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文]
墓表陰記 贈秘書丞後 - 李裕承 撰
皇帝光武三年,追尊顯隆園爲莊祖懿皇帝,躋祔太廟。仍詔前後翊護、諫諍、秉義諸臣,贈秩有差。於是國家之大義始明,闕典載擧,神人胥悅,遐邇攢頌。而贈通政大夫秘書院丞德峯李公,其一也。公之玄孫圭一,感天恩之曠絶,念祖德之闡揚,謀顯刻于隧道,以垂不朽,請銘于余。余惟家世講之有素,且重宗誼,不敢以不文辭。謹按狀:公諱鎭宅,字養重,德峯號也。我李籍慶州,以新羅元臣諱謁平爲鼻祖。至勝朝,有諱翮,號悅軒,左僕射;有諱齊賢,門下侍中,諡文忠,世稱益齋先生。入本朝,有諱元益,大司成: 生諱瑄,判書: 生諱之帶,判尹,寔公十一代祖也。高祖諱之薰;曾祖諱璡,武科早卒: 祖諱胤錫,通德郞,以族兄再煕子雲培爲嗣。娶英陽南國望女。公以英廟戊午五月二十一日,生于防禦里第。自幼儀度俊偉,聰悟絶人,貫穿經籍,過眼輒誦。以親命致力於明經,屢年居太學寄齋。甲申冬,贊善申暻上疏,語多逼,上震怒,命焚疏遠竄。一日夜,大駕由集春門出御明倫堂,命入諸生及寄齋生,悽然良久,敎曰:「爾等在蜀乎,在越乎壬午五月,是何等極變,而無一人出一聲者乎」以次詢及公。敎曰:「爾居嶺南,守嶺南本色,何不爲上疏乎」對曰:「寄齋隨參,不敢專擅矣。」上曰:「國家有可言之事,爾不可以獨疏乎」仍命退出。公忠孝諜直,出自天植,自承是敎,益感發激勵,欲冒死一白,而未得其當,常鬱抑以爲恨。正廟庚子,擢文科,補承文院副正字,陞成均館典籍,移齊陵令。後拜禮曹正郞,以輪對官入侍。上援例問所懷,對曰:「臣爲齊陵令時,陵上石儀多傾側,屛石外高內陷,以油灰塗塡,可免潦水之患矣。」上亟命禮曹判書徐有防稟處,仍詢公地閥,顧左右曰:「人甚勤實矣。」特命兼春秋,異數也。換司憲府監察,旋除兵曹佐郞,坐事罷。敍拜司憲府持平。登對,上謂蔡相濟恭曰:「卿知此臺臣乎」蔡相以熟悉對,上深奬之,卽除掌令。抗章論三政,承優批施行。後又以臺職,陳寺奴革罷疏,上曰:「久欲釐正,觀此疏,益聞所未聞,先從本道飭可也。」又曰:「疏中寺奴婢之受困,甚於刷官革罷之前。」云。而刷官主內奴,守令主寺奴,非法之過,乃守令不能盡心之致也。批累十言,命大臣謄諭諸道,一世榮之。先是,公夢陪侍顯隆園,旣覺,號泣結讕。癸丑,居臺職,連有夢異。一日曉寢,有若執右臂而扶起者,覺而起,乃感激不自勝,亟草疏以呈。連値國齊,至五月二十五日入徹。略曰:「一日無此義理,則一日爲魍魎之域: 二日無此義理,則二日爲魍魎之域。不忍言,不敢道,一時之私情: 明義理,討亂賊,萬世之大防。魯、禧兩賊,先王之讎也,殿下之讎也,臣民之讎也。雖其死骨,何可置之覆載之間乎請剖其棺、戮其屍,手磔而口臠之,以洩徹天之痛焉。」羣壬惡之,從中却之。繼以諸賊懲討事請對,終日爭執,上甚誼之。時司諫缺,命銓官以入侍掌令擬之,仍指公敎曰:「掌令卽李鎭宅也。」銓官以未通納言對,上曰:「雖未經獻納,不可爲司諫乎」後又啓請李汝節濫殺之罪,繼陳朴長卨謀陷重臣徐有防,請拿問定罪,上優批允之。人或有謗議,蔡相奏曰:「李鎭宅之所建白,實有感服於重臣秉執之誠意。且壬子嶺南人上疏時,重臣兄弟屢有慰問,以此不忘于心。