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禪軒 독서일기 2025년 9월 12일 금요일]
《『대동야승』 中 趙慶男 著 『續雜錄 속잡록』
이이첨(李爾瞻)이 상소하기를》 (144)
<1619년 기미년 만력(萬曆) 47년, 광해군 12년>
○ 당초에 4로(路)로 나누어 진병하였는데, 여기에 와서 듣고 보니 무순(撫順)에서 양진(兩陣)이 패배한 후로는 다시는 진병이 없었으므로, 호병(胡兵)의 대세는 오로지 동로(東路)로 옮겨갔다. 현군(懸軍)이 깊이 들어가자 갑자기 큰적을 만났다. 그러므로 여기에 이르러 우리 군사는 명 나라 장수가 앞장을 서서 예(例)에 따라 포수 및 병마 7ㆍ8백을 간택하여 날마다 불러내어 거느리고 갔다. 이런 까닭으로 세 영(營)의 병사는 거의 대오를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힘써 도독에게 간청했으나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양식이 떨어지고 군사들이 피로한 데다 빨리 따르기를 계속 독촉하므로 마침내 궤멸하게 된 것이다. 만주(滿住)가 조선 사신이 거느리고 온 사람들의 차림이 어떠한가를 묻자, 여러 장수들은 “군관(軍官)은 붉은 옷을 입고 깃으로 만든 갓을 썼으며, 태평소(太平簫)와 대각(大角)을 분다.”고 하였다. 그것은 대개 번방(藩邦)의 오랑캐들이 우리나라 사신들이 행차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한 것이다. 동대해(董大海)ㆍ유해(劉海)의 문필이 지극히 졸렬해서 회답 서신에는 보통의 글자를 써야 겨우 해득하였다. 또 그 편지 끝에는 두 가지 말로 결말을 하였는데, 한 가지는 남조(南朝 명 나라)에서 두 황자(皇子)를 두 나라에 나누어 세운다는 것에 대하여는 이런 일은 우리 나라에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대답하라는 것이요, 또 한 가지는 우리가 이미 남조를 도왔으니 무엇 때문에 버리랴 하는 것에 대하여는 지금의 출병이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니 어찌 다시 도울 리가 있겠는가라고 대답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유해가 몰래 한 말이다.
○ 그날의 싸움에 대하여 호인(胡人)이 와서 말하기를, “좌영(左營) 중의 한 장군이 끝까지 힘써 싸우다가 한 그루 나무 밑에 기대어 단도로 쳐 죽인 것이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고, 그는 몸에 무거운 갑옷을 입었으므로 화살이 비 퍼붓듯 쏟아져도 종래 상하게 할 수가 없었다. 이때 한 적병이 창으로 그를 찔렀으나 그는 손에 큰 칼을 잡고 엎어지면서도 끝내 칼을 버리지 않았다.” 한다. 그때 함께 본 군사가 전하는 바로는 이 사람은 좌영장 선천 군수 김응하(金應河)의 형상이었다 한다. 그래서 오랑캐들 중에서도 모두 그를 칭찬했다 한다. 이 소식이 조정에 들리자 자헌대부 호조판서를 추중하고 그의 일생의 행적과 거국적인 만사(輓辭)를 기록하여 《충렬록(忠烈錄)》이라 이름을 붙이고 세상에 간행하였다. 박정길(朴井吉)의 사(詞)에
백 길의 심하와 만 길의 산에는 / 百丈深河萬仞山
지금까지 모래밭에 피 흔적이 얼룩졌네 / 至今沙磧血痕斑
영명한 혼을 또 강상으로 부르지 말라 / 英魂且莫招江上
오랑캐 멸하지 않고는 결코 돌아오지 않으리 / 不滅凶奴定不還
하였다.
○ 이 일이 명 나라에 들리니 자주 관원을 보내어 용만관(龍灣舘)에 제사를 지냈다. 우리나라에서 사당을 의주(義州)에다 세웠다. 그후 신유년 요동백(遼東伯)을 봉했다. 제문은 기록하지 않는다.
