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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명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 신도비명 병서(神道碑銘 幷序)

작성자야촌|작성시간26.06.16|조회수57 목록 댓글 0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문정(文貞) 민공(閔公) 유중(維重)의 신도비명 병서

생각건대, 우리 효종대왕께서 대업(大業)을 회복하기 위하여 영준(英俊)들을 모아들임으로써 영준들끼리 서로 무리를 지어 조정에 들어가는 성대함이 있었다. 이때 학사(學士) 민공 같은 이는 깨끗한 명성과 곧은 절조로 당세의 제일류에 속하여 세 조정을 내리 섬기는 동안에 덕업(德業)이 성대히 드러나고 지위가 대사마(大司馬)에 이르러 곧 재상 자리에 들어가게 되었으나, 우리 인현성모(仁顯聖母 : 민유중의 딸로서 숙종의 계비가 되었음)께서 왕비의 자리에 오르시자, 공은 국구(國舅)로서 왕실의 외척은 재상이 될 수 없다는 고사에 얽매여 끝내 재상 되는 길이 막힘으로써 그 경세제민의 큰 솜씨를 묶어두고 펴지 못하였으므로, 조야가 모두 한탄하였다.


공의 휘는 유중(維重)이요 자는 지숙(持叔)이다. 그 선대는 황려(黃驪)에서 발상되었는데 봉어(奉御)를 지낸 칭도(稱道)로부터 그후 5, 6세(世) 동안 고려조에서 크게 현달하였다. 아조에 들어와서는 심언(審言)이란 분이 국가가 위태롭고 의구스럽던 단종(端宗) 때를 당하여 개성 부유수(開城副留守)로서 물러가 은둔하여 세상에 나가지 않았고, 그의 아들 충원(冲源)은 유일(遺逸)로 집의(執義)에 발탁되었다. 

 

그후 그 대를 지나 좌찬성 제인(齊仁)에 이르러서는 문장(文章)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고 호는 입암(立巖)인데, 을사사화가 일어났을 때 홀로 ‘안명세(安名世)의 사필(史筆)을 고쳐서는 안 된다.’고 말하자, 간당(姦黨)들이 그에게 역적을 비호한다고 지목함으로써 유배되어 죽었다. 

 

이분이 문천 군수(文川郡守)로 좌참찬에 추증된 사용(思容)을 낳았으니, 공에게는 고조가 된다. 증조 휘 여건(汝健)은 장흥 고령(長興庫令)으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조 휘 기(機)는 경주 부윤이고, 고(考) 휘 광훈(光勳)은 강원도 관찰사인데. 이 양세(兩世) 모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정경부인에 추증된 비(妣) 연안 이씨(延安李氏)는 부원군 광정(光庭)의 딸이다. 세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는 대사헌 시중(蓍重)이고, 다음은 좌의정 정중(鼎重)이고, 맨 끝이 공이다. 부윤공과 관찰공이 모두 착실한 행실과 순수한 덕으로 세상에 칭도되었고, 공의 형제들은 성대히 사림(士林)의 영수(領袖)가 되었다.


공은 숭정 경오년(1630, 인조 8) 10월 10일(을묘)에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서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병자호란 때에는 온 집안이 황급하게 피난을 하면서 이틀 동안에 겨우 부평(富平)에 당도하였었다.

 

이때 대가(大駕)는 곧 강도(江都)로 갈 예정이었고 관찰공은 이미 묘사(廟社)의 신주를 모시고 먼저 들어가 있었던 터였는데, 종자(從者)들이 모두 “여기서 강도로 가자면 거리가 매우 가깝고 또 천연의 요충지로서 충분히 믿을 만하니, 반드시 그곳으로 가야 합니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나는 듣건대 임금이 가는 곳에는 구적(冦敵)이 반드시 따른다 하니, 그곳으로 가는 것은 불편하다.” 하였다.

 

이때 공이 겨우 7세였으므로, 이 부인이 대단히 기이하게 여겨 이르기를 “이는 하늘이 유도한 것이다.” 하고, 마침내 영남으로 내려가서 끝내 온 가족을 온전히 보호할 수 있었다. 공이 조금 자라서는 스스로 분발해서 힘써 학문을 하여 향숙(鄕塾)에 나가 공부할 적에 동류들이 따를 자가 없었다. 

 

19세에는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21세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괴원(槐院)으로부터 한원(翰苑)에 들어가 검열이 되었는데. 신진(新進) 가운데 오직 그 적임자를 가려 취한 것이다. 이어서 대교ㆍ봉교ㆍ겸설서를 역임하였다. 계사년에는 전적에 오르고 감찰과 예조ㆍ병조의 좌랑에 옮겨졌다가 이 부인의 상(喪)을 당하였다. (喪)을 마친 뒤 정언ㆍ사서에 제수되자, 공이 상소하여 사직하면서 수년 동안 글을 읽도록 휴가를 달라고 요청하니, 상이 그 뜻을 가상히 여기어 관직 임명이 오랫동안 중지되었다.


병신년 여름에야 비로소 병조의 낭관과 지평ㆍ사서를 제수 받았는데, 때마침 재해가 자주 발생하므로, 수천 언(數千言)의 봉사(封事)를 올려 실정(失政)에 관한 일을 극력 논하고, 시기적절치 못한 대내(大內)의 건축 공사와 공주(公主)의 집을 짓는 데에 소비를 과다히 하는 일까지 아울러 언급하였다. 또 정언에 전직되어 다시 앞서 말한 것들을 되풀이하고는, 인하여 자신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을 이유로 해면을 요청하니, 상이 온후한 비답으로 타일렀다.


이에 앞서 조정에서 쌀 천 곡(斛)을 시민(市民)들에게 풀어 주고 시민들로 하여금 그 대가를 가을에 돈으로 갚도록 하였었다. 그런데 이윽고 돈이 발행되지 않아 본 품목, 즉 쌀로 다시 받아들였다. 그러자 공이 “이는 백성을 기만하는 일이다.”하며 강력히 쟁론하여 그 사안(事案)이 묘당(廟堂)에 내려졌는데, 대신이 그에 대한 방안을 아뢴 말이 흐리터분하므로 공이 또 대신을 배척하여 말하기를 “결국은 원망을 나라에 돌리고 자신은 빠져나가려고 합니다.

 

대신이 이 모양이니 백관을 어떻게 책망하겠습니까.” 하였다. 그러자 대신이 스스로 인책하고 상도 누차 엄한 전교를 내리므로, 공이 감히 편치 못하여 사직하여 체차되었다. 그후 병조의 낭관과 정언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정유년(1657)에는 지평에 제수되었다. 이때 칼을 뽑아 들고 싸우는 젊은 불량배가 있어 장령 오공 두인(吳公斗寅)이 그들을 급하게 체포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공이 오공과 함께 조정에서 물러나 오다가 말 재갈을 잡은 자가 피를 토하며 땅에 쓰러지는 것을 보고는 자세히 그 사유를 물어본 결과, 바로 오공이 체포한 불량배 가운데 하나인, 공자(公子)의 집 종이 오공에게 앙갚음을 하려고 흉기를 던진 것이 잘못 마부에게 맞은 것이었다.

 

그래서 공과 오공은 즉시 사헌부에 나와 공자의 집 종을 체포해다가 치죄한 결과 그는 끝내 죽었다. 그런데 상은 공자의 말만 받아들이고 대단히 노하여 공과 오공을 모두 함경도 지방으로 보임시키도록 명하였다. 그리하여 공은 경성 통판(鏡城通判)이 되었는데, 경성 지방은 서울과의 거리가 멀어서 임금의 교화가 미치지 못한 곳이었다. 

 

공은 그곳에 당도하자마자 맨 먼저 효제(孝悌)의 도리를 글로 써서 백성들에게 포고한 다음, 향리의 자제(子弟)들 중에 가르칠 만한 자들을 골라 가르치고, 천인(賤人)이면서도 남편이 죽은 뒤에 재가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관에서 생활비를 대주었으며, 죄가 있는 자에게는 다시 죄를 짓지 않도록 먼저 교도를 하고 그래도 고치지 않은 다음에야 형벌을 시행하니,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한 경내가 크게 다스려졌다. 

 

그 다음해에 특별히 예조 정랑에 제수되어 그곳을 떠나게 되자, 어린이로부터 백발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나와 수레를 에워싸고 울면서 하직하였고, 그 고을에 7개의 비(碑)를 세워 공의 덕을 칭송하였다. 공은 병조 정랑으로 지제교를 겸하였다가 이윽고 옥당에 들어가 부수찬이 되어서는 두 차례나 차자를 올려 경계를 드리니, 상이 크게 칭찬하였다. 얼마 뒤 스스로 하고(下考)에 처하였다. 

 

그 뒤 서용되어 헌납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기해년에는 부교리에서 헌납으로 옮겨진 것이 두 번이었고 또 중학 교수(中學敎授)를 겸하였다. 이때 상이 청 나라에 대하여 와신상담의 뜻을 품고 정신을 분기시켜 정치를 함으로 인하여 뭇 어진 이들이 조정에 나아가니, 

온 세상이 면목을 일신하였다. 

 

그러자 공은 더욱 스스로 격앙하여 큰 계책을 협찬할 것을 생각하고 날마다 계(啓)와 차자를 올리되 하루에 혹 10여 가지의 일을 올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 큰 요점은 민폐를 혁파할 것과 언로를 넓힐 것과 기강을 세울 것과 선거를 공정히 할 것과 부정한 방법으로 출세하는 길을 막을 것과 탐혹한 자를 징계할 것을 급선무로 삼았으므로, 상이 모두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이때 참판 김좌명(金佐明)이 자기 아버지인 고 상국 육(堉)을 장사 지내면서 참람하게 수도(隧道)를 사용하였으므로, 공이 죄상을 조사하고 개장(改葬)시킬 것을 계청(啓請)하였다. 그러자 동료들은 두려워서 모두 목을 움츠렸는데, 혹자가 체례(體例 관리 사이에 지키는 예절)에 관한 하찮은 일로 공을 배척하였다. 

 

그래서 공은 이미 스스로 자신의 죄상을 진술하고, 또 엄한 전교로 부름을 받고 나아가지 않은 것 때문에 상소하여 대죄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 일은 경솔함을 면하기 어렵다. 내 말은 노여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곧 경을 가르치는 것이다. 우선 깊은 생각을 가지고서 마음을 평온하게 하여 살피어라. 그러나 말은 공평하니, 체직할 수 없다.” 하였다. 

 

공이 재차 상소하여 거듭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오래도록 굳이 체직하지 않는 것은 예로 대우하는 도리가 아니므로, 지금 우선 윤허하노라.” 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겸대(兼帶)의 직은 체직하지 말도록 명하였으니, 대체로 예전 역사에도 보기 드문, 성스러운 임금에 곧은 신하였던 것이다.


