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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김경래교수의 비약, 너무 심하다!

작성자holyjoy|작성시간06.08.18|조회수219 목록 댓글 3

<하나로님>

 

제가 문법적인 해석으로는 아직 부족하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시간을 두고 연구해가기로 하고, 아무래도 저의 짧은 배움으로는 부족하다 싶어서,  저의 견해와 유사한 분들의 글들을 찾아서 인용해 보고자 합니다그래서, 글들이 모아지면, 다시 그것들을 정리해서 핵심쟁점으로 접근해 가고자 합니다.

아마도, 그것이 이미 다루어졌던 것들에 대한 중복성과 시행착오를 줄일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니나님이 여러차례 김경래교수님이란 분을 언급하셔서 인터넷으로 자료를 찾다가 발견되어, 현재 토론과 관련된 부분만 발췌해 봅니다.  

 

참조 : http://www.inchristjesus.net/articles/creation2.html
[
김경래 교수는 총신대와 이스라엘 Institute of Holy Land Studies(M.A.)를 졸업하고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에서 사본학으로 박사학위( Ph.D.)를 받았다. 지금은 전주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이 글은 1996 7월호 월간 그 말씀(p.190-196)에 실린 것이다

 

 

<홀리죠이>

 

솔직해서 고맙습니다. 아래에 김경래교수의 견해에 대한 저의 비판을 올려놓습니다. 김경래교수님에게 개인적의 어떤 감정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님을 주지하시기 바랍니다. 중간중간에 저의 소감을 표현한 부분들은 결코 그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의 표현이 아님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김경래교수>

 


1. 하나님의 아들들(6:1∼4)

창세기 61∼4절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학자들간에 쉽게 일치점을 찾지 못하고 신학계에 구구한 해석사를 남긴 성경 난제 중의 난제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제까지 전해 내려오는 여러 해석 중 어느 하나가 분명히 맞는 해석이라면, 이 구절은 하나의 난제라기보다는, 오히려 많은 성경학자들의 그릇된 신학적 사고방식을 반증해주는 사실이 아닐까?

필자는 여러 가지 견해를 이 지면에 소개하며 그것들을 하나하나 옹호 내지는 반박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는다. 우리 주변에는 그러한 류의 서적이 이미 충분히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오히려 본문에 대한 철저한 고찰을 통하여 필자가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입장을 나름대로 정리하며 설명하고자 한다. 아마도 다른 훌륭한 학자들의 해석을 재현하는 내용도 없지 않아 있겠으나, 국내의 독자들에게 어느 정도 도움이 되리라는 확신으로 이 문제를 논하고자 한다.

 

우선 1절의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났다"라는 문장에서 우리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대하게 된다. 이 낱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 '하아담'은 정관사 ''와 명사형 '아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문장 끝에서 '하아담'을 복수형 대명사 어미로 받는 것으로 보아('그들에게서'-히브리어로 '라헴'), 이것은 최초의 사람인 '아담'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요, 아담으로 시작되는 모든 '인류'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딸들'과 역시 같은 이들을 가리키는 2, 4절의 '사람의 딸들'('브노트 하아담')은 인류, 곧 인간 사회에서 태어나는 '딸들'을 가리킴이 너무나 분명하다.

 

 

<김경래교수>

 

2절과 4절에는 이들 '사람의 딸들'의 상대방이 되는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들은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 이것이 만일 인간 사회 안에서 늘 있는 선남선녀의 혼인에 관한 언급이라면, 이에 대하여 조물주께서 무언가 언짢은 반응을 보이시고(3), 또 이러한 혼인관계로 유별난 사람들이 태어난다는 것은(4) 아무래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설사 경건한 가문의 아들과 불경건한 집안의 여자, 또는 귀족층 남자와 서민층 여자의 결합이라 하더라도 이 두 가지의 결과적 사실을 만족하게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홀리죠이>

 

김경래교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는 구절을, “인간 사회 안에서 늘 있는 선남선녀의 혼인에 관한 것이라고 가정한다. 이미 이런 가정에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들> <사람>으로 보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곳에서의 결혼이 인간 사회 안에서 늘 있는 선남선녀의 혼인으로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살펴 보지 않은 채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이라는 의견을 기각해 버린다.

