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 독서보고서
1. 개 요(세계관의 차이)
제임스 사이어의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은 지금까지 세계관에 대한 나의 편협한 사고와 알팍한 세계관에 관련된 지식을 정리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저자는 서문에서 "우리 가운데 누구든 지적으로 온전한 상태에 도달하려면 타인의 세계관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할뿐더러 우리 자신의 세계관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왜 우리가 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많은 세계관들 중에 왜 그것이 참된 세계관이라고 생각하는지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세계관이란 이 세계의 근본적인 구성에 대해서 우리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일관적으로든, 비 일관적으로든 견지하고 있는 일련의 '전제들'이다. 우리는 살아가는 사회는 나와 세계관이 다른 사람들과 생활하고 있으며, 때로는 나와는 다른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이 가진 세계관을 자기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가 자신과는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과 충돌을 일으킬 때, 비로소 자신이 갖고 있는 세계관을 발견하고 한다. 자신이 가진 세계관을 검토해 보고, 올바른 세계관을 갖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그 이유는 사람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지 간에' 자신이 가진 세계관에 따라서 그 인생이 결정되고 인생의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이 선택한 세계관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진정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살수도 있고, 전혀 무의미한 삶을 살수도 있다. 더 나아가서는 우리의 영원한 삶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지금까지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떠한 세계관을 갖고 있었거나 최소한 어떤 세계관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저자는 어떤 세계관을 명제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 명제는 어떤 것이겠는가?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 질문에 대해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대답이이야만 할 것이라고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첫째, 진정으로 참된 최고의 실재는 무엇인가? 둘째, 외부의 실재 즉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본질은 무엇인가? 셋째, 인간은 무엇인가? 넷째, 인간이 죽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다섯째, 지식이 가능한 까닭은 무엇인가? 여섯째,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일곱째, 인간 역사의 의미는 무엇인가? 비록 사람들은 이런 질문들을 이론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직면하지 않을 지라도, 심지어 이러한 질문, 이러한 용어들이 의미하는 바를 전혀 모르고 있을지라도, 무의식 가운데 이런 물음들에 직면하고 나름대로 답변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본서의 전개 방법은 '유신론적 세계관'을 중심으로 다른 세계관을 소개하고 있다. 이 유신론적 세계관은 다른 말로 '성경적 세계관', 혹은 '기독교적 세계관'이다. 성경적 세계관은 성경을 통해서 바라본 세계관, 혹은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신 하나님, 바로 이 하나님의 눈을 통하여 바라본 세계관이다. 본서를 통해 나의 세계관을 명확히 알 수 있어 귀중한 시간들 이었다.
2. 하나님의 장엄으로 가득 찬 우주 : 기독교 유신론
창세기 1장 1절은 이렇게 선포하고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웅장한 선언과 함께 성경은 시작된다. 또한 성경적 세계관도 역시 이 선언과 더불어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적,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해서 잘 알기 위해서는 먼저 이 온 우주를 만드시고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것이 가장 핵심이다. 성경적 세계관은 창조주 하나님께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유신론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성경적 세계관이 나온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야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1) 기독교 유신론에서 창조주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첫째, 성경은 스스로 존재하신 하나님께서 태초에 아무 것도 없는 '무'에서 그 전능의 능력으로 우주 만물을 만드셨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모든 존재의 근거요,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심을 말하고 있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이 최고의 존재이시고 최고의 실재이심을 선언하고 있다. 하나님이 전지하셔서 하늘에 있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별들을 아시고 그 이름을 부르시는 분이시요,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도 다 아시는 분이시라고 소개하고 있다. 둘째, 성경은 하나님을 주권자로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세상을 만들어 놓으시고 내버려 두신 것이 아니라 그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우주 만물을 질서 있게 운행하고 계시며 우리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고 계신다. 이 우주의 어떤 것도, 이 세상의 어떤 것도 하나님의 관심, 통제, 권위로부터 벗어 날 수 있는 것이 없다. 셋째, 성경은 하나님이 무한하신 분이심을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어떤 측정이나 범위도 뛰어 넘는 분이시다. 우주의 어떤 존재도 하나님의 본질에 도전할 수 없다. 하나님께 필적할 자가 없다. 넷째, 성경은 하나님이 인격적인 분이심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단순한 힘이나 에너지가 아니고, 하나님은 그 분(He)이라고 지칭될 수 있는 지. 정. 의를 가지신 인격이다. 하나님은 '생각'하시는 분이시며, '행동'하시는 분이다. 인격적인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셔서 죄에 대해서는 진노하신다. 또한 인격이신 하나님께서는 사랑이 충만하신 분이셔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도와주시며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이 하나님이 역사와 인생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신다는 것이 성경적 세계관의 기본 전제이다.
(2) 성경적 세계관에서의 '인간관'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창세기 1장에 보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선하게 창조되었다. 여기서 '형상'이란 영어로 'image'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하나님이 영으로 존재하시듯이 우리 인간도 영적인 존재이다. 또한 인간은 이성, 도덕성, 지성, 사회성, 창조성, 인격성 등을 가진 존재이다. 인간이 존엄하고 위대한 존재인 이유는 인간이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계명을 불순종함으로써 범죄하여 타락하였으며, 그로 말미암아 완전히 회복될 수 없을 정도는 아니지만,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심각하게 훼손된 것이다. 현재 인간은 타락한 존재이며, 성경은 인간을, 완전하게 선한 존재로 창조되었지만 타락한 존재요 회복이 필요한 존재로 보고 있다..
(3) 성경적 세계관에서의 '역사관'에 대해서 살펴보면,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역사는 창조 → 타락 → 구원이라는 세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하시는 구원의 역사이다. 기독교 역사는 직선적이며,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시켜 나가는 의미 있는 사건들의 연속이다. 역사는 돌이킬 수 있는 것도, 반복될 수 있는 것도, 순환적인 것도, 무의미한 것도 아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만민구원역사라는 목적을 향하여 진행되고 있고, 때가 되면 역사는 끝이 날 것이다. 그리고 성경적 세계관은 이 세상 역사의 종말 이후에는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이 있다. 이 심판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의인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며 살게 되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사람들은 형벌에 처하여 세세토록 고통을 당하게 된다.
(4) 성경적 세계관에서의 '윤리관'은 초월적이고 선하신 하나님께 기초하고 있다. 성경적 세계관에서는 도덕 세계가 실재하며 다른 모든 도덕을 판단할 수 있는 절대 표준이 있다. 그 절대 표준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
(5) 성경적 세계관에서는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가?' 성경적 세계관에서는 인간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 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때, 가장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3. 시계와 같은 우주 : 이신론
하나님은 이성적인 신이시기에 그가 만드신 우주도 합리적이고 질서정연하며 따라서 연구할 수 있는 대상이다. 이러한 근거에 바탕을 두고 우주의 형태를 탐구하였다. 근대적 과학의 탄생과 성공 우주에 관한 지식을 얻는 이러한 방법이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얻는 데 적용되었다.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을 부인했다. 하나님을 단지 자연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분으로 보았다. 우주는 질서정연한 거대한 기계, 기어와 지레가 기계적으로 정확히 맞물리는 거대한 시계로 간주 되었고 하나님은 이 거대한 시계의 제조자로 여겨졌다.
이신론의 기본내용을 살펴보면, 첫째, 제 1 원인인 초월적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으나 스스로 운행하도록 버려두셨다. 따라서 하나님은 내재하지도 않으시고, 완전한 인격도 아니시고, 인간사의 주권자도 아니시며 섭리자도 아니시다. 하나님은 초월적 세력, 에너지, 제1운동자일 뿐 인격체가 아니다. 그는 창조물을 돌보지도 사랑하지도 않는다. 피조물과의 인격적인 관계도 전혀 없다. 둘째,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는 폐쇄체계 안에서 인과율의 일치체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결정론적인 성격을 지닌다. 따라서 어떠한 기적도 일어날 수 없다. 우주는 하나님의 재조정에 대해 폐쇄되었다. 하나님은 단지 창조만 하셨을 뿐 세상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을 나타내 보이는 기적이나 사건들은 불가능하다. 사람의 재조정에 대해서도 폐쇄되었다. 우주는 시계와 같은 방식으로 잠겨있기 때문에 사람이 그 체계를 재조정하려면 그 체계로부터 초월해야 가능하다. 셋째, 인간은 비록 인격체이지만 우주라는 기계의 한 부품이다. 사람의 인격을 부인하지 않으나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못하고 따라서 자신이 살고 있는 체계를 초월할 방도가 없다. 인간이 '명령을 거역'할 수 없다면 그는 의미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가? 단지 꼭두각시에 불과할 뿐. 이신론자들도 사람에게 지성, 도덕성, 사회성, 창조성이 있음을 강조하나 이것은 피조물인 인간에게 구축된 성품들이지, 하나님의 속성에 근거를 두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은 무엇인가 다른 존재나 보다 나은 존재가 될 희망은 거의 없다. 넷째, 우주 즉 이 세상은 타락했거나 비정상적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상적 상태에 있다. 인간은 우주를 알 수 있고 우주를 연구함으로써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우주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대로 있고 사람은 주변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지적능력이 있으므로 우주를 연구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있다. 유신론자들은 자연계시와 특별계시(성경, 성육신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믿으나 이신론자들에게 특별계시란 필요하지도 실제로 주어진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교통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자연 안에 계신 분이지 더 이상 역사 속에서 섭리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는 인간이 스스로의 운명을 책임지도록 그냥 버려두셨다. 다섯째, 윤리는 일반 계시에 국한된다. 우주는 정상이기 때문에 그것은 무엇이 옳은가를 보여준다. 자연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또한 자연계는 타락하지 않았다고 믿게 되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가 되신 까닭에 당연히 현재 상태의 모든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한다. 이 세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나 혹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는 것에 대한 필연적 반영체이다. 따라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옳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윤리적 가르침은 말로 표현된 자연법이라고 생각한다. 이신론자들은 기독교 의 윤리적 내용을 보존하는데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나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옳다'라는 명제위에 서게 되면 죄라는 개념 전체가 사라진다. 윤리적 판단을 내릴 수 없는 것이다. 이와같은 긴장과 모순이 이신론을 주요세계관으로서 비교적 일찍 사라지게 했다. 여섯째, 창조시에 역사의 과정이 정해졌기 때문에 역사는 직선적이다. 이신론자들은 역사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는 듯이 보인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주로 자연 속에서 구하기 때문이며 하나님은 역사에 개입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에 기록된 유대 역사는 하나님께서 역사에 개입하셨다는 기록으로서 유익한 것이 아니라 윤리적 원칙들을 추출할 수 있는 하나님의 법의 예증으로서 가장 유용하다.
