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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립 지음 『인간본성의 역사』 [루소의 ‘고상한 야만인’ (1)] 》

작성자박희용|작성시간26.06.18|조회수8 목록 댓글 0

 

                                                  [南禪軒 독서일기 2026618일 목요일]

                                 《홍일립 지음 인간본성의 역사[루소의 고상한 야만인’ (1)]

 

 

제목이 고상한 야만인로 붙은 루소(1712~1778)는 인간 진화의 원리를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을 육신과 정신의 양면성 존재로 본다, 육신은 동물이고 정신은 신이라고 본다. 그런데 그릇에 담긴 물은 생명수이지만 그릇이 깨지면 물이 흩어지듯이 육신이 살아 숨 쉴 때에만 정신이 작용한다. 인간의 번식은 육신으로 이루어진다. 정신은 생명을 잉태하지 못한다. 육신은 시간의 변화에 따라 음식과 물, 공기를 흡수하고 배출하며 성장하고 변화한다. 그러나 그 변화는 무한하지 않고 유한하다. 여기까지는 보통의 야만인이다.

제목이 고상한 야만인이라 붙은 까닭은 루소가 추구한 인간상의 최고치가 고상한이 완성된 경지이기 때문이다. 생로병사 희로애락에 얽매인 보통 사람들은 야만인이다. 자연에서 살아가는 여타 동물들과 똑같이 태어났으니 살다가 수명이 다하면 육신을 작은 분자와 워자로 분해하며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루소처럼 고상한 야만인은 생물로서의 육신의 한계를 과감하게 초월하여 정신의 무한한 경지를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보통 사람들이 희로애락의 감정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할 때 지긋이 억제하고 선별할 줄 알고, 생로병사의 거대한 굴레에 묶어 비명을 지를 때 지긋이 감상할 줄 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루소 사상의 핵심을 고상한 야만인이라 한 것을 동양식 사고법으로 보고 좋게 해석하였다. 공지하다시피 루소는 서양 근대철학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의 생애인 18세기는 산업혁명이 본격화하여 다가올 19세기에 사용될 에너지가 축적되기 시작한 시대이다. 이렇게 축적된 에너지는 19세기에 식민제국주의 침략과 학살, 노예 포획 등 온갖 야만이 자행되더니, 식민제국주의 국가들끼리 식민지 쟁탈과 이권 다툼으로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졌다.

루소 이후의 두 세기는 고상한 야만인이 아니라 보통의 야만인시대였다. ‘고상한 야만인이란 제목을 잘못 붙였는가 아니면 루소의 사상은 우수했으나 지각없는 야만인들이 국가를 지배하며 식민제국주의 침략 노선을 질주하였는가. 동서양의 지식인들은 루소의 잘못이 아니라 강대국을 지배하는 야만성 정치인들의 잘못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2026년 현재에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미국-이스라엘이 이란을 침공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과 러시아의 생리가 두 세기 전과 변한 게 전혀 없다. 지금 중국이 미국에 바짝 버금가는 초강대국 반열에 올라섰는데, 중국 역시 밀림의 왕자 사자가 그러하듯이 초강대국의 생리대로 할 것이다. 그러면 앞으로의 세계는 미국-중국-러시아 세 대량 핵 보유 초강대국들이 지구를 삼분하여 지배하게 될 것이니, 수많은 힘 약한 동물들이 숨어서 숨 낮춰 겨우 살아가듯이 지구상의 수많은 약소국가의 국민들은 초강대국들의 눈치를 보며 겨우 살아갈 것이다.

