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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펌.전호태 고구려 고분벽화] 장천 1호분 벽화의 문지기

작성자박희용|작성시간05.09.29|조회수148 목록 댓글 0
제 목 느낌이 있는 얼굴, 장천1호분 벽화의 문지기
이 름 전호태 ( jhtbh@hanmail.net ) 등록일 2004/12/08
파 일
 

느낌이 있는 얼굴, 장천1호분 벽화의 문지기


전호태(울산대학교 역사문화학과)


불교회화의 가장 큰 특징은 위계적 인물표현이다. 깨달음의 크기, 존재 안에 담긴 인격의 깊이, 베풀 수 있는 자비의 넓이를 인물의 크기로 나타내는 까닭에 여래의 크기와 평범한 속인의 크기는 전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차이가 난다. 여래, 보살, 천왕, 팔부신중, 십대제자와 아라한의 크기가 각각 다르다. 속인은 여래의 손가락 마디보다도 작게 그려진다. 불교회화의 인물상은 언 듯 보면 난장이부터 거인 종족을 차례로 배열한 듯 보이기도 한다. 대상에 대한 관념과 인식을 회화적 수단에만 의존하여 나타내려고 하다보니 회화기법 상으로는 무리를 범할 수밖에 없게 된 경우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사람의 크기를 다르게 나타낸 사례를 자주 찾아볼 수 있다. 5세기 중엽 이전에 제작된 고분벽화의 인물들은 신분과 지위에 따라 크기를 달리하여 나타내는 것이 오히려 일반적이다. 고구려 귀족부부와 이들을 수발하는 시종들 사이에는 당연히 신분적 거리가 있다. 사회적 존경을 받던 불교승려와 귀부인 사이에도 마찬가지의 신분․지위상의 넘기 힘든 격차가 존재했다. 주인의 나들이를 준비하고, 따라 나서며 여러 가지 잔일을 도맡아 했던 귀족 집안의 시종들이 고분벽화에서는 주인의 ⅛, 혹은 그보다 두 배 더 작게 그려진다. 덕흥리벽화분에서 시종들은 주인의 머리 ½ 크기로 묘사되었고, 수산리벽화분의 시종은 주인의 ¼도 안 되는 크기로 그려지는 바람에 기형적으로 길어진 양산의 대를 힘들게 받쳐 들고 있는 모습이 되었다.

 

(그림1)덕흥리벽화분 앞방 안벽 벽화: 무덤주인

 

불교적 제재들로 가득 찬 장천1호분에는 두 사람의 문지기가 등장한다. 두 문지기는 앞방에서 널방으로 이어지는 통로로 좌우로 나뉜 안벽 양쪽에서 서로를 마주보는 자세로 그려졌다.

 

(그림2)장천1호분 앞방 안벽 벽화: 문지기

 

무덤칸 안에서 바깥을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할 때 안벽의 오른쪽에 그려진 문지기 그림의 높이는 153㎝이고, 왼쪽에 그려진 문지기 그림의 높이는 155㎝이다. 삼국시대 전쟁에 나가기 위해 갑옷을 입고 투구를 썼던 건장한 보통의 성인 남자의 키가 대체적으로 155㎝~160㎝정도였다는 고고학적 발굴 결과로 볼 때, 두 문지기는 실제의 인물 크기로 그려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비교적 번듯하게 차려 입은 고구려 귀족 집안의 문지기들이 실물 크기로 벽화에 묘사된 것이다. 이들이 문지기임을 고려하면 앞 시기 고분벽화의 신분에 따른 인물 표현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표현방식이 아닐 수 없다.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인물 표현방식에 더하여 눈길을 끄는 것은 두 문지기를 나타내는 구체적인 표현기교와 그 효과이다. 두 문지기는 앞 시기 고분벽화의 인물들과 달리 표정을 지니고 있다. 화가는 오른쪽 문지기를 흰 피부, 둥근 얼굴에 큰 눈, 넉넉한 표정과 마음을 지닌 존재로 그렸고, 왼쪽 문지기는 검붉은 피부, 각이 진 얼굴에 끝이 날카롭게 뻗어나간 눈, 엄한 표정과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묘사하였다. 오른쪽 문지기는 선하게 보이는 얼굴에 걸맞게 팔을 들어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쥔 약간은 다소곳한 자세로 서 있지만, 왼쪽 문지기는 쏘아보는 듯한 눈초리로 앞을 보며 팔을 내려 두 손을 좌우 허리와 배 사이에 댄 버티고 선 듯한 자세로 입구를 지키고 있다. 두 사람의 표정은 살아 있고, 성격은 얼굴 표정과 서 있는 자세만으로도 뚜렷이 드러난다. 화가는 두 문지기가 어떤 사람인지, 평소에 사람들 대하는 태도가 어떤지를 말 한마디 없이 붓끝으로만 보는 이가 알게 하는 데에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두 문지기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만 해도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서 표정을 읽기는 극히 어려웠다. 화가가 인물의 표정을 통해 성격을 드러내려 노력한 흔적을 찾아내기도 그리 쉽지 않았다. 화가는 일종의 관행적 표현, 틀에 박힌 듯한 인물묘사 방식에 매어 있었다. 화가가 살고 있던 시대가, 당대의 일반적인 관념이 관행적 표현을 넘어서는 인물묘사를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인물의 개성을 보아도 본대로, 느껴도 느낀 대로 그려서는 안 되는 시대에 살고 있었다면 과연 시대를 넘어서는 모험을 할 화가가 몇 사람이나 있었을까.

장천1호분 벽화에서는 표정을 담아 느낌을 전할 수 있는 얼굴을 만날 수 있다. 두 문지기 정도는 아니지만 쌍영총 벽화에서도 역시 실물 크기의 표정 있는 문지기를 볼 수 있다. 5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고구려의 화가들은 화가의 붓끝을 멈칫거리게 했던 앞 시대 신분관념의 엄한 족쇄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던 듯하다. 고분벽화 인물 표현에서 확인되는 이러한 변화는 인간 개인의 본질적인 평등을 말하며, 이 세상에서의 개인 삶의 태도와 그로 말미암은 열매를 중요시 하는 불교가 고구려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믿어진 데에서 비롯된 것일까. 엄격한 신분적 인물 표현을 더 이상 강제할 수 없을 정도로 동방의 패자 고구려가 열린 사회를 지향하면서 나타난 현상일까. 아니면 이러한 사회적 문화적 흐름을 감지한 화가들이 시대를 앞서는 모험을 감행하면서 ‘고분벽화’에서부터 일어난 사건일까. 장천1호분 벽화 두 문지기의 얼굴과 자세에서 그것까지 읽어내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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