○ 오랑캐의 국서(國書)에 회답을 짓도록 명하니, 이이첨(李爾瞻)이 상소하기를, “아뢰옵나이다. 오랑캐에게 항복했던 역적 정응정(鄭應井) 등이 오랑캐의 글을 가지고 돌아온 뒤로부터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전하께서 벽력같은 위엄을 떨치시고, 정대한 의리를 떨치시어 사신을 베고, 국서를 불태워 명 나라 조정에 아뢸 것이라.’ 하였는데, 도리어 강화의 한 계책을 비국(備局)에 물으시와 대신과 여러 재신(宰臣)들이 경략(經略)을 참작하여 각기 의논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그저께 여러 대신들을 패초(牌招)하시어 그들로 하여금 다시 자세한 의논을 더하게 하셨습니다. 박엽(朴燁)이 답한 글에, ‘비국에서는 이미 성상의 교지 중의 참뜻을 받들고 겸하여 여러 신하들이 바친 의논을 채택하여 승문원으로 하여금 말을 잘 다듬게 하여 급히 지어내는 일로 계하되었습니다.’ 하였습니다. 대저 화친이란 두 나라가 서로 좋아하는 것을 말합니다. 혹 혼인으로써 화친함은 제 나라가 오 나라에게, 한 나라가 흉노에게 한 것이 이것이며, 혹 형제의 나라라고 칭탁함은 송 나라가 요ㆍ금 나라에게 한 것이 이것입니다. 이제 건주(建州)는 하늘의 뜻을 거스르고 반란을 일으켜 연호를 세우고 짐(朕)이라고 불러 참람하고 교만하여 거리낌이 없습니다. 우리 나라가 수호함에는 이미 혼인이나 형제나 외숙ㆍ생질 등의 명목으로 하지 못하면, 그들은 장차 북조로 자처하고 우리에게 상국으로 섬기기를 요구할 것이니, 이것이 과연 이웃 나라로 사귀는 비유가 되겠습니까? 이것이 오늘의 화친이 옛날의 화친과 실로 다르며 따르기 어려운 일인 까닭입니다.
만족할 줄 모르는 요구라 반드시 화가 닥쳐올 것임은 지혜가 없더라도 이미 알 수 있습니다. 화친의 설을 주장하는 이는 두 원수(元帥)가 패전하여 오랑캐의 기세가 더욱 교만하여 만약 강화를 하지 않으면 조만간에 철기(鐵騎)를 휘몰아 닥칠 것이라고 여기나 이는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명 나라 조정에서 우리 나라를 키워주고 돌봐주고 구제해 줌이 이르지 않은 데가 없고, 건주의 오랑캐에게 선유하여 침범하지 말라고 한 것이 한두 차례가 아니니, 우리 나라가 믿을 곳이 있다는 것은 저 오랑캐들도 잘 압니다. 이제 이렇게 강화를 요구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늘에 죄를 얻고 부모의 나라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뒤에 조종하고 위협하는 것이 당연히 저희들 손아귀에 있게 할 것입니다. 이것은 초 나라의 군신이 장의(張儀)에게 속아 북쪽으로 제 나라와 국교가 끊어지자, 서쪽으로 진(秦) 나라의 근심을 불러 일으키게 된 것과 같지 않습니까? 지금의 회답이 비록 그들의 마음에 만족하지 않아도 그들은 바야흐로 대국과 원수를 삼으니 반드시 요계(遼薊)가 그 뒤를 덮칠 것을 잊어 버리고 먼저 우리에게 함부로 달려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명 나라 조정의 장수들이 우리 나라에 의심을 둠이 많습니다. 