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禪軒 독서일기 2026년 6월 14일 일요일]
《 『환단고기』 [번한세가 하 기후와 기준, 위만] 》 (54)
辛丑 殷主武丁 因番韓上書天王 獻方物 丙申 徐于餘薨 丁酉 阿洛立 薨 丁丑 率歸立 薨 甲子 任那立 辛未 以天王詔 築天壇于東郊 祭三神 衆環舞擊鼓以唱曰
精誠乙奴 天壇築爲古 三神主其祝壽爲世
皇運乙 祝壽爲未於 萬萬歲魯多
萬民乙 睹羅保美御 豊年乙 叱居越爲度多
신축년에 은나라 왕 무정(武帝)이 번한을 거쳐 천왕에게 글을 올리고 방물을 바쳤다. 병신년(B.C.1225)에 서우여가 훙하고 정유년(B.C.1224)에 아락(31대)이 즉위하였다. 아락이 훙하고 정축년(B.C.1184)에 솔귀(32대)가 즉위하였다. 솔귀가 훙하고 갑자년(B.C.1137)에 임나(33대)가 즉위하였다. 신미년(B.C.1130)에 천왕이 조서를 내려 천단을 동쪽 교외에 설치하고 삼신에게 제사 지냈다. 백성들이 원을 그리고 빙글빙글 돌면서 북을 치며 노래하였다.
정성으로 천단을 쌓고 삼신님께 축수하세.
황운을 축수함이여 만만세로다.
만인을 돌아봄이여 풍년을 즐거워하도다.
[논주] 이두문은 신라 때 설총이 만든 게 아니라 이미 고래로 사용되었다. 공자 시대에 한자가 이미 보편화 됐기 때문에 연접한 동이족 삼조선 사회도 한자가 중국과 같은 시대에 발달하고 사용됐다. 한글 자모의 원형인 고대문자와 한자가 병용됐을 것이다. 이 노래는 고대문자로 기록되거나 구전하는 것을 후세 언젠가 이두문으로 정리했을 것이다. 『환단고기』에 함께 묶여있는 여러 고사서에는 한국문화 시가문학의 원류인 시가들이 여러 편 들어있어 고전을 풍요롭게 한다.
任那薨 丙申 弟魯丹立 北漠入寇 遣路日邵討平之 薨 己酉 子馬密立 薨 丁卯 子牟弗立 乙亥 置監星 牟弗薨 丁亥 子乙那立 甲午 周主瑕 遣使朝貢 乙那薨 丁卯 子麻維讀立 薨 己巳 弟登那立 李克會 啓請建少連大連之廟 定行三年喪 從之 薨 戊戌 子奚壽立
壬寅 遣子勿韓 往九月山 助祭三聖廟 廟在常春朱家城子也 奚壽薨 己未 子勿韓立 薨 己卯 子奧門婁立 薨 丁卯 子婁沙立 戊寅 入覲天朝 與太子登屼 少子登里 閑居別宮 乃獻歌太子兄弟曰
兄隱伴多是 弟乙 愛爲古 弟隱味當希 兄乙 恭敬爲乙支尼羅
恒常毫毛之事魯西 骨肉之情乙 傷跛勿爲午
馬度五希閭 同槽奚西 食爲古 雁度 亦一行乙 作爲那尼
內室穢西非綠 歡樂爲那 細言乙良 愼聽勿爲午笑
임나가 훙하고 병신년(B.C.1105)에 동생 노단(34대)이 즉위하였다. 북막이 쳐들어와 노략질하므로 노일소를 보내 토벌하고 이를 평정케 하였다. 노단이 훙하고 기유년(B.C.1092)에 아들 마밀(35대)이 즉위하였다. 마밀이 훙하고 정묘년(B.C.1074)에 아들 모불(36대)이 즉위하였다. 을해년(B.C.1066)에 감성(監星)을 두었다.