이신론은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전반기까지 짧은 기간 동안 프랑스와 영국의 학문세계에서만 영향력을 행사했을 뿐, 그것은 곧 바로 자연주의로 넘어간다. 그 이유는 세계관 자체 내 긴장과 모순 때문이다. 타락하지 않은 정상적 우주를 가정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옳다. 따라서 선과 악이 달리 존재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신론자들은 윤리학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인식론의 면에서 모든 지식은 경험에서 얻어진다면 인간은 무한한 지성을 소유해야만 보편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무한한 지성이란 존재하지 않기에 인간은 상대적 지식밖에 얻을 수 없다. 인간은 재조정에 대해 닫혀진 세계에서는 그의 인격과 존재의 중요성을 유지할 수 없다. 인간 존재의 중요성과 기계적 결정론은 결코 자리를 함께 할 수 없다.
4. 유한한 우주의 침묵 : 자연주의
유신론에서는 하나님이 무한하고도 인격적인 존재로서 우주의 창조자이자 유지자였으나, 이신론에서는 인격이 배제된 창조주?우주의 유지자로 강등되더니만 자연주의에서는 그의 존재 자체가 소멸되어 버린다. 1600년에서 1750년 사이에는 유신론에서 자연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사람들이 많았다. 그 중 데카르트는 유신론자라는 고백을 한 반면에 우주는 '물질'로 구성된 거대한 기계이며 인간의 '정신'에 의해서 파악될 수 있다고 주장한 점에서, 존 로크는 유신론자였으나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이성이 성경에 기록된 '계시'의 진위를 평가할 수 있다 생각했으며 여기서 더 나아간 것이 자연주의자들로 '하나님이 주신'이란 말을 빼버리고 '이성'만을 진리에 대한 유일한 판단 기준으로 삼았다.
La Mattrie는 이론적으로는 이신론자였으나 실재적으로는 자연주의자였던 "나는 최고자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는다. 오히려 확률의 면에서 보아도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신의 존재란 실재적 가치가 거의 없는 하나의 이론적 진리에 불과한 것이다."라는 고백하면서 이는 존재하는 하나님이란 단지 우주의 창조자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는 실재적 가치가 거의 없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러한 분위기와 결론이 자연주의로의 이행을 결정지었다.
자연주의의 정의가 담겨 있는 첫 번째 명제부터 살펴보면, 첫째, 물질은 영원히 존재하며 존재하는 거의 전부이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신론과 이신론에서의 첫 번째 명제도 근본 존재의 본질에 관한 것이며 하나님이 그 중심이었으나, 자연주의에서는 우주의 본질이 그 중심 요소이다. 왜냐하면 우주는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이며 존재했던 모든 것이며 앞으로 존재할 모든 것(Carl Sagan)이기 때문이다. 無에서는 無가 나오듯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전부터 무엇인가가 항상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연주의자들은 무엇이라는 것이 초월적 창조자가 아니라 우주의 물질 자체라 하며 어떤 형태로든 항상 존재했다고 말한다. 18세기 이후 과학은 물질이라는 개념을 세분화했으며 그들은 실재란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또한 상호간에 기계적?공간적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단위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화학과 물리학을 통해 그 관계를 알아낼 수 있고 불변의 '법칙들'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현대의 과학자들에 있어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이지만 자연주의자들에게는 공통된 기초이다. La Mattrie의 말처럼 "우주는 물질과 정신(영)이라는 두 가지로 구성되지 않으며 전 우주에서는 단 하나의 실체가 있으며 다양한 변형으로 나타날 뿐이다." 우주는 초월적 존재와 무관한 하나의 궁극적 실재로 '창조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우주는 폐쇄 체계 속에서 인과율의 일치체로 존재한다. 이 명제는 이신론의 두 번째 명제와 유사하나 차이점을 발견하면 우주를 기계나 시계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우주는 폐쇄체계로 외부의 재조정에 대해 닫혀 있다. 이는 "자연의 질서는 사물의 본질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그 모든 부분에 대한 엄격하고 필요 적절한 유일의 조정자가 된다. 예를 들어 계절 변화의 아름다운 규칙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중력의 결과로 말미암은 것이다."라는 에밀 브레이어의 견해에 잘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신학교 교수인 David Jobling이 동일한 말을 하고 있다. "우리(현대인)는 우주가 공간?시간? 물질 등이 내적으로 결합된 연속체라고 생각한다.…하나님은 인간의 '영적'부분과 교통하기 위해 시간과 공간을 '초월' 하거나 물질과 멀리 떨어져 존재하는 분이 아니다.…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역시 우리와 동일한 진화의 산물이라는 사실에 대처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Jobling은 기독교를 자연주의 세계관 안에서 이해하려 했다. 하나님을 인과율의 일치체라는 폐쇄 체계에 가둔 후, 그에게서 주권과 기타 하나님에 대한 전통적 기독교 신앙의 대부분을 제거해 버렸다. 자연주의자들은 이 폐쇄체계가 깨어질 수 없는 불변의 인과율로 유지된다고 확언하고 있다.
셋째, 인간은 하나의 복잡한 '기계'이다. 인격이란 우리가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화학적?물리적 성질의 상호 관계이다. 데카르트는 사람을 기계와 정신으로 양분하고 서로 다른 실체라 생각했지만 자연주의자들은 정신도 기계의 작용으로 간주한다. La Mattrie는 이 사실을 "이제 담대히 사람도 일종의 기계이며 우주에는 단 하나의 실체가 있고 여러 변형으로 나타날 뿐"이라고 결론을 내린다(p77 각주3참조). 더 직설적으로 Cabanis(1757-1808)는 "간이 담즙을 분비하듯이 뇌는 생각을 분비한다."라고 표현 한다. Barrett는 사람도 우주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이란 매우 복잡한 기계여서 아직 아무도 그 기계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인간의 이해력을 둘러싸고 있는 신비는 기계적 복합성에서 유래한 결과일 뿐이다. 인문주의자 선언II(Baffalo:Prometheus Book,1973)는 그 상황을 일반적으로 자연전체에 관하여 "실로 자연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광대하고 더 심오할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새로운 발견이라도 자연의 성질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넓혀 줄뿐이다." 라고 진술하고 있다. 인간은 우주의 많은 사물과 구별된 존재가 아니고 단지 그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결론을 내릴 수도 있지만 자연주의자들은 인간은 동물 중 독특한 존재라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인간만이 유일하게 개념적 사고의 능력이 있고, 언어를 사용하며, 전통의 축적(문화)등을 소유하고 있고 독특한 진화과정을 거쳤기 때문(Huxley)이라고 반증한다. 이는 인간의 인간다움(우주의 다른 부분과는 구별되는 점)을 강조함으로 가치의 근거를 찾은 것으로 지성, 세련된 문화, 선악의 분별력 등은 인간의 독특한 점일 뿐 아니라 인간을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자연주의자는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자유로이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폐쇄된 우주가 결정론을 함축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결정론은 인간의 자유와 아니면 자유롭다고 느끼는 감정과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넷째, 사망은 인격과 개체성의 소멸이다. 이 명제는 자연주의 우주관의 논리적 귀결이다. 인간은 물질로 구성되었으며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구성한 물질이 사망시에 해체되면 인간도 소멸하는 것이다. 인문주의자 선언II을 인용하면 "유일한 영원이란 우리의 문화속에서 서로의 삶에 영향을 주는 양식으로, 우리의 후손안에 존재한다."