 

참으로 성급한 논리이다. 그리고 위험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왜 성급한가? 살펴보자. 그리고 그 위험성도 지적하게 될 것이다.

 

만일 이곳 창세기6장에서의 결혼이 인간 사회 안에서 늘 있는 선남선녀의 혼인이라고 한다면(김경래교수도 만일이라면서 가정하고 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언쨚게 보실 이유가 없다. 하나님께서 이미 선남선녀들의 결혼을 축복하지 않으셨던가!(참고, 2). 그리고 유별난 사람들이 태어날 이유도 없다.

 

하지만,

 

하지만,

 

과연, 이 창세기6장의 결혼이 인간 사회 안에서 늘 있는 선남선녀의 혼인인가? 바로 노아의 홍수심판 바로 직전에 있는 타락한 인간모습이 아니던가? 그리고 이런 타락한 인간모습에 대해서 우리 주님께서 말하기를 인자가 올 때에도 역시 그러하리라고 하시면서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17:27)라고 하지 않으셨던가? 예수님께서 말하시길, “천사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아내를 삼았다고 하셨던가? 그것이 심판의 이유라고 하셨단 말인가?

 

창세기6장에 나오는 결혼은 바로 홍수심판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그렇다면 그 결혼은, 하나님께서 앞서 축복하셨던 그런 결혼(2)과는 다른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논리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심판하셔야 할 그런 종류의 결혼이었다. 그렇다면, 이 결혼이 천사들과 사람의 결혼이라고 비약해야 하는가? 그것이 바로 김경래교수의 논리이지, 참으로 비약이 심해도 너무 심하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언쨚은반응을 하시게 되는 일이 천사들과 사람들의 결합이기만 한가? 다른 이유는 없는가? 하나님께서 언쨚은 반응들을 보이시는 여러 사례들을 김경래교수는 충분히 살펴보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례연구들은 없는 채도, 비약을 하고 있다. 엄청난 비약이다. 하나님께서 사람과 사람이 성적으로 결합해서 언쨚은반응을 보이시는 사례가 전혀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보라, 성경을. 얼마나 많은 혼잡된 결혼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불쾌히 여기시고 또한 언쨚게 여기셨던가? 발람의 교훈을 좇았던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이 무엇이었던가? 도대체 김경래교수는 발람의 교훈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기나 하는 것일까? 바로 이방인과 더불어 혼인을 한 혼합된 사람들끼리의 혼인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레위기에 나오는 잘못된 성관계와 혼인들을 나열하신 뒤에 그런 죄를 지으면 그 땅이 그 백성들을 토하여 내어버리겠다고 하신 경고들에 대해서 과연 김경래교수가 검토해 보았더란 말인가?

 

그의 논리가 비약해도 너무나 비약하고 있음을 언급하는 중이다.

 

한 마디만 더 보태자.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결혼관계를 통해서 잡종들이 발생할 수 있는 경우들이 있다는 것은 이미 유전학적인 기초상식이다. 영국왕가의 결혼계통도를 보면 이것은 충분히 검증된다. 조오지4세가 왜 정신병을 앓다가 미친 채로 죽었는가? 파키스탄에 있는 난장이유전병은 왜 생겨나는가? 바로 사촌들끼리 혼인관계를 맺는 그들의 관습에 의해서 생겨난다고 하지 않는가? 난장이나 거인의 탄생이 반드시 잘못된 혼인관계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어떤 경우에는 그런 잘못된 결혼, 혼합된 결혼에 의해서 생겨날 수 있는 가능성은 왜 전적으로 배제되어야 하는가?