其曰爲國誠心,卽謂義理之誠心也。」上然之曰:「質實也。」公以前疏之未蒙批,而重被浮謗,痛激于心,又進一疏,以爲睿誣可辨,餘黨加戮,然後義理可以大明於世,刑政可以爲法於後矣。批曰:「爾敢言予所不忍聞之言,豈臣子之道乎」命王府拿囚。自後黨論日峻,事變層生,公絶意仕宦,遂尋鄕。丁巳,除開城經歷,強起赴任,爲政以淸簡恤民爲務。北使以傳訃來,所歷州郡,音樂、翫具,費鉅萬,公一切停閣。北使大怒,執之。公從容正色,引經傳以折之。上聞之曰:「素知其賢,乃能如此。」秩滿,籌司議仍任,爲沈煥之所沮。吏民號泣送之,樹碑紀惠。庚申,奉國諱,號泣幾絶,每語及壬午,慷慨流涕。純祖壬戌,獻納姜世綸陳凶疏,誣公不測,命遠竄。家人憂懼,公顔色不變,卽日首道。及宥還,髭髮勝昔。杜門謝客,不問世事。每當五月,必澡沐具衣冠,夜不就寢,畢生如一日。甲子,有蕩敍命,以翌年六月初五日,考終于鄕第,享年六十八。葬于府東馬洞負艮原。元配鶴城李氏,宣傳諱㸁女,无育。繼配安東權氏,諱達規女,育一男二女。復漢,通德郞;女李鼎學、徐相揆。孫曾多,不盡錄。公危忠卓節,炳然如日星。立朝二十餘年之間,不避權貴,不拘時諱,屢徹章奏,懇懇諤諤,躓而復起,不少改易。死生禍福,不足以嬰其心。豈不韙歟?自古以直道行者,多排擯不用。若公遭際晠時,特被隆眷,奬借之、拂拭之,不可謂不遭遇,而沮抑媒孼,罷竄相繼,低回下僚,位不稱德,世咸惜之。然公之大節,固自如也。若公之內行,事親盡其孝,追遠尤竭其誠: 立石于瓢巖峯、文忠洞二處遠祖舊址: 大宗無庇,割土田以資其匕鬯。居官遠女色,蕭然如寒士。敎子姪有義方,接朋友不飾邊幅,容䫉辭氣極其溫粹,而截然有不可犯之色。雖古成德君子,何以過此於法宜銘。銘曰:
及梁千載,代有偉人。抑抑文忠,爲麗宗臣。積善之庥,克生我公。出處行藏,惟孝與忠。結知明主,立朝正色。運屈玄黓,
義理晦塞。再疏陳籲,滿腔熱血。王曰:「嘉乃!」爲之哽咽。魍蜮羣起,遯公于荒。公身雖躓,公道則章。蹟公展布,十纔一二。胡不晉庸,俾究厥施隆陵典禮,百年乃行。銀臺誥命,榮徹玄扃。載銘載石,垂之萬億。誰其來者是儀是式。
光武六年五月日,宗後生 崇祿大夫行吏曹판書兼知經筵春秋館事同知成均館事 裕承 撰。
德峯先生文集卷之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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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주(譯註)
◇皇帝光武三年: 대한제국 광무 3년(1899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연호를 광무로 삼은 시기이다.
◇顯隆園: 사도세자의 묘호인 수은묘(垂恩墓)를 영조가 원(園)으로 승격시킨 것. 이후 장조로 추존되면서 원소(園所)의 격이 높아졌다.
◇莊祖懿皇帝: 사도세자를 추존하여 올린 황제 칭호. 대한제국기 왕실 정통성 확립 과정에서 확정된 명칭이다.
