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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代史叢

[南禪軒 독서일기 2026년 6월 5일 금요일] 《 『환단고기』 [마한세가 하 막조선] 》 (51)

작성자박희용|작성시간26.06.05|조회수7 목록 댓글 0

                                                    [南禪軒 독서일기 202665일 금요일]

                                                 《 환단고기 [마한세가 하 막조선] (51)

 

 

元興 旣受大命 鎭守大同江 亦稱王儉城 天王 亦以每年仲春 必巡駐馬韓 勤民以政 於是 藉供厚斂之弊 遂絶 先是 有詔曰 惟朕一人之養 煩民以斂 是乃無政也 無政而君何用哉 嚴命罷之

戊子 馬韓 承命入京師 諫以寧古塔遷都爲不可 從之 元興薨 己丑 子阿實立 阿實薨 弟阿淞立 己卯殷滅 後三年辛巳 子胥餘 避居太行山西北地 莫朝鮮聞之 巡審諸州郡 閱兵而還

阿闍薨 庚戌 子阿火只立 阿火只薨 丙戌 弟阿斯智立 阿斯智薨 檀君摩休丁亥 兄之子阿里遜立 阿里遜薨 子所伊立 所伊薨 丁亥 子斯虞立 戊子 周主宜臼 遣使賀正 斯虞薨 甲辰 子弓忽立 甲寅 命陜野侯 率戰船五百艘 往討海島 定倭人之叛 弓忽薨 子東杞立 東杞薨 檀君多勿癸酉 子多都立 多都薨 壬辰 子斯羅立 斯羅薨 子迦葉羅立 迦葉羅薨 甲寅 子加利立 乙卯 隆安獵戶數萬叛 官兵 每戰不利 賊遂迫都城甚急 加利亦出戰 中流矢而薨

丙辰 上將丘勿 遂斬獵戶頭目于和態 移都藏唐京 先以加利之孫典奈 入承莫朝鮮 自是國政益衰 典奈薨 子進乙禮立 進乙禮薨 乙卯 子孟男立 戊戌 須臾人箕代 兵入番韓以據 自稱番朝鮮王 燕遣使 與我共伐之 莫朝鮮不從 癸亥 檀君高烈加 遂棄位入阿斯達 眞朝鮮與五加從政 終未復而終焉

 

여원흥이 이윽고 대명을 받아 번한의 저항을 진압하고 역시 왕검성이라 부르는 대동강 유역을 장악했다. 왕이 역시 매년 중춘에는 반드마한으로 순행하여 머무르며 백성들을 다스리기에 힘썼다. 이리하여 세곡과 공물을 지나치게 거두는 폐단이 마침내 사라졌다. 이보다 앞서 조서를 내려 말씀하시기를, “오직 짐 한 사람을 공양하기 위해 백성들을 들볶아 공물을 긁어모음은 이는 곧 좋은 정치가 없음이니, 좋은 정치가 없고서야 군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하고 엄하게 명하여 지나친 세곡과 공물을 거두는 것을 철폐하였다.

무자년(B.C.1243) 마한이 명을 받고 도읍에 들어와 간하기를 도읍을 영고탑으로 옮기라고 하였으나 불가하다고 하시며 이에 따르지 않았다. 여원흥이 죽으니 기축년(B.C.1232)아들 아실(20)이 즉위하였고, 아실이 죽으니, 동생 아도(21)가 즉위했다. 기묘(B.C.1122)에는 은나라가 망했다. 3년 뒤의 신사년 (B.C.1120) 서여(箕子)가 거처를 태행산맥의 서북의 땅으로 피하여 가니 막조선은 이를 듣고 모든 주와 군을 샅샅이 조사하더니 열병을 하고 돌아왔다.

