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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능선

《조경남 『난중잡록』 심유경 평양 회담, 황제의 칙서(勅書)를 반포하는 교서 》 [39]

작성자박희용|작성시간25.06.27|조회수12 목록 댓글 0

                                                    [南禪軒 독서일기 2025627일 금요일]

                                       《『대동야승조경남 난중잡록趙慶男 亂中雜錄

                                        심유경 평양 회담, 황제의 칙서(勅書)를 반포하는 교서 [39]

 

 

<임진년 선조 2515929>

심유경이 평양의 적진에서 나와 순안(順安)에 와서, 본국(조선)이 일본과 국교를 통하여 변란이 일어난 사실을 역관(譯官) 진효남(陳孝男)에게 물으니, 유경이 적장들의 말을 믿고 들었으므로 이 물음이 있었으니, 슬프도다. 효남이 대답하기를, “일본의 대마도(對馬島)는 땅이 가까우므로 저들이 개시(開市)를 위하여 때로 혹 왕래하나, 우리나라에서는 백여 년 동안 일본에 일체 사신을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전일에 일본이 근년 이래로 배를 만들고 군사를 훈련하여 천조에 범하려 한다는 풍문을 듣고 사람을 보내서 교린(交隣)한다 칭하고 일본에 가서 사정(事情)을 탐지한 일이 있으니, 전일에 아뢴 글 가운데 또한 진술하였습니다. 그 후로 영원히 서로 배척하고 끊어서 길이 통하지 않았고 이로 인하여 원한을 맺었습니다.” 하다.

유격(遊擊) 유경(惟敬) 이 데리고 갔던 무리가 다 나오고 다섯 사람만을 성중에 머물게 하면서 다음 달 5, 6일 사이에 유격이 두 번째 입성할 것이라 하다. 유격이 곧 송 시랑(宋侍郞 응창(應昌))에게 글을 보내어 병마(兵馬)를 재촉하여 7, 8일에는 마땅히 도착하게 하고 요동의 양향(糧餉)을 운반하여 평양에 주둔하여 뒷날의 계책을 하게 하였다.

또 효남에게 이르기를, “내가 왜장과 말을 많이 하였는데 행장이 국왕을 보고자 하였다. 내가 도리에 불가하다는 뜻으로 거절하였더니 행장이 말하기를, ‘노야(老爺)의 말이 이치가 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대장부가 식언(食言)하지 아니 할 터이라. 50일 안에 가정(家丁)을 보내고 나 역시 뒤이어 와서 서로 약속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니, 평양성을 우리에게 돌릴 일은 어찌할 터인가?’ 한즉, 행장이 지도를 내어 보이며, ‘조선 팔도에 평안도 또한 그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데 어찌해서 평양의 서쪽만이 천조의 지방이 되는가?’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본시 천조의 지방이므로 조사(詔使)가 올 적에 국왕이 이 땅에서 영접한다.’ 하였다.

행장이, ‘비록 천조의 지방이 아니더라도 이미 의정(議定)된 것이니 평양 서쪽은 곧 노야(老爺)에게 돌리고 마땅히 대동강으로 경계를 삼아서 서쪽은 대명(大明) 지방이 되고 동쪽에는 일본 지방으로 할 것이나 다만 이 성을 어느 군사로 지키겠는가?’ 하였다. 나는, ‘우리가 스스로 지키겠다.’ 하니, 행장이, ‘노야의 견해가 옳다. 조선 군사로 지켜서는 안 된다. 나는 노야의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경성으로 돌아가겠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왜장이 함경도에 있는 자가 두 왕자(王子)를 포로로 하고 있다 하니, 지금 통지해 타일러서 돌려보내고 포로 된 사람들 또한 모두 풀어주게 하며, 각처의 왜인들은 모두 돌아가라.’ 하였더니, 행장이 말하기를, ‘관백이 나를 평안도로 보냈으니 평양성은 내가 주장하지마는, 다른 도는 내가 관장하지 못한다.’ 하고, 또 말하기를, ‘지금 노야와 함께 관백에게 가는 것이 어떠한가?’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조정이 나를 시켜 다만 이 성에 갔다 오라 하고, 대동강을 건너는 데는 조정의 명령이 없으니 어찌 감히 넘을 수 있겠는가.’ 한즉 행장이 생각을 한참 하더니, ‘노야의 말이 이치가 있다. 노야는 두 사람을 시켜 봉서(封書) 한 통을 써서 관백에게 보내고, 나는 열 사람을 시켜 구봉(求封 ()에서 관백을 봉해 주기를 구함) 문서를 가지고 노야와 함께 북영으로 가면 어떻겠는가?’ 하므로, 내가 허락하였다.” 하다. 효남이 말하기를, “왜적이 언제 평양성에서 물러갑니까?” 하니, 유격이 말하기를, “천병이 크게 오면 적이 물러갈 것이다.” 하다.

