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9. 04.01 00:57
■ 경주이씨 위인들....
1. 절의지사(節義志士)
경주이씨(慶州李氏)의 가통(家統)에 한특징이 있으니 겸양이 남다르고 처신에 엄격하여 청백(淸白)과 절의(節義)의 가문이었다.
조선조에 청백리(淸白吏) 녹선수는 기록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총218명이 배출되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중 오문의 녹선인은 이항복(李恒福), 이수일(李守一), 이유태(李惟泰), 이경일(李敬一)등은 청백리였으며, 이존오(李存吾) : 高麗末, 杜門諸賢. / 이 수(李 蓚) : 高麗末, 入山節士 / 이 원(李黿) : 燕山君, 戊午士禍 / 이중협(李重協) : 景宗朝, 辛壬士禍 / 이시영(李始榮) : 獨立運動, 殉義節人은 절의로 유명하다.
고려조의 절의지사(節義志士)로는 고려 공민왕 때의 충신 석탄(石灘) 이존오(李存吾)와 역시 고려말의 충신 이수(李蓚)를 들 수가 있다. 석탄공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학문에 힘써 10여세에 12도(徒)에서 공부하고 20세에 문과에 급제, 사한(史翰)으로 있을 때 정몽주(鄭夢周)·정도전(鄭道傳)·이숭인(李崇仁) 등과 학문을 토론했으며 정언에 이르렀을 때에 신돈(辛旽)이 집권하여 횡포를 일삼는데 누구도 감히 나서서 신돈의 방자와 음탕을 나무라지 못하였다.
때에 공이 분연히 나서서 왕에게 글을 올려 신돈을 쳐죽여야 한다고 탄핵의 글을 올렸다가 도리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매우 위급했었는데 이색(李穡) 등의 힘으로 극형을 면하고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고 후에 석탄(石灘)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울분으로 죽었다. 뒤에 왕이 공의 충성을 깨닫고 성균관대사성을 추증했다.
역시 고려말의 충신 이수는 검교정승 송암 세기의 제4자이고 국당 천의 막내동생이다.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사인(舍人)에 이르렀을 때에 고려가 망하므로, 모두 고려를 등지고 신왕조로 발길을 돌리는데 공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節義)를 안고 전라도 함라에 있는 갓점산에 은둔하였다.
공은 그 산속에 서실(書室)을 얽고 거기에서 독서도 하고 지금은 없는 고려사직의 원혼들을 달래며 제향을 지냈다고 한다. 밖에 나온 일이 없으므로 초근(草根) 목피(木皮)로 목숨을 이을 수 밖에 없을 것이지마는 도대체 무엇을 먹고 무엇으로 몸을 가리웠으며 무엇을 덮고 어디에서 잤을까? 세속인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자연의 삶속에서 망국의 한을 달래며 30유여년을 보내다가 표연히 자취를 감추었으니 실로 만고의 충신이 아닐 수가 없다.
공의 자취는 찾을 길이 없어서 뒤에 후손들이 그 산 아래에 단(壇)을 설하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한말(韓末)에 공의 단(壇) 앞에 세운 비의 표면에는 ≪해동수양(海東首陽)≫이라는 표제가 새겨져있다. 세인들은 공이 은둔한 이 산을 백이숙제(伯夷叔齊)가 고사리를 캐먹으며 살았다는 중국의 수양산(首陽山)에 비유한 것이다.
2. 장군(將軍) 및 의병장
경주이문에서는 유달리 무인이 많이 났으나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을 소개하기로 하면 인종~명종간의 명장으로 병사와 포도대장,지돈녕부사를 지낸 몽린(夢麟)을 비롯하여 병사 충무공 수일(守一)과 훈련대장이며 우의정이었던 완(浣) 그리고 삼도수군 통제사 규철(圭徹)을 비롯하여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극복(克福), 윤(潤), 승증(承曾)과 병자호란때의 이억(李億)장군 한말의 의병장들인 규태(圭泰)·규응(圭膺)·상구(相龜)·중국군 육군중장 상정(相定)과 근래의 국방장관이며 육군중장이었던 종찬(鍾贊)·국방장관이었고 재향군인회장이며 육군대장인 상훈(相薰) 등을 들 수가 있다.
3. 학자·문인의 맥
추천할만한 학자로는 고려조의 익재(益齋) 제현(齊賢)·조선조의 천휴당(天休堂) 몽규(夢奎)·초려(草廬) 유태(惟泰)·양와(養窩) 세구(世龜) 구천세필(世弼)을 들수가 있고 문인으로는 고려조의 동암(東庵) 진·송암(松巖) 세기(世基)를 비롯하여 고려의 명상 익재 제현·조선의 충신 천휴당 몽규를 비롯하여 조선의 명상 백사 항복(恒福)·근래의 구국시인 상화(相和)·시조계(時調界)의 영도(永道)와 호우(鎬雨)의 남매에 이르기까지의 문맥(文脈)을 들 수가 있다.