모불이 훙하고 정해년(B.C.1054)에 아들 을나(37대)가 즉위하였다. 갑오년(B.C.1047)에 주나라 왕 하(瑕)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을나가 훙하고 정묘년(B.C.1014)에 마휴(38대)가 즉위하였다. 마휴가 훙하고 기사년(B.C.1012)에 동생 등나(39대)가 즉위하였다. 이극회가 말씀을 올려서 소련과 대련의 묘를 세워 삼년상의 제도를 정할 것을 청하니 이에 따랐다. 등나가 훙하고 무술년(B.C.983)에 아들 해수(40대)가 즉위하였다. 임인년(B.C.979)에 아들 물한을 파견하여 구월산에 가서 삼성묘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니 묘는 상춘의 주가성자에 있다. 해수가 훙하고 기묘년(B.C.942)에 아들 오문루(41대)가 즉위하였다. 오문루가 훙하고 정묘년(B.C.894) 아들 누사(42대)가 즉위하였다. 무인년(B.C.883) 가을에 천왕의 조정을 찾아뵈었는데, 태자 등올(31세 단군천왕)과 작은아들 등리(登里)와 함께 별궁에서 편히 쉴 적에 태자 형제들에게 노래를 지어 바쳤다.
형은 반드시 동생을 사랑하고 동생은 마땅히 형를 공경할지니라.
항상 터럭 같은 작은 일로써 골육의 정을 상하지 마시오.
말도 오히려 같은 구유에서 먹고 기러기도 역시 한 줄을 이루나니,
내실에서 비록 환락하나 자잘한 말일랑 삼가 듣지 마시오서.
[논주] ‘與太子登屼 少子登里’에서 등올 태자는 30세 내휴 단군의 태자인데, B.C.874년에 31세 단군으로 등극하여 25년 동안 재위하다가 B.C.850년 붕어하였다. [번한세가]의 ‘太子登屼’이 [단군세기]에서 확인된다. [번한세가]와 [단군세기]의 연대와 인물이 일치함으로써 『환단고기』가 우리 민족의 고대사임이 여실히 증명된다.
나는 작년 말까지만 해도 어릴 적부터 배운 대로 우리나라 역사에서 사실은 『삼국사기』에 적힌 신라 건국 초기까지이고., 삼한시대는 『삼국유사』에 흥미거리로 얹힌 흐릿한 야사요 단군조선 시대는 『삼국유사』에 적힌대로 신화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과 믿음으로 72년 동안 살아온 나에게 『환단고기』는 가당찮은 위서였다. 그러나 73세인 2026년 1월 초에 『환단고기』를 정독하면서 ‘가당찮은 위서’라는 고정관념의 벽에 금이 가더니 벽이 차츰차츰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오늘 ‘太子登屼’이라는 말에서 비로소 벽이 완전히 무너졌다.
지금도 소위 유명한 사학자들은 『환단고기』를 ‘위서(僞書)’라 비방한다. 그러나 이렇도록 정교한 위서가 세상에 있을 수 있는가. 혹자들은 이유립이 1970년대에 『환단고기』를 조작했다고 하는데, 이유립이 얼마나 천재여서 [삼성기전 상편], [삼성기전 하편], [단군세기], [마한세가], [번한세가] 등을 오가며 시대와 인물을 정교하게 조작한단 말인가.
나는 인생의 황금기 동안 우리 민족의 고대사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짜놓은 틀 속에서 선입견과 고정관념으로 인식한 것에 대하여 안타까움과 함께 분노한다. 하지만 인생의 말기이지만 『환단고기』를 정독하며 진서임을 확인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위안을 얻는다. 그러나 『환단고기』를 정독하지도 않고서는 위서라고 비방하는 자들에게는 분노와 함께 불쌍함을 느낀다. 하루라도 빨리 ‘의심성 위서병’에서 벗어나 정신의 건강을 회복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유능한 탐구력을 우리 민족 고대사 연구와 정리에 투사해야 할 것이다.