이때에 임해군(臨海君)ㆍ순화군(順和君) 두 왕자가 수상(首相) 김귀영(金貴榮), 판서 황정욱(黃廷彧), 승지 황혁(黃赫), 남병사(南兵使) 이영(李榮) 및 여러 조신(朝臣) 허명(許銘) 등과 그의 내권(內眷)들까지 함께 몰래 회령(會寧) 땅에 모여 있었는데, 본도의 생원 진대유(陳大猷)가 본부의 관노(官奴) 국경인(鞠景仁)과 공모하고 청정(淸正)에게 밀통하여 불시에 야습하여 모두 포로로 잡아 경성으로 들여보냈다. 그러므로 유경이 왜장과 말하다가 끝에 왕자를 돌려 달라는 일을 언급하였던 것이다. 이영은 그 뒤에 살아와서 복주되었고, 김귀영 이하 여러 신하는 모두 귀양갔다. 황혁은 순화군의 장인이요, 허명은 임해군의 장인이다.

[첨언] 임해군은 석방되어 돌아왔으나 그의 6살 딸과 4살 아들은 가등청정에게 포로되어 구주 청정의 영지에 있는 자기 절 본국사에 위탁되었다. 아들은 일연(日延)으로 일본의 고승이 되었고, 딸은 청정의 부하에게 넘겨져 첩이 됐다. 포로로 잡혀 온 어린 소녀를 왜놈들이 마구 달려들어 능욕하고, 함께 잡혀간 조선 청년은 안 된다고 절규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이 후일 승려가 된 그의 행장기에 있다. 딸의 무덤과 소탑이 대마도에 있다. 선조는 자기 무능으로 하여 사후 광해군왕 때 큰아들을 비명에 죽게 했고, 장손자와 장손녀를 왜에 포로로 보냈다. 조선왕조실록 등 정사에는 일체 언급이 없다. 권력과 체통을 위해서라면 부모형제와 자식자손을 무차하게 죽여버리는 생리가 왕좌에 앉은 자들의 특성이었다. 하물며 신하들과 백성들이야!

경상 우도 감사가 정랑(正郞) 박성(朴惺)으로 모곡차사원(募穀差使員)을 삼다. 이노(李魯)가 글을 지어 열읍(列邑)에 통문하였는데 그 글에, “백 척의 나무 이미 빠졌다가 한 치의 뿌리에 생기가 돌아오고, 아홉 길의 산이 장차 이루어지려다가 한 삼태기가 모자라 큰 공이 이지러진다. 진실로 국가에 이로움이 있다면 의당 내 몸에 아까움이 없어야 하리라.” 하였다. 이러한 구절들은경상순영록에서 나옴.

세자 광해군이 군사와 백성에게 효유(曉諭)한 글은 다음과 같다.