다섯째, 역사는 인과율에 의해 연결된 사건의 직선적 연속이며, 전체적인 목적성은 없다.
자연주의자는 이 명제의 '역사'라는 단어를 자연과 인간의 역사를 연속체로 보기 때문에 모두 포함한다. 자연의 역사는 보통 영원하다고 받아들여지고 있는 우주의 기원과 함께 시작된다고 하지만 과학자들은 정확히 어떤 과정을 거처 그렇게 되었는지는 말하지 못한다. Woltjer도 다른 자연주의자들의 입장을 "인간, 지구, 우주 등 존재하는 것들의 기원은 신비에 감추어져 있어서 창세의 기자가 접근할 수 없었던 것처럼 현대의 우리도 접근할 수 없다."라고 대변하지만 자연주의자들의 공통된 전제는 그 과정이 제1운동자, 즉 하나님이나 다른 존재에 의해 생성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성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주의 생성과정보다 인간의 존재과정이 좀더 확실한 것이라고 주장되는데 자연주의 자들이 반신반의했던 진화론은 다윈에 의해 하나의 구조로 확립되었고 널리 받아들여졌다. 유신론자들은 무한하시고 인격적인 하나님이 진화의 과정을 책임지고 있으며 만일 생물계가 진화한 것이라면 그 과정은 하나님의 계획에 일치된 것이며 하나님이 친히 의도하신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는 의미에서 목적론적이다. 그러나 자연주의자들은 그 과정이 자율적이라 주장한다. 진화론은 영원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설명을 하지만 왜 일어났느냐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자연주의자들은 계획자란 개념을 용납하지 않는다. 어떤 목적성도 처음부터 가능성에서 배제한다. 인간이 출현한 후 의미 있는 역사인 인간의 역사도 고유한 목표가 없는 진화(생물학적 차원)와 마찬가지로 고유한 목표가 없다.
역사는 인간이 만드는 대로 형성된다. 유신론과 마찬가지로 직선적이나 미리 정해진 목표는 없다. 역사는 神人(the God-man)이신 그리스도의 재림에서 절정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단지 의식적 인간이 존재할 때까지만 '지속'될 뿐이다. 만일 인류가 소멸하면 인간의 역사도 사라질 것이고 자연의 역사만 계속될 것이다.
여섯째, 윤리는 단지 인간에게만 관계된 것이다. 자연주의는 특정한 형이상학적 관념 즉 외부세계의 본질에 대한 관념을 논리적으로 확대시킨 결과 성립된 사조이다. 대부분의 초기 자연주의자는 그들 주변 문화의 윤리관과 유사한 윤리관을 계속 지지했다. 그래서 그 당시 널리 퍼져 있던 기독교의 윤리관과 구별하기가 쉽지 않았다. 유신론자들과 자연주의자들은 대개 윤리적인 문제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며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윤리적 규범이 불일치(or일치)가 어떤 것인가에 관계없이 두 규범의 기초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유신론자에게는 하나님이 가치의 부여자이나 자연주의자에게 가치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윤리가 성립하려면 의식과 자기 결정력이라는 두 요소가 있어야 한다. 즉 인격이 있어야 한다. 자연주의자들은 의식과 자기결정력이 인간과 함께 생긴 것이기 때문에 윤리도 인간과 함께 성립되었다고 주장한다. 인문주의자 선언II에서는 "도덕적 가치의 근원은 인간의 경험에 있고 윤리는 자율적이며 상황적인 것으로서 신학적 혹은 사상적 재가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인간의 필요와 관심에서부터 발생한다. 이것을 부인하는 것은 삶의 모든 근거를 왜곡하는 것이고 삶의 의미는 미래를 창조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데 있다."라고 자연주의 윤리의 근원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여기서 발생할 수 있는 주요 문제는 어떻게 존재에서부터 당위를 추출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 이다. 전통적 윤리(기독교 유신론의 윤리)는 인격적 하나님에게 두었으나 자연주의자들에게는 그러한 준거점이 없고 만들려고도 하지 않으며 윤리는 단지 인간만의 영역이라 한다. 그러므로 '어떻게 자기의식과 자기 결정력이라는 존재와 가능의 영역에서부터 당위의 영역에 이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제기 된다.
자연주의자들의 답변 중 하나는 모든 사람이 도덕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심프슨은 가치관을 직관, 권위, 관습 등에서부터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심프슨은 객관적 탐구에 근거한 윤리를 주장하며 그것을 다른 사람과 환경에 조화 있게 적응하는 것에서 찾는다. 그러한 조화를 증진시키는 것은 선이며 그렇지 않은 것은 악이다. 선한 행동이란 집단이 승인하고 생존을 증대시키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음으로 최고의 가치는 인간 생존의 유지로 본다. 그러므로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인정되는 것이 인간의 생존이다.
인문과학분야의 Lippmann은 우주의 기원과 무목적성에 대한 자연주의자들의 입장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므로 '선'을 정신의 자발적 귀족(엘리트)에 의해서만 인식되어온 어떤 것으로 판명하고 인류가 20세기의 가치관 위기를 극복하고 생존하려면 엘리트 윤리가 모든 인류에 대한 강제윤리가 되어야 함을 주장함으로써 '위대한 종교적 스승들'에게 공통적인 중심 교훈이라고 생각하는 것 위에 윤리를 건설하려 했다. 리프만이 사용하는 종교라는 말은 도덕성 or 도덕적 충돌을 의미한다. 또한 영이란 말은 다른 동물이나 단순한 '대중적 종교'를 가진 동료 인간보다 그를 더 고귀하게 만드는 인간의 도덕적 능력을 의미한다. 그는 유신론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완전히 자연주의적이다. 어쨌든 윤리에서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단지 거기 존재하며 그 자체로서는 의미가 전혀 없는 우주를 두고 그 우주가 옳다는 환상을 강하게 확증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연주의의 윤리는 인간적인 면과 선택적인 면을 지닌다. 자연주의자들의 윤리적 통찰에는 타당한 것이 매우 많다는 것이다. 심지어 기독교유신론자들은 이에 수긍해야할 것이다. 유신론자들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비록 타락했지만 그 형상이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았으므로 희미하게나마 하나님의 선하심이 부분적으로 반영될 수 있기에 자신의 본성과 행동을 관찰함으로써 도덕적 진리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놀라서는 안 된다.
이신론과 달리 자연주의는 매우 지속력이 있다. 첫째로 자연주의는 정직하고 객관적이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자연주의는 사실과 과학적 탐구와 학문의 확실한 결과에 근거한 것만을 받아들이도록 요구한다. 둘째로 자연주의는 많은 사람에게 일관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5. 영점(靈點): 허무주의
허무주의는 철학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감정이다. 허무주의는 자연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결과물이 아니라 자연주의의 자연적 산물이다. 자연주의 내부에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된 의문들에 의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에서 허무주의가 탄생하였다. 첫째, 필연과 우연(형이상학적 허무주의)이다. 자연주의는 물질만이 참 존재이며 영원한 존재라고 보며, 우주는 인과율의 폐쇄체계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인간도 하나의 복잡한 기계에 불과하며 인격 역시 화학적 물리적 힘의 고등한 작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인간의 자유를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폐쇄체계란 불확정적인 것이므로 인간에게는 자기결정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주가 진정으로 폐쇄되었다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불확정성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하나의 변화는 다른 운동에 의한 것이며 또 그 운동은 다른 운동에 의한 것이므로 무한한 고리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즉, 폐쇄된 우주에서의 불확정성이란 인식되지 않은 확정성에 불과하다. 이제 인간이 설령 자신의 선택이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라 믿는다해도 그 선택 역시 자신이 인식하지 못할 뿐 다른 무엇이 야기한 결과일 뿐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인간은 자신의 행동에 전혀 책임이 없다.
자연주의 일부에는 모든 기본적 변화는 우연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우연이 불확정성을 낳는다 해도 이는 동시에 부조리를 낳는다. 우연은 우주를 이성, 의미, 목적으로 열지 않고 부조리에로 열게 된다. 인간이 불확정적이라면 그는 근본적으로 무의미하다. 자연주의가 허무주의로 넘어간 첫 번째 이유는 자연주의가 인간에게 그가 의미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는 근거, 즉 자기의식과 자기 결정력을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불가지(不可知)의 먹구름(인식론적 허무주의) 우주가 폐쇄 체계일 경우 이의 인식론적 영향은, 어떤 사람이 비인격적 힘의 결과로서 존재한다면 그는 결코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환상인지 진실인지 분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연주의 명제에 따르면 인간의 인식과 지식이 물질 작용의 결과라는 이야기인데, 그 물질 작용이 실제를 "지향"한다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다윈의 자연주의가 참이라 할지라도 그 이론의 증명은 고사하고 그 신빙성을 확립할 방법조차 전무하다는 이 아이러니! 자연주의가 진실이라면 우리는 자연주의가 참이라고 신뢰할 근거도 상실하게 된다. 요컨대 인식론적 허무주의로 귀결된다. 이 인식론적 허무주의를 받아들인다면 자신의 존재조차 실재임을 확인할 수 없다. 진정 철저한 자연주의로 일관한다면 이는 반드시 인식론적 허무주의로 귀결된다.