◇太廟: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종묘를 의미한다.
◇翊護、諫諍、秉義諸臣: 왕실을 보익(輔翼)하거나 올바른 간언을 하거나, 사직의 의리를 지킨 신하들을 뜻한다. 사후 추증의 주된 대상
이 되는 집단을 포괄한다.
◇贈秩有差: 공훈의 경중에 따라 품계를 차등 있게 하여 관직을 추증함.
◇贈通政大夫秘書院丞: 정3품 당상관 품계인 통정대부로 비서원 승(丞)을 추증함. 비서원은 대한제국 황실의 문서와 기록을 관리하던 최
고 관청이다.
◇墓道: 묘소로 통하는 길. 비석을 세워 조상의 덕을 기리는 장소인 '수도(隧道)'를 의미한다.
◇玄孫圭一: 현손인 규일. 본 묘표의 제작을 청탁한 인물이다.
◇李籍慶州 / 謁平: 경주 이씨의 계보를 상징하며, 신라 개국공신인 휘 알평을 비조(鼻祖)로 설정하여 가문의 유구한 뿌리를 밝힌다.
◇勝朝: 고려 왕조를 지칭하는 관용어이다.
◇左僕射 / 門下侍中: 고려 중앙 최고 관직인 삼사 및 중서문하성의 재상급 직위이다.
◇諡文忠: 시호 '문충'. 학문적 성취와 충절을 겸비한 인물에게 내려지는 영예로운 시호이다.
◇益齋先生: 고려 말 문신 이제현(李齊賢)을 가리킴.
◇太學寄齋: 성균관 내 유생들이 머물며 수학하던 기숙 공간.
◇甲申冬: 숙종~영조 대의 정치적 변동이 잦았던 시기의 간지 연도.
◇贊善申暻上疏: 찬선 신경의 상소 사건. 내용이 과격하여 조정의 탄압을 받았다.
◇蜀 / 越: 중국 고대 지역명이나, 여기서는 "너는 어디에 속한 자인가(어떠한 의식을 가진 자인가)"라는 임금의 은유적 질책이다.
◇壬午五月極變: 사도세자 사건(임오화변)을 지칭하는 극존칭이자 완곡한 표현.
◇明經: 경전을 통한 과거 시험 및 유학 공부를 의미한다.
◇齊陵令: 제릉(태조 이성계의 첫째 부인 신의왕후 한씨의 능)을 관리하는 지방관 직책.
◇油灰塗塡: 기와나 석물의 틈을 메우는 공법. 백성을 돌보는 실무적 성과를 강조한다.
◇春秋館: 조선 왕조의 실록을 편찬하고 기록을 담당하는 기관.
◇三政: 조선 후기 국가 재정의 근간인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을 의미함.
◇寺奴革罷: 사찰 노비 제도의 폐지 문제. 당대 사회 구조의 모순을 지적하는 핵심적인 상소 내용이다.
◇刷官 / 內奴 / 寺奴: 관청 노비 제도 내에서 노비의 소속과 관리 책임을 엄격히 구분하여 부당한 고통을 해소하려 한 정책적 논의.
◇魍魎之域: 도덕과 의리가 사라진 혼란한 세계를 도깨비(망량)가 사는 곳에 비유한 표현.
◇魯、禧兩賊: 사도세자 사건과 관련된 정치적 논쟁 속에서 지목된 당대의 인물군. 이는 역사적 실체보다는 당론적 관점에서의 명명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掌令 / 司諫: 사헌부와 사간원의 핵심적인 언관 직책.
◇拿鞠 / 王府: 왕명에 의한 엄정한 심문(국문)과 이를 주관하는 사법 기구(의금부 등).
◇北使: 청나라 사신.
◇傳訃: 사신이 부고 전달을 명목으로 입국함을 이른다.
◇開城經歷: 개성부의 행정 및 사법을 담당하는 중간급 지방관.
