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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김 게시판

경순대왕 왕기 봉안 /2015.5.21

작성자碧空/金暢冀|작성시간16.03.30|조회수161 목록 댓글 2

좀 지난 이야기이나 종인들이 아시고 게시면

좋을 것 같아서 올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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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순대왕 영모전 왕기봉안

                                    태사공후 28세손 김효기 (태사공파종회 고문)

 

1. 배경 및 경위

2015520일 충남 보령시남포읍창동리 산14번지 소재 경순대왕 永慕殿에서

신라국 경순대왕 왕기봉안식이 거행 되었다.

본 왕기는 玉馬山에 있던 金傅大王祠에 모셔있었으나 辛丑年 大洪水로 유실되고 우여곡절 끝에 회수되어 민간에 의해 神物로 인정받고 또 다른 의미로 제석동 사람들의보호를 받다가 오랜 세월에 노후 훼손 된 것을 뜻있는 丈人이 재현하여 보관 하던 중 경주김씨 종친회에서 인수하여 성대하고 여법한 절차를 거쳐 봉안 하였다.

 

2. 왕기에 엃힌 전래설화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충남보령군 남포면 창동리고야실 뒷산 중턱에 언제부터인가 정결한 사당이 한 채 있었는데 사당 안에는 신성한 神物日月星辰과 옥마산 山神國師의 호위를 받으며 자리를 잡고 있어 인근 산하에서 역사하는 삼라만상의 생사길흉 화복을 주관하고 있었는데.....어느날 하늘이 갈라지며 천지가 진동하는 뇌성병력과 함께 장대 같은 폭우가 호서지방 일대를 강타하더니 이름하여 신축년 대홍수 난리가 일어났다.

높은 산 계곡에서는 급류가 바위를 깨고 소용돌이치며 굴러내려 전답을 삼키며 온갖 수난이 이어지는 중 제석리 바닷가 야산자락에 김씨 성을 가진 노인양주가 聖植이라는 늦둥이를 얻어 양육하면서 바닷가에 어살(고기잡이 발)을 매어놓고 어패류를 채취하여 근근히 생활 하던 터였다.

며칠 째 계속되는 대홍수 난리에 김노인은 하늘만 쳐다보며 한탄하다가 밤늦게 잠자리에 들었는데 천지에 오색구름이 피어오르며 연향이 가득하고 풍신이 수려한 백발 노인이 나타나, 그만 일어나 너의 살에 나가 보거라. 오늘 너의 살에 들어있는 것은 모두 너에게 귀중한 것들이니 고 히 거두어 들여 소중히 보관 하거라 !!

너무나도 근엄한 품위에 위압되어 연신 머리를 조아리다 놀라 깨어 나가보니 탁류가 휩슬고 간 뒤지만 어획이 풍성하여 부게(고기를 담는 지게)에 가득 하였다.

그런데 그 옆에 검은 물체가 둥실 떠 걸쳐있어서 이상하게 여긴 노인은 끔을 상기 하면서 혹시나 하고 그 물체를 건져 집으로 돌아 왔다. 검은 나무상자인데 열어보니 대마포에 금박으로 金傅大王之旗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깜짝 놀란 노인은 부인과 아들 聖植을 불러 주변을 정결히 정리 한 후 를 안치하고

꿈의 내용 과 이 물체의 소중함을 설명하고 정중히 예를 올렸다.“

 

그 후 김노인 댁은 가세가 융성 해 지고 일익 가경에 부귀가 흘러 넘쳤다. 주민들이

연유를 캐물어 자초지종을 말 해 주었더니 우리 동네에 들어온 신물이니 마을 전체가 협동으로 성대히 모시자는 공론이 돌아 뒷산에 초당을 짓고 敬慕殿에 위패와 왕기를 봉안 한 후 음력 정월 열나흘을 택하여 향사일로 정하고 인근 경주김씨 후손들과 동민들이 제사를 올리게 되었다. 제석동 의 유래가 경순왕이 現夢한 것으로 해석하여 敬慕殿이라 하였다.

그 뒤로 마을은 시화연풍이요 태평성세가 이어져 동민들은 더욱 성심으로 매년 구랍에 왕기를 높이 바쳐 들고 풍물패가 가가호호 세세년년 안택을 빌며 성금과 성물을 모아 정월 열나흘에 모여 한해의 무사평안과 소원성취를 빌고 단합 하였다.“

 

3. 사당건립 및 영정봉안

1969년 경주김씨 종회에서 김부대왕사가 있던 옥마산 山麓下의 창동리 고야실에 새로 시멘트 벽돌 과 기와로 三間을 짓고 돌 담장 까지 완비한 永慕殿을 조성하고 왕기 이양을 교섭 하였으나 제석리 동민들이 찬동 하지 않아 影幀만을 새로 지어 봉안 하였다. 이때부터 매년 음력 사월사일에 제향을 올린다.

1993년에 시멘트 벽돌집을 다시 목조로 개축하고 藍浦烏石으로 만든 敬順王遺墟碑를 건립하였다. 비는 높이339.4cm(비신257.6cm 이수90.9cm 귀부90.9cm) 90.9cm 두께 76.3cm 로 호서지방 에서는 당시 가장 웅대하였고 왕의 遺墟碑로는 唯一하여 장차 이지역 명소로 자리 매김 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왕기는 19952.19일 당시 보령문화연구회장이던 경순왕 후손 김효기(태사공 28세손)전 대천고 교장이 답사하였고 문화재에 관해 국내 최고 권위자 였던 황수영 박사를 초빙하여 자문을 받기도 하였다. 기의 길이는 4m 폭은 2m로 상당히 컸고 旗頭에는 가로로 朝鮮國이라 씌였고 旗本幅 중앙에 세로로 湖西玉馬山金傅大王之旗라 적혀있었다. 나무상자에는 都光十二年壬寅이라고 흐리게 적혀있어1832년에 다시 제조 한 것으로 추정 할 수 있었다.

 

4. 보령(藍浦) 과 경순왕의 離宮

경순왕이 나라(신라)를 왕건에게 양국 하고 개성 과 충청북도 제천군 백운면도곡리,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 주포리의 離宮에 거 하신 것은 물론이고 충청남도 보령시(당시 남포현)離宮에도 내거 하셨다. 동국여지승람 이나 남포현읍지 祠廟條에 김부대왕사가 옥마산에 있다고 되었으며 聖住寺蹟에도 경순왕이 남포현에 내거 하였다고 기록 되었다. 남포에 오신 것은 崇巖山 聖住寺가 있었던 까닭인데 성주사는 바로 경순왕의 선대 문성왕계의 무렴국사가 同祖聖骨 이었던 까닭이다.

성주사는 백제국 28惠王의 아들 法王616년에 烏合寺를 창건 하였는데 당시 큰 을 물리친 戰勝 怨魂들이 佛界에 오르기를 기원하는 원찰이 되었다. 이로 인해

신라가 중흥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고 그 뒤 신라 말엽에 태종무열왕의 8대손인 郎慧和尙無染國師聖住禪院開創하여 에가서 麻谷寶徹心印을 받고 귀국하여 九山禪門中 제일가는 伽藍이 되었다. 성주사는 임진왜란에 불타고 지금은 불탑과  최치원의 글이 새겨진 낭혜화상무렴국사 만 남아있다.


관련사진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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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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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김석열(碩烈) | 작성시간 16.03.30 그토록 궁금하였던 내력을 상세히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종친들께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다.
  • 작성자치안테 김정집 | 작성시간 16.03.30 귀한 우리의 보물을 뵙게됨을 영광으로 생각 합니다
    감사 드림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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