셋째, 존재와 당위(윤리학적 허무주의) 자연주의에 있어 세계는 그저 존재할 뿐 아무런 당위를 느끼게 하지 않는다. 자연주의는 인간을 윤리적 상대주의에 가두었다. 상자 안에 있는 가치 중 어느 것이 진실된 것인가를 알기 위해 필요한 상자 밖으로부터의 판단 척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윤리학적 허무주의에서는 죄란 존재하지 않으며 죄책감만이 존재한다. 결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허무주의적 인생관을 철저히 고수하며 살 수 없다. 이는 무의미로부터는 아무 것도 나올 수 없으며 혹은 무엇이든지 나올 수 있다. 허무주의자가 '생각'이란 걸 한다면 이는 허무주의로부터의 이탈이다. 그리고 실천적 허무주의는 있을 수 없으며, 허무주의는 예술의 종말을 의미한다. 허무주의 예술조차도 구성을 갖게 되는데 구성이란 그 자체가 이미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또한 허무주의는 심각한 심리적 문제를 야기한다.
6. 허무주의를 넘어서 : 실존주의
허무주의를 초월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실존주의가 시작된다. 자연주의의 영향으로 나온 것은 무신론적 실존주의요, 유신론의 영향으로 나온 것은 유신론적 실존주의이다. 19, 20세기경 탄생한 이 두 사조는 허무주의가 절정을 맞던 1차 세계대전 무렵을 거쳐 1950년대부터 주류로 자리 잡았다.
(1) 무신론적 실존주의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자연주의의 다음 명제들에 동의한다. 신은 존재하지 않고 물질만이 영원히 존재하며 우주는 폐쇄체계 속에서 인과율의 일치체로 존재한다. 역사는 인과율에 의해 연결된 사건의 직선적 연속이나 전체적 계획은 없다. 윤리는 단지 인간에게만 관계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무의미한 세상에서 인간이 어떻게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실존주의의 관심사이다.
우주는 단지 물질로만 구성되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실재가 주관과 객관이라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세계는 단순히 존재한다. 그때 새로운 의식적 존재가 탄생했다.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르지만.) 즉, 인간이 탄생함으로서 우주에 두 가지 존재가 있게 되었다. 첫 번째 종류의 존재는 객관세계(objective world)이다. 즉, 과학과 논리학의 세계 두 번째 종류의 존재는 주관세계(subjective world)이다. 즉 정신, 의식, 인식, 자유, 안정 등의 세계. 주관은 非我에 대한 自我의 파악이며, 주관은 비아를 자신의 일부로 만들며 곧 이것은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지식은 인식자(the Knower)로 화한다.
자연주의가 객관세계와 주관세계의 통일성을 강조함으로써, 다시 말해 인간을 물질로 취급하여 허무주의에 이른 데 반해, 실존주의는 두 세계의 불일치를 강조한다. 인간은 유일한 주관적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은 우주 가운데서 의식과 자기 결정력이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과학 및 논리학과 가치 및 의미는 원래 두 세계로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다. 우리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우리의 중요성은 객관세계가 아닌 주관세계의 의식에 달려있다. 단지 인간만이 그 존재가 본질을 선행하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을 현재 상태로 빚어낼 수 있다. 즉 인간은 자신을 개념정의하기 전에 이미 존재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객관세계는 본질의 세계이다. 즉 나무는 나무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의식과 자기 결정력을 통해 자신을 인간으로 만들기 전에는 인간이 아니다. 즉 스스로가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기로 결정하면 그대로 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본성과 운명에 대하여 완전히 자유롭다. 두 번째 명제에서 보듯 인간은 주관세계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뭐든지 할 수 있다. 즉 결정론이나 비결정론은 객관세계의 것이고 자유의지는 주관세계의 것이다. 인간은 내적으로 자유롭다.
매우 정교하고 빈틈없이 조직된 객관세계는 인간과 대립관계에 놓여 있으며 인간에게는 부조리하게 보인다. 객관세계는 거기됨(thereness)의 세계이다. 그러나 이 단단하고 냉정한 거기됨의 세계는 소외이며 부조리한 것이다. 객관세계는 질서의 세계이며 주관세계는 질서를 모르는 세계이다. 인간은 객관세계가 낯설고 부조리하다고 느끼며, 그리고 인간 자신이 이방인이라고 느낀다. 이것을 더 빨리 용인할수록 인간은 더 빨리 소외와 절망을 극복할 수 있다. 주관으로 남아있던 인간이 한 객체가 되어야하는 죽음은 궁극적 부조리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항상 부조리에 직면하여 살아야 하며, 자신의 비존재로의 경향을 잊어선 안되며, 생과 죽음 사이의 긴장을 극복하며 살아야 한다.
객관세계의 부조리를 충분히 인식하고 그에 대해 반대하는 진정한 인간(authentic man)의 반란을 일으키고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 진정한 실존의 삶을 사는 자는 우주의 부조리를 눈앞에 항상 의식하면서도 그 부조리에 대항하여 의미를 창출하는 자이다. 여기서 실존주의는 허무주의를 극복한다. 선이란 의식적 선택이며 선도 주관의 일부이다. 따라서 윤리학적 문제는 쉽게 풀려버리며 선은 인간의 차원을 벗어난 어떤 표준에 의해서도 평가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의 문제 주관은 유아론(唯我論)으로 귀결된다. 즉 모든 사람이 다 각자 나름대로의 가치 중심을 갖게 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악을 선택할 수 없다면 도대체 선이 무슨 의미를 갖는가? 여기에 대해 그들은 선이 의미가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악이란 선택하지 않는 것, 즉 수동성이 악이기 때문이다. 즉 선택하지 않고 끌려다니는 수동적이 삶이 곧 악이라는 것이다.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허무주의를 극복하고자 했으나 도덕의 준거점을 제공하는 데 실패했다. 인간의 가치의 근거를 주관에 둠으로써 실재와 유리시켰으나 객관세계는 계속 침입하며 궁극적으로 죽음은 모든 것을 종식시킨다.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단지 유아론, 잠시 존재하다가 사라져 버릴 고독한 자아, 죽으면 벗겨져 버릴 탈을 걸친 것에 불과하다.
(2) 유신론적 실존주의
유신론적 실존주의는 키에르케고르, 자유주의의 사신신학을 거쳐, 칼 바르트(Karl Barth), Emil Brunner, Reinhold Neibuhr 등의 신정통주의에 이른다. 유신론적 실존주의는 다음과 같은 유신론의 명제를 받아들인다. 하나님이 세상을 개방체계 속에서 인과율의 일치체로 창조하셨으며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졌으며 하나님과 교통하며 타락된 세상은 그리스도에 의해 회복되며 윤리는 하나님께 기초한다. 그렇다면 전통적 유신론과의 차이는 무엇인가?
첫째, 인간은 인격적 존재이며 완전한 의식을 갖게 되었을 때 소외된 우주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하나님의 존재 여부는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해결되는 난제이다. 유신론적 실존주의는 하나님을 출발점으로 삼지 않는다. 인간은 처음 자기 의식을 가졌을 때 부조리한 세계를 보게 되며 하나님을 즉각 인식하지도 못한다. 인간이 유신론자가 되려면 믿음으로 '도약하는' 방법뿐이다.
무신론적 실존주의처럼 유신론적 실존주의 역시 주관 세계와 객관 세계의 구분을 강조한다. Martin Boober는 실재에 대한 인간의 두 가지 관계 구분을 "나-너(I-Thou)", "나-그것(I-it)"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사람은 사물들을 보면서 그것들을 객체, 즉 '그것(It)'으로 구성한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It)'만으로는 살 수 없으며 '너(Thou)'가 필요하다. 즉 '나-너(I-Thou)' 관계, 다시 말해 인격 대 인격의 관계가 무엇보다 우월하며 가치있는 것이다. 특히 모든 것은 '너들(Thous)의 너'인 하나님에게로 올려져야 한다. 신은 완전한 타자이면서도 오히려 나의 나(my I)보다도 내게 가까이 있는 신비함이다. 교회는 유신론의 전체 세계관을 늘 완벽하게 구현하지는 못했으며 왼쪽 항목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런 면에서 유신론적 실존주의가 있었기에 많은 유신론자가 유신론 체계 자체의 풍요함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회복할 수 있었다.
지식은 주관적인 것이다. 완전한 진리는 종종 역설적이다. 객체에 대한 지식은 '나-그것'의 관계이지만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충분한 지식이란 밀접한 상호관계, '나-너'의 관계이다. 즉 하나의 사실이 누군가를 위한 사실, 즉 나를 위한 사실이 될 때 지식은 인식자와 결합된다. 인격적 차원의 진리는 주관적인 것이며 소화되어 실제 인생을 살아가는 진리가 된다.
