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차 고당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고구려말기 최고의 영웅 연개소문이 666년 사망하게된다.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베고 대막리지가 되어 정권을 잡고 1차 고당전쟁에서 당나라 불세출의 영웅 이세민의 60만대군을 격파하였으며 2차 고당전쟁에서는 방효태의 대군을 사수에 생매장 시키는 이른바 사수대첩을 펼치며 5로에서 쳐들어오는 당나라대군을 장사도못지내게 패퇴시켰다.
[연개소문 상상도]
연개소문은 독재자이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보면 강력한 독재자가 나라를 통치하는 동안에는 그 국가는 엄청난 강대국이 된다. 하지만 독재자가 죽었을때 그동안 쌓여왔던 모든것들이 폭발되어 나라가 망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있다.
연개소문 또한 그랬다. 자신이 권력을 잡고있을때는 누구하나 강력한 힘에 밀려 복종하지 않을수 없었겠지만 그가 죽고나자 비로소 그가 있었을때는 하지 못했던 일들이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우선은 연개소문이 죽은 정확한 년도부터 헤아려볼 필요가 있을것이다.
연개소문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기록에 나와있지않다.
그런데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신채호선생의 [조선상고사]에서는 연개소문이 죽은 시기를 657년으로 적고있다.
그 근거로 남생의 묘지에 적혀있는 [남생이 657년 막리지에 임명되었다]라는 기록을 들고있다
또한 연개소문의 장남인 연남생의 묘에는 이러한 기록도 있다.
[연남생이 32살이 되던해인 665년 대막리지가 되었다]라고 쓰여져있다.
그러나 [구당서], [신당서], [삼국사기]에는 모두 연개소문의 죽음을 666년으로 표기하고있다.
과연 어떤것이 진실이란 말인가??
어느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연개소문의 죽음은 666년일 가능성이 크다.
661년 연남생은 2차고당전쟁에서 당나라 계필하력이 이끄는 부대에게 3만의 병력을 잃을 정도로 대패를 당했다.
이러한 남생이 군대를 총지휘하여 2차 고당전쟁에서 승리를 하기는 힘들었을것이다. 또한 2차고당전쟁 이후 고구려의 정세가 급격히 나빠지고 권력다툼이 일어나는 것으로보아 아마 연개소문이 죽은것은 2차고당전쟁 이후일 것이다.
따라서 [조선상고사]에 기록된 657년의 연개소문 죽음은 그 확률이 매우 희박하다.
그렇다면 연남생의 묘지에 있는 기록은 어찌된 것일까?
[남생이 657년 막리지에 임명되었다]라는 기록은 후에 신라의 '태대각간'과 같은 고구려의 '대막리지'에 오를것이라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묘지에 '태'라는 글자를 생략하고 '막리지'라 한것이고 당시 대막리지는 당연히 연개소문이었을것이다.
그렇다면 비석의 두번째 기록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662년 2차고당전쟁이 끝나고 666년 사망까지 연개소문에 관한 기록은 전혀없다.
이것은 연개소문이 2차고당전쟁이 끝나고 건강악화등 몸에 문제가 생겨 죽기전인 665년 장남인 연남생게게 대막리지 자리를 물려주고 666년 사망했다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666년 연개소문은 '형제들간에 다투어서는 안될 것이다.'라는 지극히 평범한 유언을 남긴체 사망을 한다.
연개소문이 죽기직전 이러한 말을 한것은 형제들간에 문제가 있음을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665년 대막리지가 된 연남생은 일단 고구려의 정권을 잡게된다. 연남생의 묘지에 의하면 [[9살때부터 총명하여 조의선인의 한 사람이 되고 아버지의 선임으로 낭관이 되어 중리대형, 중리위두대형의 요직을 역임하고 24살에 막리지가 되어 삼군대장군을 겸임하였다] 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셋째인 연남산의 묘에 의하면 연남산도 23살에 귀족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위두대형'의 위치에 있었다. 그렇다면 연남건은 '주부'나 '태대사자'정도의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연개소문은 아들들에게 막강한 일정의 권력을 주었던 것이다.
(사극 대조영과 연개소문에서 그린 연남생과 연남건의 모습은 역사와는 전혀 사실이 다르다.
