하고 있고, 움직이고 있고 흘러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 일리가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부터 고린도전서 3장을 강의합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가 뭐냐 하면 분명히 자신은 성도이고 교회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 해놓고 사도 바울이 보니 육신에 속한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드러내요.  그게 뭐냐 하면, ‘나는 아볼로 파다 나는 게바 파다 나는 바울 파다.’ 이렇게 나오니까요.

그런데 바울이 이런 자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상당해 재미있는 것이 어떤 자가 바울 자신을 지지하고 추종하고 있는데 그런 자를 향해 바울이 어린아이 같다고 지적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 같으면 나를 지지하고 따르면 고마워서 ‘아이구 감사합니다.’ 라고 할 것 같은데.

진중권이란 사람이 있어요.  목사님 들어보셨습니까?  [미학 오디세이]라는 책도 썼는데, 이 사람은 시사 평론도 하고 해서 상당히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는 유명한 사람입니다.  책을 내면 무조건 사서 읽는 고정적 팬이 많은데 그런데 이 사람의 약점이 뭐냐 하면, 일체 자기 팬을 관리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를 분명히 좋아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질타하고 나서는데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육신적인 인간들은 교회라는 것이 분명히 주님이 머리고 우리는 지체여서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이 함께 계신다는 증거가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아닙니까.  아나니아가 땅을 팔았습니다.  그 전에 바나바란 사람이 땅을 팔아 헌금을 해서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이 부부도 땅을 팔았는데 그 값의 반은 숨겨두고 전체를 낸 것처럼 사도에게 내 놓았을 때, 사도 베드로가 하는 말이, ‘네가 나를 속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속였다.’고 했어요.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는 교회란 것도 인간대 인간의 관계망이라고 본 거에요.  그런데 베드로의 말씀은 ‘네가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고 함께 계시는 성령님을 속였다.’고 하는 순간에 아나니아란 사람이 죽었고, 죽고 난 뒤에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자기 부인이 왔고 그에게 물었더니 또 거짓말을 했고 또 죽었어요.

이 때부터 사람들이 교회를 굉장히 무서워했어요.  세상 모든 관계가 인간과 인간에 의해 좌우된다고 생각했던 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거든요.

바울이 게바 파고 바울 파고 이런 것을 지워버렸어요.  이런 것을 지워야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를 증거하기 위해서 자기 추종자마저 질타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계신 곳이 교회이지 사람들만 모인다고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대 인간의 관계망이지요.

오늘 아침에 뉴스를 보니까 어떤 이단종파에 빠진 중학교 교사가 수업시간에 학생들이게  이단 교리를 가르치고 자기가 지정한 음악회에 가지 않으면 때리고 해서 인터넷에서 난리가 났어요.  그 이단이 어떤 것인지는 나오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제가 오래전에 백수로 있을 때, 서울에 교사 자리 알아보고 있으면서 안암제일교회 출석했는데 그때 초등부를 가르쳤습니다.  5학년 여자 B반을 담당해서 처음 맡을 때 4, 5명 이었는데 한 달 후에 20명 정도가 되었어요.  

그렇게 된 비결이 어디 있는지 여러분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 비결은 다른 것이 아니라 토요일에 학생의 부모를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즘 자녀교육이 참 힘들고 어려운데 일단 교회에 한 번 보내 보세요.  제가 책임지고 잘 가르쳐 보겠습니다.’ 하고 설득을 했더니만 부모가 아이들을 교회에 적극적으로 보냈어요.  그래서 한 달 만에 20명 만들었어요.  

이렇게 해서 아이들은 모였고, 그 이후에는 아이들에게 재미있게 해 줘야 해요.  교회 온다고 해서 아이들이 계속 출석합니까?  아니지요.  그래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아이들이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한 두 명씩 자꾸 늘어가니까 그 집단에 같이 어울려 떠나지 않았어요.

어떤 아이가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것은 그 학교에 자기 친구가 없다는 말이 됩니다.  즉 학교에 자기를 좋아하는 아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일학교 아이들도 친구가 친구를 좋아하고 또 다른 친구가 가세하고 이렇게 해서 서로 친하게 되면 교회 오지마라고 해도 찾아와요.

그런데 그 중 한 아이가 교회를 안 나왔어요.  그래서 제가 그 아이 학교를 찾아갔어요.  토요일 수업시간에 그 학교를 찾아갔어요.  지금 생각하면 미친 짓이지요.  제가 그 아이 담임선생님을 찾아갔는데, 무엇 때문에 오셨느냐고 묻길래, 아이가 교회에 오지 않아서 찾아왔다고 하니 담임이 깜짝 놀라요.  그런데 그 얘기가 그 아이 귀에 들어갔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다음 주에 그 아이가 교회에 나왔어요.  왜냐하면 자기 교회 안 나온 것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닌 줄 알았는데 교회 선생님이 이렇게 까지 관심을 가져 주는구나 생각하고 얼마나 좋아하는지.

이 모든 일은 제가 백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인간은 믿음이 있어서 교회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부모가 믿음이 있어서 아이를 보낸 것이 아니고, 교회를 인간대 인간의 관계망으로 짜여져 있기 때문에 친구 만들어주고, 관심 가져주고, 재미있게 해주면 찾아오게 되어 있더란 말이지요.