상이 이때 여러 궁가(宮家)와 각(各) 아문(衙門)이 산택(山澤)을 절수(折受)한 것 및 모든 불법에 관계된 일들을 혁파하기 위해 공명 정직한 시종신을 특별히 간택하여 여러 도를 자세히 살피도록 하면서 20여 조항이 적힌 봉서(封書)를 내렸으니, 이는 모두 성상의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공은 영남우도를 맡았는바, 마음을 다해 지방 실정을 탐문 조사해서 성상의 뜻에 보답하려고 기했었는데, 도중에 성상이 승하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밤낮을 쉬지 않고 달려와 상주(喪主)에게 복명하였다. 그후 이조 정랑ㆍ교리를 역임하고 부친상을 당하였다. 

 

상을 마치고는 이전의 관직에 복직되었는데, 상이 병환 때문에 오랫동안 강연(講筵)을 정지하므로, 공이 동료와 함께 세 차례나 차자를 올려 경계를 드리고, 또 말하기를 “고사에 의하면, 옥당에 내리는 비답은 일찍이 하룻밤도 넘긴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8일이 되었어도 아무런 지휘가 없으시니, 혹 신들의 말을 듣기가 싫어서 그러신 것이 아닙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진실로 질병 때문에 그런 것인데, 마음에 없는 말을 들으니 부끄럽고 두려워서 몸 둘 곳이 없다.” 하였다. 

 

그러자 공이 글을 올려 대죄(待罪)하면서 이 문성(李文成 이이(李珥))이 선조(宣祖)에게 고했던 말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임금이 공론을 거절할 적에는 흔히 질병으로 해명을 하니, 이는 임금에게 질병이 있는 때가 바로 국가의 위망이 눈앞에 닥친 때인 것입니다.” 하며, 더욱 바름을 견지하여 굽히지 않으니, 상도 공을 위하여 공경히 예우하였다.


임인년에는 이조 정랑ㆍ직강을 역임하고 수찬에 옮겨졌는데, 이때 의주 부윤 이공 시술(李公時術)이 청 나라의 지경과 흔단이 생기어 화의 기미가 헤아릴 수 없게 되자, 공이 비밀히 상소하여 그를 구해(救解)할 계책을 진술하고, 인하여 변방 일의 편의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이윽고 다시 이조 정랑이 되었다가 파면되어 여강(驪江)으로 돌아갔다. 그후 또 이조 정랑ㆍ헌납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계묘년에는 부교리로부터 다시 이조 정랑이 되어 교서관 교리를 겸하였다. 공이 이조의 관직에 대해서는 누차 제수되었으나 그때마다 사양했다가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명을 받은 것이다. 

 

공은 일심으로 일을 공평히 처리하여 선악을 매우 세밀히 분변하였고, 소장(消長)의 기미에 더욱 신중히 대처하였다. 이어 부응교에 올라 서학 교수(西學敎授)를 겸하다가 사간에 옮겨졌다. 이때 양사(兩司)가 여러 궁가의 시장(柴場)ㆍ어장(漁場)을 절수(折受)한 폐단을 가지고 오랫동안 쟁론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고 또 여러 궁가의 소속들에게 모두 역역(力役)을 면제하도록 명하였는데, 해조가 불가하다고 논집하자 근거가 없다고 책망하였다. 

 

그러자 공은 매우 강력히 쟁론하고 또 상을 면대하여 여러 가지 다른 일까지 수천 언에 이르도록 남김없이 논의하면서, 상의 과실을 지척하고 관원들의 부정함을 밝히어 바로잡되 조금도 거리낌이 없이 하였다. 이때 낮 시간이 이미 늦었는데도 상이 싫어하거나 괴롭게 여기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들어준 일이 많았으므로, 동료들도 공을 두려워하였다. 이어 집의에 제수되었다가 제용감 정으로 체직되었다.


갑진년에는 부응교로 명을 받고 강도(江都)에 가서 군대의 기계(器械)와 양향(糧餉) 등을 검찰하고 돌아와 그 사실을 자세하고 명확하게 아뢰니, 모두 사의(事宜)에 합당하였다. 이어 집의에 고쳐 제수되어 한학 교수(漢學敎授)를 겸하였다. 이에 앞서 청 나라 오랑캐의 칙서(敕書)가 반포되었는데, 수찬 김만균(金萬均)이 자신의 조모가 호란(胡亂)에 죽었으므로 의리상 차마 그들의 사신을 영접할 수 없다는 뜻으로 상소하여 진정하였다. 

 

그러자 승지 서필원(徐必遠)이 부모의 원수보다는 가볍다면서 허락하지 말기를 청하였으나, 김만균은 끝내 청 나라 사신 영접 반열에 나가지 않았다. 그리하여 옥관(獄官)의 심문을 받기에 이르자, 우암 송 선생께서 상소하여 예경(禮經)의 ‘복수(復讎)의 의리는 오세(五世)에 이르러서 다한다.’는 설을 인용해서 “천하의 큰 예법을 혼란시켜 없애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때 서필원은 먼저 이미 북도의 관찰사로 나가 있으면서 소장을 급속히 올려 우암 선생께 대항하여 변론을 하였는데, 사리에 어긋난 말이 많았다. 그러자 대신(臺臣) 이규령(李奎齡)ㆍ조성보(趙聖輔)가 서필원을 탄핵하려고 하였으나 동료들의 논의가 통일되지 않았으므로, 상이 이 두 사람을 북읍(北邑)으로 특별히 내보내고, 또 억양(抑揚)이 상의 뜻에 맞지 않은 것 때문에 전관(銓官)들을 모두 파면하였다.

 

이때 공이 강도에서 돌아와 개연히 탄식하기를 “의리가 어두워져버렸다.” 하고는, 마침내 서필원의 편벽되고 비뚤어진 죄상과 삼사(三司)의 무기력한 과실을 논박하고, 또 외직에 보임된 두 대신을 환조(還朝)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진노하여 당장에 공을 체직하였다. 얼마 후에 교리에 제수되었으나 사체하였고, 명을 받아 관서(關西) 지방을 시찰하고는 돌아와 상을 대하여, 변방을 튼튼히 하고 학교를 진흥시킬 방도를 조목조목 진술하니, 상이 공의 아뢴 말마다 허가해 주었다. 이어 사도시 정을 거쳐 응교에 제수되었다.


을사년에는 사인을 거쳐 다시 응교가 되었다가 전라 감사에 발탁되자, 감동 분발하여 정사에 적극 힘쓸 것을 생각하고 주야로 부지런히 힘쓴 결과, 호령이 엄하고 교화가 행해지며, 이로운 것은 진흥되고 해로운 것은 제거되었다. 그리하여 임기가 차서 정적(政績)을 보고한 결과 몇 달 동안 더 유임되었다. 체직하여 첨지중추에 제수되었다가 판결사ㆍ대사간ㆍ승지 겸 승문원부제조에 옮겨졌다.


정미년에는 이조 참의가 되고 또 비국(備局)을 겸하였다. 이때 허적(許積)이 청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국위를 손상시키고도 도리어 스스로 공치사를 하므로, 간관(諫官) 이공 숙(李公䎘)이 양사(兩司)를 창도하여 그의 죄상을 논핵하니, 상이 크게 진노하여 일시에 일곱 간신(諫臣)들을 찬축하였다. 

 

그런데 공이 막 이 일곱 간신들을 전별하는 자리에 갔을 때, 남이 엿보는 것을 금해야 한다는 자가 있자, 그 자리에 앉았던 손들이 대부분 놀라 흩어졌으나, 공만은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다가 그 시간을 다 마치고 돌아갔다. 공은 다음날 정사에 임하여 ‘제신(諸臣)이 비록 죄를 입기는 했으나 전지(傳旨)가 내리지 않았으므로, 법규상 그 대관(代官)을 내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으로 아뢰니, 상이 엄한 비답을 내리고 특별히 추고하도록 하였다. 

 

수일 뒤에는 규정된 휴가를 인하여 정사에 참여하지 않은 것 때문에 상이 거만하다고 책망하고, 또 파직하고 추고할 것을 명하였다. 그후 달포 남짓 지나서 특별히 승지에 제수되고, 이어 부제학ㆍ형조 참의ㆍ대사간에 옮겨졌으나, 모두 사체하였다.


얼마 후 승지가 되어서는 김공 만기(金公萬基)와 함께 입시하여 상이 오랫동안 강연(講筵)을 열지 않은 것을 가지고 합사(合辭)로 이를 경계시키자, 병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이 진언하기를 “이 두 신하는 사람을 진퇴시키는 것과 형통하게 하고 비색하게 하기를 자신의 호오(好惡)에 따라서 하니, 만일 그들의 사정에 치우치는 행위만 버리도록 한다면 비록 강연을 10일에 한 번씩만 열더라도 반드시 나라에 유익할 것입니다.”하니, 공이 말하기를 “만일 김좌명의 말대로라면 이는 권신(權臣)이니, 의당 물러가 형벌을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하고, 물러 나와서는 연해서 소장을 올려 죄를 청하고 체직되어 광주(廣州)의 시골집으로 돌아갔다. 그후 관직 제수의 명이 다섯 번이나 내렸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무신년에는 충청 감사가 되었는데, 호서(湖西)는 호남(湖南) 지방과 가까우므로, 백성들이 이미 공의 치화(治化)를 익히 들어왔던 터라 호령하면 행해지고 금하면 중지되어 힘을 들이지 않고도 정사가 이루어졌다. 이해 겨울에는 본도의 균전사(均田使)를 겸하여 본도의 높고 낮은 수많은 전지(田地)를 몸소 분주히 답사하면서 친히 전지의 비옥함과 척박함을 구별하고서, 장차 경계(經界)를 바로잡고 부역(賦役)을 균등하게 하려고 하였는데, 그 일을 다 마치기 전에 갑자기 다른 관직으로 옮겨 가게 되자, 식견 있는 이들이 이를 한스럽게 여겼다.


그후 대사성을 거쳐 평안 감사에 발탁 제수되었다. 그런데 공은 평소에 유학의 교화를 숭상하였거니와 서쪽 지방에 대해서는 더욱더 뜻을 두었었다. 그리하여 학생들에게 학업을 일과로 정해 주고, 문묘(文廟)의 위치를 바로잡았으며, 제기(祭器)와 제복(祭服)은 일체 옛 제도를 따르고 관례와 혼례의 복식(服飾)은 별도로 갖추었으며, 성현의 서적을 열군(列郡)에 두루 반포하여 학습의 자료로 삼았다. 

 

그리고 정렬(貞烈)을 표창하고 무용(武勇)을 장려하며, 미인들과 연회를 열고 즐기는 일을 줄이어 낭비를 없애고, 가난한 백성을 도와주어 제때에 시집을 가도록 하였다. 또 기회를 틈타 성지(城池) 및 무비(武備)를 수선하였고, 조선으로 정벌 나왔던 명 나라 장수들의 사당을 새로 단장하고,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사당을 창건하였으며, 모든 관우(館宇)의 퇴락한 것들을 모두 일신시켰다. 그러나 백성들은 수고로운 줄을 몰랐다.


