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심중생상담(자)교실4
회심의 구체적인 단계
(이제 우리가 회심의 해부와 순서에 대해서 살펴볼 때, 두 가지 큰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는, 많은 친구들이, 회심이란 것이 단계들이나 부분들로 나뉘어지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제안에 본능적으로 움추립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신학자들이 이런 단계들을 설정하려고 할 때, 여러 가지 혼란스러운 순서들을 제시하기 때문에 학생들이 그만 전체 문제를 포기해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이 주제에 대하여 많은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살펴” 이것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첫 번째 어려움을 살펴봅시다. 이것에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회심이란 하나의 과정이 아니기 때문에 몇 개의 단계들로 나뉘어져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회심이 하나의 과정이라는 사실에 전혀 문제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회심이 과정이 아니라는 것을 애써 강조하려는 사람들은 회심이 무엇인지를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회심”이란 것을, 어떤 사람이 자신의 마음과 앞으로의 전망을 새롭게 하고 주님께로 돌아갈 때 일어나는 어떤 일로 생각합니다. 그런 “회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지원”받기는 하지만, 인간의 자연적인 능력으로 아마도 여러 해를 걸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심은 이런 류의 과정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이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셔서 사람이 사망을 거쳐 생명에 이르게 되는 것으로 회심을 이해합니다. 그것은 성스러운 진리임에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구원을 받을 때 일어나는 사건의 순서에 대하여 일어나는 심한 혼동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중생이니, 회심이니 하는 말들을 서로 다르게 쓰고 있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이런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여기서 회심이라고 하면, 영혼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순간에 대해서 쓰지 않을 것입니다. 새로운 출생을 언급할 때에만도 회심이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은혜의 전적인 과정, 곧 맨처음 복음을 희미하게 이해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구도하면서 마침내는 의식적인 새출생의 순간과 확신에 이르는 전과정을 언급하는데 이 회심이라는 말을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더 나아가기 전에 한 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만일 영광의 주님께서 원하시기만 하시면, 회심의 전체 과정이나 단계가 순식간에, 그리고 동시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은 이런 방식으로 당신의 왕국에 들어오게 하십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예를 들어 사도 베드로같은 사람들)은 참된 회개의 순간이 있기 전에 얼마 동안의 준비기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영적 상담자로서 진정 구비될려면 구원의 과정의 구성요소나 단계들에 대하여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한 개인의 구원은 참으로 엄청난 사건입니다. 의심할 것 없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고 미묘한 변화가 포함됩니다. 하지만 성경 속에서 그 주요단계들을 기술하는데 사용되고 있는 이 용어는 놀랍게도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이런 용어들(이나 근접한 동의어들)을 사용하면서, 우리들은 다섯 개의 서로 분간이 가능한 단계를 구성해 볼 수 있고, 아마도 그 순서들에 대해서 완전히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오직 하나의 순서로 설정될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이미 고려한 첫 번째 그룹의 구절들을 존중하면서 회심의 과정이 시작되는 초기의 중생에 대해서 언급해야 합니다. 이미 회심의 과정을 출생과 관련해서 언급했었습니다. 그것은 수태로서 시작되어서 분만으로 마칩니다. 여기서는 초기중생을 수태(conception)라고 명명하겠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사실 이 다섯 개의 단계들이 거의 동시에 일어날 수 있습니다. 회심의 과정은 아주 빠르게 진행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이 분명한 빛과 죄의 확신을 얻은 이후에도 계속 참된 것이 무엇인 지를 추구하는 기간이 있다는 것을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처음 단계부터 살펴 보겠습니다.