◇籌司: 비변사(籌司)를 지칭하며, 국가의 재정 및 군사 정책을 기획하던 최고 기관.
◇純祖壬戌: 순조 2년(1802).
◇蕩敍命: 억울한 죄를 씻어주고 관직에 다시 서용하게 하는 사면 명령.
◇負艮原: 묘지의 방위를 표기함. 간좌(艮坐)는 동북 방향을 의미한다.
◇通德郞 / 判書 / 判尹: 조선의 관직 체계. 통덕랑은 문관 품계, 판서는 중앙 관청의 장관, 판윤은 한성부의 수장이다.
◇銘: 명(銘)은 비문의 말미에 운율을 맞추어 기록한 결론적인 송덕문이다.
3. 국역문.
묘표의 음기 — 비서승으로 추증된 뒤에(이유승 찬)
광무 3년(1899) 황제께서 현륭원(顯隆園)을 추존하여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삼고 태묘에 배향하셨다. 이어 전후로 옹호하고 간쟁하며 의리를 지켰던 여러 신하에게 등급을 나누어 관작을 추증하라는 조서가 내려졌다. 이에 국가의 대의가 비로소 밝혀졌고, 빠졌던 예전(禮典)이 모두 거행되니 신과 사람이 모두 기뻐하고 멀고 가까운 곳에서 함께 칭송하였다. 증 통정대부 비서원승 덕봉(德峯) 이공(李公) 또한 그중 한 분이시다.
공의 현손 규일(圭一)이 하늘의 은혜가 끝없음에 감격하고 조상의 덕을 널리 알리고자, 묘소의 길목에 비석을 세워 영원히 남기려 하며 나에게 명(銘)을 청하였다. 나는 가문 대대로 학문을 강론해 온 인연이 있고 또한 종족의 의리를 중히 여기기에, 글재주가 부족함을 핑계로 사양할 수 없었다. 삼가 행장을 살펴보건대, 공의 휘는 진택(鎭宅), 자는 양중(養重)이며 호는 덕봉이다.
우리 경주 이씨는 신라 원신(元臣) 휘 알평(謁平)을 비조로 한다. 고려조에 이르러 휘 핵(翮)은 호가 열헌(悅軒)으로 좌복사를 지냈고, 휘 제현(齊賢)은 문하시중으로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세상에서 익재(益齋) 선생이라 부른다.
본조(조선)에 들어와 휘 원익(元益)은 대사성을 지냈고, 아들 휘 선(瑄)은 판서, 아들 휘 지대(之帶)는 판윤을 지냈으니, 이분이 공의 11대조이다. 고조 휘 지훈(之薰), 증조 휘 진(璡)은 무과에 급제했으나 일찍 졸하였다. 조부 휘 윤석(胤錫)은 통덕랑을 지냈고, 종형 재희(再熙)의 아들 운배(雲培)를 양자로 삼았다. 영양 남씨 국망(國望)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공은 영조 무오년(1738) 5월 21일 방어리(防禦里) 본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준수하고 총명함이 남달랐으며, 경전을 꿰뚫어 보아 한 번 보면 바로 암송하였다. 부친의 명으로 명경(明經)에 힘써 여러 해 동안 태학(성균관) 기재(寄齋)에 머물렀다.
갑신년(1764) 겨울, 찬선 신욱(申暻)이 상소한 내용이 지나치게 급진적이어서 임금이 진노하여 상소를 불태우고 그를 멀리 귀양 보냈다.
어느 날 밤, 임금이 집춘문을 거쳐 명륜당에 납시어 여러 유생과 기재생을 입시시켰다. 슬픈 기색으로 오래 있다가 교지를 내리기를, "너희들은 촉(蜀)에 있는가 월(越)에 있는가? 임오년 5월(사도세자의 일)에 어찌하여 한 사람도 소리를 내는 이가 없었는가?" 하셨다.
