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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8번질문) 베드로가 부인하기 전 닭이 과연 몇 번 울었는가?(답변완료)

작성자권정희|작성시간04.02.06|조회수1,098 목록 댓글 0

질문8.)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때 닭이 몇 번 울었는지요?  마태기사와 마가 기사의 차이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밤 닭 울기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마26:34))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막14:30))

 

위의 질문은 재미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큰 난제는 아니고, 결코 하나님의 말씀되는 성경의 권위를 저해시키는 모순도 결코 아닙니다. 상식에 기초해서, 성경의 기록과정과 인간의 인식기능에 대해서 이해하면 쉽게 이해됩니다.

 

먼저, 성경의 기록과정에 대해서는 10번질문에 대한 답변을 참고하십시오. 그곳을 8번 이 문제에 적용해서 닭이 과연 몇번 울었느냐는 문제를 살펴보면, 이 문제의 특이성이 드러납니다. 먼저, 마태가 기록한 '오늘 밤 닭 울기 전에'라는 구절을 읽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닭이 한 번 울었겠구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마태는 '한 번' 울었다고 하지 않고, '닭 울기 전'에라고 합니다. 그런 표현에 '한 번 울었겠다'고 생각하는 그 판단을 마태의 글 속에 넣어서 읽는 것을 'eisgesis'라고 합니다. 본문에 있는 것을 있는 대로 읽는 'exegesis'와 대조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많은 의문들이 바로 이 eisgesis때문에 옵니다.

 

이런 점을 지적하고 문제자체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이 발화를 직접 들은 사람은 마태입니다. 그리고 마가는 간접적으로 들었을 것입니다. 마가의 기록이 신빙성이 덜하다는 것이 아님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마가는 닭이 우는 사건 이후에 이 예수님의 예언사건에 대해서 들었을 것이고, 마태는 이 사건, 곧 닭이 우는 사건 이전에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언사건을 기록할 때에 마태와 마가의 관심은, 결코, 닭이 몇 번 울었느냐는 것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베드로의 배신행위에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이것이 초대교회에 미쳤던 영향이 어떠하였을까를 생각해보는 것은 재미있는 과제일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학자들이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베드로가 배신하기 전에 '닭이 울었다'는 그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서 베드로의 배신행위를 기록했고, 마가는, 닭이 운 사건 그 이후에 기록하면서, 실제로 닭이 몇번 울었을 때에 베드로가 배신했는가에 대해서 더욱 인상적인 전승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설명은, 글리슨 아처의 '성경난제백과사전'을 보면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글리슨 아처가 주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 사건 자체,곧 닭이 구체적으로 몇 번 울었느냐는 문제입니다.

 

저는, 닭이 두 번 울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마가의 기록에서 분명히 '닭이 두 번 울기 전에'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예언의 성취인 마가복음 14장57절을 보면, 마가는 '닭이 곧 두번째 울더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결코 마태의 기록인 '닭이 곧 울더라'는 표현과 모순이 되지 않습니다. '닭이 울었다'는 사실에 촛점을 마춘 마태가 '닭이 곧 울더라'고 이 예언의 성취를 기록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럽습니다. 그리고 닭이 우는 것은 한 번만 우는 것이 아니라, 어느 닭이 한 번 울면 연달아 다른 닭들도 따라 우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그것을 고려하신다면, '닭이 운다'는 그 사실 자체에 주목한 마태의 관찰과 기록이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재밌는 질문이 발생합니다. 그 닭이 울었던 싯점이 도대체 언제냐는 것(팔레스타인의 2000년 전의 닭의 습성과 문화를 고려해야 답이 나옵니다- 이 질문은 여러분에게 맡깁니다)과, 베드로가 닭이 첫번째 울었을 때, 그 닭소리를 들었을까 아니면 듣지 못했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저는 인간의 인식기능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복음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위해서 굉장히 필요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이근호목사는 이 점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각설하고, 베드로는, 그 첫번째 닭소리를 한 편으로는 듣고, 다른 한편으로는 듣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저의 견해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인식의 기능을 자세히 관찰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곧, 첫번째 닭소리를 듣기는 들었는데, 베드로는 그것을 잠재식역의 청각기능으로 듣고는 그것을 무의식 아래에 억눌러 버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되(롬1:21) 하나님을 없다고 부인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입니다. 그러다가, 두번째 우는 닭소리를 듣고는 예수님의 예언말씀을 기억하고는, 통곡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설명은 상식만 가지면, 설명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상식만 갖고 복음의 비밀과 신비를 풀 수가 있다고 여기는 말이 아닙니다. 복음은 신비와 그 본질은,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은혜를 허락하셔야만 가능해집니다. 아무리 이런 성경의 '난제'(사실 난제도 아니지만)들을 다 풀어낸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그 복음의 본질의 변두리에도 못갑니다. 이것에 철저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성령님께서 역사하실  때, 우리의 인식의 기능(곧 베드로의 인식의 기능을 통해서 닭소리를 듣게 되는 것처럼)과 정상적인 상식, 그리고 그 어법을 사용하시고, 그것들을 통해서, 그 놀라운 신비의 복음, 복음의 신묘함을 깨우치고, 또한 그 복음의 능력에 의해서 우리로 말미암아 생활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것이 참된 은혜된 삶이지요.  그 주님을 오늘도 찬양합니다. 베드로를 회개시키셨던 주님, 그 주님께서 우리들을 오늘도 회개시키시기를 기도합니다.

 

권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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