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禪軒 독서일기 2025년 8월 28일 목요일]
《『대동야승』 中 趙慶男 著 『續雜錄 속잡록』
갈수록 깊어지는 광해 왕과 인목대비의 갈등 》 (132)
<1615년 을묘년 만력 43년, 광해군 8년>
○ 이원익(李元翼)은 소를 올려 대비를 모실 것을 청했는데, “신은 이전 조정의 늙은 신하로서 충성은 정온에게 미치지 못하며, 죽음은 이덕형(李德馨)보다 앞서지 못하여 나라를 잊고 임금을 속였사오니 만 번 죽음을 피하기 어렵사옵니다.” 하였다. 윤인(尹訒)이 팔뚝을 휘두르면서 이원익을 죽이기를 청하였으나 윤허를 하지 않다가, 정조(鄭造) 등의 탄핵이 끊이지 않았으므로 곧 파직하여 내쫓을 것을 명하여 중도부처(中途付處)하였다. 때문에 충원(忠原)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으면서 항상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쉬고 친구들이 도와주어도 한 되나 한 말의 곡식이라도 받지 않고 몸소 짚자리를 엮어 집안사람들을 거느렸다.
[첨언] 윤인과 정조는 이원익과 같은 군자를 팔뚝을 휘두르며 죽이기를 청한 천하에 고약한 난신적자들이었다. 그러나 화무십일홍이라더니 결국 1623년 둘 다 망나니가 휘두르는 칼날에 목이 떨어졌다. 정조는 1617년 목천현감 박기현을 세 번이나 모함하며 파직을 청하는 계를 올렸다.
○ 동학(東學)의 유생 조경기(趙慶基) 등이 상소하기를, “아뢰옵나이다. 신이 들은 바에 의하면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요(堯)ㆍ순(舜)의 도가 아니면 감히 임금 앞에서 진술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고금 천하에 현명한 인금과 의리 있는 임금으로서 칭송할 만한 분이 어찌 적겠습니까. 그런데도 반드시 ‘요ㆍ순’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임금으로서 요ㆍ순의 도로서 자처하지 않으면 임금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이며, 신하로서 요ㆍ순의 도를 가지고 임금을 인도하지 못하는 자는 신하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자입니다.
지금 국운이 불행하여 계속 우환을 만나고, 난역(亂逆)의 변고가 번갈아 발생하여 추대한다는 비밀 계교와 옹립한다는 흉악한 역모로써 의(㼁)를 지목하였으니, 이는 종묘의 화근이요, 신하와 백성의 큰 원수입니다. 전하에게는 비록 천륜의 중함과 동기의 친함이 있다고 하더라도 왕법(王法)에 있어서는 가감(加減)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전(慈殿 대비)에 대해서는 의(㼁)의 자전만이 아니요 곧 전하의 자전이시니, 의(㼁) 때문에 자전께 대하여 경중을 따져서는 안 되옵니다. 신하 된 자는 진실로 의당 임금을 요ㆍ순의 도로써 인도하여 그 임금이 요ㆍ순의 정치를 베풀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진사 이위경(李偉卿) 등은 앞장서서 상소문을 올려 모후(母后)를 추악하게 헐뜯었고, 전 장령(掌令) 정조ㆍ윤인의 무리들은 경전(經傳)을 멋대로 인용하고 악한 마음을 같이해서 인피하였습니다. 그 패악(悖惡)함을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혹은 애강(哀姜)이 주 나라로 도망한 데에 비깁니다. 애강(哀姜)이 노(魯) 나라로 시집감에 노(魯) 나라 장공(莊公)이 그의 어머니를 능히 막지 못하여 예절과 시기를 거스르면서 원수의 딸을 취(娶)하게 되어 인륜이 시초가 이미 바르지 못하였으므로 후에 애강(哀姜)이 경보(慶父)와 사통하고 두 임금을 시해하였으니 노 나라의 신하들은 의리로 보아 함께 하늘을 이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경서(經書 춘추〈春秋))에는, ‘주(邾) 나라로 도망갔고, 이(夷)에서 죽었다. 제 나라 사람들이 부인(夫人 애강)의 시체를 가지고 제 나라로부터 도착하였다.’고 한 것은, 애강을 깊이 배척한 것입니다.