 

김경래교수의 비약에 주의하지 않는다면, 그저 그의 교수됨이나 박사됨에 현혹될 것이다. 교수가 말하는 것이라고 해서 다 옳은 것도 아니고, ‘박사라고 해서 다 옳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 글을 읽어가고 있는 바로 나 자신의 냉엄한 판단이 중요할 뿐이다.

 

홀리죠이의 말이 옳은가? 바로 내가 판단해야 할 일이다. 그것을 남에게 미루지 말라.

하나님께서 그 모든 권위를 물리치고 바로 나에게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지성을 주셨다. 그리고 말씀을 주셨다. 그것 뿐이다. 우리가 의지할 것은..

 

<김경래교수>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브네하엘로힘')이란 히브리어 표현은 여기 말고 유일하게 욥기에 또다시 등장한다(1:6, 2:1, 38:7). 욥기에서 우리가 문맥을 통하여 분명히 아는 대로, 이 표현은 우리 인간이 아닌 '하늘의 영적인 존재', 소위 '천사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미 언급한 바대로 창세기 6 1∼4절의 본문에서 이들 '하나님의 아들들'은 인간 세상의 남자를 가리키기에는 곤란한 점이 많으므로 자연히 누군가 '인간 사회' 밖의 존재이어야만 하겠고, 아울러 욥기의 도움을 얻어 얼마든지 '천사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홀리죠이>

 

바로 이 글에서도 김경래 교수의 성급함이 드러난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브네 하 엘로힘)이라는 표현이 창6장과 욥기에서만 등장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정말 기존의 해석과 견해가 어떠 한 지를 알고 그것에 반대되는 견해를 개진하려면 좀 더 철저하게 살펴보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어떻게 이런 글이 목사들이 참고한다고 알려져 있는 그 말씀이라는 참고잡지에 실릴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 글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고 하니,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다. 

 

브네 하엘로힘”(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구약성경에 창세기6장과 욥기에서만 등장한다고 하는 것은, 구약성경연구를 얼마나 피상적으로 하고 산술계산적으로 하는 지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견해이다.

 

구약성경의 다른 곳을 예로 들라면, 호세아111절을 살펴보라. 여기에 보면, “브네 엘”(개역성경에는 하나님의 자녀로 번역)이라는 말이 나온다. “엘로힘의 관계를 충분히 아는 사람이라면, “브네 하엘로힘브네 엘의 동가적(同價的)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호세아111절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자녀”, 브네 엘이 사람을 지칭하는지 천사를 지칭하는지 살펴야 할 것이다. 하나로님이 살펴보시기 바란다.

 

또한 신명기325, 시편7315절도 참고하시기 바란다. 

 

김경래교수의 문제점은, 바로 <브네 하 엘로힘>이라는 기술적인 표현에만 집착함으로 인하여, 그 용례를 욥기에만 제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바로 신32:5,73:15, 1:11, 11:1 등에 등장하는 유사표현들을 충분히 상고했어야 했다. 그리고 시편82:1에 나오는 엘로힘”(한글개역성경에서는 재판장이라고 번역)이란 단어와 브네 엘룐”(한글개역성경에서는 지존자의 아들들이라고 번역)이라는 단어를 좀 더 숙고했어야 했다. 특별히 시편82편의 표현들은 예수님께서 요한복음1033절에서 자신의 신성을 증명하시기 위하여 사람들과 대조하고 있는 문맥을 참고하지 않으면, 잘못된 해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고려했어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 같다. 

 

김경래교수의 논지는, “브네 하 엘로힘과 동가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표현들을 고려하지 않은 채로 산술적으로 기계적으로 그 표현들이 욥기에만 나오고 그 욥기의 표현이 천사들을 지칭하기 때문에, 고로, 6장의 브네 하엘로힘천사를 나타낸다는 식으로 비약하고 있다.

 

너무나 성급한 비약인 셈이다. 이것은 김경래교수가 필자가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홀리죠이로서는 "전혀 옳지 않은 생각이요 입장"이다. 