자유와 필연은 인간과 신의 관계가 빚는 역설이다. 나는 신의 처분에 맡겨져 있는 동시에 모든 것이 내게 달려 있는 것이다. 신의 생각에선 해결되었으나 인간의 생각에선 해결되지 않는 이 역설 그대로와 함께 살아야 한다. 이러한 신-인간관계를 비역설적으로 진술하려 한 시도들은 한쪽을 부인하는 극단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역설을 의지하는 것은 멈춰야 할 지점을 알기 힘들다는 약점이 있다. 이 한계를 결정하는 비모순적 명제 가 필요한데, 유신론적 실존주의에서는 성경이 그 역할을 한다.
7. 동양으로의 여행 : 동양 범신론적 일신론
시대가 바뀌어 가면서 서양사상사의 흐름은 결국 막다른 골목에 부딪히고 말았다. 자연주의는 허무주의에 귀결되었고, 자연주의에 물든 서양인들이 받아들이기 원하는 조건으로는 허무주의를 극복하기가 어렵다. 실존주의도 그러한 시도의 하나이지만 그것은 다소 심각한 여러 문제를 안고 있으며, 유신론도 하나의 해답이지만 외식적이고 사랑이 부족한 현대의 기독교계는 유신론의 생명력을 빈약하게만 증거하기 때문에 자연주의자들은 여기에 별로 끌리지 않았다.
자연주의를 재검토하게 되었지만 더 이상 좋은 방안을 찾지 못하였으므로 동양으로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동양의 사상은 서양보다 더 역사가 깊으며 반 합리주의, 혼합주의, 과학기술의 부재, 소박한 생활양식, 다른 종교적 구조, 분리보다 통합을 추구하는 등 여러 면에서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어 새로운 것을 찾던 서양인들에게 매우 흥미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인도의 구루(힌두교의 종교적 스승)들이 미국과 유럽을 바삐 가로질러 다니며 동양에 대한 지식을 전하고 있으며 서양에서 점점 더 신선한 대안이 되고 있다.
동양 범신론적 일신론(실재는 유일의 비인격적 요소에 의해 구성된다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동양의 다른 세계관과 구분이 된다. 인도의 힌두교는 범신론적 일신론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아트만(Atman, 각 사람의 본질, 영혼)은 브라만(Brahman, 전 우주의 본질, 영혼)이다. 즉 인간(각 개인 모두의)의 영혼(soul)은 우주의 영혼(Soul)이란 말이다. 모든 각 개체의 영혼인 아트만은 전 우주의 본질인 브라만과 통하고 있다는 뜻이다.
인간은 신인 것이다. 서양사상은 사람과 자연, 인간과 신을 구별하였으나 동양의 범신론적 일신론에서는 사람은 신이요 자연은 사람이다. 그 궁극적인 실체는 통한다는 뜻이다. 범신론의 신은 유일 무한하고 비인격적인 궁극적 실재이다. 신은 우주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이다. 궁극적 실재는 모든 것을 초월한다. 그것은 존재한다. 합일의 본질은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 어떤 구분도 초월하는 거기에 안식함으로써만 그것을 '체험할' 수 있다. 보리수 나무의 열매를 쪼개고 쪼갠 후 "아들아 네가 볼 수 없는 이 씨의 본질에서부터 실로 이 큰 보리수가 나왔느니라. 그렇다. 내아들아, 볼 수 없는 기묘한 본질이 바로 온 우주의 영혼이다. 그것이 실재요, 또한 아트만이다. 그리고 네가 바로 그것이다."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더 실재에 가깝다는 명제는 실재에도 현상적인 위계(hierarchy)가 있다는 말이다. 순수하고 단순한(즉 광물)이 가장 실재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그 다음에 식물, 동물, 사람 등의 순서이며, 사람에게도 등급이 있다. 완전한 스승, 불타, 구루 등의 순서로. 하나 됨을 체험한다는 것은 의식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유일자와 합일될 때 의식은 완전히 사라지고 단지 무한한 비인격적 존재로 변하게 된다. 명상의 기술처럼 의식도 그 효용성을 다 감당한 후에는 버려질 어떤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물질의 본질은 아트만이지만 물질은 아트만이 아니다.
많은 길(모든 길은 아닐지라도)은 유일자로 향하고 있다. 유일자와 합일되는 것은 유일의 참된 길을 찾는 문제가 아니다. 각자가 자신의 길에 서 있으면서도 올바른 방향을 향해 서 있으면 된다. 유일자와의 합일을 체험하는 것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기술의 문제이며, 이 기술까지도 가지 각색이다.
기술의 종류 - 주문인 만트라의 암송 / 실재의 완전성을 상징하는 만달라의 묵상 / 하이크의 시편 묵상 / 끝없는 기도나 절의 반복 / 이러한 기술은 대부분 지적 내용이 없는 묵상의 방법인 고요와 고독을 요구한다. 가장 일반적인 '길'중의 하나는 오옴(Om)이란 단어를 읊조리거나 '오옴 마네 빠드메 훔'과 같이 오옴이 들어 있는 구절을 암송하는 것이다.
아트만, 즉 절대아(絶對我, Self)의 상태를 네 가지로 표현될 수 있다.
1) 외부세계의 모든 대상을 의식하는 깨어 있는 상태, 외적 대상을 의식하는 일곱 부분을 즐기는 쾌락을 말한다.
2) 내면 세계에서 의식하는 몽상의 상태, 자신의 꿈과 고독 속에서 일곱 부분의 미묘한 내적 영상을 즐기는 쾌락이다.
3) 인간이 아무런 욕망도 갖지 않고 꿈도 꾸지 않을 때 갖는 의식이 잠자는 상태, 환희와 환희의 경험에 의해 얻어진 깊은 고요의 의식이며 일종의 합일 상태이다.
4) 아트만이 자신의 순수한 상태에 있는 것으로서, 고귀한 의식이 깨어 있는 상태, 이것은 외적 의식도 내적 의식도 아니고, 반(半)의식도 잠자는 의식도 아니고, 의식도 무의식도 아니다. 그는 아트만, 영혼 자체이다. 따라서 보거나 만질 수도 없고 모든 구분을 뛰어넘으며 모든 사상과 언어를 초월한다.
우주와의 합일을 체험하는 것은 인격을 초월하는 것이다. 아트만은 브라만이다. 브라만은 유일자이고 비인격이다. 그러므로 아트만도 비인격이다. 인간은 가장 진실되고 충만한 존재로서 비인격이다. 범신론의 신에게 중요한 것은 그의 하나됨, 즉 순전히 추상적이고 구분되지 않는 비이원론적 통일성이다. 따라서 신은 인격을 초월한다. 그리고 아트만은 브라만이기 때문에 인간 역시 인격을 초월한다. 인간이 존재를 '실현'하는 것은 그 구분되지 않은 유일자(Undifferentiated one)와 합일되는 것이다.
동양 범신론적 일신론에서 존재가 활동은 아니다. 명상은 존재로 이르는 주된 통로이다. 따라서 모든 형태의 명상은 정적주의의 사례 연구가 된다. 보리수 나무 밑에 앉아, 보거나 듣지도 않고 다른 데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고 명상에 잠겨 있는 석가의 불가사의한 미소가 이제 이해될 것이다. 석가는 유일자와 합일된 것이다. 우주와 합일을 체험하는 것은 지식을 초월한다. 궁극적 진리가 관계된 곳에서는 모순율이 적용되지 않는다. 지식주체와 지식 객체라는 이원성을 유일자는 초월한다. "그는 아트만, 영혼 자체이며 모든 구분과 사상을 초월하는,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존재는 지식이 아니다. 언어는 이원성을, 실상 여러 이원성(화자와 청자, 주어와 술어)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언어는 실재에 관한 진리를 표현할 수 없다.
동양의 범신론적 일신론는 무 교리적이다. 어떠한 교리도 진리가 될 수 없다. "고대 힌두교의 교리와 현대 힌두교의 교리는 서로 다르나 모두 정통이다" 바꾸어 말하면 범주화된 진리는 사라졌다는 것이다. 우주와 합일을 체험하는 것은 선악을 초월하는 것이다. 우주는 언제나 완전하다. 동양인들은 도덕을 부인하는 것을 용납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이 주제는 동양 범신론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 가운데 하나이다. 업보라는 개념이 동양 사상에서는 거의 보편적이다. 업보란 고통이든 기쁨이든, 왕이든 노예든 하루살이든, 현재의 상태는 과거의 행동, 특히 전생에서 행동한 결과라는 개념이다. 인간은 선을 행해야 한다. 만일 선을 행치 않는다면 그 결과를 거둘 것이다. 비록 이생에서 거두지 않는다 해도 다음 세상에서 아마 더 낮은 단계의 존재로 환생함으로써 그 열매를 거둘 것이다. 보편적으로 이해되고 알려진 바와 같이 동양은 사실상 도덕적 세계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선한 행동을 하는 것은 유일자와의 합일에 도달하기 위함이다. 선을 행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돕는 최고의, 최상의 방법이다. 모든 행동은 전체 환상계의 일부분일 뿐이다. 유일의 참된 '실재'는 궁극적 실재이며 그것은 모든 구분, 선악 등을 초월한다. 브라만은 선악을 초월한다. 진리와 비진리의 구분처럼 선악의 구분도 궁극적으로 사라진다. 모든 것은 선이다. 도둑이 성인이고 성인이 도둑이고 도둑이 성인이다.
