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한 올림픽 제2회 파리올림픽
대회기간
1900년 5월 14일∼1900년 10월 28일
개최도시
프랑스 파리
대회규모
24개국, 선수 997명
메달순위
1위 프랑스, 2위 미국, 3위 영국 (금·은·동 합계)
개최종목
골프, 럭비, 사격, 사이클, 수영, 승마, 양궁, 요트, 육상, 조정, 줄다리기, 체조, 축구,
크로켓, 크리켓, 테니스, 펜싱, 수구 등 95개 세부종목
쿠베르탱은 원래 1부 고대의 이집트·인도 스포츠,
2부 중세의 기사도, 3부 현대의 스포츠 행사로 이루어진
스포츠 박람회로 대회를 구상했는데,
올림픽 토대가 허약한 당시에는 실현이 어려웠다.
결국 그 계획이 무산되자 프랑스 정부에 의존하게 되었고
또 프랑스 정부와 국민들의 관심도 때마침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집중되어,
만국박람회의 부속 국제경기대회가 되었다.
대회 개막 직전 박람회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겨우 올림픽 대회를 개최했지만,
시설·홍보 등의 대회준비부족과 함께 진행 면에서도 몇 년이 지난 후에야
메달을 선수들에게 우송하는 등 형편없었다.
만국박람회의 한 행사로 열려 올림픽 개최의 본래 의도가 퇴색하고,
육상경기를 제외한 다른 경기는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소외되었다.
올림픽운동의 발전이 심하게 좌절을 겼었던 한차례의 올림픽으로 기록되어있다.
파리올림픽은 쿠베르탱이 책임을 맡았던 두 번째 올림픽이었다.
아테네를 영구 개최지로 하자는 그리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파리가 제 2회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었다.
올림픽운동에 심혈을 기울여 온 쿠베르탱과는 상관없이,
당시 프랑스정부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파리에서 열린 국제박람회에 뜨거운 열기를 올렸으며,
누구도 올림픽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없었다.
프랑스정부측은 올림픽에 대해 거들떠 보지도 않았고
올림픽 조직위 역시 자금 부족 난을 해결하려는 노력조차 없었다.
운동선수들에게는 제대로 된 경기장마저 주어지지 않았고,
적지 않은 선수들이 자기가 올림픽에 참가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
의심이 갈 지경이었다.
이런 현실을 평정 하고자 쿠베르탱은 각 선수들에게 기념장을 하나씩 발급했다.
불리한 조건에서도 각 참가자들은 최선을 다해 경기를 치렀으며,
아테네올림픽보다 훨씬 우수한 성적을 따냈다.
선수들은 국가대표팀의 소속이 아닌 개인자격으로 참가했다.
경기는 센강에서 열린 요트경기로 시작되었으며,
가장 인기를 끈 육상에서는 소아마비를 앓던
미국의 R.유어리가 3관왕을 차지했다.
파리올림픽은, 고대올림픽과 아테네 근대올림픽에서 금지해왔던
여성선수들에 대한 출전 허용을 실시한 면에서 진보적 색채를 띠고 있는데
그 대회에 총 11명의 여자 선수가 참여했다.
여성선수인 영국의 C.쿠퍼가 여자 테니스 단식경기에서 우승하여
올림픽 사상 첫 여성 메달리스트가 되었고,
럭비풋볼 경기가 시범종목으로 실시되었다.
제1회 대회에서 체조의 한 종목으로 치러진 역도는 제외되었다.
프랑스가 일요일에 경기를 치르도록 한 경기일정 때문에
참가선수들의 반발이 일어났고,
넓이뛰기의 M.프린스타인 등 일부 미국선수는
논쟁 끝에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일요일의 결승경기에 불참했다.
미국의 앨빈 크랜즐린(Alvin Kraenzlein) 은
파리올림픽에서 최고스타로 주목됐으며
그는 60m,110m, 200m허들, 그리고 넓이뛰기 등 4개 종목에서
타이틀을 획득했고, 이것은 시종 깨기 힘든 기록으로 남았다.
파리올림픽에서 가장 희극적 사건은 마라톤경주에서 발생했다.
마라톤에 참여한 총 19명 선수 가운데,
경기노선을 몰라서 헤맨 선수와 과도한 피로로 인해
중도에서 포기한 선수가 12명에 달했다.
결과 파리의 한 빵집 사장이 금메달을 따내는 희극이 발생하기도 했다.
하지만 마라톤에 참여했던 기타 선수들이
빵집 사장이 지름길로 갔다고 질책했으며
이에 국제올림픽위원회는 12년 만에야 조사를 끝내고
빵집 사장을 최종 마라톤 우승자로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