부언한다면, ‘戊寅 入覲天朝 與太子登屼 少子登里 閑居別宮 乃獻歌太子兄弟曰’에 대한 해석이 다른 책들이 있다. 이기동의 『환단고기의 철학과 사상』은 “무인년(B.C.883) 태자 등올登屼과 함께 천자께 찾아가 입조하였다. 작은 아들 등올이 별궁에서 한가하게 지내며 노래를 지어 바쳤다. 태자 형제가 노래를 부르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라고 해석한다. 번조선왕 누사(42대)가 가을에 내휴 천왕을 찾아뵙고 난 후에 별궁에서 태자 등올과 아우 동리와 함께 어울려 쉴 때 태자와 아우를 위해 노래를 지어서 불렀다. 태자 등올과 함께 천자께 찾아가 입조한 게 아니다. 또한 ‘작은 아들 등올’이 아니라 ‘작은 아들 등리’이고, 태자 형제가 노래를 부른 게 아니다. 상당한 분량의 책인데 이런 티가 있어 아쉽다.
임승국의 『한단고기』는 ”무인년(B.C.883)에 천자를 찾아뵙고는, 태자 등올(登屼)과 작은아들인 등리(登里)가 별궁에서 한적하게 기거하고 있음에, 태자 형제들에게 노래를 바쳤다.“라 하여 해석이 순조롭다. 그러나 ‘한적하게 기거하고 있음’을 보고 누사가 노래를 지어 바쳤다기 보다는 누사가 태자 형제와 함께 별궁에서 어울려 쉬다가 노래를 지어 불렀다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노래의 뜻이 매우 좋지만, 한편으로는 번조선의 왕으로서 미래의 천왕인 동올 태자 형제들과 우의를 돈독히 하기 위하여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모습을 읽을 수 있다.
婁沙薨 乙未 子伊伐立 丙申 漢水人王文 作吏讀法以獻 天王嘉之 命三韓 如勅施行 己未 遣上將高力合 與淮軍敗周 伊伐薨 辛酉 子阿勒立 丙寅 周二公 遣使獻方物 阿勒薨 己丑 子麻休立 一云麻沐 薨 丙辰 子多斗立 薨 己丑 子奈伊立 薨 己未 子次音立 薨 己巳 子不理立 薨 乙巳 子餘乙立 薨 甲戌 奄婁立 戊寅 匈奴 遣使番韓 求見天王 稱臣貢物而去 奄婁薨 子甘尉立 薨 戊申 子述理立 薨 戊午 子阿甲立
庚午 天王 遣使高維先 頒桓雄蚩尤檀君王儉 三祖之像 以奉官家
누사가 훙하고 을미년(B.C.866)에 아들 이벌(43대)이 즉위하였다. 병신년(B.C.865)에 한수 사람 왕문이 이두법을 지어 바치니 천왕(31세 단군 등올(登兀 B.C.874~B.C.850)께서 좋다고 하시며 삼한에 모두 칙서를 내려 시행하도록 하였다. 기미년(B.C.842)에 상장 고력합을 보내 회군과 합쳐 함께 주나라 군대를 깨뜨렸다. 이벌이 훙하고 신유년(B.C.840)에 아들 아륵(44대)이 즉위하였다. 병인년(B.C.835)에 주나라의 소공과 주공이 사신을 보내어 특산물을 바쳤다. 아륵이 훙하고 을축년(B.C.836)에 아들 마휴(麻休 혹은 麻沐 : 45대)가 즉위하였다. 마휴가 훙하고 병진년(B.C.785)에 아들 다두(46대)가 즉위하였다. 다두가 훙하고 기축년(B.C.752)에 아들 나이(47대)가 즉위하였다. 나이가 훙하고 기미년(B.C.722)에 아들 차음(48대)이 즉위하였다. 차음이 훙하고 기사년에 아들 불리(49대)가 즉위하였다. 불리가 훙하고 을사년(B.C.676)에는 아들 여을(50대)이 즉위하였다. 여을이 훙하고 갑술년(B.C.647)에 엄루(51대)가 즉위하였다. 무인년(B.C.643)에 흉노가 번한에 사신을 파견하여 천왕을 알현할 것을 청하여 신하로 봉함을 받고 공물을 바치고 돌아갔다. 엄루가 훙하고 아들 감위(52대)가 즉위하였다. 감위가 훙하고 무신년(B.C.613)에 아들 술리(53대)가 즉위했다. 술리가 훙하고 무오년(B.C.603)에 아들 아갑(54대)이 즉위하였다. 경오년(B.C.591)에 천왕이 고유선을 보내어 한웅, 치우, 단군왕검의 삼조의 상을 하사하시고 관가에서 받들어 모시도록 하였다.