죽음은 개인적, 인격적 존재의 종말이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에 관한 본질적인 것은 불변한다. 죽음은 각 개인에게 구현된 아트만의 종말을 뜻한다. 또한 개인의 종말을 뜻한다. 그러나 영혼, 즉 아트만은 불멸의 것이다. 개인이나 인격이라는 의미에서는 어떤 사람에게도 사후의 생은 없다. 아트만은 계속 존재한다. 그러나 아트만은 비인격이다. 아트만이 환생될 때는 다른 인격이 된다. 범신론적 일신론은 영혼의 불멸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인격적, 개인적 불멸성을 거부하는 점에서는 자연주의와 흡사하다.
유일자와의 합일을 체험하는 것은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다. 시간은 비실재이다. 역사는 순환적이다. 강의 경우 전체적 관점에서 - 우물, 내, 강, 바다, 수증기, 비, 우물의 순환계에서 - 본다면 강은 흐르지 않는다. 시간이란 강을 하늘에서 내려다보기보다는 강가에 앉아 바라봄으로써 만들어 낸 환상이다. 역사는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 사건들이란 반복될 수 없는 시공간의 상황에서 발생 한 것이기 때문이다.
서양이 동양의 비합리성을 지적한다면 동양인은 범주로서의 이성을 거부할 것이다. 만일 도덕의 소멸을 지적한다면 동양인은 그러한 선악의 구분에 필요한 이원성을 비웃을 것이다. 만일 죽음을 이야기한다면 동양인은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아트만은 브라만이다. 브라만은 영원하다. 오히려 죽음을 바란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든 서양과 동양이 매우 다른 일련의 전제 위에서 활동함을 이해하는 것이 출발점이 된다. 대화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한 편에서라도 그들의 근본적 전제가 얼마나 다른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의 아름다움을 전하려는 자는 매우 힘든 일을 택한 것이다. 왜냐하면 서양의 추악한 제국주의, 전쟁, 폭력, 탐욕과 게걸스러움 등의 안개가 실로 두텁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초월적 명상과 기타 동양의 정신 수련법들은 직장인들로 하여금 통근길에 명상케 하고 기업체에 그 과정을 개설하게 하는 등 대대적 선풍을 일으키고 있다. 이처럼 서양인들은 계속 동양으로 향하고 있다. 동양이 평화에 대한 약속, 의미에 대한 약속, 가치에 대한 약속을 내세우는 한에는 사람들이 반응을 보이며 좇아갈 것이다.
8. 또 하나의 실재 : 뉴 에이지(New Age)
초심리학적인 일들이 사실이라고 혹은 분명히 가능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대부분 연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개인적인 경험에 의해 그런 확신을 갖게 된다. 이미 1974년에 영국에서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을 주 대상으로 실시한 어떤 설문 조사에서는 거의 70%가 초감각적 인식(ESP, extrasensory perception)이 존재할 수 있다고 믿고 있음이 드러났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오늘날 많은 사람이 스스로 과학적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경험들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의식의 새로운 상태에 대한 관심이 증가되었기 때문에 나온 결과라고 생각된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명상과 최면술 그리고 환각을 경험하고 있고, 수면과 꿈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과학으로는 알 수 없는 사건들을 경험할 수 있는 토대가 되는 것이다. "뉴 에이지 세계관 자체가 적기를 맞은 사고 체계인 것이다."
인간 본성의 급격한 변형은 의식의 광대한 스펙트럼 위에서 활동하는 법을 배우게 되면 세상이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깊고 풍부한 인간성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며 그래서 우리의 5대 손들은 우리를 네안데르탈인 정도로 생각할 만큼 우리와 매우 다르게 될 것이다. (정신연구재단의 진 휴스턴) 새로운 인간 본성의 등장, 이 새로운 종은 진화할 것이다. (사회학자인 조지 레오나드) 평범한 기술과 내적인 기술이 모두 진보하여 인간 정신의 진화와 인류 진보의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 질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새로운 시대에 대한 낙관론의 한 주요한 계열은 조용해졌다. 인간의 능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마약 사용을 옹호하던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거나 지난 10년간 침묵을 지켜 오고 있다. 그 희망은 거짓으로 드러났다.
뉴 에이지 사상을 살펴보면, 심리학, 사회학과 문화 사학, 인류학, 자연과학, 건강학, 정치, 과학소설, 영화, 스포츠 뉴 에이지 사상은 심대한 문화적 영향력과 침투력을 가진 세계관으로 형성되고 있다. 우리는 차후 수년 내에 이것이 자라나 많은 성인과 아이들의 마음을 얻으려 노력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다른 세계관들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초월적인 신의 존재를 부정, 인간성의 진화론적 변화에 대한 희망(자연주의) 개개 인간에 대단한 가치 부여(자연주의/유신론) 시간과 공간, 도덕이 초월되는 신비한 경험을 중심(동양 범신론적 일신론) 그러나 달리 실재에 이르는 안내자로서의 이성을 부정한다. 세계는 실제로 비합리적인 혹은 초합리적이며 새로운 인식 형태를 필요로 한다.
뉴 에이지 사상은 이방종교(애니미즘)의 관념 중 반영하고 있으며, 자연적인 우주는 대략적으로 위계질서 안에 넣을 수 있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영적 존재가 거주하는데 그 정점에 유신론의 하나님과 비슷하지만 인간에 대한 관심은 가지고 있지 않은 하늘의 신(The Sky God)이 있다.
우주는 인격적 영역을 가지고 있으나, 무한하고 인격적인 창조주 하나님은 없다. 이러한 영적 존재들은 그 기질이 사악한 것으로부터 지저분한 것, 우스꽝스러운 것, 착한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사람들은 살아가기 위해서 선물이나 제물, 제사와 주문 등으로 악한 영들을 진정시키고 선한 영들을 졸라야 한다. 주술사, 마술사, 무당 등은 길고 힘든 훈련을 통해서 영계를 어느 정도 통제하는 법을 배웠고 질병의 영, 가뭄의 영 등을 쫓아낼 수 있다. 따라서 보통 사람들은 이들에게 의존해야 한다.
모든 생명에는 단일성이 있다. 우주는 영과 물질의 연속체이다. "동물들이 인간들의 조상일지도 모르며 인간은 동물로 변할지도 모르고 나무나 돌들이 영혼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다른 세계관들의 명제는 모두 정연하게 서로 들어맞지는 않지만 실재를 바라보는 의미 있는 방법이 될 수 있을 만큼 상당한 의견 일치가 있기도 하다.
뉴에이지의 기본 개념을 살펴보면, 첫째, 존재의 본질이 무엇이든 간에(관념이든 혹은 물질, 에너지 혹은 입자이든) 자아가 중추, 곧 최고의 실재이다. 이 사실을 인식하고 이해함에 따라 인류는 인간 본성의 급격한 변화에 가까이 가게 된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우리는 변화된 인간성의 전조들과 뉴 에이지의 전형들을 볼 수 있다.
유신론의 최고의 실재를 초월적인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물적인 우주는 자연주의의 최고의 실재이다. 그리고 뉴 에이지에서는 자아(영혼)가 최고의 실재이다. 개별 자아가 중요하게
된다. 이 자아가 정확히 무엇인가 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합의하지는 못했으나 인간의 인식 중심인 자아야말로 진정 우주의 중심이라고 주장한다. 우주는 초월적 하나님에 의해 외부로부터 조정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에 의해 내부로부터 조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가장 완전하고 가장 깊은 실재에 대한 인식에 도달할 때 신 곧, 우주와 그 우주의 창조자가 된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가 진실로 인식의 문을 열 수 있고 동굴로부터 기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이제 막 깨닫기 시작하고 있다.
자기기만의 위험은 뉴 에이지의 커다란 약점이다. 자아만이 왕인 한, 상상이 현실이라고 전제되는 한, 보는 것이 존재하는 것인 한, 상상하고 보는 자아는 그 사적인 우주에 단단히 갇혀 있는 것이다. 곤란한 것은 그 자아가 왕이 아니라 죄인이라는 점이다.
뉴 에이지는 우주는 자아 속에서 통일되어 있으며 또 다른 두 개의 영역-평범한 의식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보이는 우주, 그리고 새로운 의식의 상태를 통해서 접근이 가능한 보이지 않는 우주 [혹은 큰 정신(Mind at Large)]에서 발현된다. 또한 오관을 통해 직접 접근할 수 있고 자연 과학에 의해 밝혀진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보이는 우주와 마약, 명상, 신접, 바이오피드백, 침술, 제식무, 특정한 음악과 같은 '인식의 통로'를 통해 접근이 가능한 보이지 않는 우주에 둘러싸여 있다. 우주는 인과율의 일치체라는 성격에 종속된다. 그러나 그 체계는 그것을 궁극적으로 통제하는 자아와, 자아가 변화의 대리자로 삼기도 하는 큰 정신으로부터 나온 존재들에 의해 재조정될 수 있다.