4. 독립운동의 맥
독립운동의 맥은 헤이그만국평화회의의 정사(正使)였고 광복군 정통령(正統領)이었던 보재(溥齋) 상설(相卨)을 비롯하여 6형제 50여명을 이끌고 솔가 망명한 우당(友堂) 회영(會榮)·성재(省齋) 시영(始榮)을 꼽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분들은 만주에 신흥군관학교를 설립하고 3,500여명의 독립군을 양성하여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수천명의 왜적을 섬멸하였고 뒤에 3·1운동을 지휘하였으며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성재공은 재무총장과 법무총장을 맡아 임시정부 수호에 진력하다가 광복후에 5형제를 모두 이국(異國)의 땅에 묻고 홀로 돌아와서 대한민국 수립에 기여하고 초대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 밖에도 규완(圭完)·규학(圭鶴)·봉우(鳳雨)·일범(一凡)·항발(恒發) 등 50여인이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5. 종교계의 거인들
일찍이 고려 인종 때에 도교(道敎)의 도사(道士)인 중약(仲若)은 임금을 달래어 궁중에 복덕궁(福德宮)을 신설하게 하여 왕실에 도교(道敎)를 받아들이게 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지만 그의 법을 중국의 송나라에 전한 최초의 거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 천주교의 전파에 공헌한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인’ 벽(檗)을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정조 3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맹자봉 기슭 천진암(天眞庵)에서 권철신·일신(權哲身·日身)형제, 정약전·약종·약용(丁若銓·若鍾·若鏞) 3형제, 이승훈(李承熏)등 10여명을 상대로 그는 처음으로 학문의 대상으로서가 아닌 믿음으로써 서교(西敎, 天主敎)를 강론한다.
이것이 우리 천주교, 천주교회의 출발로 인식되고 있다. 그는 이 천진암(天眞庵)강학회를 시발로 1785년 숨질 때까지 7년 동안 고향과 서울을 오가며 신앙을 전파했다. 1785년 1월 그는 서울 명례(明禮)방(현 明洞)에 사는 중인(中人) 김범우(金範寓)의 집에서 권철신·일신형제, 정약전·약종·약용 3형제 등 신자들과 예배를 보다 붙잡혔다.
그의 아버지는 사학(邪學)으로부터 아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타이르고 야단치고 온갖 수단을 동원했으나 소용이 없자 목을 매 자살을 기도하는 소동까지 벌였다. 이벽(李檗)은 신앙과 효도의 갈림길에서 번민하던 끝에 문을 닫고 들어 앉아 식음을 끊었다.
기도와 독서만으로 버티기 10여일 만에 탈진한 그는 쥐통병에 걸려 죽었다고 한다. 최근 천주교에서는 잊혀진 그의 묘소를 포천(抱川)에서 찾아내 발굴, 천진암(天眞庵) 아래로 이장하고 기념비를 세웠다. 칼날 아래의 순교보다도 더 거룩한 순교라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그리고 대종교(大倧敎)의 맥을 이은 규채(圭彩)와 광복 후까지 대종교의 대표로 맥을 잇고 교리를 정리하는데 심혈을 기울인 성재 시영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불교계에서는 근년에 명성을 떨친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정 성철(性澈)이 있다.
6. 궁중악의 전통
7. 화가·영화감독·바둑계의 왕자
역사상 많은 화가와 서예가가 있었을 것이지만, 몇 분만 소개하기로 하겠다. 우선 연산군에게 불의의 화를 입은 종준(宗準)을 아마추어 화가의 초기인물로 보고 싶다. 그 다음으로는 선조 때의 해룡(海龍)이 글씨에 뛰어났으며 중국의 남종화(南宗畵)가 지니고 있는 문인화(文人畵)의 기법을 최초로 조선에 도입한 분으로 하곤(夏坤)을 들 수가 있다.
공은 저 유명한 좌의정 경억(慶億)의 손자이고 대제학 인엽(寅燁)의 큰 아들이기도 하다. 그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고금의 그림을 평한 평론집『두타초(頭陀草)』가 전한다. 다음으로는 헌종~순조대의 희수(喜秀)가 그림과 글씨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이런 가운데 철종~고종대에 글씨를 가업(家業)으로 하는 집안이 나타났다. 지금 덕수궁(德壽宮)의 정문에 [대한문(大韓門)]이라는 현판(懸板)을 경주이씨 문중의 종태(鍾泰)가 썼다. 비록 그림이나 글씨는 아니지만 역시 시각예술(視覺藝術)의 하나인 영화촬영기술의 개척자이며 최초의 감독이었던 명우(明雨)를 꼽지 않을 수가 없고 그 다음으로는 그의 형이었던 필우(弼雨)가 최초의 영화촬영기사였다.
또 같은 시기에 작가와 영화감독을 겸했던 규환(圭煥)도 한국영화의 초기 공로자이다. 그리고 우리가 빼놓아서는 안 될 국보적 존재인 바둑의 황제 창호(昌鎬)가 있다. 그는 10대의 어린 나이로 한국 뿐 아니라 동양의 바둑계를 석권했으며 나아가 세계에서 무적의 패자(覇者)로 우뚝 선 것이다.
심수 이정근(조선화가)"설경산수도"(국립중앙박물관),미법산수도(국립중앙박물관)
이상화 1923년 《백조(白潮)》지에 발표.《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라. 독립운동의 선구자
1.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
이상설(相卨)은 서기 1870년~1917에 출생하였는 바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溥齋), 충북 진천(鎭川) 출신으로 행우(行雨)의 장남이며 7세 때 용우(龍雨)에게 입양되었다. 이범세(李範世)·여규형(呂圭亨)·이회영(李會榮)·이시영(李始榮) 등과 신학문을 배웠다.
헐버트(Hulbert, H.B.)와도 친교를 맺어 영어·불어를 익히고 수학·물리·화학·경제학·국제법 등을 공부하였다. 고종 31년(서기 1894) 문과에 급제하고 이이(李珥)를 조술(祖述)할만한 학자라는 평을 받았다. 2년 후에 성균관교수 겸 관장·한성사범학교 교관·탁지부 재무관 등을 거쳐서 궁내부 특진관에 승진하였다.