그런데 담임이 바뀌었어요.  그러니까 그 아이들이 안 나와요.  결국 이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예초부터 믿음이 없는 인간들을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밑바닥부터.  뭘 위해서?  꼭대기를 위해서.  꼭대기가 꼭대기답게 증거되기 위해서는 밑바닥의 인간대 인간의 관계망 이런 것은 지우는 방향으로 주님께서 교회에서 친히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을 보면 바울이 교회를 걱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신나서 어쩔 줄 몰라요.  예초부터 교회는 인간대 인간의 관계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신나하는 거예요.  제가 여기에서 고함을 질러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 뭐냐 하면, 지금까지 고린도전서 설교하는 자들이 이런 식으로 합니다.  “고린도교회가 교회는 교회이지만 아직 육신적인 교회가 되어 사도 바울을 보내서 건전한 교회로 육성하고 개혁하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되도록 하셨다.”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지워버리는 작업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교회이긴 하지만 뭔가 부족하다.  그래서 더 노력하자’ 이런 것이 아니라 ‘교회는 예초부터 너희들의 인간적인 생각과 상관없이 주님에 의해서 교회 된다.  그러니까 안심해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노력하라’는 말과 ‘안심하라’는 것은 천지차이입니다.  노력하라는 것은 아직도 부족하고 모자라는 것이고 사람에게 기대를 거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신납니다.  너희들의 인간들의 관계망과는 상관없이 이미 주님에 의해 교회 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설사 그들이 아무리 아볼라 파, 나는 게바 파, 나는 바울 파라고 쥐어뜯고 싸워도 그런 인간대 인간의 관계망과 실제 교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고린도전서를 보낸 것입니다.

제가 지난 주일 오후 설교에  ‘하나님은 사람을 믿지 않습니다.’ 라는 그 한 마디를 해 놓고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사람을 믿지 않습니다.  대신 ‘인간들아 나를 믿어라.’  인간들이 예수 믿으면 되고 하나님 믿으면 되지, 네가 네 행동 믿고, 네가 네 신앙 믿고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일체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믿을 것을 믿어야지 인간의 솜씨를 뻔히 아시는 주님이 인간을 믿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점차 지워버리고, 잘라내고, 허물어버리면서 그렇게 나갑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에 보면 아버지의 첩과 간통한 사람을 어떻게 합니까?  죽여 버렸지요.  그리고 성찬식 때 자신을 살피지 않고 함부로 떡과 잔을 먹은 자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여 버렸잖아요.  출애굽기에 안식일에 나무하는 사람을 죽였고, 무당에게 가서 점치는 사람을 죽였지요.  이렇게 죽여 버린 것을 가지고 무서워해야 합니까?  아니지요.  오히려 박수를 쳐야할 것입니다.  왜?  우리는 교회 만들기 실패해도 주님은 실패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행동을 지워버리는 주님을 보면서, ‘아 주님은 우리한테 맡긴 것이 아니구나.  주님은 스스로 모든 것을 이루어 가시는구나.  혼자서 교회 만들기에 나서는구나.’ 하고 평안한 마음으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시면 고린도전서가 해석이 되지요.
고린도전서 3장에서 제일 말썽 많은 구절이 14-15절 말씀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이 작업을 우리보고 시켰습니까?  아니면 주께서 하시는 것입니까?  이것부터 묻고 싶습니다.  대답해 보세요.  주님께서 이대로 실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알아서 자기 공력을 스스로 제거하거나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느 바보 같은 인간이 이발소에 가서 “기계만 빌려주세요.  제가 거울보고 제 머리 깎겠습니다.” 이런 자가 있습니까?  이것은 이발사에 대한 모독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생명을 우리 속에 담고 있는 자입니다.  성도를 탁 깨어보면 그 속에 그리스도의 피만 있어야 합니다.  만약 예수의 피가 없으면 천국 문을 통과할 수 없어요.  예수님의 피가 있어야 통과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들어 있어야 사람 취급 받지 복음이 없는 사람은 사람 취급을 못 받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기 생명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생명만 중요시 합니다.  겉포장만 코카콜라라고 해서 코카콜라가 아닙니다.  안에 코카콜라가 들어 있어야 코카콜라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이라고 하면, 우리는 거룩할 수 없어요.  다만 거룩한 요소가 들어올 때 거룩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거룩한 백성이란 것은 어렵게 이야기하면 ‘언약이 들어 있는 사람’, 신약적으로 쉽게 말하면 ‘예수님의 피가 들어있는 사람’을 거룩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생명이 들어 있는 복음을 절대로 양보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연천에서 죽은 군인들의 부모가 왜 그렇게 비통해 하고 실신을 하고 그렇습니까?  자기 생명 같은 자식이 죽었으니까 그래요.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볼 때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목숨이 우리보다 더 귀하단 말입니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사망이나 생명이나 이런 것은 안 중요해요.  하나님 보시기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요해요.  우주도 세상도 안 중요해요.  아들 예수가 중요해요.  예수님이 죽으신 것 때문에 하나님은 계속해서 이 땅에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아들의 죽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기 생명의 피만 전할 수 있다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자기 생명의 귀중함을 방해받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력을 이야기 한 거예요.

고린도전서 3장 14절을 해석하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이 무엇을 가리고 있다는 것입니까?’  “나는 아볼라 나는 게바” 지금 이것이 무엇을 가려요?  예수님의 생명을 가리잖아요.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우리보고 뭘 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제가 좀 전에 뭐라고 했던가요?  하나님은 우리를 믿는다, 믿지 않는다?  안 믿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교회 되는 것은 인간의 솜씨가 아니라 하나님의 솜씨로 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지워버렸지요.  무엇을 보여주기 위해서?  지금 이 교회에 성령님이 계시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죽였습니다.  그 정도로 집요하게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생명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뭘 쌓습니까?  마일리지를 쌓아요.  내가 얼마나 헌금을 했고, 얼마나 충성 봉사했고 등등.  인간은 살아 있으면서 자신이 지워져야 할 밑바닥이 아니고 영원해야 될 꼭대기로 생각합니다.  세상은 다 불타 없어져도 나는 죽기 싫다는 것이 우리 아닙니까?  연천의 김동민 일병은 다른 동료는 죽이고 자신은 피신할 생각을 했어요.    