그런데 선왕의 가례(嘉禮)가 인륜의 시초를 어지럽힌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자전의 과실에 또한 애강의 추악함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혹은 염후(閻后)가 이궁(離宮)으로 옮겨간 것에 비교하기도 하옵니다만, 염후의 과실이 비록 하나둘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손정(孫程)이 권세를 희롱한 것이 이미 군자의 자처하는 도리가 아니며, 폐위하고 옹립한 일도 또한 제음(濟陰)이 참여하여 안 것이 아니오니, 감히 오늘날 증거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설령 세 역적의 말이 모두 옳더라도,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서 숨기고,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서 숨기는 것이 옳다고 하였으니, 존귀한 이(임금)와 친한 이(부모)와 어진 이를 위하여 숨겨 주는 것이 또한 《춘추(春秋)》의 의리이니, 전하에게 자전의 과실을 들추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모자의 도리가 끊어졌다.’고 한 것은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이며, ‘명백하게 마땅히 끊어야 할 죄악이 있다.’고 한 것은 무엇을 가리킨 것이며, ‘장차 국모로서 대우할 것인가?’라고 한 것은 무슨 소견으로 한 것이옵니까? 세 역적도 선왕에게서 어찌 은혜로운 대우를 받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선왕을 저버리면 또한 다른 날에 전하를 저버릴 것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세 역적의 흉패한 것 따위는 진실로 말할 것도 없습니다. 대신(大臣)은 전하의 팔다리와 같은데 이를 보고도 말하지 않고, 삼사는 전하의 눈귀와 같은데 이를 편하게 여겨 간쟁하지 않으며, 정원은 전하의 목구멍과 혀와 같은데 이를 좇을 뿐 간언하는 도리를 행하지 않습니다. 단지 의논을 다르게 주장하는 것을 능사로 여기고 본래의 관직을 바꾸는 것을 일삼을 뿐이니 그 밖에 떼 지어 몰려다니는 무리들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제갈량(諸葛亮)은 한 나라 후주(後主)에게 일러 아뢰기를, ‘시위(侍衛)하는 신하가 안에서 게으르지 않고, 충성스러운 뜻을 가진 선비들이 밖에서 자기의 몸을 바치는 것은 대개 선제(先帝)의 특별한 대우를 추모하여 폐하에 보답하려는 것이옵니다.’ 하였습니다. 저 대신과 삼사와 정원의 관원들은 모두 선왕께서 특별히 대우한 신하들이니, 마땅히 전하의 조정에서 보답할 것을 꾀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선왕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세 역적의 흉패함을 예사로 알아서 하늘의 토벌을 죄 있는 자에게 행하지 못하도록 하여 천지간에 흉악한 죄인이 숨을 쉬고 살도록 하였습니다. 신 등이 생각하기로는 대신과 삼사와 정원은 모두 죄가 있습니다.
아! 세 역적의 계책이 결코 그대로 될 이치가 없으나 저들의 설계대로 된다면 만대 후에 전하를 어떠한 임금이라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저 이위경ㆍ정조ㆍ윤인 등은 전하의 죄인일 뿐 아니라 실로 선왕의 죄인이요, 선왕의 죄인일 뿐 아니라 실로 만고(萬古) 강상(綱常)의 죄인입니다. 신 등은 그러므로 윤인 등 세 역적을 참수하지 않는다면 삼강은 없어지고 구법(九法)은 파괴되며, 예악은 무너지고 이적(夷狄)이 횡행하게 될 것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금수(禽獸)가 되지 않을 사람이 도대체 몇이나 되겠습니까? 신은 이위경ㆍ정조ㆍ윤인 등을 유사(有司)에게 맡겨 극형에 처하도록 하시어 사직과 하늘에 계신 혼령을 위로하시고, 온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위대한 성인(聖人)의 순효(純孝)하심을 알게 하신다면 어찌 성사(盛事)가 아니겠으며, 어찌 통쾌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첨언] 동학(東學)의 유생 조경기(趙慶基) 등이 목숨을 내놓고 이위경ㆍ정조ㆍ윤인 등 세간신을 극형에 처하기를 상소했다. 그러나 광해 왕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동학의 유생들이 결코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골병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 군수ㆍ변장(邊將)ㆍ내직(內職)ㆍ외임(外任)을 제수할 때, 돈으로 사들이는 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러나 다소(多少)의 한도가 있었으며 이조 판서는 값이 비싸므로 바라보기가 어려워 참판과 함께 비워 두었다. 참의 이정원(李挺元)만이 홀로 흉악한 무리들에게 아부하고 궁궐 안 사람들과 결탁하여 정권을 독차지한 지 7ㆍ8년에 부유함이 왕공(王公)에 비길 만하였다. 위로 감사ㆍ병사(兵使)ㆍ수사(水使)로부터 아래로 권관(權管)ㆍ찰방에 이르기까지 천냥 백냥 하는 식으로 모두 정해진 액수가 있어 값에 따라 주의(注擬)하고, 낙점도 또한 이런 액수로 정하였다. 김 상궁(金尙宮)이 붓을 잡고 마음대로 하니 임금도 어떻게 하지 못하고, 6명의 시위(侍衛)와 10명의 소원(昭媛)들도 머리를 모아 낙점을 애걸할 때에는 김 상궁이 없는 때를 엿보고, 김 상궁이 나타나면 흩어졌다. 아! 세상일이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는가? 시정(市井)에서 돈을 빌리고, 민결(民結)에서 값을 징수하였다.
