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禪軒 독서일기 2026년 6월 7일 일요일]
《 『환단고기』 [번한세가 상 치우남 왕] 》 (52)
番韓世家 上
蚩尤天王 西征涵芮 南平淮岱 披山通道 地廣萬里 至檀君王儉 與唐堯幷世 堯德益衰 來與爭地不休 天王 乃命虞舜 分土而治 遣兵而屯 約以共伐唐堯 堯乃力屈 依舜而保命以國讓 於是 舜之父子兄弟 復歸同家 盖爲國之道 孝悌爲先
及九年洪水 害及萬民 故檀君王儉 遣太子扶婁 約與虞舜 招會于塗山 舜遣司空禹 受我五行治水之法 而功乃成也 於是 置監虞於琅耶城 以決九黎分政之議 卽書所云 東巡望秩 肆覲東后者 此也
辰國 天帝子所治 故五歲巡到琅耶者一也 舜諸侯 故朝覲辰韓者四也 於是 檀君王儉 擇蚩尤後孫中有智謀勇力者爲番韓 立府險瀆 今亦稱王儉城也
번한세가 상
치우천왕은 서쪽으로 탁예(𣵠芮)를 정벌하고 남쪽으로 회대(淮岱)를 평정하였다. 산을 뚫고 길을 내니 땅 넓이는 만리가 되었다. 단군왕검(B.C.2333~2241)과 요나라 도당(요임금)이 같은 시대였는데 요임금의 덕이 날로 쇠퇴해져 서로 땅을 다투는 일이 쉬지 않았다. 천왕은 마침내 우순(순임금)에게 명하여 땅을 나누어 다스리도록 하더니 군사를 보내어 주둔시키고 함께 요임금의 당나라를 치도록 약속하였다. 요임금이 마침내 힘에 굴복하여 순임금에 의지해 생명을 보전하고 나라를 양보하였다. 이에 순임금의 부자와 형제가 돌아와 같은 집에 살게 되었으니 대저 나라를 다스리는 길은 효제(孝悌)가 먼저이다.
9년 홍수를 당해 그 피해가 만백성에게 미치므로 단군왕검이 태자 부루를 보내어 우순과 약속하고 초청하여 도산에서 만났다. 순임금은 사공인 우를 파견하여 우리의 오행치수의 법을 배우게 하니 마침내 홍수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이에 우(순임금)를 낭야성에 두고 구려분정(九黎分政)이 의사를 결정하는 것을 감독하도록 하였다. 바로 『서경(書經)』에서 말하는 ”동쪽으로 순행을 떠나 차례대로 산천에 제를 올리고 동방의 천자를 알현했다“라는 기록이 바로 이것이다.
진국(辰國)은 천제의 아들이 다스리는 곳이다. 그러므로 5년마다 순행하는데 낭야성도 그 하나이다. 순은 제후이므로 1년에 네 번 진한에 입조하여 알현했다. 이때 단군왕검은 치우의 후손 가운데 지모가 뛰어나고 용력이 뛰어난 자를 골라 번한의 왕으로 삼고 험독에 막부를 세웠는데 지금의 왕검성이라고도 부르는 곳이다.
[논주] 이 글에서는 단군왕검이 세운 나라 이름을 ‘진국(辰國)’이라 한다. 그러면서도 삼한관경제로 진한, 번한, 마한 세 나라 이름을 쓴다. 통칭하여 ‘삼한(三韓)’이라고 한다. 『삼국유사』에서는 ‘조선’이라고 하면서도 항목 명칭을 <고조선기>라고 했다. [북부여기]에서는 박혁거세 거서간이 서라벌에 세운 나라 이름이 ‘진국(辰國)’이라 한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고조선’과 ‘단군조선’은 다른 시대의 왕조와 구분하기 위해 만든 편의성 국명이다. 이 중에서 ‘고조선’이란 말은 이미 익숙해졌지만 알고 보면 사용할 게 못 된다. ‘진국’과 ‘삼한’은 단군왕검계 왕조일 때의 국명이다. 앞글 [마한세가]에서는 색불루 단군 이후 왕조 이름을 ‘삼조선(三朝鮮)’이라 하고, 관경제로 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이라고 한다. 차이는 한(韓)‘과 조선(朝鮮)’이다. 국명 문제에 대한 학계의 논의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각 왕조시대에 적합한 국명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요약하면 단군왕검 시대에는 중국 대륙의 동부 양자강 하류부터 황하 하류를 거쳐 난하-대릉하-요하 유역을 거쳐 만주와 연해주를 거쳐 한반도를 지나 대마도 구주, 일본열도 모두가 진국의 영역이었다는 것이다. 그 중심지가 발해가 중요한 교통로 역할을 하는 난하-대릉하-요하 유역으로 인간과 문화가 가장 발달한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단군왕검 시대보다 2천 년 전에 이미 찬란한 홍산문화를 꽃피웠다.