 

<김경래교수>

 

언어 표현 자체와 전체적 문맥을 통하여 이런 식의 유추는 가능하지만, 다만 이러한 이해에 대한 신학적 걸림돌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이 해석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 학계의 현실이라고 하겠다. 특별히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 22:30, 12:25) 때문에 학자들은 선뜻 상기한 해석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은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누가복음 20 34∼36절에서는 동일한 내용의 말씀이 좀더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세상사람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지만 저 세상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는다. 그들은 천사와 같아서 이제는 죽지도 않는다. 그들은 부활의 아들들이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예수께서 부활 후의 사람들을 가리켜 '천사와 같다'고 하신 것은 그들과 천사들이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기' 때문이 아니라, 누가복음에서 밝히 보는 대로, '더 이상 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영광의 부활에 참여한 자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부른 것 역시, '하나님의 아들들'인 천사와 같게 변한 그들의 새로운 신분 때문이 아닐까?.

 

<홀리죠이>

 

이 글에서도 김경래교수의 논리가 얼마나 비약이 얼마나 심한지 관찰해 볼 수 있다. 이 글에서 그는 두가지 큰 비약을 하고 있다.

 

첫째, 그는, 예수님의 말씀 중에 부활 후의 사람들천사와 같다고 하신 것을,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 가기때문이 아니라, 천사들이 더 이상 죽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주장이 엄청난 논리상의 비약이 되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상황과 맥락을 전혀 고려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어떤 상황에서 이 말씀을 하시는가?  마태복음22장이나, 마가복음 12장 모두가 바로 결혼문제에 대한 질문을 받은 뒤에하시는 말씀이다. 이런 맥락 중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곧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지금 천사들이 죽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고 계시는가? 아니다! 바로 천사들이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간다는 것을 주장하시면서, 부활 후의 사람들이 바로 그런 천사들,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가는그런 천사들과 같다고 하시는 것이다.

 

김경래교수가 예수님께서 오해함이 아니냐하셨던 그들을 향하신 그 책망에서 벗어날 것 같지가 않다는 것이 홀리죠이의 소감이다..

 

둘째, 더욱 놀라운 비약은, 그의 그리고 이들 영광의 부활에 참여한 자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부른 것 역시, '하나님의 아들들'인 천사와 같게 변한 그들의 새로운 신분 때문이 아닐까?”라는 말 속에 있다. 분명히 그는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들로 불리워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부활에 참여한 어떤 사람들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사람들천사들이라는 식의 논리를 전개하는 것이다. 부활 후의 사람들이 천사들처럼 변한다는 것을, 창세기6장과 관련시켜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표현이 천사들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사람들이 천사들처럼 변한다는 성경적 사실에 근거해서 (그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만 사람들이 천사들이다는 식의 결론으로 비약하고 있는 것이다. 엄청난 비약인 셈이다.

 

이런 논리적 비약은, “사람들이 하나님처럼 변화하게 될 것이다는 성경적 사실(, 13:1-3)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이다는 식의 결론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엄청난 비약이고, 위험한 비약이 되는 셈이다.

 

그런 논리를 비판하는 홀리죠이의 의도를 간파하기 바란다.

 

사람은 사람이다. 천사처럼 변화되어도 사람이다. 하나님처럼 변화가 된다고 하더라도 사람이다. 사람이 천사가 되고, 사람이 하나님이 된다고 하는 것은 (조심해서 표현하는 경우 이해될 수는 있다고 하더라도) 참으로 조심해서 사용해야 할 것이고, 또한 참으로 조심해서 주장해야 할 것이다. 그런 조심성이 김경래교수의 윗주장에는 결여되어 있음이 한탄스러울 뿐이다.

 

<김경래교수>

 

다시 창세기 6장으로 돌아와, 칠십인역의 알렉산드리아 사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표현에 대하여 '하나님의 천사들'이라는 번역을 발견하게 된다.

 

과거 유대인들의 이러한 해석은 칠십인역말고도 에녹서, 요세푸스 등을 통하여 찾아볼 수 있다. 아울러 신약성경의 몇몇 구절도 창세기 6 1∼4절의 해석에 대하여 빛을 던져준다.