왕세자는 이렇게 말한다. 하늘이 앙화를 내림에 섬 오랑캐가 침범하였으니, 각 고을이 붕괴됨에 강회(江淮)가 보장(保障)의 험함을 잃었고, 옛 서울이 함몰됨에 도성 사람이 서리(黍離)의 시를 슬피 읊는다. 구묘(九廟)가 티끌을 무릅쓰고 임금의 행차가 멀리 파천하였으며, 2백 년의 예악 문물이 하루아침에 없어졌으니 예로부터 드문 병화(兵火)의 참혹함이다. 슬프다! 우리 군사와 백성들이 혹은 칼날에 걸려 피를 뿌리며 풀밭에 쓰러지고, 혹은 부모가 잡혀가서 의탁할 바를 잃었으며, 혹은 처자가 더럽혀지고 욕을 보아 집을 보존하지 못하니, 이 원수를 생각하매 어찌 한 하늘을 이고 살랴!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뉘우침에 회복함은 기약이 없었는데 상국(上國)이 구원병을 보내어 신병(神兵)이 대동강에 모였고, 영남과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켜서 맹렬한 장사가 한강 언덕에 구름 뭉치듯 하였으니, 칼날이 이르는 바에 적의 넋이 이미 빠져나갔다. 전승의 보고가 끊이지 않고 전장에서 적의 귀를 베어 바침이 연달았으며, 더구나 적의 괴수 평수길(平秀吉)이 스스로 죽을 자리를 찾아와서 바다 위에서 죽자 남은 군사들은 기운을 잃어 항복하며 혹은 거리에서 울부짖고 혹은 영동(嶺東)으로 달아나니, 너희 장사들의 힘으로 이 망해가는 적을 멸하기는 바로 벌겋게 달구어진 화롯불에 털 하나를 태우는 격이요 도끼를 갈아 버섯을 치는 격이라 할 것이다.

내가 왕명을 받고 동쪽으로 와서 국사(國事)를 권서(權署)함에 원수를 갚고자 괴롭고 어려움을 참고 견디며 창을 베고 자며 날새기를 기다리니, 저 왜적과는 함께 살지 아니하기를 맹세한다. 너희 군사와 백성이 누구인들 우리 열성조(列聖朝)께서 길러낸 사람이 아니겠는가. 위로는 국가의 수치를 생각하고 아래로 사삿집의 욕됨을 생각하여 분기하고 적을 섬멸할 것이 정히 이때로다. 벼슬과 상은 나에게 있으니 나는 너희에게 아끼지 않을 것이다.

, 죽을 마음만이 있고 살려는 생각을 말아서 적개(敵愾)의 공을 함께 아뢰고 성상을 받들어 옛 도읍에 돌아와서 어서 내소(來蘇)의 희망을 위로하라.

경상 좌병사 박진(朴晉)이 안강(安康)에 주둔하고 흩어진 군사를 수합하여 박의장(朴毅長)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낮에는 성 밑에 달려 돌격하여 군사의 위엄을 보이고, 밤에는 산머리에다 횃불을 벌이고 포를 쏘아 놀라게 하니, 이로 말미암아 경주의 적이 숨어 나오지 못하다가 얼마 안 되어 성을 비우고 밤에 도망하다. 의장이 성에 들어가서 창고의 곡식 4백여 석을 수합하고 길도 통할 수 있게 되니, 부윤 윤인함(尹仁涵)이 기계(杞溪)에 있으면서 의장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성을 지키게 하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황제가 사신 설번(薛藩)을 보내어 행조에 와서 주상을 위로하기 위하여 조서를 가지고 오다. 조서는 다음과 같다.

조선 국왕에게 칙유(勅諭)하노라. 그대 나라가 대대로 동번(東藩)을 지키고 평소 공순함을 바쳐서 의관(衣冠)과 문물이 낙토(樂土)라 칭해졌는데, 근간에 왜놈들이 창궐하여 크게 함부로 침략해서 왕성을 함락시키고 평양을 약탈하여 점령하매 생민이 도탄에 빠져 멀고 가까운 곳이 없이 소란해지고 국왕이 서쪽으로 바닷가에 피하여 거친 들에 거처하니, 그대가 난리를 겪은 상황을 생각하매 짐의 마음이 측은하다.