수태과정
수태단계(초기의 중생)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비하심 가운데서 영혼 속에 너무나 값진 생명의 씨앗을 뿌리십니다. 그래서 회심의 전 과정이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수태는 단순간에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읽거나 아니면 생각하는 어느 순간 동시적으로 일어납니다. 성경은 그것이 진리를 매개로 해서 일어나게 된다고 합니다(야고보서1장18절과 베드로전서1장23절을 보십시오). 수태가 된 사람은 그 순간부터 자신의 영적 필요에 대하여 깨어나게(awakened)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에 대하여 각성하기(convicted) 시작합니다. 오직 수태가 되어야만 이런 경험들이 주어집니다. 수태없이는 영혼이 잠을 자고 있는 중이며, 눈먼 소경이고, 감옥에 사로잡혀서 흑암중에 지내며, 죽은 자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그 분의 진리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인간의 고집센 악의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아무 소망이 없이 잃어버린 바 된 그러면서도 오만불손한 죄인들의 상태를 묘사하는 성경적 단어들입니다(에베소서2장1-5이 분명하게 이런 것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수태가 없이도 우리는 구원의 계획을 이해할 수 있는 지성이 있고 그래서 진리를 저버리는 자들을 심판하신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정당하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죄를 사랑하는 것 때문에 너무 어리석고 고집스럽게 되어서 수태없이는 복음이 우리들에게 어떤 깊은, 그리고 지속적인 충격을 주지 못합니다. 우리들은 자기들이 머물러 있는 건물 안에 폭탄이 곧 폭발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으면서도 전혀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과도 같습니다. 경고를 지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위험을 충분할 정도로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믿지를 않고 있는 셈입니다.
잃어버린 바 된 죄인들은 현실에 대하여 살아나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영적 상태를 지각하고, 죄의 흉악함과 영원한 중요성을 깨달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불신앙은 인간의 모든 사고과정을 부패시켜서 오랫 동안 기독교교리들을 공식적으로 믿어온 사람들 조차도 그들이 알고 있는 사실들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수태가 일어나기 전에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마음이 열려서 그들이 처한 영적 위험들을 깨닫게 됩니다. 수태는 모든 영혼의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곧 심정(혹은 정서), 마음(혹은 지성), 그리고 의지(결정하는 기능)에까지 영향을 미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설득력을 가지고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웨스트민스터고백서와 침례교고백서는 (효과있는 부르심이라는 제목하에서) 어떻게 마음이 하나님의 일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영적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살아나야 하는가, 어떻게 돌같이 굳은 마음이 제거되고 의지가 새로워져야 하는 지, 그래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자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올 수 있게 되어야 하는 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나게 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수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각성됨과 죄의 가책
수태가 되면, 반역적인 영혼이 즉각적으로 그 잃어지 된 곤경에 대해서 각성되기(awakened) 시작하고 죄에 대해서 가책을 느끼게 되는(convicted) 두 가지 쌍둥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어떤 교사들은 수태-각성-가책을 모두 하나의 사건으로 다루기를 선호합니다. 그렇게 보면 그것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수태는 순간적인 반면 각성과 가책은 거의 같은 시간대에 진행되기 때문에, 뒤의 두 가지를 함께 하나의 범주 안에 넣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첫 번째의 확신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겠는데, 이것은 탕자의 비유에서 완벽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엄청난 기근이 일어납니다(그것은 주님께서 상황을 마련하셔서 죄인을 다루시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처음에는 여전히 자신의 문제를 풀 수 있다고 생각하고는 - 단지 육신적인 해결책만 생각합니다 -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어 삽니다. 그때 갑작스럽게 태도상 현저한 변화가 생깁니다. 그 변화가 “이에 스스로 돌이켜”라는 말 속에 나타나 있습니다. 원어로는 “그가 깨어났다”는 문자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수태의 첫 번째 효과는 죄인들이 깨어나서 자신의 영적 상황을 보기 시작합니다. 마치 탕자가 갑작스럽게 자신의 비극적이고 어리석은 상태를 보고 부르짖는 것과도 같습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제 멋대로 살았던 아들이 자기 아버지에게 했던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었던가를 느끼기 시작합니다. 또한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죄의식을 갖게도 됩니다. 겸비하게 되고 여지없이 깨어진 상태에서 스스로 말합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하리라.”