1904년 6월 박승봉(朴勝鳳)과 연명으로 일본인의 황무지개척권의 요구를 거부해야 한다는 상소 곧 [일인요구 전국 황무지 개척권 불가소(日人要求 全國 荒蕪地 開拓權 不可疏)]를 올렸는데 고종이 상소를 받아들여 일인의 요구를 물리쳤다.
이해 8월 보안회의 후신인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의 회장에 추대되었다. 1905년 학부협판과 법부협판에 보임되고 11월초에 의정부 참찬(議政府 參贊)에 올랐다. 1905년 11월에 이완용(李完用)·박제순(朴齊純) 등 5적의 찬성으로 을사조약을 체결하려할 때 공은 대신회의의 실무책임자였으므로 회의에 참석하여 조약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일본의 철저한 제지로 끝내 들어가지 못하였다.
을사조약은 강제로 체결되었으나 고종이 인준하지 않았음을 알고 공은 5적을 즉시 처단하고 조약을 파기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나아가서 조병세(趙秉世)·민영환(閔泳煥)·심상훈(沈相薰) 등의 원로대신을 소두(疏頭)로 하는 백관반대상소(百官反對上疏)와 복합상소(伏閤上疏)를 올리도록 주선하였다. 11월말에 민영환이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종로로 나와서 울면서 “민족의 궐기와 결사항일투쟁”을 호소한 다음에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1906년 봄에 이동녕(李東寧)·정순만(鄭淳萬) 등과 북간도 용정(龍井)으로 망명하여 8월에 항일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숙장(塾長)이 되었다. 여기에서 이동녕 등과 함께 역사·지리·수학·국제법·정치학 등의 신학문과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1907년 6월에 고종의 밀지(密旨)를 받고 네델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파되었다. 이때에 공이 정사(正使)였고 부사(副使)로는 이준(李儁)과 이위종(李瑋鍾)이 보좌했다. 일행은 현장에 도착하여
‘국권의 회복’을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일본의 간악한 선동에 의하여 회의에 참석조차 거부되는 참경에 이르렀으나 공은 대한제국의 현황과 주장을 밝힌 성명서 ≪공고사(控告詞)≫를 헤이그에 모인 세계 각국의 대표에게 보내는 등 국권회복에 있는 힘을 다하였다.
일행 가운데 이준은 불행하게도 숙환(宿患)으로 현지에서 죽어 장례를 치뤄주었다. 그뒤에 헐버트·이위종·송헌주(宋憲澍)·윤병구(尹炳球) 등을 대동하고 영국-프랑스-독일-미국-러시아 등지를 순방하면서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대한제국의 독립만이 동양평화를 보장하는 길이라는 것을 역설하였고 더불어 대한제국의 [영세중립]을 제의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애국활동을 문제삼은 일제는 그들의 주구(走狗)들을 시켜서 국내에서 공을 궐석재판에 회부하여 [사형]을 선고하였다. 1908년에는 1년 동안 미국에 머물면서 미국의 조야에 독립을 지원해 줄 것을 호소하는 한편 각지에 산재해 있는 교포들을 규합하여 [조국의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끌어올리는데 온 정성을 다하였다.
그러한 결실로서는 동년 8월에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열린 [애국동지대표자대회]를 꼽을 수가 있고 이듬해 4월에 열린 [국민회 제1회 이사회]를 들 수가 있다. 이때에 공과 함께 재미교포의 애국운동을 위한 조직화사업에 동참한 대표적인 인물은 이승만(李承晩)과 국민회 총회장 최정익(崔正益)이었다.
다시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공은 이승희(李承熙)·김학만(金學萬)·정순만 등과 더불어 항카오(興凱湖) 남쪽 봉밀산(蜂密山) 부근의 땅 45만방(方)을 구입하여 한인 교포 100여 가구를 이주시키고 “한흥동(韓興洞)”이라고 명명하여 최초의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하였다.
이어서 국내외의 의병들을 통합하여 보다 강력한 항일전선을 구축하고자 1910년 6월에 유인석(柳麟錫)·이범윤(李範允)·이남기(李南基) 등과 회동하고 연해주 방면에 모인 의병을 통합하여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였다. 7월에는 전 군수 서상진(徐相津)을 국내에 보내어 고종에게 13도의군의 편성을 아뢰고 군자금을 내려줄 것과 망명정부의 수립을 추진하겠다는 상소문을 올렸다.
8월에 나라가 망하자 연해주와 간도 등지의 교포를 규합하여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였다. 9월에 일본의 음모에 넘어간 러시아가 공의 일행을 연해주의 니콜리스크로 추방하였기 때문에 함께 쫓겨 갔다가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1911년 한민장(韓民長)·김학만·이종호(李鍾浩)·최재형(崔在亨) 등과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고 회장에 취임하여 ≪권업신문≫의 주간을 함께 맡기도 했다.
1913년 이동휘·김립(金立)·이종호·정재관(鄭在寬) 등과 나자구(羅子溝)에 [사관학교]를 세워 광복군의 장교를 양성하였다. 이듬해에 이동휘·이동녕·정재관 등과 중국과 러시아령 안에서 동지들을 모두 규합하여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를 수립하고 정통령(正統領)에 추대되었다.
