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現代史叢

《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 <해모수와 고주몽>》 (55)

작성자박희용|작성시간26.06.20|조회수5 목록 댓글 0

 

                                                      [南禪軒 독서일기 2026620일 토요일]

                                       《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 <해모수와 고주몽>(55)

 

 

                                                                      第六 高句麗國本紀

 

高句麗之先 出自解慕漱 解慕漱之母鄕 亦其地也

朝代記曰 解慕漱 從天而降 嘗居于熊心山 起兵於夫餘古都 爲衆所推 遂立國稱王 是謂夫餘始祖也 着烏羽冠 佩龍光劒 乘五龍車 從者百餘人 朝則聽事 暮則登天 無所令而管境自化 山無盜賊 禾穀滿野 國無事而民亦無事 檀君解慕漱之初降 在於壬戌四月初八日 乃秦王政八年也

 

                                                                        고구려국본기

 

고구려의 선조는 해모수로부터 나오는데 해모수의 태어나 자란 땅 바로 그곳이다.

조대기에 이르기를, “해모수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웅심산에서 일찍이 살았다. 부여의 옛 도읍지에서 군대를 일으키고는 무리의 추대를 받아 나라를 세우고 왕을 칭하, 이분을 일컬어 부여의 시조라고 한다. 오우관을 쓰고 용광검을 차오룡거를 탔는데, 따르는 시종이 백여 명이었다.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저녁에는 하늘로 올랐다. 영을 내리지 않아도 관경이 스스로 변화하고, 산에는 도적이 없으며 들에는 벼와 잡곡이 그득했다, 나라에 아무 일이 없고 백성들 또한 아무 일이 없었다. 단군 해모수가 처음 하늘에서 내려와 재위에 오른 날이 임술년(B.C.239) 4월 초 8일로서 곧 진나라 왕 영정 8년이다.

 

藁離郡王高辰 解慕漱之二子也 沃沮侯弗離支 高辰之孫也 皆以討賊滿功 得封也 弗離支 嘗過西鴨綠 遇河伯女柳花 悅而娶之 生高朱蒙 時則壬寅五月五日也 乃漢主弗陵元鳳二年也 弗離支薨 柳花 率子朱蒙歸于熊心山 今舒蘭也 旣長 周遊四方 擇迦葉原而居之 選於官家 爲牧馬 未幾 爲官家所忌 與烏伊摩離陜父 逃至卒本 適 夫餘王無嗣 朱蒙 遂以王壻 入承大統 是謂高句麗始祖也

 

고리군 왕 고진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고, 옥저후 불리지(弗離支 고주몽의 아버지 고모수(高慕漱)의 본명)는 고진의 손자이다. 모두 도적 위만을 토벌한 공을 세워 봉함을 받았다. 불리지가 일찍이 서압록강을 지나다가 하백녀 유화를 만나 기뻐하며 장가들어 고주몽을 낳았다. 때는 임인년(B.C.79) 55일이고, 곧 한나라 왕 불능 원봉 2년이다. 불리지가 죽으니 유화는 아들 주몽을 데리고 웅심산으로 돌아가니 지금의 서란이다. 주몽이 성장하여 사방을 주유하다가 가섭원을 택하여 거기서 살았는데, 관가에 뽑혀 말을 키우는 일을 했으나 얼마 안 되어 관가의 미움을 받게 되자 오이와 마리, 협부와 함께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렀다. 때마침 부여 왕은 후사가 없었는데 주몽이 마침내 사위가 되어서 승계하여 대통을 이었다. 이 분을 일컬어 고구려 시조라 한다.

 

[논주] 고리국{藁離國}은 해모수가 군대를 일으킨 곳으로 삼국유사에서 북부여 시조 해모수가 요나라 의주계(醫州界)에 있는 홀승골(忽昇骨)에 도읍하였다고 전한다.

고주몽은 북부여 6세 단군 고무서가 B.C.58년에 훙하자 단군을 승계하였다. B.C.79년에 태어난 고주몽은 22세인 B.C.58년에 북부여 7세 단군이 되었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고구려 건국이 B.C.37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북부여 단군을 승계하여 단군이 된 고주몽이 21년 후인 B.C.37년에 나라 이름을 고구려로 바꾸었기 때문일 것이다. 태자가 아닌 자로서 왕이 된 자는 이전의 나라를 지우고 자기의 새 나라를 세우기를 바란다. 그래야 이전 왕조의 왕족들과 신하들의 세력을 흩어버리고 자기 왕조를 든든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태자가 아니라 타국 출신인 사위로서 단군을 승계한 고주몽이 대번에 나라 이름을 바꾸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새 나라 준비 기간이 21년 걸렸다.

