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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명(墓誌銘)

영의정 약천 남구만 묘지명(領議政藥泉南九萬墓誌銘) - 최창대(崔昌大)

작성자야촌|작성시간26.06.16|조회수41 목록 댓글 0

■ 남구만(南九萬)

    조선 후기의 문관이자, 숙종 시대를 대표하는 명신이다.

▲약천 남구만선생 초상화

 

◇출생 : 1630년 1월 15일 / 충청도 충주목 누암(現 충청북도 충주시)

◇사망 : 1711년 5월 4일[수(壽) 81세] / 경기 광주부 율현(現 서울특별시 강남구 율현동)

◇재임기간 : 제139대 영의정, 1687년(숙종 13) 9월 1일~1688년(숙종 14) 8월 9일.

                    제143대 영의정, 1694년(숙종 20) 4월 24일~1696년(숙종 22) 9월 6일.

◇시호 : 문충(文忠)

◇본관 : 의령 남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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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정 약천 남공 묘지명(領議政藥泉南公墓誌銘) - 최창대(崔昌大) 찬(撰)

하늘이 뛰어난 재주와 큰사람을 태어나게 한 것은 장차 세도(世道)를 부식(扶植)하고 국가를 구제하려고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이 태어남은 기약한 바가 있고 그 사람이 나오면 성과가 있게 되기 마련이다. 인조께서 중흥(中興)하고 효종께서 계승(繼承)하면서부터는 

모두가 전일한 덕을 가지시어 정교(政敎)가 훌륭하고 밝아 인물을 양성하여 후사(後嗣)들에게 끼쳐주었는데, 고(故) 상신 약천공(藥泉公, 

남구만) 같은 분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세 조정을 내리 섬기고 마침내는 우리 성주(聖主, 숙종)를 섬겨 보좌(輔佐)하고 광정(匡正)하여 나라를 튼튼히 하고 사람을 바루어 사직(社稷)이 잘되고 오래가게 함에 끝내 힘입음이 있게 하였으니, 아! 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삼가 상고해보건대, 공의 휘(諱)는 구만(九萬)이요 자(字)는 운로(雲路)이며, 성은 남씨(南氏)요 호는 약천(藥泉)이다. 원조(遠祖) 휘 민(敏)은 중국에서 사명(使命)을 받들고 나오다가 표류하여 지금의 영해부(寧海府)에 이르니, 신라왕이 성을 남씨(南氏)로 내리고 영의공(英毅公)에 봉하였다. 

 

그 뒤에 본적을 의령(宜寧)으로 옮기고 관작(官爵)과 문벌(門閥)로써 세상에 알려졌는데, 우리 태조(太祖)의 개국(開國) 때 충경공(忠景公) 남재(南在)가 원훈(元勳)이 되었고 그의 손자 충간공(忠簡公) 남지(南智)가 세종을 섬겨 계속해서 정승에 올랐으니, 공에게는 8대조가 된다. 

 

고조 휘 언순(彦純)은 무과 승지요, 증조 휘 타(柁)는 증(贈) 병조 판서(兵曹判書)이며, 조부 휘 식(烒)은 평강 현감(平康縣監)에 증 찬성이요, 고(考) 휘 일성(一星)은 금성 현령(金城縣令)에 증 영의정이다. 비(妣)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강릉 부사(江陵府使) 권엽(權曗)의 따님인데, 정경 부인(貞敬夫人)에 증봉(贈封)되었으며, 3대의 추증(追贈)은 공이 귀히 되었기 때문이다.

공은 어려서 호서(湖西: 충청도)의 결성(結城: 홍성군 결성면)에서 살다가 나이 10여 세에 서울로 왔는데, 서울의 명사(名士)들이 모두 공의 문식(文識)에 감복하였고 명성은 날로 퍼져나갔다. 신묘년(辛卯年, 1651년 효종 2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병신년(丙申年, 1656년 효종 7년) 별시(別試)에 등제하였는데, 그때는 효종이 바야흐로 사람을 씀에 마음을 쏟고 있을 무렵이었으므로 공은 가주서(假注書)로서 가까이에서 모시면서 기주(記注)와 응대(應對)함에 임금의 마음에 합당함이 있자 격식을 건너뛰어 전적(典籍)에 올리라 명하였으며, 간간이(세자 시강원의) 사서(司書)와 문학(文學)을 맡게 하였다.

 

찬선(贊善) 송준길(宋浚吉)공이 서연(書筵)에 출입하면서 공의 어질고 문식이 있음을 보고 깊이 허여(許與)하였으며, 공도 스승으로 섬겼다. 정언에서 지평에 올랐는데, 임금이 친히 인평 대군(麟坪大君)의 상(喪)에 제(祭)을 올리려 하자 간관(諫官)들이 국법이 아니라고 다투어 간하니, 임금이 언관(言官)의 말을 꺾으려 하여 ‘타위(打圍, 사냥)는 국법에 있는 바라’면서 먼저 행하게 하였으므로, 제신(諸臣)들이 더는 간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공이 연해 상소를 올려 간절하게 간하여 결국 중지하게 되었다. 이조에서 홍문록(弘文錄)에 천거하여 곧바로 교리에 제배(除拜)되었는데, 이는 극선(極選)이다. 공은 한미(寒微)한 집안에서 발신하여 돌보아 주는 이가 없었으나 오로지 재식(才識)이 특출함으로써 항상 시망(時望)에 앞섰는데, 뒤에 대관(大官)과 장상(將相)이 될 때에도 역시 그러하였다.

 

명을 받들고 호남(湖南)을 염찰(廉察)하다가 도중에 효종께서 승하하셨음을 듣고 조정 명령에 의하여 달려와서 상사(喪事)를 마쳤으며 돌아와서는 이조 정랑에 제배되었다. 이로부터는 옥당(玉堂, 홍문관)과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에 출입하였으나 이조에 있는 적이 가장 많았다.

 

임인년(壬寅年, 1662년 현종 3년)에는 어사가 되어 영남(嶺南)의 기근(饑饉)을 진휼하여 온 지역이 구제를 받았다. 응교(應敎)와 사인(舍人)을 거쳐 갑진년(甲辰年, 1664년 현종 5년)에는 승지에 탁용되었으며 여러 자리를 거쳐 대사간이 되었는데, 관사(官邪)와 정폐(政弊)를 바로잡으려고 많이 건의하여 더러는 하루에 10여 가지 일을 청하기도 하였으나 임금이 많이 따랐다.

 

이조 참의를 거쳐 대사성이 되어서는 사습(士習)을 바로잡고 경학(經學)과 문예에 힘쓰게 하였으며, 명관(名官)은 학식을 겸해야 한다고 여겨 학제(學制)를 정하여 사생간(師生間)에 한 달에 세 번씩 회강(會講)하기를 청하였고, 오래 된 큰 집을 수리하여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기를 청하였으나 마침 그 직을 떠나게 되어 실행하지 못하였다.

