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조부 신공 묘표
외할아버지 신공(辛公)의 휘는 석훈(碩勳)이요, 자는 성수(聖叟)이다. 관향은 영월(寧越)이니, 고려 시대의 대성(大姓)이었다. 우리 왕조에 들어와 휘 희(熹)가 있어 한성판윤을 지냈다. 그의 아들 이(頤)는 문과에 급제하여 충주목사를 지냈으며 유애비(遺愛碑)가 있다.
아들 영귀(永貴)는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판서를 지냈고, 여러 번 지방관(방백)을 거쳐 가는 곳마다 명성과 업적이 많았다. 아들 계(桂)는 전첨을 지냈고 서장관으로 북경에 갔다가 그곳에서 돌아가셨다. 아들 숙량(淑良)은 남원부사를 지냈다. 아들 백수(伯粹)는 문과에 급제하여 경력을 지냈으니, 실로 공의 9대조이시다.
증조의 휘는 낙도(樂道)요, 조부의 휘는 철(澈)이며, 아버지의 휘는 정봉(廷鳳)이다. 어머니는 함평 이씨로 만하(萬夏)의 딸이다.
숙종 병신년에 공께서 태어나셨다. 천성이 청렴하고 올곧으며 자애로워, 평생 세력이나 이익을 좇는 구차한 일은 마음속에 두지 않으셨다.
늘 강개하여 세상과 쉽게 타협하지 않는 뜻을 품었으며, 남을 위해 일을 꾸미는 것을 좋아하여 사람들이 많이 의지하였다. 집안 법도가 엄숙하였는데, 형제 4명 중 공이 장남이시니 여러 동생들이 공을 엄부처럼 공경하였다.
종가의 종형이 일찍 돌아가시고 자식이 없어 종수(從嫂)가 계셨는데, 공의 장남을 양자로 보내 후사를 잇게 하였으니 이는 문중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공께서는 종가에 함부로 왕래하지 않으셨으며, 일 때문에 가시더라도 의관을 정제하고 뜰에 서서 할 말씀만 마치고 곧바로 물러나셨다.
공께서 30여 세에 배필을 잃으시고 슬하에 5남매가 집에 가득하였는데, 재취를 하려던 차였다. 처마 밑에 제비가 새끼 다섯 마리를 먹이며 기르는 것을 보셨는데, 제비 새끼들이 자라 곧 날 것 같았다. 하루는 어미 제비가 어지러이 날며 서로 싸우더니, 며칠 뒤 제비 새끼들이 갑자기 모두 죽었다. 괴이하게 여겨 자세히 살펴보니 모두 입에 가시를 물고 있었다. 틀림없이 어미 제비가 밖에 나갔다가 죽었고, 새로 들어온 어미 제비가 시기하여 죽인 것이었다.
공께서 이를 보고 스스로 반성하며 슬퍼하시어 재취를 하지 않기로 하시고, 10여 년을 홀로 지내며 5남매를 무사히 교육하셨다. 을병년의 대기근 때, 본군에서는 백성을 구제할 방법이 없었는데, 공께서 군수의 측근에서 정성을 다해 힘쓴 덕분에 온 고을 사람들이 모두 살아날 수 있었다.
또한 잘못된 일을 바로잡아 군정이 맑고 평온했으니, 향인들이 지금까지도 칭송하고 있다. 아! 하늘이 수명을 더해주지 않으시고, 또 학문에 힘써 타고난 자질의 아름다움을 채우지도 못하셨으니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그러나 자녀 5남매가 장남은 양어머니를 지극히 효도로 섬겼고, 차남은 강직하고 스스로를 지키는 모습이 공과 닮았으며, 세 딸 모두 부덕(婦德)을 갖추었으니, 또한 공의 어진 덕이 증명된 바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영조 계미년 7월 22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48세였다. 묘는 세거지인 임천 어은동 선영 아래 계좌(癸坐)의 언덕에 있다. 배필은 수원 백씨로 동지 세복(世復)의 딸이며, 묘는 공의 묘소 옆에 합장하였다. 장남 일원(一源)은 (종가로) 출후(出後)하였다. 차남 재원(再源)은 담양 전씨에게 장가들었다.
