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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갈,묘비,묘표

이대방 묘갈명(李大邦 墓碣銘) - 송시영(宋時烈)

작성자야촌|작성시간26.06.22|조회수18 목록 댓글 0

이대방(李大邦)의 묘갈명(墓碣銘) - 송시열(宋時烈)

기묘 사화(己卯士禍) 뒤에 세속에서 숭상하는 것이 크게 변하여 선비는 사람들이 꺼리는 대상이 될 정도가 이만저만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대방(李大邦) 공은 그 시대에 선비의 긍지를 지니고 몸을 펴서 청송[聽松 : 성수침(成守琛)의 호]의 풍의(風誼)를 사모하여 스스로 문송(聞松)이라고 호(號)하였다.

 

또 사사로이 그 필법조차 배웠다. 선조(宣祖) 계묘년(癸卯年, 1603년 선조 36년)과 갑신년(甲申年, 1604년 선조 37년) 연간에 미쳐서 당(黨)의 화가 다시 크게 일어났다. 공은 다시 우계 선생(牛溪先生)을 좇아 공부하였다. 공의 사람됨이 청수하고 명랑하며 온화하고 간이하였다.

 

입에는 나쁜 말을 담지 않고 행실은 이상한 짓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키는 바는 확고하였다. 부모를 섬김에 효성이 지극하여 특별히 무슨 일이 있기 전에는 곁을 떠난 일이 없었다. 맛있는 음식을 보면 먼저 입에 넣는 일이 없었다. 사람이 그 기뻐하는 안색과 온화한 얼굴을 보고 깊이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처신하는 것이나 처사하는 것이 하나도 구차한 것이 없었으니 부모도 공이 불의에 빠지리라고는 염려하지 않았다. 거상할 때 시묘살이를 하면서 아침저녁으로 곡하고 절하였다. 비록 바람이 불고 눈이 와도 폐하지 않았다. 음식 중에서 아버지의 이름자에 혐의가 되는 것은 평생 먹지 않았다.

형제가 다섯인데 공이 경리를 잘하여 그 의지할 데가 없는 사람은 생업을 마련해 주었다. 종족간에는 더욱 화목을 돈독히 하였으며 비록 천한 노비라도 은혜와 의리를 가지고 대해 주었다. 평생 살림에는 힘을 쓰지 않았으며 아름다운 산수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곧 거기에 가서 거처하였으나 오래 머문 적은 없었다. 

 

더불어 같이 종유하는 사람들은 다 명사와 승우(勝友)였다. 그리하여 천거를 받아 헌릉 참봉(獻陵參奉)에 임명되었다. 예(例)에 따라 봉사(奉事)로 승진하였다가 하세하였다. 때는 갑진년(甲辰年, 1664년 현종 5년) 윤9월 14일이다.

자제 이시(李時)ㆍ이서(李曙)ㆍ이탁(李晫)ㆍ이오(李晤) 등이 광주(廣州) 방이동(芳夷洞)에 있는 단인(端人, 8품의 외명부(外命婦)) 완산 이씨(完山李氏)의 묘에 안장하였다. 향년이 67세였다. 단인은 밝고 통달하여 사리를 알았다. 남편을 섬기고 시부모를 받드는 데 다 부도(婦道)에 맞았다. 계미년(癸未年, 1643년 인조 21년) 2월 27일에 하세하였으니 향년이 약간이다.

공의 자(字)는 사기(士基)이고, 성은 이씨다. 계는 경주(慶州)에서 나왔다. 시조 이알평(李謁平)이 신라조를 도운 공로로 벼슬이 대관에 이르렀다. 그 뒤에 이름 있고 훌륭한 공경(公卿)이 거듭 있었다. 증조(曾祖) 이석(李晳)은 현감이고, 조부(祖父) 이귀서(李龜瑞)는 군수이고, 부친 이즉(李鰂)은 사의(司議)를 지냈다. 

 

선비(先妣) 이씨는 국족(國族)으로 정국 공신(靖國功臣) 안현군(安賢君) 이성동(李盛同)의 딸이다. 이시는 진사(進士)로 이유항(李惟恒)ㆍ이유정(李惟鼎)ㆍ이유진(李惟晉)ㆍ이유복(李惟復)을 낳았고, 이서는 현감(縣監) 이유택(李惟澤)ㆍ참봉(參奉) 이유부(李惟孚)ㆍ승지(承旨) 이유태(李惟泰)ㆍ이유익(李惟益)ㆍ현감 이유겸(李惟謙)을 낳았으며, 이탁은 이유선(李惟善)ㆍ이유설(李惟卨)ㆍ현감 이유언(李惟彦)ㆍ이유헌(李惟獻)을 낳았고, 이오는 이유절(李惟節)ㆍ이유제(李惟濟)ㆍ이유함(李惟咸)을 낳았으며, 내외(內外)의 증손(曾孫)과 현손(玄孫)은 모두 2백여 명이다.