[논주] 상장 고력합(上將高力合)을 보면 고등의 손자 색불루가 삼조선을 건국한 데서 보듯이 고씨(高氏)가 단군조선 시대 처음부터 끝까지 유력한 가문이었다. 이들의 후손이 북부여와 동명국을 건국하더니 결국 고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했다. 고씨는 역사가 4천 년 이상 되는 유구한 가문이다.
‘天王 遣使高維先 頒桓雄蚩尤檀君王儉 三祖之像 以奉官家’를 보면 기원전 600년경에도 국가 체제가 완전히 정비되어 국가 정통성 역사 교육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때만 해도 이웃인 주나라와 흉노가 화친을 청하며 사신과 공물을 보낼 정도로 진조선-번조선-마조선의 삼조선은 단군이 직접 다스리는 진조선을 중심으로 뭉친 강력한 천왕의 나라로서 동북아를 호령하였다.
阿甲薨 癸酉 固台立 薨 丁亥 子蘇台爾立 薨 乙巳 子馬乾立 薨 丙辰 天韓立 薨 丙寅 子老勿立 薨 辛巳 子道乙立 癸未 魯人孔丘 適周 問禮於老子李耳 耳父姓韓名乾 其先風人 後西出關 由內蒙古而轉至阿踰豹 以化其民 道乙薨 丙申 子述休立 薨 庚午 子沙良立 薨 戊子 子地韓立 薨 癸卯 子人韓立 薨 辛巳 子西蔚立 薨 丙午 子哥索立 薨 庚辰 子解仁立 一名山韓 是歲 爲刺客所害 辛巳 子水韓立
아갑이 훙하고 계유년(B.C.618)에 고태(55대)가 즉위하였다. 고태가 훙하고 정해년(B.C.574)에 아들 소태이(56대)가 즉위하였다. 소태이가 훙하고 을사년(B.C.556)에 아들 마건(57대)이 즉위하였다. 마건이 훙하고 병진년(B.C.545)에 천한(58대)이 즉위하였다. 천한이 훙하고 병인년(B.C.535)에 아들 노물(59대)이 즉위하였다. 노물이 훙하고 신사년(B.C.520)에 아들 도을(60대)이 즉위하였다. 계미년(B.C.518)에 노(魯)나라 사람 공구(孔丘)가 주나라에 가서 노자(老子) 이이(李耳)에게 예를 물었다. 이(耳)의 아비의 성은 한(韓)이요, 이름은 건(乾)이니 그의 선조는 풍(風)의 사람이라, 뒤에 서쪽으로 관문을 지나 내몽고로부터 이리저리 돌아 아유타에 이르러 그 백성을 개화시켰다. 도을이 훙하고 병신년(B.C.505)에 아들 술휴(61대)가 즉위하였다. 술휴가 훙하고 경오년(B.C.471)에 아들 사양(62대)이 즉위하였다. 사양이 훙하고 무자년(B.C.453)에 지한(63대)이 즉위하였다. 지한이 훙하고 계묘년(B.C.438)에 아들 인한(64대)이 즉위하였다. 인한이 훙하고 신사년(B.C.400)에 아들 서울(65대)이 즉위하였다. 서울이 훙하고 병오년(B.C.375)에 아들 가색(66대)이 즉위하였다. 가색이 훙하고 경진년(B.C.341)에 아들 해인(67대)이 즉위하였다. 일명 산한(山韓)이라 했는데 이해 자객의 시해를 당했다. 신사년(B.C.340)에 아들 수한(水韓)이 즉위하였다.