그리고 오랑캐의 사신이 오면 으레 협박하는 행위가 많았는데, 공이 통역관들을 엄격히 검속하고 또 오랑캐와 은밀히 내통한 역관 두 사람을 장살(杖殺)하니, 일로(一路)가 두려워서 삼갔고 오랑캐들도 감히 노여움을 부리지 못하였다. 신해년에 임기가 끝났는데, 상이 명하여 그 지방을 완전히 진구할 일로 잉임(仍任)시켰다. 

 

그후 얼마 안 되어 형조 판서에 승진되었는데, 대신이 공의 후임자 고르기를 어렵게 여겨 육경(六卿) 가운데서 고를 것을 청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민모(閔某)에게 승진된 새 자급(資級)을 주어 그곳에 잉임시켜라.” 하였으니, 이는 대체로 한(漢) 나라 때 증질(增秩)의 고사를 사용한 것이다. 

 

이듬해 여름, 지중추에 제수되었는데, 공이 돌아옴에 미쳐 그곳의 관고(官庫)는 가득 차 있고 공의 짐보따리는 쓸쓸하였으므로, 서도의 백성들이 비석을 세워 공을 추모하고 또 사당을 세워 공을 제사 지냈다. 그후 형조 판서ㆍ대사헌ㆍ우참찬 겸 빈객ㆍ총관과 의금부의 관직을 지내고 한성부 판윤에 옮겨졌다가, 다시 대사헌이 되어 또 경연ㆍ춘추관의 직을 겸하고 형조 판서로 고쳐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수개월 동안에 형조 판서를 두 차례 지내면서 송사를 잘 처리하여 감옥이 거의 텅 비었다.


계축년에는 호조 판서ㆍ총융사가 되었는데, 이때 영릉(寧陵 효종릉을 가리킴)을 이장(移葬)하였다. 또 명년에는 인선대비(仁宣大妃 효종의 비)가 승하하였는데, 공이 효종의 산릉(山陵)과 인선대비의 국장(國葬) 두 도감(都監)을 연해서 관장하여 그 공로로 정헌ㆍ숭정의 품계가 더해졌다.


처음 효종이 승하하였을 때, 자의대비(慈懿大妃 인조의 계비)의 상복(喪服)을 기년(期年)으로 의정하였는데, 허목(許穆)이 상소하여 당연히 삼 년을 입어야 한다고 논하였다. 그러자 상이 이를 대신에게 묻도록 명하였다. 그런데 유신(儒臣)인 동춘ㆍ우암 두 송 선생(宋先生)이《의례(儀禮)》소(疏)의 사종설(四種說)을 인용하여 논변하였고, 또 국조(國朝)의 고사를 상고해 본 결과 역시 모두 기년복을 입었으므로, 허목의 설이 마침내 행해지지 않았다.

 

그러자 간당들이 이를 인하여 화를 만들어 심지어는 두 송 선생을 가리켜 임금을 폄손시키고 왕통을 어지럽힌다고 지목하였다. 그후 인선대비의 상을 당했을 때도 자의대비의 복제(服制)는 중자부(衆子婦)로서 대공(大功 9개월 입는 복)에 해당하는데, 영남 사람 도신징(都愼徵)이 상소하여 대공으로 강쇄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러자 상이 대신과 육경과 삼사로 하여금 함께 의논하도록 하니 여럿이 말하기를 “기해년의 복제는 본시 시왕(時王)의 제도를 사용한 것인데《대전(大典)》의 ‘중자부는 대공을 입는다는 조항[衆子婦大功條]’에도 ‘승중의 경우는 기년을 입는다.[承重則服期]’는 글은 없습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상이 또 예경을 참고하라고 명하므로, 이에 사종설을 들어 해석하여 대답하니, 상이 크게 진노하여 기년으로 고치도록 명하고, 영상 김공 수흥(金公壽興)을 중도에 부처하였는데, 이는 선왕을 잊고 다른 사람의 논의에 따랐다 하여 죄를 삼은 것이다.

 

그리하여 제신(諸臣)이 도성을 나가 처분의 명을 기다리고 있으므로, 좌상 정공 지화(鄭公知和)가 차자를 올려 제신에게 공직(供職)할 것을 명하도록 요청하니, 상이 비답하기를 “처분이 이미 정해졌는데도 ‘처분의 명령을 기다린다.’고 한 것은 임금을 진실하게 섬기는 의의가 아니다.” 하였다.

 

그러자 공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신이 예경을 의거하여 망녕되이 전주(箋註)의 뜻을 논하고 신이 또 집필(執筆)까지 하였으니, 죄가 제신들보다 큽니다. 국법을 받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마침 청 나라 사신이 오므로, 특별히 공을 원접사로 임명하여 보냈는데, 복명도 하기 전에 상이 갑자기 승하하였다. 

 

그리하여 금상(今上)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곽세건(郭世楗)ㆍ조함(趙瑊)의 무리가 기회를 틈타 소장을 올려, 예를 의논했던 제신들을 극도로 흉험하게 무함하므로, 공이 병을 칭탁하여 사직하는 차자를 여섯 번이나 올려 마침내 호조 판서의 직을 해면하고 참찬에 제수되어 진휼당상에 임명되었다.


그후 산릉의 일을 마치고는 즉시 강상(江上)으로 나가 있던 중, 사헌부의 논핵이 과연 일어나서 우암 선생이 으뜸으로 삭출되었는데, 또 동춘 선생의 관작을 추탈하고 예를 의논한 제신들을 파직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을묘년 1월에야 이 논핵이 비로소 정지되었다. 

 

이때 공은 소장을 올려 처벌해 주기를 청하고 총융사의 밀부(密符)를 봉납(封納)하였으나 상이 온후하게 타이르고 윤허하지 않았는데, 공은 먼저 이미 교외(郊外)를 향해 출발하였다. 그리하여 승정원이 이 사실을 보고하니, 상이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의정공(議政公 여기서는 민유중의 형인 민정중(閔鼎重)을 말함) 역시 국장(國葬)의 일을 감독하라는 명을 받아 일을 마치고는 먼저 양주(楊州)의 평구(平丘)로 가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공과 동행하였다. 그리하여 함께 충주(忠州)에 도착해서는 서로 가까운 곳에 각각 자리 잡고 살면서 필마(匹馬)로 왕래하며 술잔도 나누고 글도 강론하여 흔연히 이를 지극한 낙으로 삼으니, 따라와서 배우는 향리의 자제들이 퍽 많았다.


공은 일찍이 도감(都監)을 맡은 공로로 숭록의 품계가 더해졌는데, 시골로 내려가는 길에 상소하여 모든 직임을 해면하고 새로 올린 자급을 환수하기를 요청한 결과, 상이 총융사의 직만 체직하였다. 그런데 그후 우암이 북쪽으로 유배되자 역적 윤휴의 무리가 더욱 강력하게 공을 헐뜯으므로, 공이 누차 소장을 올려 사양하였으나, 상이 완강하게 윤허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루는 연중(筵中)에 하교하기를 “민모가 지금 막 비변사의 직을 겸대하였으므로, 오래도록 밖에 있어서는 안 되니, 유시를 내려 속히 부르라.” 하였는데, 공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상소하여 심정을 말하였다. “신은 소년 시절부터 송시열의 문하에 종유하면서 한갓 그의 학문의 순정함과 실천의 독실함과 임금을 사랑하는 순수한 충성과 세상을 부지하는 대의가 있는 것만을 알았고, 그에게 요즘 사람들이 지적하는 말과 비슷하게나마 권세를 탐하고 나라를 그르치는 행위가 있음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예경(禮經)의 깊은 뜻에 이르러서는 신이 비록 그 일부분도 알지 못하지만, 망녕되이 진작부터 소가(疏家)의 사종설(四種說)을 잘못 지켜 왔던 터라서, 빈청(賓廳)의 회의하던 날에는 감히 그 소견을 숨기지 못하고 내놓았다가 끝내 이 불측한 지경에 빠졌습니다. 

 

그러니 신의 죄를 조사해 보면 어찌 송시열보다 가볍겠습니까. 그런데 송시열은 이미 죄수(罪首)로 지목받아 먼 변방에 유배되었으니, 신도 사리상 혼자 면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논핵하는 자들이 심지어는 우리들을 송 나라 때의 소인배였던 왕안석(王安石)ㆍ여혜경(呂惠卿)에 비유하기까지 하니, 이렇게 큰 치욕을 당하고서 어찌 감히 청명한 조정에 다시 서겠습니까.”


그러자 상이 온화한 비답을 내리고 이어서 특별히 하교하여, 공과 의정공이 함께 시골구석에 물러가 있으면서 올라올 뜻이 없다는 이유로 아울러 추고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윤휴는 또 연석(筵席)에서, 죄수를 찬양 칭송하고 조정을 비난 배척했다는 이유로 공을 삭출할 것을 청하였다.


이때 예금(禮禁)이 있어 이를 범한 자는 죽게 되어 있었는데, 유필명(柳弼明)이라는 망녕된 사람이 있어, 장차 우암 선생을 위해 원통함을 호소하겠다고 하면서 공을 찾아뵙자, 공이 금령(禁令)을 들어 그리 못하도록 강력히 말리었으나, 유필명이 듣지 않고 서울로 달려가 상소하였다. 

 

그러자 윤휴가 청하여 유필명을 사주한 자가 누군가를 국문하였는데, 유필명은 정신이 혼란하여 공이 그 소장을 보았다고 거짓으로 말하였다. 그러나 공은 실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 마침 윤휴를 위해 말해 준 자가 있어, 공을 잡아다 치죄하지는 않게 되었다. 

 

공은 그래도 교외에서 왕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다가 옥사가 끝나서야 비로소 돌아왔는데, 윤휴는 또 의정공과 공을 같은 죄로 모두 삭출할 것을 청하였다. 이해 겨울에는 상이 특별히 하교하기를 “민모 등의 재주와 국량은 중대한 직임을 맡길 만하니, 아울러 서반직에 서용하라.”하였는데, 그 이튿날 군소배들이 서로 아뢰어 강력히 쟁론하니, 상이 부득이 그들의 말을 따랐다.

 

정사년 1월에는 상이 공에 대한 문외출송의 처벌을 사면할 것을 명하였는데, 군소배들이 또 3개월 동안이나 이를 쟁론함으로써 끝내 그 조치가 다시 중지되었다. 이해 6월에는 양사가 합계(合啓)하여 나라의 예를 바로잡고 종통(宗統)을 분명히 하는 뜻으로 태묘(太廟)에 고하기를 청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국구(國舅)인 김공 만기(金公萬基)가 빈청에 동참하여 예를 의논하였기 때문에 이 일을 칭탁하여 그를 제거해서 중궁(中宮)을 요동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자 상이 그들의 정상을 알아차리고는 준엄한 비답으로 그들을 배척하고, 또 하교하기를 “듣건대 예를 의논한 제신들이 의금부에 처분을 기다리고 있다 하니, 그들에게 그만 끝내고 돌아가도록 하라.” 하니, 이에 벌 떼처럼 일어나던 쟁론이 조금 수그러졌다. 