경략(經略 양호)이 이른바 순리에 따라 좌단(左袒 찬성의 뜻)하라는 것과, 유 도독(劉都督 유정)이 이른바 노적(奴賊)을 위해 덕을 배반했다는 것과, 진강(鎭江) 유덕(游德)이 이른바 지난해 군사를 징발할 때 마침내 머뭇거렸다는 것과, 호문계(胡文桂)가 이른바 너희 군대들이 곧 나아가 구제하지 않아 눈물이 비 오듯 하였다는 것과, 군문표하인(軍門票下人)이 이른바 조선의 원수가 이내 적에게 항복하니 비통하고 놀라며 분개하고 함께 욕을 한다는 것과, 한장(韓將)이 이른바 너희 원수가 싸우지 않고 적에게 항복하니 그 사정을 헤아릴 수가 없다는 것과 또 항복한 장군의 가족이 과연 갇혀 있는가라고 말한 것과, 상차관(常差官)이 이른바 조선의 두 장수가 삼영(三營)의 군대를 거느리고 완전히 병영(兵營)을 열지도 않았다고 한 것과, 우 수비(于守陴)가 이른바 너의 원수가 군대를 거느리고 적에게 항복하고 두 원수가 오랑캐의 군대를 이끌어 장차 요양(遼陽)을 공격하려 했다고 하고, 또 그의 조카를 시켜 항복한 장수의 가족들을 가두어 나의 허실(虛實)을 탐지한 것과, 한인(漢人)으로 성이 심(沈)인 자가 강홍립 등이 교일기(喬一琦)를 결박해 누루하치의 적군에게 투항했다는 등등의 말이 있습니다. 강홍립 등이 이미 대국을 저버리고 또 군부의 일도 저버린 것은 명 나라 조정의 사람들에게 이미 자세하게 들었으니 우리 나라에 대하여 괴상하게 여기고 의심을 품음이 마땅합니다. 비방을 들끓게 하고 훼방을 쌓음이 이와 같으니 어찌 우리 나라는 신용이 있는데 의심을 받아야 하며, 충성스러우면서도 죽임을 당해야 할 때입니까?
지금 만약에 오랑캐 사신이 곧 돌아가 화친하는 일이 관철되면 박엽(朴燁)의 한 자[尺]의 화친 문서는 전해져 도적에게 아부하는 증명서가 될 것이요, 명 나라 조정에서는 준엄하게 규탄하여 우레같이 울리고 서리같이 차가울 것이니, 공의(公議)가 격해지면 하늘의 뜻을 헤아리기 어려울 것이라, 장차 교묘한 말과 이로운 말로 그 사이에서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장차 금을 실어들이어 뇌물을 주어 면하도록 하겠습니까? 지금 헛되이 공갈치는 오랑캐의 글을 두려워하고, 반드시 하늘의 토벌이 있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이것이 신이 알 수 없는 바입니다. 임진란 때 선왕(先王 선조)께서 왜놈들이 길을 빌려 달라는 요청을 강하게 물리쳐 팔방이 어육(魚肉)이 되고, 삼도(三都)가 불에 타 필마(匹馬)로 서쪽으로 옮기심에 나라의 운명이 장차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화친을 요청하는 왜국의 서신이 계속 이르렀어도 의리에 의거한 위대한 절개가 더욱 확고하여 마침내 명 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크게 응원하여 없어지는 나라를 존재하는 나라로 만들었으니, 어찌 전하의 가법(家法)으로 오늘날 마땅히 본받아 행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과연 스스로 굳세어지는 도리를 다하고 힘써 보존하는 책략을 꾀하여 변방의 신하로 하여금 그 사설(辭說)을 엄하게 하여 누루하치 사신에게 답하게 명령하고, 또 누루하치의 서신을 명 나라 조정에다 알린 연후에 전날의 성교(聖敎)에 이른 바와 같이 잡다한 일을 힘써 제거하고, 전심 전력으로 무기를 수선하고 군대를 기르고, 장수를 선택하여 인재를 뽑아쓰고, 백성의 고통을 관대히 보살피고 인심을 위안하며, 둔전(屯田)을 널리 개방하고 기계를 만들고, 성지(城池)를 돌보는 등 철저히 정리를 하소서. 그러면 뭇 사람들의 마음이 저절로 격려되어 사기가 백배나 더해져 국경의 수비가 폭도들을 막는 데 단단해지고, 나라를 지키는 데 환란을 방비하는 실효가 있게 되어 부모(명 나라 황제를 비해 말한 것)가 참으로 가까워지고 제후(諸侯)된 도리가 더욱 경건하여 내외의 간격이 없어 영원히 번유(藩維 제후)의 위치가 확보될 것이니, 장차 천하에 그 말이 있게 되고 만세에 그 명성을 떨치게 될 것입니다.