[첨언] 광해 왕의 총애를 받는 김개시가 매관매직의 선두에 써 있다. 이런 상태는 이미 나라가 아니다. 어찌 새 임금이 서지 않겠는가.
○ 큰 가뭄으로 벼의 싹이 다 말라 죽고, 샘과 우물들도 모두 말라 버렸다.
○ 남원(南原)의 북면(北面)에서는 암소가 머리 둘 달린 송아지를 낳았는데 울면 소리가 두 입으로 나왔다.
○ 북청문(北靑門 서울의 북문인 숙청문(肅淸門)을 말함)의 바위굴에서 술떡 같은 물건이 흘러나왔는데, 그것을 먹으니 진짜와 같았다느니, 또 집돼지가 사람을 낳았느니, 돌부처가 움직여 춤을 추었느니 하는 말이 있었다. 6월에 대사령(大赦令)을 내리고 임금이 친히 기우제를 지냈다.
○ 밤중에 도승지 한찬남(韓纘男)의 집 대문에 쓰여 있기를
경서에 밝은 어진 선비가 이 때에 성대하게 많으니 / 明經賢士盛於斯
2백 년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로다 / 二百年來始見之
일곱 경서의 대문에 모두 통을 받기를 스스로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으니 / 七大文通從自願
어둠 속의 발자취를 귀신만은 알리로다 / 暗中蹤跡鬼神知
하였다. 한찬남은 이이첨(李爾瞻)ㆍ허균(許筠)과 친교를 맺어 심복이 되어서 크게 국가시험의 폐해를 저질렀으니, “자원하는 대로 따랐다.[從自願]”는 세 글자로 당시의 일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 유학(幼學) 조직(趙溭)이 상소하기를, “아! 전하의 하늘에까지 사무치는 효성에도 불행히 전에 없었던 변고를 만났습니다. 의당 천리(天理)의 떳떳함을 잃지 않아야 되는데도, 혹 인륜의 지극함을 다하지 못하여 후세의 조롱을 면치 못할 것이 있는 듯하오니 그것이 성덕에 누가 됨이 심히 크지 않겠습니까? 신이 듣자오니, 인륜에 다섯이 있는데, 어버이와 자식 간의 사랑이 첫째에 있다고 하옵니다. 그러므로 온갖 행실의 근본은 효(孝)라는 한 글자에 있는 것이옵니다. 순(舜)임금이 천하에 법도가 되어 후세에 전하여질 수 있었던 까닭은 그분이 완악하고 사나운 부모를 모시고 있었으면서도 능히 효성으로써 화합하고 능히 즐겁도록 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고수(瞽瞍 순의 아버지)가 완악하고 사나워 죽이려고 하는 마음을 갖지 않았었고, 순임금도 부모를 섬기는 데 효성스럽게 섬기고 잘 어울리도록 하는 정성이 없었더라면, 순임금의 신상(身上)에는 본디부터 대효(大孝)의 이름은 없게 되었을 것이오며, 천하의 법도가 되지도 못하고 전하여져서 후세에 미치지도 못했을 것이옵니다. 자전(慈殿)께서 비록 전하를 사랑하지 않으실지라도 전하께서는 위대한 순임금이 어버이를 모시던 도리로써 그분을 섬기지 못하시겠습니까?
오늘 자전의 죄를 따지는 자들이 한편에서는, ‘어머니의 도리가 이미 끊어졌다.’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뚜렷이 끊어버려야 할 죄악이 있다.’ 하니, 원통한 말입니다. 무릇 사람의 자식으로 부모의 과실을 말하는 것은 비록 여항(閭巷)의 보잘것 없는 백성이라도 또한 감히 하지 못하옵는데, 감히 우리 임금님의 앞에서 차마 자애로우신 어머니의 죄악을 들추어낼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여항의 보잘 것 없는 백성에게도 감히 하지 못하는 짓을 우리 임금님에게 대하는 것이오며, 법도로 삼아 전할 수 있는 도리로써 우리 임금님에게 바라지 않는 것이니 불경함이 이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마땅히 크게 불경을 행한 것에 해당하는 율법에 처하여야 하는데도 법은 가하여지지도 않고, 화려하고 현달한 관직을 띠고 있으니, 이는 신하와 백성의 이목이 놀라고 심지(心志)가 무너져서 스스로 멈출 수 없는 바입니다.