 

공은 이때 사헌부의 계(啓)가 있었다는 말을 듣고 서울 가까운 곳으로 나아오려고 출발했다가, 도중에 은지(恩旨)를 듣고야 되돌아갔다. 무오년 봄에는 사면을 인하여 공의 죄가 석방되고 이어서 직첩도 돌려받았는데, 그후 두 번이나 서용하라는 명이 내렸으나, 그때마다 간당(姦黨)들에 의해 저지되었다.


기미년 여름에는 화의 빌미가 더욱 치성해져서 의정공과 함께 찬축되었는데, 공은 흥해(興海)로 유배되었다. 공이 그곳에 이르러서는 문밖도 나가지 않고 종일토록 글만 보면서 즐거운 가운데 자득하는 지취가 있었다. 이해 10월 초 1일에 크게 천둥이 치고 그 이틀 뒤에도 그러하므로, 상이 크게 놀라 동요하여 공과 함께 찬축된 여러 신하들을 석방하도록 명하니, 온 조정이 합사로 쟁론하여 6개월 만에야 그쳤다. 그리하여 공과 의정공이 비로소 충주의 옛집으로 돌아왔는데, 이때가 바로 경신년 4월이었다.


그후 인조의 손자인 복선군 남(福善君枏)과 허견(許堅)이 역모(逆謀)를 했다가 그 사실이 발각되어 흉당들이 모두 처형됨으로써 조정이 청명해지자, 의정공은 들어와 재상이 되고, 공은 공조 판서ㆍ지경연에 제수되었다. 얼마 후 호조 판서로 옮겨져서 또 선혜청 당상(宣惠廳堂上)에 임명되자 누차 상소하여 사면하니, 온후한 분부를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그러자 공은 “죄를 짓고 폐해진 나머지 거듭 특별한 은총을 입었으니, 의리상 감히 한결같이 물러가 있을 수만은 없다.” 하고, 마침내 도성에 들어와 명을 받았다. 이어 승문원 제조ㆍ도총관ㆍ판의금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마침 복선군 남과 허견의 숨은 죄상을 추가로 고발한 자가 있어 옥사가 재차 일어났다. 

 

공은 명을 받고 사건의 진상을 자세히 조사하여 역모의 정상을 철저히 밝혀내었고, 그들을 처벌함에 있어서는 간혹 더 심사숙고하여 감형해 주는 경우도 있었다. 이때 장성(長星 살별)이 하늘에 뻗치는 변이 있어 상이 신하들에게 그 대비책을 물었으므로, 공이 학문을 강론하고 어진 이를 구하며 비용을 절약하여 백성을 사랑하는 도리를 진술하고, 또 말하기를 “부세가 과중하고 재정이 고갈되는 것은 오로지 군액(軍額)이 과다한 데서 비롯된 것이니, 속히 변통해야 합니다.”하니, 상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이해 10월에는 인경왕후(仁敬王后 숙종의 비 김씨)가 승하하자, 공이 국장도감 제조가 되었다. 공은 전후로 호조에 있으면서 네 번이나 산릉(山陵)의 일을 치르면서도 법도가 있게 조치하여 민력이 크게 펴이고 경비도 고갈되지 않았다. 이윽고 병조 판서에 옮겨졌는데, 당시의 상황은 만과(萬科 무과에서 한꺼번에 많은 사람을 뽑던 것을 이름)가 있은 이후로 무사가 워낙 많아서 벼슬 한 번 못해 보고 늙어버린 사람이 많았으므로, 그 원망이 조정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공이 병조 판서가 되어서는 공도(公道)를 크게 넓히어 특별히 무예 시험하는 법을 새로 만들어서 재주에 따라 등용하니, 재주 있는 자에게는 권장이 되었고 재주 없는 자도 감히 원망하지 않았다. 신유년 1월에는 도감을 맡은 공로로 보국(輔國)의 품계가 더해졌다. 3월에는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유중의 딸로 숙종의 계비가 됨)가 중전(中殿)의 자리에 오르자, 공은 관례에 따라 영돈녕부사가 되고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의 호가 내려졌다.

 

상이 자전(慈殿)의 전교를 인하여 대신에게 묻기를 “변란이 이제 겨우 제거되어 인심이 아직 정해지지 못한 터에, 국가가 의지하여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겨우 아무아무뿐인데, 지금 병조 판서(민유중을 가리킴)를 한가한 자리에 있게 한다면 실로 인재를 버린 데 대한 탄식이 있게 되니, 심 청천(沈靑川), 한 서평(韓西平)의 고사에 의거해서 병조 판서를 체직하지 말라.”하니, 대신이 이전의 규례를 인용하여 그래서는 안 된다고 고집하고 또 말하기를 “만일 비국과 선혜청 등의 직임만 그대로 겸대시켜 공부(貢賦)와 군제(軍制)의 의논에 참여하도록 한다면 인재를 온전히 버린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은 다시 자신의 뜻을 누차 하교하였으나, 대신이 앞서 한 말을 더욱 견지하였고, 유신(儒臣)과 간신(諫臣)도 쟁론하였다. 그러자 상이 육례(六禮 혼례를 뜻함)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공이 아직도 신명(新命)을 받지 못했다 하여 우선 체직하라고 명하니, 공이 나와서 사은하고 연해서 소장을 올려 여러 가지 겸직을 해면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후로는 사관(史官)을 통하여 소명(召命)이 누차 내렸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공은 또 입대하여 겸직을 거듭 사양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는데, 옥당이 비국과 경연의 직을 체직하기를 청하자, 공은 더욱 스스로 편치 못하여 계속 해면해 주기를 호소해 마지않았다. 이윽고 상신(相臣)의 말에 따라 또 진휼청의 직을 겸임시켰으나, 누차 사양하고 나오지 않으므로, 승문원과 경연의 두 직임을 체직하도록 허락하고 진휼청의 일만 전담하게 하였다. 그리고 또 공을 패초(牌招)하게 하니, 공이 대궐에 나와 소장을 올리고 물러갔다.


처음, 부윤공(府尹公 여기서는 민유중의 조부 기(機)를 말함)이 정랑에 추증된 휘 여준(汝俊)의 지자(支子)로서 고령공(庫令公)의 후사가되었으므로, 공이 국구(國舅)가 되고 나서는, 3대의 봉작(封爵)은 먼저 이미 규식대로 준행하고, 자신이 소유한 은례(恩例)를 가지고 본친(本親)에 옮겨 쓸 것을 청하여 마침내 정랑공에게 좌참찬을 추증하였다.


임술년에는 금위영(禁衛營)을 새로 설치하고 공을 제거(提擧)로 삼자, 차자를 두 번 올리고 세 번 임금 앞에 들어가, 더욱더 간절하게 비국의 직임까지 아울러 사양하니, 상이 그제야 애써 공의 뜻에 부응하여 비국의 직임을 체직하였다. 대동법(大同法)을 설치한 목적은 본디 공물(貢物)의 폐단을 없애기 위한 것인데, 간악하고 외람된 행위가 더욱 많아져서 국가의 비용이 날로 쭈그러들었다. 

 

그러자 경신년 정화(政化)를 일신하던 처음에 공이 건의하여 그 법을 새로 재정하였는데, 이에 대해 우암이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민유중이 일찍이 호조에 있으면서 공법의 경리 규제를 대략 변경시킴으로써 여기에 큰 힘을 얻어 백성에게서 징수하지 않고도 산릉(山陵) 같은 큰 역사를 치러내었습니다.

 

그러니 만일 민유중의 충성스러운 심려가 아니었으면 누가 능히 이 일을 했겠습니까. 이는 참으로 정자(程子)가 이른바 ‘작게 변경하면 작게 유익하고 크게 변경하면 크게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이공 단하(李公端夏)가 그 법을 재차 더 보아 상정(詳定)해서 융통성 있게 증감(增減)할 것을 청하여, 공이 수석(首席)으로 그 일을 주관하였다. 

 

그러자 놀고 먹는 시정배(市井輩)들이 떼지어 일어나 비방하였고 사대부들 중에도 그들의 말을 빙자하여 흠잡는 자가 있었으나, 공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음으로써 일이 마침내 행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일이 다 공의 뜻과 같이 되지는 못하였다. 이때 형조의 관리가 뇌물을 받고 법을 굽히었는데 그 일이 혜국(惠局)에 관계되었으므로, 공이 그를 추고하여 치죄하였고, 제사(諸司)가 시장 물건을 강제로 사들이는 것은 새로 만든 금지 조항에 들어 있는데 승정원이 이를 제일 먼저 범하였으므로, 공이 그들을 세밀히 추문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정언 박태유(朴泰維)가 상소하여 공더러 ‘기탄없이 제멋대로 행동을 한다.’느니, 또는 ‘은총을 믿고 방자하게 군다.’고 비난하므로, 공이 상소하여 처벌을 청하니, 상이 그때마다 온화한 유시를 내렸는데, 처벌을 청하는 소장이 네 번째 올라가서야 비로소 진휼청의 직임을 체직하도록 윤허하여 공을 편안하게 하였다. 공은 또 금위영과 혜국의 직임을 극력 사양하여 끝내 윤허를 받았다.


계해년 겨울에는 상이 두진(痘疹)을 앓았으므로, 공이 명을 받고 금중(禁中)에서 숙직하였는데, 상이 쾌차하자 시약(侍藥)했던 여러 신하들과 함께 은사(恩賜)를 입었다. 갑자년에는 호위대장(扈衛大將)을 겸하였으니, 공을 위해 증설한 것이었다. 또 총관을 겸했다가 곧 체직되었다.


병인년 가을에 지진이 있자, 교리 이징명(李徵明)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예로부터 이 변고는 흔히 외척이 권세를 부리는 데서 말미암는 것입니다.” 하고, 심지어는 왕후를 힘써 경계하라고 요청하기까지 하였다. 그러자 상이 크게 놀라 이징명을 불러 그 사유를 물었으나 그의 대답에 끝내 사실적인 일이 없으므로, 특별히 명하여 그를 파직 삭출하였다. 공은 이때 두문불출한 지 한 달이 넘어서야 비로소 상소하여 죄주기를 청하니, 상이 지극하게 위로하여 타일렀다.


공은 본디 풍담(風痰)을 앓아왔는데, 정묘년 여름에 병환이 있자, 상이 태의(太醫)를 명하여 항상 간호하도록 하였으나, 끝내 6월 29일에 안국방(安國坊) 사제(賜第)의 정침(正寢)에서 별세하니, 향년이 58세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상이 몹시 애도하고 위하여 거애(擧哀)하였으며, 소선(素膳)을 차려오도록 명하고 조시(朝市)를 정지하였다. 

 

공경대부로부터 이서(吏胥)와 군교(軍校)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슬퍼하며 서로 조문하였다. 우암은 시골에 있으면서 공의 신위를 베풀고서 통곡하였고, 공의 문인으로서 상복을 입은 사람이 20여 인이나 되었다. 상장(喪葬)에 드는 온갖 수요에 대해서는 예조에서 제공하고 내부(內府)에서 갖춰주었다. 