1915년 3월 중국 상해(上海) 영국조계(英國租界)에서 박은식(朴殷植)·신규식(申圭植)·조성환(曺成煥)·유동열(柳東說)·유홍렬(劉鴻烈)·이춘일(李春日) 등과 함께 [신한혁명단(新韓革命團)]을 조직하고 본부장에 취임하였다. 그 뒤에도 조국광복을 위하여 동분서주하다가 1917년 3월 니콜리스크에서 48세의 한참 일할 나이에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구국(救國)의 일생’을 마감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2.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이회영(1867년~1932)은 서울 출신으로 호는 우당, 좌찬성 유승(裕承)과 정경부인 동래정씨와의 사이에 7남 중 4남으로 태어났다.
1906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갑(李甲)·전덕기(全德基)·양기탁(梁起鐸)·이동녕(李東寧)·신채호(申采浩)·안창호(安昌浩) 등과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중앙위원으로 정치·경제·교육·문화 등의 분야를 담당하고 만주에 광복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하기로 협의한 다음 간도 용정(龍井)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이상설(李相卨)을 숙장(塾長)으로 선임하여 교육을 시행토록 하였으나 1907년에 이상설이 네델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정사로 파견되었으므로 여준(呂準)을 파견하여 교무행정을 맡도록 조치했다.
이듬해에 보재(溥齋. 상설의 호)가 열강을 역방하면서 주권회복의 활동을 하고 돌아오자 공이 만주로 찾아가서 앞으로의 진로를 숙의하였는데, 장차의 구국활동은 분담하기로 합의하고 국내활동은 공이 맡고 국외활동은 보재가 담당하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공은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문제는 교육의 진흥이라” 고 단언하고 동지들을 각 학교에 파견하여 민족의식교육에 힘쓰도록 독려하고 공도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의 학감으로 취임하여 민족의 각성을 축구하는 정신운동에 앞장섰다.
1909년 봄에 양기탁의 집에서 김구(金九)·이동녕·주진수(朱鎭洙)·안태국(安泰國)·이승훈(李昇薰) 등과 비밀리에 신민회간부회의를 소집하고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로 합의하고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를 후보지로 결정하였다.
1910년에 나라가 망하자 6형제 전가족이 만주로 솔가 망명하여 황무지를 개간하기 시작하였다. 이듬해에 교민자치기관으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1912년에 독립군지도자양성을 목적으로 신흥강습소를 세웠는데 이것이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전신이었다.
1918년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자 온 민족이 고무되었고 공도 오세창(吳世昌)·한용운(韓龍雲)·이상재(李商在) 등과 비밀리에 회동하고 고종의 국외망명을 계획하고 시종(侍從) 이교영(李喬永)을 통하여 고종에게 상주하여 고종의 재가를 얻었으나 얼마 후에 고종이 갑자기 승하하시니 모든 계획이 허사가 되고 말았다.
1919년 2월에 북경의 공의 자택에서 공과 이시영·이동녕·조성환·이광(李光)과 함께 회동하고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한 다음 국내외에 이 소식을 알리기로 하였다. 3·1운동 직후 본국에서 민족대표로 파견된 여운형(呂運亨)·현순(玄楯)과 북경에 있던 이시영·이동녕·조성환·이광 등과 함께 상해로 내려가서 임시정부를 수립하는데 참여했으나 동지들끼리 의견차이로 싸우는 것을 보고 북경으로 돌아와서 항일투쟁을 계속하고, 1924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을 조직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만주와 중국에 있던 동지들이 상해로 집결하여 조직한 [항일구국연맹(抗日救國聯盟)]의 의장에 추대된다. 1932년 상해사변이 일어나자 항일구국연맹은 3대 강령
1) 일본군기관과 수송기관을 파괴할 것.
2) 일본의 요인 및 친일파를 숙청할 것.
3) 일본의 외교기관을 폭파할 것을 발표하고, 중국국민당을 찾아가서 자금과 무기의 지원 약속을 받아냈다.
그해 11월 만주에 연락 근거지를 확보하고 지하공작망의 구축과 주만일본군사령관의 암살을 결행할 목적으로 대련(大連)으로 가는 기
차에서 일본경찰에게 잡혀 잔혹한 고문 끝에 여순감옥에서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3.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 - 초대 부통령.
[생졸년] 1869년 12월 3일, 서울 ~ 1953년 4월 17일
선생은 이 땅의 유명한 구국의 명신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10대손이다. 아시는 바와 같이 백사(白沙) 선생은 임진왜란 때에 다섯 번이나 병조판서를 맡으면서 끝까지 이 땅에서 왜적(倭賊)을 몰아내고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분으로서 임진난(壬辰亂1592년)과 정유재란(丁酉再亂,1593년)의 6년에 걸친 전쟁이 끝나고 한성(漢城)으로 환도(還都)한 뒤에 선조대왕께서 “종사(宗社)가 한성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참으로 모든 대신들이 한 몸이 되어 애쓴 공로에 의함이지마는, 반드시 그 공로의 순위를 따지기로 한다면 그 첫 번째의 공훈은 부득불 경(卿)에게 돌아가지 않을 수가 없다. (宗社還于舊都只是賴諸卿力爾諸卿誠同功一體然必欲論首功不得不歸之卿耳)”라고 말씀하시던 바로 그분이다.