이와 같기 때문에 나라에 언론이 떠들썩하게 되어, 의심해서는 안 될 곳에 의심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견문(見聞)이 미치는 바를 감히 숨기지 못하여 이원익(李元翼)의 차자가 나오게 된 것인데, 상감의 비답(批答)에는, ‘불초한 짐이 대비를 받들어 모시는 것과 여러 신하들이 조정에서 알현하는 것이 전날과 다름이 없는데, 경은 어디에서 황당한 말을 얻어듣고 문자로 나타내어 여러 사람의 귀를 놀라게 하는가?’ 하신 것이 있습니다. 신은 마음속에서 혼잣말로 우리 전하께서 지성으로 대비를 받듦이 이와 같이 지극하신데도 오히려 이런 말이 들리게 됨을 면치 못하였으니 말의 망극함이 어찌 이에 이르렀습니까. 이원익을 늙고 망령하다고 여기지 않을 수 없으며, 다시 전하께 의심을 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어(移御)하신 이후로 두 궁궐에 각기 거처하시어 음식을 돌보시는 일을 오래도록 비우시고, 조석으로 문안드리는 일도 또한 폐하십니까?
한결같이 생각하시는 효성이 비록 전날보다 못하시지 않을지라도, 귀나 눈으로 듣고 보기에는, 혹 신하들의 의심이 없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신이 고개를 뽑고 발꿈치를 들어 전하께서 고치시기를 바라는 지가 한 달 이상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상감께서 측은히 여기신다는 소문이 없고 새벽 문안이 종시 없으시니, 신의 미혹됨은 이에 이르러 심하옵니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부모가 사랑하면 자식도 또한 사랑하여 개와 말에 이르기까지 다 그러한데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랴?’라고 했습니다. 이것으로써 보면 전하께서는 대비를 마땅히 사랑하셔야 하겠습니까? 사랑하시지 말아야 하겠습니까? 선유(先儒)의 말에, ‘순임금이 고수(瞽瞍)를 섬기어 즐겁도록 한 것은 아들의 직분을 다하여 즐거운 바탕을 만든 것이다.’라고 한 것이 있습니다.
아! 대비께서는 바로 전하의 어머니이며,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은정은 하늘이 내려주신 떳떳한 본성이온데, 쓸쓸한 옛 궁궐에서 귀신들과 이웃하여 하늘의 해와 격리된 지 이에 석 달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름에 겨워 피눈물을 흘리고 있으니, 선왕이 대비를 전하께 부탁하신 것이 반드시 이와 같기를 바라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한밤의 여가에 전하의 마음에도 가엽게 여기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시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대비를 같은 궁 안에 모시지 않으며, 정성(定省)의 예를 받들지 않으며, 음식을 돌보는 효성을 행하지 않으시면서, 다만 이원익을 죄줌으로써 그 일을 씻어 넘길 생각을 한다면, 이것은 끓는 물을 가지고 끓는 것을 멈추려고 하는 것과 같은 일이옵니다. 잘 받들고 잘 조화시키는 효성이 법도가 되어 후세에 전할 수 있는 도리는 아마 이와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 아홉 겹 깊은 궁궐 속에서 면류관을 깊이 쓰시고 크고 작은 바깥세상의 의논을 어떻게 아시겠습니까? 신하 된 자는 마땅히 황급하게 아는 것은 말하지 않는 것이 없어야 하는 것이 그 직분입니다. 그러나 대신들은 깨우쳐 드리는 도리를 행하지 않고, 삼사(三司)는 비위만을 맞추는 뜻만 가지고서 세월을 끌 뿐 한 사람도 언급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극히 효성스러운 임금의 마음으로 하여금 점차로 훌륭하게 끝내시도록 하지 못하는 데에 이르게 하니, 장차 저들 대신과 삼사를 무엇에 쓰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모자(母子)의 정의에 마음을 두시고 간사한 말에 미혹되지 마시어 자전을 받드시는 데 처음과 같은 성대한 은덕을 다시 보내신다면 어찌 전날의 과실을 덮고 새로운 교화를 밝히시는 데 부족하겠습니까?
