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비명(병서)
송시열 찬
임진년 연안 전투는 국가의 공식 역사와 야사에 모두 기록되어 있으며, 오늘날까지 이를 말하는 이들은 그 전투의 장렬함과 충절의 위대함을 모두 찬탄하여 마치 그 인물을 직접 보는 듯하다고 한다. 이제 이공의 행장을 살펴보면, 그의 충성과 용맹이란 하늘이 부여하고 평소의 수양에서 길러진 것이며, 하루아침에 난리를 만나 분발한 인물들과는 전혀 다른 경지임을 알 수 있다.
이공의 이름은 정암(廷馣), 자는 중훈(仲薰)이며 경주 이씨이다. 그 선조는 신라의 알평에서 비롯되어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명문가를 이루었다. 증조부 이구는 급제하여 헌납을 지냈고 간신다운 기풍이 있었으며 감정에 이르러 졸하였다. 조부 이달존은 진사였고, 부친 이당은 사직령을 지냈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여덟 살에 글을 짓고, 십여 세에 이미 시명(詩名)이 있었다. 열여덟에 진사에 합격하고, 스물한 살에 급제하였다. 이후 한림과 여러 관직을 거쳐 문한과 예제 업무에서 두루 능력을 인정받았다.
명종이 승하하고 조사가 올 때 모든 의례를 정리하였으며, 이후 여러 외직과 중앙 관직을 거치며 행정 능력을 인정받았다. 사헌부와 사간원에 들어서는 간신과 권세가를 탄핵하였으나, 이로 인해 여러 차례 배척을 당하였다.
연안 부사를 지낼 때는 형옥을 공정하게 처리하여 권세가의 미움을 샀으나, 백성들은 그를 아쉬워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공은 의병을 모아 수천 명을 모았고, 연안성에서 “奮忠討賊”이라 써 걸고 끝까지 성을 지켰다. 화포와 불길로 적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 공로로 조정의 포상을 받았으나 공은 이를 공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후 여러 지방관을 지내며 국난 수습에 힘썼다.
임종에 이르기까지도 충성과 효도를 근본으로 삼아 권세를 따르지 않았다.
사후 좌의정에 추증되고 월천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충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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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주]
이정암(李廷馣, 1541~1600)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연안 전투에서 의병을 조직하여 방어전을 수행한 인물이다.
그는 전형적인 사림 관료이면서도 전시에는 지방 방어의 실질적 지휘관 역할을 수행한 “문무겸용형 관료”로 평가된다.
본 신도비명은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찬한 것으로, 그의 성리학적 역사관이 반영된 대표적 비문이다.
송시열은 이정암을 “성에 따른 충의의 구현자”로 규정하며, 그의 행위를 단순한 전공이 아니라 평소의 도덕적 수양의 결과로 설명한다.
특히 “性於天、養於素”라는 표현은 주자학적 인간론에 기반하여, 인물의 공적을 도덕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해석하는 전형적 방식이다. 이 비문은 임진왜란 지역 항전사의 사료이자, 조선 후기 충절 담론 형성의 중요한 텍스트로 기능한다.
출처>전통의명문 경주이씨종친회 카페 ㅣ 이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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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神道碑銘(幷序)
壬辰延安之戰,載在國乘野史,至今談之者,莫不壯其事、偉其忠,而如見其人焉。今觀李公行狀一通,又知公之忠勇,性於天、養於素,而非一朝臨亂慷慨者比也。公諱廷馣,字仲薰。上世有謁平,佐羅祖,賜籍於慶州。歷高麗、入本朝,世有聞人焉。曾祖筥,登第,嘗爲獻納,有諫臣風,卒官監正: 祖達尊,進士: 考宕,社稷令,始爲訓導官,多所成就。妣義城金氏,通政應辰女。
公生而聰慧,八歲能屬文,十二三已有能詩聲。十八進士,十九魁課試,二十一及第。由槐院爲翰林注書,陞典籍,爲工、禮曹佐郎。明廟薨,適詔使至,公爲諸公所任,吉凶儀節,多所講定。改兵曹佐郎,歷全羅、咸鏡、京畿都事,間爲禮、兵、刑正郎兼知製敎,奉命覆審江原、京畿災傷。爲正言請削乙巳僞勳,爲持平欲論當路不法事,當路覺之,駁遞之。以直講兼春秋館,預修明廟實錄。自後出爲延安、長湍、楊州、平山,入則爲諸司官,低徊冗散者十三年。其在延安決大訟,權貴人銜之,卽棄歸。在楊州,大修鄕校及道峯書院。癸未,栗谷先生建白設纂修廳,招集文學人,公與焉。拜掌令、司成、掌樂正。朝廷以倭奴爲憂,拜公東萊府使。公痛絶賂賄之弊,嚴約邊將。又禁倭稅米之弊,以誠信爲不可。壬辰四月,倭報猝至。公時爲吏曹參議,語夫人曰:「國事至此,不如自盡。」遂經於房內,賴救得免。大駕西幸,公追及松都。負母夫人過延安,遂傳檄遠近,招集義旅,得數千人。王世子拜爲招討使。公入延安城,建大將旗,書「奮忠討賊」四字。賊圍甚急,公堅守不退。夜半吹角,軍民齊應。以火砲火具擊賊,風起火烈,賊大敗。追擊獲其所掠,以賑士卒。捷聞,上嘉其功,超授同知中樞府事,並褒其忠。然公不以功自居。其後歷全州府尹、全羅監司、忠淸、黃海等道。丁酉罷職。母夫人卒於僑居。倭亂再起,起復守延安。庚子懿仁王后薨,公入臨還,遂卒,享年六十。公性忠孝,明於義利,不附權貴。拒尹元衡,斥鄭汝立,皆不爲屈。劉綎賜金,亦不受。終身無甔石之資,著述多散佚。自號四留居士,後改退憂。追贈左議政,封月川府院君,諡忠穆。 <끝>
四留齋集卷之十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