경술년(庚戌年, 1670년 현종 11년)에는 외직을 청하여 청주(淸州)를 맡았는데, 해마다 큰 흉년이 들었으므로 공은 주야로 진휼할 일을 강구하고 상소를 올려 세부(稅賦)의 감면과 곡물의 비축을 청하는 한편 때에 맞추어 나누어 진휼하자 백성들이 배부름과 편안함을 얻어 농상(農桑)을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하였으므로, 사람들이(송 인종(宋仁宗) 때) 부필(富弼)의 청주(靑州)를 다스릴 때에 비교하였다.

 

이듬해에는 함경도 관찰사에 발탁되어 유교(儒敎)를 일으키고 무술을 권장하였는데, 함흥성(咸興城)을 개축하고는 사방의 궁벽한 성루(城壘)까지 몸소 두루 돌아보고 변방 관새(關塞)의 실상을 도면으로 그려 올리면서 무산부(茂山府)를 설치할 것과 갑산(甲山), 길주(吉州)간의 새 도로를 틀 것과 사군(四郡)을 다시 폐지할 것을 청하였는데, 임금이 연석(筵席)에 임하여 도면을 펴놓고 재신(宰臣)들에게 그 상소를 읽게 하고는 탄식하기를, “재주와 충성심은 참으로 남이 미치지 못할 바이로다.” 하였다.

 

뒤에 무산부는 다시 설치가 되었고 임기가 만료하자 1년을 더 머물면서 변방의 일을 더욱 성취시키게 하였다. 이조 참판으로 조정에 돌아와서는 동지경연사를 겸직하고 비변사와 진휼청의 당상을 겸대하였다. 금상(今上, 숙종)이 새로 즉위하자 종실인 정(楨, 복창군(福昌君))과 남(柟, 복선군(福善君))이 은총을 믿고 교만 방자하므로, 공이 ‘그들이 종국에는 몸을 망치고 나라에 해를 끼칠 것이라’고 말하니, 임금이 싫어하여 공의 여러 직임을 모두 체직시켰다. 이에 공은 어머니를 모시고 결성(結城)으로 돌아왔다.

무오년(戊午年, 1678년 숙종 4년)에는 특별히 형조 판서에 승진시켰는데, 언관(言官)이 취소하기를 청하여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 제수되었다. 그때에 윤휴(尹鑴)가 재신이 되어 불법을 많이 행하고, 허적(許積)의 얼자(孽子) 허견(許堅)이 간교(奸巧)와 자횡(恣橫)이 심하였으므로, 공이 상소하여 ‘윤휴가 금송(禁松)을 작벌하여 집을 지은 것과 허견이 공공연히 무인(武人)의 처를 납치 간음하고 대비(大妃)의 서모를 구타하여 이빨을 부러뜨린 일’을 발고(發告)하자, 핵실하여 처치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그 일당들이 오로지 엄익(掩匿)과 기만(欺瞞)을 일삼고 윤휴와 허견의 죄상을 드러낸 것을 되려 부실한 말이라면서 공을 무함하여 남해(南海)로 귀양 보냈는데, 얼마 후에 사면되어 돌아왔다. 

 

경신년(庚申年, 1680년 숙종 6년)에 허견과 남이 복주(伏誅)되자, 맨먼저 도승지로 불렀고 부제학으로 옮겼다가 올려 양관(兩館,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임시켰는데, 모상(母喪)을 당하여 시골로 돌아왔다. 복을 벗자 대사간을 거쳐 병조 판서에 탁용되었는데, 공은 정사(政事)를 함에 성일(誠一)에 바탕을 두고 실행함에 조리가 있었으며, 법을 운용함에 엄하지만 까다롭게 하지 않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오직 정일(精一)해야만 천하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에 다달아서는 오로지 그 이해를 살피고 여러 사람에게 질문하여 그 장처(長處)를 가려서 옳다고 여겨진 뒤에 행하면 반드시 성과가 있게 된다.” 하였다. 

 

청주(淸州)와 북도(北道)에서는 이미 남다른 치적(治績)이 있어 그곳 사람들이 각기 생사당(生祠堂)을 지었고, 전후로 관장하였던 여러 관사(官司)에서는 모두 함께 법식으로 삼아 지금까지도 많이 준용하고 있으며, 늙은 아전들은 아직도 공의 일을 말하고 있다. 

 

병조의 장관이 되어서는, 병조의 전포(錢布)가 지난날에는 유출(流出)이 많았으므로 공이 이서배(吏胥輩)들의 간계를 다 파악하고 죽음만은 면해 주면서 보상하게 하였으며, 낭관(郎官) 중에서 가려서 맡겨 규칙을 정하여 점검하게 하니, 1년안에 창고가 넘쳐나서 노적(露積)을 하게 되었으나 담을 치지 않았다.

병진년(丙辰年, 1676년 숙종 2년)의 만과(萬科, 각종 무예로 무사를 많이 뽑았기에 붙여진 이름)를 치른 뒤로는 무사(武士)들이 잡탕이 되어 가리기가 어려우매 공이 신언서판(身言書判)과 무예로써 시험하여 가합한 자를 기록하였다가 차례로 뽑아 썼는데, 뒤에는 이름난 무인이 많이 배출하니 중외에서 한결같이 칭탄하였다. 

 

또 조정에 건의하여 북도의 정장(精壯)들을 모집하고 조직하여 친기위(親騎衛)를 만들어 요령이 있게 훈련시키니 마침내 용맹한 군사가 되었다. 갑자년(甲子年, 1684년 숙종 10년)에는 우의정에 제배되어 좌의정에 올랐으며, 사면하자 오래지 않아 또 좌의정에 제배되었다. 

 

공이 사신으로 북경에 갈 때에 영상(領相) 김수항(金壽恒)과 이민서(李敏叙)로 복상(卜相)하기로 약속하였는데, 돌아와 보니 딴사람으로 복상하고 연유도 말해 주지 않자 공이 치사하게 여겨 병을 핑계하고 사퇴하였다가 정묘년(丁卯年, 1687년 숙종 13년)에는 영의정이 되었다.

공은 사람됨이 강직하고 의로움을 좋아하였으며, 사리(事理)를 분석함이 정확하여 작은 벼슬에 있을 때부터 감언(敢言)하기로 이름이 있었고, 정승으로 있을 때에는 더욱 범안(犯顔, 임금의 뜻을 거슬려가며 정면으로 직언함)하면서 논변하였다. 일찍이 이르기를, “대신은 마땅히 임금의 마음을 바루는 것으로 선무(先務)를 삼아야 한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선비가 성취하는 것은 오직 하나의 시(是, 옳은 것)일 따름이다.”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한번 뜻을 정한 바에는 비록 사생(死生)과 화복(禍福)이 당장에 목전에 닥친다 해도 돌보거나 주저함이 없었다. 여러 궁가(宮家)에서 산택(山澤)을 점거하여 별장을 만들고 ‘절수(折受)’라 부르며 그것이 있는 곳의 백성들은 심한 고통을 받았는데, 제공(諸公) 등은 말을 하려 해도 하지 못하였으나 공이 주청하기를, ‘국제(國制)의 직전(職田) 숫자대로 유사(有司)가 값을 치루고 매입하여 절수는 전부 혁파해야 한다’고 누누이 힘주어 말하니, 임금이 처음에는 언짢아하다가 종말에는 윤허하자 조정 신하들이 감탄하였다.

