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若無湖南 是無國家(약무호남 시무국가) '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도 없었을 것이다.'(임진일기-8.28) 장군 이순신이 <난중일기>에 기록으로 남긴 어록이다. 한양 건천동에서 태어나 충남 아산에서 성장한 이순신은 나이 서른 둘에 식년무과(式年武科)에 급제하여 두만강과 허천강이 마주치는 함경도 국경 수비대 동구비보에 부임한 초급 장교시절 <함경도일기>를 썼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묶어 7년간에 걸친 조일전쟁을 중언부언 하지 않는 <난중일기>로 남겼다.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국난을 극복해낸 야전 사령관으로서 엄격한 진중생활과 정확한 전투상황 및 조정을 오간 장계와 유지를 기록한 장군은 사랑하는 아내가 충남 아산에 있었지만 전장과 전선을 누비는 군인이었기에 소실 부안여자는 물론 여진(女眞)이라는 여자와 세 번 관계했으며(병신일기-9.15), 광주목사 최철견의 서출딸 최귀지와 동침했다는 사생활까지 기록되어 있는 <난중일기>에 호남인을 극찬한 내용을 남긴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임진년 개전초기. 신식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이 부산포를 유린하고 한양을 향하여 파죽지세로 북상할 때 경향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승병이 일어났다. 이러한 의병들은 제 고장 지키기에 급급했지만 고경명, 김천일, 김덕령 등 호남의 의병장들은 제 고장을 넘어서 경상도 충청도에서 왜군을 맞이하여 목숨을 걸고 싸웠다. 이러한 호남인의 넓은 마음을 영산포 장터바닥 멍석에서 장군은 깨달았던 것이다.
"신(臣)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배가 있습니다." 장군 이순신의 독백은 차라리 절규다. 임금을 능멸했다는 이유로 장군이 한양으로 압송된 이후 삼도 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 연합함대가 칠천량 앞바다에서 전멸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장군은 절망하지 않았다. 비록 12척의 배가 살아남았지만 그 배들이 쉴 곳은 해남반도 끄트머리 우수영이라는 것을 생각했을 때 마음이 편안해졌다. 12척의 전선으로 133척의 일본 함대를 울돌목에서 궤멸시켜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명량해전(鳴梁海戰)을 승리로 마감한 장군은 함대를 이끌고 북상, 당사도와 어외도, 칠산 앞바다를 지나 위도와 고군산 군도에서 한양으로 진격하는 적들에게 직산 이북으로의 진출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시위하고 수영을 목포 앞바다 고하도(초고에는 보화도로 나옴)로 옮겼다. 고하도에서 숨고르기를 한 장군은 어느 날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가 몽탄과 학다리를 지나 영산포에 닻을 내렸다. 난리통에 봉두난발을 한 백성들이 새끼줄에 발목이 묶인 닭과 콩, 팥, 조, 수수 등을 한 두 됫박씩 팔고 있는 장터에 평복으로 들어간 장군은 주모가 내주는 국밥을 멍석에 앉아 먹었다. 이렇게 호남인과 호흡을 같이 한 이순신은 말린 토란대와 고사리에 선지를 넣고 끓인 국밥이 맛있었다. 라고 작가 김훈은 <칼의 노래>에서 묘사하고 있다. 두부도 몇 점 떠있는 장국밥에 밥을 말아 먹었으며 반찬으로 나온 무 짠지와 미나리 무침이 좋았으며 수행한 안위는 세 그릇을 비웠고 모처럼 포식했다, 라고 묘사된 것으로 보아 장군은 허기진 배를 채웠을 뿐만 아니라 호남인의 넉넉한 인심을 가슴 가득 채웠을 것이다. 이러한 호남 인심을 바탕으로 수군을 재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을 것이다.