이런 변화는 수태의 결과로 일어납니다. 모든 무신경함이 깨어져나가고 깊은 열망, 마음 답답한 공허함이 마음 가운데 형성됩니다. 신자들이 누리고 있는 하나님과의 교제와 영적 특권들을 자기는 전혀 맛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예민하게 의식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권세와 거룩, 그리고 영원한 일들에 대한 실재에 대해서 지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이란 단어들이 엄숙한 그러면서 문자적인 중요성을 담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그렇게도 중요하게 여겨지던 이 세상의 일들이 별로 중요치 않게, 무가치한 것처럼 보이기고 합니다. 영적으로 파산되었음을 발견하게 되고, 참된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는 것에 대해서 더 이상 개의치 않게 됩니다.
세상이나 어떤 특별한 우상이 참된 진리를 추구하고 하고 있는 자에게 여전히 강하게 영향을 미치면서 얼마 동안 그 마음 속에 전투가 일어나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수태가 한 번 일어나게 되었다면,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메시지가 점차적으로 더 강하게 영향을 미치는 과정이 진행됩니다. 더 이상 그는 이전같이 자신만만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편견과 불신앙이 혼란 중에 물러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갈보리에서 행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이 이제 그의 심정을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를 일으키는 하나님의 외적 수단이 바로 설교, 개인적인 전도활동, 혹은 인쇄된 매체들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들음이란 것은, 다시 확언합니다만, 오직 하나님께서 수태를 통해서 사람의 심정 가운데에 역사하실 때에야 효력이 있습니다.
수태는 순간적이라는 것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하지만, 각성된 이후에는 상당한 기간을 통해서 계속해서 그 각성이 깊어져 갑니다. 설교, 상담, 독서 등의 외적 매개물들이 계속해서 성령님에 의해서 사용되어 죄인의 영혼 속에 복음의 진리가 깨달아 지게 됩니다.
죄의 가책에 대한 경험으로 돌아갑시다. 이것은 지금까지 잘못 이해되어 왔는데, 그 잘못된 바는 이 가책을, ‘복음의 진리를 밝은 빛 가운데서 비춰주어서 그것을 진리로 깨달을 수 있도록 해주는’ 성령님의 활동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신앙을 드러내 준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정의는 정통적인 정의와 비교하면 훨씬 부족합니다. 정통적인 견해에서는, 죄의 가책을 불신앙들만 아니라 모든 죄들을 드러내는 것으로 봅니다. 죄의 가책은 즉각적으로 혹은 점차적으로 죄의식과 불결함에 대한 의식을 가져오게 되어서 죄인 자신이 하나님 앞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합니다. 자신을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병든 자라고 여길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자신이 고집스러운 자이며, 또한 처벌받아야 할 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단순히 지적으로만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수치감을 갖고 그렇게 느끼게 됩니다.
가책 하에 있는 사람은 처음으로 외적인 행위로서의 죄와 내적인 마음의 죄를 구분할 수 있게 됩니다. 자신 안에 기만, 교만,탐욕, 악의, 이기심, 정욕과 같은 죄들을 보고는 이런 용어들이 자신의 가장 깊은 본성을 드러내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자신의 행동에 대해는 물론이고 말입니다.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의 상태를 부인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변명하거나 방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머리를 흔들면서 이제 말하기를,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겠나이다”(시51편3절)고 하게 됩니다. 자신에게 무언가 개선해 볼 만한 여지가 있다고 여기질 않고, 하나님께서 자비롭게 용서해 주셔서 깨끗하게 씻어주시고 새롭게 해 주지 않으시면 전혀 소망이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죄로부터 움추리게 되고, 그것에서부터 해방되기를 원합니다. 가책은 또한 죄인의 눈을 열어서 죄의 결과들을 보게 해 줍니다. 특별히 자신이 영원한 형벌을 받기에 마땅한 자임에 주목하게 해 줍니다.