기원전 2600년경에 치우천왕과 황제헌원이 탁록대전에서 맞붙었다. 결과를 보면 동이족 쪽에서는 헌원의 항복을 받았다 하고, 화이족 쪽에서는 치우를 잡아 죽여 시체를 나누어 세 곳에 묻었다고 한다. 그런데 300여 년 후인 단군왕검 시대에 요임금과 순임금이 단군왕검에게 복종했다는 이 기사를 보면 치우천왕이 승리하여 중국 동부 지역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중국 동부 지역에서 일어난 은나라는 동이족이다. 화이족이 세운 주나라가 황하 중류에서 일어나 은나라를 멸망시켰다. 양자강 하류 유역에서부터 황하 하류 유역을 지나 난하-대릉하-요하 하류 유역 평야지대에서 산 농경족은 모두 동이족으로 논농사와 밭농사를 겸작했디. 또한 한반도 북서부와 남서부 평야 지대에 산 사람들도 동이족이다 일부는 일본열도로 건너갔다..그러나 황하 중상류에서 산 화이족은 주로 밭농사를 했다.
蚩頭男 蚩尤天王之後也 以勇智著聞於世 檀君乃召見而奇之 卽拜爲番韓 兼帶監虞之政 庚子 築遼中十二城 險瀆令支湯池桶道渠庸汗城蓋平帶方百濟長嶺碣山黎城是也 頭男薨 子琅邪立 是歲庚寅三月 改築可汗城 以備不虞 可汗城一名琅邪城 以番韓琅邪所築 故得名也
甲戌 太子扶婁 以命往使塗山 路次琅邪 留居半月 聽聞民情 虞舜亦率四岳 報治水諸事 番韓 以太子命 令境內大興扃堂 幷祭三神于泰山 自是三神古俗 大行于淮泗之間也
치두남(蚩頭男 1대)은 치우천왕의 후손으로 지혜와 용기가 세상에 드러난다는 소문을 단군이 듣고는 곧 불러보더니 이를 기이하게 여기고 곧 번한왕의 자리를 내리고, 겸하여 우(虞)의 정치를 멀리서 살피도록 하였다. 경자년(B.C.2321)에 요중에 열두 개의 성을 쌓았으니 험독, 영지, 탕지, 통도, 거용, 한성, 개평, 대방 백제, 장령, 갈산, 여성이 그것들이다. 치두남이 죽고, 아들 낭야(2대)가 즉위하였다. 이해 경인년(B.C.2311) 3월에 가한성을 개축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가한성은 일명 낭야성이라고도 하는데 번한의 낭야에 세워졌기 때문에 그 이름을 얻었다.
갑술년(B.C.2267)에 태자 부루가 명을 받들어 도산으로 가는 길에 반달 동안 낭야성에 머무르며 백성들의 사정을 묻고 들었다. 우순도 역시 사악(四岳)을 인솔하고 치수와 여러 일들을 보고하였다. 번한은 태자의 명을 받들어 나라 안에 크게 경당을 일으키는 영을 내리고 아울러 삼신을 태산(泰山)에서 제사 지냈다. 이로부터 삼신을 받드는 옛 풍속이 회수와 사수 지역에서 크게 행해졌다.
[논주] 요중(遼中)은 대릉하 상류 지역으로 비정되고, 낭야성은 지금의 산동성 청도시에 지명이 남아있다. 도산은 양자강 하류의 회계산이다. 단군왕검 때 치우천왕의 후손이 산동성에 살고 있었고, 또한 화이족 순임금 우를 간접 통치하였으므로 번한의 영역이 산동반도 남부에까지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후세의 산동반도의 제나라와 노나라뿐만 아니라 화북지역의 연나라까지 모두 동이족의 영역이었다.
