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禪軒 독서일기 2025년 8월 4일 월요일]
《『대동야승』 中 조경남 『난중잡록』 趙慶男 亂中雜錄
이원익, 권율, 이순신 등의 왜적 재침 대비 》 [92]
<1597년 정유년 1월 ~ 2월 만력 25년, 선조 30년>
○ 1월 5일 부천사(副天使) 심유경(沈惟敬)이 영남으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였다가, 11일에 출발하여 서울로 향하고, 인하여 명나라로 돌아갔다.
○ 6일 한효순(韓孝純)이 전라 좌수영에 도착하자 이순신(李舜臣)이 한산도로부터 나와서 적을 막을 일을 상의하였다. 이튿날 부찰사(副察使)는 순천으로 돌아갔다.
○ 1월 10일 크게 바람이 불고 비가 왔다. 청정(淸正)이 병선 1만여 척을 거느리고 대마도로부터 바다를 건너와서 다시 서생포(西生浦)ㆍ두모포(豆毛浦)ㆍ죽도(竹島) 등의 옛 보루를 수리하였다.
이때에 이순신이 좌수영으로부터 한산진으로 돌아가다가 중도에 풍우를 만나 남해현(南海縣)에서 정박하는데, 정탐하는 배가 달려와 경상 좌수영이 소식을 보고하기를, “요시라(要時羅)가 사적으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미 이달 10일 비바람이 부는 가운데에 청정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와서 다시 옛 병영으로 들어갔다 합니다.” 하였다.
○ 변방의 보고로 적병이 크게 이른 것을 알고 배신 권협(權悏)을 보내어 중국에 아뢰는 글을 가지고 가서 급함을 고하였다.
○ 도제찰사가 재촉하는 일로 다음과 같이 명령하였다.
「청야(淸野)하는 한 가지 일은 적을 방어하는 데 있어 가장 관건인데, 어렵지 않은 일을 진작 거행하지 아니하니 지극히 해괴하다. 종사관을 나누어 보내어 적간(摘奸)할 때에 각 고을 수령과 각 면의 도유사(都有司)와 이(里)의 유사 등을 군령에 종사하게 하여, 재삼 명령하여 말린 연후에 죽음을 받아도 한이 없도록 하라. 각처의 인민이 산성을 싫어하고 꺼려서 다른 고을로 옮겨 피한 자는 왜적에게 붙은 자이니 일일이 적발하여 먼저 목을 베고 난 뒤에 보고할 일이다.」
이상을 3도에 관문(關文)으로 보내었다.
[첨언] 다른 고을로 피난한 백성을 왜적에 붙은 자로 몰아 일일이 적발하여 먼저 목을 베고 난 뒤에 보고하도록 한 명령은 매우 지나치고 잘못됐다. 백성들이 모두 왜적에 죽지 않고 도체찰사의 손에 족게 생겼다. 참으로 답답하고 고지식한 명령이다. 싸울 수 있는 장정들은 관군과 함께 산성에 들어가더라도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져 어디로 가든지 자기가 구명도생해야 한다. 도체찰사 이원익은 지혜가 원만한 인물인데 왜 이런 무리한 명령을 내렸을까 궁금하다.
○ 이원익(李元翼)이 권율(權慄)과 의논하여 호남 군사 1만 명을 징발하여 군사를 나누고, 광양 현감으로 장수를 정하여 거느리고 와서 영남에 교부하게 하되, 담양ㆍ남원 등 산성이 있는 일곱 고을에는 군사의 징발을 제외하였다.
○ 남원부의 쌀과 콩과 첩입관(疊入官)인 운봉ㆍ장수ㆍ진안ㆍ임실ㆍ구례ㆍ곡성 등 여섯 고을의 쌀과 콩을 모두 교룡 산성(蛟龍山城)으로 실어 들이고, 각 고을의 아문을 성내에 설치하여 장차 모두 아문의 관할로 들이게 하고, 대소 인민은 모두 막(幕)을 지어 가속을 데리고 들어가 거처하도록 하였다. 각도 각읍의 산성에 다 그렇게 하였다.
○ 도체찰사는 단결을 위한 일로 다음과 같이 명령하였다.