이러한 경험의 강도는 사람에 따라서 매우 다양합니다. 얼마씩 다른 형태를 취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강하게 죄의식을 느낄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은 더 나은, 더 깨끗한 삶을 향한 배고픔과 목마름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가책의 타당성은 이런 강도나 형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진정성에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회심의 사례들을 보면, 각성과 가책의 이 “쌍동이” 단계가 순식간에 일어날 수도 있고, 오랜 시간을 끌면서 일어날 수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순절날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한 번의 설교를 듣고 명백하게 자신들의 영적 필요에 대하여 각성이 되고 자신들의 죄에 대해서 가책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십자가사건 전후로 해서 이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에게 수태의 과정이 시작이 되었고, 점차적으로 마음의 불편과 잘못됨을 느끼기 시작해 오고 있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설교가 그들의 심정에 마지막 강타를 먹인 셈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회심에 대한 기록을 보면, 최소한 두 번(어떤 주석가들은 세 번)의 “부르심”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진짜 완전하게 자각하고 죄를 확신케되기 전에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처음 그를 초청하였을 때, 무언가를 그 마음 가운데서 느끼기 시작했을 것임에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가 하던 일을 버리고 주님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곧 그 결정을 포기합니다. 그가 완전히 자신의 죄인됨을 알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누가복음5장8절) 하였던 것은 마지막 “부르심”에서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랜 시간을 걸친 영적 자각과 죄의 가책을 통한 확신의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이 단계의 회심이, 마음 속에 영적 생명의 씨앗이 심겨진 이후에 갑작스럽게 일어나든 지, 아니면 점차적으로 일어나든 지, 주님께서 이런 죄의 가책을 심화시키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외적 매개물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복음전도입니다. 복음의 논증이 불신자들의 깊은 필요와 죄책의 심각함을 계속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분적으로만 각성이 되고 죄의 가책을 느끼고 있는 죄인들이 더욱 깊은 상태로 들어가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규칙적으로 복음전도설교를 해야 할 또 다른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참된 진리를 추구해 오던 사람이 참으로 각성이 되고 가책을 통한 죄인됨의 확신에 이르게 되면, 회개와 믿음의 단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회개와 믿음
회개와 믿음은 구원에 이르는 경험의 세 번째 단계에 있는 쌍둥이 사건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함께 언급하신 것들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마가복음1장15절). 바울 또한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환기시키기를, 자기가 가르쳤던 모든 것의 근본적인 목표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사도행전20장21절)을 가지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마음 속에 생명의 씨앗을 심으시는(수태케하시는) 주님의 목적은, 그래서 각성과 죄의 자각이 일어나게 하시는 목적은, 그 사람을 자유롭고 자발적인 회개와 믿음에 이르게 하기 위함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만약 회심의 역사가 베드로전서에서 말한 것처럼 영적 씨앗을 심으시고, 곤궁함의 재난을 보내시며 죄에 대한 의식을 자극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때문에만 일어나는 것이라면, 회개와 믿음은 더 이상 순전한 것도, 자유의사를 따라 일어난 것도, 그럼으로 타당한 행위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회개와 믿음은 분명히 자유의사를 따라 일어나며 순전하고 타당한 행위임에 분명합니다. 죄 안에 있는 사람은 눈이 멀었고 사단과 자신의 정욕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의지는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 죄악되고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감각도 없고 이성도 없었습니다. 오직 주 예수께서 (누가복음11장의 “강한 자”처럼) 귀신의 요새를 깨부수고, 생명의 씨앗을 그 사람의 마음 속에 심어주심으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스스로의 고집스런 자기의지의 힘과 깊이에서 건져내어 자유롭게 해 주실 때에만, 그는 자유롭게 되어 하나님을 향한 자유로운, 건전하고 도덕적인 선택을 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 속에 빛을 비춰주시고, 그 값진 씨앗을 심어주셨기 때문에, 그가 자신의 필요를 느낄 수가 있고, 수치를 느끼며, 마침내(혹은 당장에) 자유롭게, 기쁨으로, 그리고 몹시 갈급한 심령으로 예수님께 나아가게 됩니다. 회개하는 마음, 신뢰하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당연히 그것은 자유롭고, 값어치있고, 또한 의지적인 선택입니다. 또한 그것은 그의 인생에 자신이 순전히 자유롭게 선택하여 도덕적인 반응을 보였던 첫 번째 순간이기도 합니다.]