이러한 고대사에 대하여 한국 쪽에서 자만할 것도 없고 중국 쪽에서 반박할 것도 없다. 한국인이나 중국인이나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중국대륙에서 자연 발생한 족속이 아니라 아프리카에서 동쪽으로 이동해와서 갈라진 족속들이다. 중국대륙에 들어와서부터 이동한 경로가 달랐다. 한 무리는 남쪽 해안을 거쳐 양자강 하류 유역에 일단 정착했고, 다른 한 무리는 동북쪽 육로를 거쳐 황하 중상류에 정착했다. 양자강 하류 무리는 인구가 늘어나자 일부가 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발해만과 요동만 연안에 분포했고, 황하 중상류 무리는 인구가 늘어나자 동쪽으로 이동하여 황하 하류에 정착하며 양자강 무리들과 섞였다. 현대에는 중국 동부 산동성부터 한반도 남부까지 황해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는 일대에 분포하는 Y성염색체 하플로는 양자강 무리의 O1계와 황하 무리의 O2계가 80% 정도로 주류를 이루고 있다. 바다를 격한 일본열도는 도래인 후손인 O1계가 약 35% 정도 되지만 O2계는 훨씬 적다. Y성염색체 하플로가 황해권 고대사를 물증하고 있다.
동아일보 2015년 8월 27일 기사를 보면, 중국 랴오닝 성 랴오양(遼陽)시 박물관의 신석기시대 첫 전시실에는 비파형 동검과 미송리식 토기들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고, 60m² 남짓한 아담한 전시실을 돌아 나가자마자 투구를 쓴 채 긴 창을 쥐고 선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의 거대한 동상이 막아서고, 동상 뒤로 모든 전시실에서 비파형 동검이나 미송리식 토기들은 자취를 감췄으며, 연(燕), 진(秦), 한나라 등 중원 문명 위주의 유물들만 빼곡히 전시돼 있을 뿐이라고 한다. 또한 고구려를 다룬 전시실도 다른 전시실로 이어지는 통로로 보일 정도로 초라하고, 고구려 전시실 전면은 고구려 정벌에 나선 당 태종을 그린 벽화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고 한다.
이 기사는 11년 전의 것이다. 지금도 역시 그런 전시실 모습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10년이 지난 지금은 요양시 박물관 연구사들의 사관이 많이 진화했을 것이다. 10여 년 전에는 동이족 단군왕검의 삼한의 지표유물인 비파형 동검과 미송리식 토기들을 감추고, 번조선을 친 진개와 고구려를 정벌한 당태종을 크게 부각시키는 사관이었지만, 이제는 치우천왕을 중화민족의 한 조상으로 모시는 정도로 생각의 틀이 넓어졌으니 발굴된 유물과 유적을 사실 그대로 전시하고 있을 것이다.
지구 위의 모든 문명은 지구 위에 사는 모든 인류의 공동문명이다. 황하문명과 양자강문명, 요하문명과 홍산문명 모두 동북아에 사는 동북아 사람들의 문명이다. 그러한 고대문명을 이룬 사람들이 어디 국경을 딱 정해놓고 살았겠는가. 사냥감의 이동에 따라 이동하고. 기후 변화에 따라 경작지를 이동하면서 살았다. 고대인들에게는 국경 개념이나 민족 개념이 없었다. 가족과 씨족, 부족 개념이 최우선이었다. 그런 그들이 이룬 문명을 현대인의 관점에서 구분하여 소유권을 다툰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문명이 어디 하늘에서 뚝 떨어졌는가. 고대 문명은 근접해 사는 여러 부족들이 서로 소통하는 가운데 이룩한 인류의 집단 전체의 지혜의 산물이다.