백사공의 가문은 그 유례가 없을 만큼 번창하여 10대손인 성재(省齋) 선생에 이르기까지 부통령 1인, 영상(領相) 6인, 그리고 3인의 문형(文衡)을 배출한 명문이다. 성재선생은 우찬성(右贊成) 유승(裕承) 공과 동래정 씨(東來鄭氏) 사이에서 7형제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초취(初娶) 부인은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의 따님이었으나 일찍이 사별하셨고 재취 부인도 만주의 독립투쟁 중에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17세에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 출사(出仕)하여 2년 뒤인 19세에 형조좌랑이 되었으며 23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한 다음 요직을 거쳐 26세에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 정 3품)에 이르고 을미년(乙未年. 1895)에 왕명으로 청일전쟁의 ‘관전사(觀戰使)’가 되어 요동반도(遼東半島)와 여순(旅順), 대련(大連) 등 전투현장을 시찰하였다.
38세에 엄친의 별세(別世)로 거상(居喪) 중에 평안남도 관찰사(平安南道觀察使)에 임명되고 이듬해에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그다음 해에 한성재판소장, 고등법원판사에 이르렀으며 종 2품 태극팔괘장(太極八卦章)을 받았다.
을사늑약(乙巳勒約, 1905)이 체결되자 나라의 위기를 직감한 우국지사들이 비밀리에 모임을 가졌었는데, 그 주요 멤버는 선생을 위시하여 이회영(李會榮, 선생의 넷째형), 전덕기(全德基), 이동녕(李東寧), 양기탁(梁起鐸) 등이었고 서울의 상동(尙洞) 공옥학교(攻玉學校)에서 만나 나라의 장래에 대하여 숙의(熟議)하였다.
헤이그 정사로 이상설(李相卨) 선생을 파견할 것을 건의한 것도 이 모임이었고 일본의 노골적인 박해를 피하여 해외로 나가서 조직적인 항일투쟁을 하기로 결의한 것도 이 모임이었다. 드디어 이회영, 이동녕, 장우순(張祐淳) 등 세분이 경술년(庚戌年. 1910) 봄에 남만주를 답사하고 독립운동의 활동무대로 안동(安東, 오늘날 중국 丹東의 옛 지명), 환인(桓仁), 유하(柳河), 통화(通化)를 지정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이해 8월 29일에 《한일합방(韓日合邦)》으로 나라가 망하니 이분들의 예측이 적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라가 넘어가게 되니 한 나라의 진신(縉紳. 고관)이라는 사람들의 추태가 가관이었다. 어떤 부류는 금품에 매수되어 함구하거나 또는 작위(爵位)를 받고 매국(賣國)에 동조하였으며 이른바 유림(儒林)의 논객(論客)이라는 부류들도 모두 이런저런 이유로 적에게 빌붙거나 은둔하는 등 조야가 모두 패배주의로 기울 때에 우당선생과 성재선생의 6형제는 전 가족을 분연히 솔가(率家)하여 만주로 망명한 다음 구국투쟁에 목숨을 바치기로 결의하였던 것이다.
나라가 망하던 해 12월에 전 가족 40여 명을 6~7조로 나누어 용산, 남대문, 장단(長湍) 등의 기차역에서 차례로 차를 태우고 만주로 떠났다. 신의주에 도착했으나 일본경찰의 검색이 심하므로 한밤중에 얼어붙은 압록강을 썰매를 타고 건너 안동(安東, 지금의 중국 단동)에서 며칠 쉬고 다시 환인(桓仁)을 거쳐 유하(柳河, 오늘날 중국 통화 시의 행정구역)에 도착하여 비로소 짐을 풀었다.
누구 하나 반기는 이 없는 타국, 살을 에이는 만주벌판에 정착한 지 2년 만에 어렵사리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敎)》를 설립하였는데, 이해에 선생의 둘째 형 석영[石榮. 고종 때의 영의정 이유원(李裕元)에게 입양됨] 공이 1만여 석의 가재(家財)를 방매(放賣)하여 가지고 오니 그 자금으로 길림성(吉林省)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에 넓은 대지를 새로 매입하고 현대적인 시설을 갖춘 무관학교를 세웠으며 주변의 3~4 곳에 분교(分校)를 설치하여 10여 년 동안이나 인재양성을 하게 되니 만주 일대에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3,000여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그러자 일본의《대판매일신문(大阪每日新聞)》이 선생을 일러 “무관(無冠)의 제왕(帝王)”이라고 추겨 세운 뒤에 “만주 일대의 살인강도의 두령”이라고 대서특필하기에 이른 것이다. 홍범도(洪範圖)의 지휘 아래 왜군 100여 명을 사살한《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와 김좌진(金佐鎭), 이범석(李範奭)의 통솔로 수 천명의 왜군을 섬멸한《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가 신흥무관학교 출신에 의한 대첩(大捷)이었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기미년(己未年,1919) 1월에 고종황제가 독시(毒弑)되었다는 소식에 전 민족이 통곡하고 있는데, 마침 미국 대통령 윌슨(Woodrow Wilson, 제28대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를 주창하였다는 외신(外信)을 접한 선생은 “이 기회에 국내외의 동포들이 ‘독립, 자존’을 외치며 떨쳐 일어나도록 해야겠다.”라고 생각하고 북경(北京)에 있는 중형(이회영)의 집에서 이회영, 이동녕, 조성환(曺成煥), 이광(李光) 등과 함께 3·1 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국내외에 알렸으며 얼마 뒤에 본국에서 민족대표로 파견된 여운형(呂運亨), 현순(玄楯)을 이끌고 북경의 이회영, 이동녕, 조성환, 이광 등과 함께 상해로 내려가서 임시정부(臨時政府)를 창설하고 법무총장과 재무총장, 의정원장에 추대되었다.