 

<홀리죠이>

 

말이 나온 김에 역본이야기 좀 하자. 칠십인역은 모세가 성경을 기록한 뒤에 천 년 이상이 지난 뒤의 번역이다. 또한 알렉산드리아의 종교, 곧 이집트종교의 영향 하에서 번역된 것이다. 이집트 종교가 어떤 주장들을 하는 지에 대해서는 여기서 늘어놓지 않겠다. 관심이 있는 분들은 그런 관점에서 칠십인역을 인용하면서 자기 주장을 펴나갈 때에 조심해야 할 것만 지적해 놓는다.

 

그리고 김경래교수가 언급하고 있는 에녹서와 요세푸스의 주장을 검토해 보자.

 

먼저, 요세푸스의 이 부분에 대한 주장은 이렇다: “Now this posterity of Seth…..now showed by their actions a double degree of wickedness; whereby they made God to be their enemy, for many angels of God accompanied with women, and begat sons that proved unjust….”(The Antiquities of the Jews, ch.3. 72-73). 여기서 요세푸는 셋의 후손들이 하나님을 자기들의 원수가 되었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for 이하에 설명하는데, 그 설명이 논리적으로 전혀 이해가 되지 않도록 설명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셋의 후손이 하나님을 자기들의 원수가 되도록 할 짓들을 한 것이 그 이유가 되어야 하는데, 요세푸스는 그 이유로서 하나님의 천사들이 여자들과 결합해서 자녀들을 낳았다고 한다. 셋의 후손들이 하나님을 원수삼은 것과 하나님의 천사들이 여자들과 결합하여 자녀들을 낳은 것이 도대체 어떻게 연결되는가? 셋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천사들이라고 여길 수 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요세푸스는, 정말로 이상한 설명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 이상한 설명을 김경래교수는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는 것을 보니, 참으로 이상한 노릇이다.

 

에녹서에 대해서 살펴보자. 에녹서에 대한 구체적인 평가는 뒤로 미룬다. 에녹서의 한 부분을 유다가 인용(유다서14-16/에녹서1:9)하고 있기 때문에, 이 에녹서의 권위에 대해서 평가하는 것에 대해서 입장이 구구하기 때문이다. 단지, 실제로 이 에녹서를 읽어보면, 얼마나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이 그곳에 삽입되어 있는 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에녹서는 경건치 못한 자들에 대한 경계를 위하여 기록된 일종의 상상과 추측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경계에 대한 권면과 교훈은 옳은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라도 그 모든 스토리들을 참된 역사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마치, 공자의 교훈을 우리가 옳은 것으로 인정하는 대목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의 주장을 모두 다 옳은 것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과도 같습니다.

 

특별히 유다의 에녹서에 대한 해석에 주목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유다서의 에녹서를 인용한 부분들이 천사들에 대한 심판을 묘사한다고 하지만, 유다는 분명하게도 그 부분이 사람들에게 예언한 것으로 해석합니다(14). 유다가 에녹서의 전체 내용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 부분을 인용하면서도 잘못된 해석들을 경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김경래교수>

 

먼저 베드로후서 2 4∼5절에서는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떄까지 지키게 하신 일'(4)'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홍수로 인간 세상을 멸하신 일'(5)을 나란히 언급하고 있다.

 

<홀리죠이>

 

김경래교수의 논리가 얼마나 비약하고 있는지 또 다시 보여주는 대목이다. 바로 옆에 있는 구절들이 인과적으로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식으로 주장하기 때문이다. 접속법에는 병렬적 접속도 있고 인과적 접속이 있다는 것은 부언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나란히 언급하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인과적으로 그 앞 뒤를 해석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게 인과로 해석하려면 당연히 인과적 관계를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천사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인간에 대한 심판으로 인과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가? 과연 창세기6장이 그런 인과관계를 설명하고 있는가? 과연 창세기6장이 <천사들> <사람의 딸들>과 성적으로 결합했는데, 바로 그런 성적 결합 때문에, 천사들을 심판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가?