그런데 광개토태왕비 비문에 새겨진 "환지십칠세손(還至十七世孫, 도리어 17세손에 이르러...)"이라는 구절이 있다. 주몽부터 광개토태왕까지의 13세대에 해모수-자 고진-손자-증손자 불리지의 4세대를 합치면 17세손이 된다. 고주몽은 해모수의 방계 5세손이고, 광개토대왕은 17세손이다.

광개토태왕이 자신을 '17세손'이라 칭한 것은 '시조'의 관념이 주몽을 넘어, 고구려의 뿌리인 해모수까지 확장되어 있음을 전제로 한다. 고구려의 역사를 북부여 건국(B.C. 239) 시점까지 끌어올리며 고구려가 북부여를 잇는 17대의 적통임을 만천하에 과시하였다.

그러나 고주몽은 해모수의 직계가 아니라 방계라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장수왕이 아버지의 비문에는 해모수 17세손이라 했지만 고구려 역사서에는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를 공식적으로 거론하기가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또한 신라 박혁거세 신화와 석탈해 신화, 김알지 신화가 만들어지던 시대 풍조처럼 고구려 건국 후에 고주몽을 신격화하기 위하여 유화부인의 신화가 만들어지고 해모수-고진-손자-불리지-고주몽의 가계가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 후세인들은 다만 남아 있는 역사 자료를 두고 해석할 따름이지, 나머지 부분은 상상이고 가설이다.

 

고주몽 건국 기사는 [가섭원부여기]에 다음과 같이 더 자세하다.

 

迦葉原夫餘紀 休崖居士 范樟 撰 始祖 解夫婁 在位 三十九年

壬寅八年 先是 河伯女柳花 出遊 爲夫餘皇孫高慕漱之所誘 强至鴨綠邊室中而私之 仍升天不歸 父母責其無媒而從之 遂謫居邊室 高慕漱本名弗離支 或曰高辰之孫 王異柳花 同乘還宮而幽之 是歲五月五日 柳花夫人生一卵 有一男子 破殼而出 是謂高朱蒙 骨表英偉 年甫七歲 自作弓矢 百發百中 夫餘語 善射爲朱蒙 故以名云

甲辰十年 王老無子 一日祭山川求嗣 所乘馬 至鯤淵 見大石 相對俠淚 王怪之 使人轉其石 有小兒 金色蛙形 王喜曰 此乃天𧶘我令胤乎 乃收而養之 名曰金蛙 及其長 立爲太子

壬戌二十八年 國人以高朱蒙 爲不利於國 欲殺之 高朱蒙 奉母柳花夫人命 東南走 渡淹離大水 到卒本川 明年開新國 是爲高句麗始組也

癸酉三十九年 王薨 太子金蛙立

 

시조 해부루 을미년 원년(B.C.86)에 왕은 북부여 때문에 제약을 받아 가섭원(迦葉原 길림) 또는 분(岔陵)이라고도 하는 곳으로 옮겨서 살았다.

임인년 8(B.C.79)에 앞서 하백녀 유화부인이 나들이를 나갔는데 부여의 황손 고모수(高慕漱)가 유혹하더니, 강제로 압록강 변의 어떤 집에서 자기 멋대로 하여 버리고는 고모수는 승천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유화의 부모는 유화가 무모하게 고모수를 따라음을 책망하여 마침내 구석방에 딸을 가두어 버렸. 고모수는 본명이 불리지(弗離)이며 혹은 고진(高辰)의 손자라고도 한다. 왕께서는 유화를 이상히 여겨 수레를 같이 타고 궁으로 돌아와 깊숙한 곳에 가두어 버렸다.

그해 55일 유화부인은 큰 알 하나를 낳으니 한 사내아이가 그 껍질을 깨고 나왔다. 이름은 고주몽(高朱蒙)이라 불렀는데 생김새뛰어났으며 나이 7세에 저 혼자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에선 활 잘 쏘는 것을 일컬어 주몽이라 하므로 이로써 이름으로 불렀다.

갑진년 10(B.C.77)에 왕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어느 날 산천에 제사를 지내고 아들 있기빌었더니 타고 있던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자 큰 돌을 마주 보고 서서 눈물을 흘렸. 은 이를 이상히 여겨 사람들을 시켜 그 큰 돌을 굴리게 하였더니 어린애가 있었는금색의 개구리 모양이더라. 왕은 몹시 기뻐하여 이 아이야말로 하늘이 나에게 내리아기로다라고 하시며 곧 거두어 기르니,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고 장성하매 태자로 책봉하였다.