[논주] 중국에서 공자와 노자가 활동하던 시기의 역사를 번조선에서도 예의주시하며 기록하였다. 중국의 문화가 번조선을 거쳐 삼조선 전체에 전파되어, 삼조선 사람들이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수준 이상의 고급문화를 누렸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문자로 기록된 서책과 사서들이 상당했을 것이 자명하다. 그런데 그 실증물들이 모두 사라지고, 현대에는 겨우 『환단고기』 한 권만 살아남았다.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살아남은 이 『환단고기』를 부정하며 없애려고 하는 자들이 있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壬午 燕倍道入寇 攻安寸忽 又入險瀆 須臾人箕代 以子弟五千人 來助戰事 於是 軍勢稍振 乃與眞番二韓之兵 夾擊大破之 又分遣偏師 將戰於機城之南 燕懼 遣使乃謝 以公子爲質
戊戌 水韓薨 無嗣 於是 箕詡以命 代行軍令 燕遣使賀之 是歲 燕稱王 將來侵未果 箕詡亦承命正號 爲番朝鮮王 始居番汗城 以備不虞 箕詡薨 丙午 子箕煜立 薨 辛未 子箕釋立 是歲 命州郡 擧賢良 一時被選者 二百七十人 己卯 番韓親耕于郊 乙酉 燕遣使納貢 箕釋薨 庚戌 子箕潤立 薨 己巳 子箕丕立 初 箕丕 與宗室解慕漱 密有易璽之約 勤贊佐命 使解慕漱 能握大權者 惟箕丕其人也 箕丕薨 庚辰 子箕準立 丁未 爲流賊衛滿所誘敗 遂入海而不還
배
임오년(B.C.339)에 연나라가 도리를 배반하고 쳐들어와서 안촌골을 공격하더니 험독에서도 쳐들어왔다. 수유 사람 기후(箕詡)가 자식과 제자들 5,000인을 데리고 와서 싸움을 돕자 이에 군세가 떨치기 시작하였다. 곧 진한과 번한의 두 한의 병력과 함께 협공하여 크게 격파하고, 또 한쪽으로 군사를 나누어 파견하여 계성의 남쪽에서도 싸우려 하니, 연나라가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 사과하기에 연나라 공자를 인질로 삼았다.
무술년(B.C.323년)에 수한이 훙했으나 후사가 없었다. 이에 기후(69대, 수유족)가 명을 받아 군령을 대행하였다. 연나라가 사신을 보내 이를 축하하였다. 이 해 연나라도 왕이라 칭하고 장차 쳐들어오려고 하였으니 기후도 역시 명을 받아 번조선 왕이라 칭하고 처음에는 번한성에 머무르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기후가 훙하고 아들 기욱(70대)이 즉위하였다. 기욱이 훙하고 신미년(B.C.290)에 아들 기석(71대)이 즉위하였다. 이 해 각 주와 군에 명하여 어질고 지혜 있는 자를 추천하게 하니 일시에 선택된 자가 270인이었다. 기묘년(B.C.282)에 번한왕이 교외에서 몸소 밭을 가꾸었다. 을유년(B.C.276)에 연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기석이 훙하고 경술년(B.C.251)에 아들 기윤(72대)이 즉위하였다. 기윤이 훙하고 기사년(B.C.232)에 아들 기비(73대)가 즉위하였다. 애초에 기비는 종실의 해모수와 옥새를 바꾸기로 몰래 약속을 하고 옆에서 부지런히 보좌했다. 해모수가 대권을 장악할 수 있도록 한 유일한 인물이 기비 그 사람이다. 기비가 훙하고 아들 기준(箕準 B.C.221 74대)이 즉위하였다. 정미년(B.C.194)에 떠돌이 도적 위만(衛滿)의 꼬임에 빠져 패하고 바다로 들어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논주] 이 시대부터 우리 민족의 시련이 시작되었다. B.C.323년에 서우여의 후손인 수한이 후사 없이 죽자, 연나라의 침략을 물리친 공을 세운 기후(箕詡)가 69대 번조선왕이 됐다. 