어제 급하다는 소식을 전하기에 이미 변방 장수에게 영을 내려 군사를 내어 구원하게 하고 이제 또 행인(行人 외교관) 설번을 시켜 국왕에게 이르니, 마땅히 그대 조종(祖宗)이 대대로 전해온 기업을 생각할 것이요 어찌 차마 하루아침에 가벼이 버리랴. 급히 수치를 씻고 흉악한 놈들을 제거하여 수복을 힘껏 도모하라. 다시 마땅히 계속하여 선유(宣遊)하니, 해국(該國) 문무 신민은 각각 임금에게 보답하는 마음을 굳게 하고 원수를 갚는 의리를 크게 분발하라.

짐이 이제 문무 대신(文武大臣) 2()에게 명하여 요양(遼陽)의 정예한 군사 10만을 통솔하고 적을 치는 것을 도우러 가서 해국의 병마와 앞뒤로 협공(挾攻)하여 흉악한 적을 섬멸하여 남은 종자가 없기를 기하도록 하였다. 짐이 밝으신 천명(天命)을 받아서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에게 군주가 되어 있는데 방금 만국이 모두 편안하고 사해가 안정되었거늘 어리석은 이 조그맣고 하찮은 놈들이 감히 횡행하므로 다시 동남의 연해(沿海) 여러 진()에 신칙하고 아울러 유구(琉球)ㆍ섬라(暹羅) 등 나라에 선유하여 군사 10만 명을 모아 동쪽으로 일본을 쳐서 악인의 거괴(巨魁)의 목을 베어 바다 물결이 고요해지도록 하니, 벼슬과 상주는 후한 은전을 짐이 어찌 아끼랴.

대저 선대의 강토를 회복함이 이것이 대효(大孝), 군부(君父)의 환란에 급히 달려감이 이것이 지극한 충성이다. 해국의 군신은 본래 예의(禮義)를 아니 반드시 능히 짐의 마음을 잘 알아서 옛 강토를 빛나게 회복하여 국왕으로 하여금 개가(凱歌)를 울리며 환도하여 종묘사직을 지키게 하고, 길이 번병(藩屛)을 지켜짐이 먼 지방을 구휼하고 소국을 어루만져 기르는 뜻을 위로할 것이다.

공경할지어다. 그러므로 공경히 이를 선유하고 행인 설번을 시켜 받들고 조선에 달려가서 국왕 및 문무 신민에게 선유하노니 힘써 수복을 도모하기를 시행하라.

8도 신민에게 선유하는 교서는 다음과 같다.

우러러 생각하건대, 황천이 우리나라가 왜적에게 침략받은 것을 심히 불쌍하게 여겨 특별히 행인(行人) 설번을 보내어 성지(聖旨)를 선유하고 인하여 크게 군사를 보내어 적을 쳐서 우리의 생령(生靈)을 건지고, 우리의 강토를 회복시켜 주려고 기필하시었다.

그래서 힘이 1천 근의 중령을 들어 낙천근이라고 불리는 참장(參將) 낙상지(駱尙志)를 시켜서 남방의 정예한 화포수(火炮手)로 혼자서도 1백 명을 당해내는 자 5천 명을 거느려 선봉으로 삼고, 광녕총병관(廣寧總兵官) 양소(楊韶)는 요병(遼兵) 및 가정(家丁)ㆍ달자(㺚子)ㆍ철기(鐵騎) 3만 명을 거느리고 다음이 되며, 병부 상서(兵部尙書) 송응창(宋應昌)은 소진(蘇鎭)ㆍ산동(山東)ㆍ산서(山西)ㆍ선부(宣府) 등의 대군을 통솔하여 뒤이어 와서 육로로는 평양으로 달려가서 바로 공격하여 소탕하고 수로로는 두 패로 나누어, 수륙 모든 군사가 모두 경성에서 모여 멀리 몰아 남쪽으로 내려가기를 약속하였으니 전장(戰將)3백 명이요, 군사가 무릇 70만 명이다. 천병의 위엄으로 이 조그마한 오랑캐를 치는 것은 비유컨대 태산을 들어 새알을 누르는 것과 같을 것이다.