임술년 28(B.C.59)에 나라 백성들이 고주몽을 가리켜 나라에 이로움이 없는 인물이라 하여 그를 죽이려 했다. 고주몽은 어머니 유화부인의 명을 받들어 동남쪽으로 망하여 엄리대수(淹利大水)건너 졸본천(卒本川)에 이르러, 이듬해 새 나라세우니 이것이 고구려의 시조가 된다.

계유년 39(B.C.48)에 왕이 죽고 태자 금와가 즉위했다.

 

임인년 8(B.C.79)에 유화가 불리지를 만나 인연을 맺어 고주몽을 잉태했다. 이 만남의 인연을 앞의 글에서는 弗離支 嘗過西鴨綠 遇河伯女柳花 悅而娶之 生高朱蒙 불리지가 일찍이 서압록강을 지나다가 하백녀 유화를 만나 기뻐하며 장가들어 고주몽을 낳았다.”라 하고, “불리지가 죽으니 유화는 아들 주몽을 데리고 웅심산으로 돌아갔다라 하며 다듬은 문장으로 표현한다. 불리지가 주어이다. 그러나 뒤의 글에서는 유화가 주어로서 河伯女柳花 出遊 爲夫餘皇孫高慕漱之所誘 强至鴨綠邊室中而私之 仍升天不歸 하백녀 유화부인이 나들이를 나갔는데 부여의 황손 고모수(高慕漱)가 유혹하더니, 강제로 압록강 변의 어떤 집에서 자기 멋대로 하여 버리고는 고모수는 승천하여 돌아오지 않았다.”라고 두 청춘 남녀의 순간의 사랑과 이별 과정을 분식 없이 서술하고 있다. 아주 강한 양극과 음극이 갑자기 만나자말자 철커덕 붙어 아주 큰 인물을 만들었다. 앞의 글에서 자랑할 게 못 되는 가섭원 부여왕 해부루 이야기가 없는 것을 보면 후세에 다듬은 글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고주몽 탄생과 성장의 진실이 뒤의 글에 더 있다고 할 수 있다.

해부루가 B.C.86에 왕이 되고, B.C.79년에 유화를 거두어 후궁으로 삼았다. 고주몽이 B.C.79년에 태어났고, 아들이 없는 해부루가 곤연에서 금와를 얻어 길러 태자로 삼았으므로 고주몽은 해부루의 아들이 아니다. 유화는 후궁이 되기 전에 이미 누군가의 아이를 잉태하고 있었다. 부여의 황손 고모수(高慕漱), 불리지가 아버지인데, 그가 일찍 죽었다면 해부루로서는 유화와 고주몽을 냉대할 수 없다. 그래서 유화를 왕궁에 거두었을 것이다. 해부루로서는 아버지가 고모수인 고주몽을 태자로 삼을 수가 없다. 그래서 어느 궁녀에게서 얻은 금와를 길러 태자로 삼았을 것이다. 고모수는 해부루와 같은 혈통이지만 해부루 편을 안 들고 해모수의 편을 든 역적이다. 친척인 해부루는 유화와 고주몽을 인정하지만, 해부루 왕이 해모수에게 쫓겨나 가섭원으로 옮겨온 사실을 아는 금와 태자와 동부여 사람들은 고주몽을 미워한다. 이런 환경 속에서 자란 고주몽은 주변의 견제와 냉대를 받을 수밖에 없고, 장성해서는 생명의 위험을 직접 느낄 수밖에 없었다. 고주몽은 이런 상태를 깨뜨리고 탈출하여 북부여로 갔다. 고모수의 아들이라는 후광과 특출한 활 재주로 고무서 단군의 눈에 들어 사위가 되고, 후사가 없이 갑자기 죽은 고무서 단군의 뒤를 이어 북부여 7세 단군이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친 고주몽이 낡은 북부여가 아니라 싱싱한 고구려를 세우는 것은 당연하다.

