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을 버리면 모두가 삽니다(고전 3:3-11)
인간에게는 편을 가르는 뿌리 깊은 본성이 있습니다. 편을 가르는 것 때문에 공동체 안에도 영적 비극이 일어나곤 합니다. 고린도교회는 예배가 뜨겁고 찬양이 넘치며 각양 은사가 풍성한 교회였지만, 내부적으로는 '바울 파', '아볼로 파'로 나뉘어 시기와 다툼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 분열의 중심에는 ‘내가 옳다’는 깊은 자기 확신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옳음이 커지면, 사람은 작아집니다. 하지만 편을 버리면 모두가 삽니다.
1. 편을 가르는데 익숙한 사람들
인간은 어떤 이슈를 마주하면, 본능적으로 편을 가르고 자기가 옳다고 믿는 습성이 있습니다. 환경 보호나 자원 절약 같은 선한 명분도, 정의를 세운다는 지당한 주장도, 그것이 사람 위에 올라서서 타인을 짓밟고 군림할 때는 더 이상 선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확신을 절대화하는 이념이자 우상이며, 결국 영적인 폭력이 될 뿐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바울과 아볼로를 두고 갈라선 이유도, 결국 자기 선택이 옳음을 증명하고, 스스로를 높이려는 교만이 작동했기 때문입니다. 나의 옳음이 커질수록, 주변 형제들은 작아지고, 마침내 그 영혼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는 비극이 일어납니다. 좋은 가치가 사람을 섬기면 사랑이 됩니다. 좋은 가치가 사람을 누르면 폭력이 됩니다
2. 우리는 모두 일꾼일 뿐입니다
바울은 공동체 안에 있는 시기와 다툼을 끝내기 위해서, 모든 지도자들을 다만, '일꾼'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지만, 그것을 진짜 자라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부모가 자녀를 기르고, 농부가 씨를 뿌려도, 생명 그 자체를 자라게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주인으로 착각할 때 타인은 경쟁자가 되지만,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고백할 때, 곁에 있는 성도는 한 밭에서 함께 일하는 동역자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내 생각과 방식을 내려놓을 때, 별다른 역할 없이 자리를 지키는 지체 한 명조차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3. 터는 이미 놓였습니다
교회와 소그룹 공동체의 기초는 결코 사람이나 인간적인 방식으로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 기초가 된 공동체는 작은 흔들림에도 금세 균열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라는 단단한 터 위에 선 공동체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영원한 기초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나의 확신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터 위에 온전히 설 때, 나에게 칼을 겨누는 사람마저 한 영혼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야가 열립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오해와 정죄를 당하면서도, 자기를 못 박는 자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끝까지 사람을 사람으로 보셨습니다. 인간을 사랑하는 것을 넘어, 원수를 사랑하고 죄인을 용서하는 이 십자가의 사랑이, 교회의 참된 기초입니다. 이곳이 사라진 사람을 다시 찾아내는 자리입니다.
결론: 신앙생활의 진정한 온기는 나의 옳음을 증명하는 데서 오지 않습니다. 내 확신을 내려놓고, 주님의 사랑을 먼저 작동시킬 때 시작됩니다. 내 생각과 지식이 주인의 자리에 앉으려는 습성을 떨쳐내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교회의 터와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내가 옳다는 확신에 가려져서, 소외되고 보이지 않았던 한 영혼을 끝까지 찾아내고 축복하는 곳이 목장이고 교회입니다. 여러분이 옳음보다 사랑이 먼저 일하는 공동체, 영혼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살려내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기로 결단하기를 축복합니다.
적용 나눔) 최근 한 주를 돌아볼 때, '내가 옳다'는 확신 때문에 누군가를 마음속에서 작게 만들거나 지워버린 적이 있었는지 솔직하게 나누어 봅시다. 그 사람을 '틀린 편', ‘틀린 사람’이 아니라 '같은 터 위에 선 한 사람'으로 다시 보기 위해, 내가 내려놓아야 할 나의 옳음은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