 

제전(諸殿)에서는 각각 중사(中使)를 보내어 상차(喪次)를 감독하고 보호하였다. 또 평상시의 녹봉을 3년 동안 계속 주었고, 조부(弔賻)와 치제(致祭)를 더해 주었다. 초상난 지 3개월째 되던 달 정유일에 여주의 소재지 동쪽 섬락리(蟾樂里) 술좌(戌坐)의 언덕에 예장(禮葬)하였는데, 원근에서 와 장례에 참여한 사람이 수백 인이었다.


공은 모두 세 번 장가 들었는데, 해풍부부인(海豊府夫人) 이씨(李氏)는 이조 판서 경증(景曾)의 딸로 청숙(淸淑)하여 여사(女士)의 행실이 있었고, 은성부부인(恩城府夫人) 송씨(宋氏)는 동춘 선생 휘 준길(浚吉)의 딸로 부도(婦道)가 매우 잘 갖추어져서 온 종문(宗門)이 그의 어짊을 칭송하였으며, 풍창부부인(豊昌府夫人) 조씨(趙氏)는 진사 귀중(貴中)의 딸이다. 

 

이씨ㆍ송씨 두 부인은 진작 별세하여 각각 따로 장사 지냈다가 이때에 이르러 모두 공의 묘와 합봉(合封)하였다. 그후 상이 영릉(寧陵)을 배알하고 특별히 측근의 신하를 보내어 공의 묘에 치제하였다. 그런데 공이 작고한 지 3년 만에 시사(時事)가 크게 변천하여 인현왕후가 사제(私第)로 물러남으로써 공 및 세 부인의 봉고(封誥)와 배명(拜命)이 불태워지고, 의정공은 서쪽 변방에 유배되어 작고하였다. 

 

그로부터 6년 뒤인 갑술년 4월에 상이 크게 뉘우쳐 깨달아 왕비 전하께서 다시 중전 자리에 들어옴으로써 공 및 세 부인의 작호를 모두 되돌려받았다. 상은 특별히 승지를 보내어 공의 묘에 치제하고, 또 시호 내리는 은전을 속히 거행할 것을 명하여 태상시(太常寺)에서 공의 시호를 ‘문정(文貞)’이라 의정하니, 공의 묘표(墓表)의 전면에 시호를 넣어 어필로 친히 썼다. 

 

갑신년 봄에는 특별히 영의정을 추증하고 겸대(兼帶)의 직도 관례대로 추증하였으니, 공의 시종에 걸친 슬픔과 영화가 여기에서 더욱 갖추어지게 되었다. 송 부인은 2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 진후(鎭厚)는 문과에 급제하여 참찬이 되었고, 진원(鎭遠)은 문과 중시에 급제하여 유수(留守)가 되었으며, 딸은 진사 이만창(李晩昌)과 별검(別檢) 신석화(申錫華)의 아내가 되었고, 인현왕후는 서열로 둘째이다. 

 

조 부인은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진영(鎭永)이고, 딸은 진사 이장휘(李長輝)와 사인(士人) 홍우조(洪禹肇)의 아내가 되었다. 측출(側出)은 2남 2녀인데, 아들은 진창(鎭昌)ㆍ진오(鎭五)이고, 딸은 이만(李熳)ㆍ유순(柳絢)의 아내가 되었다. 

 

참찬은 부제학 이단상(李端相)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를 두었는데 조규빈(趙奎彬)에게 시집갔고, 현감 이덕로(李德老)의 딸에게 재차 장가들어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익수(翼洙)ㆍ우수(遇洙)이고 딸은 김광택(金光澤)에게 시집갔다. 

 

유수는 좌의정 윤지선(尹趾善)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창수(昌洙)ㆍ형수(亨洙)이고, 딸은 이주진(李周鎭)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진영은 현령 이명승(李明升)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두었다. 맏사위는 1남 재(縡)를 두었는데 지금 한림(翰林)이다.


공은 기상과 용모가 장중하고 신색(神色)이 광채가 빛나서, 바라보면 정인군자임을 알 수 있다. 소싯적부터 가정의 교훈을 이어받았고 또 일찍이 사우(師友)들 사이에서 덕성을 감화받았기 때문에 행실이 더욱 고상하였다. 조부모와 부모를 섬기는 데 있어서는 화순한 기색을 극도로 하여 어버이의 뜻을 매우 편안하게 여겼다.

 

관찰공(觀察公)의 병이 위독했을 때는 두 형과 함께 손가락을 베어 피를 먹여드렸고, 전후로 상사(喪事)를 당해서는 인정과 예문에 모두 유감이 없게 하였으므로, 우암이 그의 집상(執喪) 잘한 것을 칭찬하여 세상에 흔히 볼 수 없다고 하였다. 공은 귀하게 된 뒤에도 백씨ㆍ중씨와 한집에서 살다가 식구가 너무 많아 한집에 수용할 수 없게 된 다음에야 분가(分家)를 하였다. 

 

그러나 형제가 날마다 반드시 서로 만났고 만나면 반드시 평상을 나란히 하고 앉아서 크고 작은 일을 반드시 자문하여 명을 받아 거행하였다. 백씨가 작고했을 때에는 그 슬퍼하는 표정이 다른 사람까지 감동시켰으므로, 보는 이들이 간혹 죽은 이의 아들인가 의심하기도 하였다. 

 

중형이 병들었을 때에는 약과 음식물을 반드시 먼저 맛보았고 반드시 몸소 붙들어 보호하였으며, 백자씨(伯姊氏)에게도 그와 같이 하였다. 그리고 고모와 누이동생이 홀로 되었으므로 마음을 다하여 돌보아 주고 고락을 같이하였으며, 이 마음을 미루어 종족에까지 미쳐서 빈궁한 종족을 구제하는 데에 범 문정(范文正)의 풍도가 있었다.


공은 평상시에도 모든 일을 예교(禮敎)대로 준행하여 일찍이 게으른 태도를 짓거나 상스러운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매일 새벽이면 일어나서 종일토록 청정하게 앉아 있었는데, 주렴과 안석은 조용하고 기상은 한아하였다. 아들들을 가르치는 데에 매우 법도가 있어 아침저녁으로 와 늘어서서 절하였고 감히 아버지 앞에서 즐기며 웃는 일이 없었다. 

 

또 아들들에게 일찍이 학문에 힘쓰고 행실을 삼가며 구차하지 않게 뜻을 단단히 세우도록 경계하였다. 관례(冠禮)와 혼례(婚禮)에 대해서는 반드시 고경(古經)을 상고하여 손수 의식을 정하였고, 상제(喪制)의 의례(疑禮)나 변례(變禮)에 있어서는 반드시 반복하여 강론하고 질정해서 바른 데로 돌아가도록 힘썼다. 제사를 지낼 때에 이르러서는 매우 정결하게 재계하고 정성을 다하여, 모든 것이 사대부 집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공은 일찍 동춘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장인과 사위가 서로 사제(師弟)가 되어 성심으로 스승을 섬기고 후사(後事)에까지 힘을 다했으므로, 세상에서 공을 주자(朱子) 문하의 면재(勉齋 주희의 사위이며 제자였던 황간(黃榦))에 비유하였다. 또 우암 선생을 사사하여 매우 독실히 존숭하고 믿어 처신과 영욕 여부를 끝까지 함께하였다. 

 

공의 친구는 모든 당세의 뛰어난 선비들이었는데, 신의가 서로 계합하여 친구가 죽은 뒤에도 뜻을 변치 않았다. 일찍이 한 포의의 선비와 교의가 막역하였는데, 그가 죽자 그의 자식을 자기 자식처럼 보살펴 주고, 그의 딸이 시집갈 적에는 혼수를 갖추어주면서 말하기를 “비록 내 집에 데려다 길러 주지는 못할지라도 어찌 어루만져 구제할 책임조차 맡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후진을 장려하는 데는 반드시 그를 성취시키고자 하여, 한 가지라도 능한 것이 있음을 보면 이를 미처 천양하지 못할까 염려하였다. 또한 사정(邪正)의 분간에 엄격하여, 처음에는 윤휴와 서로 좋게 지내다가 그의 옳지 못한 점을 보고는 당장 끊어 버리므로, 사람들이 혹은 공을 너무 성급한가 의심하기도 하였으나, 뒤에 과연 공의 판단이 들어맞았다.


담박한 절조는 늘그막에 이르러 더욱 신실하여, 높은 지위에 오른 뒤에도 몸치장은 마치 한빈한 선비 같았고,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은 뒤에도 의복과 거마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얻고 잃은 것에 무관하여, 세상에 득세해서 설쳐대는 소인배들을 보면 마치 자신을 더럽힐 것처럼 여겼다. 

 

또 화복에 대해서는 일체 운명에 맡기어 아무리 오만 가지 곤경을 당하더라도 더욱 형통하게 대처하였다. 국가에 충성을 다하여 의기(義氣)가 안색에 드러났고, 항상 국사를 위해 몸바칠 것을 기약했기 때문에 두루 역임한 내ㆍ외직이 대부분 복잡 다사한 자리였으나, 사공(事功)이 성취되어 풍속이 당장 일신되었다. 

 

이는 대체로 본원이 광명정대하고 소창통달하기 때문에 그 정사에 발휘된 것이 마치 강하(江河)를 터내린 것처럼 성대하여 어디에 가나 모두 공적을 이루게 된 것이다. 공이 항상 말하기를 “나의 총명은 남보다 나은 것이 없으나, 오직 일을 대하면 감히 정성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기 때문에 절로 실수가 없게 된 것이다.” 하였으니, 여기에서 공이 일생 동안 간직한 마음을 볼 수 있겠다.


대체로 공이 대각(臺閣)에 재직할 적에는 옛 성현들의 정직한 풍도가 있었고, 강연(講筵)에 들어가서는 참다운 학사(學士)라는 칭찬이 있었으며, 여러 내ㆍ외직을 드나들 적에는 군민(軍民)들이 부모처럼 떠받들었고, 조정의 앞자리에 정색하고 앉았을 적에는 사림(士林)들이 높은 집 천장처럼 우러렀다. 

 

아무리 곤궁하여도 평소의 지조를 변치 않았고, 아무리 현달하여도 겸손하여 덕을 기르는 광채가 더 빛났다. 군자의 도와 성쇠를 같이하여 끝내 완전한 명예를 보전하였으니, 비록 시기가 위태롭고 형세가 막히어 포부를 다 펴지는 못하였으나, 그 풍도와 지절만으로도 후세에 드러내 보이기에 충분하겠다.