 

창세기6장은 천사들의 심판에 대해서는 눈꼽만큼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 <하나님의 아들들> <천사들>이라고 본다면, 그것이 참으로 이상하다. 그런데, 김경래교수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왜 천사들이 범죄했는데, 사람들이 심판을 받아야 하는가? 창세기 6장에 과연 <사람의 딸들>이 천사들에게 추파를 던져서 그 천사들의 범죄에 동조하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 있는가? 창세기6장이 강조하는 것은, 바로 사람의 타락인데, <천사들의 여인들과의 결합>을 그 사람의 타락의 현상으로 묘사하고 있는가?

 

김경래교수의 <가장 옳은 견해>에 이런 의문들을 검토해 본 것이 없는가? 그런 견해를 가장 옳다고 하는 그의 그 <가장>을 능히 헤아려 볼 수 있지 않는가?

 

<김경래교수>

 

베드로전서 3 19∼20절의 기록 역시 이와 같은 문맥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 구절(벧전3:19∼20) '그리스도께서 고난 즉 죽음을 부활로 이기신 후, 전에 타락하여 옥에 갇혀 있는 천사들에게 자신의 승리를 선언하신 것'이라고 본다. 옥에 갇힌 이들 천사들은 베드로후서 2 4("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말고, 유다서 6("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에도 언급되어 있다.

 

특별히 베드로전서 3 19∼20절과 베드로후서 2 4∼5절에서 이들 천사들의 투옥과 홍수 심판 기사가 나란히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리는 존재들이 다름 아닌 이들 '타락한 천사'라고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필자의 글 "그리스도인의 고난: 베드로 전서 3:13∼22" 참조, 「설교자를 위한 성경 연구」, 1996 5월호, 12∼22쪽에 실림).

 

<홀리죠이>

 

김경래교수의 견해가 또 다시 비약한다. 김교수는 벧전319-20절을 해석하면서 옥에 있는 영들천사들이라고 해석한다. 참으로 그의 성급함을 탄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강조하기 위해서 어떤 구절의 앞뒤 문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로 어떤 구절들을 끌어오는 습관이 어디서 생긴 것일까?

 

그 구절의 바로 뒤를 보자.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고 베드로사도가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천사들이 아닌 것이다! 만일 옥에 있는 영들천사들이라고 한다면, 베드로 사도는, 지금, “타락한 천사들이 회개할 것을 하나님께서 오래 참고 기다리신다는 기묘한 설을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지금 김경래교수가 그런 각색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와 참으심이 참으로 깊으시지만, 과연 하나님께서 타락한 천사들이 회개할 것을 기다리시면서 참으시고 계시는가?

 

베드로는, 바로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고 한다. 바로 타락한 사람들을 오래참고 기다리시는 것이지, “타락한 천사들을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이리 저리 들어 끄집어 대고 있지만, 바로 그 구절 자체의 문맥과 맥락을 무시한다면, 아무리 많은 성경구절들을 끄집어 댄다고 하더라도 그 호소력은 제로가 된다. 바로 김경래교수의 글이 그렇다. 호소력 빵점이다.

 

또한,

 

김경래교수의 천사타락설이 이상함을 발견하게 된다. 곧 천사들이 두 번 타락한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첫번째는 아담이 범죄하기 이전일 것이고, 두번째는 바로 홍수심판이전이다. 김경래교수가 첫번째 천사의 타락을 인정하지 않는가? 그것은 모르겠다. 위에서 그 의견을 구체적으로 피력하지 않는다. 단지, 천사들의 타락을 홍수심판과 연결시키는 것을 보니, 아담타락 이전에도 천사타락한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의 신학이 보다 더 기형적이 될 것이기 때문에, 좀 더 호의적으로 그의 견해를 보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게 그의 견해를 추측해 보는 것이다.