차례로 물음이 공에게 미치자, "기재에서 함께 참여했을 뿐 감히 독단적으로 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임금이 "국가에 말할 일이 있는데 너는 홀로 상소하지 못하겠느냐?" 하고 물러나게 하셨다. 공은 충효와 정직함이 타고난 성품이라, 이 교지를 듣고 더욱 감동하고 분발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한 번 밝히고자 했으나 기회를 얻지 못해 늘 울분으로 한을 삼았다.
정조 경자년(1780)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에 보직되고, 성균관 전적을 거쳐 제릉령(齊陵令)으로 옮겼다. 후에 예조정랑에 배수되고, 윤대관(輪對官)으로 입시하였을 때 임금이 예를 들어 소회를 물으시니, 공이 "신이 제릉령일 때 능 위의 석물이 많이 기울고 병풍석 밖은 높고 안은 꺼져 있었는데, 유회(油灰)로 메우면 빗물의 환난을 면할 수 있습니다"라고 답하였다.
임금은 급히 예조판서 서유방(徐有防)에게 처리하도록 명하고 공의 가문을 물으신 뒤, 좌우를 돌아보며 "참으로 근실한 사람이다"라며 특별히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게 하셨으니 이례적인 은혜였다. 사헌부 감찰로 옮겼다가 곧 병조좌랑이 되었으나 일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다시 사헌부 지평에 서용되었다. 입시했을 때 임금이 채상(채제공)에게 "경은 이 대관을 아는가?"라고 물으니 채상이 잘 안다고 대답하였고, 임금이 깊이 칭찬하였다. 곧 장령으로 제수되었다. 항소(抗疏)하여 삼정(三政)을 논하니 좋게 비답을 내려 시행하게 하셨다.
뒤에 다시 대관의 직분으로 절노(寺奴) 혁파 상소를 올리니 임금이 "오래전부터 바로잡으려 했는데 이 상소를 보니 더욱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식견이다. 먼저 본도부터 엄하게 하라"고 하셨다. 또한 "상소 중에 '사노비의 고통이 쇄관 혁파 전보다 심하다'고 했는데, 쇄관은 내노(內奴)를 주관하고 수령은 사노를 주관하니, 불법의 과오가 수령이 마음을 다하지 못한 결과이다"라고 하시고, 비답을 열 가지로 나열하여 대신들에게 명하여 여러 도에 전유(傳諭)하게 하시니 온 세상이 이를 영화롭게 여겼다.
이전에 공이 현륭원(사도세자 묘)을 모시는 꿈을 꾸고 깨어난 뒤 울음을 터뜨리며 슬퍼한 적이 있었다. 계축년(1793) 대관으로 있을 때 연이어 이상한 꿈을 꾸었다. 어느 날 새벽 잠결에 마치 누군가 오른쪽 팔을 잡고 일으켜 주는 듯하여 깨어나니, 감격함을 이기지 못해 급히 상소를 초하여 올렸다.
국상(國喪)이 겹쳐 5월 25일에야 상소가 전해졌다. 대략 이르기를, "하루라도 이 의리가 없으면 하루가 망량(魍魎)의 세계가 되고, 이틀 동안 이 의리가 없으면 이틀이 망량의 세계가 됩니다. 차마 말할 수 없고 감히 도리로 삼을 수 없습니다. 일시적인 사사로운 정이 아니라 의리를 밝히고 난적을 토벌하는 것은 만세의 큰 방벽입니다. 노론과 희빈의 두 역적은 선왕의 원수이며, 전하의 원수이고, 신민의 원수입니다.
그 죽은 뼈라 할지라도 어찌 하늘과 땅 사이에 둘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그 관을 쪼개고 그 시신을 베어 손으로 찢고 입으로 씹어서 하늘에 닿은 통분을 풀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여러 소인배들이 이를 미워하여 중간에서 가로막았다. 이어 여러 역적을 징토하는 일로 청대(請對)하며 종일토록 다투니 임금께서 매우 의롭게 여기셨다.