바로 이러한 가짜 꼭대기 때문에 진짜 꼭대기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가려지는 것에 대해서 교회를 만드시는 주님께서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이런 가짜를 지워버리는 작업에 나서십니다.  

그래서 자기 공력을 많이 쌓았다는 사람은 나중에 구원 받을 때에 어떤 구원을 받는가 하면, “불 가운데서 구원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시껍했다.’ 즉 ‘혼줄 났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자기 생명밖에 모를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휴유 -’  나는 주님도 좋고 내 자존심도 조금은 챙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불 가운데서 구원 받았다는 것은 그 동안 내 마일리지 쌓은 것 다 타버리고 아무것도 남은 것 없이 겨우 달랑 구원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로 주님은 인간의 모든 행위를 다 지워버린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뭐냐,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 이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결국 남는 것은 예수님과 하나님이 전부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모르고, 7절에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고 --” 할 때,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니까 그를 무시하지 말라는 식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본문의 취지는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진짜 아볼로가 중요하고 바울이 중요할 것 같으면  22절 말씀이 없어야 해요.  그런데 바울은 22절에서 ‘바울도 아볼로도 게바도’다 지워져야 하고 남는 것은 꼭대기이신 예수님만 남아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어요.  

지난 월요일 대구 성경공부 모임에 고산에서 개척교회 하시는 박 목사님이 오셨어요.  그 목사님과 사모님이 요새 죽을 지경이에요.  83세 되신 노모가 계신데 최근 이분에게 온갖 노인 질환이 다 찾아 왔어요.  중풍에 심근경색에 치매에 등등.  그래서 박 목사님 형제분들이 어머니를 병원에 입원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박 목사님은 호흡기도 뽑고 더 이상 억지로 생명 연장책을 쓸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오히려 어머니를 계속 고통 속에 몰라 넣는 것이기에.  
  
그러나 다른 형제들은 자신이 불효자로 낙인이 찍힐까봐 굉장히 염려를 합니다.  어머니 아픈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불효자가 되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의에 흠집이 나는 것을 참을 수 없어 해요.  그래서 노모를 이 병원 저 병원 끌고 다니면서 계속 돈 들여서(결국은 돌아가시겠지만) 나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는 것으로 자신이 불효자는 아니었다는 것을 남들에게 보여주고 자신에게도 위안을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대 인간의 관계망입니다.  신앙도 없고 예수님도 없고 그저 다소나마 착해져보자.  조금이나마 바울처럼 되 보자. 라는 식의 인간대 인간의 관계망이 교회라면 그 교회 불 가운데서 억지로 구원 받을 것입니다.  ‘주님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었구나.  내 공력은 인정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공력만 남기는 것이구나.’  

고린도전서 3장이 바로 이것입니다.  ‘네 공력이냐 내 공력이냐?’
16절에는 ‘구원 받는 것이 너냐 아니면 네 속에 계시는 성령님이냐?’를 보는 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성전 책임자는 누구란 말입니까?  우리보고 성전 책임지란 말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이 책임지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  지워버리는 방식으로.  바울도 지워버리고, 게바도 지워버리고 결국은 그리스도만 남게 하는 이러한 작업을 예수님이 지금도 실시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2장 24-25절 말씀 보겠습니다.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여기에서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고 했는데 왜 자꾸 만들려고 합니까?  이게 얼마나 불신입니까?  예수님이 알아서 다 구원하는데 왜 자꾸 우리가 예수님 앞에 폼 내려고 하느냔 말이지요.  “저 예쁘지요?  저 잘 났지요?  저 착하지요?” 왜 이런 재롱을 부르느냔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안 믿는데, 이미 우리는 주님의 것인데 --

좀 더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이 있으면 인간의 대상체가 있습니다.  사람이 예수를 믿을 때 예수님을 나의 대상체로 여기면 아무리 그 인간이 노력해도 예수 안 믿습니다.  이 사람이 믿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자기 믿음을 믿지 예수를 믿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대상이란 것은 항상 뭐가 전제되어야 하는가 하면, ‘나’라는 주체가 허물이지지 않는 상태에서 대상이 생겨요.  내가 믿는 대상이 내 앞에 있는 대상이란 뜻에서 대상입니다.  말이 좀 어렵지요?

뭐냐 하면, “저 사람이 누구야?” 이 말은 나와 다르다는 말입니다.  나를 허물어버린 상태에서는 “저 사람이 누구야?”라는 말이 안 나옵니다.  “너 누구야?” 라는 것은 ‘나는 아는데 너는 모르겠다.’ 는 뜻입니다.  나를 포기 못하고 고수한 상태에서 그것이 하나님이 되던 예수님이 되던 그것은 항상 대상체로 남고, 대상으로 남은 한 내가 성큼성큼 걸어가서 거리를 좁히려고 얘를 쓰지만 절대로 가까이 갈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를 믿으라고 하잖아요.

