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훈장 수훈자 덕운 위황량(德雲 魏滉良) 옹 별세
-나눔과 봉사, 숭조와 향토문화 발전에 바친 백년의 삶
장흥위문(長興魏門)의 원로이자 지역사회의 큰 어른이었던 덕운 위황량(德雲 魏滉良) 옹이 지난 6월 17일 밤 별세했다. 향년 100세.
덕운 옹의 별세 소식이 전해지자 장흥 지역사회와 장흥위씨 종친들은 깊은 애도를 표하고 있다. 평생을 지역과 문중, 문화와 교육, 그리고 이웃을 위해 헌신해 온 그의 삶은 한 세기를 관통한 봉사와 나눔의 역사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덕운 옹은 관산에서 신생약국을 운영하며 평생 지역민들의 건강을 돌보았고, 의료환경이 열악했던 시절에는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약국 문을 열어 주민들의 곁을 지켰다. 그러나 그의 삶은 단순히 약업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얻은 것을 지역사회에 돌려주는 것을 삶의 사명으로 여겼으며, 평생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덕운 옹의 삶을 관통하는 핵심 가치는 ‘배려와 나눔’이었다. 그는 20대 후반부터 숭조사업과 사회봉사에 참여하기 시작하여 70여 년 동안 한결같은 마음으로 지역사회 발전과 문화 창달에 헌신했다. 선조를 기리는 사업은 물론 장학사업, 향교 지원, 문화유산 보존, 향토사 연구, 천관산 가꾸기 운동에 이르기까지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드물 정도였다.
특히 존재 위백규 선생 현창사업은 덕운 옹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꼽힌다. 존재 선생에 대한 학술적 조명과 선양사업이 본격화되는 과정마다 덕운 옹의 헌성과 노력이 함께했다. 존재 선생 동상 건립, 관련 자료 발간과 지원, 문중 유적 정비 등에 적극 참여하며 지역의 역사와 정신을 후세에 전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하산사 신실 건립, 덕암공 의열비 건립, 충렬공 위계정 신도비 조성 등 문중의 성역화 사업에도 앞장섰다. 2018년 회주사 경내에 세워진 충렬공 신도비 역시 덕운 옹의 거액 헌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선조를 기리고 후손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일이야말로 미래를 위한 투자라는 것이 그의 평생 신념이었다.
교육과 장학사업 역시 그의 빛나는 업적 가운데 하나이다. 관산중학교와 관산고등학교 운영위원장, 장흥교육청 행정자문위원장 등을 맡아 교육환경 개선에 힘썼고, 청운장학회와 천관장학회를 통해 수많은 지역 인재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는 “인재를 키우는 일이 지역의 미래를 만드는 길”이라고 늘 강조하였다.
유림으로서의 삶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장흥향교 전교를 역임하며 유림문화 계승에 힘썼고, 향교 시설 정비와 윤리문화 진흥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다. 특히 《유가요람》 발간을 비롯한 전통문화 보급 활동은 지역 유림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남겼다.
덕운 옹은 향토문화 보존과 연구 분야에서도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장흥문화원 이사와 향토문화보존위원회 부위원장, 『장흥군지』 편집위원 등을 맡아 지역 문화유산의 조사와 보존에 힘썼다. 장흥 암각문 발굴조사의 출발점이 되기도 했다. 장흥문화원과 해동암각문연구회가 추진한 장흥 암각문 조사사업은 2020년 덕운 옹의 안내로 천관사와 장천재 등을 답사하면서 시작되었다.
평생 천관산을 사랑한 인물이기도 했다. 천관산 봉수대 복원, 각종 표석 건립, 자료집 발간, 장천동 영월정 건립 등 천관산 가꾸기와 홍보사업에 남다른 애정을 쏟았다. 이에 역사학자 홍순석 교수는 2020년 펴낸 역사기행 한시선집 『천관산』을 덕운 옹에게 헌정하며 “평생 천관산을 사랑하며 살아오신 분”이라고 기록하기도 했다.
서예가로서의 족적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덕운 옹은 각종 전국 서예대전에서 입상하며 실력을 인정받았고, 평생 4천여 건에 이르는 휘호를 써서 개인과 단체에 기증하였다. 그의 휘호는 단순한 작품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잇는 나눔의 매개였으며, 문화봉사의 실천이었다. 고령에 이르러서도 붓을 놓지 않았던 그는 지역 서예문화 발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남겼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덕운 옹은 2007년 정부로부터 문화훈장 옥관장을 수훈하였다. 당시 지역 출신 인사로서는 매우 드문 사례였으며, 향토문화 보존과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평생의 헌신이 국가적으로 평가받은 결과였다. 이후에도 그는 장원봉 유래비 건립, 충렬공 신도비 조성, 장학기금 출연 등 다양한 공익사업에 참여하며 나눔과 봉사의 삶을 이어갔다.
그러나 무엇보다 사람들은 덕운 옹을 화려한 직함이나 공적보다 '좋은 어른'으로 기억한다. 그는 평생 모은 재산을 자신보다 공동체를 위해 사용했고, 남을 돕는 일을 기쁨으로 여겼다. 지역사회에서는 그를 두고 '배려와 베풂의 한세상을 산 사람', '마지막 선비', '복인(福人)'이라 불렀다. 백수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지역 현안과 문화사업에 관심을 기울이며 후배들을 격려했던 모습은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한 세기를 살아오며 자신보다 공동체를 먼저 생각했던 사람. 평생을 나눔과 봉사, 숭조와 문화 창달에 바친 사람. 덕운 위황량 옹의 삶은 이제 역사가 되었지만, 그가 남긴 선덕(善德)의 향기는 오래도록 장흥의 산하와 사람들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장흥위문의 큰 어른이자 지역사회의 정신적 지주였던 그의 삶을 기억하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장흥위씨 씨족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위이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