딸 하나는 풍양 조운경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우리 선인 휘 동욱(東郁)에게 돌아갔으며, 셋째 딸은 무안 박우에게 시집갔다. 재원은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현(賢)이라 하고, 첫째 딸은 한산 이씨에게 시집갔으며(이름은 빠져 있음), 둘째 딸은 제주 고제봉의 후손에게, 셋째 딸은 안동 권수인에게 시집갔으니 풍담(楓潭)의 8대손이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불초한 형제인 나 예환(禮煥)과 의환(義煥)을 낳으셨다. 현은 자식이 없어 일원의 아들 계현(啓賢)의 차남 익남(翼男)을 본종으로 환원시켜 현의 후사로 삼았다.
[부주]
본 묘표는 난국재 이예환(蘭菊齋 李禮煥)이 외조부 신석훈(辛碩勳)의 행적을 기록한 글이다. 이 글은 조선 후기 향촌 사대부 묘표의 전형적 구조를 따르되, 개인 윤리와 사회적 실천을 결합하여 서술한 점이 특징적이다. 특히 핵심은 두 가지이다.
첫째, 사적 윤리의 극단적 실천이다. 제비 우화를 통해 재혼을 단념하고 자녀 양육에 전념한 일화는, 감정적 서사가 아니라 “가정 윤리의 자
기 규율화”로 기능한다.
둘째, 공적 실천으로서의 치민(治民)이다. 대기근 시 군정 보좌로서의 구휼 활동은 사적 덕성이 공적 영역으로 확장되는 구조를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신공의 형상은 “수신(修身) → 제가(齊家) → 치민(治民)”의 유교적 도덕 상승 구조를 완결적으로 구현한 사례로 서술되
고 있다.
국역 > 이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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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譯註]
◇휘(諱) : 이름(휘)
◇자성수(字聖叟) : 자는 성수
◇계출영월(系出寧越) : 영월 신씨 계통
◇승국(勝國) : 고려
◇방백(方伯) : 지방관(관찰사)
◇전첨(典籤) : 관직명
◇서장관(書狀官) : 조선 사신 수행 관원
◇환거(鰥居) : 홀로 지냄(재혼 없이 독거)
◇영실(盈室) : 자녀가 집에 가득함
◇을병대살년(乙丙大殺年) : 흉년·기근의 해(병란/기근 포함)
◇군재(郡宰) : 지방 수령
◇가년(假年) : 하늘이 수명을 더 줌
◇어은동(魚隱洞) : 지명
◇부묘(祔墓) :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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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外祖辛公墓表。
外王父辛公,諱碩勳,字聖叟,系出寧越,勝國大姓。入我朝,有諱熹,漢城判尹。男頤,文科,忠州牧使,有遺愛碑。男永貴,文科,吏曹判書,屢經方伯,所在多聲績。男桂,典籤,以書狀官赴京卒。男淑良,南原府使。男伯粹,文科,經歷,實公九代祖也。曾祖諱樂道。祖諱澈。考諱廷鳳。妣咸平李氏,萬夏女。肅廟丙申某月日,生公。天資淸直慈惠,平生未嘗以勢利苟且之事,經營於心。常有慷慨難合之志,好爲衆集事,人多賴之。家法嚴肅,兄弟四人,公居長。羣弟敬公如嚴父。宗家從兄夭而無子,從嫂在。公長男爲後,非門中不得已事也。公未嘗往宗家,以事往則正衣冠立於庭,言訖卽退。公年三十餘,喪配,五子女盈室,欲再娶之際。堂燕哺五子,呴呴將飛。一日母燕亂飛相鬪,數日後,子燕忽皆死。怪而諦視,則皆口含刺,必是母燕出外死,繼母燕猜殺之。公感傷反己,因止再娶,鰥居十有餘年,五子女無恙,敎育之。當乙丙大殺之年,本郡無以救民,公爲郡宰左右,殫誠竭力,闔境全活。又多繩糾,郡政淸平,鄕人至今傳頌。嗚呼!天不假年,又不能學問以充其生質之美,可勝惜哉。然男女五人,長男事所後母至孝,次男剛直自守,彷彿於公,三女皆有婦德,亦可見懿德有所徵也。英廟癸未七月二十二日卒,享年四十八。墓在世居郡林川魚隱洞先塋下癸坐原。配水原白氏,同知世復女,墓祔公雙兆。長男一源出後。次男再源,娶潭陽田氏。女一適豐壤趙雲耕,二女歸我先人諱東郁,三女適務安朴瑀。再源生一男二女,男曰賢,女適韓山李氏(名缺),次適濟州高霽峯後孫,次適安東權壽仁,楓潭八世孫。先考生不肖兄弟曰禮煥,曰義煥。賢無子,一源男啓賢,以其次男翼男還本宗,爲後於賢。 <끝>
蘭菊齋集卷之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