이때의 임시정부 조직과정에서 지출된 모든 경비가, 고종황제께서 시해되기 전에 비밀리에 이회영선생에게 하사하신 5만 원 중에서 지출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무인년(戊寅年. 1938)에 장개석정권(蔣介石政權)이 중경(重慶)으로 옮기자 임시정부도 함께 이사하게 되어 선생은 이때부터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임시정부의 법무총장과 재무총장을 번갈아 맡으면서 임시정부의 명맥유지에 진력하였다.
이와 같이 독립, 구국투쟁에 여념이 없던 계유년(癸酉年. 1933) 여름에 우연히 들린 서점에서 황염배(黃炎培)의《조선(朝鮮)》이라는 신간(新刊)을 보고 거기에 쓰인, “조선족은 미개(未開)한 종족인데 일본이 지배하게 되면서 일본의 교화(敎化)에 의하여 비로소 문명한 민족이 되었다”는 내용을 읽고 어찌 비분강개하지 않으셨겠는가.
이런 연유로 선생은 항일투쟁의 와중인데도 1년 가까이 항주(杭州, 중국 항저우로 저장성의 수도)의 여관에서 한민족(韓民族)을 모독한 황염배의 글을 통박(痛駁)하고 더불어 세계를 향하여 <한민족의 위대성>을 펼쳐 보임으로써 한민족의 긍지(矜持)를 제고시키고자 피맺힌 글《박황염배지한 사관(駁黃炎培之韓史觀) - 감시만어(感時漫語)》이라는 저서를 집필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을유년(乙酉年. 1945)에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함으로써 한민족은 36년의 노예생활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해방은 되었으나 그것이 남의 힘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뜻하지 않았던 불행한 사태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들을 든다면, 우선 국토의 분단이 그 첫 번째이고 이로 인하여 야기된 민족의 분열과 갈등 그리고 골육상쟁의 참상을 지적할 수가 있으며 그 두 번째의 커다란 비극이 점령군인 미군사령부에서《임시정부》라는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통고였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기쁨보다는 조국으로부터 날아오는 실망스러운 소식에 탈진이 된 채 귀국 길에 올랐는데, 마침 장개석(蔣介石) 총통 부부가 비행기를 주선해 주고 몸소 나와서 일일이 악수를 나누면서 환송하는 가운데 선생도 이해 겨울에 중경을 떠나 상해에 닿았고 여기서부터는 미군이 제공한 비행기로 환국했으나 점령군의 요구대로 임시정부는 해체되고 정부요인들은 ‘개인의 자격’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선생은 해방된 고국에 돌아와서 성균관총재에 추대되고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위원장에 피선되었다. 그러나 지도층이라는 자들이 사분오열로 나뉘어 싸우는 것을 보고 1947년 9월에 대종교(大倧敎)의 대표직만 빼놓고 일체의 공직에서 탈퇴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선생이 80세(1949)가 되던 1월에 ‘5.10 총선’을 지지하는 성명을 냈고, 3월에 미 군정장관 존 리드 하지(John Reed Hodge)의 방문을 받고 한국이 처한 현실과 장래에 대하여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었으며, 7월 3일에는 국회 본회의에 나아가서 198명의 민의원에게 “국호(國號)를《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해야한다”고 강조하고 그 필연성을 역사적 사실을 들어 역설하였다.
1948년 7월 12일 제헌헌법의 성안이 완성되었고, 16일 정부조직법이 가결되면서 다음날 17일 제헌헌법이 공포되었다. 그리고 20일에는 대망의 정부통령선거가 실시되었는데,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선생이 당선되었는바 득표수는 132표였다.
선생은 부통령에 당선된 뒤에 대통령인 이승만에게 “대통령선서식은 이미 취임식장에서 경과하였으나 국조단군(國祖檀君)께 드리는 경봉(敬奉)의 절차가 없을 수는 없지 않소”라고 하여 단군성전(檀君聖典)에 고유(告由)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 일은 비록 조그마한 사건 같이 보이지만 장차 한민족(韓民族)의 역사를 바로 세울 때에 중요한 기맥(起脈)의 역할이 되기 때문에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면서 선생의 민족적 정통성에 대한 집념을 확인할 수 있는 단면으로 이해된다.
선생은 1951년 5월 9일 이승만의 독재정치에 반대하여 부통령직을 사퇴하기로 결심하고 국회에 사표를 제출함과 동시에 저 유명한《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국회에서는 2일 후에 만장일치로 사표를 반려했으나 13일에 다시 제출하므로 할 수 없이 수리하였다.
이로부터 1년 후에 선생은 이승만 독재정권을 반대하는 민주세력과 국민의 여망을 거부할 수 없어서 대통령 출마를 결심하고 대국민성명을 발표한다. 1952년 7월 27일에 발표한 성명서에서 선생은, “이제 내가 목적으로 하고 실현하고자 하는 것은 다만 하나입니다.
그것은 특권정치를 부인하고 민주정치를 확립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여 독재, 부패정권 타도와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의지가 여실히 드러나 있었으므로 언론도 ‘이 이상 4년 더 기다릴 수 없다’는 선생의 선거 슬로건을 대서특필하여 독재와 부패에 시달리는 국민에게 한 가닥의 꿈을 안겨주었으나 이승만 일파의 공작에 의하여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만다.