장 귀인(張貴人)이 임금의 총애를 궁중에서 독차지하고 종친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이 편들며 특별히 은권(恩眷)을 받으므로, 이조 판서 박세채(朴世采) 공이 말을 하니, 임금이 노하여 그 직을 파하자 군신(群臣)들이 두려워하였다. 공이 청대(請對)하여 극언(極言)하고 정(楨)ㆍ남(柟)의 일을 인용하여 진계(陳戒)를 하니, 임금이 대노하여 공을 경흥(慶興)으로 귀양 보냈다. 

 

이에 온 조정에서 들고일어나서 몇 달을 두고 역쟁(力爭)하자, 용인(龍仁)의 파담(琶潭)으로 방면해 돌아왔다. 기사년(己巳年, 1689년 숙종 15년)에는 중궁(中宮)이 폐출되고 군소(群小)들이 득세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장씨(張氏) 때문에 숙휘공주(淑徽公主, 효종의 따님)에게 서운하게 생각함이 있어 공에게 말을 하자, 공이 ‘내치(內治, 궁내를 다스림)에는 은애(恩愛)를 주로 하고 밖으로 발표해서는 안된다’고 말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공의 앞서 말한 것을 트집하여 강릉(江陵)으로 귀양 보냈다가 이듬해에 풀려 결성으로 돌아왔다. 

 

갑술년(甲戌年, 1694년 숙종 20년)에 중궁께서 복위되니 영상으로 소환되었다. 처음에 김춘택(金春澤), 한중혁(韓重爀) 등이 남몰래 돈을 거두어 거짓을 말하고서 여러 사대부로 더불어 궁궐과 통내(通內)하면서 폐비(廢妃)의 복위를 꾀하다가 민암(閔黯) 등에게 적발되어 바야흐로 국문하여 치죄하려고 하던 차였는데, 때마침 임금이 민암 등을 내치고 구신(舊臣)을 불러들여서 쓰게 된 것이다.

(공이 김춘택 등의 죄를 청하려 하니) 더러 말하기를, “이들은 민암 등이 죽이려 한 사람인데, 하필이면 왕세충1)(王世充)ㆍ두건덕2)(竇建德)을 위하여 원수를 갚아 줄 것이 있느냐? 끝까지 추궁할 것이 없다.” 하였다. 공은 생각하기를, “김 청성[金淸城: 청성 부원군 김석주(金錫胄]이 경신년에 남인(南人)을 축출한 대옥사(大獄事)는 비록 공이 있다고는 하나 본래 마땅히 할 일은 아니었다.

 

사사로이 통하는 길이 한번 열리면 전철(前轍)을 밟아 전복하는 일이 속출할 것이므로 통렬하게 방지하지 않으면 나라는 틀림없이 망한다.”고 여기어 글을 올리기를, “오늘날 신민들은 중궁께서 이미 복위되셨음을 큰 경사로 여기고, 또 전하께서 쾌히 결단하시어 일월처럼 광명하며 추호의 모호함도 없음을 큰 다행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 불량한 무리들이 그 사이에서 조금이나마 힘이 되었다고 생각할 때 성덕(聖德)에 누(累)가 됨이 어떻다 하겠습니까? 그 허실(虛實)을 밝히고 왕법(王法)을 쾌히 바루어야만 거조(擧措)가 명정(明正)하고 사경(私逕)이 폐쇄되어 청명(淸明)한 다스림을 다시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오랜 뒤에야 한중혁을 논죄하여 멀리 귀양 보내자 공이 또 말하기를, “한중혁 등을 치죄하기를 청한 것은 성상을 위하여 중외의 의혹을 풀고 중전(中殿)을 위하여 복위의 정대함을 밝히며, 사대부를 위하여 천고(千古)의 수욕(羞辱)을 씻음이니, 이는 옛사람이 이른바 ‘조정을 일월의 위로 높이는 일’입니다. 죄가 귀양감에 그친다면 의혹을 풀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좋게 여겼으나 김춘택의 무리들은 깊이 원망하였다.

장희재(張希載)는 세자의 소생모(所生母)의 아우이다. 중궁이 사제(私第)로 폐출되자 장희재가 서찰로 장씨(張氏)와 통래하면서 말이 중궁에게 저촉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장희재가 국문을 받게 되었다. 임금이 그 서찰을 가지고 대신에게 말하기를, ‘죄는 마땅히 베임을 당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때에 세자의 나이는 겨우 일곱 살이었는데, 공은 ‘장희재를 죽이면 일이 장씨에게 연루(連累)되고 장씨가 위태로워지면 세자가 불안해진다’고 여기어, 이에 법을 굽혀서라도 살리기로 하고 임금에게 말하기를, “성상께서 이미 깨달으시고 명분(名分)이 이미 정해졌으므로 지금까지의 모든 일은 이제 논할 것이 없겠습니다만, 중궁께서는 희빈(禧嬪)에게 규목樛木, 3)의 은혜가 있고 희빈은 중궁에게 소성(小星: 빈첩(嬪妾)의 예를 다하며, 세자께서는 중궁에게 효성을 다하기를 한(漢)나라 장제(章帝)가 마 태후(馬太后, 한 명제(漢明帝)의 황후)에게와, 송(宋)나라 인종(仁宗)이 유 태후(劉太后, 송 진종(宋眞宗)의 황후)에게 하듯이 한다면 이는 신자(臣子)들의 구구(區區)한 소망인데, 지금 장희재가 전전하여 불안해진다면 일후에 궁궐 사이에서 어떻게 화목을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 말을 가납하였으나 뭇 논의는 시끄럽도록 공격하였고 김춘택의 무리들은 또 시골의 유생(儒生)들을 사주하여 서로 소장(疏章)을 올려 힘주어 헐뜯으면서 공더러 역적을 두호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공은 다만 겸손하게 대하고 더불어 따지려고 들지 않았다. 누차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이루지 못하니, 형적이 하루도 조정에 있기 편안치 못하였으나, 그래도 날마다 백성들의 애로와 정사의 득실을 강구하였고, 순무사(巡撫使)를 삼남(三南)에 보내서 해방(海防)을 살피고 백성들의 질고(疾苦)를 제거해 주기를 청하였으며, 또 부역을 크게 균등하게 하여 백성들의 힘을 펴 주고자 하였고, 명경과(明經科)의 격식을 고쳐서 오로지 구독(口讀)에 치중하지 말고 유생들로 하여금 경전(經傳)의 뜻을 이해하는 데에 전념케 하기를 청하였으나 의논에 이동(異同)이 많아 시행되지 못하였다. 공이 정승이 되어서는 법을 받드는 데에 사(私)가 없이 하고 몸소 솔선하기에 힘썼으며, 붕당의 폐해를 깊이 걱정하여 사람을 씀에 반드시 공의(公議)에 따라 하였다.

 

형상(刑賞)을 공정하게 하고 체통을 엄히 하였으며, 관사(官司)의 나쁜 전례를 고치기에 힘썼고 더욱이 백성들을 중히 여겨 경사(京司)에서 백성을 압제하는 일이 있으면 아무리 중신(重臣)이라도 반드시 죄를 가하였다. 전후로 일을 보살핀 지 2년이 채 못되었으나 공이 상위(相位)에 있을 때에는 상하가 어렵게 알고 함부로 못하였다.