아도가 죽자 경술년(B.C.1091)에 아들 아화지(22)가 즉위하였고 아화지가 죽병술년(B.C.1055)에 동생 아사지(23)즉위했다. 아사지가 죽자 단군 (摩休 29, 무인년 B.C.943신해34910)의 정해년(B.C.934)에 형의 아들 아리손(24)이 즉위하였다. 아리이 죽으니 아들 소이(25)가 즉위했고 소이가 죽으니 정해년(B.C.754)에 아들 사우(26)가 즉위했다. 무자년(B.C.753)에 주()나라 왕 의구(宜臼)사신을 보내 신년을 축하했다. 사우가 죽으니 갑진년(B.C.677)에 아들 궁홀(27)즉위하더갑인년(B.C667)에 협야후(陜野侯)에게 명하여 전선 500척을 이끌고 가서 해도를 쳐서 왜인의 반란을 평정하도록 했. 궁홀이 죽으니 아들 동기(28)가 즉위하였고 동기가 죽자 단군 다(多勿 38, 신미년 B.C.590을묘546)의 계유년(B.C.588)에 아들 다도(29)가 즉위했다. 다도가 죽자 임진년(B.C.509)아들 사라(30)가 즉위하였고, 사라가 죽자 아들 가섭라(31)가 즉위했다. 가섭라가 죽으니 아들 가리(32)가 즉위하였는데, 을묘년(B.C.426)융안의 우화충과 사냥족들 수만이 반을 일으켰다. 관병이 싸울 때마다 패하여 적이 마침내 심히 급하게 도성에 쳐들어오니 가리도 역시 출전하였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병진년(B.C.425)에 상장 구물이 마침내 사냥꾼들의 두목 우화충을 붙잡아서 참수하고 도성을 장당경으로 옮겼다. 이보다 먼저 가리의 손자인 전나(33)가 들어가 막조선을 계승하니 이때부터 정치가 날로 쇠퇴하였다. 전나가 죽으니, 아들 진을례(34)가 즉위했다. 진을례가 죽으니 을묘년(B.C.366)에 아들 맹남(35)이 즉위하였다. 무술년(B.C.323) 수유의 사람 기후(기씨조선 시조왕)가 병력을 이끌고 번한에 들어가 웅거하고, 자립하여 번조선 왕()이라 칭하였다. 연나라는 사신을 보내 우리와 함께 기후를 치자고 했으나 막조선은 따르지 않았다. 계해년(B.C.238) 단군 고열가(高列加 47, 병인년 B.C.295계해58238)가 마침내 단군 자리를 버리아사달에 들어갔다. 이후 몇 년 동안 진조선은 오가가 함께 더불어 다스렸으나 끝내 국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종말을 맞았다.

 

[논주] B.C.2333년 단군왕검이 삼한관경을 세우면서 웅백다를 마한왕으로 임명한 이후 그의 후손들이 2대 노덕리를 거쳐 18대 아라사까지 이어졌으나, B.C.1285년 색불루와 싸움에서 패한 아라사가 사망함으로써 단절됐다. 이후부터는 색불루 단군으로부터 19대 막조선왕으로 임명받은 여원흥의 후손들이 왕위를 이었으나, B.C.36635대 맹남 즉위 후부터는 기록이 없다. 상국인 진조선은 B.C.23847세 단군 고열가가 북부여를 세운 해모수에게 밀려 단군 자리를 버리고 은둔하면서 사라졌다.

북부여기에 己巳八年 帝率衆 往諭故都 五加遂撤共和之政 於是 國人推檀君 是爲北夫餘始組也 기사년 8(B.C.232)에 해모수 단제께서 무리를 이끌고 가서 옛 도읍의 오가들을 회유하시니 마침내 오가 대표들이 공화 정치를 철폐하였다. 이에 만백성들이 추대하여 단군이 되었다.”라 하므로 오가(五加) 공화 정치가 햇수로 7년 동안 시행되었다.

그런데 임승국은 眞朝鮮與五加從政 終未復而終焉진조선은 오가와 함께 진왕(秦王) (진시황))에게 복종하게 되더니 끝내 미처 회복하지 못한 채 종말을 맞았다라고 해석한다. 이렇게 해석하면 한사군 이전에 삼한이 진시황에게 복종한 것으로서 중국 쪽 사서들에서도 없는 엉뚱한 해석이 된다. 벌써 이 해석이 대중들에게 널리 전파되고 있다. 이것은 자를 오가의 정치로 읽지 않고 진시황 영정(嬴政)의 이름인 자에만 집착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고사서에 있는 글자 한 자를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엉뚱한 해석이 나오고, 그 엉뚱한 해석이 일파만파를 일으켜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중국 쪽에서 이것을 근거로 삼아 진시황 삼한 정복론을 주장해올 경우에 극구 변명하며 반박해봐야 본전도 못 건질 수 있다.

임종국은 이미 [단군세기]에서는 於是五加共治國事六年 이에 오가(五加)들이 나라 일을 함께 다스리기를 6년이나 계속하였라 해석했고, [북부여기]에서는 己巳八年帝率衆往諭故都五加遂撤共和之政於是國人推檀君是爲北夫餘始組也 기사 8(B.C.232), 단제께서 무리를 이끌고 가서 옛 도읍의 오가들을 회유하시니 마침내 공화(共和) 정치를 철폐하게 되었다라 해석해놓았다. 그런데 왜 이 [마한세가] 국역에서는 엉뚱하게 진시황을 끌어들였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현세의 대중과 후세를 위하여 삼가 크게 경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이라도 출판된 판본을 교정해야 하고, 인터넷에 공개된 자료를 수정해야 할 것이다.