루소는 인간의 양면성을 예리하게 통찰했다. 육신과 정신의 두 면을 통찰한 것도 예리하지만, 진짜로 예리한 것은 정신의 두 면을 본 것이다. 루소는 인간의 정신에도 보통 정신우수 정신의 두 가지가 있음을 보았다. 더 세분한다면, ‘보통 정신저열보통으로, ‘우수 정신우수초월로 부분할 수 있다. ‘저열 정신은 침략전쟁을 선도한 자들과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이고, ‘보통 정신은 큰 욕심 없이 자기 분수에 만족하며 일상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우수 정신은 사리분별을 잘하며 자기 직분에 성실하면서도 남과 사회를 선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사람들이다. ‘초월 정신은 인간 본연의 실체를 탐구하며 자연, 생명, 우주, 나아가서는 신과 대화를 시도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루소의 사상을 축약하여 고상한 야만인이라 한 까닭이 드러난다. 인간은 육신을 가진 생물적 존재이므로 온갖 문제와 한계를 갖는다. 세상에는 보통의 야만인들이 다수이지만 저열한 야만인이 곳곳에 숨어있다. 하지만 발은 땅을 딛고 있으나 머리는 하늘로 두는 원리대로 인간은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하여 항상 노심초사해오고 있다. 즉 지금은 보통이거나 저열하지만 언젠가는 우수 정신이 되고, 마침내 초월 정신의 경지에 올라 육신과 정신의 극치를 반드시 알고야 말리라는 의지를 가진 존재가 바로 인간 동물이다. 루소는 인간이 육신과 정신의 양면성 존재임을 깊이 알았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 않고, 육신과 정신의 통일을 통해 완전한 인간, 신에 가까이 가는 인간이 되기를 희망하였다.

 

(1) 429p : 루소는 흄처럼 모든 탐구는 인간 본성에 대한 규명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 본성의 규명을 우리 삶의 의무와 목적을 알기 위한 조건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가 거기서 인간을 탐구하고, 인간의 본성과 의무와 목적을 알아내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이다.

 

[논주] 나는 17세부터 10여 년 동안 존재의 의미와 목적, 인간의 본성, 인간 삶의 의무와 목적을 알기 위해 깊은 고민을 자주 했다. 격정의 시절, 질풍노도의 시절, 영어로 스트럼 운트 그랑크 시절이었다. 이로부터 55년의 시간이 흘렀다. 무엇을 발견했는가? 아직도 막연하고 모호하다. 인간과 인생이 무엇인지 모르고 답할 수 없다. 승려들은 나이 칠십이 넘으면 득도하여 마음이 편안하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72세가 된 지금도 영혼이 불안하다. 그렇다고 신을 인정하거나 만들어서 모든 것을 의지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하기가 싫다. 단지 인간은, 나는 우주 대자연 속에서 피었다 지는 꽃과 같은 존재임을 약간은 알았다. 다행히 그 꽃이 일찍 지지 않고 활짝 핀 시절을 보내고, 이제 져서 열매를 맺었다. 그 열매 둘이 땅에 떨어져 다시 피어나 꽃을 피웠고, 다시 열매를 맺었다. 인간 본성의 규명과 인생의 의미와 목적 탐구는 여전히 미완이지만, 생물로서의 한살이를 다했다. 우주 대자연의 은혜에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내가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니, 방법론에서 미숙한 점과 면이 무척 많았다. 깜깜한 밤길을 걷는 것처럼 막막한 어둠 속이지만 밤하늘에는 북두칠성과 북극성이 있어 방향을 찾듯이 우연히 눈에 띄는 책들과 귀로 듣는 말들이 동력이었고 사색이 앞으로 나가는 발걸음이었다. 그러나 동력들도 성능이 한결같지 않아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고, 사색도 부실하여 의미 있는 생각의 끈을 계속하여 잇지 못했다.

불교에서는 근기를 상중하로 나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근기로서 인간의 본성, 인간 삶의 의무와 목적에 대한 관심은 있으나 깊이 생각하지 않고 현실 존재를 중심으로 성실하게 살아간다. 상근기들은 관심과 생각의 정도가 많고 깊은데, 이 상근기도 다시 상중하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상하 근기인들은 일반적인 지식인들이라 할 수 있다. 사상과 철학에 대한 관심이 많으나 현실 생활에 만족하며 성실하게 살아가면서 알맞게 탐구한다. 상중 근기인들은 철학자, 목사, 신부, 승려 등 종교지도자들로서 현실 생활이 사상과 철학, 종교이다. 상상 근기는 인간의 본성과 인생의 목적을 이해하기 위하여 생물로서의 인간 동물이 할 수 있는 현실 생활을 전부 포기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극소수로서 독공하는 도인이나 수도사라고 할 수 있는데, 한 판 승부에 인생 전부를 건 용기와 집념은 대단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물외인(物外人)이다.

세상에는 상중하 근기인들이 있고, 상근기도 세 가지 부류 인간으로 나누어진다. 이 중에서 어느 방법론이 좋느냐는 질풍노도기에 접어드는 청소년 개인이 선택할 문제이다. 그런데 이 선택에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점은 자기 근기의 역량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근기의 그릇이 다르다. 작은 사발에 무거운 짐을 담으면 그릇이 깨어지고, 큰 그릇에 작은 짐을 담으면 그릇이 허전하여 일생이 헛바퀴 돈다.