알미니안적인 기독교인들은 구원의 서정에 대한 이런 견해가 너무 ‘기계적’이라고 봅니다. 만일 수태가 구원의 과정에 있어서 불가피하게 개입되는 것이라면, 회개와 믿음은 참되게 자유로운 행위가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수태-각성-가책의 과정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활동은, 우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자유롭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단계들을 통해서 우리들은 기만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고집스러운 자신의 의지와 사탄의 권세로부터 해방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서야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자유롭고, 정신을 차린 채로, 열망해 오던 선택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는 이 과정을 시작케 하시고 또한 경영해 오셔서 우리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그리고 의지적으로 주님께 나아가 회개하고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런 일이 있게 되면,그것은 이제 처음으로 자유로운 도덕적 결단을 내려 보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수태가 일어나게 되면, 우리가 언젠가 기어이는 회개하고 믿게 된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런 불가피함이 우리들의 하나님을 향한 절박한 열망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일단의 젊은이들이 절벽 아주 가까운 곳에서 장님놀이를 하고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갑자기 눈이 가려진 녀석이 그룹에서 이탈해서는 자신이 절벽 낭떠러지 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천길 낭떠러지 아래 떨어져서 비참하게 죽을 판입니다. 화들짝 놀란 친구들이 그 녀석을 좇아가 전력을 다해서 고함을 지릅니다. 그 녀석은 그들이 자기를 놀리는 줄 알고 더욱 빨리 달려갑니다. 떨어지기 바로 일보 전에 뒤 좇아가던 친구 한 명이 눈가리개를 낫궈 채었습니다. 순식간에 그 녀석이 바로 눈 앞에 펼쳐진 위험사태를 눈치 채었습니다. 계속 달려가겠습니까? 물론 그러지 않겠지요. 눈가리개가 벗겨져서는 불가피하게 그는 되돌아 설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불가피함이 자유롭게 그리고 의지적으로 그가 선택했다는 사실을 변경시킵니까? 너무나 안심하면서 감사를 할게 뻔합니다.
참된 회개의 본질에 대해서는 엄청난 논쟁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지성의 변화’(a change of mind)를 말하는가 아니면 죄에 대한 참된 슬픔을 포함하는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에 대한 전 인생의 승복을 포함하는가 아니면 그런 것은 이후에나 오는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실제적인 죄들을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통치에 승복하는 것을 믿음에다가 잘못 첨가하는 것이라고 비난하기까지 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회개는 믿음과 상호교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적인 죄에 대하여 부끄러움과 후회,그리고 슬픔을 가지는 것에 대해서는 그 단어를 적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게다가 그리스도의 뜻에 굴복하는 것이 회심 이후의 얼마 뒤에나 있게 되는 별개의 행위로 보기도 합니다.
이런 견해를 취하는 사람들은, 때때로 진지한 복음주의 설교자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복음으로의 요청은 심각하게 불완전해서 많은 비율의 거짓된 회심자들을 낳게 됩니다. 그들은 곧장 넘어져 버리거나 나무나 풀이나 짚(고린도전서3장12절)으로 교회에 출석하게 됩니다. 이 책은 이전의 입장, 더 안전하고 단순히 말해서 더욱 성경적 견해, 곧 회개가 실제적인 개인의 죄에 대한 사무치는 슬픔과 반역적인 삶을 주님의 권위와 통치에 내어맡기는 것으로서 보는 입장을 견지합니다. 다음 장에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때때로 연기시키게 하는 회개와 믿음에 있어서의 가능한 결점들을 제시하겠습니다. 이것들은 영혼의 의사들로서 훈련받고자 하는 이들에게 아주 중요한 점들입니다.
믿음은, 복음 전체에 대한 신앙, 특별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믿음과 갈보리의 십자가에서 행하신 완전히 충분하신 구속사역에 대한 믿음을 의미합니다.