예수님이 대상이 되는 한 절대 자기 부인이 안 됩니다.  자기가 부인되어버리면 저것을 ‘너’라고 할 수 있는 ‘나’가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그러면 어떻게 구원 받는가?  주님께서 우리를 다 삼켜버려요.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나 밖의 예수님’이 아니고 ‘예수님 안의 나’예요.  이렇게 될 때,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고, ‘이제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나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주님으로 보는 것입니다.  “주여”라는 말은 “이미 당신이 나를 삼켰습니다.” 하는 뜻입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 밖을 못 벗어납니다.” 라는 의미입니다.

‘나는 예수님 밖을 못 벗어납니다.’ 라는 것은 ‘예수님이 갖고 계신 하나님의 뜻이 고스란히 나에게로 덮칩니다.  나는 그냥 당하면 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행복한지요.  만약에 내 힘으로 믿으려 한다면 세 발짝 다가서면 네 발짝 물러납니다.  산 넘어 산이에요.  다가갔는가 싶은데 더 멀어져 있어요.  이것을 어려운 말로 ‘지평’이라고 합니다.  

5m 밖에 철조망이 쳐 있으면 5m를 걸으면 철조망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평이란 것은 지평선이 손에 잡힌 것 같은데 잡으면 저만큼 또 멀어져 있어요.  이것 이해 안 되면 곤란합니다.  인간이 자아가 있는 이상은 예수님도 지평이지 경계가 아니에요.  40일 금식 기도하면 주님이 손에 잡힐 것 같지요?  40일 금식하고 나면 주님은 저 멀리 가 있어요.

어떤 시인이 이런 시를 썼어요.  “지평선이 손에 잡히면 여행은 끝이 난다.”  참 멋있지요?  지평선이 손에 잡히면 나의 여행도 끝이 난다.  이것은 지평선이 보이는 어느 벌판에서 너무 감동되어 마치 지평선이 손에 잡힐 것 같은 황홀함을 표현한 것 같아요.

주님이 우리 손에 잡힐 것 같지만 결코 잡히지 않습니다.  주님을 잡으려고 계속 달려드는 우리의 행동 하나 하나를 지우면서 마지막에는 우리 생명까지 거두어 가십니다.  그래서 남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만 남기지요.  

굉장히 장엄하게 끝이 나네요.  좀 쉬었다가 합시다.

 

 

 

 

광주 강의 7-2

둘째시간 시작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끝부분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만 하나님은 사람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사람에게 교회 세우라고 당부한 적도 없습니다.

종말이 되면 성령님의 은사로 모든 것을 이루시지 사람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백성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 만들기를 시도해 보았지만 실패로 끝이 났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하는 것을 통해서 이미 보여주셨습니다.

인간의 속성이란 하나님을 부르지만 하나님 위주가 아니고 절대 신이 되어 있는 자기 위주로 살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일체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 만들기’는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데리고 하십니다.  이것을 놓치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 혼자 다 하신다’고 해 놓고 놀려고 하면 안 됩니다.  복음을 위해서 혼인할 수도 있어야 하고, 복음을 위해서 이혼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복음을 위해서 한다고 해 놓고는 실상은 자기 행복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하지요.  복음을 위해서와 자기 행복을 위해서를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부산에서도 그런 강의를 했습니다만, 복음을 위해서라면 직장을 그만 둘 수도 있고(이 말에 사람들이 굉장히 좋아해요.  그런데 그 다음 말에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복음을 위해서라면 뼈 빠지게 일할 수도 있어야 해요.  ‘내가 한 푼이라도 더 벌어서 복음을 위해서 쓰겠다.’는 이런 생각을 왜 못합니까?  이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 사는데 주께서 먹여 살리겠지 뭐.  나는 직업 안 가질래.’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요.  이것은 결국 뭐냐 하면, 복음 핑계대면서 자기 편안함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어요.

복음을 위해서 땡볕에서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그 사람이 복음을 위해 놀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일 할 수도 있는데 논다.’ 이렇게 되어야지, ‘일하기 싫어서 논다.’면 이것은 이기주의지 복음은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학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열심히 공부할 수도 있는데 복음을 위해서 잠시 쉴 수도 있겠다는 이것은 되는데, 공부하기 싫어서 놀면서 복음을 위해서 논다고 핑계되면 안 됩니다.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인 존재인지 주께서 다 아시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4장부터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교회를 꾸려나가는가’ 하는 점이 본격화 됩니다.  즉, 주님께서 사람에게 협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사람을 어떻게 다루시는가?’, 복음을 위해서 자기 사람을 어떻게 혹독하게 다루시는가를 가지고 사도의 예를 들어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린도전서 4장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잘못되게 해석하면 안 됩니다.  ‘사도가 이렇게 고생했는데 나도 고생해야지.’ 이렇게 나온다면 정말 곤란합니다.  그것이 아니라 이렇게 해야 정답입니다.  ‘아, 주님께서 사도를 이렇게 다루셨듯이 지금도 주님께서 나를 그렇게 다루고 계시기에 지금 내가 이런 상태에 놓여 있구나.’ 라고 믿으면 틀림이 없습니다.

사도가 고생하는 것을 본 받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사도가 나를 본 받으라고 하는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의미에서 한 이야기입니다.  사도처럼 고생한다고 해서 사도를 본 받는다고 여긴다면 큰 오산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고린도전서 4장을 보면서, ‘아, 하나님께서 사도를 이렇게 다루시는구나!’ 라고 하면서 구체적으로 그 다루시는 모습을 살펴보아야지요.

9절에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라고 했을 때, 여러분들이 ‘주님께서 사도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들을 미말에 두셨구나.’ 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것은 구원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은 자기 교회 만들기 위해서 사도를 이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도 개인의 구원 문제는 사도가 이야기했듯이 지금 어떻게 이루어지는가가 아니고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졌어요.