 

일찍이 기사년(己巳年) 제신(諸臣)들의 죄를 논할 때에는 공이 임금에게 자신을 용서함에는 후하고 남을 책함에는 박해서는 안된다는 뜻으로 권면하였더니, 응교 김진규(金鎭圭)가 기회를 타서 이간질하기를, 공이 허물을 성궁(聖躬)에게 돌리고 있다 하여, 공이 교외로 나와서 대죄하고 기어코 사면할 것을 청하였으나 이윽고 도로 제배되었다.

 

이때에 한중혁의 무리들이 아직도 정법(正法)이 되지 않아 공이 또 말하기를, “조정이 누차 변혁하여 출척(黜陟)이 떳떳하지 못하여, 천한 사람들은 높은 자리를 가리켜서 여관집의 머슴 같다 하고, 변방 사람들은 귀양 온 사람들을 가리켜서 상담(湘潭)의 와룡4)(臥龍)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화란이 일어난 것은 비록 당론(黨論)에서 연유하였지만 번복하는 계기는 혹 다른 경로로 의심받기 때문에, 형벌을 자주 행하더라도 기강은 더욱 서지 않고 처분을 한껏 새롭게 하더라도 인심은 더욱 의아하여, 국가에서 천고(千古)에 드문 성대한 일을 거행함이 있었는데도 거짓 소문이 먼저 유포됩니다.

 

신이 옥안(獄案)에서 그 실정을 파악한 것만 하더라도 거둔 재물은 모두 주육(酒肉)과 거마(車馬) 의복(衣服)의 비용으로 쓰여지고 복위(復位) 문제로 뇌물을 뿌리는 데에 쓰여짐이 아님은 분명하였습니다. 전하께서 혁혁하게 조림(照臨)해 계신데도 호서배(狐鼠輩)의 무망(誣罔)이 이와 같으니, 신은 참으로 통탄스럽게 여기는 바입니다.” 하였고, 또 당인(黨人)들의 경죄(輕罪)는 다소 소방(疏放)하기를 청하면서 말하기를, “논자들은 말하기를, ‘당인을 다스림이 엄하지 않은 것은 훗날의 보복이 두려워서 그런 것이다.’ 합니다.

 

아! 오늘날의 조정 신하들이 마땅히 힘을 써야 할 바는 편사(偏私)를 쓸어내어 기어코 훗날을 다짐함이 없게 하여야 하거늘, 어쩌자고 훗날을 꼭 있는 일로 여기고 ‘나는 그러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답니까?” 하였다. 이는 대체로 노론(老論)이 남인(南人)을 원수같이 미워하며 공론을 조작하여 훗날을 도모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공의 말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임금은 가납하고 한중혁은 결국 고문으로 죽었다.

병자년(丙子年, 1696년 숙종 22년)에는 장씨(張氏)의 선대 묘소에 저주(咀呪)가 있어, 공이 장씨 집의 노복이 그 모의에 동참하였는지의 여부를 핵실하였으나 대답이 명백하지 않았다. 그러자 모든 의심은 스스로 그 일을 저지르고 화를 서인(西人)들에게 떠넘기려 한 것이라 여겼다. 

 

공도 그러한 것으로 여겼으나 장 희빈에게 난처한 일이라도 생길까봐 끝까지 추궁하지 말기를 청하였더니, 언자(言者)들이 또 무더기로 일어나서 매우 공에게 대항하였다. 그러자 공은 곧바로 시골로 내려와서 굳이 사면을 청하여 해임하고 다시는 의정부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윽고 저주를 한 자가 잡혀서 죽었는데, 죄를 지고 죽임을 당한 집의 자식이었다. 공은 일을 잘못 판단한 죄를 청하였으나 임금은 불문에 부치고 끊임없이 소명(召命)을 내렸으나 공은 응명하지 않았는데, 오직 주상(主上)과 춘궁(春宮)의 병환이 있을 때에는 내의원의 직임을 겸대케 한 바가 있기 때문에 부득이 입궐하였다가는 바로 시골로 내려오고 한번도 까닭없이 오래 머무는 일이 없었다.

공은 조정에 나선 지 오래이고 임금에게 지극한 예우를 받았다. 일찍이 명을 받들고 남한산성(南漢山城)의 군량을 점검하다가 병을 얻게 되자 현종께서 의원을 보내서 살펴보게 하였고, 경신년(庚申年) 모상(母喪)에 반장(返葬)할 때에는 임금이 상수(喪需)와 담여군(擔轝軍, 상두꾼)을 내주라고 명하였는데, 장상(將相)이 아니고서 이러한 예우를 받은 것은 모두 특은(特恩)이다. 

 

무진년(戊辰年, 1688년 숙종 14년)에 귀양을 보낼 때에는 임금이 공에 대하여 매우 노하여 있었으나 일찍이 연신(筵臣)에게 말하기를, “남구만은 강명(剛明) 정직하여 굽힘이 없다. 그러기에 나는 그를 정승으로 쓰려 한다.” 하였고 을해년(乙亥年, 1695년 숙종 21년)에 시골 유생들이 공을 헐뜯을 때에는 하교하기를, “영상(領相)의 공충(公忠) 청직(淸直)은 그 짝을 찾기 어렵다.” 하였다. 

 

평생을 붕당을 탕척하고 국세(國勢)를 만회하는 것을 자기의 소임으로 삼았는데, 연석(筵席)에서나 장주(章奏)에서 근실하고 간절하였던 바는 실로 고인(古人)에게 부끄러움이 없었다. 공이 시골로 내려갈 때에 임금은 시를 지어 내리기를,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 깊어 법 받들기에 힘썼고, 시세를 걱정하여 힘부쳐도 자신을 잊었다. [體國誠深惟奉法 憂時力瘁自忘身]” 하니, 논자들이 말하기를, “신하를 알기는 임금만한 이가 없다.”하였다.

 

그러나 공은 거취를 반드시 의(義)로써 재단하고 조금도 구차스럽게는 하지 않았다. 공이 참소를 당하여 인퇴(引退)할 때에 임금이 돈소(敦召)하고 권대(眷待)함은 고금에 뛰어났으므로, 여러 차례 육경(六卿)에게 명하여 내려가서 함께 오게 하였으며, 승지와 사관(史官)을 보내서 누차 수찰(手札)을 내려 어선(御膳)을 나누어주고 혹은 친히 맞겠다고 하교하였는가 하면, 심지어 친히 손을 잡고 만류하기까지 하였으나 나감이 타당하지 아니할 때에는 기어코 나서지 않았고, 의당 사퇴해야 할 때에는 장소(章疏)를 수십 번 올려서라도 기어코 소청이 받아들여져야만 그만두었다.

신사년(辛巳年, 1701년 숙종 27년)에 공을 원망하는 자가 등용되어 장희재의 일을 들고 나와 공을 귀양 보내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고 이르기를, “나는 그의 심정을 안 지 오래이다.” 하고 아산(牙山)에 유배만 시켰는데, 이것도 대간(臺諫)의 논의에 핍박되어 그랬던 것으로 얼마 후에는 용서하여 결성으로 돌아왔고, 갑신년(甲申年, 1704년 숙종 30년)에는 영중추부사에 서용(敍用)되었다. 