[이제 칭의와 새출생의 단계를 살펴보기 전에 강조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시간을 끌 수 있는 단계는 오직 2단계(자각과 죄의 확신)와 3단계(회개와 믿음) 사이에서 뿐이라는 것입니다. 회개와 믿음이 이루어지면, 모든 것이 순간적입니다. 이때에 목회적 적용이 요구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곧, 그 사람이 참으로 깊히, 그리고 실제적으로 감동을 받고 있다면, 그럼에도 아직 결정적으로 아직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는 앞에서 언급한 두 단계 중의 어느 한쪽에 있습니다. 그는 여태 각성과 죄의 가책을 통한 확신의 과정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자신의 영적 필요를 대단히 생생하게 보고 있다는 분명한 표시들이 있고, 참으로 죄의 가책을 통하여 자신의 죄인됨을 확신하는 것으로 보이면, 그래서 그는 오직 한 점 무언가를 남겨놓고 주저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는 지금 회개와 믿음의 단계에서 문제를 느끼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영적 상담가로서의 우리의 과제는 회개와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아마도 그 참된 진리를 추구하는 자는 갈보리사건이 자신의 모든 죄를 씻어주었다는 것, 그리고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죄에 대하여 깨닫고 있지만, 아직 자신 안에 무언가 선한 것이 있어서 자신을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실 만 할 것이 있다는 생각을 붙잡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베드로가 고기를 한 배 가득 넘치도록 잡게 되는 기적의 사건 전에 회개하는 것을 지체하게 했던 것이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원을 위해서 거의 대부분을 이루셨지만, 실제로 자신이 구원에 이르는 것은 자신이 하는 어떤 일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더욱 심한 것은, 어떤 사람이 불완전한 회개를 할 때입니다. 그런 사람은 참으로 감동을 받아서 회개를 하기는 하지만, 어떤 특별한 죄나 죄악된 습관을 여전히 갖고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들어가려고 할 때, 얼마간 죄악된 야심과 그럴 듯한 옷으로 가장한 습관들을 여전히 가진 채, 곁문을 통해서 들어갈려는 시도로 인해서 우리들의 회개가 잘못 망쳐지게 될 때가 얼마나 자주 있습니까! 참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전심으로 회개해야 하고, 자신의 모든 죄(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죄)에서 돌아설 수 있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상담은 이렇게 진행되어야 합니다. 만약 참된 진리를 추구하는 자가 이 단계에서 머뭇거리고 있다면...우리들은 그 친구가 참된 회개에 이르고 보혈의 공로와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능력만을 전심으로 믿을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즉각적인 회개와 믿음이 참된 것이라면(깊지는 않더라도),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다음 단계의 회심이 뒤따르게 됩니다.]
칭의와 새 출생
신실한 회개와 믿음에 이어서 구원의 네 번째 단계가 곧 시작됩니다. 칭의와 의식적인(conscious) 새 출생의 쌍둥이 사건이 그것인데 이것들은 순간적으로 일어납니다. 물론 전체 모든 과정이 새로운 출생의 과정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의식적인 단계의 출생을 의미합니다. 수태(초기의 중생)를 통해서 임신을 하게 되고 때가 되면 ‘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의식적인 새 출생은 생명이 시작된 바로 그 시작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이며 가시적인 생명의 시작을 말합니다. 그 때 참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명백하게 새로운 본성(a new nature)을 받게 되고 상당한 정도의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칭의란 어떤 특별한 개인이 죄값을 이제는 치룰 것이 없고, 완전히 의롭게 된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모든 축복들을 이제 받을 자격이 있다고 하는, 하늘에서의 선언입니다. 칭의가 하늘에서 선포될 때, 지상에서 회심한 사람에게는 그가 새로워 졌음을 나타내는 의식적이면서 가시적인 증표가 주어집니다. 그래서 구원의 표적을 발견할 수 있고 새로운 성품이 그의 생활 속에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칭의와 동시적으로 이제 참된 진리를 추구해 오던 이 사람은 새롭게 출생하게 됩니다.(마음 속에 생명의 씨앗이 심겨지는) 수태의 과정이 처음으로 영혼을 동요시켜서 영적 필요에 자각하게 하고 죄의가책을 통하여 자신이 죄인됨을 확신케 되어서 자유롭게 회개하며 오직 예수만을 믿게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즉각적으로 이제 주님께서는 이 죄인을 하늘 법정에서 의롭다고 칭하시고, 그 순간 눈에 보이는 새로운 출생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제 참 추구자는 외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그의 눈이 열려서 완전히 (영적 세계를) 지각하고 봅니다. 그의 귀는 듣고, 그의 목소리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합니다. 그의 모든 영적 능력은 의식적인 삶 속에서 꽃을 피기 시작하고, 그의 형제들과 자매들을 믿음의 권속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이제 그는 완전히 새롭게 출생한 것입니다. 새로운 동기와 욕구가 지배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5장17절)입니다.]