공은 지성으로 선비를 사랑하여 비록 나같이 어리석은 사람도 일찍이 분에 넘치게 후한 대접을 받아왔으므로, 공에게 무슨 일이 있을 때면 으레 열에 한두 가지쯤은 참여하여 들었었다. 정미년에 어떤 표류된 선박이 제주도에 정박하였는데, 거기에 탄 일행 90여 인이 모두두 명나라 옷을 입었고 명 나라 말을 하였는바, 스스로 말하기를 “동남해상(東南海上)에 명 나라 황통(皇統)이 아직 존재하고 있는데, 우리가 바로 그쪽 사람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의 의논이 장차 그들을 청 나라로 압송해 가려는 것이었다. 그러자 공이 통분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상의 앞에서 극력 쟁론하고 물러 나와서 또 대신에게 극언하기를 “제공(諸公)은 후환이 있을까 염려하는 것입니까. 만일 나에게 재차 남번(南藩)을 맡겨준다면 의당 죽기로써 담당하여 나라에 근심이 없게 할 것이오.” 하였으나, 대신이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이때에 공이 성남(城南)으로 나를 찾아와 그 일을 하나하나 얘기하면서 비탄강개한 나머지, 목이 메어 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아, 병자ㆍ정축년 이후로 사대부들이 보고 들은 데에 익숙해지고 작위에 골몰하여 비풍(匪風)ㆍ하천(下泉)의 의리를 아는 자가 적었는데, 공만이 명 나라를 슬피 염려하여 외로운 충성이 환히 빛나서 심지어는 생사를 돌보지 않고 오직 의리만을 취하려고까지 하였으니, 그 뜻이 열렬하다 하겠다. 그 뜻이 인륜과 세교에 도움됨이 어떠하겠는가. 이것으로 공의 묘에 명(銘)한다면 나의 붓이 부끄럽지 않으리라. 다음과 같이 명한다.

효종 임금 즉위한 처음에 / 孝廟初服
인재를 가장 많이 얻었는데 / 得人爲盛
오직 우리 민공이 / 曰唯閔公
이 좋은 기회 만났네 / 嘉會是應
훌륭한 인품과 학식으로 / 瓊琚玉佩
일찍부터 조정에 드날렸는데 / 早颺王庭
공의 강직한 말에 / 諤諤昌言
대신들이 숨을 죽였네 / 巨室氣屛
그러자 상이 이르기를 아 / 上曰吁哉
네 말이 바르도다 하였느니 / 乃言則正
진실로 나라의 직신(直臣)은 / 展也邦直
성스러운 임금에서 비롯된 걸세 / 厥由主聖
밤낮으로 부지런히 힘써 / 庶幾夙夜
성왕의 풍화를 도우려 했는데 / 翊贊神化
중도에 임금님 승하하시어 / 中途泣弓
만사가 와해 되어 버렸네 / 萬事解瓦
이어 사왕이 즉위하여서는 / 遭逢聖嗣
온갖 정사 공이 다 떠맡아 / 一埤負荷
나가서는 지방 잘 다스리고 / 出莅藩屛
조정에선 좋은 계책 아뢰니 / 入告氈廈
백성들은 부모처럼 사모하고 / 民懷父母
임금은 어진 보좌로 의지했네 / 主倚良佐
그런데 국운이 중도에 기울어 / 邦運中蹇
예송이 화의 빌미가 되니 / 禮訟胎禍
소인배들이 마구 무함하여 / 哆侈成錦
군자들이 모두 제거되었네 / 衆陽消剝
공은 남쪽서 거의 죽을 뻔했지만 / 九死南荒
그 지조가 은산 철벽 같았는데 / 銀山鐵壁
태양이 다시 밝아지매 / 旭日回光
성대한 차림으로 거듭 돌아오니 / 繡黻重返
바야흐로 공을 크게 써서 / 方將大用
나라의 기둥으로 삼으려 했네 / 爲國之榦
그런데 따님이 왕비 되시어 / 坤儀正極
왕이 우리 장인이라 하시니 / 王謂我舅
자취 얽매이고 형세 묶이어 / 迹拘勢閣
국가에 이택 다 펴지 못했네 / 利澤未究
공은 세 조정을 섬기면서 / 盖公三朝
끝까지 한 절조를 지키어 / 終始一節
온갖 행실이 법도에 맞아서 / 百行是宜
세상의 올바른 도리 되었네 / 世所塗轍
그러나 또 그보다 큰 것은 / 然且有大
열렬한 존주대의였으니 / 尊周之烈
의리를 보면 몸을 잊고서 / 見義忘身
백성의 도덕을 세우려 하였네 / 欲樹民極
그 뜻이 너무도 우뚝하여 / 其志卓卓
무궁한 후세에 표장할 만하므로 / 可表千億
내가 그 대강을 간추려서 / 我撮其槩
여기에 드러내어 새기노라 / 于以顯刻

 

[註解]


[주01] 증질(增秩)의 고사 : 한(漢) 나라 때에 조정에서 양리(良吏)를 포상함에 있어, 관리를 전임시키지 않고 그 자리에 둔 채로 녹수(祿

              數)만 계속 올려 주던 일을 말한다.


[주02] 사종설(四種說) : 비록 승중(承重)일지라도 삼년복을 입을 수 없는 네 가지 경우를 설명한 것이다. 첫째는 정(正 적장자(嫡長子)이

           고 체(體 자신이 직접 낳은 자식)이지만 전중(傳重)할 수 없는 경우가 있으니, 이는 적장자로서 폐질(廢疾)이 있어 종묘를 주관할수

           없는 경우를 말한 것이요,

 

           둘째는 전중된 자가 정도 아니고 체도 아닌 경우이니, 이는 서손(庶孫)이 후사가 된 경우를 말한 것이요, 셋째는 체이기는 하나 정이

           아닌 경우이니, 이는 서자(庶子)를 후사로 삼은 경우를 말한 것이요, 넷째는 정이기는 하나 체가 아닌 경우이니, 이는 적손(嫡孫)을

           후사로 삼은 경우를 말한 것이다. 《儀禮 喪服 賈公彦疏》


[주03] 기해년의 복제 : 기해년인 1659년 효종이 죽었을 때의 복제를 말한다.


[주04] 심 청천(沈靑川) …… 고사 : 심 청천은 조선 명종비(明宗妃)의 조부로서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연원(沈連源)을 가리키고, 한

           서평(韓西平)은 인조비(仁祖妃)의 아버지로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을 가리키는데, 본디 규례상 왕실의 외척은

           요직을 가질 수 없게 되어 있었으나, 이들은 모두 요직을 두루 지냈었다.


[주05] 범 문정(范文正)의 풍도 : 범 문정은 시호가 문정인 송(宋) 나라 때의 명상(名相) 범중엄(范仲淹)을 가리키는데, 그는 한창 귀현(貴

              顯)하게 되었을 때 가난한 종족을 위하여 의전(義田)을 두고 거기서 수확한 곡식으로 종족들을 구제했었다.《宋史 卷314》


[주06] 비풍(匪風) …… 의리 : 비풍은《시경(詩經)》회풍(檜風)의 편명이고, 하천은《시경(詩經)》조풍(曹風)의 편명인데, 이 두 편 시

           의 내용은 모두 주(周) 나라 왕실이 쇠미해져 감을 대단히 염려하여 다시금 주 나라 왕업을 일으킬 수 있기를 기원한 것이다. 여기서

           는 즉 명 나라 왕업이 다시 복구되기를 기원하는 데에 비유한 것이다.


[주07] 따님이 …… 못했네 : 조선 시대에 왕실의 외척은 요직을 갖지 못하도록 제도상으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민유중 역시 재상 등 요직

           에 오르지 못하여 경륜을 한껏 펴 보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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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驪陽府院君文貞閔公維重神道碑銘 幷序

 

惟我孝宗大王圖恢大業, 收攬英俊, 有拔茅彙征之盛。 時則有若學士閔公, 以淸名直節, 爲當世第一流。 逮歷事三朝, 德業茂著, 位至大司馬, 朝暮將入相, 我仁顯聖母正位坤極, 公以國舅局於故典, 竟阻登庸, 經濟大手, 縮而未展, 朝野莫不嗟恨。

公諱維重, 字持叔, 其先起黃驪, 自奉御稱道, 五六世大顯於, 入我朝有曰審言, 當端宗時國家危疑, 以開城副留守退遯不出。 子冲源以遺逸擢執義, 歷二世而至左贊成齊仁, 以文章鳴世, 號立巖, 乙巳禍作, 獨言: “安名世史筆, 不可改。” 奸黨目以護逆, 放謫而終。 是生文川郡守、贈左參贊思容, 於公爲高祖也。 曾祖諱汝健, 長興庫令、贈吏曹判書。 祖諱慶州府尹; 考諱光勳江原道觀察使, 兩世俱贈領議政。 妣贈貞敬夫人延安李氏, 府院君光庭之女。 有三丈夫子: 長大司憲蓍重, 次左議政鼎重, 其季公也。 府尹公與觀察公, 俱以質行醇德見稱於世, 至公兄弟, 蔚然爲士林領袖。

公以崇禎庚午十月乙卯降。 自幼穎秀異凡兒。 丙子之難, 合家傖荒兩日, 僅到富平。 時大駕將幸江都, 觀察公已奉廟社主先入, 從者咸曰: “此去江都至近, 且天塹足恃, 必可往。” 公曰: “吾聞人君所至, 寇必隨之, 往之不便。” 時公甫七歲, 李夫人大奇之曰: “此天誘之也。” 遂往嶺南, 卒能全保。 稍長, 自奮勵爲學, 出遊庠序, 曹偶莫班。 十九, 擧進士。 廿一, 闡大科, 自槐院入翰苑爲檢閱, 取新進惟其人。 歷待敎、奉敎、兼說書。 癸巳, 陞典籍, 遷監察、禮・兵二曹佐郞。 丁李夫人憂。 服闋, 除正言、司書, 上疏辭職, 乞數年暇讀書, 上嘉其志, 除命久寢。

丙申夏, 乃拜兵郞、持平、司書, 會災沴稠洊, 囊封累千言, 極論闕失, 幷及大內土木之非時、主第營費之太濫。 又移正言, 復申前言, 仍以不得其言乞解, 上皆優批開諭。 先是, 朝廷發千斛米, 令市民待秋輸錢, 已而錢不行, 徵還本色。 公曰: “是罔民也。” 爭之强。 事下廟堂, 奏覆糢糊, 則公又斥大臣曰: “畢竟歸怨於國, 而己不與焉。 大臣如此, 百僚何責?” 於是大臣皆引入, 上亦屢下嚴敎, 公不敢安, 辭遞。 後除兵郞、正言, 皆不就。

丁酉, 拜持平。 時有惡少拔劍相鬨, 掌令吳公斗寅逮捕之急。 一日公與吳公退朝, 見執鞚者嘔血倒地, 諦問之, 乃公子家奴在逮中者, 逞憾於吳公而誤中也。 二公卽坐府捕治, 竟死。 上入公子說, 怒甚, 命幷補北官。 公通判鏡城地遠, 王化不及。 公至, 首以孝悌之道爲文而告之, 擇鄕子弟可敎者敎之, 賤人有夫死不嫁者廩之, 有罪者敎而不改而後刑之。 無何, 一境大治。 明年, 特授禮曹正郞, 髫白擁車泣辭, 樹七碑以頌德。 以兵郞帶三字銜, 已而入玉堂爲副修撰, 再上箚陳戒, 上優奬。 尋自居下考, 敍拜獻納, 不就。