 

공은 무인년(戊寅年, 1698년 숙종 24년)부터 나이 늙음을 들어 치사(致仕)하기를 청하였으나 오래도록 윤허하지 않았고, 정해년(丁亥年, 1707년 숙종 33년)에는 임금이 공을 생각하고 특별히 부르기를, “면유(面諭)할 말이 있다.” 하여, 공이 부득이 오기는 하였으나 더욱 간절하게 사퇴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공이 서울을 아주 떠날까 걱정하여 굳이 만류하기를, “경이 나의 만류를 들어주면 나도 경의 청을 들어주겠노라.”하여, 이에 공의 치사를 윤허하고 선온(宣醞, 궁중에서 빚은 술을 내림)하였으며 덧붙여 음식까지 하사하였다.

 

공은 교외에서 잠시 머물다가 파담(琶潭)으로 돌아왔다. 공은 늙어서도 조정에 큰일이나 크게 논의할 일이 있던지 이웃 나라에 정세 변화가 있을 때에는 임금이 곧바로 자문하였고, 대신들도 친소(親疎)를 가리지 않고 걸핏하면 서면으로 질문하여 공의 한마디를 기다려서 결정하였는데, 식자(識者)들이 공을 평하기를, “올바름을 고집하여 꺾이지 않은 점은 송경(宋璟, 당 현종(唐玄宗) 때 재상)이나 사마광(司馬光, 송 철종(宋哲宗)때 재상)에게도 뒤지지 않으며, 나라에 위난(危難)이 있을 때에는 능히 배도(裵度: 당나라 재상)ㆍ이강(李綱, 송나라 재상)이 될 수 있으나 정사(政事)와 문학에 있어서는 오히려 공에게 남음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공은 집에서 생활할 때 청렴 검소하였고 성품이 학문을 좋아하여 극로(極老)에 이르도록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았으며, 경사(經史)를 관통하였으되 실용에 응용하기에 힘썼다. 문장을 함에는 그 체재(體裁)가 풍부하고 전실하였으며 그 소주(疏奏)와 의논은 반드시 전훈(典訓)에 의거하였으므로 문채가 환하여 볼만한 것이 있었다. 

 

문집 약간 권이 있다. 사람을 가르치는 데에 성실하여 문하에서 배출한 사람이 1백여 인인데, 나의 선공(先公, 최석정(崔錫鼎))과 최규서(崔奎瑞) 공ㆍ박태보(朴泰輔) 공은 이미 당세에 이름이 드러났었고 그 외에도 일가(一家)를 이룬 사람이 많았다. 

 

공은 신묘년(辛卯年, 1711년 숙종 37년) 3월 17일에 졸(卒)하니, 수(壽)는 83세이다. 병이 나자 임금이 의원을 보내고 약을 내렸으며, 부음(訃音)이 들리자 애조(哀詔)를 내리고 관재(棺材)를 하사하였으며, 3년 녹(祿)을 보내 주게 하였다. 5월에 양주(楊州) 화접동(花蝶洞)의 충경공(忠景公, 남재(南在)) 묘소 우강(右崗)에 예장(禮葬)하였다.

부인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지평 정수(鄭脩)의 따님으로 1남 1녀를 낳아 아들 남학명(南鶴鳴)은 천거로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에 제수되었고, 딸은 시정(寺正) 조태상(趙泰相)에게 출가하였다. 측실(側室)에서 난 아들은 남학성(南鶴聲), 남학청(南鶴淸), 남학정(南鶴貞)이고 딸은 이대곤(李岱坤)에게 출가하였다. 

 

주부의 3남은 생원 남극관(南克寬)과 남처관(南處寬)ㆍ남오관(南五寬)이고 딸은 이창원(李昌元), 이광의(李光誼)에게 출가하였다. 시정(寺正)의 계자(系子)는 도사(都事) 조명빈(趙明彬)이다. 선군(先君)께서는 공의 유지(遺誌)에 대한 부탁을 받으셨는데, 글을 미처 이루지 못하고 별세하시자 주부가 나에게 이르기를, “자네가 선지(先志)를 이루어 주는 것이 마땅하다.” 하므로, 의리상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입조(立朝)의 대절(大節)을 기술하였으나 관력(官歷)과 행치(行治)에 대해서는 다 기록하지 못하였다.

아! 옛 송(宋)나라 때 소식(蘇軾, 송(宋)의 문장가 호는 동파(東坡)이 장 문정공(張文定公, 송 신종(宋神宗) 때의 장방평(張方平)을 칭도(稱道)하기를, “공은 소시부터 노년에 이르도록 한번도 말로써 남의 신상(身上)에 대하여 물어본 일이 없고 얼굴빛으로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한 일이 없었으며, 비록 인주(人主)를 대해서도 반드시 살펴본 뒤에 말을 하였다.

 

훼예(毁譽)에 동요됨이 없고 득실(得失)에 한결같았으니, 참으로 공자(孔子)가 이른바 직도(直道)로 임금을 섬긴 사람이라 하겠다. 위로는 인주에게 구합(苟合)하기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록 탁용은 했어도 역량을 다 발휘하게는 못하였고, 아래로는 사대부들과 구합하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공을 좋아하지 않은 사람이 많았으나 천하의 위인(偉人)을 말할 때에는 반드시 공으로 으뜸을 삼았는데, 경력(慶曆, 송 인종(宋仁宗)의 연호) 이래로 명신(名臣)으로서 인주의 존경을 받은 이는 공만한 이가 없었다.” 하였는데, 나 최창대(崔昌大)도 역시 공에게 이렇게 말하겠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공을 논하건대, 공에게는 세 가지 남이 못할 어려움이 있었다. 공의 벼슬이 높아지면서 조정의 뒤바뀜이 마치 바둑판처럼 되어 나라의 권세를 잡은 자는 임금의 희노(喜怒)를 틈타서 형벌을 함부로 가하여 사원(私怨)을 풀려고 하매 국가가 그 폐해를 받았는데, 공만이 홀로 깊이 걱정하여 번번이 상대가 폭력으로 대하면 나는 인자하게 대한다는 뜻으로써 위아래에 풍고(諷告)하면서 자신은 남의 비방과 비웃음을 받았지만 도륙(屠戮)하는 화만은 조금은 줄어들게 되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그대는 정치를 하였으므로, 어떻게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고?” 하였는데, 공에게는 그러한 면모가 있었다. 장희재를 죽음에서 살려 준 것은 경법(經法)의 테두리를 벗어난 일이어서 비록 평소에 공을 존경하던 사람들까지도 공을 의심하지 않은 이가 없었고 뭇사람의 비방을 들었으며, 마침내는 그 일 때문에 실각(失脚)을 하였지만 후회하지 않았으니, 어찌 소신이 없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이던가? 