세상에 가장 널리 쓰이는 그릇은 알맞은 그릇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중근기들과 상하 근기들이 많다. 모자라면 더 채워야 하지만 지나침은 모자람보다 못하다고 한다. 독서와 사색이 목적지로 가는 나침반과 영양분이지만, 그것들이 지나치면 정신을 혼란하게 한다. 욕심을 내어 꽉꽉 채우면 오히려 그릇에 금이 가는 수가 있다.

석가모니가 보리수 밑에서 수십일 고행을 한 끝에 새벽별을 보며 크게 깨달았지만 몸은 이미 버쩍 말라 죽기 직전이었다. 이때 마을 소녀가 준 한 잔의 우유를 마시고 기력을 되찾았다. 천하의 고승들이 수십 년 수도 끝에 한 소식 얻고서 하는 말씀이 별다른 게 아니라 평상심의 재발견이다. 한 시대를 살고 간 현인들 모두가 남긴 말은 인생의 의미와 행복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이다.

 

(2) 430p : 루소는 인간 본성을 원초적 인간이 습관이나 편견으로 인해 변질되기 이전의 성향(에밀, 65)“으로 파악하고, 어떠한 외적 요인에 의해서도 오염되지 않았던 태초의 인간이 어떠한 모습이었는지를 상상하는 데서 인간 본성을 규명하기 위한 실마리를 찾는다.

 

[논주] 막연하고 어려운 말이다. 루소가 말하는 바의 원초적 인간이란 존재할 수 없다. 루소가 이런 가상의 존재를 설정하는 논거는 기독교적인 세계관의 시발점인 아담일 것이다. 아담은 순진무구한 인간상이고, 하와는 아담을 유혹한 습관이나 편견으로 치부하고 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기독교적 상상의 인간상이다. 그러므로 루소의 인간관의 근원 역시 허구이기 쉽다. 그 허구를 여러 겹의 포장지로 꽁꽁 싸매어서 거대한 물건인 것처럼 보이면서 그 속에 진실한 알맹이가 들어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있다. 또한 수십억 명 인구에서 한 사람의 원초적인 인간상을 설정하는 것은 상상일 뿐이고 현실이 아니다. 그러므로 루소의 인간관은 근본에서부터 사실이 아니라 상상에 의한 것으로 정확성이 낮다.

루소의 이런 생각과 비슷한 것이 동양에서는 동심론(童心論)‘이다. 동심론은 세상의 모든 어린아이의 마음은 순진무구하다고 한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외부에서 가해지는 영향과 충격에 의해 마음이 차츰 오염된다고 한다. 어린아이라고 모두 순진무구하지 않고, 어린아이들이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은 아직 느낌과 생각이 미숙하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인 어린아이의 마음을 인간 본성의 근본으로 삼는 것은 착점이 잘못됐다.

 

(3) 430p : 원시의 인간은 일도 언어도 거처도 없고, 싸움도 교제도 없으며, 타인을 해칠 욕구가 없듯이 타인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어쩌면 동류의 인간을 개인적으로 단 한 번도 만나 적이 없이 그저 숲속을 떠돌아다녔을 것이다. 그는 얼마 안 되는 정념의 지배를 받을 뿐 스스로 자족하면서 자신의 상태에 맞는 감정과 지적 능력만을 갖고 있었다.

 

[논주] 루소가 19세기 서양문명의 대표적인 사상가라고 하지만 이 부분의 글을 보면 참 단순하다. 인간의 생물성을 인정하면서도 뿌리 깊은 기독교적 창조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인간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물건이 아니라 남녀가 사랑해서 낳은 생물적 존재이다. 태어나기 전에도 부모와 조상들이 있었고, 태어난 후에도 부모형제와 친척들, 이웃이 있다. 인간은 고립된 독자적 존재가 아니라 연대하는 집단적, 사회적 존재이다. 함평 고인돌 지역에 가면 거대한 암석들을 캐서 나른 신석기 시대인들의 흔적을 볼 수 있다. 그 고인돌들은 몇 사람이 아니라 수십 수백 명이 함께 어울려 작업한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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