대조영과 연개소문의 연남생은 대당 강경파이다. 또한 대조영의 연남건은 당나라와 화친을 원하는 온건파이고 연개소문의 연남건은 이도저도 아닌 권력에 눈이먼 필부로 나온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틀렸으며 사실과 맞지않다)
우선 남생과 남건,남산의 갈등의 원인은 3가지로 나눌수 있다.
1. [세력기반이 다른곳에 있었다는 가능성도 있다.]
국내성 지역은 오랫동안 고구려의 수도로서 전통귀족의 본거지였다. 그런데 5세기 이후 평양지역으로 수도가 옮겨지면서 국내성은 소외되기 시작했다. 새롭게 수도가 된 평양 지역에서는 신흥 평양계 귀족들이 성장해 국내성 출신 귀족들과 대립하는 모습을 보였다.
국내성 즉, 지금의 집안 지역에서 발견되는 고분벽화와 평양지역에서 발견되는 고분벽화 사이에는 일정한 문화적 차이가 존재한다. 이것은 두곳의 문화적 기반과 성향이 다름을 의미하는 것이다.
양원왕 재위 13년인 559년에 환도성에서 일어난 간주리의 반란은 국내성 출신 귀족들이 가진 불만의 표시라고 할 수있다.
남생은 후에 남건,남산에게 쫓기면서 국내성을 기반으로 반란군에 대항한다. 이는 남생과 남건,남산은 어머니가 다른 이복형제였다는 가능성도 있다.
연개소문은 평양과 국내성을 결합시키기 위해 국내성과 평양에서 부인을 두었을수도 있다.
혹은 남생과 남건,남산의 처가 각각 국내성과 평양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어쨌든 후에 남건이 평양에서 정변을 일으켰을때 평양에서 남생을 지지하는 세력이 없었고 남생이 근거지를 국내성으로 옮겼을때 흔쾌히 도와주었다는 점은 이같은 사실을 더욱 증명해주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대막리지가 된 후 수도인 평양에서 정권을 잡으려는 남생과 남건,남산사이에 심한 마찰이 있었을것이다.
2. [남생과 넘건의 능력의 차이이다.]
남생의 묘지에 적힌대로 남생은 어렸을적 부터 재주가 뛰어났을 수도 있다.
하지만 2차고당전쟁 중이던 661년 9월에 남생은 압록강에서 계필하력에게 3만의 전사자를 내는 참패를 당하고 만다. 이러한 사실들은 남건이 남생의 능력을 깔보게 되어 남생을 몰아 내려는 생각을 갖게 하였을 수도있다.
3. [정책의 차이이다]
[삼국사기]에 보장왕은 666년 태자 복남을 보내어 당나라 황제가 계시는 봉선의식에 참가하도록 하고있다. 그때가 연개소문이 죽은 해이며 연개소문이 죽기 얼마전의 일이다.
이미 대막리지는 연남생이 이어받아 있었고 연개소문은 정사를 돌보지 못할 정도로 사정이 나빴던 것이며 이에 보장왕은 친당 정책으로 돌아섰으며 연남생은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이는 보장왕의 친당정책에 동조하고 있음을 뜻한다. 게다가 연남생은 2차고당전쟁에서 당나라에 혼쭐이 난적이 있기 때문에 얼마간 당나라를 두려워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것이다.
반면 남건은 후에 평양성에서 마지막까지 홀로 결사항전을 할 정도로 강경파였다.
두사람의 정책이 완전히 달랐고 이는 과거 연개소문의 정변이 자식들간에 다시 일어날 조짐을 보일 정도로 무서운 갈등의 이유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갈등의 최고조에 이르러 마침내 무력대결)
연개소문이 죽고 상이 치뤄지는 동안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상이 끝나고 연남생이 자신이 대막리지가 되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여러성을 순시하고 있을때 문제가 발생했다.
누군가 남건과 남산에게 남생이 그들을 죽이려 한다고 이간질 시켰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않았고 다시 남생에게 남건,남산이 죽이려한다고 말했을때 남생은 세작을 평양으로 보내어 알아보게한다.
남건과 남산은 자신들이 도성에 있고 남생이 유약한 인물이라 생각하여 의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남생은 강경파인 남건이 자신이 없는 도성에서 아버지 연개소문과 같은 정변을 일으킬까 두려워 세작을 파견한 것이다.