 

혼자만의 지극한 충성을 간직하고 종사(宗社)를 위하여 깊이 걱정하고 멀리 생각하는 도량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윽고 정유년(丁酉年, 1717년 숙종 43년) 7월의 일(세자(世子)의 대리 청정(代理聽政))이 있고서야 사람들이 비로소 공을 생각하고 사람이 미치지 못할 바라 하였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사직(社稷)의 신하라 칭할 이가 있나니, 사직을 안정시킴으로써 즐거움을 삼는다.”하였는데, 아마도 공은 그러한 사람일 것이다. 음사(陰邪)를 통렬하게 징치(懲治)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현륙(顯戮)을 가하고야 말아서, 위로는 군덕(君德)을 밝게 빛내고 아래로는 사풍(士風)을 드러나게 바루었으므로, 후생(後生) 소자(小子)들로 하여금 모두 깊이 부끄러워할 줄을 알고 말하기를 휘기(諱忌)하게 하였으니, 세도(世道)를 바루고 인심을 맑게 한 공은 비록 옛날에 일컬었던 바 ‘일치(一治, 일을 담책(擔責)해서 훌륭히 다스림)’에 대한다 해도 가할 것이다. 아! 위대할진저! 명(銘)하기를,

성인이 주역(周易)의 덕을 찬양하여 강중(剛中)보다 더 귀한 것 없다 했는데, 하늘이 그것을 공에게 부여하여 우리나라 돕게 했다네. 

용맹으로써 충성을 발휘하였고 인(仁)으로써 일을 보았는데, 문(文)은 능히 나라를 경영할 만하였고 무(武)는 가히 군사를 통솔할 만하였다. 

 

한번 등용(登用)이 되자 계획도 하고 실행도 하였는데, 어찌 평지와 비탈길이 없겠는가마는, 오직 의(義)에 견주어 행동했다네. 간사하고 아첨한 자들 징계하고 부딪쳐 거리낌 없이 직언(直言)을 하였으므로, 여러 번 위리 안치(圍籬安置) 당하여 때로는 굴하고 때로는 펴기도 했다네. 

 

나라가 피폐하고 답답할 때 당하여 사단이 있기 전에 명석함 발휘하며, 독특한 관찰을 분명하게 하자 많은 몽매한 이들 우두커니 바라만 보았네. 허다한 입방아들 시끄럽게 지껄였으나 나에게 무슨 상관 있느냐 생각하였네. 공이 하는 일은 다른 것이 아니오라 종사(宗社)를 편안히 하는 일이었도다. 

 

임금이 이르기를 아! 그대 마음 내 마음과 같아, 그대의 덕 그릇됨이 없으매 그대는 나의 고굉(股肱)이로다. 

스스로를 다스려서 남까지 다스리니 그대는 세상의 법도(法度)이로다. 

 

저 분류(奔流)를 능히 막아서 그대가 구릉(丘陵)이 되었는데, 숨겨진 소굴들 한번 타파되니 해와 달이 정정히도 밝았노라. 그 충성과 그 기강(紀綱)은 백료(百僚)들이 본을 받았도다. 앞으론 턱이 채이고 뒤론 꼬리 밟혔으나 끝까지 후회함이 없었는데, 영문(令聞)과 달존(達尊) 있었으매 뉘라서 감히 공을 업수히 여겼으랴? 

 

공이 절하고 머리 조아리며 신은 늙어 물러가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유(兪)라! 

예(禮)로써 마칠지어라 하였다. 

 

이름은 사고(史庫)에 실리고 시호는 봉상시(奉常寺)에 있으며, 임금은 포가(褒嘉)하는 말씀 있었으니 

백세(百世)토록 밝은 빛 드리우리. 사관(史官)의 기술함이 있고 유택(幽宅)에 묘지 간직했다네. 

아직도 벼슬길에 나온 이에 권하노니, 정직함으로 임금 보좌할지어다.

[각주]
1) 왕세충(王世充) : 수(隋)나라 사람으로, 양제(煬帝)가 시해당한 뒤에 양제의 아들 동(侗)을 세우고 보좌하다가 나중에는 그를 폐하고 자

    립하여 황제라 칭하였으나 당병(唐兵)에게 패하여 항복하였는데, 뒤에 원수진 사람에게 피살당하였음.
2) 두건덕(竇建德) : 수(隋)나라 사람으로, 우문 화급(宇文化及)이 양제(煬帝)를 시해하자 그를 토멸하여 죽이니 월왕(越王) 동(侗)이 하

    왕(夏王)으로 봉하였음. 뒤에 왕세충(王世充)이 동을 폐하자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하(夏)라 하였으나 당 태종(唐太宗)이 진왕(秦王)으

    로 있을 때에 그를 토멸하고 사로잡아다가 장안(長安)에서 죽였음.
3) 규목(樛木) : ≪시경(詩經)≫ 주남(周南)의 편명(篇名). 서(序)에 후비(后妃)가 능히 아랫사람들을 은애(恩愛)로 대하니, 중첩(衆妾)들

    이 그 덕을 기리고 칭송한 시(詩)라 하였음.
4) 상담(湘潭)의 와룡(臥龍) : 상담(湘潭)은 상수(湘水)로서 중국 양자강(楊子江)의 지류(支流)인데, 옛날 굴원(屈原)이 이곳으로 귀양 왔

    기 때문에 귀양지의 뜻으로 쓰였고, 와룡(臥龍)은 큰 뜻과 재주를 지니고서 쓰이지 못한 사람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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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領議政藥泉南公墓誌銘) - 崔昌大 撰

 

天之生魁才鉅人, 蓋將以救世道而扶人國家也。 其來也有期, 其出也有爲。 自仁祖中興, 孝宗繼統, 咸有一德, 政化休明, 作成人物, 以遺後嗣, 而若故相藥泉公出焉。 是用歷事三朝, 卒相我聖主, 寔能輔佐匡拂, 康國正人, 社稷靈長, 終必有賴。 嗚呼! 豈非天哉?