아! 전날에 소를 올렸던 유생들도 또한 오늘의 일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자전에까지 언급하였다가 엄중하게 우레같은 위엄을 입었으므로 그후로는 사람들이 모두 혀를 매어두고 말하기를 경계하였습니다. 그래서 전하께서는 그 얼굴을 보지 못하였거든 그 그림자를 살피라는 것을 생각하시기 원하옵니다. 신이 듣자오니, 계축년 가을에 집의 신경락(申景洛)이 아뢴 말에 답하시기를, ‘평상시에 대비께서 별궁(別宮)에 옮겨 계신 적이 많다.’ 하셨는데, 신은 본래부터 각기 거처하실 마음이 계신 줄은 아오나, 그 끝을 보지 못하므로 다만 스스로 사사로이 애통하게 여길 뿐이었습니다. 대비께서 이어(移御)하신 후에는 즉시로 마땅히 상소를 올려 생각을 아뢰어야 될 것이온데, 그대로 보고 지내다가 오늘날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즉시 바로잡지 못한 과실을 어찌 면할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지체한 죄부터 먼저 다스리시고, 또 대신들이 말하지 않은 것과 삼사가 쟁론하지 않은 것을 책망하시고, 이어 애통하게 여기시는 조서(詔書)를 내리시어 온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대성인(大聖人)의 효성이 우순(虞舜)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모두 알게 하신다면, 만고의 이미 무너진 강상(綱常)을 밝히실 뿐만 아니라, 후세에 전하는 데에도 또한 장차 빛이 있게 될 것입니다.
이윤(伊尹)은, ‘내가 이 임금으로 하여금 요(堯)ㆍ순(舜)이 되게 하지 못한다면 마음 부끄럽기가 마치 시장에서 매를 맞는 듯하다.’ 하였고, 맹자(孟子)께서도, ‘나는 요임금과 순임금의 도가 아니면 감히 임금 앞에 들이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요임금과 순임금의 도란 효성과 우애일 뿐입니다. 신이 말씀드린 것도 실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옵니다.” 하였다.
조직(趙溭)은 그 때에 나이 20이었다. 대북(大北)의 간당(奸黨)인 박승종(朴承宗)의 사주로 옥에 여러 해 갇혀 있었고, 형벌과 심문을 여러 차례 받았다. 계해년에 은혜를 입어 창녕(昌寧) 원에 제수되었다.
○ 진사 소명국(蘇鳴國 익산(益山) 사람)은 천성이 음험하여 고향에 있을 때는 패악한 행동이 많았고, 성균관에 있을 때도 흉악하고 간사한 일이 있었다. 본군(本郡)의 선배들이 연명(連名)으로 상소하여 알리고, 양사(兩司) 대관(臺官)들이 합계하여 죄 주기를 청하였다. 그래서 의금부에 체포해다가 가두고 추국을 하니, 소명국은 은밀하게 고하기를, “장령 윤길(尹趌)과 정언 양시진(楊時進) 등이 부사(府使) 신경희(申景禧)와 몰래 역모를 꾀하여 능창군(綾昌君)을 추대하려고 하였습니다. 신이 그 일의 본말을 듣고 알았으므로 먼저 신을 제거하여 말 뿌리를 없애려고 하였습니다.” 하니, 즉시 윤길(尹趌) 등 여러 사람들을 잡아다가 국문하였으나 불복하였는데도 모두 극형에 처하고, 능창군은 교동(喬桐)에 안치하였다가 죽이었다. 소명국은 용서를 받았으나, 그 후에 나라를 원망한 죄로 죽었다. 능창군은 정원군(定遠君)의 둘째 아들이다.
○ 윤8월 13일 성릉(成陵 광해군의 생모 공빈 김씨의 묘)을 태묘에 모시고, ‘융봉현보무정중희(隆奉顯保懋定重熙)’라고 존호를 올리고, 증광시를 보이었다. 광해군의 친어머니는 일찍이 경술년에 제명(帝命)을 받고 추숭(追崇)되었었다.
○ 8도에 크게 흉년이 들어서 각도에 명하여 재상(災傷)을 당한 사람들에게는 공채(公債)를 반감하여 풍년이 들 때까지 연기하도록 허락하였다.
○ 성주(星州) 사람 이창록(李昌祿)은 광해군이 자전(慈殿)을 각박하게 대우하는 것을 원통하게 여기고 한 말에, “양심 없는 사람을 우리가 임금으로 삼겠는가?” 하였다. 그래서 정인홍(鄭仁弘)이 이 변고를 올리니, 조정에서는 이창록을 잡아다가 국문하고 죽였다. 그리고 대역(大逆)으로 논하여 성주부(星州府)를 혁파하여 고령(高靈)에 부쳤다가, 얼마 후에는 강등시켜 신안현(新安縣)으로 만들었다.
[한국고전종합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