이 못난 소신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라에 몸을 바쳐 바라는 바는 충정(忠貞)이요, 기약하는 바는 명분과 절개입니다. 신이 문형의 임무를 맡아 글재주를 다하여 사대(事大)의 문서와, 교린(交隣)의 문서와, 전교(傳敎)하는 명령과, 찬송하는 글을 지음에 있어서 애태워 생각하고 정신을 괴롭히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이러한 지가 6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제 이러한 무도한 일을 만나니 비분강개한 마음이 타인보다 배나 더해집니다. 교지(交趾 남방 곧 지금의 월남에 있던 나라)에 보낼 초격(草檄)을 만들거나, 힐리(頡利 돌궐족의 이름)에 보낼 노포(露布) 같은 것이라면 신이 스스로 옛사람에 비하고 전철(前轍)을 답습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 본성을 버리고 그 본심을 어기면서 명 나라를 저버리고 종사(宗社)를 잊으며 우리 임금을 불의에 빠뜨리고, 우리 신민(臣民)을 욕하게 하면서 몇 줄의 글을 써 한마디 말이 나라를 망치는 결과를 초래함에는 신은 차라리 손가락을 자르고 팔을 끊으며 벼루를 부수고 붓을 태울지라도 감히 명령에 좇지는 못하겠습니다. 이 글이 관계되는 바는 다만 신의 몸과 이름만 더럽힐 뿐 아니라, 우리 나라가 2백 년 간 사대(事大)했던 지성이 이에 이르러 싹 없어져 버리며, 삼한(三韓)의 문물이 이에 이르러 옷깃을 왼쪽으로 하는 야만으로 변해버리며, 열성조가 터를 닦아놓은 왕업이 이에 이르러 장차 끊어지게 되며, 백성의 윤기(倫紀)가 이에 이르러 장차 멸하려 하니, 천지가 닫히고 산천이 부끄러워할 일을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대저 떳떳한 도리가 존재하고 사람의 윤리가 존재하는데 누가 이를 분개하지 않으며 누가 이를 애통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위로는 경상(卿相)ㆍ대신(大臣)으로부터 아래로는 사서(士庶)ㆍ군졸에 이르기까지 근심하고 놀라며 기상이 참담하여 실로 온 나라가 똑같이 생각합니다. 전일에 비국(備局)에서 의논을 한 여러 신하들도 비록 다 토로하지는 못하였으나 그중에 한두 마디씩은 모두 떳떳한 의리에 의거해야 된다는 대체의 뜻은 있었습니다.
신이 홀로 어리석고 망령되어 감히 마음에 있는 바를 모두 털어 말을 다하고 도리를 외치는 것은 이 몸이 비록 애석하게 생각하나 우리 임금을 가히 버릴 수 없는 것이며, 이 마음은 비록 속일 수 있으나 하늘의 이치는 속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위태로워 망하게 된 백성들이 혼란한 나라에 있어서도 오히려 곧은 신하가 있거늘 하물며 이렇게 현명한 임금과 어진 신하들이 서로 만날 날에 신이 어찌 말하지 않겠습니까? 성상께서 평일 높은 관직과 후한 녹으로써 신을 대우한 것이 다만 신으로 하여금 일세(一世)에 영화와 사치를 누려 여러 사람의 눈에 빛나게 보이려 하기 위해서였습니까? 장차 늙을 무렵에 그대로 지내라고 해서입니까? 벼슬자리에서 아첨하게 하기 위해서입니까? 신은 은총이 이미 지극하고 본분(本分)이 이미 넘쳐 한 번의 죽음 외에는 다시 갚을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명 나라 조정에 차마 배반하지 못하는 것은 곧 성상의 뜻을 감히 배반하지 못하는 것이요, 이 누루하치 놈과 차마 통하지 못하는 것은 곧 국가를 감히 잊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신도 장차 순종하여 받들어 모시는 것이 편안한 향락을 맞이하는 것이요, 직언을 하고 어기는 것이 스스로 허물을 부르는 것인 줄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와같이 목을 곤두세우고 마구 간하여 말만 하면 거리낌에 부딪치는 것은 진실로 털끌만큼이라도 자신을 위하는 것이 아니오니 구구한 본심을 성상께서도 반드시 통촉하여 굽어 살피십시오.