己亥, 以副校理移獻納者再, 又兼中學敎授。 時上志在薪膽, 勵精爲治, 群賢造朝, 一世改觀。 公益自激昂, 思贊大猷, 啓箚無虛日, 日或十餘事, 大要以革民弊、恢言路、立紀綱、公選擧、杜私逕、懲貪酷爲急, 上悉嘉納。

參判金佐明葬其父故相國, 僭用隧道, 公啓請勘罪改葬之。 僚席縮頸, 或執體例, 微事斥公。 公旣自列, 又以嚴敎不赴召, 上疏待罪, 答曰: “此擧難免率爾。 予匪怒伊敎, 且存遠慮, 平心察之。 然所言則公, 不可遞也。” 再疏申辭, 批曰: “久强不遞, 非禮待之道, 今姑允從。” 然猶命勿遞其兼帶, 蓋主聖臣直, 前史所罕也。 上欲罷諸宮家、各衙門折受山澤及諸干不法事, 別擇禁從之公明正直者, 廉察諸道, 封書廿餘條, 悉出叡指。 公得嶺南右道, 竭心咨訪, 期酬聖志, 道聞仙馭賓天, 幷夜奔還, 致命于恤宗。 歷吏曹正郞、校理。 遭外艱, 制終, 還舊踐。 上以疾久停講筵, 公與同僚三上箚陳戒, 且曰: “故事玉堂之批, 未嘗經宿。 今八日而無指揮, 莫是厭聞而然耶?” 上答曰: “誠因疾病, 受情外說, 媿懼無所容。” 公上章待罪, 引李文成宣廟語曰: “人君拒公論, 多以病爲解, 是人君有疾之時, 卽國家危亡之秋也。” 益持正不撓, 上亦爲之敬禮。

壬寅, 歷吏郞、直講, 移修撰。 時義州府尹李公時術生釁虜境, 禍機叵測。 公密疏陳救解之策, 仍及邊事便宜。 俄還吏郞, 罷歸驪江。 又除吏郞、獻納, 皆不就。

癸卯, 由副校理, 還吏曹、兼校書校理。 公於銓地累除輒辭, 至是始拜命, 一心秉公, 臧否甚卞, 尤謹於消長之幾。 陞副應敎、兼四學校授, 移司諫。 時兩司以諸宮家柴、漁場折受之弊久爭, 不從, 又命諸宮所屬幷免力役, 該曹執不可, 責以無據。 公爭之甚力, 又面對竭論, 旁及他事, 至累千言, 指斥衮闕, 糾正官邪, 無少諱忌。 時晝漏已晩, 而上不示厭苦色, 多所聽納, 同朝亦嚴憚焉。 拜執義, 遞爲濟用正。 甲辰, 以副應敎承命往江都, 檢視軍實, 歸奏詳明, 悉合事宜。 改執義、兼漢學敎授。 先是, 北人頒僞勅, 修撰金萬均以其祖母死於難, 義不忍迎接, 上疏陳情。 承旨徐必遠謂與父母讎較輕, 請勿許。 萬均終不趨班, 至於廷尉問, 尤齋宋先生上疏引《禮經》“復讎盡五世”之說, 以爲: “天下之防, 不宜牿亡。” 必遠先已出按北藩, 馳章對辨, 語多悖謬。 臺臣李奎齡趙聖輔欲劾必遠, 僚議參差, 上特出兩人于北邑, 又以揚抑不稱旨, 幷罷銓官。 公歸自江都慨然曰: “義理晦矣。” 遂論必遠僻拗之罪、三司罷軟之失, 又請還兩臺補外, 上震怒立遞之。 尋除校理, 辭遞。 承命廉察關西, 歸對條陳固圉興學之方, 上輒可其奏。 歷司䆃正, 除應敎。

乙巳, 由舍人還應敎, 擢授全羅監司, 公感奮思效, 日夜孜孜, 令嚴而化行, 利興而害祛, 報政加任數月。 遞授僉樞, 移判決事、大司諫、承旨、兼承文副提調。

丁未, 拜吏曹參議, 又兼備局。 時許積奉使辱國, 乃反自功, 諫官李公倡兩司論罪, 上大怒, 一時竄七諫臣。 公方赴離亭, 有言禁人伺之者, 坐客多驚散, 而公獨凝坐, 及日而歸。 翌日, 臨政, 啓以: “諸臣雖被罪, 傳旨未下, 法不當出其代。” 上嚴批特推。 後數日, 以式假不參政, 上責以偃蹇, 又命罷推。 居月餘特授承旨, 移副提學、刑曹參議、大司諫, 皆辭遞。 尋拜承旨, 與金公萬基入侍, 以久廢講筵合辭規戒。 兵判金佐明進曰: “斯兩臣者, 進退通塞, 隨其好惡。 若令去其偏私, 雖十日一講, 必有益於國也。” 公曰: “若如佐明之言, 是權臣也。 當退伏刑辟。” 旣出, 連上章請罪, 遞歸廣州田舍, 除命五下, 皆不起。

戊申, 爲忠淸監司, 湖西湖南, 民已習聞公治化, 令行禁止, 不勞而政成。 冬, 兼本道均田使, 驅馳原濕, 親辨饒瘠, 將以正經界, 均賦役, 事未竣而遽有他遷, 識者恨之。 由大司成, 擢授平安監司。 公雅尙儒化, 於西土尤加意焉。 課學子之業, 正文廟之位。 籩豆祭服, 一從古制, 別具冠婚服飾, 聖賢書籍, 遍布列郡, 以資學習。 褒貞烈, 奬武勇, 省姱嬉, 祛其浮費, 資貧民, 嫁不失時。 又以方便修繕城池及武備, 增東征諸將之廟, 創建乙支文德之祠。 凡諸館宇之陊剝者, 無不一變, 而民不知勞。 胡差之至, 例多恐嚇。 公嚴束譯鞮, 又杖殺潛通者二人, 一路振肅, 虜亦不敢怒。

辛亥, 秩滿, 命仍任完賑事, 未幾陞拜刑曹判書。 大臣難其代, 請擇於六卿, 上曰: “若爾則閔某以新資仍之。” 蓋用增秩故事也。 翌年夏, 遞授知樞, 比歸, 庫藏充溢, 而行李蕭然。 西民立石追思, 又建祠俎豆之。 授刑判、大司憲、右參贊兼賓客、摠管、禁府, 遷判尹, 還大憲, 又兼經筵、春秋, 改刑判。 數月之中再長秋官, 聽斷如神, 囹圄幾空。

癸丑。 拜戶曹判書、摠戎使。 時移奉寧陵。 明年, 仁宣大妃昇遐, 公連管山陵、國葬兩都監, 以勞加正憲、崇政階。 初, 孝廟禮陟, 慈懿大妃之服, 以朞年議定, 許穆疏論當服三年, 命詢大臣。 儒臣二宋先生引《禮疏》四種說論辨, 且考國朝故事, 亦皆服朞, 於是說遂不行。 奸黨因此媒禍, 至目以貶君亂統。 及仁宣之喪, 慈懿服制, 用衆子婦大功, 都愼徵投疏, 謂不當降殺。 上令大臣、六卿、三司雜議之, 僉曰: “己亥服制, 本用時王制, 而《大典》衆子婦大功條, 無‘承重則服期’之文。” 上又命參考《禮經》, 乃擧四種說解釋以對, 天怒大震, 命改爲期年, 謫領相金公壽興于中道, 以忘先王附他論爲罪, 諸臣皆出城待命。 左相鄭公知和陳箚請命供職, 上批曰: “處分已定, 猶謂待命, 非事君以實之義。” 公乃上疏曰: “臣据《禮經》, 妄論箋注之義, 而臣又執筆, 罪浮諸臣, 乞伏邦憲。” 上終不許。 適北使至, 特差公遠接使以送之, 未復命, 上遽棄群臣, 今上以沖年嗣位。 郭世楗趙瑊輩乘機投疏, 搆捏議禮諸臣, 極其凶險。 公移疾上六箚, 遂解度支, 拜參贊, 差賑恤堂上。 山陵畢, 卽出江上。 臺論果發。 尤齋先生首被削黜, 而又請追奪同春先生官爵, 罷議禮諸臣職, 上不從, 乙卯正月, 始停。 公陳疏請譴, 封納摠戎密符, 上開諭不許。 而公先已發向圻郊。 政院以聞, 命推考。 時議政公亦受敦匠之命, 事竣先往楊州平丘, 至是偕行, 轉到忠州, 仍取近卜居, 匹馬往來, 杯酒講說, 欣然以爲至樂, 鄕里子弟從學者頗多。 公曾以都監勞加崇祿階, 在道上疏, 乞解諸任、收新資, 上只遞摠戎使。 及尤齋北竄, 而賊輩詆公益力, 公累上疏狀, 上固不許。 一日, 於筵中敎曰: “閔某方帶籌司, 不可久在外。 其下諭促召。” 公上疏曰: “臣少遊宋時烈之門。 徒知其學問之純正、踐履之篤實、愛君之精忠、扶世之大義, 而未見其貪權誤國, 彷彿於近日之言者。 至於《禮經》奧義, 臣雖未窺其一斑, 妄嘗謬守疏家四種之說, 當賓廳會議之日, 不敢自隱其見, 終陷於不測之地。 按臣之罪, 豈下於時烈哉? 時烈旣以罪首投荒, 臣理難獨免。 今之論者至比於安石惠卿, 蒙此大僇, 何敢復立淸朝乎?” 上賜溫批, 繼有特敎。 以公與議政公俱退在鄕曲, 無意上來, 幷令推考。 而請於筵席, 以贊頌罪首、譏斥朝廷, 削黜公。 時有禮禁, 犯者當死。 有妄人柳弼明謂將爲尤齋訟冤, 歷謁公。 公以禁令力止之, 弼明走京師投疏。 請鞫問其所嗾, 弼明慌亂, 誣謂公見其疏, 而公實不見也。 適有爲言者, 得不拿治, 公猶待命郊外, 獄竟始還。 又以議政公與公同罪請削黜。 冬, 上特敎曰: “閔某等才局可屬重任, 幷西敍。” 翌日群小交竭力爭, 上不得已從之。 丁巳正月, 命釋門黜, 群小又爭之三朔, 竟還寢。 六月, 兩司合啓, 請以正邦禮、明宗統之意, 告于大廟, 蓋國舅金公萬基同參賓廳議禮, 欲托此除去, 以動搖中宮也。 上覺其情狀, 批斥嚴峻, 又敎曰: “聞議禮諸臣, 待命金吾, 其令罷歸。” 於是蜂起之論少沮。 公聞有臺啓, 將詣近圻, 道得恩旨乃還。 戊午春, 因赦放釋, 繼還職牒, 後再有敍命, 輒爲奸黨所尼。