「각도 각 관아에서 향병(鄕兵)을 모집하여 수효가 많기를 기하고, 명망이 있어 아랫사람을 통제할 만한 자로써 주장(主將)을 삼고, 그 고을에 무사 및 수령의 군사 가운데 무재(武才)와 용략(勇略)이 있는 자를 영장(領將)으로 정하여 각기 그 관아의 나장(羅將) 5인을 데리고 가도록 허락하고, 무릇 군무(軍務)에 관한 것은 영병장(領兵將)이 직접 체찰부에 보고하되, 문서는 관인(官人)에게 주어서 왕래하도록 하라. 전직 조관(朝官)이나 생원과 진사 중에서 물망이 있는 자를 도청유사로 선택해 정하여 고을에서 문서에 능한 2명을 불러 사환으로 삼도록 허락하라. 조련군으로 군적을 만든 외에 빠진 남정과 전직 조관과 생원ㆍ진사ㆍ교생(校生)ㆍ좌수(座首)ㆍ한량ㆍ재인ㆍ백정을 60세 이하 15세 이상은 빠짐없이 책을 만들어 별갑(別甲)으로 정하고, 조군(漕軍)ㆍ수군(水軍)으로 전에 도피한 자는 한량의 예에 의하여 소속시키고, 양반의 종은 3명에 1정(丁)을 취하고, 부자가 동거하는 자는 그 아들을 취하고, 삼부자가 동거하는 자는 두 아들을 취하고, 활과 화살을 각자가 준비하고, 화약과 조총은 관(官)에서 준비해 주고, 단결 훈련하여 죽음으로써 동맹하였다가 변방의 보고와 전령을 따라 즉시 거느리고 달려가되 일체 체찰부의 분부를 따르고, 원수(元帥) 이하는 절제하지 못한다. 운운.」
이상을 3도에 관문으로 보내었다. 이때에 이원익이 초계(草溪)에 있으면서 진주(晉州)로 하여금 제석당 산성(帝釋堂山城)을 쌓게 하였다.
○ 밀양인 이대천(李大川)과 구례인 성진실(成眞實)이 장군이라 자칭하고 망령되이 선문(先文)을 내기를 김덕령의 일과 같이 하였으므로 체찰사가 듣고 매우 기뻐하여 군사를 허락해 주고 충의로써 격려하였더니, 그 뒤에 속이고 망령된 것이 드러나 베임을 받았다.
○ 28일 도원수가 경상 우병사 김응서(金應瑞)로 하여금 평행장(平行長)을 함양(咸陽)으로 청하여 잔치를 대접하게 하고, 인하여 청정의 적정을 탐지하였다.
○ 2월 이순신이 아뢰기를, “신이 힘을 다하여 바다를 건너는 적을 막고자 하였으나 마침내 군기(軍機)를 놓쳐서 적으로 하여금 상륙하게 하였으니 신은 죽어도 남는 죄가 있습니다. 다만 각 고을 수령 등이 수군의 일에 전혀 마음을 쓰지 않는데, 그중에서도 남원ㆍ광주가 더욱 태만하였으니, 청컨대 명령을 내려 목을 베어 군중에 보여서 하나를 징계함으로써 백을 북돋우소서. 운운.” 하였다. 비변사에 계하(啓下)하기를, “부체찰사로 하여금 두 고을 원을 문초하라.” 하였다. 그 뒤에 부체찰사가 순천에서 두 원을 잡아다가 치죄하였다.
○ 권율이 대구에 머물면서 각도의 군사를 모은 것이 모두 2만 3천 6백 인이었다. 장수를 정하여 적의 오는 길에 나누어 방어하게 하였다.
○ 원수(元帥)의 분부로 남원 판관 이덕회(李德恢)가 부(府)에 있는 총통(銃筒) 1천 자루를 대구에 가져다가 바쳤다.
○ 11일 남원 부사 최염(崔濂)이 산성 별장 신호(申浩)와 더불어 7읍의 군사를 모아 산성을 지킬 절차를 준비하였다.
○ 명나라에서 특별히 군사를 내고 은(銀)을 내어 두 번째 구제하기를 허락하므로 배신 윤승훈(尹承勳)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사은하였다. 병부(兵部)에서 태복시(太僕寺)를 시켜 마가은(馬價銀) 2천 냥을 지출하여 오는 배신에게 주어 스스로 초약(焇藥)을 사도록 하고, 차량(車輛)을 연도(沿途)에서 번갈아 보내주었다. 우첨도어사 도찰원군문(都察院軍門) 정4품 양호(楊鎬)를 보내어 경리조선군무로 삼아서 조선으로 나오는데, 먼저 고시(告示)를 내어 군사를 금지시켰다. 《고사(攷事)》에서 나왔다. 또 심유경(沈惟敬)을 조선에 보내어 먼저 적정을 탐지하게 하므로, 심유경이 중도에서 돌아와 서울에 이르렀다.
[한국종합고전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