요하문명의 주인공이 우리 조상이라고 한국과 중국이 서로 다투어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우수한 문명을 이룬 조상들을 이어받아 우수한 문명을 이루겠다는 생각이라면 좋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 민족이 가장 우수하고 다른 민족은 열등하다는 증거로 요하문명을 말한다면, 그 의도와 목적이 동북아의 맹주가 되기 위함이란 말인가? 그럼 맹주가 되어서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가. 옛날 정복자들처럼 동북아를 지배하고 나아가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말인가? 알렉산더, 징기스칸, 나폴레옹, 무솔리니, 스탈린, 히틀러, 동조영기 등 등 한 시대를 뒤흔든 영웅들치고 해피앤드가 없다. 인간 개인으로나 국가 전체로나 이득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러므로 요하문명을 두고 서로 다투는 것은 치졸하고 어리석기 그지없는 짓이다.
太子至塗山 主理乃會 因番韓告虞司空曰 予北極水精子也 汝后請予 以欲導治水土 拯救百姓 三神上帝 悅予往助 故來也 遂以王土篆文天符王印 示之曰 佩之則能歷險不危 逢凶無害 又有神針一枚 能測水深淺 用變無窮 又有皇矩倧寶 凡險要之水 鎭之永寧 以此三寶授汝 無違天帝子之大訓 可成大功也
於是 虞司空 三六九拜而進曰 勤行天帝子之命 佐我虞舜開泰之政 以報三神允悅之至焉 自太子扶婁 受金簡玉牒 盖五行治水之要訣也 太子 會九黎於塗山 命虞舜 卽報虞貢事例 今所謂禹貢 是也
태자는 도산에 당도하여 화합을 주관하며 번한 왕을 통해서 우사공순임금 다음 우임금)에게 이르기를, ”나는 북극 물 정기의 아들이다. 그대의 왕이 나에게 물과 땅을 이끌고 다스려서 백성들을 도와 구하는 방법을 여쭙는다고 하니, 삼신상제께서 기뻐하시며 나를 가서 도우라고 해서 왔다.“고 했다. 말씀을 마치고 천왕 땅의 전문으로 쓰인 천부경과 천왕인을 보이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지니면 곧 능히 험준한 곳을 다녀도 위험이 없을 것이고, 흉한 일을 만나도 피해가 없을 것이다. 또 여기 신령스러운 자가 한 개 있으니 능히 물이 깊고 얕음을 측정할 수 있고 쓰임새의 변화가 끝이 없을 것이다. 또 곱자인 황거종이란 보물이 있는데 대저 지세가 험한 요충지의 물길을 다스려서 물이 잔잔하게 할 것이다. 이제 이 삼보를 그대에게 주니, 천제의 아들이 주는 큰 가르침에 어긋남이 없으면 치수에 성공하여 마침내 큰 공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우나라 사공은 삼륙구배를 하고 나아가 아뢰기를, ”천제 아드님의 명을 부지런히 행하고, 우리 우나라 순임금의 정치를 힘써 도와 삼신께서 크게 기뻐하심이 지극하도록 보답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태자 부루로부터 (치수의 방법이 담긴 죽간) 금간옥첩을 받은 것이 대저 오행치수의 요결이었다. 태자는 구려(九黎 아홉 동이족 나라)를 도산에 모으고 우나라 순임금에게 명하여 곧 우순이 조공한 사례를 보고하도록 하였다. 지금의 이른바 우공(禹貢)이 그것이다.
[논주] ‘三六九拜’는 천 번째 절은 세 번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조아리고, 두 번째 절은 여섯 번 머리를 조아리며, 세 번째 절은 아홉 번 머리를 숙이는 삼신신앙에서 유래된 고대국가 최고급 예법이다.
이글에서 ‘虞司空’과 ‘虞貢’과 ‘禹貢’이란 말에 대한 해석이 동서고금에 걸쳐 여러 갈래다. ‘虞司空’은 ‘순임금인 虞의 치하에서 사공 벼슬을 하는 사람’으로 즉 후일에 최초의 세습국가인 하(夏)나라를 세운 우임금이다. ‘虞貢’은 ‘禹가 바친 虞인 순임금의 공물”이고, ‘禹貢’은 ‘도산회의에 참석할 때 공물을 들고 와서 직접 바친 후일의 우임금’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虞貢’과 ‘禹貢’은 공물을 보낸 사람과 직접 바친 사람의 차이일 뿐이지 공물을 바쳤다는 같은 뜻이다.