뉴 에이지 사상에서 큰 정신(Mind at Large)은 보이는 우주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의식은 눈 깜작할 사이에 지구 표면을 수백 킬로미터나 여행할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은 탄력적이며 우주가 뒤집힐 수도 있고 시간이 거꾸로 흐를 수도 있다. 육체적인 치료에 영향을 줄 수도 있고 원수를 저주하여 죽이거나 미치게 만들거나 육체적, 감정적, 정신적인 고통을 줄 수도 있다. 큰 정신은 나름대로의 규칙과 질서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동시에 신이었으며 또 나였다. 그 음악, 그 노래, 내 안에 있는 신의 울림을 신뢰하기만하면 나는 내가 원하는 무엇이든 다 될 수 있었다. 자아 스스로가 실재의 게임을 지배하는 규칙을 만들어 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원하는 어떤 실재의 질서, 어떤 우주라도 만들어 낼 수 있다.
뉴 에이지에서는 색채와 광채에 대해, 정신의 다른 쪽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모든 것은 찬란하게 빛이 나고 내부로부터 빛을 발하는 것 같이 보인다. 모든 색채는 정상적인 상태에서 보이는 어떤 것보다 농도가 훨씬 더 강하고 동시에 색조와 빛깔의 미세한 차이를 인식할 수 있는 정신 능력은 현저히 강화된다. 이 영역에 특이한 존재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큰 정신은 매우 특이한 장소이다. 그 거주자들이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아의 상상이 만들어낸 것이거나 무의식적인 공포나 희망의 반영이 아닐까?
뉴 에이지의 핵심적인 경험은 우주 의식(cosmic consciousness)인데 그 안에서는 공간, 시간 그리고 도덕성과 같은 보통의 범주들은 사라져 간다. 의식의 또 다른 상태, 우주 의식은 자신이 우주와 하나가 되었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아를 깨닫는 것은 자아와 우주가 하나의 조각들일 뿐 아니라 같은 조각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우주의식에 중심이 되는 것은 단일성의 경험이다. 우주의 전체성을 인식하는 경험, 전 우주와 하나가 되는 경험, 우주와 하나됨을 넘어서 자아가 모든 실재의 창조자임을 인식하고 그런 의미에서 자아가 우주이며 우주의 창조자임을 경험하는 것이다.
매클레인, 헉슬리, 릴리 등은 여전히 우주를 인식하는 것이 그렇지 못한 것보다 낫고, 사랑하는 것이 미워하는 것 보다 나으며, 낡은 시대가 붕괴하는 것을 그저 바라만 보는 것보다 새로운 시대(New Age)를 선도하는 것이 나은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것은 낫다 혹은 좋다라는 표현이 그 대상에 대한 도덕적 평가를 하는 것이므로 우주 의식 속에서 모든 도덕성의 범주가 사라진다는 주장은 모순된다. 헉슬리와 일리, 카스타니다 등은 우주 의식을 경험하려고 처음 시도하는 경우에는 공포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안내자와 함께 할 것을 강력히 권한다. 그러나 이것도 지옥을 경험한다면 그것을 부수고 천국을 창조하면 된다는 명제와 모순된다. 그러나 자아가 '신'인 것은 사실이지만 자아가 항상 그것을 깨닫지는 못한다고 말할 것이다.
육체의 죽음은 자아의 종말이 아니다. 우주 의식에 대한 경험이 있다면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사라진다. 인간들은 몸을 능가하는 단일체(개체)이다. 퀴블러-로스는 죽음은 그저 생명이 다른 단계로 전이 하는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수천 번의 생을 살았다. 전생의 자신에 대해서 알았다고 혹은 보았다고 주장한다.
실재의 본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서는 뉴 에이지의 일반적인 틀 안에서 다음 세 가지의 독특한 해석이 있다.
1) 새로운 의식의 상태에서 인식되는 존재와 사물들은 의식하는 자아와 떨어져 존재한다고 보는 비학(occult)적 해석 전부는 아닐지라도 대부분의 영매, 마녀, 점쟁이, 마술사, 주술사가 받아들이는 지적인 틀. 몽환, 수정 구슬, 트럼프, 부적판 등 신비한 힘을 지닌 물건들을 통해서 사람이 '다른 쪽'을 접할 수 있고 도움을 얻을 수 있다고 가정한다.
2) 그 존재와 사물들을 의식하는 자아의 반영으로 보는 환각
새로운 의식의 상태에서 경험되는 실재가 그저 자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실재는 자기가 만들어 낸 것이다.
3) 우주 의식이 실재에 대한 수많은 특수한 모형 중 하나를 사용하는 정신의 의식적인 행동이라는 개념적 상대주의 해석 한 사람에게 원하는 결과를 가져올 어떤 것도 믿을 수 있도록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다. 어디로 가고 싶은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 우주에 대한 자연주의의 관념을 받아들였을 때, 그는 지옥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가 우리의 문명을 넘어서는 문명이 있다는 관념을 받아들였을 때 "그러한 공간으로 떨어졌다." 믿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새로운 의식이 지닌 결함을 살펴보면 우리는 이제 우주 의식과 함께 새로운 사회가 오리라고 거의 믿지 않는다. 오히려 비관주의가 올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뉴 에이지 세계관은 내적인 모순 투성이며 자연주의적 허무주의나 동양 신비주의가 부딪힌 딜레마를 해결하지도 못하고 았다. 단지 이 딜레마를 무시한다.
뉴 에이지 사상이 윤리적인 문제가 주의를 끌지 못하는 이유는 자아가 왕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왕이 하는 일은 잘못일 수 없는 것이다. 자아가 만족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엄청난 잔인성을 허락한다. 유아론과 이기주의의 먹이가 될 수 밖에 없다. 애니미즘으로부터 차용한 수많은 반인 반신, 악마들, 또 다른 실재 혹은 정신의 내부공간에 거주하는 수호자들이 늘 따라다니고 의식에 의해서 진정되거나 주문에 의해 조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초대교회 영지주의자들은 아마도 갈대아의 점성술에서 빌려 온 듯한데, 하나님은 너무 높고 멀리 계셔서 직접 하찮은 인간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가르쳤다.인간보다는 높고 하나님보다는 낮은 존재들 중에서 덜 우호적인 존재들을 진정시키고 우호적인 존재들에게는 도움을 청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하나님은 천사를 동원하여 명령을 수행시키기도 하시지만 그 분은 중개자를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그 분이 친히 사람이 되셨으므로 우리를 속속들이 아신다.
주술과 과학, 마술과 철학, 마약을 통한 경험 등 실재에 대한 설명은 동일하게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누구의 사상이나 경험에 대한 비판도 없다. 모든 체계가 동일하게 가치 있으므로 경험의 테스트만 거치면 된다. 경험은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념의 논리적인 결론은 일종의 인식론적 허무주의이다. 결코 실재가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자아가 신이든지, 아니면 신이 아니고 따라서 자신과 다른 사물들의 존재에 좌우되는 것이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자신들이 신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의 환상을 흔들어 깨우려는 것은 이론적으로 헛된 것이다.
9. 사라진 지평선 : 포스트모더니즘
신의 죽음을 인정하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지혜의 시작이다. 왜냐하면 결국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어떤 것에 "뒤따라오는" 그 무엇이 아니라 근대의 마지막 행보이며, 근대가 스스로의 신념을 심각히 숙고한 결과 분석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음을 자각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용어는 본래 건축학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건축가들이 콘크리트, 유리, 강철로 된 비인격적이고 꾸밈없는 상자 모양의 건축물을 더 이상 짖지 않고, 과거로부터 여러 특색을 끌어오되 그 본래의 목적이나 기능과 상관없이 그렇게 하여 복잡한 모양과 형태를 꾸며내는 방향으로 전환된 데서 유래한다.
프랑스 사회학자 장 프랑스와 리요타르가 포스트모던이란 용어를 문화적 정당화 방식의 변화를 가르키는 것으로 사용하면서 문화 분석에서 핵심단어로 자리 잡았다. 리요타르는 포스트모던을 "거대담론들(metanarratives)에 대한 불신"으로 정의했다. 서구 문화를 하나로 묶어주는 단 하나의 이야기, 하나의 거대담론(혹은 하나의 세계관)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까지 오랜 세월에 걸쳐 여러 이야기들이 존재해 왔을 뿐 아니라, 각 이야기는 그것을 자기 이야기로 삼는 사회집단에게 결속력을 제공해 왔다.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으로 어떤 이야기도 다른 이야기 처럼 신빙성을 지니지 못 한다. 모든 이야기가 똑같이 타당하며, 그 타당성은 그 이야기에 따라 사는 공동체에 의해 확증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무엇이 참된 실재인지를 묻지 않고, 존재와 앎과 윤리의 관념이 사회에서 어떻게 발생하고 작동하는지를 묻는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가장 일차적인 것은 "존재에서 인식으로" 거쳐 의미 구성으로 변천 된다는 것이다. 그들의 질문은 무엇이 존재하느냐 혹은 그 존재하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느냐가 아니라, 언어가 어떻게 의미를 구성하느냐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정의에 대한 보편적 기준이 아예 없다는 '포스트모던적' 단념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보면, 중세의 위계 질서에서 계몽주의의 보편적 민주주의를 거쳐 개인과 공동체의 자율적 가치관을 격상시키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일종의 무정부 상태를 의미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말하는 실재 자체에 관한 진리는 영원히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뿐이다. 우리가 인식의 주체처럼 보이는 자아에서 시작하여 거기에 함축된 논리를 따라가 보면, 남는 것이라고는 우선 고독한 자아(solipsism, 유아론)밖에 없고, 그 다음에는 그것조차 남지 않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우리 인생에 관한 개인적 이야기를 하면서 살고 있다. 우리가 어디에 있었고 장차 어디로 갈 것인지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이야기도 한다.