己未夏, 火色益熾, 與議政公俱被竄逐, 公得興海。 旣至, 足不出門外, 終日看書, 怡然有自得之趣。 十月朔日, 大雷震, 越二日亦如之。 上大驚動, 命放同竄諸臣, 傾朝合爭, 六閱月乃止。 於是公與議政公始還忠州舊居, 時庚申四月也。 謀不軌事覺, 凶黨就法, 朝著淸明, 議政公入相, 公授工曹判書、知經筵。 尋移度支, 又差宣惠堂上。 屢疏辭免, 溫旨不許, 則曰: “罪廢之餘, 洊蒙異恩, 義不敢一向退處。” 遂入城拜命, 差承文提調、都摠管、判義禁。 會有追告隱情者, 獄再起, 公承命按劾, 盡得逆狀, 而間有所平反者。 時長星竟天, 詢訪臣隣, 公陳講學、招賢、節用、愛民之道, 又言: “賦重財竭, 專由軍額之過多, 宜亟變通。” 上嘉納。 十月, 仁敬王后昇遐, 差國葬都監提調, 公前後在度支, 四經山陵, 而措置有方, 民力大紓, 經費亦不告乏。 俄移兵曹判書, 自萬科之後, 武弁如林, 人多空老, 怨歸朝廷。 及公秉銓, 大恢公道, 別創試藝之法, 隨才調敍, 才者以勸, 而不才者不敢怨。

辛酉正月, 以都監勞加輔國階。 三月, 仁顯王后膺德選, 公例拜領敦寧府事, 賜號驪陽府院君。 上因慈敎問大臣曰: “變亂才除, 人心未定, 國家所倚重, 堇若而人, 今使兵判就閑, 實有棄才之歎。 依沈靑川韓西平故事, 勿遞兵判。” 大臣引故典執不可。 且曰: “若仍帶備局、宣惠等任, 與議貢賦、軍制, 則猶勝於全棄。” 上屢下敎諭意, 而大臣愈持前說, 儒臣、諫臣亦爭。 上以六禮不遠, 而公猶未拜新命, 命姑遞公。 旣出謝, 連上章乞解諸兼任, 史官宣旨, 召命屢降, 而皆不進, 又入對申辭, 上不許。 而玉堂請遞備局、經筵, 公益不自安, 控籲不已。 尋以相臣言, 又兼賑廳, 屢辭不出, 則許遞承文、經筵兩任, 俾專賑事, 又命牌招, 公詣闕陳章而退。 始府尹公以贈正郞諱汝俊之支子, 出後於庫令公, 公旣爲國舅, 以三代封爵先已准式, 請將所有恩例, 移用於本親, 遂加正郞公爲左參贊。 壬戌, 新設禁衛營, 公爲提擧, 再上箚三入前席, 幷辭備局愈益懇至, 上乃勉副備局。 大同之設, 本欲捄貢物之弊, 而奸濫滋多, 國用日蹙。 庚申, 更化之初, 公建議裁定。 冬, 尤齋上箚言: “閔某曾在地部, 略變貢法經制, 大得其力, 不賦於民, 而了辦山陵大役。 若非某誠心忠慮, 誰能爲此? 此眞程子所謂‘小變則小益, 大變則大益’也。” 至是, 李公端夏請再加看詳, 通融增減。 公以首席尸其事, 市井遊食之輩, 群起造謗, 而士大夫亦多駕其說而疵議者。 公不少沮撓, 事竟得行, 然猶未能盡如公志。 時刑曹吏受賕枉法, 而事關惠局, 公推治之。 諸司之勒買市物, 新立禁條, 而政院首犯, 公請問備。 正言朴泰維上疏詆公, 至謂: “恣行不顧, 縱肆怙恩。” 公上疏請譴, 輒賜溫諭, 章四上始許遞賑廳以安之。 又力辭禁營、惠局, 竟蒙許。

癸亥冬, 上患痘疹, 公承命直宿禁中, 旣復常, 與侍藥諸臣同被恩賚。 甲子, 兼扈衛大將, 爲公增設也。 又兼摠管, 旋遞。 丙寅秋, 地震, 校理李徵明上疏以爲: “自昔此變, 多由於外戚用事。” 至請勉戒坤聖。 上大駭招問徵明, 所對卒無實事, 特命罷削。 公杜門踰月, 始拜疏請罪, 慰諭備至。 公素苦風痰, 至丁卯夏感疾, 上命大醫恒視, 竟以六月廿九日, 考終于安國坊賜第之正寢, 壽五十八。 訃聞, 上震悼, 爲之擧哀, 命進素膳、輟朝市。 自公卿大夫, 以至吏胥軍校, 莫不咨嗟相弔。 尤齋在鄕, 爲設位而哭之慟。 門人加麻者廿餘人。 送終百須, 司徒供之, 內府庀之, 諸殿各遣中使監護。 限三年不收常祿, 弔賻致祭有加。 越三月丁酉, 禮葬于驪州治東蟾樂里負戌之原, 遠近會者數百人。 公凡三聘: 海豐府夫人李氏, 吏曹判書景曾之女, 淸淑有女士行; 城府夫人宋氏同春先生浚吉之女, 婦道甚備, 宗門誦其賢; 豐昌府夫人趙氏, 進士貴中之女。 二夫人歿而各葬, 至是幷合封焉。 後上謁寧陵, 特遣近臣致祭於墓。

公卒之三年, 時事大變, 仁顯王后遜于私第, 公及三夫人封誥, 幷命焚之, 議政公栫棘西塞而歿。 後六年甲戌四月, 上大悔悟, 王妃殿下復正坤位, 悉還公及三夫人爵號, 特遣承旨祭墓。 又命亟擧節惠之典, 太常議諡曰文貞, 御筆親書塚上表面。 甲申春, 特贈領議政, 兼帶如例, 公之終始哀榮, 於是益備矣。 宋夫人二男三女: 男鎭厚, 文科, 參贊; 鎭遠, 文科重試, 留守。 女爲進士李晩昌、別檢申錫華妻, 而仁顯王后於次爲第二也。 趙夫人一男二女: 男鎭永, 女爲進士李長輝、士人洪禹肇妻。 側出二男二女: 男鎭昌鎭五, 女李熳柳絢。 參贊娶副提學李端相女, 有一女趙奎彬。 再娶縣監李德老女, 有二男一女: 男翼洙遇洙, 女金光澤。 留守娶左議政尹趾善女, 有四男一女: 男昌洙亨洙, 女李周鎭, 餘幼。 鎭永娶縣令李明升女, 有一男。 長壻一男, 翰林。 公氣貌莊凝而神采映發, 望之知其正人君子也。 少也襲訓家庭, 又嘗薰陶於師友之間, 以故其制行益高。 事王父母、父母, 極其愉惋, 親意甚安之。 觀察公病革, 與二兄俱割指進血。 前後居憂, 情文無憾, 尤齋稱其執喪之善, 世不多見。 旣貴猶與伯仲同居, 至家衆不能容然後分異, 然日必相會, 會必聯床, 大小事必咨稟而行之。 伯氏之喪, 哀動傍人, 觀葬者疑於子。 仲氏之疾, 藥餌必嘗, 扶護必親, 於伯姊亦如之。 姑與妹孀居, 顧撫盡情, 甘苦視己, 推以及於宗族, 恤窮濟貧, 有范文正之風。 平居動遵禮敎, 未嘗有惰容俚言, 每辨色而作, 淸坐終日, 簾几從容, 氣像閑雅。 敎諸子甚有法度, 晨昏羅拜, 無敢嬉笑於前。 嘗戒以勤學飭行、立志不苟。 冠婚必稽古經, 手定儀式, 喪制疑變, 必反復講質, 務歸得正。 至於莅祀之時, 極其潔齋, 致其誠愨, 皆足爲搢紳家楷範。 早登同春之門, 舅甥爲師弟, 誠心服勤, 盡力於後事, 世以門之勉齋況之。 又師尤齋, 尊信甚篤, 屈伸榮辱, 與共終始。 所與友皆當世髦俊, 信義相契, 不以死生易其志。 嘗有布衣交莫逆也, 及歿視其孤如子, 而女將嫁, 備資裝遺之曰: “縱不能取養於家, 何可不任其撫恤之責哉?” 奬勵後進, 必欲其成就, 見有一能, 猶恐薦揚之不及。 嚴於邪正之分, 始與相善, 見其不是, 立謝之, 人或訝其太遽, 後果驗。 淸修之節, 至老彌亮, 致位隆顯, 身如寒士。 及至戚聯宮掖, 服御無變。 恬於得喪, 視世之翕翕熱者, 若將浼焉。 禍福之際, 一聽於天, 雖困殢萬端, 處之愈亨。 赤心徇國, 義形於色, 常以鞠躬盡瘁爲期, 故內外歷踐, 多是劇地, 而事集功起, 風采立變, 蓋其本源之地, 光明正大, 疏暢通達, 故發於其政者, 沛然若決江河, 無所往而不有成績也。 公常曰: “吾聰明無過人者, 惟臨事不敢不盡誠, 故自無遺失。” 此可見公之一生所存矣。 蓋公處臺閣, 則有古遺直之風; 登講筵, 則有眞學士之稱。 出入內外, 軍民戴之如父母; 正色朝端, 士林仰之若帡幪。 阨窮而不變平生之守, 盛滿而益著謙牧之光, 與道消長, 卒保完名。 雖時危勢礙, 不能盡布其所抱負, 而其風猷志節, 亦足以表見於來後矣。 公愛士不倦, 雖以余之顓愚, 亦嘗猥蒙款接, 凡有事在與聞其一二。 丁未歲, 有漂船泊耽羅, 一行九十餘, 皆華服華語, 自言: “東南海上皇統猶在, 我卽其人也。” 朝議將押解北庭, 公痛憤流涕, 力爭於上前, 退又極言於大臣曰: “諸公慮有後患耶? 倘再畀我南藩, 當以死自當, 國其無憂。” 大臣終不聽。 時公訪余於城南, 一一道其事, 而慷慨悲咤, 嗚咽不成聲矣。 嗚呼! 自丙、丁以來, 士大夫狃於見聞, 沒於爵位,《匪風》、《下泉》之義, 知者鮮矣。 而公獨慨念京周, 孤誠炳然, 至欲捐其死生而惟義之是取, 其志可謂烈矣。 其有補於民彝世敎也, 何如哉? 以此銘公之墓, 庶幾不愧吾筆也。 銘曰:

孝廟初服, 得人爲盛。 曰維閔公, 嘉會是應。 瓊琚玉佩, 早颺王廷。 諤諤昌言, 巨室氣屛。 上曰吁哉! 乃言則正。 展也邦直, 厥由主聖。

庶幾夙夜, 翊贊神化。 中途泣弓, 萬事解瓦。 遭逢聖嗣, 一埤負荷。 出莅藩屛, 入告氈廈。 民懷父母, 主倚良佐。 邦運中蹇, 禮訟胎禍。

哆侈成錦, 衆陽削剝。 九死南荒, 銀山鐵壁。 旭日回光, 繡黻重返。 方將大用, 爲國之幹。 坤儀正極, 王謂我舅。 跡拘勢閣, 利澤未究。

蓋公三朝, 終始一節。 百行是宜, 世所塗轍。 然且有大, 尊之烈。 見義忘身, 欲樹民極。 其志卓卓, 可表千億。 我最其槪, 于以顯刻。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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