당시 사간(司諫) 자리가 비었는데, 전관(銓官)에게 입시 중인 장령을 의망하라고 명하고, 이어 공을 가리키며 "장령이 곧 이진택이다"라고 하셨다. 전관이 아직 헌납(獻納)을 거치지 않았다고 대답하니, 임금은 "비록 헌납을 거치지 않았으나 사간이 될 수 없단 말인가?"라고 하셨다.
뒤에 또 이여절(李汝節)의 남살죄(濫殺罪)를 청하고, 이어 박장설(朴長卨)이 중신 서유방을 모함한 죄를 진술하여 나국(拿鞠)하여 정죄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우대하는 비답으로 윤허하셨다. 사람들이 혹 비방하는 논의를 하였으나, 채상이 주대하기를 "이진택이 건백한 것은 실로 중신이 뜻을 굳게 지킨 성의에 감복한 것이며, 임자년 영남 사람들이 상소할 때 중신 형제가 여러 번 위문하였으므로 이를 잊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라를 위한 성심이란 곧 의리의 성심을 말하는 것입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그렇다며 "질실(質實)한 사람이다"라고 하셨다. 공은 앞선 상소가 비답을 받지 못하고 거듭 부당한 비방을 받자 마음이 아프고 격동되어 또 한 통의 상소를 올렸다.
"예종의 무함이 판명되고 여당을 가중 처벌한 뒤에야 의리가 세상에 밝아지고 형정이 후대에 법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니, 비답에 "네가 감히 내가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하니 어찌 신자의 도리인가?" 하고 왕부(王府)에 나국(拿鞠)하여 가두도록 명하셨다. 그 후 당론이 날로 심해지고 사변이 층층이 일어나자, 공은 벼슬을 단념하고 향리로 돌아갔다.
정사년(1797) 개성경력(開城經歷)으로 제수되어 억지로 부임하였다. 정사를 펼침에 청렴하고 간소하며 백성을 돌보는 것을 임무로 삼았다. 북사(北使)가 부고를 전하러 왔는데, 지나온 주군(州郡)마다 음악과 완구에 든 비용이 거금 만 냥이 넘었다. 공이 이를 일절 중단시키니 북사가 크게 노하여 그를 잡으려 하였다.
공이 종용히 정색하며 경전을 인용하여 그를 꺾으니, 임금이 듣고 "평소 그 어짊을 알았는데 과연 그럴 만하구나"라고 하셨다. 임기가 차자 주사(籌司)에서 유임하기를 의논하였으나 심환지(沈煥之)가 저지하였다. 아전과 백성들이 울부짖으며 전송하고 비석을 세워 은혜를 기록하였다.
경신년(1800) 국상(정조 승하)을 당하여 울부짖으며 거의 끊어질 듯하였고, 임오년(사도세자) 일을 말할 때마다 강개하여 눈물을 흘렸다.
순조 임술년(1802) 헌납 강세륜이 흉한 상소를 올리며 공을 불측한 죄로 무고하여 멀리 귀양 보내라는 명이 내려졌다.
집안사람들은 우려하고 두려워했으나 공은 안색이 변하지 않고 즉시 길을 떠났다. 유배에서 풀려 돌아오니 수염과 머리카락이 예전보다 더 낫았다.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며 세상일을 묻지 않았다. 매년 5월이 되면 반드시 목욕재계하고 의관을 갖추었으며 밤에도 눕지 않았으니, 평생을 하루같이 하였다.
갑자년(1804)에 탕서(蕩敍)의 명이 있었고, 이듬해 6월 5일 향리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68세였다. 부 동쪽 마동(馬洞) 간좌(艮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원배(元配)는 학성 이씨로 선전관 득(㸁)의 딸이나 자식이 없었다. 계배는 안동 권씨로 달규(達規)의 딸이며 1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복한(復漢)으로 통덕랑이다. 딸은 이정학(李鼎學), 서상규(徐相揆)에게 시집갔다. 손자와 증손이 많으나 다 기록하지 못한다.