구원의 확신
의식적인 출생과 더불어서 구원의 다섯 번째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구원의 확신의 단계이며, 성령께서 인치시는 단계입니다. 보통 이 단계는 네 번째 단계와 동시적일 수도 있지만, 약간 뒤로 미뤄 지기도 합니다. 에베소서1장13절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런 인치심은 하늘의 확실성을 받는 것으로 기술됩니다. 바울의 마음 속에 있는 인침은 의심할 것 없이 고대동양사회에서 사용되던, 왕이나 귀족이 자신의 선포나 편지의 진정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사용되던 것입니다. 새로운 회심자는 성령의 인치심을 자신 안에서 발견해 볼 수 있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그것을 또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새로운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부록2,“회심의 표”가 사역자들에게 참된 복음을 찾는 자들이 구원의 확신을 분별하도록 돕는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이 다섯 개의 단계를 통해서 성령님께서 설교자들과 전도하는 신자들이 참된 복음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게 하십니다. 그것을 로마서 10장14-15절, 그리고 17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의 영혼 속에 수태하시는 것은 복음이 선포될 때입니다. 죄인들에게 전해진 말씀을 통해서 영적인 각성에 이르게 되고 죄책을 통하여 죄인됨을 확신하게 됩니다. 복음의 논증과 간언, 그리고 강청함이 외적인 도구들입니다. 설교자가 이런 사역을 감당하게 될 때마다 하나님의 도구가 된다는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죄인은 설교자와 전도하는 신자들로부터 회개와 믿음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고, 넘어질 때마다 은혜의 보좌로 다시 나아가도록 권면하고 강청하는 사람은 다시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참진리를 찾는 죄인은 확실하게 새로워지고, 새로운 본성 속에서 환하게 빛나게 될 때, 자신 속에서 있었던,그리고 계속되는 은혜의 역사를 인식하게 되는 것도 종종 하나님의 대변자를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지체될 수 있는 단계들
주님께서 한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실 때, 외과의사가 골절수술을 할 때처럼 그 사람을 회심시키지 않습니다. 외과수술의 경우 환자가 마취에서 깨어나 발견하는 것은, 본인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으면서도 이미 수술이 끝나버렸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수술과정은 전적으로 다릅니다. 이 과정에서는 죄인이 완전히 깨어있는 의식을 가지고 참여하게 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그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자기의 의지를 녹이실 때, 그는 분명하게 가르침을 받아서 지적으로 확신을 하게 되어 복음의 약속들을 갈망하면서 열정적으로 껴안게 됩니다. 자기자신을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에 전적으로 맡기면서 말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다섯 단계의 이 정신적 모델은 참된 진리를 찾아나선 사람들이 점진적으로 죄인됨의 확신에 이르게 되는 동안 지연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때로는 “내적인 투쟁과 바깥으로부터의 두려움”을 겪으면서, 혹은 잘못된 회개로 시간을 허비하기도 합니다. 두 단계는 의심할 바 없이 즉각적이고, 세 단계는 지체될 수도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 - 수태 혹은 초기중생의 단계 - 는 성령님의 순간적인 행위이십니다. 네 번째 단계 - 칭의와 함께 의식적이며 가시적인 새생명이 주어지는 단계 -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단계들 사이에 두 번째, 세 번째 단계는 지체되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각성되어지고 죄의 가책을 통한 죄인됨의 확신에 이르게 되는 경험은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회개와 믿음을 표현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구원에 있어서 이렇게 지체가 되는 것은 죄인에게 달려 있는 문제입니다. 만일 사정이 이렇지 않다면, 주님께서 하신,“구하라-찾으라-두드리라”는 약속은, 그 즉각성을 나타내는 어조를 고려할 때, 아무런 근거도 없는 셈입니다. 다섯 번째의 구원의 확신에 이르는 단계는 또한 저지될 수가 있겠는데,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계속적으로 권면해주는 활동이 필요합니다.