이들 형제를 이간질한 자는 고구려내의 남생과 남건일파일 수도 있고 신라와 당의 첩자일 수도있다. 그렇지만 내분이 생긴 후 신속하게 병력을 침투시키고 신료들도 적극찬성하고 있는 당나라의 상황을 볼때 당의 첩자일 가능성이 아주 높아진다.
남생이 보낸 세작은 불행하게도 남건과 남산에게 붙잡혀버린다.
연남건은 왕명을 빙장하여 연남생을 소환하지만 이미 자신을 의심한다고 느낀 남생이 돌아올리 없었다.
이애 남건과 남산은 16살된 남생의 아들 현충을 죽여버리게 된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남생은 국내성에 들어가 세력을 모아 이에 대항한다. 마침내 최고의 권력을 이어받은 연개소문의 아들들이 무력충돌을 하는 상황에 이른것이다.
남건은 남생이 국내성을 근거지로 세력을 규합해 평양진입을 꾀하자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정권을 잡아버린다.
그리고 왕명을 내세워 남생의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분하에 병력을 모조리 긁어 모은다.
남생 역시 남건이 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빼앗고 보장왕을 인질로 잡고있다고 말하자 명분에서는 남생이 앞서게 되었다.
따라서 오골성과 같은 큰 성들도 연남생을 돕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전세는 남생에게 많이 불리했고 남생은 당나라에 항복하기로 결심하고 대형불덕을 당나라에 보내지만 요동의 고구려군은 그를 통과시키지 않았다.
전세는 불리하였지만 명분은 앞섰던 남생이었지만 당에 항복을 결정하자 이제는 그 명분마저도 불리하게 되었다.
국내성과 오골성은 남생에게 강력히 반발하며 등을 돌려버렸고 남건이 대군을 몰라 휘몰아치자 남생은 더 버티지 못하고 서북쪽으로 퇴각해 요하주변에 위치한 현도성을 장악하고 방어에 치중하는 한편 대형 염유를 당에 보내 다시한번 원군요청을 강력하게 요청한다.
(당나라의 힘을 빌린 연남생의 반격)
남생이 어떠한 조건을 내걸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나라는 마침내 667년 연남생에게 '요동도독겸평양도안무대사'란 벼슬을 내리고 남생을 구원한다는 명분하에 50만의 대병력을 일으켰다.
신성을 함락한 당나라는 이어 요동의 16개성을 잇따라 함락시킨다.
설인귀와 이적이 좌충우돌하자 연남건의 지원군마저 모조리 패하고 남소성,목저성,창암성등 3개의 성이 또 다시 무너지며 연남생은 당나라 부대와 합류한다.
이에 국내성,오골성등이 남생을따라 항복하였다.
668년 당나라 유인궤를 선봉으로 병력을 증가시켰고 전군의 선봉은 연남생이 맡았다.
당나라 장수 설인귀의 공격으로 부여성과 그주위의 40여성이 떨어지면서 요동북부는 완전히 당나라의 손으로 넘어갔다.
남건의 지원병이 도착했으나 설하수에서 이적의 부대와 접전을 치루는 도중 설인귀와 연남생이 좌우에서 휘몰아치자 3만의 전사자를 내고 후퇴하였다.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어 연남생과 당나라군은 압록강에서 연남건의 최후방어선을 돌파하고 압록강을 건넜다.
당나라군대가 육이성을 함락하고 연남생이 설득하니 그 주위의 성들이 줄줄이 항복하였다.
668년 9월 신라군까지 합세하여 평양성을 휘몰아치니 신라와 당의 연합공세아래 먼저 연남산이 항복하고 남건이 때로는 용맹하게 성문을 박차고나와 싸워보기도 하였으나 중과부적 결국 연남생과 내통한 신성이 성문을 열자 평양성은 함락되었고 연남건은 사로잡혀 당나라로 끌려가 유배도중 살해되고 말았다.
연남생과 남산은 당나라에 항복한 댓가로 벼슬에올라 그렇게 당나라에서 일생을 마쳤다.
연남생과 연남건의 대결은 형제간의 권력다툼이었지만 그 파장은 상당해서 결국 900년된 나라를 망하게 하였다.
누구의 정책이 옳았건 누가 잘못을 했건 나라를 지키지 못한 연남생과 연남건은 역사의 죄인이며 죽은 고구려의 열성조들과 아버지 연개소문은 지하에서도 눈을 갑지 못했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