신이 성상의 밝으심을 만나 매양 요순으로서 기대했는데, 지금 전하께서는 도리어 고려 말의 임금은 밝고 신하는 현량하여 무슨 일에도 책응(策應)을 잘하였던 일로써 자처하시니, 신은 더욱 통곡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신은 청하옵건대, 고려가 요ㆍ금과 화친한 사실의 시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려 성종 5년에 거란이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했는데 고려에서는 회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12년에 거란이 침략하여 봉산군(蓬山郡)을 격파하자, 고려에서는 곧 화친을 요청했고, 익년에 거란의 연호(年號)를 받들어 사용했습니다. 예종 11년에 금 나라 임금 아골타(阿骨打)가 사신을 보내오고, 또 12년에 금 나라 임금이 국서를 보내 왔는데 자칭 형이라 부르고, 고려를 아우라 불렀습니다. 14년에 금 나라 임금이 자신을 짐(朕)이라 부르고 고려에 조서를 내렸으며, 인종(仁宗) 4년에 태묘에 고하고 금 나라를 섬길 것인가의 가부를 점쳤습니다. 그리고 사신을 보내어 신(臣)이라 칭하고 표(表)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고려는 비록 저 요와 금 두 나라의 침략을 받았으나 즐겨 화친하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8년의 오랜 세월이 지나서 바야흐로 거란에 허락했고, 14년의 오랜 시간이 지나 바야흐로 여진에게 허락하였습니다. 그러나 곧 다시 태묘에 의문점을 점치기까지 하였으니, 그 지체하고 어렵게 여기며 신중히 형세를 관망하고 시기를 헤아리는 뜻을 진실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흉측한 서찰이 한번 와서 누루하치의 먹물이 마르기도 전에 황공하여 쩔쩔매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들의 뜻을 거스릴까 하여 곧 그들과 수호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 고려는 처음에 강화로 명목을 삼았으나 마침내 그들에게 완전한 복종을 면치 못하여, 정삭(正朔)을 받들어 표(表)를 올리며 공물을 바치느라고 겨를이 없었으며, 금 나라는 고려에 대하여 처음에는 형제로 약속을 했다가 몇 해 되지 않아 갑자기 조서를 내리어 말을 하사하는 은사를 베풀고, 신하나 종으로 여겨 천한 굴욕이 벼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성상께서는 지금의 후금이 전날 금 나라의 남은 자취를 밟지 않는다고 여기십니까? 〈비망기(備忘記)〉 중에 한결같이 전조(前朝)와 같이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감히 이상과 같이 차례로 들어 진술하는 바입니다.