우리의 구원 문제는 2,000년 전에 있었던 십자가 사건에 있는 것입니다.  그 피 흘림에 있는 것이지 지금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는가 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사람이 너무 개판을 쳐도 문제지만, 너무 성실하고 착해도 문제가 많아요.  만약 구원이라는 것이 각자의 행동에 따라 결정된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온 직접적인 능력으로 구원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 인간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구원이 되고 안 되고가 결정된다는 식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뭐가 문제냐 하면,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고 했는데, 십자가라는 고정된 사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십자가의 확정된 사건을 안 믿으려 하고, 십자가 믿어서 어떻게 달라진 사람이 되는가가 초점이 되어 달라진 사람들의 리스트를 찾아요.  한경직 목사, 손양원 목사, 주기철 목사 이런 사람을 수집해서 그들의 공통점을 찾아서 나도 그런 공통점을 가져야 그들과 함께 구원의 반열에 들어가는 것처럼 여겨 그렇게 노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가리는 것입니까?  십자가만으로 구원된다는 진리를 가리는 무서운 짓입니다.  굉장히 주의해야 될 사항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에서 말하는 것은 구원 문제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현재 구원파 박옥수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4장에서 사도를 왜 그렇게 혹독하게 다루는가 하면 10절에 그 해답이 나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것이 해답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사도를 혹독하게 다루느냐 하면, 사도로 하여금 약하게 만들어서 교회 교인들이 강하게 되고, 더 안정감을 얻고, 믿음의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해서 이쪽을 약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쪽을 약하게 함으로서 저쪽을 강하게 하고, 이쪽을 어리석게 함으로서 저쪽을 지혜롭게 하고, 이쪽을 가난하게 함으로서 저쪽을 부하게 하는 그런 방식으로 주님께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여러분 의의 있습니까?  없겠지요.  주께서 그렇게 하시겠다는데.

이것은 구원문제와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이 개입되면 안 됩니다.  구원 얻는데 사도 바울처럼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이야기를 했지요.  그런데 베드로가 착각을 해서 초막 셋을 짓자고 하자마자 모세와 엘리야가 사라졌어요.  그리고 예수님만 남았는데 그 때 하늘 구름 가운데서 음성이 들렸지요.  “너희는 저희 말만 들어라.”  모세도 엘리야도 아니란 말이지요.  오직 예수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왜 고생하고 비천하게 되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할 수가 있겠지요.

제가 강의를 하면 어떤 오해를 받는가 하면, ‘예수 믿고 구원 받았으면 기도할 필요 없겠네요?’ 이렇게 나옵니다.  저는 이렇게 답합니다.  ‘당신이 하고자 하는 기도, 전도는 할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주님께서는 자기 사람을 가만두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말씀처럼 주님께서 우리를 가만 두질 않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내가 움직여야 주님의 일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을 대상체로 보고 자신을 주체로 보는 것입니다.  내가 안 움직이면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주님께서 우리를 삼키셨다는 그래서 주 안에서 구원 받는다는 근본적인 복음의 원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믿어주어야 믿는 것이지 내가 안 믿겠다고 버티면 예수가 무슨 재주로 날 찾아와’ 이런 식입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오늘 아침에 제가 십자가마을 게시판에 올린 글 보신 분 있습니까?  [인간들의 거짓말]에 대해 썼습니다.  성경에 보면 “저희가 하나님을 알되”라는 구절이 있지요.  그런데 인간들은 ‘나는 절에 다니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른다.’고 거짓말해요.  그러나 성경은 거짓말 안 합니다.  ‘너희가 절에 가든 교회 가든 너희가 하나님을 안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끝까지 하나님을 속여요.  ‘나는 하나님 모른다.’

결국 인간은 자기밖에 몰라요.  심지어 자신이 구원 받지 못한 책임도 주님께 돌려요.  주님이 성령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 못 받았다고 합니다.  이들의 말을 잘 들어보면 굉장히 신학적이고 합당한 것처럼 들립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뭐냐 하면, 주님을 대상체로 보고 나를 주체로 봐서, 주님 쪽에서 뭔가가 날아와서 나를 데리고 가야 구원 받겠다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 붙잡힌 사람은 모든 것을 ‘고마움’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은 아직 성령이 도착하지 않아 구원 못 받았으니 그 책임이 주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책임 전가를 주님께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지옥 가는데 대해 자기는 책임 안 지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식 자체가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4장 9절을 봅시다.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여기에서 “구경거리”는 놀림감이지요.  ‘복음 안다고 까불더니 꼴좋다.  저렇게 망했구만.’ 이렇게 조롱당하고 나중에는 쓰레기 취급 받도록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주체가 있기 때문에 이 주체가 신에게 향하든 세상으로 향하든 이 주체가 확장되어서 능력을 가져서 신도 붙들고 세상 부귀영화도 잡고 싶고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주체가 확장되려면 뭐가 필요한가 하면, 힘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면 인간대 인간의 관계망에서 나온다고 여깁니다.

세상의 모든 모임은 인간의 관계망이지요.  교회든 뭐든 다 그런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으면 착한 사람이고, 사람들로부터 인정 못 받으면 나쁜 사람이 됩니다.  이들은 인간대 인간의 관계망이 전부입니다.  진리도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외부에서 진리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자폐증 환자처럼 외부와는 완전히 단절된 채 인간들끼리 서로 인정해야 그것이 진리가 되고 옳은 것이 되고 그렇습니다.