 

<김경래교수>

 

특별히 유다서 6절에서 천사 타락을 언급한 후 바로 이어 나오는 7("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을 통하여, 우리는 천사 타락이 성적인 범죄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 신약성경의 몇몇 기록은 창세기 6 1∼4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름 아닌 '(타락한) 천사들'이라는 해석을 반증하기보다는 오히려 변증해주고 있음을 보게 된다.

 

<홀리죠이>

 

참으로 어이가 없다. 김경래교수는, 유다서 6절에서 천사타락을 언급한 뒤에 7절에서 소돔과 고모라의 간음행위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 천사의 성적 타락의 증명이라고 한다. 어이가 있는가? 어이가 있다면, 유다서5절을 보시라! 그곳에서는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라고 한다. 그리고 그 뒤에 천사들이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은 것을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김경래교수와 똑 같은 논리로, 5절에 심판을 받은 이스라엘백성들은 6,7절에서 심판을 받은 자들로 언급되고 있는 천사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들들과 똑 같은 성적 범죄로 인하여 멸망을 받은 이라고 보아야 한다. 과연 그런가? 그것이 과연 성경적인 진리인가?

 

그렇지 않다. 전혀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백성이 멸망한 것은, 바로 4절에서 유다가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꾼 것때문이었다. 성적 범죄로 묘사를 한다면, 그것은 육체적이 성적 범죄(를 포함하고 있다고 하더라도!)가 아니라, 바로 영적인 성적 범죄를 말하는 것이다.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꾼다는 것이 그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보아야 바로 5, 6, 7절이 제대로 연결된다. 5절에서는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꾼 이스라엘백성들”, 6절에서는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꾼 천사들”, 그리고 7절에서는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꾼 소돔과 고모라백성들에 대해서 지적하는 것이다. 그런 잘못된 지도자들이 교회 내에 침투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유다가 경계하고 있는 것은, 육체적인 성적 범죄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에 초점이 있는 것도 아니다. 바로 영적인 간음그것을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이단적인 주장과 그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런 영적 간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김경래교수의 주장이 과연 어떤 색을 따르고 있는가?

 

이 글을 읽는 바로 독자의 판단이 필요한 대목이다.

 

<김경래교수>


창세기 6 3절의 '120'은 아마도 하나님의 새로 정하신 인간의 수명을 가리킬 것이다. 그 동안 인류는 대략 900세 정도로 '오래도록'(히브리어의 '레올람' '영원히'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수명을 누려왔었다(창세기 5장의 족보 참조). 그러나 앞으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수명을 120년 안으로 단축시키실 것이라는 뜻이 아닐까?

 

<홀리죠이>

 

"윗대목은 나도 공감한다"고 제가 썼었는데, 취소합니다. 제가 윗부분을 오독해서 공감한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120년이라는 숫자가 심판의 연기된 기간, 하나님의 참으시는 기간이라는 제 나름대로의 확신 속에  있기 때문에 그런 전제로 윗글을 읽었는데, 나와 의견이 동일한 것으로 오독했었습니다.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수정합니다. 저는, 120년의 기간이 사람의 수명의 기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로님의 글에 대한 앞선 글들을 통해서 제가 그렇게 보는 이유들을 설명했습니다. 

 

<김경래교수>

 

창세기 6 4절의 '네피림'에 대한 언급은 '하나님의 아들들' '천사'로 해석할 때 더욱 쉽게 이해된다. 우리는 더 이상 이들 '타락한 천사들'이나 그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 태어난 '네피림'의 존재에 대하여 궁금해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후자는 노아 홍수 때 이미 모두 멸망하였겠고, 전자는 신약성경의 기록대로(그리고 이사야 24:21∼22 참조) 심판 때까지 옥에 갇혀 지켜질 것이기 때문이다.

 

<홀리죠이>

 

김경래교수의 비약이 더욱 심해진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천사들이고, 또한 네피림이라고 한다. 그 본문이 쉽게 이해되기는커녕 더 많은 의문들을 낳게 한다. 과연, 네피림이 홍수 이후에 모두 멸망되었는가? 민수기13장에 등장하는 네피림은 도대체 어디서 출생한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모두 다 멸망해 버렸는데, 어떻게 홍수 이후에도 그들이 가나안땅에 존재한다고 하여야 하는가? 성경이 잘못되었는가?