선생은 85세 되시던 1953년 4월 15일 새벽 2시경에 부산 동래(東萊) 온천의 우사(寓舍)에서 영면하셨다. 장례는 전 국민의 애도 속에서 국민장으로 치러졌고 명예위원장에 부통령 함태영(咸台永), 위원장에 민의원의장 신익희(申翼熙), 부위원장에 대법원장 김병로(金炳魯), 국무총리서리 백두진(白斗鎭) 등 국무위원 전원과 각계의 유지가 모두 참예하였다.
선생은 일생을 화랑의 ‘세속 5계(世俗五戒)’를 애송(愛誦)했으며 항상 말씀하시기를, “공직에 종사하는 자는, 공로는 남에게 돌리고(功歸于人), 허물은 내가 받는다(歸咎于身)는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초취부인을 잃고 만주로 망명 후에 얼마 있지 않아서 또 상처를 당한 42세 이후에는 다시는 여인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이 지구상에 망한 나라도 많고 애국자도 헤아릴 수 없이 만치만 6형제 40여 명의 전 가족이 솔가(率家)하여 구국투쟁에 몸을 던진 사례가 과연 있었던가?. 1만여 석의 가산을 방매하여 무관학교를 짓고 독립군을 직접 길러냈으며 모진 고난 속에 시달리던 애국자들을 보살피면서 만주에서의 항일투쟁도, 중국에서의 임시정부도 모두 선생과 우당선생을 비롯한 6형 제분들의 도움에 의하여 부지해 나갔던 것이니 그 쓰라렸던 고난의 길, 36년의 피맺힌 세월을 누가 있어 선생과 우당선생 그리고 나머지 4형 제분들과 그 가족의 혈성(血誠)에 견줄 수가 있을 것인가?.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통적 표상이라고 할만하다.
마. 호암(湖巖) 이병철(李秉喆)의 사업보국(事業報國)
삼성(三星) 그룹회장
호암 이병철 선생은 1938년 일제치하의 암흑기에 사업에 투신, 한국최고의 기업인 삼성을 창업하여 성장시킨 한국 기업인의 대명사이다. 또한 당시 불모의 한국경제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앞서가는 경영인으로서 국가경제발전을 선도해온 재계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사업보국, 인재제일, 합리추구로 대변되는 철학을 가진 경영자로 가시적 업적에 못지 않게 신념과 경륜을 가진, 경영의 여러 분야에 걸쳐 원칙을 제시하고 또 일관된 실천을 보여 줌으로써 많은 교훈을 남겼다. 선생은 1910년 2월12일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서 부친 이찬우 공과 모친 안동 권씨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는 선비의 집안으로 경제적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이병철 선생은 강직한 가풍 속에서 비교적 유복한 소년시절을 보냈다. 선생은 다섯 살 때부터 조부인 문산 이홍석 공이 세운 서당 문산정에 다니며 한학을 공부했고, 열한 살 되던 해에 진주에 있는 지수보통학교에 편입, 이듬해에는 서울의 수송보통학교로 옮겨 수학했다.
그 후 중동중학교에서 신학문을 공부했으며, 1926년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의 후손 박두울 여사와 결혼하였다. 결혼 후에도 학업에 전념하던 선생은 1930년 4월 일본으로 유학하여 와세다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였다. 그 무렵 세계적인 대공황의 소용돌이 속에서 극심한 경제혼란이 빚어 낸 사회상을 목격할 수 있었던 이병철 선생은 느끼고 생각한 바가 많아 동경의 유학생활을 중도에서 그만두고 귀국하였다.
귀국한 이병철 선생은 몇 년 동안 깊은 사색과 구상 끝에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민족경제의 건설이 가장 시급한 과제라는 결론을 내리고 사업에 투신하기로 결정했다. 1938년 3월1일 대구에 삼성상회를 설립하여 중국과 만주 등을 상대로 무역업을 시작했다.
삼성상회는 무역업 외에도 국수 제조업으로 내실을 다지면서 성장가도를 달렸고 삼성상회의 성공에 힘입어 1939년 조선양조를 인수했다. 자본금 3만원으로 창립된 삼성상회를 이전의 사업경험을 살려 단기간에 급성장시켰고, 삼성상회가 바로 오늘날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삼성의 주춧돌이 된 것이다.
기업경영의 비범한 능력을 발휘했던 선생은 개화기의 혼돈과 일제치하의 태평양전쟁, 한국동란 등 민족의 대수난을 겪으면서도 사업보국의 염원은 한결 같았다. 전란으로 폐허가 된 황량한 땅에 빈손으로 피난하여 부산에서 제일제당을, 대구에서 제일모직을 세워 그 시대에 이미 수입대체산업의 효시를 이루었다.
이들은 최고의 생산시설을 갖추고 새로운 경영기법을 시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기업이었다. 평소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사명에 관해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던 선생은 1961년 한국의 대표적인 경영인들이 모두 참여하는 한국경제인협회를 발의했고 초대회장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인 공직을 맡았다.
이때 비로소 우리나라는 경제부흥의 기운을 찾게 되었고 중요한 경제정책들이 수립되는가 하면 모든 경제인들의 창의력과 추진력이 발휘되어 5천년 민족사의 숙원인 빈곤추방의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농업의 자급자족을 통한 민생안정의 방안을 구상했던 이병철 선생은 1967년세계최대의 단일비료생산시설인 한국비료공장을 세워 오랜 숙원을 이루었다.
또한 중앙 매스컴을 설립해 신문, 방송, 출판을 통해 한국언론사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언론문화발전의 획기적인 계기를 만들었으며, 동양최대의 사립 호암미술관을 세워 후세들에게 우리의 전통문화유산에 대한 긍지를 심어주는 한편, 삼성미술문화재단을 통한 도의문화진작과 예술문화 창달에도 정성을 쏟았다.