謹按公諱九萬, 字雲路, 姓南氏, 號藥泉。 遠祖, 蓋自中國奉使, 漂到今寧海府王賜姓, 封英毅公。 後移籍宜寧, 官、伐世聞。 我太祖開國, 忠景公實爲元臣。 其孫忠簡公世宗繼相, 於公八代祖也。 高祖諱彦純, 武科, 承旨; 曾祖諱, 贈兵曹判書: 祖諱平康縣監、贈贊成: 考諱一星金城縣令、贈領議政。 妣安東權氏江陵府使之女, 贈貞敬夫人。 三世貤爵, 用公貴也。 公少, 家湖西結城, 年十餘, 來京師。 京師諸名士, 咸服公文識, 聲聞日廣。 辛卯, 中司馬, 登丙申別試。 方孝宗厲精用人, 公以假注書侍親政, 記注、應對, 有當上心, 命越格陞典籍, 間爲司書、文學。 贊善宋公浚吉同出入書筵, 見公賢而有文, 深相推與, 公亦師事之。 由正言遷持平。 上欲親酹麟坪大喪, 諫官爭以非邦典。 上欲折言者, 謂打圍乃邦典所有, 命先行之。 諸臣爭不得, 公連章切諫, 爲寢之。 薦吏曹弘文錄, 直拜校理, 極選也。 公起寒素, 無藉援, 徒以材識特出淸要薦選, 率常取先於時望。 後爲大官、將相亦然。 奉命廉湖南, 道奉孝宗諱, 奔赴朝命, 卒事, 還拜吏曹正郞。 自時出入玉堂、兩司, 而在吏曹爲多。 壬寅, 爲御史, 賑嶺南饑, 一方以濟。 歷應敎、舍人。 甲辰, 擢承旨, 累轉大司諫, 官邪、政弊, 多所論建, 或日請十數事, 上多從之。 歷吏曹參議, 爲大司成, 董正士習, 勤課經藝, 請以名官兼學職, 定學制, 師生月三會講。 欲建古廈屋, 講行鄕飮酒禮, 會去職不果。 庚戌, 求外職得淸州, 屬歲大饑, 公日夜講賑事, 上疏條請蠲予廣儲粟, 分哺以時, 民得飽安, 耕桑如他日。 人比之富公靑州。 明年, 擢咸鏡道觀察使, 興儒敎, 奬武力。 旣改築咸興城, 窮城僻壘, 遍莅躬問, 圖上邊塞形便, 請設茂山府、開甲山吉州間新路、復廢四郡。 上臨筵, 展圖示宰執, 令讀其疏, 歎曰: “才、誠實難及也。” 茂山, 後果設也。 秩旣滿, 命留一年, 益修邊事。 以吏曹參判還朝, 兼同知經筵、備邊司、賑恤廳。 今上新卽位, 宗人怙恩驕次, 公言“終必害于身, 凶于國”。 上不悅, 盡遞諸職。 公奉母歸結城

戊午, 特陞刑曹判書, 用言者還寢, 授漢城左尹。 時尹鑴爲宰臣, 多不法, 許積孼子姦橫甚。 公上疏發斫禁松構屋, 公騙武人妻及驅大妃之庶母折其齒。 有命覈處。 其黨專掩匿欺謾, 出罪, 反以言不實構公, 竄南海, 尋宥還。 庚申, 逆誅, 首召以都承旨, 移副提學, 進兼兩館大提學, 以母憂還鄕。 喪除, 由大司諫擢兵曹判書。 公爲政, 本之以誠壹, 行之有條理; 用法, 嚴而不苛嬈。 嘗稱曰: “惟精也, 可以成天下之務。 故於事專務審其利病, 講問於人人, 而擇其長, 見可而行, 行必有效。” 淸州北路, 旣有異績, 其人竝立生祠。 前後所管諸司, 皆與爲條式, 至今多遵用, 老吏猶能道公事。 及長兵曹, 錢布舊多耗泄, 公盡得吏胥奸偸, 免死而責其償, 擇郞屬任之, 爲立規制句校之。 歲中, 府庫充溢, 至露積不垣。 自丙辰萬科後, 武士淆雜難擇, 公試其身、言、書、判及武技, 錄其可者, 以次甄用。 後多爲名武, 中外翕然稱之。 建募北路精壯, 團作親騎衛, 勸課有方, 卒成驍卒。 甲子, 進拜右議政。 轉左相, 辭遞, 未幾還拜。 公之使金領相壽恒與公約以李敏叙卜相。 及還, 改用他人, 又不言所以。 公恥之, 謝病免。 丁卯, 進拜領議政。 公爲人剛直好義, 而見理明, 自其爲小官, 名爲敢言; 及居相位, 益犯顔論事。 嘗曰: “大臣當以格君心爲先。” 又曰: “士惟成就一箇是而已。” 以故於其所執定, 雖死生、禍福立至於前, 而無有所顧疑。 諸宮家占山澤爲莊, 號爲折受, 所在民甚病。 諸公言不能得, 公請 “以國制職田之數, 有司捐價更之, 而悉罷折受”, 累累力言。 上始咈而終許, 廷臣感歎。 張貴人寵傾宮壼, 宗人黨之, 特被恩眷。 吏判朴公世采以爲言, 上怒罷其職, 群臣震慄。 公求對極言, 引爲戒。 上大怒, 竄公慶興。 擧朝力爭數月, 放還龍仁琶潭。 己巳, 中宮廢, 群小進用。 先是, 上以張氏故, 有憾於淑徽公主, 以語公。 公謂內治主恩, 不宜宣發。 及時, 上罪公前言, 謫江陵。 明年, 放還結城。 甲戌, 中宮復位, 召以上相。 始金春澤韓重爀等潛聚銀詭稱, 與群士大夫通宮禁, 謀復廢妃。 閔黯等詗發之, 方鞠治, 而會上黜等, 召用舊臣。 或言: “此輩, 等所欲殺, 何必爲世充建德報仇? 宜不深竟。” 公以爲 “金淸城庚申之事, 雖曰有功, 本非所宜爲。 私逕一開, 覆轍相尋, 不痛防之, 國必亡”, 上章言: “今日臣民旣以中宮復位爲大慶, 又以殿下光明夬斷, 如日月之更, 無纖毫之翳, 爲大幸。 若謂群不逞一分有力於其間, 其爲聖德之累, 何如也? 鞫其虛實, 夬正王誅, 然後擧措明正, 私逕可杜, 而淸明之治, 庶幾復見矣。” 久之議重爀遠配, 公又言: “請治重爀輩, 爲聖主解中外之疑惑, 爲坤宮明復位之正大, 爲士大夫洗千古之羞辱, 是古人所謂尊朝廷於日月之上者也。 罪止竄配, 不足以釋疑。” 上善之, 而春澤輩深怨之。 張希載, 春宮所生母弟也。 中宮之廢私第, 希載以書通張氏, 語涉中宮, 至是希載就鞠。 上以其書語大臣: “罪當誅。” 時春宮才七齡。 公以謂“希載誅, 則事連張氏張氏危, 則恐春宮不安”。 於是請屈法傅生議, 言於上曰: “聖心旣悟, 名分已定, 從前百事, 今可毋論。 惟中宮有《樛木》之恩於禧嬪禧嬪盡《小星》之禮於中宮, 王世子盡孝於中宮, 如漢章帝之於馬太后宋仁宗之於劉太后, 是臣子區區之望。 而今因希載轉輾不安, 則日後宮闈之間, 亦安保其雍和也?” 上納公言。 而群議譁然攻之, 春澤輩又嗾鄕生交章力詆, 謂公護逆。 公但遜謝不與辨, 累乞退不得。 迹不一日安於朝, 猶日講民憂、政得失。 請遣巡撫使三南, 察海防, 除民疾; 又欲大均賦役以紓民; 請改明經科式, 毋專取口讀, 俾儒生解經旨。 言多異同, 不行。 公爲相, 務奉法無私, 以身先人; 深病黨比, 用捨必循公議。 審刑賞, 嚴體統, 革官司謬制。 尤重民事, 京司有厲民, 雖重臣, 必罪之。 前後視事不滿二年, 當公居位, 上下皆嚴憚之。 嘗議己巳諸臣之罪, 公勉上以躬自厚薄責人之義。 應敎金鎭圭乘機惎之, 謂公歸咎聖躬。 公出郊固免, 已而還拜。 時重爀輩猶不正法, 公又言: “朝廷屢變, 黜陟靡常, 賤人指高位, 如逆旅之傭夫: 遐荒視流竄, 若湘潭之臥龍。 禍難之作, 雖根於黨論; 翻覆之機, 或疑以他逕。 是以鈇鉞亟行, 而紀綱愈不立; 處分一新, 而人心愈益疑。 國家有千古盛擧, 而訛言先已流布。 臣於獄案得其情狀, 所聚之貨, 盡歸酒肉、裘馬之費, 其非爲復位行賂昭昭也。 殿下赫赫照臨, 今爲狐鼠輩所誣如此, 臣誠痛之。” 又請稍疏黨人輕罪曰: “議者言 ‘治黨人不嚴, 畏其報復, 爲他日地’。 噫! 今日廷臣所當致力, 宜在於掃除偏私, 必期無他日可也。 今胡以他日爲必有之事, 曰我則不爲地耶?” 蓋老論仇嫉南人, 脅公論以爲後日計, 公言如此。 上納之。 重爀竟栲死。 丙子, 有蠱于張氏先墓。 公按治家奴與其謀, 而對辭又不白。 衆疑其自蠱而嫁禍於西人, 公亦意其然, 而難處於張嬪, 請毋竟。 言者又群起深持公。 公徑還田廬, 固辭釋位, 自後不復入相府。 已而蠱者乃罪誅家子, 捕誅。 公以誤事引罪, 而上收召不置, 公不應命。 惟上及春宮有疾, 有帶內醫院, 故不得已造朝, 而旋復歸田, 未嘗無故久淹。 公立朝久, 甚見重於君上。 嘗奉命閱南漢兵糧, 遇病, 顯宗命醫來視。 庚申, 以喪歸也, 上命賜喪需、擔軍。 非將相得此, 皆異恩也。 方戊辰之行遣, 上怒公甚, 而嘗語筵臣曰: “九萬剛明正直不撓屈。 予故任以輔相。” 乙亥, 鄕生之詆公, 敎曰: “領相之公忠淸直, 罕有其比。” 一生以洗滌朋比、挽回國勢爲己任, 其勤勤懇懇於筵席、章奏, 實無愧古人。 及還鄕, 賜御詩曰: “體國誠深惟奉法, 憂時力瘁自忘身。” 談者謂知臣莫若君也。 然公於去就, 必裁以義, 尺寸不敢自苟。 其遭讒毁引退, 上所以敦召眷待, 體絶古今, 屢命六卿偕來, 下乃承旨、史官, 累降手札分御膳, 或以親逆爲敎, 至親握手勸留。 而於所不當進, 則不輒起; 於所當辭, 至章數十上, 得請乃已。