 

平樂二十一年甲午十月 伐北沃沮滅之 明年乙未 自卒本移都訥見 訥見 今常春朱家城子也 琉璃明帝二十一年 又自訥見 移都于國內城 亦曰皇城 內有丸都山 山上築城 有事則居之 大武神烈帝二十年 帝襲樂浪國滅之 東鴨綠以南屬我 獨海城以南近海諸城 未下 山上帝元年 遣弟罽須 攻破公孫度 伐玄菟樂浪滅之 遼東悉平

 

평락 21년 갑오년(B.C.27) 10월 북옥저를 정벌하여 이를 멸망시켰다. 이듬해 을미년(B.C.26)에 졸본으로부터 서울을 눌현으로 옮겼다. 눌현은 지금의 상춘 주가성자이다. 유리명제(琉璃明帝, 2, B.C.19A.D.17)19년 또 눌현으로부터 국내성으로 옮겼으니 또한 황성이라고도 한다. 성안에 환도산이 있는데 산 위에 성을 쌓고 일이 있으면 여기에 머물렀다. 대무신(大武神) 열제(3, A.D.1843) 20, 제는 낙랑국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동압록 이남이 우리에게 속했는데, 오직 해성의 남쪽, 바다 근처의 여러 성들만은 아직 항복하지 않았다. 산상(山上帝 : 10, A.D.197226)의 원년 동생 계수를 보내 공손탁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현도와 낙랑을 정벌하여 이를 멸망시켰다.

 

[논주] 대무신(大武神) 열제(3, A.D.1843) 20년인 A.D.37년에 습격하여 멸망시킨 낙랑국은 B.C.165년에 위만조선에 밀려 요동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에 다시 세운 최씨낙랑국이다. 이 최씨낙랑국이 완전히 망한 게 아니라 최씨 왕족들이 한나라로 탈출하여 항복하고는 한나라 군대와 함께 다시 쳐들어와서 고토를 회복한 후에 왕국이 아니라 한나라의 일개 군인 낙랑군으로 존속하다가 A.D.313년에 고구려 미천왕이 완전히 멸망시키고 한나라 세력을 평양 지역에서 몰아냈다.

산상(山上帝 : 10, A.D.197226)의 원년에 동생 계수를 보내 공손탁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현도와 낙랑을 정벌하여 이를 멸망시킨 것은 평양의 낙랑군이 아니라 B.C. 108년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다음에 요동지역에 설치한 한사군 중에서 아직 남아있는 현도군과 낙랑군을 정벌한 것이다. ’낙랑이란 아름이 여러 군데에서 사용되고 있는 시대였다.

 

  B.C.27에 북옥저를 멸하고 A.D38년에 낙랑국을 멸하는 등 고구려는 개국 초부터 활발한 정복 사업을 벌였다. 수구 사학자들이 말하는 한사군인 현도, 임둔, 진번, 낙랑군이 한반도 북서부 지역을 300여 년 동안 지배한 게 아니라, 만주와 한반도 전역이 동이족의 영역 그대로인 상태에서 그 한사군들은 요서와 요동 해안 일부 지역에 설치하였다가 북부여 고두막 단군이 지휘하는 의병들의 저항으로 제대로 지역을 장악하지 못했다. 그 직후에 새로운 저항 세력인 고구려가 일어나 북옥저를 멸하고 최씨낙랑국을 멸했다. 이후 최씨 왕족들이 유인한 한나라 군대가 평양 지역을 점령하여 설치한 한사군과 현도군을 고구려가 A.D313년에 한반도에서 완전히 축출했다.

현대에도 중국은 최씨낙랑국을 점령하여 설치한 낙랑군을 근거로 한반도 지분을 내심으로 주장하고 있다. 또한 일본은 경남 일부 지역에 잠시 설치한 임나가야를 근거로 왜구 침략과 임진왜란, 경술국치를 지금 현재도 정당화하고 있다. 전체가 아닌 일부 지역의 한정된 기간 동안의 지배를 근거로 삼아 이웃 나라를 침략하는 태도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망상이다. 그러한 망상이 대를 이어 계속될수록 한국과 중국, 일본 사이는 멀어지게 되고, 미래 언젠가는 다시 전쟁의 불길에 휩싸이게 된다.

일부 지역 한정된 기간 지배를 근거로 침략의 명분을 찾는다면, 우리 한국은 중국 땅과 일본열도에 대하여 그야말로 확실한 물증과 명분을 갖고 있다. 만주와 화북, 산동성 등 중국의 동북부 지역은 동이족이 일만여 년 전부터 살아오다가 2천 년 전에 떠나온 땅이다. 일본열도는 동이족의 후손들이 수시로 건너가 개척하여 곳곳에 작은 나라들을 세운 땅이다. 일본인의 70% 이상이 한반도계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금수강산 한반도를 사랑하여 만족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리하여 한반도를 탐내어 침략해온 한족, 거란족, 몽골족, 여진족, 왜족을 용감하게 맞서 싸워 물리쳤다. 마찬가지로 미래에도 우리 한반도를 탐내어 침략해오는 외적이 있다면 용감하게 맞서 싸워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