『書經』의 [夏書]의 편명인 <우공(禹貢)>은 이 글의 ‘虞貢’으로 중국 전설상의 순임금 다음의 우임금이다. 후일 하나라를 세운 첫 임금이 되기 전의 사공(司空) 벼슬에 있을 때 황하의 범람으로 많은 백성들이 희생당하고 경작지가 수몰당하자 황하 치수를 위해 9년 동안 노력했다. 그러나 계속 실패하여 낙심할 때 단군왕검의 태자 부루가 남방을 순시할 때 불러서 금간옥첩이란 말로 대표되는 치수법을 가르쳐 준 것으로 하여 우사공은 결국 황하 치수를 성공할 수 있었다. 태자 부루가 우사공에게 가르쳐 준 치수법은 직자와 곱자를 이용한 과학적인 하천 준설과 물길 만들기이다. 직자를 사용하여 곳곳의 수심을 측정하고, 곱자를 사용하여 갈수기에 물길의 높낮이와 굽은 정도를 측정하여 평탄하게 하고 바르게 함으로써 물이 순리로 흘러가도록 만들었다. 우는 그 공으로 순임금을 이어 우임금이 되었다.
규모가 훨씬 작은 한반도의 강들도 해마다 홍수로 강 유역의 인민들이 큰 피해를 당한다. 그러다가 십 년이나 오십 년을 주기로 닥치는 대홍수 때는 인민과 재물이 남는 게 없을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당한다. 중국의 황하는 한반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강으로 평야 지대를 흐른다. 평시에는 조용히 흐르지만 장마기에는 인간이 전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거세게 흐른다. 현대에 제방을 쌓고 쌓아도 물길을 감당하기 어려운데 고대에는 제방이 없었으니 뒷물에 밀리는 대로 평야를 이리저리 마구 흘러갔다. 고대에는 거의 해마다 아득한 중원 평야가 바다로 변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황하 물길을 다스리는 치수 사업이 역대 모든 왕조의 제1과제였을 것이다.
우사공이 황하 치수를 성공하여 임금이 됐다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4300여 년 시간을 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 치수 사업의 성공 비결을 태자 부루가 가르쳐주었다느니 아니니 하며 후세인들이 다투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고 속 좁은 짓이다. 이 기사 그대로, 황하 치수 사업을 성공시키는데 단군왕검의 태자 부루가 해준 조언이 큰 도움이 됐다는 것만 해도 나라와 민족을 초월하여 대단히 좋은 일이다.
중국은 순임금과 우임금 시대의 사실이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고 말로만 전해지기 때문에 일단은 전설로 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2015년 12월에 요임금의 도성인 ‘도사유지’가 발굴하였고, 조사와 연구 결과로 요순시대(堯舜時代)가 실재하는 역사임을 공표했다. 그렇다면 요임금, 순임금, 우임금은 전설이 아니라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사공의 황하 치수와 태자 부루의 조언이 전설이 아니라 사실이다. 중국에는 순임금과 우임금에 대한 고사서가 남아있지 않지만 한국에는 [단군세기]와 [번한세가] 등 사서에 순임금과 우임금에 대한 기사가 남아있다. 이밖에도 중국에서 전설로 취급하는 고대사에 관련된 인물과 기사가 [단군세기], [번한세가], [마한세가] 등에 상당히 많이 기사로 남아있다. 그러므로 중국 하자들은 한국의 고사서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중국 전설을 고대사로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한국과 중국의 고사서와 전설들은 자국 중심의 서술이다. 그러나 진화한 문명 세계에 사는 현대 학자들은 균형 잡힌 관점과 시각으로 고대사를 재해석하여 편성해야 할 책임이 있다.