기후는 1천 년 전 중국 은나라의 현인으로 번한에 망명한 기자(箕子)의 먼 후손이다. 기자가 직접 번조선의 왕이 된 게 아니라 먼 후손이 번조선의 왕이 되었고, 후손이 6대 129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 은나라 사람들은 원래 동이족이다. 중국 고대에는 문명이 일어난 황하 중상류 중원이 역사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그래서 이 지역에 사는 중국인들은 화산에서 조상이 출현했다고 하며 스스로 화이족이라 부르며 변방에 사는 족속들은 미개한 오랑캐로 불렀다. 중원의 동쪽인 산동성과 화북지역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만주와 한반도에 사람들과 함께 엮이는 동이족이었다. 그러므로 중원에서 일어난 주나라는 화이족 최초의 정통 국가이고, 동부지역 동해 연안에서 명멸한 은나라-상나라-제나라-노나라-연나라 등은 모두 동이족들의 나라였다. 은나라 대신인 기자는 당연히 동이족이고, 번조선에서 800년 동안 살아온 그의 후손들은 더욱 동이족이다. 기준왕이 한반도 서남부로 이동하여 정칙했기 때문에 기씨의 후에들은 지금 한국인이다. 현대중국이 그동안 염제신농과 황제헌원 둘만을 조상으로 숭배하다가 근래에 동이족인 치우천왕을 합사하여 조상으로 숭배하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1100년경에 기자가 세운 기자조선이 기원전 194년까지 약 900년 동안, 중국 동부지역이 아니라 한반도 서북부에 있었다고 하는 것은 확대 과장 차원을 넘어 망상이 아닐 수 없다. 기자의 먼 후손이 번조선의 마지막 시대 왕조였다. 그런데도 삼국시대에는 기자를 기운전 1100년경부터 미개한 동이족을 가르친 스승으로 받들고, 고려시대에는 평양에 기자를 만들어 놓고 조선 말기까지 숭배하며 제사를 지냈으니, 그런 짓을 한 조상들은 선현이라고 할 수가 없다.
1천 년 동안 유지하던 동북아 지역의 평화가 기원전 339년 연나라 군대가 번조선을 침략하기 시작하면서 깨졌다. 기원전 300년~250경에 연나라 장수 진개가 침략하여 서쪽 땅 2천 리를 빼앗기면서 외벽인 번조선이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 여파로 진조선과 막조선이 혼란에 빠졌다. 진개의 침략 시기가 확실하지 않는 데, 본문에서 ‘乙酉 燕遣使納貢 을유년(B.C.276)에 연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라 했으므로, 약세일 때는 조공을 바치던 연나라가 번조선이 혼란에 빠지자 곧 진개를 보내 침략을 자행했기 때문에 강력한 통치력을 가진 기석왕이 죽고 경술년(B.C.251)에 아들 기윤(72대)이 즉위한 후일 것이다.
서쪽 영토 2천 리를 빼앗긴 번조선과 진조선을 국력을 강화하여 빼앗긴 영토를 수복할 생각은 하지 않고 기윤이 즉위한 B.C.251년부터 해모수가 단군이 된 B.C.238년까지 13년 동안 진조선 종실 해모수와 번조선 태자 기비가 합작하여 대권, 즉 단군천왕 자리를 빼앗을 궁리를 하며 국력을 소모했다. 이 틈에 연나라는 더욱 공세를 취하여 삼조선 전체가 위기에 빠졌고, 이어서 훨씬 더 강한 한나라가 일어나 동방 침략을 개시하면서 결국 B.C.108년에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말았다.