성상께서는 또 강홍립(姜弘立) 등이 불행하게 적에게 함락되어 그곳에서 보고 들은 바를 밀서로 알리는 것이 무엇이 불가하냐고 말씀하시니 피를 가지고 있는 무리들은 기가 막히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강홍립이 원수의 조정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적의 유시를 받들어, 정문(呈文 공문)을 돌릴 때는 한(汗)이라 칭했고, 다른 기록에는 만주(滿住)라 칭했으니, 그 몸을 바치고 항복할 계획은 이미 먼저 통사를 보내어 우리도 또한 싸울 뜻이 없다고 하던 그날에 뚜렷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가 올린 장계에 있어서도 자유를 얻지 못하여 반드시 누루하치의 눈을 거쳐 그 가부를 정한 뒤에 보냈으므로 감히 만력(萬曆)의 연호를 쓰지 못하고 이 서신을 가지고 오는 자가 강을 건너서 채워 써넣어 보낸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홍립이 오랑캐에게 하나의 포로가 되었고, 흉노의 장막(帳幕) 안의 한 종이 되었을 뿐입니다. 전하와는 군신의 대의는 이미 끊어졌으니 그가 전하께 군신의 지성을 다하기를 옛날의 납서(蠟書)를 보냈던 자와 같겠습니까? 그 보고해 온 바를 보면 공갈 협박하여 우선 숨을 붙이고 몸을 보전하려는 말뿐이니, 강홍립이 이와 같은데 전하께서는 강홍립에게 바라심이 오히려 이와 같으시니 신은 참으로 답답합니다.
성상께서 만약 강력하게 병사를 청한 것으로 신을 죄주지 않으시고 나라를 위하여 하지 못한 것으로 신을 죄주거나, 답서를 짓지 않았다고 신을 죄주시지 마시고 임금 잘못을 바루지 못했다고 신을 죄주신다면 신은 오히려 웃음을 머금고 죽겠습니다. 신의 나이는 지금 이미 60이라 비록 잠깐 동안 죽지 않는다 하더라도 금수의 구역에서 구차하게 살거나 오랑캐의 풍속에 섞여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힘써 간쟁하다가 죽어 결초보은을 하는 귀신이 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아! 임금의 명령을 좇지 않으면 이는 불충이 되고, 의를 보고도 용감하지 않으면 이는 인간이 아닙니다. 황공하여 땅에 엎드려 엄한 견책을 기다리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상께서는 급히 부월(鈇鉞)의 죽임을 내리시어 어기고 거만스러운 죄를 밝히시기를 엎드려 비옵나이다.
비답에, “경이 한 장의 차자로써 급히 달려오는 도적을 막을 수 있는가?” 하였다. 이이첨은 충절을 스스로 이렇게 뽐내면서 어째서 대비에게는 그리 박했는가? 그 폐와 간을 들여다보는 듯하니 간사하지 않은 것이 없다.
[첨언] 이이첨이 상소에 쓴 말이 결코 잘못되거나 부족하지는 않다. 금나라 때부터 있어 온 오랑캐의 의도를 알고 대비하자는 충언이 절절하다. 그런데 비답에서 보듯이 이이첨의 주장대로 하지 않고 어떻게 하든지 오랑캐를 달래려고 하고 있다. 안으로 군사력을 기르며 밖으로 일단은 강화를 도모해야지 군사력을 기르지도 않으면서 오랑캐를 무시해선 안 된다. 그런데 광해 왕은 안으로 군사력을 강화하지도 않으면서 오랑캐의 침략에 지레 겁을 먹고 있다. 속잡록의 저자인 조경남도 이 상소에 나타난 이이첨의 충절을 인정은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인목대비를 박해한 것을 들며 비판하고 있다. 인목대비가 영창대군을 낳은 것이 결과적으로 화근이었다. 광해 왕으로서도 성장하는 영창대군이 크게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장성한 후에는 왕위 다툼이 필연으로 보였다. 어린 영창을 앞세워 인목대비가 정치 공작을 치열하게 전개하고 있는 상황이 심각해지고 있었다. 그러니 이이첨 등 대북파가 앞장서서 영창대군을 사사하고 인목대비를 폐비하지 않을 수 없는 정치적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인조반정이 성공했기 때문에 인목대비에 대한 비판이 통제를 받았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정사와 야사에 나타난 인목대비에 관한 흑역사를 객관적인 눈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 오랑캐에게 답한 글에 이르기를, “조선국 평안도 관찰사 박엽(朴燁)은 건주위(建州衛) 마법(馬法) 족하에 글을 올립니다. 우리 두 나라는 국경이 서로 접하여 함께 황제의 신하로서 함께 명 나라 조정을 섬겨온 지가 이에 2백 년이나 되어서 일찍이 조금의 혐의와 원한의 뜻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이번에 건주(建州)가 명 나라 조정과 틈이 생겨 전쟁을 일으키고 화를 맺어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사방에는 보루가 많아졌으니 어찌 다만 이웃 나라만의 불행이겠습니까? 귀국에 있어서도 또한 좋은 일이 아닐 것입니다. 명 나라 조정과 우리나라와는 부자의 사이와 같아 아버지의 명이 있는데 자식이 감히 좇지 않을 수 있습니까? 대의(大義)가 있는 바에야 반드시 그래야만 하나 지나간 일이라 지금 말할 것은 아닙니다. 정응정(鄭應井) 등을 먼저 내보냈으니 화친하자는 뜻을 또한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웃끼리 좋아하는 정이 또한 어찌 없겠습니까?