辛巳, 怨公者柄用, 持希載事, 請竄公。 上不許曰: “予知其心事久之。” 只配牙山。 蓋迫於臺議也, 尋宥還結城。 甲申, 敍領中樞。 公自戊寅引年乞致仕, 久不許。 丁亥, 上思公特召曰: “欲有面諭。” 公旣至, 申乞益懇。 上恐其去, 固留之曰: “卿聽我留, 予當許卿。” 於是許公致仕, 宣醞加賜食物。 公少留江郊, 轉還琶潭。 公旣老, 而朝廷有大事、大議及隣國情變, 上輒咨焉, 大臣無親疎, 動以書訪之, 須公一言以決。 有識論公以爲: “守正不撓, 旣無愧宋璟司馬光, 而國有危難, 必能爲裴度李綱, 政事、文學猶爲公末餘。” 公家居廉儉, 性好學, 至耋老, 手不去書, 貫通經史, 而務致於實用。 爲文章, 贍蔚典厚, 其疏奏、議論, 必經據典訓, 彬然可觀, 有文集若干卷。 訓誨人不倦, 及門之士百餘人, 昌大先公及崔公奎瑞朴公泰輔旣顯名當世, 其餘成業者衆。 公以辛卯三月十七日卒, 壽八十三。 疾病, 上遣醫頒藥。 訃聞, 下哀詔, 賜棺材, 致祿三年。 五月, 禮葬楊州花蝶洞忠景墓右岡。 夫人東萊鄭氏, 持平女, 擧一男一女: 男䳽鳴, 薦授宗簿主簿。 女適寺正趙泰相。 側室子䳽聲䳽淸䳽貞, 女適李岱坤。 主簿三男: 克寬, 生員: 處寬: 五寬。 女適李昌元李匡誼。 寺正繼子明彬, 都事。 先君受公遺誌之託, 文未就而下世。 主簿語昌大曰: “子宜追成先志。” 義不敢辭, 謹敍其立朝之大節, 而官閱、行治, 不能盡記。

嗚呼! 昔蘇軾張文定公曰: “公自少至老, 未嘗以言徇物, 以色假人。 雖對人主, 必審而後言, 毁譽不動, 得喪若一, 眞孔子所謂以道事君者。 上不求合於人主, 故雖用而不盡; 下不求合於士大夫, 故不悅公者衆。 至言天下偉人, 必以公爲首。 而慶曆以來, 名臣爲人主所敬, 莫如公者。” 昌大於公亦云。 而抑嘗論公有三難焉。 自公之官顯, 朝廷之變換如奕棋然, 柄國者乘人主喜怒, 淫刑以逞快其私怨, 而國受其敗。 公獨深憂之, 輒以 “彼以暴, 吾以仁” 之義, 諷告于上下, 身被人訾笑, 而屠揃之禍, 爲之少息。 孔子曰: “子爲政, 焉用殺?” 公則有焉。 希載之貸死, 出於經法之外, 雖素慕公者, 莫不疑焉, 蒙衆口姍毁, 卒以顚沛而不悔。 豈無以而然哉! 懷獨至之忠, 而爲宗社深憂過計耳。 及有丁酉七月事, 而人始思公爲不可及。《孟子》曰: “有社稷臣者, 以安社稷爲悅。” 公庶幾焉。 至其痛繩陰邪, 必加顯戮而後已, 上以光昭主德, 下以表正士風。 後生小子皆能深恥而諱言之, 其匡世道、淑人心之功, 雖比之古所稱一治可也。 嗚呼, 偉哉! 謹爲銘曰:

聖贊《易》德, 莫尙剛中。 天用錫汝, 俾相我邦。 勇以發忠, 仁以濟公。 文能經國, 武可卽戎。 亦旣登庸, 有猷有爲。 豈無平陂,

惟義與比! 懲姦觸佞, 有諤其言。 婁寘叢棘, 時詘時伸。 枯菀之際, 動晳幾先。 獨觀爲明, 群蒙𥊼焉。 有口嘵嘵, 謂我何營, 我營匪他,

惟宗社寧。 王曰嗚呼! 乃心予同。 爾德罔愆, 爾惟股肱。 自治治人, 爾爲規繩。 遏彼崩流, 爾爲丘陵。 幽竇旣破, 日月貞明。 之綱之紀,

百僚是刑。 跋疐後前, 其卒靡悔。 令聞達尊, 誰敢余侮? 公拜稽首, 臣老誠歸。 聖君曰兪! 禮以終之。 名載府庫, 諡在太常。 王有褒言,

百世耿光。 史官有述, 藏之玄壤。 尙勸有位, 惟直佐王!  <끝>      << 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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