선생의 탁월한 경영능력과 미래를 통찰하는 선견력, 강인한 지도력은 우리 시대 최첨단의 개척분야인 유전공학과 우주항공산업에서도 빛을 내기 시작해 후세들에게 미래의 꿈과 무한번영의 교훈을 줄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든 위업들을 남기고 선생은 1987년 11월19일 오후5시 향년78세로 영면하였다.
선생의 공을 기려 대한민국 정부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일본 정부는 훈일등서보훈장을 추서하였다. 호암 이병철 선생의 열정과 혼이 담긴 삼성은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三男인 이건희(李健熙)회장이 경영을 맡아 새로운 사업과 경영방식을 개척하여 우리나라 총수출의 20%, 시가총액의 27%를 차지하는 한국의 대표기업으로 발전시켰다.
나아가 이건희 회장은 첨단기술을 바탕으로 세계일등 제품을 개발하여 삼성을 세계적인 기업의 반열에 올려놓을 뿐만 아니라 사회공헌사업에도 힘을 쏟아 국민들로부터 사랑받는 기업으로 도약하고 있다.
이명박 李明博(출생 : 1941년 12월 19일~)
17대 대한민국 대통령.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연세대학교 언론홍보대학원, 수상 : 대한민국 50년의 50대 인물(조선일보,1998), 20세기 한국을 빛낸 30대 기업인(전경련,1999) ,경력 : 제17대 대한민국 대통령(2008), 제32대 서울시 시장(2002), 제15, 14대 국회의원, 동아시아연구원 이사장(1994), 인천제철 대표이사 사장, 회장 겸임(1978), 현대건설 대표이사 사장(1977) ,저서 : 청계천은 미래로 흐른다(2005), 신화는 없다(2005), 절망이라지만 나는 희망이 보인다(2002)
생년월일 1941.12.19 (양력) ,본적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덕성리 537 ,본관 경주 ,종교 기독교
혈액형 B형 ,자녀 1남 3녀 ,신장/체중/시력 173cm / 70kg / 좌 1.0 우 1.0
존경인물 안창호, 간디, 잭 웰치 /좌우명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가훈 정직/취미 테니스, 수영
결혼일 1970.12.19 /애창곡 사랑이여(유심초), 아침이슬(양희은) /좋아하는 가수 조용필, 보아, 비
/좋아하는 배우 안성기, 장동건 / 감명깊은영화 오아시스, 집으로, 캐스트 어웨이, 벤허
1954 포항 영흥초등학교 졸업
1957 포항중학교 졸업
1960 동지상업고등학교(야간) 졸업
1965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1998 한국체육대학교 명예이학박사
1999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객원연구원
2004 서강대학교 명예경영학박사
2004 카자흐스탄 국립유라시아대학교 명예박사
2005 몽골국립대학교 명예경제학박사
2005 국립목포대학교 명예경제학박사
1965 현대건설 입사 (공채)
1977~1988 현대건설 대표이사 사장
1978~1981 인천제철 대표이사 사장 겸임
1978 한국도시개발(現 현대산업개발) 대표이사 사장 겸임
1978 한국철강협회 부회장
1980 해외건설협회 업계대표 부회장
-한국원자력산업회의 업계대표 부회장
1981~1992 대한수영연맹 회장-대한알루미늄 대표이사 사장 회장 겸임
1982~1987 현대엔지니어링 대표이사 사장 겸임
1982~1992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상임위원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
-서울상공회의소 부회장1983~1992 한국능률협회 부회장
1983~1992 해외건설협회 이사
1983~1990 동남아 경제협력 건설분과 위원장
1984~1992 아시아수영연맹 회장
1984 세계수영연맹 집행위원
1985~1986 한라건설 대표이사 회장 겸임
1986~1999 주한부탄왕국 명예총영사
1987~1992 현대엔지니어링 대표이사 회장 겸임
1988~1992 현대건설 대표이사 회장
1988~1992 현대엔진공업 대표이사 회장 겸임
1988 한무쇼핑(현대백화점) 대표이사 회장 겸임
1989~1992 한·소 경제협회 설립준비위원장 겸 부회장
1989~1991 현대종합목재 대표이사 회장 겸임
1990~1992 현대자원개발 대표이사 회장 겸임
-한국항만협회 이사
1991~1992 동북아 경제협력 민간협회 한국측 회장
1992~1995 14대 국회의원(민자당→이후 신한국당, 전국구)
1992~1994 6.3동지회 회장
1992~2007 미국 아칸소주 명예대사
1993~1996 한국청년실업인협의회 회장
1993 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 이사 겸 운영이사회장
1994~2002 동아시아연구원 이사장
1995 삼청로터리클럽 회장
1996~1998 15대 국회의원(신한국당→이후 한나라당, 서울 종로)
1996 한국국악협회 고문
1997 한나라당 종로지구당위원장
1999~2002 아태 환경NGO 한국본부 총재
2000~ 캄보디아 훈센 총리 경제고문
2000~2002 한국장애인정보화협의회 명예회장
2001~2007 해외한인무역협회 고문
2001 한나라당 국가혁신위원회 미래경쟁력분과 위원장
2002~2006 서울특별시장(32대, 민선3기)
전국시도지사협의회 회장
2005 영국 파이낸셜타임즈사 fDi 선정 2005 올해의 인물
2007 한나라당 제 17대 대통령후보
2008 제17대 대통령 취임
집필자 : Beaux-ar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