한산 통제영에서 의금부 도사에게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돼 뼈가 바스러지는 국문을 당한 후 방면되어 백의종군의 심정으로 전장에 되돌아 왔을 때 장군 이순신은 자신의 군막에 환도 두 자루와 선조 임금이 내려 보낸 면사첩(免死帖)을 걸어놓고 전투에 임하면서 이 강토에서 왜군을 쓸어낼 때까지 임금의 칼날이 장군 자신을 향하여 작동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임금을 능멸했다는 죄목으로 한산도 수영에서 체포되어 전라 좌수영이 있는 여수에서 함거에 올라 아흐레 밤낮을 털털거리며 한양으로 압송될 때 임금이 필요한 것은 장수의 용맹이었지만 역설적으로 임금이 두려워하는 것은 전라도 땅이 아니라 장수의 용맹이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서울에는 충무로가 있지만 광주에는 충장로가 있다. 그 충장(忠壯)이 곧 김덕령이다. 광주 석저촌에서 태어나 문무를 익히다 임진년 조일전쟁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킨 충장공 김덕령은 담양과 전주에서 왜군을 무찌른 여세를 몰아 진주성 싸움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우고 진주에 도원수부를 마련한 권율 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왜군과 싸웠다. 이순신 장군이 남해안 해상을 봉쇄하고 출몰하는 왜선을 추격하면 적들은 장군의 위용에 공포감을 느끼고 육지로 올라가버려 선박은 불태워 버릴 수 있지만 적들을 소탕할 수 없어 수군(水軍)으로서는 한계에 부딪혀 애를 먹고 있었다. 이때 진주에 있던 곽재우와 김덕령이 휘하 장졸들을 거느리고 선단에 승선하여 뭍으로 도망가는 적들을 추격하여 섬멸했다고 장군은 기록하고 있다(갑오일기-9.26)
'부자(父子)가 서로 잡아먹고 부부(夫婦)가 서로 잡아먹었다. 사람 뼈다귀가 길가에 쌓였다'라고 류성룡이 징비록에서 기록했듯이 장군은 도탄에 바진 백성을 먼저 생각했을 것이다. '굶주린 사람이 쓰러지면 백성들이 덤벼들어 그 살을 뜯어 먹었다'(난중잡록) '옷 없는 병졸들이 추위에 떨고 있다. 군량미는 바닥났다. 군량은 오지 않았다'(갑오일기-1,20)
하지만 백성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임금만의 권한이었고 장수는 백성을 사랑할 수 없었다. 장수에게는 오직 임금에 대한 충(忠)만이 요구되고 있었다. 때문에 장군 이순신은 우리나라를 침략한 왜군에 의해 죽는 것 보다 주군(主君)으로 모시는 임금에 의해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이 7년 전쟁 내내 유령처럼 따라다녔다.
우리에게 널리 읽히는 이순신 평전은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 후 197년이 흐른 1795년 정조대왕의 명을 받들어 유득공이 편찬한 <이충무공전서>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이순신 장군이 직접 쓴 '난중일기' 초고본과는 거리가 멀다. 원집 8권과 부록 6권으로 편찬된 <이충무공전서>는 임진년 정월 초하루부터 4월 22일까지 그리고 무술년 10월 8일부터 10월 12일까지가 송두리채 빠져있다. 뿐만이 아니다. 제1책 임진일기(壬辰日記)를 시작으로 장군이 전사하던 무술년까지를 기록한 장군의 일기는 무술일기(戊戌日記)로 끝나지만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한 당대의 학자들은 주권국가 조선이 일본을 상대로 당당히 치른 조일전쟁(朝日戰爭)의 승장 이순신이 기록한 진중일기를 전쟁일기로 명명하지 못하고 사대주의에 입각하여 <난중일기>라 기록하였다.
동인의 거두 영의정 이산해가 득세하여 서인을 싹쓸이 한 후 권력을 장악한 영남학파는 온건세력을 표방하는 퇴계 이황을 중심으로 남인(南人). 과격세력을 지향하는 남명 조식을 중심으로 한 북인(北人)으로 갈리게 되지만 모두가 경상도와 안동을 중심으로 한 영남학파였다는 것은 권력의 실체가 영남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세력이 이순신을 보는 눈이 곱지 않았을 것이고 이러한 세력의 계보를 이어온 세력이 편찬한 장군의 편전은 왜곡될 수밖에 없다. 초고본 <난중일기>에서 보이는 이순신의 호남사랑과 호남인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은 이순신의 인간적인 모습들이 전기와 평전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 그것을 여실히 말해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숙종시대 대제학을 지낸 이민서는 "의병장 김덕령이 역적으로 몰려 옥사하자 장수들은 목숨을 보전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곽재우는 군직을 떠나 야인이 되어 당쟁의 화를 피했고 이순신은 싸움이 한창일 때 투구를 벗고 앞장서서 싸우다(免 先登)적탄에 맞아 죽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호남인의 멍에로 작용하고 있는 훈요십조(訓要十條)는 차령과 금강 이남의 땅을 배역의 땅으로 규정하고 있다. 지금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훈요십조는 호남인을 신뢰하고 중용하여 고려를 개국한 왕건이 사망한 이후 정권 다툼에서 변조되었다는 설이 대두되고 있지만 고려 500년과 조선 500년을 관통하여 현재에도 살아있는 유령이다. 한양에서 태어나 충남 아산에서 성장한 이순신 장군이 호남을 사랑하였고 조일전쟁의 대미를 장식한 노량해전에서 장군은 전사하였지만 배역의 땅 이북에서 출현한 이몽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며 경상도 성주 출신으로 경상 우수사였던 배설(裵楔)이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군 선단을 맞이하여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명량해전 초기 전장을 탈영하여 선영이 있는 선산 땅에 숨어있다 체포되어 한양에서 처형된 것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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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근(ensagas)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