B.C.1285년 색불루 단군이 삼조선을 세우면서 삼한 관경제를 이어받아 진조선-번조선-마조선 관경제를 실시했는데, 가장 핵심인 군사력을 통합하지 않고 각 번국에게 분리한 것은 결정적인 실책이었다. 물론 각 번국왕을 믿고 그렇게 했을 것이나 세월이 흐르면서 외침을 당했을 때 군사력을 통합하기가 차츰 어려워진다. 그래서 삼조선 말기에는 서로 간에 군사적 협력이 어려워서 외적에게 각개격파 당하고 말았다. 외형은 진조선을 중심으로 한 삼조선이나 세 조선이 모두 군사력과 군령권이 독립된 나라이기 때문에 자자기 나라가 직접 침략을 당하지 않으면 소극적 방어에 집중하기 마련이다. 인구가 적은 삼조선이 인구가 많은 한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하려면 먼저 삼조선이 굳게 뭉쳐야 한다. 어느 시대에나 외침을 당했을 적에 지도자들이 단결하면 민심이 뭉쳐서 국난을 극복할 수 있다. 반대로 지도자들이 분열하면 민심이 흩어져서 나라와 영토를 잃는다.
삼조선 말기는 우리 민족 전체가 위기에 빠졌다. 동이족이 단결하지 못한 채 각자도생을 꾀하며 분열하다가 삼조선이 무너지고 말았다. 다행히 고구려가 삼조선의 영토 대부분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한반도를 정복하려는 야심을 내보인 시대, 고려 초기 거란족이 침략한 시대, 중기 몽골족이 침략한 시대, 조선 중기 왜족이 침략한 시대, 말기 왜족에게 정복당한 시대 등은 우리 민족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이중에서 1910년 왜족에게 정복당한 시대를 제외하고는 온 민족이 뭉쳐서 저항한 덕분에 간신히 멸족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 시대에는 위로는 왕이 무능하여 나라를 팔아먹고, 신하들은 뿔뿔이 흩어져 친일부역과 각자도생에 분주하니 백성들도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낙심하여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왜족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이로써 환인 시대와 환웅시대 다음인 단군왕검의 삼한 시대 진한, 번한, 마한의 약 1천 년 역사와 색불루 단군의 삼조선 시대 진조선, 번조선, 마조선의 약 1천 년 역사, 그리고 북부여 약 200년 역사 해석을 마친다. 다음 차례는 기원전 58년에 일어난 고주몽의 고구려 역사 700년이다.
기원후 660년에 망한 백제 인구가 620만이었다. 그러면 3국은 모두 합쳐서 2천만은 되었다. 그러므로 삼조선 말기에 한반도와 요동, 요서, 삼강평야 등에 산 동이족이 최소한 1천만 명은 넘었다. 일제시대 한반도 전체 인구가 3천 만이었다. 신라통일기 인구 2천만보다 1400년 후인데도 1천만 명밖에 더 늘어나지 않았다. 그동안 계속되는 외침으로 많은 백성들이 죽었기 때문에 인구가 늘어날 수 없었다. 이러한 인구증가율을 보면 우리 민족이 그동안 얼마나 큰 고통을 겪으면서 겨우 목숨을 연명해왔는지를 알 수 있다.
고조선의 3단계 도읍 시대는 다음과 같다.
1. 송화강 아사달(하얼빈) 시대 : 초대 단군왕검~21세 소태(B.C.2333~1286 : 1048년간)
2. 백악산 아사달(農安․長春) 시대 : 22세 색불루~43세 물리
(B.C.1285~426 : 860년간)
3. 장당경(開原) 시대 : 44세 구물~47세 고열가
(B.C.425~B.C.238 : 188년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