실제적인 결론
첫째, 실제적인 견지에서 살펴볼 때, 우리의 복음전도설교를 이런 지체될 수 있는 단계에 있는 사람들을 흔들어 깨우고 심화되도록 전개해야 합니다.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 나의 설교들이 이들에게 적절한 내용들인가? 개인적으로 상담하고 있는 사람이 어떤 단계에 있는 사람인 지를 관찰하고 있는가?
둘째, 참진리를 찾고 있는 사람이 점진적으로 깊어진 자발성으로 회개하고 믿는 것이 하나님께 너무나 값진 것임을 이 모델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 사람 스스로, 복음에 대하여 자유로우면서 개인적이고 참된 반응을 하기 전에 반응을 보이도록 서두르거나 그것을 선취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종류의 감정적인 조작을 통해서 그 사람이 믿음을 고백하도록 조장하는 것은, 성령님께서 그 사람의 마음 속에 역사하셔서 산출하고 계시는 참된 반응을 망쳐놓고 있는 셈입니다.
셋째, 세 번째 회심의 단계에서 참진리를 추구하는 자가 잘못된 인상을 가지도록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께서 정하신 때가 되면 자기를 회심시키실 것이라는 근거에서 지금 개인적인 반응을 보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 말입니다. 이때 복음의 명령, 훈계, 약속, 그리고 권면 등을 복음전도설교에서 다양하게 구사되어야 합니다. 지금 당장, 자비를 구하면서,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 것, 그리고 심령이 애이는 회개, 믿음, 그리고 승복함 가운데서 그 분에게 나아가는 것이 필요함을 강조해야 합니다. 복음전도설교는 결코 밀어부치지도, 강제하지도, 조작하지도 않습니다. 탄원하고 설복하며 언제나 인격적이면서 자발적인 반응을 보이도록 강청합니다.
다음 장에서는 회개와 믿음의 단계에 있어서 목회적인 의미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구원을 구하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 주어야 하는 지를 강조하게 될 것입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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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Horace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2.07.30 각주가 함께 따라와 붙지 않는데, 방법을 알려주시는 분이 계신다면 각주까지 붙은 것으로 올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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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Horace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2.07.30 수태로부터 출산에 이르는 과정이 두 번의 중생의 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회적인 사건이되 그 단회적 사건 안에 과정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밤하늘의 유성이 긴꼬리를 내면서 사라질 때 그 첫순간과 끝이 있음을 강조한다고 해서 두 개의 유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이 유성만을 말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유성은 긴꼬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는 사실, 이것이 연속(장)적 중생론이 강조합니다. 럭비공처럼 타원형이어서 타원형의 앞부분과 뒷부분이 길게 늘어져 있는 것, 곧 elongated 되어 있어서 기간이나 과정이라고 불려질 수 있는 유형으로 중생이 단회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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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Horace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2.07.30 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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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마우스 작성시간 12.07.30 홀리죠이님이 왜 연중론이 목회자들과 전도자들에게 그토록 강조하며 필요하다고 하며 씨름하는지를 조금씩 이해할 수 있을 것같습니다.
이런 내용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정말 큰 차이를 빚어낼 것이라 하신 말씀에 동감합니다.
개인적으로 영혼의 의사가 되는 훈련을 받을 필요가 많은 것 같습니다 !
주님, 너무나도 귀한 한 영혼을 살려내기 위해 주의 손에 붙들린 의의 병기가 되게 하옵소서 -
답댓글 작성자마우스 작성시간 12.07.30 제가 칭찬에 약합니다~
밥이라도사드리이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