우리 속에는 "진리를 향한 충동"이 계속 일어나지만, 진실하게 된다는 것이 이제는 관습적 은유를 사용하는 것을 일컫는다. 도덕적으로 말하자면, 기존의 관행에 따라 거짓말해야 하는 의무, 모두가 그래야 하듯이 떼거지로 거짓말해야 하는 의무를 의미한다. 자신의 거대담론(자신의 세계관)이 다른 모든 이야기를 포괄하거나 설명해 주는 으뜸 이야기인 것처럼 거기에 매달리는 자는 환상에 빠진 사람이다. 이런 이야기들이 어느 정도 의미는 갖고 있으나 진리를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하면,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어떤 것도 과연 실재와 부합하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그렇다고 포스트모더니트들이 우리의 언어 이외에는 다른 실재가 없다고 믿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언어 체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모든 언어는 인간의 산물이다. 우리는 언어의 '진실성'을 단정할 수 없고, 단지 그 유용성을 단언할 수 있을 뿐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속에는 (1)계시에 의한 확정적 거대담론이라는 '전근대적' 관념에서 (2)대응의 진리에 이를 수 있는 인간 이성의 자율성이라는 '근대적' 관념을 거쳐 (3)우리의 목적에 걸맞는 언어를 구성함으로써 우리가 진리를 창조한다. 비록 이런 언어가 분석의 순간에 해체되지만 '포스트모던' 관념으로의 이행이 존재한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진리라는 것이 사물의 진면목을 지칭하지 않고, 그런 진리 주장이 모두 인간이 만든 이야기이며 그것을 우리가 믿고 들려주는 것이라면, 총체적 무질서에 빠질 것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들을 참된 것으로 믿고 있으므로, 그것들이 사회 내에서 참된 이야기의 기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둘째, 여러 집단이 동일한 이야기를 믿고 있어서 다소 안정된 공동체가 유지된다. 만일 한 공동체 내에서 서로 이질적인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다른 이야기들을 믿게 되면, 그 공동체는 와해되기 시작할 것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삼위일체라고 믿는다. 포스트모더니트는 이 이야기가 실재와 부합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런 주장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은 부합한다고 설명할 것이다. 자연주의자는 '우주가 존재의 전부'라고 실제로 믿겠지만, 포스트모더니트는 그런 신념이 원리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입증될 수 없다고 설명할 것이다. 어쨌든, 이야기는 사회를 결속시키는 큰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 이야기가 없다면 서로 이질적인 덩어리에 불과한 사회를 하나로 묶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에는 "거대담론에 대한 불신이 잇음에도 불구하고, 각 문화에는 구성원들의 충분한 동의를 얻어서 실제로 거대담론의 역할을 하는 이야기가 엄연히 존재한다.
10. 검토된 삶
세계관의 선택 제한된 수의 세계관 중에서 어떻게 선택할 수 있을까요? 초월적이고 인격신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가정하는 세계관과 그렇지 않은 세계관 중에서, 무슨 근거로 선택을 해야 하는가? 적절한 세계관이 되기 위해선 다음의 4가지의 특징을 모두 갖추어야 한다.
(1)내적인 지적 통일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인데 위스콘신 대학의 케이트 얀델 교수 "만일 어떤 개념체계의 본질적 요소가 논리적 일관성이 없는 일련의 명제들로 구성되었으면 그 체계는 틀린 것이다." 라고 말한다. 바로 이러한 근거 위에서 각 세계관이 어떤 점에서 일관성이 없음이 드러났다. 특히 뉴에이지의 경우에는 많은 점에서 일관성이 없음이 드러났다.
(2) 각자가 일상생활의 의식적 경험에서 수집한 것, 또는 비판적 분석과 과학적 탐구를 통해 얻은 것, 또는 다른 사람의 경험을 통해 들은 것 등 모든 형태의 자료를 포함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죽은 자 중에서 부활했다면 우리의 체계는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그런데 그 자료들을 거부하거나 포함할 수 없는 세계관이라면 그것은 거짓 세계관이거나 적어도 부적절한 세계관일 것이다.
(3) 적절한 세계관은 그것이 설명하겠다고 주장한 것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각 세계관에게 던져야 할 심각한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즉 인간은 생각하지만 그것이 불완전하다는 사실, 사랑하지만 또한 증오한다는 사실, 창조적이지만 또한 파괴적이라는 사실, 현명하지만 종종 어리석다는 사실 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진리나 개인적 성취에 대한 인간의 갈망을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쾌락이 완전히 채워질 만큼 충분한 경우는 왜 그리 드물까? 왜 우리들은 항상 더 많은 것을 원할까? 사람들이 비도덕적 행동 양태를 거부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 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이것들은 거창한 질문이다. 그러나 세계관이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질문들 때문이다. 즉 이러한 질문들에 답을 하거나 적어도 대답을 제공할 틀을 제시하기 위해 세계관이 있는 것이다.
(4) 적절한 세계관이란 주관적으로 만족스러운 것이어야 한다. "어떻게 한 세계관이 만족을 줄 수 있는가?" 하고 질문했을 때 그 대답은, 세계관은 진실됨으로써 만족을 준다. 아마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세계관을 검토하게 하는 첫 번째 이유는 만족감의 부재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바, 무엇인가 잘 맞지 않는다는 막연하고 꺼림칙한 감정이 우리로 하여금 만족을 추구하게 한다. 우리의 세계관이 만사 형통하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묻어 버리려고 노력하지만 의심은 표면으로 다시 떠오른다. 자신의 불안에 가면을 씌우지만 그 가면은 떨어져 나간다. 사실 우리가 진정한 만족을 누리기 시작하는 때는 바로 의문점을 계속 추구하여 진리를 발견할 때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11. 비평
저자는 세계관을 정의할 때 핵심 질문으로 "제1의 실재, 곧 참으로 실재적인 것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제일 먼저 제기하는 것에 대해 이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형이상학(혹은 존재론)을 모든 세계관의 토대로 간주한다. 존재가 인식보다 앞선다. 만일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유신론을 정의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한 것이고,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삼위의 인격이시며, 초월적이고 내재적이며, 전지하시고 주관적이며, 선한 존재로 규정했던 것이다. 유신론의 나머지 내용은 모두 가장 근본적인 존재에 대한 신념에서 나오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 유신론이 포기된 이유는 그것의 내적 비일관성이나 사실 을 설명할 능력이 없다는 점 등에 있지 않고, 그것이 부적절하게 이해되거나 완전히 망각되었거나 혹은 당면한 문제에 적용되지 않은 점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유신론은 의문점들과 거친 부분들을 지니고 있다. 또한 문제점도 있다. 유신론은 유한한 인간은 어떤 세계관에도 그러한 문제들이 항상 있다는 것을 설명해 주고 있다. 유신론은 인간이 의미와 중요성을 찾을 수 있는 준거틀을 제공한다.
기독교 유신론을 단지 지적 구조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것을 완전히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이 세계관을 이해하고 이 세계관 안에서 사는 것과 관련된 심오한 인격적 차원이 있다. 왜냐하면 이 세계관은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그 분께 인격적으로 의지하고 있다는 것,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인격적 반역, 그 분과의 교제를 회복하기 위해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등을 인식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제임스 사이어의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은 개인의 세계관을 체계적으로 궁극적인 실재, 인간관, 사망관, 윤리관, 역사관 등에 대한 질문을 중심으로 유신론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신론, 자연주의, 허무주의, 실존주의, 동양 범신론적 일신론, 새로운 의식에 이르기까지 다소 논리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세계관을 이해하고 간파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세계관을 확실히 정립하는데 많은 도움을 되었다. 지금까지의 나의 세계관을 한 마디로 정의해 본다면 실존주의적 유신론이었다고 고백한다. 이는 유신론의 기본 명제인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것을 깊이 묵상하지 못하고 신앙생활 했음을 고백한다. "감사합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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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라오스정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5.01.01 이러한 글을 소화하려면,.많은 노력과 시일이 필요하리라 봅니다..
그래도 이런것을 소화하고 나면 우리의 바른신앙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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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라오스정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5.01.01 실재를 무엇으로 인식하느냐에 따라,..각자의 세계관이 다르게 나타난다고 봅니다..
<유신론의 최고의 실재를 초월적인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물적인 우주는 자연주의의 최고의 실재이다. 그리고 뉴 에이지에서는 자아(영혼)가 최고의 실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