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ll님에게
좋은 질문을 연달아 올려주시니 감사하군요. 진지한 님의 추구에 우리 주님의 빛이 더하여지심을 기원합니다.
더우기나 이곳 카페에 "기도중에" 오셨다니...기도 속에 복된 교제가 이어지를 소망합니다.
이번에 올려주신 질문을 보면서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무엇보다도, 님께서는 Navigator라는 단체를 통해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다른 사람의 경우에는 그곳 단체를 통해서 배울 것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님께서는 이미 그 단체와의 심리적인 거리감을 님의 질문 속에서 많이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그 단체를 통해서 더 이상의 도움은 받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로이드존스목사의 하박국강해서를 거부한 것은, 네비의 공식적인 입장이라기 보다는 님께서 교제하시는 그 선교사님과 그 형제의 개인적인 견해일 것입니다. 네비가 그렇게 배타적이지 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보다 생산적으로 님의 시간을 활용하고 배울 수 있는 곳을 찾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저로서는 국내사정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권할 수는 없겠습니다만....지역교회에서 배우고 교제하며 봉사하는 것을 무시하지 않은 어떤 단체를 찾으심이 좋을 것이라는 말씀만 드려놓고 싶습니다.
그런 단체를 통해서 "기쁨"을 누리시길^^
각설하고,
질문에 대한 답변에 들어가서...
말씀하신 사무엘상21장을 해석할 때에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하진승형제의 "하나님의 말씀은"이라는 책에서 주장하는 식의 해석은 위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말씀의 중요성을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무시하는 식으로 강조하게 된다면 큰 잘못입니다.
하진승형제는, 사무엘상21장 자체의 맥락과 표현들도 무시하고 있고, 이 삼상21장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성경 곧 시편34편을 무시하면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종교개혁의 가장 기본적인 성경해석을 무시한 셈입니다.
먼저, 삼상21장 본문을 해석할 때에 우리는 다윗의 나이를 고려해야 합니다. "침을 수염에 흘리매"라는 말을 듣고는 언듯 그가 중년 이상, 혹은 노년때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신앙의 경륜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죽음의 위기라 하더라도 "미친 체"할 수 있단 말인가 의심하게 됩니다. 그런 의심이 이런 본문해석을 왜곡되게 합니다.
앞뒤 문맥을 살펴보시면 분명히 아시겠지만, 지금 다윗은 헤브론에서 왕위로 등극하기 전입니다. 곧 30세가 되기도 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총애를 받던 사울로부터 시기를 받아서 쫓겨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이해하려고 할 때에 다윗의 심정 속으로 들어가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한 번 시도해 보십시오(이것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은 묵상이 정말로 필요합니다. 님께서 죽음을 당할 것 같은 그런 위경의 때가 있었습니까? 그런 경우가 없었다면, 그리고 그런 경우를 고려하지 않으면서, 이 본문의 다윗을 판단하려고 하는 것은, 다윗의 행동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일단 그런 위기의 상황, 죽음이 바로 눈 앞에서 혀를 낼름거리면서 자신을 삼키려고 하는 상황에서,
다윗이 하였을 법한 기도가 무엇이었겠습니까?
"아이고 하나님, 나 죽습니다. 나 좀 살려주이소"일 것입니다.
제 같으면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아니, 오줌을 질질 흘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오줌 질질흘렸다고 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저보다도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저보다도 용감하고 저보다도 지혜롭고 저보다도 기지가 넘쳤다는 것입니다.
시편34편을 보면,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4절) 합니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6절)이라고 합니다. "의인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저희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17절)이라고 합니다.
이 시편의 표현들은 다윗이 아기스왕 앞에서 "침을 수염에 흘리며 미친 척을 할때"에 그가 속으로는 "기도"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의 겉모습"이 이렇게 '미친척"하는 위선적이고 가장적일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는 것은, 인간의 실존의 모습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처사입니다.
인간은 사선을 넘는 위기의 "한 순간"에 "천년"을 넘깁니다. 바로 어떤 "한 순간"인데도 "영원"앞에 서는 것 같은 "순간"이 있습니다. "한 순간"인데도, "억만겁"의 세월이 지나가 버린 것 같습니다.
다윗이 "미친 척"하는 바로 그 "순간"에 다윗은 "영원의 하나님"앞에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미친 척하는 것이 기도였다는 말이 아닙니다. 미친 척하는 순간적인 그 행동과 동시에 속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위경의 기도를 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붙잡고 그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더우기 이 시편의 구절 중에 메시야시편으로 알려져 있는 구절(20절)이 있다는 것을 알면, 다윗의 이 때의 심정을 더욱 우리는 신중하게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고려할 때 우리들에게 떠오를 수 있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죽음의 위기 앞에서, 다윗처럼 이렇게 "미친 척"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장부처럼" 그 죽음을 당당하게 맡아들여야 하는 것 아닐까? 이전의 순교자들이 그렇게 죽어가지 않았더란 말인가? 다니엘의 세친구가 그렇게 하지 않았던가?
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기를 소망하고 기대하고 기원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단지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면서 그런 죽음의 위기 앞에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도록 힘을 달라고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신앙의 훈련을 해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은혜의 힘으로 우리는 우리의 죽음 앞에서도 당당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오늘 이 삼상21장의 다윗을 책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때쯤에야 우리는 다윗을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성경은 헬라신화속의 영웅들을 찬양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소크라테스같이 죽음을 당당하게 받아들인 것이 아니고 고뇌속에서 받아들이셨습니다.
신앙의 영웅은 죽음의 고통과 절망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 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부르짖습니다. 다윗이 그러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진정한 영웅이 되는 셈입니다.
저의 글이 도움이 될 수 있기를 ^^
홀리 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