! 너희 대소 서민들은 조종의 옛 백성으로 이제 함몰되어 섬 오랑캐를 위하여 복역(服役)하고 혹은 그 부모와 처자를 잃었으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아니하랴. 어찌 원수 갚을 뜻이 없으랴. 마땅히 각각 힘을 다하고 분발하여 왜적을 베어 공을 바치면 난이 평정되는 날에 공신(功臣)을 녹()하여 은택이 후손에게 미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천병이 멀리 몰아 짓밟을 즈음에 반드시 옥석구분(玉石俱焚)의 근심을 면치 못할 것이니 비록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각기 힘써서 공을 바치라. 왜장 한 놈을 베는 자는 신분을 따지지 않고 가선대부에 승진시킬 것이요, 왜적의 머리 한 개를 베는 자는 공신이 되고 적중에 들어 있던 자도 왜적을 베어 가지고 나오면 죄를 면할 뿐 아니라 아울러 그 공을 녹할 것이다. 모두 알라.

황제의 칙서(勅書)를 반포하는 교서는 다음과 같다.

왕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임금답지 못하여 이렇게 천고에 없던 적변을 당하여 삼경(三京)을 지키지 못하고 여기저기 파천하며 종묘사직이 폐허가 되고 생령이 어육이 되었으니 천지와 조종에게 죄를 얻음이 지극하도다. 오직 우리 성천자(聖天子)께서 생각하고 구휼하기를 자성(子姓)의 나라와 같이 보아 전후로 군사를 크게 발하여 만 리에 달려와 구원하고 은() 2만여 냥을 주어 군수(軍需)를 하게 하니, 지금껏 지탱하여 한구석을 보존할 수 있는 것은 추호도 모두 황제의 은혜로다. 이제 또 특별히 사신을 보내어 과인에게 대효를 힘쓰라 하고 신민들에게 지극한 충성을 힘쓰게 하여, 한 통의 윤음이 정녕하고 간절하여 귀에다 대고 타이름과 같을 뿐만이 아니니, 다 읽기도 전에 울음소리와 눈물이 함께 나오는구나.

스스로 생각하건대 박덕한 몸이 어찌하여 이것을 천조에 얻었는고. 불행 중의 다행히 이보다 더 클 수가 없노라. 무릇 혈기 있는 자로서 이 칙유를 보는 이는 누군들 감동되고 격동되어 정성을 다하여 적을 치기로 생각하지 아니하랴. 이에 별지에 등서하여 각 도에 게시하노라.

! 360여 고을에 어찌 충의 호걸의 선비가 적으랴마는 당초에 변란이 갑작스레 일어난 데다 태평을 누린지도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진실로 방위하는 힘을 바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들이 더욱 원한을 쌓았고 선비들은 분발하기를 생각하며, 적도 또한 지극히 흉악함을 저지르던 나머지 조금 쇠하여 하늘이 우리에게 앙화를 내린 데 대해 뉘우침을 성하게 볼 수 있으니, 적을 꺾어 소탕함이 정히 이 기회에 있도다.

무릇 너희 대소 인민은 비록 과인을 생각지는 아니하더라도, 홀로 우리 선왕의 남기신 덕택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비록 우리 조종이 남긴 덕택을 생각하지는 아니하더라도, 홀로 성천자의 은혜로운 뜻을 생각하여 너희 부모 형제와 처자의 원수를 갚지 않겠는가. 힘쓸지어다. 힘쓸지어다.

[한국고전종합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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