 

그리고 과연 천사들이 심판때까지 옥에 갇혀 지켜지고 있는가? 지금 공중에 권세잡은 자들은 누구인가? 지금 하나님의 자녀들조차도 삼키려고 사자처럼 활동하는 마귀들은 도대체 어떤 자들인가? 타락한 천사들이 지금도 활동하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더욱 조심하고 더욱 경계해야 하지 않는가?

 

바로 거짓된 논리와 이론들을 통해서도 악한 천사들이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을 과연 김경래교수는 모르는가 아는가?

 

<김경래교수>

 

마지막으로 필자는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하여 필자와 견해를 같이하는 상복 목사님의 저서를 소개하고자 한다. 도서출판 횃불에서 간행한(1993년 초판) 그의 저술「잃어버린 왕좌」는 창세기 1∼11장에 대한 강해집으로서, 창세기 6 1∼7절에 대하여는 제16장에서 "타락한 천사들"이라는 제목으로 비교적 자세히 다루고 있다.

 

 

<홀리죠이>

 

위의 김상복목사의 견해가 적힌 글들을 구하실 수 있는 분들은 이곳에 올려주시면 제가 좀 더 구체적으로 비판할 수 있겠습니다. 혹시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originaljoy@hanmail.net으로 연락해 주시거나 저의 카페(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 에 글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위의 글의 내용 중에서 김경래교수님에 대해서 개인적인 감정이 비춰지는 표현들에 대해서는, 그 개인이 아니라, 그와 같은 견해를 표방하고 있는 사람들 일반에 대한 표현입니다. 일종의 수사법입니다. 그의 글을 지금 비판하기 때문에 적절한 것으로 판단합니다. 그 개인에 대해서는 저는 개인적으로 안면도 없습니다. 개인적인 어떤 악의가 있는 것으로 오해가 없으시기 바랍니다. 혹시, 거친 표현들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의 기분을 언쟎게 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 비판하는 논리와 그 근거에 초점을 맞춰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혹시 이 글을 퍼가시는 분들은, 김경래교수와 홀리죠이 사이에 혹시라도 있을 수 있는 오해에 책임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김경래교수에 대해서 개인적인 악의가 전혀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김경래교수에 대해서는 저는 전혀 악의가 없습니다. 지금 논의되는 토론의 초점에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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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holyjoy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6.08.18 이 글을 퍼가시는 분들은 퍼가시는 것에 책임지시기 바랍니다. 이 카페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만 저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혹시, 김경래교수님이 이 카페에 들어오셔서 토론을 한다면 언제든지 받아들이겠습니다. 다른 인터넷활동에 대해서는 저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시간도 없습니다. 이 점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 작성자니나 | 작성시간 06.08.18 김경래교수 성경지식이나 신학 지식이 짧습니다. 제가 그 양반 글로서 한번 비판했더니 반으이 차갑더군요? 사본학으로 학위는 받아 언어적 실력은 있을 것입니다. 옛날 대전고를 나오고 서울대 떨어진 것은 기적이었다고 하더군요? 얼결에 총신대 원서 넣어서 그 양반 총신대 출신이지요? 그래도 인격은 훌륭합니다. 그런데 학문적으로 배울점이 별로입니다. 지금은 미국의 조그만 신학교 교수입니다. 전 홀리죠이님의 의견에 동조합니다.
  • 작성자바로미 | 작성시간 06.08.19 정말 이것은 퍼가지 않는 것이 좋겠네요. 글구 니나님은 모르는 것이 없네요? 발이 상당히 넓군요.. 이제 누군지 90% 는 알것 같네요. 위와 같은 김경래 교수에 대한 정보는 아무나 아는 것이 아닌데... 틈나는데로 알려주시면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그럼 좋은 활동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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