琅邪薨 癸卯 子勿吉立 勿吉薨 甲午 子愛親立 愛親薨 子道茂立 道茂薨 癸亥 子虎甲立 丁丑 天王 巡到松壤 得疾而崩 番韓遣人治喪 分兵戒嚴 虎甲薨 檀君達門己丑 子烏羅立 甲午 夏主少康 遣使賀正 烏羅薨 丙戌 子伊朝立 伊朝薨 檀君阿述丙寅 弟居世立 居世薨 辛巳 子慈烏斯立 慈烏斯薨 乙未 子散新立 散新薨 戊子 子季佺立 庚寅 以命設三神壇于湯池山 徙官家 湯池古安德鄕也 薨 丁巳 子伯佺立 伯佺薨 乙未 仲弟仲佺立 薨 辛卯 子少佺立
甲午 遣將蚩雲出 助湯伐桀 乙未 遣墨胎 賀湯卽位 少佺薨 甲戌 子沙奄立 薨 弟棲韓立 薨 丁丑 子勿駕立 薨 辛巳 子莫眞立 薨 丁卯 子震丹立 是歲 殷主太戊 來獻方物 薨 癸酉 子甘丁立 薨 子蘇密立 癸巳三年 以殷不貢 往討北亳 其主河亶甲 乃謝 蘇密薨 子沙豆莫立 薨 季父甲飛立 薨 庚申 子烏立婁立 薨 子徐市立 薨 戊申 子安市立 薨 己丑 子奚牟羅立 薨 檀君蘇台五年 以雨師小丁 出補番韓 盖高登 每彈其智謀出衆而勸帝出補
時 殷主武丁 方欲興兵 高登聞之 遂與上將西余 共破之 追至索度 縱兵焚掠而還 西余 襲破北亳 仍屯兵于湯池山 遣刺客 殺小丁 幷載兵甲而去
낭야가 훙하고, 계묘년(B.C.2238)에 아들 물길(3대)이 즉위하였다. 물길이 훙하고, 갑오년(B.C.2187)에 아들 애친(4대)이 즉위하였다. 애친이 훙하고, 아들 도무(5대)가 즉위하였다. 도무가 훙하고, 계해년(B.C.2098)에 아들 호갑(6대)이 즉위하였다. 정축년(B.C.2084)에 천왕(5세 단군 구을 B.C2099~2084)이 순행하다가 송양(松壤 평양 강동군)에 이르러 병을 얻어 붕어하였다. 번한 왕이 사람을 보내 문상하고 병사를 보내 경계하도록 했다. 호갑이 훙하고, 단군 달문(達門 6세 B.C.2083~2048)의 기축년(B.C.2072)에 아들 오라(烏羅)가 즉위했다. 갑오년(B.C.2017)에 하나라왕 소강이 사신을 보내 새해 인사를 올렸다. 오라가 훙하고, 병술년(B.C.2015)에 아들 이조(8대)가 즉위했다. 이조가 훙하고, 단군 아술(阿述 9세 B.C.1985~1951)의 병인년(B.C.1975)에 동생 거세(9대)가 즉위했다. 거세가 훙하고, 신사년(B.C.1960)에 아들 자오사(10대)가 즉위했다. 자오사가 훙하고, 을미년(B.C.1946)에 아들 산신(11대)이 즉위했다. 산신이 훙하고, 무자년(B.C.1893)에 아들 계전(12대)이 즉위했다. 경인년(B.C.1891) 명을 받아 삼신단을 탕지산에 세우고 관리들의 집을 옮기게 하였다. 탕지는 옛날의 안덕향이다. 계전이 훙하고, 정사년(B.C.1864) 아들 백전(13대)이 즉위했다. 백전이 훙하고, 을미년(B.C.1826)에 동생 중전(14대)이 즉위했다. 중전이 훙하고, 신묘년(B.C.1770)에 아들 소전(15대)이 즉위했다. 갑오년(B.C.1767)에 장군 치운을 파견하여 탕(湯)을 도와 걸(桀)을 치게 하였다. 을미년(B.C.1766)에 묵태를 파견하여 탕임금의 즉위를 축하했다. 소전이 훙하고, 갑자년(B.C.1727)에 아들 사엄(16대)이 즉위하였다. 사엄이 훙하고, 동생 서한(17대)이 즉위했다. 서한이 훙하고, 정축년(B.C.1664)에 아들 물가(18대)가 즉위했다. 물가가 훙하고, 신사년(B.C.1660)에 아들 막진(19대)이 즉위했다. 막진이 훙하고, 정묘년(B.C.1614)에 아들 진단(20대)이 즉위했다. 이해에 은나라 왕 태무(太戊)가 찾아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진단이 훙하고, 계유년(B.C.1608)에 아들 감정(21대)이 즉위했다. 감정이 훙하고, 아들 소밀(22대)이 즉위했다. 계사년(B.C.1588)에 은나라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가서 북박을 치게 하니 그 왕 하단갑이 이에 사죄했다.