인간대 인간에서 나오는 것이 힘이고, 이런 힘을 인간들이 원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사도를 왜 이렇게 사용하시는가 하면 ‘힘없는 힘이 너를 구원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전혀 무능하고 힘도 없는데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힘입니다.  ‘힘이 안 되는 힘을 네가 붙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모델이 바로 사도입니다.

사도는 남 좋은 일 시킵니다.  자기가 복음 전했는데 돌아오는 이득은 하나도 없어요.  자기는 갈수록 약해져요.  갈수록 무명한 자가 돼요.  갈수록 망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싱글벙글하면서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10) 라는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뭐냐 하면, 우리들로 하여금 인간대 인간의 관계망에서 나오는 그 힘을 얻고자 했지 정말 주님이 주시는 힘없는 힘을 붙들 마음이 있었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즉 사도들의 삶을 통해서 진짜 복음을 보여주시고 인간들이 아는 복음은 가짜 복음임을 나타내 보이시는 것입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왜 사도들이 고생하는가?  복음의 능력이 이 땅에서는 어떤 양태로 등장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다음은 우리 차례입니다.  힘없는 힘을 의지할 수 있는가?  

간음했던 여인이 돌에 맞아 죽지 않고 되살아 난 것은 힘없는 힘에 의해 용서 받았기 때문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인들은 이런 간음한 여인의 심정을 이해 못하고 ‘예수 믿고 난 뒤에 착해졌다.’는 소리 듣고자 해서 교회 나옵니다.  이것이 또한 세상에서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착해 졌다는 힘.

그런데 사도 바울은 착한 힘도 아니도 도덕적인 힘도 아니고 그냥 십자가의 힘, 용서해주시는 힘뿐입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자기에게 힘이 아닙니다.

제가 광주 강의한지도 벌써 몇 개월이 되었지요.  1월부터 했습니까?  예.  
처음 강의할 때 제가 십자가에 대해서 이야기했지요?  그 때 제가 이런 염려를 했습니다.  행여나 복음을 가지고 힘으로 환산하려고 한다면 제 강의는 앞으로 들을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십자가뿐이구나!’ 라고 나온다면 참 고맙고 감사할 텐데, ‘십자가를 믿었으니까 이제 하나님이 힘 되는 힘을 주실거야’ 이렇게 나온다면 그 사람은 자기 앞에 가난하게 나타난 사도 바울을 거부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가난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진짜 신앙인과 가짜 신앙인을 구분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이 왜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났는가?  그 초라한 모습 속에 진짜 우리가 구원 될 수 있는 힘없는 힘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아보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딱 구분시키기 위해서 사도들은 비참한 모습으로 등장했어야 합니다.  이것이 4장의 결론입니다.  

제가 이렇게 강의하면서 여러분의 심정은 이해를 하지요.
제 강의 듣고 묻고 싶을 거예요.  “목사님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광주에 진짜 신자가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라고.  그러나 광주에 신자가 몇 명인가가 아니라 대한민국이 신자가 몇 명이나 되는지가 의문입니다.      

어느 인간이 힘 안 되는 힘을, 그냥 용서만 해 주시는 그 힘에 자기 목숨을, 기쁨과 행복과 전부를 걸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는가?

만약에라도 사도 바울처럼 자기가 초라하게 되고 죽은 자 같이 될 때, 자기 생을 후회하면서 ‘미쳤지 내가 왜 예수 믿었던가?  그 때 복음 강의 왜 들었던가?’ 하고 가슴 치는 일이 있을 수도 있어요.

사도 바울의 심정을 이해하기 위해서 빌립보서 4장을 한 번 봅시다.  12-13절입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여기에서 “능력”이 무슨 능력(힘)입니까?  복음의 힘이지 세상 힘이 아닙니다.  마귀가 예수님께 줄려는 힘이 아니에요.  인기 있는 목회자, 세상 부귀영화, 재정적 자립 이런 것이 아닙니다.  남이 보지 못하는 힘(힘없는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누가 바울을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힘없는 힘이 사도 바울을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을 지난 강의에서 뭐라고 했지요?  ‘밑바닥 지우기’ ‘꼭대기만 남기기’ 꼭대기에는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과 하나님.  이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점차 지워나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지워나간다]는 것은 죽이는 것도 되지만, 그런 것들에 의미를 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일을 위해서 복음에 나서신다면, 이 복음을 위해서 목회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고, 놀 수도 있고 일 할 수도 있고, 결혼할 수도 있고 이혼할 수도 있고 등등.  이것이 얼마나 큰 자유입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자유를 못 누리는 이유가 뭔가 하면, 세상을 인간대 인간의 관계망으로 보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초라하게 되면 남들이 나에 대해 뭐라고 수건거릴까’ 하면서 아직도 그들이 갖고 있는 힘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질타하는 그 질타의 힘을 무서워하고, 주님의 용서하시는 용서의 힘이 별 힘으로 여겨지지 않지요.

본문으로 돌아와서 4절에 보면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인간대 인간의 관계망에서는 내가 자책할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것으로 나를 의롭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토대에서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5장 봅시다.
사람이 얼마 없으니까 갑자기 진도가 빨라지지요?  기분 좋습니다.
사실은 1장 2장이 그만큼 중요했었어요.  진도가 못나갈 만큼.

