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서공의 부인은 경주 이씨이다.
남편인 공이 세상을 떠난 뒤 12년이 지난 계사년(1533) 10월 어느 날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석 달 뒤 양주에 있는 공의 묘역에 장사지냈다. 참찬 이사균이 이미 그 사실을 자세히 묘지에 기록하였다. 그 세계를 살펴보면, 이씨는 신라의 명문가로 대대로 높은 벼슬과 명망을 누렸고, 조선에 들어와서도 여러 대에 걸쳐 법관의 보좌 관직을 지냈다.
조부는 휘 번으로 전주부윤을 지냈고, 부친은 휘 영령으로 문소전직이었다. 어머니는 참의 이익의 딸이다. 부인은 성화 갑오년(1474)에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바른 가르침 속에서 자라 보고 듣고 익힌 것이 모두 단정하고 정숙하였다. 공에게 출가한 뒤에는 시부모를 공경으로 섬기고, 집안이 풍족하여도 늘 스스로를 경계하였으며, 남편이 귀한 지위에 올라도 조금도 교만하지 않았다.
남편상을 당해서는 예를 다하여 상을 치렀고, 지나친 슬픔으로 건강을 해칠 정도였다. 자녀로는 장남 언이 있어 사복시 주부를 지냈고, 차남 두는 홍문관 수찬이 되었으며, 딸 하나는 유학 이원복에게 출가하였다. 그 밖의 자세한 내용은 비지명에 실려 있다.
아아! 판서공이 세상을 떠난 지도 이미 오래되었다. 비석은 이제야 새겨졌지만 그 비문은 오래전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부인의 세계와 행적을 다시 자세히 적지 않고, 공의 비석 뒷면에 간략히 기록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수찬이 뜻한 바이다.
세월이 흘러 산이 골짜기로 변하고 골짜기가 산으로 변한다 하더라도, 썩지 않는 것은 단단한 비석에 의탁하여 후세에 전해질 것이니 의심할 바가 없다. 이러한 뜻이야말로 또한 훌륭한 일이 아니겠는가. 가정(嘉靖) 15년(1536) 봄에 쓰다.
[부주]
저자 묵재(默齋) 홍언필(1476~1549)의 자는 자미(子美),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연산군·중종·인종·명종 대에 활동한 조선 중기의 명신으로, 경학과 문장에 뛰어나 사림의 중망을 받았으며 벼슬은 의정부 좌찬성에 이르렀다. 문집으로 《묵재집》이 전한다.
이 글은 한 판서의 부인인 경주 이씨의 세계(世系)와 덕행, 자손 상황을 간략히 기록한 비음기(碑陰記)이다. 어려서부터 가정의 교훈을 이어받아 시부모를 정성껏 섬기고, 부귀한 환경에서도 겸손함을 잃지 않았으며, 남편상을 당한 뒤에는 예를 다해 상례를 치른 모습을 칭송하고 있다. 아울러 비석에 새겨진 덕행은 세월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을 밝힘으로써, 후세에 모범을 전하려는 조선 전기 묘도문자의 정신을 보여 주고 있다.
국역 > 이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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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韓判書夫人碑陰記
公之夫人慶州李氏。後公卒十二年,癸巳十月某日,以疾終。越三月某日,窆于楊州公墓之兆。參贊李公思鈞,誌之詳矣。其派系曰:李氏,新羅望族,世躋華顯。入國朝,高曾繼爲法官之佐。大父諱蕃,全州府尹;考諱永齡,文昭殿直。娶參議李翊之女。成化甲午,生夫人。其內範曰:幼在敎訓,見聞擩染,罔非端貞。及歸于公,祇事尊章,家肥而思愆,夫貴而不盈。服公之喪,極敬盡禮,哀毀傷性。其後曰巘,司僕主簿,其長也;次曰㞳,弘文修撰;女其季也。壻曰幼學李元福。餘具碑誌。
嗚呼!判書公之下世久矣。碑今雖鐫,而其文之就之也,蓋亦久矣。肆夫人系行不追載,迺卽公之碑陰以書之。此修撰之志也。陵谷之變也,而其不朽者,則託乎貞珉,以傳也無疑矣。其志固不亦可也。時柔兆攝提格嘉靖十五年春也。
默齋先生文集卷之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