 

[마한세가]에서 중요한 부분은 子弓忽立 甲寅 命陜野侯 率戰船五百艘 往討海島 定倭人之叛 갑진년(B.C.677)에 아들 궁홀(27)즉위하더갑인년(B.C667)에 협야후(陜野侯)에게 명하여 전선 500척을 이끌고 가서 해도를 쳐서 왜인의 반란을 평정하도록 했이다.

또한 이 기사는 [단군세기]36세 단군 매륵 재위 58년의 기사 갑인년 38(B.C.667), 협야후(陜野侯) 배반명(裴幋命)을 보내어 바다의 도적을 토벌케 하였다. 12월엔 삼도(三島 규슈, 혼슈, 시코쿠)가 모두 평정되었다.“로 나온다. 단군 매륵 치하의 삼한은 이어지는 기사 무진년 52(B.C.653)에 단제께서 병력을 보내 수유(須臾)의 군대와 함께 연나라를 정벌하게 하였다. 이에 연나라가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리자 제나라가 대거 일어나 고죽(孤竹)에 쳐들어 왔으나, 우리의 복병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화해를 구걸하고는 물러갔다에서 보듯이 동방의 강국이었다. 그러니 전선 500척으로 왜인의 반란을 평정할만큼 군사력이 충분했다. 발해와 황해가 삼한을 잇는 교통의 요로였으니 부산과 일본열도 사이 한일해협 정도는 가볍게 건넜다.

또한 [단군세기]에는 ”3대 가륵단군 재위 10(BCE 2173)년 두지주의 예읍이 반란을 일으켜 그곳의 추장 '소시모리'의 목을 참수했는데, 그의 후손인 '협야노(陜野奴)'라는 인물이 일본으로 건너가 왕을 참칭했다. 35대 사벌단군 재위 50(BCE 723)'언파불합(彦波弗哈)' 장군을 보내 쿠마소(웅습熊襲)로 보냐 정벌했다.“라는 기사가 있다

그런데 임승국의 환단고기의 각주는 협야후(陜野侯) 배반명(裴幋命) : <일본서기> 신무천황기에는 협야존(狹野尊) 일면 신무천황이라 적혀있다.“라고 한다.

또한 일설에는 일본을 정벌한 '언파불합'과 일본 천황가의 뿌리가 되는 초대 진무천황이 되는 '협야후 배반명'은 부자 관계라고 하며, <일본서기>에도 '언파렴무로자초즙불합존(彦波瀲武鸕鷀草葺不合尊, 우가야 후키아에즈)', '언파불합''협야(狹野, 협야후)'가 부자 관계로 나온다고 한다.

환단고기가 공개되자 한국과 일본은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한국의 주류 사학계는 인상을 찡그리며 위서라고 냉소했으나 일본 사학게와 대중들은 좋아했다고 한다. 언파불합과 협야후 배반명이 진무천황과 연관된 인물들이라면 일본으로서는 천황의 뿌리가 밝혀졌으니 경사가 아닐 수 없고, 한국으로서는 그 못되먹은 왜족의 우두머리가 한반도에서 건너간 자라고 하니 배반당한 심정에 찡그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그럴 수 있겠지만 한국의 주류 사학자들이 얼굴을 찡그린 이유가 그러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환단고기가 지금까지 자기들의 철밥통을 보장해준 한국사를 뿌리로부터 온통 뒤흔들어놓았기 때문이었다. 환단고기가 말하는 고대사가 사실로 드러나면 자기들의 박사 학위를 지금까지 보장해준 모든 논문이 휴지쪼가리가 되기 때문이다.

[단군세기][마한세가]가 반드시 사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억지로 꾸며서 기록하여 후세에 남길만큼 우리 조상들이 그렇게 사기꾼 기질이 있지는 않다. 일본사람들이 진무천황이 삼한에서 온 인물이라고 믿든 안 믿든 그것은 자신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2700년 전 까마득한 옛날 일이므로 사실이라도 달라질 게 없고 아니라도 달라질 게 없다. 사실이라면 그것을 좋은 방향으로 해석하고 이끌어가야지 나쁜 방향으로 이끌며 정치적 욕망을 만족하려는 것은 지극히 야수스러운 짓일 뿐이다. 고구려 고토 수복을 외치는 한국의 과격한 국수주의자들도 야수스럽지만, 협야후 배반명과 진무를 엮어 임나일본부와 한반도 남부 경략설을 주장하는 것 역시 야수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이 야수스러움은 기자조선설과 한사군설을 주장하는 자들에게도 이어진다.

동북아에 사는 사람들이 그런 야수스러운 행태를 언제까지 이어갈 것인가. 한국, 중국, 일본의 사유인들은 수천 년 동안 대대로 이어져 온 그 야수스러운 욕망의 굴레를 이제는 깨끗이 끊어내야 한다. 동양삼국 우리끼리의 굴레를 이제 훌쩍 벗어던지자. 그리고는 밖으로 눈을 돌리고 동북아 전체를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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