소밀이 훙하고, 아들 사두막(23대)이 즉위하였다. 사두막이 죽으니 작은 아버지 갑비(24대)가 즉위했다. 갑비가 훙하고, 경신년(B.C.1441)에 아들 오립루(25대)가 즉위했다. 오립두가 훙하고, 아들 서시(26대)가 즉위했다. 서시가 훙하고, 무신년(B.C.1393)에 아들 안시(27대)가 즉위했다. 안시가 훙하고, 아들 해모라(28대)가 즉위(B.C.1352)했다. 해모라가 훙하고, 단군 소태(素胎 21세 B.C.1337~1286) 5년(B.C.1333) 우사(雨師) 소정(29대)을 번한 왕에 임명하였다. 대저 고등(高登)이 항상 소정의 지모가 출중함을 꺼리다가 단군께 권하여 번한으로 내보낸 듯하다.
이 무렵 은나라 왕 무정이 영토를 넓히려는 욕심으로 군사를 크게 일으키려 하였다. 고등이 이를 듣고 상장 서여와 함께 이를 격파하고 색도까지 추격하여 병사를 풀어 불 지르고 약탈한 뒤 돌아왔다. 서여가 북박을 습격하여 격파하고 병사들을 탕지산에 주둔케 하더니 자객을 보내 소정을 죽이게 한 후, 무기와 갑옷들을 함께 싣고 돌아왔다.
[논주] 단군 소태(素胎 21세 B.C.1337~1286) 말기는 동북아 정세의 격변기였다. 이 격변은 28세 동안 잠잠하던 번한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삼한의 패권을 놓고 경쟁하는 이 시대의 영웅들은 고등, 서여, 소정, 색불루, 여원홍, 개천령 등이다. 우선 변화를 일으킨 가장 큰 충격은 이웃인 은나라 왕 무정이 ‘方欲興兵’의 정책을 펼치며 군대를 육성하기 시작하면서였다. 이 정보를 들은 삼한의 실세 고등은 우선 단군 곁에 있는 유능한 소정을 외방인 번한 왕으로 보내고는 상장 서여(서우여)와 함께 은나라를 먼저 침공하여 서쪽으로 색도까지 추격했다. 무능한 소태 단군을 밀어내고 단군이 될 욕심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서여 또한 남쪽으로 북박(산동성 조현 접경지)까지 침공하여 전과를 올렸다. 서여 또한 치우남의 후손들로 이어진 번한 왕계를 제치고 소태 단군으로부터 29대 번한 왕으로 임명받은 소정을 자객을 보내 죽임으로써 번한 왕이 되고자 하는 권력욕을 드러냈다. 그러나 고등을 견제하려는 소태 단군은 서우여를 번한 왕이 아니라 후계 단군으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경쟁자인 고등은 적극 반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할 수 없이 소태 단군은 고등을 번한 왕으로 임명했다. 고등이 갑자기 죽고, 후계자가 된 손자 색불루는 야심이 대단했다. 무능한 소태 단군과 그가 임명한 서우여를 쫓아내고 단군 자리에 올랐다. 반대하는 마한 왕 아라사를 해성에서 격파하고 심복 여원홍을 마한 왕으로 임명했다. 또한 번한으로 돌아가 따르는 무리들을 이끌고 대항하는 서우여 군대를 심복 개천령을 보내 진압하도록 했으나 실패했다. 그리하여 색불루 군대와 서우여 군대가 삼한의 패권을 두고 한판 큰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색불루 단군이 진압보다는 타협을 선택하여 서우여를 30대 번한 왕으로 삼음으로써 삼한에 평화 시대가 다시 도래하게 되었다.
병이 심하면 미루지 말고 대수술을 해야 하듯이 나라와 세상도 헝클어지고 잡스러워지면 한바탕 전쟁을 거쳐야 한다. 어느 왕조시대에나 난세가 도래하면 걸출한 영웅들이 곳곳에서 나타나 자웅을 결함으로써 권력의 서열이 다시 정해진다. 흙탕물도 시간이 지나면 맑음 물과 앙금으로 분리되듯이 그리하여 다시 세상이 평화로워진다. 이들 영웅들의 등장과 활약 덕분에 이후 연나라 위만의 침략 때까지 1000년 동안 삼조선의 나라와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