5장 보기전세 4장 19절을 보면,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 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 보겠노니”에서 “능력”이란 것은 무슨 능력입니까?  마지막 때에 우리를 미말에 두고 우리로 하여금 거지로 만들고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대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감사함으로 수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보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제가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만 예수님을 절대로 대상체로 보지 마세요.  내 건너편에 세우 두고 ‘내가 잘 믿을게’ 이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안 믿습니다.  우리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냥 덮쳐온 거예요.  그리고는 ‘이미 너는 내 사람이야!’ 하고 확인을 반복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거기에 깔려 몸부림치지요.  

저희교회에서 지난 주일 오전 설교 후에 말이 좀 많았어요.  설교에 문제가 있어서 말이 많은 것이 아니라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요.  어떤 충격인가 하면, 제가 설교할 때는 무심코 했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손아귀에 잡고서 마구 때린다.’고 했어요.  처음 몇 대 맞을 때는 핑계가 많아요.  ‘바빠서 교회 못나왔다.  뭐 어떻다.’ 하는데, 너무 많이 맞으면 아무소리 못하고 따운 되지요.  그 때 그 빈곳에 예수님이 자기 피를 담아서 끌고 가십니다.

교회 안 다니고, 예수도 모르고, 성경도 모른다고 했을 때에 소주 한 세병 마시고 집에 누워서 한 번 생각해 보잔 말입니다.  결국 남는 것이 뭔가 하면 ‘왜 세상 일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불신자가 소주 마시고 결국 내 뱉는 소리가 ‘왜 세상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는가’하고 따지는 것이나, 교회 10년 다닌 사람이 기도하면서 ‘신이시여! 왜 내가 원하는 기도 안 들어줍니까?’ 하는 것이나 뭐가 다릅니까?  똑 같지요.  이렇게 되면 교회 다닌 것이 헛일입니다.

세상은 원래 하나님 뜻대로 되지 우리 마음대로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 말씀대로 되지 피조물 마음대로 안 되게 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죽을 때까지 몰라요.  자꾸 자기 마음대로 되어야 한다고 우기는데 우겨봤자 계속 얻어맞기만 하지 안 됩니다.

5장을 봅시다.
5장에서 어려운 점이 뭔가 하면, 아버지의 첩과(그 당시 첩을 두는 것은 합법적인 것이었습니다) 관계를 가졌어요.  아비의 아내를 취했다는 것이지요.
구약성경에 아비의 아내를 취한 사람이 있었지요.  누구입니까?  르우벤.  이 르우벤이 빌하와 관계했고, 또 압살롬이 있지요.  다윗의 후처와 관계를 가짐으로 자신이 공식적으로 왕 됨을 공표했지요.

이것을 보면 여성단체에서 말하기를 성경이 도대체가 여성에 대한 품위라든가 존엄성을 일체 말살해 버리고 남성의 노리개, 애완용 개, 집의 가구 취급을 하니까 이것이 바로 남성 우월주의 문화의 대표적인 사례가 아니겠는가 하고 성경에 대한 거부반응을 많이 나타내는데 이 점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생계문제였습니다.  사람이 배가고프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제가 지난 번에 콜버거(Kohlberg)의 [도덕 발달이론]에 대해 언급을 했는데 기억납니까?  잠시 말씀드리면, 1단계는 어린아이 단계 - 처벌해야 말 듣고, 보상해야 말 듣는 단계.  2단계는 때리는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는 단계.  3단계는 착한 소년, 착한 소녀 되기.  4단계는 기존 질서와 조직을 존중하는 단계.  5단계는 이런 것을 개혁하는 단계.  6단계는 이 모든 법을 초월하는 단계.  이렇게 봅니다.

1단계는 자기 몸만 생각합니다.  때리면 안 하고, 안 때리면 또 하고.  옳은가 나쁜가는 모르고 내 몸이 아픈가 안 아픈가만 따져요.  이런 단계가 교회 나오면 어떻게 됩니까?  다급해서 교회 나오면 ‘신이시여! 부탁합니다. 잘 봐주세요.’ 하면서 찾아 왔다가 다급한 일이 풀리면 교회 안 나오지요.

2단계는 어머니가 아이를 때릴 때 자기 몸이 아픈 것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엄마가 무슨 마음 때문에 나를 때릴까를 생각해요.  C.F에 그런 것 있지요.  엄마가 우유주면서 ‘또 싸울거야?  또 싸우면 내 딸 ?해!’ 하니까, 아이가 울면서 ‘안 싸울게’ 하고 그 때 서울우유 주잖아요.
이 단계에서는 목사 말에 무조건 순종합니다.  목사님이 나를 사랑해서 저런 말씀을 하셨는데 순종해야지. 라는 단계입니다.  목사님께 순종하므로 내 신앙이 우수한 것으로 여기는 단계지요.  

3단계는 엄마의 권위에 복속되기 보다는 자기 스스로 착한 사람 되는 것입니다.  자립하는 단계지요.  여기에서 자기 의 마일리지가 쌓이지요.  이 단계에서는 목사고 뭐고 내가 하나님께 잘 해서 구원 받겠다는 것이지요.  

4단계는 나 혼자만의 구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봉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중근처럼 내 한 목숨 바쳐서 국가와 민족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수류탄이 터졌으면 다른 전우를 생각해서 내가 먼저 수류탄을 온 몸으로 감싸는 그런 단계지요.  이 단계에서 이웃 사랑을 하고 밥 퍼주는 단계.  

5단계가 뭐냐 하면, 기존의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단계입니다.  4단계와 5단계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4단계는 기존 질서에 복종하는 단계이고 5단계는 나라 꼴이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6단계는 뭐냐 하면, 모든 일에 대해서 주님께 감사하는 단계.