(답변으로) 온 글에, ‘내가 처음부터 만약 대국의 황상을 범하려는 마음을 가졌다면 푸른 하늘이 어찌 굽어 살피지 않겠소?’ 하였으니, 이 마음이 족히 세업(世業)을 보전하여 길이 하늘의 복을 받기에 족합니다. 지금 이후로도 다시 좋은 생각을 간직하여 함께 대도(大道)에 이른다면 명 나라 조정에서 총애하는 은전이 즉시 내릴 것이니, 양국은 각각 국경을 지켜서 예전과 같이 우호 관계를 닦으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오직 이런 뜻을 알려주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 체찰부사(體察副使 원수(元帥)가 겸함)의 서장(書狀)에, “이달 15일에 안주(安州)로부터 강가를 순찰하며 창성(昌城)에 이르니, 도망하여 돌아온 사람이 전하는데, ‘누루하치의 군대가 명 나라 군대를 방어하는 일로 떠나는데 우리나라 군졸이 졸지에 난을 일으킬까 두려워 양반(兩班) 출신 이하 모든 군대 6백여 명을 모두 죽였다.’ 합니다.” 하였다.
○ 겸오도체찰부사(兼五道體察副使) 장(張)이 몫을 나누어 보낸 일로, “해당 도(道)의 군사로서 전쟁에 나가 분명히 죽은 자의 의복ㆍ장비 등이 방어소(防禦所)에 남아 있는 것을 일일이 찾아내어 그들의 본집으로 돌려보내어 그들의 부모나 처자로 하여금 그것으로 헛 장례라도 지내어 제사나 지내도록 해야 하겠는데 각 방어소의 해당 관리가 각 도에서 내려보내기 전에는 처리를 분명하게 못하여 태반이 둔 곳이 없어 매우 원통하고 한스럽습니다. 도에서는 이 일로 변상(邊上)에 와서 십분 규명하여 현재 생존한 자를 찾아 각 부대 안의 인명과 물건의 개수를 아울러 기록하여 방위하러 나간 사람 중에 말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뽑아내어 실어 보내게 했으므로 여기서는 비록 어떤 물건이 누구의 것인지를 몰라도 만약 그들의 아내나 아들로 하여금 찾게 하면 반드시 자기들의 물건인 줄 알 것이라, 물건이 비록 중한 것이 아니라도 국가에서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을 달리 보지 않는다는 뜻을 밝히지 않을 수 없으므로 보내노니 군사들을 데리고 가서 일일이 그들의 집에 나누어주어 국가에서 덕의(德意)를 베푸는 줄 알게 하십시오.” 하였다. 전라도의 각 고을은 본도 초관(哨官) 이복명(李福命)이 남원 전사자 신억균(申億均) 등 18인에게만 주도록 하고, 본부 군사로서 사망자는 1백여 인인데 다만 좌우영의 살수(殺手)들에게만 주었을 뿐이다.
각 도의 삼군(三軍)은 모든 운반물을 본도의 감사와 병사(兵使)에게 보냈다. 17일 익산에서 호군(犒軍)했다.
[한국고전종합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