공의 재주와 지혜와 행실과 의리는 스스로 세상에 나타날 만한데 얕은 직위에 침체하여 있다가 돌아갔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오직 그 자손들이 번성하고 또 현인이 많다. 지금으로 말하면 이유태(李惟泰)가 유학으로 세상에 크게 이름을 펼쳐 금상이 누차 명소(命召)하여 현관(顯官)을 제수하였으며, 특히 이유택(李惟澤)에게는 고을을 주어 그 모친을 봉양하도록 하였다. 

 

그의 어린 자제들도 행실을 닦고 글을 좋아하니 이씨의 흥성함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하늘이 공에게 넓게 베푼 것이 대개 틀림없을 것이다. 항차 그 세운 덕이 고인에 비하여도 부끄러움이 없고 잠긴 덕과 그윽한 빛이 오랠수록 더욱 밝게 나타날 터이니, 잠시 펴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 유감이 되겠는가? 후세의 군자들은 공에게서 보고 얻어 선(善)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 옳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공의 뜻이 옛 사람만 못하지도 않으며, 공의 재주도 어찌 지금 사람만 못하겠는가? 사람은 먼저 하는데 스스로는 뒤따르고 자기는 굽혀 있고 남은 펴니 하늘이 이미 정한 바 있어 쌓은 것이 많으면 멀리 가서 베풀도다. 저 사정으로 이 사정을 바꾸려함은 아! 선비가 원하는 바 아니로다. 광릉 땅 곁을 바라다보니 강물은 끊임없이 흘러 공의 복과 여경(餘慶)도 이와 함께 길리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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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李大邦 墓碣銘 - 宋時烈

 

己卯士禍之餘, 俗尙大變, 士類爲人所諱者深矣。 李公大邦能自伸于明, 慕聽松之風, 自號聞松, 私自習其筆法。 及宣廟癸、甲之際, 黨禍復大起。 公復從牛溪先生游。 公爲人淸明和易, 口無惡言, 行去厓異, 而所守則確如也。 事親甚孝, 無故則未嘗不在側, 得一美味, 不先入口。 人見其愉色婉容, 卽知其有深愛也。 行己處事, 一毫不苟, 父母不憂其陷於不義。 居喪廬墓, 晨夕哭拜, 雖風雪不避。 飮食之嫌於先諱者, 終身不食也。 兄弟五人, 公能經理, 以業其無歸者, 於宗族益敦其雍睦。 雖奴隷之賤, 待之亦有恩義。 平生不事生業。 聞有山水之佳者, 輒就而居之, 亦未嘗久淹。 所與遊皆名人勝士。 以薦拜獻陵參奉, 例陞奉事以終, 甲辰閏九月十四日也。 男時、曙、晫、晤等葬之廣州藝稊洞端人完山李氏之封, 壽六十七。 端人明達, 識事理。 事君子, 奉舅姑, 咸得婦道。 以癸未二月二十七日終, 年若干。

公字□□。 李氏出慶州。 上祖謁平佐麗祖, 以功至大官。 其後名公巨卿累累有焉。 曾祖晳, 縣監; 祖龜瑞, 郡守; 考鯽, 司義。

妣李氏, 國姓, 靖國功臣安賢君盛同之女。 時, 進士, 生惟恒、惟鼎、惟晉、惟復。 曙生縣監惟澤、參奉惟孚、承旨惟泰、惟益、縣監惟謙。 晫生惟善、惟卨、縣監惟彦、惟獻。 晤生惟節、惟濟、惟咸。 內外曾玄總二百餘人。 公之才志行義, 足以自見於世, 而沈淪下位, 斂而歸之, 豈非命也耶? 惟其子孫蕃衍而多賢, 今惟泰以儒學大鳴於世, 今上屢徵爲顯官, 又特除惟澤邑宰, 以養其母。 其幼稚又皆修行好文, 李氏之興, 蓋未艾也: 天之報施於公者, 蓋不爽矣, 況其所樹立無愧古人, 其潛德幽光, 文益彰顯, 其屈於暫者又奚足憾也? 後之君子觀於公而不怠於善可也。 

銘曰:

公之志非不如古人, 公之才豈不如今人, 人先己後, 己屈人伸。 天旣有定, 積者多而施者遠也。 以彼易此, 嗚呼士之所不願也! 廣陵之傍, 江水湯湯。 公之祉慶, 與之俱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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