1단계부터 5단계까지는 어떤 기대치를 예상합니다.  이렇게 되어야 나도 기뻐.  나도 존재할 이유가 있어.  6단계는 있는 그대로가 하나님의 은혜로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6단계의 사람은 모든 일에 감사하기 때문에 1단계부터 5단계의 기적에 대해서는 눈 깜짝도 안 하지요.  

그런데 이 여섯 가지가 성도에게는 다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6단계에 있다가 월급이 차압당하면 갑자기 1단계로 내려가 버립니다.  새벽기도 안 나오다가 자식이 아프면 갑자기 새벽기도 나옵니다.  ‘주여, 뭘 잘못해서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다시는 그런 불순종 하지 않겠습니다.’ 하면서.

우리는 평생을 엘리베이트처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 받는 것은 십자가 은혜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만약 한 단계 한 단계를 사건화 시키면 이 사건이 십자가의 사건을 가리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이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인간은 위의 6단계 안에 다 들어 있어요.  이것이 콜버거의 이론인데 다음에 기회가 되면 [신앙의 발달단계]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 4절에 보면,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렇게 되어 있지요.
사도 바울이 지금 육체적으로 고린도교회 교인들과 함께 있습니까?  아니지요.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 주의 영으로 함께 있지요.  몸은 떠나 있어나 영으로 함께 있지요.  이것이 과연 가능합니까?

바울이 몸은 떠나 있어나 영으로 함께 있지요.  “주 예수의 이름으로 내 영과 함께” 모였잖아요.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4, 5절)  

여기에서 논쟁의 여지가 있어요.  
“이런 자”가 누구입니까?  아버지의 첩과 간통한 자입니다.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누구의 육신은 멸한다고요?  아버지의 첩과 간통한 그 육신은 멸하고,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얻으리라” 여기에서의 영은 누구의 영입니까?  

육신을 사단에게 내어줘서 죽고 영은 예수의 날(재림 때)에 산다고 할 때,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영은 간통한 사람의 영이 아니고 영과 함께 있는 우리끼리 즉 사도 바울과 복음 아는 사람만 구원 받는다고 해석하는 사람이 있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아버지의 첩과 간통해서 사단에게 몸을 내어준 사람이 구원 받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만약 이것이 용납이 되면 교회에서 자살하는 방법으로 아버지 첩과 간통할 거예요.  머리 좀 잘 돌아가는 사람들은.  

나쁜 짓하면 주께서 죽이시지요.  이왕 죽는 것 약 먹고 죽으나 나쁜 짓 실컷 하고 죽으나 영은 예수의 날에 구원 받을 것이 뻔한데 무엇 때문에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약 먹고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교회가 5절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가르치면 윤리적으로 너무 느슨해져서 사도 바울의 취지와는 달리 노골적으로 죄 짓겠다고 나서면 교회가 점점 더 타락할 것이 아니냐는 것이지요.  그래서 본문은 그런 식으로 해석하면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아무리 이 본문을 봐도 그런 해석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 본문 해석의 핵심은 어디 있느냐 하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지옥 갔습니까?’ 이것을 물으면 답이 나와요.  지옥 갔는지는 알 수 없지요.  다만 이들이 성령을 속이고 헌금을 해서 즉사했다는 것만 알뿐입니다.  아나니아 삽비라가 천국 갔느냐 지옥 갔느냐 하는 문제는 우리가 논할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이 참으로 중요한데 이것이 뭘 시사해 주는가 하면, 현상적으로 그 사람이 망했다고 해서 지옥 갔다고 간주할 권한이 인간에게는 없다는 말입니다.

현상적으로 이런 벌을 받으면 반드시 지옥 간다고 규정지을 수 있는 근거는 없습니다.  만약 현상적으로 망해서 벌 받아서 지옥 간다고 본다면 사도 바울은 벌 중에서도 엄청난 벌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것 가지고 시비를 겁니다.  바울은 사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사도같으면 저렇게 비참하고 힘들게 살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무슨 큰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죄 값으로 힘들게 살았다고 보는 것이지요.  이런 식으로 바울을 사도가 아니라고 곡해하는 사람이 고린도후서에 보면 나와요.

바울은 지금 역으로 그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다시 고린도전서 1장으로 돌아가서, 사람이 구원 받는 것은 십자가의 능력이지 인간들의 지혜로는 안 됩니다.  현상적으로 이런 벌을 받으면 지옥 간다고 하는 것은 인간들의 지혜입니다.  이런 인간들의 지혜가 십자가의 피로만 구원 받는다는 사실을 가로막고 있는데, 이 장애를 제거하는 방법 중 하나가, 간통한 자가 죽기는 죽는데 마지막 때에 구원 받는 현상을 이야기함으로 구원 문제에 있어서는 인간들의 지혜를 동원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교회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한다는 것을 그대로 적용시키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인간적인 힘으로 교회 만들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힘으로 치리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치리문제는 다음 시간에 하겠습니다.

이번 시간의 결론을 맺으면 이렇습니다.
인간들이 자기 지혜를 동원해서 현상적으로 교회를 만들어 보려고 하는데, 이것은 인간에게는 권한이 없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시는데, 어떻게 하시는가 하면, 사도로 하여금 세상에서 비참하게 망가진 모습으로 살게 하시는데, 그렇게 하신 이유는 현재 사람들이 힘으로 여기는 그런 힘을 극복하고 진짜 구원 받는 힘은 ‘힘 안 되는 힘’, ‘보이지 않는 힘’으로 마음껏 복음의 진리를 외치도록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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