공의 위태로움에 충성하고 절개는 탁월하여 해와 별처럼 밝았다. 조정에 서 있는 20여 년 동안 권귀를 피하지 않고 세속의 휘(諱)에 구애받지 않으며 자주 장주(章奏)를 올렸다. 간절하고 정직하게 말하였으며,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죽음과 삶, 재앙과 복이 그 마음을 흔들지 못했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 예로부터 올바른 도리로 행하는 자는 배척당하고 쓰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공처럼 성대하고 밝은 때를 만나 특별히 두터운 권고를 받고 포장(奬借)과拂拭(불식)을 받았으니, 불우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저지하고 모함하는 무리가 잇달아 파직과 귀양을 거듭하여, 낮은 벼슬에 머물며 지위가 덕에 미치지 못했으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하였다. 그러나 공의 큰 절개는 본래 스스로 그러하였다.
공의 내행(內行)을 살펴보면, 어버이를 섬김에 효를 다하였고, 먼 조상을 추모함에 정성을 다하였다. 표암봉과 문충동 두 곳의 먼 조상 옛 터에 비석을 세웠고, 대종(大宗)에 보살핌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토전을 나누어 제사 비용을 마련하였다. 관직에 있을 때 여색을 멀리하여 한사(寒士)처럼 깨끗하였고, 자식과 조카를 가르침에 의로운 법도를 따랐으며, 친구를 대함에 꾸밈이 없었다.
용모와 말투는 매우 온화하고 순수하였으나, 감히 범할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비록 옛날 성덕(成德)의 군자라 할지라도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겠는가. 마땅히 명(銘)을 지어 새긴다.
명(銘)에 이르러 말한다.
양(梁)나라 이래 천 년, 대대로 위인이 있었네
공손하고 문충(익재)은 고려의 으뜸 신하
공덕이 쌓인 상서로움, 우리 공을 낳으셨네
나아가고 물러남은 오직 효와 충뿐이었네
밝은 임금의 지우를 얻어 조정에서 정색하셨네
운이 꺾이고 현묵(어두운 시대)한 시절, 의리가 닫혔네
두 번 상소하여 간절히 호소하니 피 끓는 정성
왕께선 "가하다" 하시고 목이 메어 우셨네
망량 같은 무리 일어나 공을 거친 땅으로 내쫓았네
공의 몸은 넘어졌어도 공의 도는 드러났네
공의 자취를 펼쳐 보아도 열에 한둘뿐
어찌하여 더 쓰이지 못해 그 뜻을 다하지 못했는가
현륭원(莊祖)의 전례, 백 년 만에야 행해졌네
은대(승정원)의 고명(교지)이 저승에까지 빛나네
글 새겨 돌에 담아 만억 년까지 전하리니
오는 이들 누구인가, 이 의리를 본받으라.
광무 6년(1902) 5월,
종후생 숭록대부 행 이조판서 겸 지경연·춘추관사 동지성균관사 유승(裕承)이 찬하다.
4. 부주
본 묘표음기는 광무 3년(1899) 장조 추존 이후, 충의를 지킨 신하들에게 추증이 내려진 국가적 정비 과정 속에서 작성된 문장이다. 작성자는 경주 이씨 문중 인물로, 이진택의 행적을 정리하여 묘도에 세울 비문 형식으로 구성하였다.
이진택은 정조대 사헌부 및 대간 직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여러 차례 정치적 상소를 올렸고, 특히 사도세자 관련 문제와 삼정 개혁, 노비 제도 개편 등에 대해 적극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정치적 논쟁과 처벌, 복직이 반복되었다.
그의 생애는 관료적 성공과 좌천, 복직이 교차하는 전형적인 후기 조선 정치 관료의 궤적을 보이며, 동시에 강한 직언 성향으로 인해 당쟁의 영향을 크게 받은 사례로 평가된다. 사후 평가에서는 충의와 절개가 중심적으로 강조되며, 학문적 업적보다는 정치적·윤리적 입장과 행동이 주요한 평가 기준으로 제시되어 있다.
출처> 전통의명문 경주이씨종친회카페 ㅣ 이상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